선인들의 유람록 <용문산>

댓글 0

자연/취월당

2021. 6. 12.

김진여金侲汝, <산수山水>

18세기 전반, 21.8×1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가을 풍경을 그린 듯도 하고 눈 온 후 풍경을 그린 듯도 하다.

화폭 위 왼쪽에 추파秋坡라 적힌 것을 화제로 본다면 가을 풍경이다.

괴석과 반굴盤屈의 소나무 가지를 함께 그려두는 방식은 송, 원대의 산수화풍을 계승한 듯하다.

 

 

 

 

김윤식金允植, 「윤필암에서 멀리 조망한 기록潤筆庵遊望記」

 

 

한강에서 물결을 거슬러 동쪽으로 가면 모두 큰 협곡이다. 동쪽에서 남쪽으로 가면 지세가 더욱 높아지고

강물이 더욱 거세진다. 기슭을 낀 뭇 산들은 모두 우뚝하고 아스라한 기세를 지니고 있다. 그 정수가 모이고

맥이 몰려들어 걸출하고 우뚝하게 양근과 지평 두 고을에 서려 진산鎭山이 된 것이 바로 미지산이다.

양근현 현사에서 비호령을 넘어 곧장 위로 20리쯤 가면 절간이 있는데 상원암이다. 상원암에서

다시 5리를 올라가면 설암이다. 다시 5리를 가면 윤필암인데, 미지산 정상에 있다.

 

이번 여행에서 두건도 쓰지 않고 도포를 벗고 갔다. 기어서 절벽을 오르는데 앞선 자는 당기고 뒤에 있는 자는

밀어 힘이 다하고 정신이 노곤해져서야 윤필암이 보였다. 벽은 부서지고 서까래는 썩었으며 불상의 감실은 손상

되어 있다. 그러나 윤필암의 볼거리는 여기에 있지 않다. 예전 고려 말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이 이곳에 집을 짓고

책을 꼼꼼하게 읽었는데, 마침내 문장으로 현달하였다. 후대 사람들이 그 자취를 인멸시키지 않으려고 그 방을 암자

로 삼아 '붓을 적신다' 는 뜻의 윤필潤筆이라 이름하였다. 실로 선생이 붓을 적시던 곳이 이곳이다.

 

나는 을묘년(철종 6, 1855) 늦여름 이 암자에 올랐다. 한더위 철인데도 이곳은 서늘하여 서리와 눈기운이 있었다.

안개가 하루 종일 걷히지 않았다. 몇 밤을 자면서 안개가 조금 걷히기를 기다린 후에 누각에 올라 조망하였다.

윤필암은 산이 돌아가는 곳에 있어 동쪽과 서쪽, 북쪽 방향이 막혀 있고 오직 남쪽 한 곳으로만 길 하나가 끝없이

트여 있다. 경기의 여러 군들이 모두 앉은자리 아래 보인다. 마을들이 옹기종기 늘어서고 하천과 언덕이 굽이굽이

뻗어 있는 모습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하나하나 지적할 수 있다. 기호 남녘에 이르기까지 시력이 미치는 곳이

가물가물 흐릿한데, 다만 여러 산들이 개미무덤이나 풀무덤처럼 늘어서 있는 것만 보였다. 종종 이름난

산이나 높은 이 우뚝 솟아 있었으니, 그 모습은 마치 파도 속에서 격랑을 견디고 있는 바위 같다.

 

산사의 승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에게 일러주기를

"저 산은 이름이 아무아무이고 아무 고을의 진산입니다.

또 저 강은 이름이 아무아무이고 아무 고을의 지류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 이름을 들어보니 모두 전에 가보고 싶었지만 가보지 못한 곳들이다.

시야는 영남의 소백산에 이르러서야 그쳤다. 그 너머로는 안개와 구름이 자욱하여 하늘과 접해 있기에

눈으로 다 볼 수 없어서 마음으로 다 헤아릴 수가 없다. 따져 보니, 소백산이 여기서 700여 리다.

 

내가 어제 상원암에 있을 때는 하늘이 밝아 동남쪽 땅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위에 한 조각 옅은 구름이 있고,

그 아래 검은 비단 같은 것이 곧바로 몇 길 드리워져 있었다. 승려에게 물어보니 "아무 땅에 큰 비가 내립니다"

라고 하기에 나는 망연자실하였다. 이제 이 암자에 이르니 또 짙은 안개가 산을 뒤덮고 있어 지척에서도

사람의 얼굴을 식별할 수가 없다. 나는 비로소 개고 흐림이 한결같지 않고 높고 낮음이 일정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아, 내가 일찍이 저 조각구름 아래 있을 때는, 어둑하면 온 천하가 다 어둡다고 생각하고

밝으면 천하가 다 밝다고 생각하였으며, 한 단계 올라가면 더 높은 곳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한 단계 내려가면 더 낮은 곳이 없으리라 생각하였다.

이제 그것을 회상하니, 참으로 우습다.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말하였다.

"목은 이색은 젊은 시절 중국의 선비들을 좇아 노닐어 시문의 법도가 삼엄해졌다.

그러다가 만년에 이르러 넘실넘실거리고 종횡으로 치달려서 마침내 마음에 재워두지 않고 풀어냈다.

이 늙은이는 재주가 일세에 드높아서 동방을 오만하게 굽어보아 우리나라에는

안목을 갖춘 사람이 없다고 여겼으므로 감히 이같이 말 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노인의 안목이 중국의 거대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요,

미지산의 높음에서 비롯되었구나."

 

 

 

용문산 龍門山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에 있는 해발고도 1,157미터의 산.

태백산맥에서 갈려져 나온 광주산맥에 속하며 경기도에서 화악산 · 명지산에 이어 세 번째로 높다.

동쪽에 중원산中元山 북쪽에 봉미산鳳尾山이 있으며 석가봉  · 가섭봉  · 아난봉 등의 봉우리가 있다.

용문사를 비롯하여 윤필암  · 상원사上院寺 등의 사찰이 있다. 미지산彌智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조선의 이태조가 등극하면서 용문산이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양평 용문사 마의태자 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제30호

 

 

 

근세의 개화파 인물 김윤식金允式(1835~1922)은 20세 되던 1855년(철종 6, 을묘) 늦여름에 미지산 윤필암에

올랐다. 이색이 1378년(우왕 4, 무오) 가을 8월에 쓴 「지평현 미지산 윤필암기」를 보면, 이색은 왕명으로 보제

普濟스님, 즉 나옹화상의 묘비명을 썼는데, 그 제자들이 윤필료潤筆料(시 · 서 · 화를 써준 대가로 받는 예물)를

보내오자 그것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색은 "재물에 탐을 낼 수는 없다" 하고, 또 "도가 같지 아니하면 서로

꾀할 수 없다" 는 공자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보제스님과 친교6를 맺지는 못하였으나, 보제스님이 열반한 후

사리가 나오는 이적異跡을 보고 흠모하다가 왕명을 받들어 명을 썼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색이 묘비명을 쓴 후 정안군定安君 부인 임씨任氏가 비구니가 되어 이름을 묘덕妙德이라 하였는데,

재물을 희사하여 미지산에 윤필암을 두었다. 이색은 이 글로 암자의 건축을 기념하였으며

본래는 시주한 사람의 성명을 빠짐없이 뒤에 기록하였다고 하나,

현전하는 글에는 시주한 사람들의 명단이 보이지 않는다.

 

미지산은 용문산의 옛 지명이다. 조선 태조의 등극으로 이름을 용문산이라 바꾸어 불렀다는 설과, 조광조의

제자 조욱이 스승과 함께 미지산과 옥천사를 자주 들렀는데, 조광조가 기묘사화 때 역적으로 몰리자,

조욱은 미지산으로 피신하러 가는 길에 덕촌 퇴촌리 마을에 정착하였고,  그

의 호 용문을 따서 미지산을 용문산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는 설이 있다.

 

김윤식은 본관이 청풍으로 인조 ·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육金堉의 후손이다.

호는 운양雲養이며 서울 교외 두호豆湖에서 김익태金益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조 김수묵金守默이 현감으로 있을 때 죄를 지어 유배된 이후 집안은 매우 가난하였다. 1842년 양친을 사별하고

숙부 김익정金益鼎 댁에서 자라게 되어 김익정의 아들로서 훗날 개화파로 활약한 김만식金晩植(1834~1900)과

어릴 적부터 친형제처럼 지냈다. 김윤식은 개화파 지도자 박규수朴珪壽(1807~1887)가 1869년 후반에서 1870년 초,

북촌의 양반 자제들 가운데 영민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교육하였을 때, 그 청년들 속에 끼어

있었다. 박영교朴泳敎(1849~1884) · 김옥균金玉均(1851~1894) · 홍영식洪英植(1855~1884) · 박영효朴泳孝

(1861~1939) · 서광범徐光範(1859~1897) · 유길준兪吉濬(1856~1914) · 김홍집金弘集(1842~1896)

등과 함께 개화사상을 흡수하였다.

 

이른바 개항의 시기에는 문명과 문명의 충돌이 일어났으므로 그 난국을 극복하기 이해 전근대의 체제를

근대체제로 변혁해야만 하였다. 이때 개화파는 개항 이전의 우리나라 사회 상태가 서구 제국이나 열강들에

비해서 낙후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주 근대화를 민족주의 운동과 결부시켰다.

그들의 주장은 구체제를 강화함으로써 응정하자는 위정척사파의 주장과는 상이했으며

현실 대처의 방안을 나름대로 수립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1874년 문과에 급제한 김윤식은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881년에는 영선사領選使로서 38명의 외국어 및

기술 유학생을 인솔해서 중국 천진의 기기창機器廠 남국南局 및 동국東局 등에 유학시켰다.

그해 5월에는 12명의 조사朝士를 중심으로 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 일본을 방문하여 여러 인사들을

게이오의숙 · 동인사 등에 유학시켰다. 그는 이때부터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 등 양무파洋務派 관료들과

친분을 맺으면서 김옥균과는 달리 온건개화파로서 동도서기론을 주장하였다. 「열병식을 보고」와

「변원규 지사의 귀국을 전송하며」 에서는 군제 개혁을 주장하였다.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는

개화파를 비판하였고, 메이지유신에 의한 일본의 급진적 변화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을 지녔다.

 

김윤식은 1892년 면천에 유배되어 있을 때, 「시무설詩務說」 · 「육종륜군이 천진으로 유학가는 것을 전송함」

이라는 시를 지어 국내 인재등용의 불합리와 부패척결의 필요성을 논하는 한편, 외교의 다원하를 통하여 외침을

견제해야 한다는 논리를 제시하였다. 그 후 그는 김홍집 내각의 외부대신으로 활동하였다. 1895년 10월에

민비 시해 사건,  11월 단발령 포고 이후 유생 및 의병의 봉기, 1896년 2월 고종의 이른바 아관파천으로 인해

김홍집 내각이 붕괴된 후에는 경기도 광주 방이동에 은신하였다.

그러다가 1896년(광무 원년) 12월 21일, 종신토록 제주도에 정배定配한다는 언도를 받아

제주에서 생활하다가 1901년(광무 5) 7월 10일 제주도를 떠났다.

 

그는 의화단 사건 이후 북경이 연합군에 의하여 강제 분할되자 「북경 사건을 탄식하며」(1908년 작)

《대동학회월보》에서 국제 정세의 심각성을 염려했으며 무술정면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양계초梁啓超가

지은 <청의보淸議報>를 보고 「청의보를 읽고」를 지어 양계초의 개혁운동을 예찬하였다.

「빅구탄白鷗歎」(1902) · 「벽어탄壁魚歎」(1904) · 「산목탄山木嘆」(1905)의 장편고시에서는

시정試政의 난맥상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김윤식은 문장을 통해 자신의 명성을 국외에서 드날리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그가 미지산 윤필암에 올라 원나라에서 활약하여 명성을 얻은 목은 이색의 일을 추억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김윤식도 어쩌면 조선을 오만하게 굽어보며 안목을 갖춘 사람이 없다고 여겼던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일제 강점기에 김윤식은 민족의 장래에 대한 올바른 전망을 갖지 못하고

일신의 안전만을 꾀하여 변절하고 말았다. 국제적인 문장가로서 명성을 누리고 싶어 하였던

욕구가 현실의 판단과 전망을 어둡게 하고 말았던 것이리라.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