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유람록 <월출산>

댓글 2

자연/취월당

2021. 6. 16.

도판 : 팔도총도八道總圖

1683년, 124×90.5,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구정봉

 

 

구정봉 상단.

 

 

 

 

김창협金昌協, 「월출산 구정봉 등반기月出山九井峰記」

 

 

월출산의 절정은 구정봉이다. 사방 모서리는 모두 험준한 벼랑이 가파르고 아슬아슬하다.

다만 서쪽 벼랑 아래에는 지름이 겨우 한 자 남짓한 굴혈이 위로 뚫려 절정에 이른다. 정상에 오르는 사람들은

모두 반드시 굴혈 속으로부터 길을 취한다. 그 굴혈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기고 뱀처럼 나아가서야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관모나 망건을 벗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마치 쥐가 또아리처럼 몸을 웅크리고 굴혈로 들어가는 것처럼 한다.

그러다가 굴혈에 들어가면 비로소 사람처럼 간다. 하지만 여전히 굴혈 속으로 가는 것이며, 굴혈은 길둥글고 좁으므로,

그 속을 가는 사람은 두 벼랑 사이에서 몸을 움츠려, 그 귀를 마치 담벼락에 붙인 것처럼 하고 가기를 서너 걸음을 해야

굴혈이 끝난다. 굴혈이 다하면 비로소 위로 나오니, 마치 우물 속에서 나오는 듯한데, 거기를 나오면 곧바로 절벽에

이르게 되며 벼랑 아래는 디딜 땅이 없다. 사람이 갈 수 있게 통하는 틈새는 가까스로 한 발을 놓을 수 있게 할 뿐이다.

그 길을 가는 사람은 반드시 발을 앞뒤로 번갈아 디뎌야 마침내 벼랑을 건널 수 있다. 바야흐로 앞발을 벼랑 위에

두었을 때는 뒷발을 앞발과 교대하여 벼랑 위에 두게 되면 이것은 전적으로 몸을 벼랑에 맡기는 것이라 위태로움이

심하다. 하지만 이것을 건너기만 하면 곧 절정이어서, 마치 신발 밑을 보듯 큰 바다를 굽어보게 되므로 역시 상쾌하다.

 

 

 

 

 

 

 

 

 

 

 

월출산 月出山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과 강진군 성전면에 걸쳐 있는 해발고도 809미터의 산.

소백산맥 끝부분에 위치하며 견고한 석영반암石英班岩과 분암류粉岩柳로 이루어져 있다.

영암군에 속한 북쪽은 날카롭고 가파른 골산骨山이며 강진군에 속한 남쪽은 완만한 육산肉山이다.

최고봉은 천황봉天皇峰이며 남서쪽으로 구정봉九井峰 · 도갑산道岬山 · 월각산月角山 등이 펼쳐져 있다.

천황봉 북쪽으로는 장군봉將軍峰 · 국사봉國師峰 등이 연봉을 이룬다.

 

 

 

이 유람기는 월출산 구정봉의 최정상에 오르는 과정에만 초점을 두어,

그 험준함과 기괴함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글을 지은이는 김창협金昌協(1651~1708)으로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다.

농암農巖이라는 호로 잘 알려져 있는 그는 노론의 영수 김수항金壽恒(1629~1689)의 아들로

과천果川에서 태어났다. 19세에 진사시에 합격할 정도로 일찍부터 학문에 재주가 있었지만

기사환국(1689, 숙종 15) 때, 부친이 송시열과 함께 사사되자 자연 속에 은둔하였다.

특히, 그는 농장이 있던 경기도 영평의 응암鷹岩에 농암수옥農岩樹屋을 짓고 살았다.

이는 세상이 나를 속일지라도 청산은 나를 속이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자연 속에서 자연에 의지하며 살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김창협은 월출산의 구정봉에 올라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절벽의 위태함이며 조심스럽게 절벽을 올라가는 기분을 느낄 수가 있다. 특히 동굴이 좁아서

"뱀처럼 기어가야 한다" 는 구절이나 "귀를 양 벽에 착 붙인 듯이 한다"는 구절들이 인상 깊다.

게다가 마지막 정상에 올라갔을 때의 감동을 "역시 상쾌하다" 라고 간결한 말로 완곡하게 표현 하였다.

(중략)

 

서쪽 봉우리인 구정봉은 높이 783미터이며 회문리會門里 · 교동리校桐里와 강진군康津郡 성전면城田面 월하리

月下里 경계에 있다. 실은 금강산에도 구정봉이 별도로 있다. 영암의 구정봉은 높이 10여 자 되는 큰 바위가 우뚝

솟아 있고, 그 곁에 사람이 드나들 만큼 좁은 굴이 있다. 그 굴을 타고 올라가면 20명쯤 앉아서 놀 만한 곳에 웅덩이

아홉 개가 있다. 그 웅덩이에 고인 물은 우물처럼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아홉 마리의 용이 거기에 산다는

전설이 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에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 구정봉에 있는 우물 형태는 옛날 동차진이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벼락을 맞아 죽을 때 생긴 것이라고도

전해온다. 동차진은 구림鳩琳에 유배되어 내려와 살던 어느 장군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날 때, 겨드랑이

에 깃털을 달고 왔으며, 백일이 되자 이빨이 났다. 3세가 되자 맷돌을 번쩍 들어 올렸다. 7세에 어른들처럼

나뭇짐을지고 다녀 '구림에서 장사났다' 라는 말을 들었다.

어느 날 그의 집에 어떤 노인이 들러

"사람이란 때를 만나야 하고 사람을 만나 기량을 닦지 못하면 비운에 빠지게 되는 법이라오"

라며 아들을 맡기라고 하였다. 동차진은 괴 노인을 따라 금강산에 들어가 도술을 익혔다.

10년의 세월이 흘러 동차진이 노모를 찾아 집에 오자 어머니는 자식에게 내기를 걸었다.

"내가 밥 지을 동안 너는 저 산봉우리에 올라 석성石城을 쌓아라."

시합헤서 노모가 이기자 동차진은 억울해 하며 돌을 내던지고 깨뜨렸다.

이를 본 노모는 아들더러 자만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이 무렵 북쪽 오랑케들이 국경을 넘어 침공해 오자 노모는 아들에게 나가 싸우도록 일렀다.

동차진은 구정봉에 올라 주문을 외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오랑캐들의 머리 위에 돌맹이가 수없이 쏟아져 그들을 몰살시켜버렸다.

이때 하늘에서 옥황상제가 그것을 보고 "인간을 제도하는데 도술을 쓰기 보다는 공명심이나 만용을 부려서

결국 화를 자초할 것이므로 살려둘 수 없다" 고 하였다. 그리고는 벼락을 아홉 번 내려 동차진을 죽여버렸다.

 

그 후 사람들이 이 봉우리에 오를 때마다 동차진은 봉우리를 세 번 움직여서 다시는 자신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응징하였다. 그래서 그 바위를 신령암神靈岩 혹은 삼동암三動岩이라 한다고 한다.

하지만 구정봉이 삼동석이 아니라 별도의 것을 가리킨다는 말이 있다.

월출산에는 열 사람이 움직이거나 한 사람이 움직이거나 그 흔들림이 똑같은 동석動石 세 개가 있는데,

그것을 삼동석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영암이란 지명도 삼동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허목許穆의 「월악기月嶽記」(13년 맹동 초길)에 따르면 구정봉 위,  도갑사의 아래, 용암사의 아래에

각각 동석이 하나씩 있으며 영암이라는 고을 이름은 동석 때문에 생겨났다고 하였다.

김창협의 구정과 동암의 전설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노선을 택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편 허목許穆은 78세 되던 현종 13년(1672) 맹동 10월 초길(1일)에 월악을 등반하고 「월악기」를 적어

여정을 밝히고, 이동 중에 바라보이는 자연 풍광이나 들어서 알게 된 사찰의 소재에 대해서도 적었다.

그는 9월에 탑산塔山을 내려와 그 길로 월악에 들어갔는데, 등반의 노정은 다음과 같다.

 

도갑道岬 → 용암사龍巖寺, 구층부도九層浮圖 → 구정봉九井峯, (구룡정九龍井 · 소년대小年臺)  

구절폭포九折瀑布 · 칠지정사七池精舍 → 청청대靑靑臺,(쌍석봉雙石峯의 하나) → 죽사竹社,(봉선암奉僊庵의 말사).

 

 

허목은 도갑사에 대해 신라 승려 도선道詵(872~898)이 거처하던 곳이라고 밝혔다.

도선은 도를 배워 신통력을 지녔기 때문에, 천 년 이후의 일을 말할 수 있었다.

조선 초에는 승려 학조學祖가 거처하였으며, 허목의 당시에는 그 불주(염주) · 가사 · 포단 · 철학鐵鶴이

모두 남아 있었다. 허목은 그러한 사실들을 적은 후, 가보지 못한 신이한 지역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구정九井의 남쪽에는 한 쌍의 석봉石峯이 있는데, 그 중 높은 것이 청청대靑靑隊이다.

그 남쪽에는 불정봉佛頂峯이 있고, 거기에는 감천甘泉이 있다고 도선 옹의 산수기는 말하였다.

용암의 아래에는 삼석거三石車가 있다. 그 가운데 운거雲車는 소년대 동쪽에 있다.

마거馬車는 운거의 북쪽에 있다. 녹거鹿車는 가장 아래에 있다. 모두 산속의 기이한 자취이다.

그동북쪽의 별도로 떨어진 봉우리는 고산孤山이며, 그 아래에는 고산사孤山寺가 있다.

남쪽으로 구정봉과 마주하여, 바위 벽과 기이한 벽이 많다. 도갑道岬의 서북쪽 석봉 사이에는 

상견성上見性과 하견성下見性이 있다. 또 아래로는 봉선암奉僊庵이 있다.

 

 

허목은 등반기 뒤에 부록을 첨부하여 세 가지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곧, 월출산에서 나는 손초蓀草, 도갑 아래 바위의 국장생國長生과 황산皇山 바위의 황장생皇長生,

구림鳩林과 서호西湖 석포石浦의 매향비梅香碑에 대해서도 밝혀 놓았다.

 

 

지난날 들으니, 월악의 북쪽 비탈에는 혜초惠草가 난다고 하였으나 산 속에 사는 사람들은

알지를 못하였다. 오직 시내와 바위 사이에 손초蓀草가 무성하여 가지와 잎이 모두 향기로웠다.

남해의 여러 산들에는 대부분이 손초가 있어서, 빙설의 위에서 모두 푸릇푸릇하다.

도갑의 아래에는 바위를 세워 국장생國長生을 새겼다.

또 그 아래 황산皇山에는 바위를 세워 황장생皇長生을 새겼다.

동네의 나이 많은 노인들이 전하길, 도선 승려가 그것을 만들었다고 한다.

만력 연간에 원수 서평공西平公(한준겸韓浚)이 호남으로 순력을 와서 이곳을 지나다가

국장생을 파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 아래에 각석으로 사좌석四座石을 표시해 두어,

깊이 땅속으로 들어가 있었으므로 파내려고 하다가 아무 쓸모 없다고 여겨서 다시 묻었다고 한다.

구림에도 입석立石이 있고 서호의 석포에도 입석이 있다.

거기에 새기기를, "아무 해 아무 달에 매향梅香을 하다" 라고 적혀 있는데,

아무 해 아무 달의 글씨는 인멸되어 알아볼 수가 없다.

 

 

매향비는 매향갈埋香碣이라고도 한다.

매향은 불교에서 내세의 복을 빌기 위하여 향香을 강이나 바다 속에 묻는 일이다.

그 의식의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큰 돌에 새기고 옥개석을 씌운 것을 비라 하고,

작은 돌에 새기고 옥개석이 없는 것을 갈이라고 한다.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