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유람록 <서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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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2021. 6. 16.

필자미상, <무등산도無等山圖>, 19세기,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무등산은 광주광역시와 화순군 이서면, 담양군 남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백제 때 무진악武珍岳.

고려 때 서석산瑞石山이라고 하였다. 무등산을 그린 이 그림은 매우 희귀한데, 그린 이를 알 수 없다.

 

 

 

고경명高敬命, 「서석 유람록遊瑞石錄」

 

 

22일 병인丙寅, 날이 개었다. 아침에 판관判官과 찰방察訪이 입석立石(선돌) 으로 곧장 갔다. 

어제 날이 어둡고 깜깜해서 제대로 찾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남은 사람들은 곧장 선생을 좇아 상원등사上元燈寺

에 이르렀다. 작은 암자가 새로 엮어져 있었지만 작고 좁아서 쉴 수 없었기에 선생은 암자 서쪽 단상에 앉아 쉬었다.

약간 서쪽에 노송 두 그루가 마주해 있고 그 아래 발을 뻗고 쉴 만한 돌이 있었다. 조금 있다가 판관과 찰방이 뒤따라

왔다. 관령官伶들에게 천왕봉과 비로봉에 올라 횡적橫笛을 불게 하였는데, 횡적 소리가 몇 차례 울리자 난새와

봉황이 생황과 퉁소 소리를 내며 연무 자욱한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 아스라하였다. 마침 한 승려가 가서

박자에 맞추어 을 추니 참으로 한바탕 웃을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상봉上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가 셋 있는데, 동쪽에 있는 것이 천왕봉이요, 가운데 것이 비로봉이다. 그 둘은 100 척

정도를 두고 떨어져 있어서 평지에서 그 둘을 바라보면 한 쌍의 대궐문 같다. 서쪽 것이 반야般若인데 비로봉 서쪽

꼭대기와 거의 한 필匹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그 아래의 거리는 한 자도 안 되어 평지에서 그 둘을 바라보면 화살과

오늬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봉우리 위에는 잡목이 없고 단지 진달래와 철쭉이 틈새에 무더기로 피어 있는데 그

길이가 한 자尺쯤 되고 가지는 깃발처럼 모두 남쪽으로 쏠려 있다. 지세가 높고 차가우며 눈 · 비에 고생을 겪어서

그런 것이다. 이제야 산살구와 진달래가 반쯤 지고 철쭉이 막 피어나기 시작하며 나뭇잎도 그다지 제 몸을 펼치지

못한다. 봉우리는 평지와 한 유순由旬(30리) 정도 떨어져 있을 뿐이지만 그 풍기風氣는 이처럼 멀고 다르다.

 

반야봉의 서쪽은 땅이 평평하고 넓으며 봉우리의 기세가 돌연 끊어져, 1,000척 단애 아래는 땅이 얼마나 깊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멀리서 보면 우듬지가 가지런한 것 같으니, 참으로 한유韓愈가 「남산시南山詩」에서 "소나무와 대나무는

부들과 잡풀의 번잡하고 무성함을 질타한다"  고 한 것이 이것을 두고 말한 듯하다. 절벽에 올라 줄지어 앉아서 우상

羽觴(술잔)을 날리듯 주고받으니 훌쩍 우화등선羽化登仙하고픈 마음이 생겼다. 단애의 서쪽에 총석叢石이

빗살처럼 늘어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100 척씩 된다. 이른바 서석瑞石이 이것이다.

 

이날 흰 연무가 조금 걷혀서 어제처럼 심하게 시야를 가리지 않았다. 비록 사방을 멀리 다 보지는 못하고 가까운 

산이나 큰 물줄기를 대략 분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끝내 큰 바다를 꿰뚫어 보고 한라산 섬 등 여러 섬들을 역력히

헤아려 보아서 장풍파랑長風破浪을 타고 노닐려던 뜻을 위로하지는 못하였기에, 여전히 애석하도다!

 

이에 앞서 왔던 길을 되짚어 반야봉과 비로봉을 곁에 하고 내려와 상원등사의 동쪽으로 나와서 삼일암三日庵과

월대月臺를 거쳤다. 입석이 있어, 매우 기이하다 삼일암은 그윽하면서도 앞이 탁 틔여 환해서 여러 암자들보다 

훨씬 나았다. 전종禪宗에서 '여기서 사흘을 머무르면 도를 깨칠 수 있어서 이름을 삼일암이라 하였다' 고 한다.

금탑사金塔寺는 삼일암의 동쪽에 있는데, 10 척은 될 법한 돌이 하늘을 버티고 홀로 서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돌이 속에 9층의 상륜부相輪部를 감추고 있어서 절 이름을 여기서 취하였다' 고 한다. 은적사隱迹寺 또한

금탑사의 동쪽에 있어서 곧 옹성瓮城과 서로 마주하고 있다(옹성은 적벽赤壁의 동북쪽에 있다.) 샘물이 돌의 

구멍에서 분출하니, 경인년(1530, 중종 25)의 가뭄에 산속의 여러 샘이 말랐는데, 이 샘물만 콸콸 솟으며 마르

지 않았다고 한다. 석문사石門寺는 금탑사에서 80보쯤 가면 있다. 동서쪽에 각각 기이한 돌이 대문처럼 우뚝

마주 서 있어 그리로 들고 난다. 금석사錦石寺는 석문사 동남쪽에 있다. 김극기金克己가 시에서 '절문이

영운嶺雲의 봉토를 호위하고 있네" 라고 한 것이 바로 이곳이다.

 

암자 뒤에는 바위가 수십 개  있어, 빽빽하고 특이하며 기이하고 뾰족하다. 그 아래에는 찬 샘이 있어,

대자사大慈寺 터는 금탑사 아래에 있다. 옛 우물이 맑디맑아 이끼 무리가 뒤덮지 않았고, 섬돌 위에 하늘나리가

무성하게 피어 있다. 길가에 석실石室이 있는데 비바람 칠 때 몸을 의탁할 만하였으니, 속칭 소은굴小隱窟이라

고 한다. 이날 내가 상봉에서부터 이미 취하여 느긋하게 두루 살피지 못하고, 승경을 고르고 기이한 것을 찾아봄은,

마치 말을 타고 비단을 볼 때 어질어질하다가는 사라져버리므로 한갖 휘황찬란한 빛깔만 보고 그 무늬의 오묘함

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뒤에 청운靑雲을 방문해서 그 대강을 이렇게 기록한다. 가을이 오면 마땅히 다시

사영운謝靈運의 납극蠟屐(등산용 나막신을 매만짐) 고사를 따라 오늘의 흠결을 보상하리라.

 

금석사로부터 산을 휘감아 기슭 동쪽으로 나오니 곧 규봉圭峰이다. 김극기의 '비단을 마름질해서 암석 모양

만들었고, 홀을 쪼아 봉우리의 기세를 이루었다' 라는 시구가 정말로 헛말이 아니었다. 돌의 기이하고 오래됨이

입석과 대등하지만, 그 자리의 넓고 높음과 모양의 빼어남과 훌륭함은 역시 입석이 감히 흉내낼 바가 아니었다.

규봉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권극화權克和의 기록에 보이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모두 실려 있으니

여기서는 대략 말하였다. 예부터 '신라의 김생金生이 암자의 편액에 세 글자를 크게 썼는데

훗날 어떤 사람이 훔쳐갔다' 는 말이 전한다.

 

광석대廣石臺는 규봉암 서쪽에 있는데 돌의 표면이 깎아낸 듯 넓고 평탄하며 매끄러원 둘러앉으면 수십 사람도

수용할 수 있었다. 애초에 서남쪽 귀퉁이 미저사微低寺의 승려가 대중들을 모아 들어올려 큰 돌로 고인 후 그 웅장

하게 서리고 기묘한 형상을 보려하였으나,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던 것인 듯하다. 이른바 삼존석三尊石이 광석

대의 바로 남쪽에 있다. 높이 솟아 나무 끝을 넘어서고 푸르게 우뚝 곧게 서서 더욱 대의 장엄함을 더하고 그 기세를

돕는다. 늙은 나무가 있는데 돌레가 열 아름이고 궁륭穹窿처럼 아치형을 이루고 우뚝하게 높아서 대 위를 가로질러

타고 넘어간다. 잎이 두텁고 그늘이 짙어 선선한 바람이 저절로 이르니, 비록 한창 무더위에 한두 겹의 옷을 걸친 자

라도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다. 천관산天冠山 · 팔전산八巓山 · 조계산曺溪山 · 모후산母后山 등 여러 산들이 모두 눈

아래 있다. 대개 규봉의 경승은 이미 무등산 여러 절의 으뜸이 되는데, 이 대의 경승이 또 규봉 십대十臺 위에 아득히

솟아 있으니 '남도의 제일' 이라 해도 옳다. 한스러운 것은 최학사崔學士처럼 난새와 학을 타고 그 사이에서 읊조려서

규암의 위에서 취묵醉墨을 한바탕 흩뿌려 진주晉州의 쌍계雙溪나, 합천陜川의 홍류紅流

고사와 같이 하는 사람이 없음이니, 애석하다.

 

광석대 서쪽에는 바위가 길을 막고 있어, 문설주와 문지방 같은 모양이다. 

이것을 넘어 들어가면 곧 문수암文殊庵이다. 암자의 동쪽에 샘이 암벽 중간의 갈라진 곳에 있으며 창포가 네 구석에

빗겨 자랐다. 그 앞에 대가 있는데, 높이가 여러 장丈이고 넓이도 그와 같다. 광석대 서북쪽으로부터 돌비탈 길을 더듬어

홀연 길을 꺾고 몇 차례 돌면 자월암慈月庵에 도달한다. 암자의 동쪽에 풍혈대風穴臺가 있다. 혈이 바위 밑에 있는데,

풀로 빈 곳을 덮으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조금 느낀다. 암자 서쪽에는 병풍 같은 입석이 있다. 별도로 돌이 깔린 곳이

있는데, 노송이 그 위에 자라니 곧 장추대藏秋臺이다. 깊은 계곡을 내려다보노라면 터럭과 머리칼이 모조리 뻣뻣이 선다.

장추대에서 서쪽으로 가서 절벽을 기어올라 남쪽으로 돌면 오솔길이 나오는데 폭이 한 척尺도 되지 않는다. 어그러진

곳은 돌로 덮어서 그곳을 밟으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끊어진 산비탈을 내려다보면 칠흙처럼 깊디깊어 비록 백혼

무인伯昏無人(초나라 은자) 처럼 아스라한 바위를 밟고 설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 당장에 발꿈치를 고정시킬 수가

없다. 절벽이 끝나면 움푹 파인 곳이 나와 원숭이처럼 줄을 끌며 올라가니, 그 남쪽은 은신대隱身臺이다.

 

작은 소나무가 너댓 그루가 있고 철쭉이 서너 무더기로 피어 있는데, 모두 거꾸로 자라나 있다.

은신대 서쪽에 바둑판처럼 네모지고 가지런한 돌이 있는데, 사람들이 '도선道詵이 좌선하였던 곳' 이라고 한다.

그 북쪽은 청학대 · 법화대 등 여러 대가 널려 있다. 바위 구멍을 뚫고 지나가노라니, 배와 등이 모두 암벽에 부딪치고

문질러진 뒤에야 정상에 도달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며 손으로 땅을 집는 것이 팽조彭祖가 우물을 들여다보는

모습과 같았다.(팽조는 큰 나무에 자기 몸을 묶고 수레바귀로 우물을 덮고서 우물을 내려다보았다고 한다.

그 고사를 그린 그림이 있었다.) 한참 있다가 다시 절벽의 움푹 파인 곳을 거쳐 내려왔다.

밤이 깊어 갈천葛川 선생을 모시고서 문수암에 묵었다.

 

 

 

무등산 상봉 일원

 

 

 

 

 

서석대

 

 

 

입석대

 

 

규봉암을 품고 있는 광석대.

 

 

 

서석산 瑞石山

 

 

광주광역시와 화순군 · 담양군 일원에 자리한 해발고도 1,186미터의 산.

무등산無等山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과거에는 무악武岳 · 무진악武珍岳 · 입석산立石山 등으로 불렸다.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능선상에 주상절리가 발달하였다. 장불재 너머 동쪽 사면에는 입석대立石臺 · 서석대瑞石臺

· 지공指空너덜 · 삼존석三尊石 ·  규봉암圭峰癌 · 풍혈대風穴臺 등이 있고 정상 가까이는 수신대隋身臺가 있다.

서석대는 수정병풍水晶屛風이라고도 하는 주상절리이다.

 

 

 

고경명高敬命(1533~1592)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의 의병장이다. 

나이 42세 되던 해(선조 7, 1574) 4월 20일 광주목사 갈천葛川 임훈林薰(1500~1584)의 초청으로

24일까지 5일간에 걸쳐 지금의 무등산인 서석산에 올랐다. 그때 지은 기행문이

「서석 유람록遊瑞石錄」인데, ≪고제봉유서석록高齊峰遊瑞石錄≫이라고도 한다.

목판으로 간행되어 1631년(인조 9)에 서광계徐光啓가 쓴 발문이 있다.

고경명은 서석산에 오르게 된 감회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서석은 우리 고을 광주의 산이다. 어렸을 때부터 성장하기까지 여러 차례 올라 관상하였으므로 매달린 듯한

벼랑이나 끊어진 바위 절벽이나 깊은 숲과 그윽한 시냇물 등에 내 신발 흔적과 발자국을 남겨 놓으려 해왔다.

그러나 노상 범연히 보아 왔기 때문에 묘리를 얻지 못하였으니, 어찌 나무 하는 시골 아이나 소치는 동자 따위가

보는 것과 다를 바 있으리오. 홀로 가서 마음을 상해서 유의조柳儀曺(유종원柳宗元)가 남간南澗에서 느낀 그런

슬픔을 느낄 수 밖에 없었기에, 산을 자세히 알았다고 말한다면 옳거니와, 산의 정취를 얻었다고 말한다면 아직

그렇지 못하다 할 것이다. 이제 다행히 임 선생의 뒤를 따라 산에 올라 눈을 씻고 다시 바라보게 되었으므로, 황

홀하기 이를 데 없어 마치 회오리 바람의 바퀴와 깃 우산 달린 수레를 타고 낭풍閬風과 현포玄圃 위에서 노닐게

된 것과 같으니, 어찌 위대하지 아니한가! 일흥逸興이 비동하여 소매를 떨치고 약속 장소로 향하여,

정오도 채 못되어 이미 골짜기 어귀에 다다랐다.

 

 

고경명은 4월 20일에 증심사證心寺에 묵은 후, 21일에 임훈과 취백루翠栢樓에서 만났다.

당시 동행한 사람으로는 신형愼衡 · 이억인李億仁 · 김성원金成遠 · 정용鄭庸 · 박천朴天 · 이정 · 안극지安克智

등이 있었다. 취백루는 누대 앞에 오래 묵은 측백나무 두 그루가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술을 두서너 순배 한 후 밥을 먹고 떠났다. 임훈은 야복野服 차림으로 죽여에 올라 증심사 주지인 조선스님의

안내로 증각사證覺寺로 향하였던 것이다. 고경명 일행의 산행코스는 다음과 같았다.

 

 

4월 20일(갑자) 취백루翠栢樓 → 증심사證心寺

4월 21일(을축) 사인암舍人岩 → 증각사證覺寺 → 중령中嶺 → 냉천정冷泉亭 → 입석대立石臺

→ 불사의사不思議寺 → 염불암念佛庵 → 덕산德山너덜 → 지공指空너덜.

4월 22일(병인) 상원등上元燈 → 정상삼봉頂上三峯 → 서석대瑞石臺 → 삼일암三日庵 · 금탑사金塔寺 → 은적사隱迹寺

→ 석문사石門寺 · 금석사金石寺 · 대자사大慈寺 → 규봉암圭峯庵 → 광석대廣石隊 → 문수암文殊庵

풍혈대風穴臺 · 장추대藏秋臺  → 은신대隱身臺.

4월 23일(정묘) 영신靈神골 → 장불천長佛川 → 창랑천滄浪川 → 적벽赤壁 소쇄원瀟灑圓

식영정息影亭환벽당環碧堂.

 

 

또한 4월 21일의 기록에서 고경명은 입석대의 장관을 다음과 같이 섬세하게 묘사하였다.

 

 

석양에 입석암立石庵에 닿으니 양사기楊士奇(중국 명초의 문인 정치가)의 시에 이른바 십육봉장사十六峯藏寺

곳이 바로 여기로구나 싶다. 암자 뒤에는 괴석이 곧추서서 죽 늘어서 있어서 마치 봄에 죽순이 다투어 머리

내미는 듯도 하며, 희디희어서 마치 연꽃이 처음 필 때와도 같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높은 관모를 쓰고 몸이

귀인이 단정하게 홀笏을 쥐고 공손히 읍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가까이 가서 보면 마치 철옹성과도 같은 튼튼한

에 일만의 병사가 숨어 있는 듯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아무런 의지 없이 홀로 솟아서 형세가 더욱 홀로 빼어나

니, 마치 세속을 떠난 선비가 무리를 벗어나 홀로 초연한 모습 같기도 하다. 더욱이 알 수 없는 것은 네 모퉁이를 깎

아내어 아주 반듯하게 갈아서 층층이 쌓고 겹겹이 포개어 도끼질한 듯한 모습이라 마치 석수장이가 먹줄을 튕겨 다

듬은 듯하다. 생각컨데, 혼돈에서 천지개벽이 이루어질 때 기가 무심하게 엉켜 우연히 이렇게도 괴상하게 만들어진

걸일까? 아니면 신공귀장神工鬼匠이 바람과 우레를 명하여서 이런 교활한 농간을 부린 것일까? 아아, 누가 구워냈으

며, 누가 지어부어 만들었는지, 또 누가 잘라냈단 말인가? 아미산峨眉山의 옥으로 된 문이 땅에서 솟은 것일까? 그렇

않다면 성도成都의 석순石筍이 해안海眼을 둘러 진압하 것이 아닐까?    알지 못할 일이로다. 돌의 형세를 보니 들

쭉날쭉하게 떨기져 뽑혀나고 무리져 나와서 아무리 계산 잘하는 자라 해도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니 열여섯 

개 봉우리라고 하는 것은 다만 눈으로 보이는 것만 근거로 삼아 그 대강만 헤아려 둔 것일 따름이다. 암석대의 봉우리

들이 길게 이어져 날개를 편듯한 형상을 한 것은 마치 사람이 펼쳐서 깍지끼고 있는 듯한데 암자는 바로 그 중간에 있

다. 우러러보면 위태로운 바위가 높이 솟아서 곧 떨어져 눌러버리지 않을까 해서, 두려워서 머물러 있기가 불안하기 

그지 없다. 바위 밑에 샘이 있어 모두 두 곳인데, 하나는 암자의 동쪽에 있다. 하나는 서쪽에 있다.

아무리 큰 가뭄에도 줄지 않는다 하니 이 또한 신기한 일이다.

 

 

사실 무등산은 육산肉山, 즉 토산이지만 그 특색은 오히려 암석의 아름다움에 있다.

그 대표적인 바위가 서석대 · 입석대 · 규봉이다. 또 의상봉 · 새인봉 · 중봉 등 직립형 돌무더기가 곳곳에 흩어져

있어 절경이다. 그 돌무더기를 '선돌' 이라 부르는데, 뜻을 취해 '立' 이라 하고, 음을 취해 '瑞' 라 하였다 한다.

정상을 중심으로 서쪽에 서석대, 남쪽에 입석대가 있다.

규봉圭峯은 두 봉우리의 깎아지른 모습이 마치 홀圭가 같은 봉우리이다.

이 가운데 특히 서석대는 수정 병풍을 둘러친 것 같다. 아름다운 바위 즐기들로 이루어진 총석叢石이다.

그런데 대체로 고려 이후로 무등산을 '서석산' 이라고도 불렀던 듯하다.

무진주를 광주로 고쳐 부른 것은 940년(태조 23)인데,<고려사> 「지리지」는

무등산을 무진악武珍岳, 서석산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한시기행>에서 밝혔듯이, 전라도 일대의 산수는 시름하는 마음을 위안하여 줄 만큼 좋은 곳이 많다.

그 산수가 구성진 가락, 섬세한 미감을 낳았다. 조선 중기, 호남에 여러 가단歌壇이 형성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호남 가단은 기촌 · 성산 · 장흥 · 영암 · 해남 · 고산에서 발달하였다.  그중 담양군 남면 지곡(지실)에 있는

식영정息影亭은 임억령 · 김성원 · 고경명 · 정철 등 성산사선聖山四仙이 활동한 중심지이다.

그들은 식영정 부근과 식영정에서 바라보이는 풍광을 선별하여 「식영정제영息影亭題影」이라는 연작시를 지었다.

그들이 선별한 승경의 첫째가 '서석산(무등산)에 감도는 한가로운 구름' 이다. 고경명이 서석산에 노닌 것은

바로 자기 고장의 산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자 성산사선이 미적 감각을 공유한 결과이기도 하다.

고경명은 명앙정삼십영俛仰亭三十詠의 「서석청운瑞石晴雲」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矗矗飄香篆

뾰족뾰족 향불 연기 나부끼고

叢叢揷玉笄

뭉텅뭉텅 옥비녀를 꽂은 듯.

地靈偏愛寶

지령이 유독 보배를 아껴

雲氣晝常迷

구름 기운으로 낮에도 항시 가리누나.

 

 

구름은 꼿꼿하게 오르는 향불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서석산 봉우리는 여기저기 뭉쳐 있는 여인의 옥비녀 같다.

서석산의 봉우리가 직립형 돌무더기로 이루어진 것을 두고 옥비녀들이 여기 저기 떨기져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형상을 지나치게 드러내지 않으려고 지령(지신)이 구름을 피어오르게 해서 대낮에도

서석산의 일부를 살짝 가려준다고 하였다. 지령이 호걸을 낳는다는 말이 있다. 지령이 서석산이라는

보배를 유독 아낀다는 것은 지령이 이 지방의 인재를 유독 사랑한다는 뜻을 빗댄 것이다.

 

또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에서는 '서석한운瑞石閑雲(서석산의 한가로운 구름)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飄空亂絮彈

어지러이 버들솜이 하늘로 튀더니

釋嶠脩眉斂

산마루에 멈춰 긴 눈썹으로 모이네.

濃淡摠相宜

짙거나 옅음이 아주 어울리니

詩材多不厭

시의 소재 많아서 싫지 않구나.

 

 

무등산의 한가로운 구름들이 마치 버들솜처럼 하늘을 날더니, 산마루에 멈춰 산 모양을

긴 눈썹처럼 만들어 주며 그 짙고 옅음이 아주 적절해서 시로 노래할 만하다고 하였다.

서석산은 험준하고 커서 일곱 개의 군 · 현에 걸쳐 있다.

산의 정상에 오르면 북쪽으로는 적상산赤裳山이 바라보이고, 남쪽으로는 한라산이 멀리 보인다.

그리고 월출산月出山과 송광산松廣山 같은 산은 모두 어린 자식이나 손자 격이다. 위에는 열세 개 봉우리가 있고,

항상 흰 구름이 둘러 있으며 거기에 사당祠堂이 있었다. 무당이 말하기를 "벼락과 번개, 구름과 비의 변화가 항상

이 산의 허리에서 일어나서 자욱하게 아래로 내려가지만, 산 위는 그대로 푸른 하늘입니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가운데 봉우리의 정상에 서면 날듯이 세상을 가볍게 보고 홀로 특별히 다른 길을 가는 기분이 들어 인생의 고락苦樂은

마음에 둘 것이 못 됨을 깨닫게 된다. 정약용이 「서석산瑞石山 유람기」에서 남긴 말이다.

 

 

젊은 시절 정약용은 호남 광주의 금소당琴嘯堂에 거처할 때, 동복同福의 적벽赤壁에 노닐고 다시 서석산에 올랐다.

그에게 서석산 유람을 부추긴 사람은 화순和順 하람 조익현曺翊鉉이었다. 정약용이 서석산은 바라보기만 해도

아름답다고 하자, 조익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적벽의 뛰어난 경치는 여자가 화장을 한 것과 같아서 붉고 푸르게 분을 바른 모습이 비록 눈을 즐겁게 할 수는

있으나, 가슴속의 회포를 열고 기지氣志를 펴게 해주지는 못하네. 그대는 서석산을 보지 못하였는가.

우뚝한 모습은 마치 거인巨人과 위사偉士가 말하지도 웃지도 아니하고 조정에 앉아 있어 비록 움직이는 흔적은

볼 수 없되 그의 공화功化는 사물에 널리 미치는 것과 같네. 그대는 그 산을 가보지 않으려나?"

 

 

서석산을 거인과 위사의 형상이라고 하였다.

그 산을 닮아 고경명은 그토록 고결한 정신을 드러냈던 것이 아니랴.

고경명은 서석산의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그려내었지만 사실 활달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장편고시 「취시가醉詩歌」에는 호걸의 기상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남산으로 돌아와 크게 누워 서적만 지키는 것은 답답하기 짝이 없으며 그렇다고 선술仙術을 익히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하고, 차라리 젊은 날의 기백을 지키겠다고 하였다. 

시의 후반부만 보면 이러하다.

 

 

이름은 스님 명부에 들었고 계책도 낮지만 근력은 그래도 말안장 시험할 만하기에

늙은 나이에 유주 · 병주의 젊은이들과 사귀어 평원에서 사냥 싸움해서 말을 달리나니

어느 때야 깃발 끼고 변방으로 나아가 활 당겨 높이 쏘아 적의 깃발 떨구랴.

옛 교하의 모래 벌에서 밤을 세우니 온 군영에 소리 없고 서릿발만 희구나.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