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유람록 <소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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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2021. 6. 17.

정선鄭敾, <조어釣魚>

17세기 말~18세기 초, 61.2×31.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그림은 본래 계절산수와 산수인물도로 이루어진 8폭 가운데 한 점이다.

본래 병풍이었으나 지금은 낱쪽 족자로 개장되었다고 한다. 비가 내리는 속에 도롱이 입은 인물이 낚시하는

광경을 화폭에 담았다. 화폭 윗면의 비기운과 비바람에 나뭇가지가 쏠려 있는 모습이 무척 생동적이다.

 

 

 

 

이황李滉, 「소백산 유람록遊小白山錄」

 

 

그 다음 날 계해, 걸어서 중백운암에 올랐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승려가 이 암자를 짓고는 그 속에서

좌선을 해서 선리禪利에 자못 통하였는데, 하루아침에 떠나서 오대산으로 들어갔으므로, 지금은 승려가 없다.

창 앞에는 옛 우물이 완연히 남았고, 뜨락에 푸른 풀은 쓸쓸할 따름이다.

암자를 지나서부터는 길이 더욱 끊어질 듯 가팔라서 곧바로 위로 올라가는 것이 마치 거꾸로 매달린 것 같다.

온 힘을 다해 부여잡고 올라서 간신히 정상에 이르렀다. 마침내 견여를 타고, 산등성을 따라서 동쪽으로 서너 리쯤

가서, 석름봉에 이르렀다. 석름봉 머리에 풀을 엮어서 초막을 지은 것이 있고, 그 앞에는 시렁을 엮은 것이 있다.

매잡이가 만든 것이라고 하니, 그들이 얼마나 고생을 겪는지 알만하다.

 

석름봉 동쪽으로 서너 리 지점에 자개봉이 있다. 또 그 동쪽으로 서너 리 지점에 봉우리가 우뚝 일어나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국망봉이다. 만일 하늘이 맑고 해가 밝은 날이면 용문산은 물론이고 서울까지도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날은 산 이내와 바다 아지랑이가 부옇게 끼어 흐릿하고 아득해서 용문산조차

바라볼 수 없었다. 오직 서남쪽 구름 가에 월악月嶽이 은은하게 비칠 뿐이다. 고개를 돌려 그 동쪽을 바라보매,

든 구름과 푸른 기운이 첩첩으로 싸여서 그 모양을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되 그 참모습은 자세하지 않은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태백산 · 청량산 · 문수산 · 봉황산이다. 그 남쪽에 보였다가 숨었다가 하면서 구름 밖에 멀리

희미한 것은 학가산 · 공산 등 여러 산이다. 그 북쪽에 형상을 감추고 자취를 숨겨서 하늘 한쪽에 아득히 보이는

것은 오대산· 치악산 등 여러 산악들이다. 바라보이는 강물은 아주 드물다. 죽계竹溪의 하류는 구대龜臺의 내川

이고, 한강의 상류는 도담島潭의 굽이이니, 고작 이것들이 보일 뿐이다.

 

종수宗가 말하였다. 

"정상에 올라 바라보이는 것은 가을 서리가 내린 후이어야 하거나, 혹은 장맛비가 갓 갠 날이어야 아름답습니다.

주세붕周世鵬 태수는 비에 닷새간 막혀 있다가 날이 맑아지자 곧바로 산에 올랐기 때문에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묵묵하게 그의 말이, 처음에 막히고 답답한 자라야 마침내 쾌활할 수 있으리라는 뜻을 알아

차렸다. 하지만 내가 여기에 왔을 때는 하루도 막힌 적이 없었으니, 어찌 만 리 길을 내달려온 쾌활함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는 하지만 산 오름의 절묘한 곳은 시력으로 바라볼 수 있는 끝까지 다 바라보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산 위의 기운은 아주 높고 차가워 맹렬한 바람이 부딪치고 뒤흔들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나무가 자란 것

들이 모두 다 동쪽으로 누워 있고, 가지와 줄기는 대부분 휘고 굽고 자그맣고 문드러져 있다. 4월 그믐쯤은 되어야

숲의 잎이 피기 시작한다는데, 한 해 동안 크는 것이 한 푼이나 한 치 정도에 불과하며, 억세게 고통을 견디어 모두

힘껏 싸우는 형세를 하고 있으니, 깊은 숲과 큰 골짝에서 자라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어디 거처하느냐에 따라 기운이 변하고 어떻게 기르느냐에 따라 체질이 변한다'

라는 것이 물건이나 사람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석름봉 · 자개봉 · 국망봉의 세 봉우리와의 거리가 서로 8, 9리쯤 되는 사이에 철쭉이 우거려 한참 난만하게 너울거린다.

마치 비단 장막 속을 거니는 것 같기도 하고(주희가 그러했듯) 축융봉의 잔치에 취한 것 같기도 하여 매우 즐거웠다.

봉우리 위에서 술을 석 잔 마시고 시 7수를 지으니, 해가 벌써 기울었다. 옷을 털고 일어나 다시 철쭉 숲을 더듬어

내려가서 백운암에 이르렀다. 내가 종수에게 말하였다. "처음에 제월대에 오르지 않은 것은 각력脚力(발힘)이 먼저

다 고갈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지금 이미 정상에 올라왔는데도 다행이 힘이 남으니, 어찌 가서 보지 않으랴?"

마침내 종수가 앞서 인도하여, 바위 벼랑을 따라 발을 오무려 디디다시피 하면서 올라가니, 이른바 상백운암이란

것은 불에 타서 없어진 지 오래여서 풀과 이끼에 뒤덮여 있었다. 제월대는 바로 그 앞에 당도하여 있는데, 지세가

아주 동떨어져 있어서 정신이 두렵고 혼이 떨릴 정도여서 오래 머무르고 있을 수 없었다. 마침내 내려왔다.

이날 저녁, 석륜사에서 다시 묵었다.

 

 

 

 

 

 

 

소백산 小白山

 

 

소백산은 주봉이 해발고도 1,440미터이고, 비로봉 · 국망봉 · 제1연화봉 · 도솔령 · 신선봉 · 형제봉 · 묘적봉

등의 연봉들이 이어져 있다. 국망봉에서 시작되는 죽계구곡은 경기체가 죽계별곡의 배경이 되었고, 연화봉에서

이어진 희방계곡에는 높이 301미타의 희방폭포가 장관을 이루며 북쪽 계곡은 단양팔경의 시발점이다.

 

 

 

 

 

 

 

 

 

 

 

희방폭포

 

 

 

 

1549년(명종 4, 기유) 4월 신유, 49세의 이황李滉(1501~1570)은 소백산을 유람하였다.

소백산은 그가 영주 · 풍기 사이를 왕래하면서 머리를 들면 바라볼 수 있고 발을 옮기면 곧 갈 수 있는 곳이었거늘

40년 동안이나 꿈과 생각만으로만 향할 수밖에 없었던 곳이었다. 그는  1548년에 청량산을 유람하면서

당나라 한유韓愈가 형악(형산)의 신에게 묵도하자 구름과 안개가 걷히고 형산의 모습이 홀연 눈앞에 나타났던

것처럼 산이 신령한 기운과 교감하는 경험을 하였다. 1548년 단양군수로 있을 때는 단양에서 이제까지 남들이

언급하지 않았던 구담龜潭이라는 승경을 발견하고 잔잔한 기쁨을 맛보았다. 하지만 1549년 풍기군수로

부임해서는 그해 겨울과 봄에 백운동 어구까지 갔지만 공무 때문에 발길을 돌린 것이 세 차례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소백산에 오르면서 자연 속에 드러나는 조화의 자취를 진심으로 즐겼다.

 

이황은 산수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느끼는 기질이 있었다. 곧, 산야기山野氣가 있었다.

또한 산을 정신적 가치의 상징물로 여겼고 우러러보아야 할(첨앙瞻仰) 정신적 가치의 상징물로 여겼다.

그에게 있어서 산놀이는 인간 욕망(사욕私慾)을 억제하고 본성의 깊이를 구명하는 공부(진덕수업進德修業)를

상징한다. 백운동 주인이 되고도 세 차례나 어구에서 발걸음을 돌렸다는 것은 높은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일(진덕進德)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사실을 스스로 반성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소백산은 충청도 단양 동쪽 35리, 영춘 동남쪽 40리, 경상도 풍기에서 32리에 있다.

장백산맥이 오대산을 거쳐서 태백산에 이르러 영남의 진산鎭山이 되었는데, 그 서쪽에 소백산이

주흘산主屹山과  함께 우람하게 솟아서 서남쪽으로 지리산과 어울려 영남의 병풍을 이룬다.

또한 소백산은 황수潢水의 발원지로 황수는 서남쪽으로 낙동강이 된다.

낙동강은 서쪽으로 흘러 상주에 이르고, 또 꺾여서 남쪽으로 흐르며

함안 북쪽에서 남수藍水와 합류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김해 동쪽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그 400여 리 긴긴 흐름의 근원이 소백산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소백산은 북쪽에서 오다가 서편으로 뛴다. 그 짜임이 아주 웅대하여 검푸른 빛이 허공을 가로지르고,

봉우리 안에 있는 형상은 모두 빼어나서 마치 푸른 물결이 다투어 솟구치는 것 같다. 휘돌아 동쪽으로 온 것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져 거북이 엎드린 것 같은데, 그거을 영구靈龜라 한다.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

안향安珦(1243~1306)의 신주를 모시던 문성묘文成廟의 진산鎭山이었다.

또한 소백산은 역대 왕과 왕ㅂ미의 태胎를 안치하던 곳이다. 소백산의 경원봉慶元峯은 고려 충숙왕의 태,

윤암봉輪庵峯은 조선 소헌왕후의 태, 초암동草庵洞은 고려 충렬왕의 태, 욱금동郁錦洞은 고려 충목왕의  태를

안치하였다. 그래서 주세붕은 「죽계별곡竹溪別曲」에서 다음가 같이 말하였다.

 

 

죽령竹嶺 남, 영가永嘉(안동의 옛 이름) 북, 소백산小白山 앞, 천재千載  흥망興亡.

풍류도 한결같은 순정順政의 성읍城邑이라. 딴 세대世代에 숨지 않을 취화봉翠花峰.

천자天子의 태胎를 감춰 중흥中興을 빚어내니 경기 어떠하니잇고.

 

 

소백산에는 여덟 곳의 승경이 있었다. 종수라는 승려는 소백산 높은 곳에 암자를 짓고,

그곳 봉우리를 묘봉妙峯이라 하였다. 그는 이황에게 팔경八景을 시로 적어 달라고 해서,

이황은 그를 위해 경술년 하지 여러 날이 지난 후 「묘봉암 팔경」이란 시를 지어 주었다.

바위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선 모습, 시냇물에 옥구슬이 씻겨 내리는 모습,

길게 낀 안개가 바다 위에 부글부글 끓는 모습, 바위굴로 돌아가는 구름이 빗기운은 끌고 가는 모습,

미인의 짙은 눈썹 같은 산 모양이 은은히 드러나는 모습, 넓고 멀리 펼쳐져 있는  들판에 석양이 지는 모습,

달과 별이 처마에 걸린 모습, 종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지는 소리 등을 팔경으로 꼽았다.

 

이황은 백운동 서원을 떠나 안간교를 건너 소백산 석륜사石崙寺에서 하룻밤 묵은 후에 중백운암 · 석름봉 · 

환희봉 · 상가타上伽陀 ·  하가타下伽陀를 거쳐 관음굴에서 유숙하고, 다시 박달재 · 비로전 터 · 옥금동을 거쳐

고을로 돌아왔다. 유람 중에 경치를 구경하고 동행자들과 환담하며 지명을 붙이거나 고치고 시를 지었다.

평온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였으며 원경과 근경을 빠짐없이 조망하였다. 

소백산에 오른 이황은 천리목千里目의 시선으로 먼 곳까지 다 바라보았다. 석름봉에 올랐을 때의

광경을 기록한 부분은 원경과 근경이 대조를 이루어 묘사가 아주 세밀하다.

근경과 원경을 빠짐없이 조망하는 원만구족한 정신세계를 반영하였다.

 

흔히 도학을 추구하는 선비들에게 산놀이는 진덕수업의 과정을 연습하는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이황의 산놀이는 다른 사람의 산놀이와는 달랐다. 승려 종수가 주세붕의 산놀이를 회고하면서

처음에 닷새 동안이나 비에 막혀 답답했었기 때문에 뒤에 산 정상에 올라 쾌활함을 얻었다고 말하였다.

진리의 깨달음을 그런 식으로 비유한 것이었다. 이황은 석름봉에 올라 광할한 세계를 둘러보고도, 등산의

묘처는 시야의 광활함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자신은 하루도 막힌 적이 없었으므로 등정의 일순간에

'만 리의 쾌함' 을 얻을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하루도 막힘이 없었다' 는 것은 그간 날씨가 좋았다는 사실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꾸준히 도체道體를 양성하여 왔기에 하루도 불평한 심사를 가지지 않았다는 자부의 말이다.

'만 리의 쾌함' 이란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깨달음을 의미한다. 퇴계는 그런 순간적, 찰나적 깨달음에서 얻는

쾌감과는 다른 희열을 도체의 연마 과정 중에 꾸준히 잔잔하게 느껴왔다고 말하 것이다.

곧, 이황의 진덕수업은 한 단계 한 단계 자득하는데서 즐거움이 있지, 은폐되어 있던 본질을

찰나의 순간에서 확인하는 쾌활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이황은 석름봉에 올라서 구부러지고 키 작은 관목들을 보고는 '앙상하고 비바람에 시달리며 힘들여

싸우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라고 가련해 하였다. 그는 맹자 「진심편盡心篇 · 上」에 나오는 '거이기居移氣

양이체養移體' 라는 말을 환기하였다. 속말에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그 뜻과 통한다고 오해되기도

하지만 실상 맹자가 말한 것은 그런 뜻이 아니다. 맹자는 범范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제濟나라 수도로 와서 왕자를

보고 탄식하였다. "거처는 기상을 변하게 하고 먹고 입는 것은 몸을 변화시킨다. 영향이 크도다, 거처라는 것는!

다 같이 사람의 자식이 아닌가!" 라고 하였다. 왕자가 살고 있는 집이라고 해도 그가 타는 수레와 말이 다른 귀한

집 자식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도 왕자가 저같이 달리 보이는 것은 그가 처해 있는 위치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 하물며 천하의 가장 넓은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의 경우야 얼마나 다르겠는가? 맹자는 이러한 비유

의 말을 이용해서 사람은 천하의 가장 넓은 곳이라고 할 인仁에 거처하여 인을 실현하여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산 정상의 나무들이 앙상하게 비바람에 시달리며 힘들여 싸우는 모습은 곧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인간 존재의 모습

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참된 모습은 아니다. 그는 석름 · 자개 · 국망의 세 봉우리 사이에 철쭉이 난만하게 너울

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게 난만하게 너울거리는 것이 원만구족한 인간 본성의 모습이다. 사실 이황이라 하여도

아무 갈등 없이 자득의 기쁨을 항시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도 '힘들여 싸우는 모습'을 짓는 경우가 많았으리라.

진정한 은자이어야만 산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을 터이거늘, 자신도 '공문서 속에서 몸을 빼어

한 때 산 어귀를 거니무리' 일 뿐이라고 자조하기까지 하였다.

 

이날 밤 석륜사에서 이황은 시를 한 수 지었다.

「석륜사에서 주경유(주세붕)가 「자극궁에서 가을에 느껴」라는 시에 차운한 것을 본받다」라는 제목이다.

이황보다 앞서, 역시 49세 때 소백산을 유람하였던 주세붕은 석륜사에 묵으면서 「석륜사에서 이백의 자극궁세서

가을을 느끼고」 시에 차운하다 라는 시를 남겼다. 이백은 49세 때, 강주江州 심양의 도관인 자극궁(훗날의 천경관)에

가서 「심양 자극궁에서 가을을 느껴 짓다」 라는 시를 지어 그중 "마흔아홉 해의 잘못은,

한 번 지나가면 회복하기 어려운 법.

야인의 마음은 갈수록 상큼해진다만, 세간 도리는 번복이 심하구나" 라고 하였다.

세상사와 거리를 두고 야인으로서 살아가겠다는 뜻을 담은 이 시는 너무도 유명하여

북송 때 소식과 황정견도 차운하였다.

《회남자》에 보면 춘추시대 거원遽瑗은 나니 50에 지난 49년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황은 자신의 나이도 이백이나 주세붕과 마찬가지로 49세에 이르고 보니,

그 감회가 들과 다르지 않았기에 이백의 시의 운자를 이용해서 감회를 적었다.

 

이황의 문인 조목趙穆은 훗날, 기대승奇大升이 이황의 묘갈명을 지으면서,

'중년 이후로는 바깥으로 달리려는 뜻을 끊었다 라고 말한 것은 온당치 못하며, 선생은 애당초 권세나 이익 따위의

분화紛華함에 대하여 담박淡泊 하였다고 하였다. 물론 이황의 '산야질' 은 본래의 성품이었다고 하겠으나, 귀거래를

결심한 것은 혼란한 정치현실과 경직된 지적 환경 속에서 지기 생각을 감추고 숨기려 한 도회韜晦의 태도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고, 현실의 공간을 벗어나 존재의 근원적 물음에 답할 정신세계를 찾아나선 결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특히 45세 때 을사사화에서 중형의 죽음은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황은 비록 47세에 홍문관응교로 조정

에 들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였고, 48세 되던 해 정월에 외직을 자청해 단양군수로 부임하였으며 단양의 산수를

유람한 후 「단양 산수의 놀 만한 곳에 관한 속기」를 남겼다. 그해 10우러에는 풍기군수로 부임하고, 이듬해 4월에 소백

산을 유람한 후 그 감흥을 이렇듯 「소백산 유람록」으로 적었다. 이름을 서간병수栖㵎病蓃라고 적었다. 즉, 시냇가에

들어 사는 병든 늙은이라는 뜻이다. 그해 12월에는 경상감사에게 세 번이나 사직서를 올려

회보를 기다리지 않은 채 귀향 하였다.

 

이황은 소백산 등정에서 남송의 철학자 주희朱熹와 장식張植이 남악에 노닐던 고사를 되새겼다.

하지만 주희와 장식이 기이한 경관을 구경하여 '가슴의 막힌 것을 쓸어내리는 기세' 를 만끽하였던 것과는 달랐다.

이황은 산수 자연의 역동적 힘과 원만한 모습을 함께 사랑하였다. 이황은 구도자였다. 하지만 산수를 즐기면서

도의道義만 따지는 것은 조박糟粕만 보는 것에 불과하고 고상하고 현허玄虛한 것만 좋아한다면 인간의 윤리적

세계를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이황은 그 둘을 부정하고, 산을 유람할 때 거칠지 않고 부드러우며 억세지 않고

유순한 태도를 지켰다. 그 정신세계를 바로 이 「소백산 유람록」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흔히 도학가라고 하면

현실과 동떨어지고 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을 연상하기 쉽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옳다고 할 수 없다.

 

선인 가운데 진정한 도학가는 우주 만물의 법칙이자 생명의 원리인 이理가 스스로에게 오는 것을 체험하였다.

현대의 우리가 지향하는 궁극의 삶을 살았기에, 우리는 그들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실은 진정한 도학가들이 존재하였다는 것이 우리 문화의 강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