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유람록 <비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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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2021. 6. 20.

 

필자 미상, <니금산수도尼金山水圖>, 17세기, 31.4× 25.5cm, 개인 소장.

 

니금으로 그린 화려한 산수도이다. 괴송과 기암을 올려다보는 고사高士를 그린 방식이

다소 상투적이지만, 괴송과 기암 자체는 매우 웅혼하다.

 

 

 

허훈許薰,  「수정사 유람기遊水淨寺記」

 

 

진성眞城(진보眞普)을 마주하여 우뚝 솟은 것이 구봉대舊烽臺(남각산봉수南角山烽燧)이고, 그 북쪽 지맥이

비봉산이다. 그 남쪽 기슭에 수정사가 있다. 절 앞 계곡에서는 문석文石(무늬가 있는 수석)이 많이 난다.

내가 세들어 사는 집과 겨우 40여 리 떨어져 있다. 을미년(1893) 칠석날, 나는 이명숙 李明叔 · 박경순朴敬淳 ·

이치첨李穉瞻 · 이순칠李舜七 등과 가서 보았다. 각산에 이르러 권화여權華汝를 방문하였더니, 그는 기꺼이 길

안내를 맡기로 하였다. 겨우 1리를 가니 동구가 나왔는데 동천동動泉洞이라 한다. 비봉산의 오른편 날개이다.

그 지맥을 끊어 개울을 소통시켰다. 권화여가 말하였다.

"우리나라 산 이름 중에 비봉산이 많지만 이 산이 여러 비봉산 중에 가장 수려하지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구원하러 온 중국 장수가 우리나라 산의 장대한 것을 보고 지맥을 마구 끊었는데,

이것도 그러한 자취지요." 내가 말하였다.

"예전에 가정稼정 이곡李穀의 「동유록東遊錄」을 보니 원나라 사람 호종유가 지맥을 끊었다는 설이 있더이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왜구가 이곳에는 들어오지 않았으니 중국의 여러 장수들이 어찌 이곳을 지나가면서 지세를

살필 수 있었겠소? 못 위쪽에 있는 개울의 물길이 언덕의 지세를 따라 곧바로 나 있지 않았다면 비가 와서 빗물이

개울을 채운 다음 못으로 흘러들게 되어 못이 필시 터지고 말겠지요. 이 때문에 산기슭을 터서 개울과 통하게

하여 그 물살의 기세를 줄인 듯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호종유가 한 짓이겠지요."

 

개울의 돌들은 벌써 알록달록한 무늬를 띠고 있다. 경순이 말 하였다.

"물방울 흔적입니다. 원래부터 돌에 무늬가 있는 것은 아니지요."

권화여는 이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심하게 반박하였다. 고개를 하나 넘으니 마무곡馬武谷이다.

마무곡 아래 문석文石이 많았는데 아마도 수정사의 돌이 여기보다 나은 성싶다. 개울을 따라가서 수정사

동구에 이르렀다. 나무꾼에게 물어보니 절에 승려가 살고 있지 않다고 한다. 날이 이미 저물었다.

여려 사람들이 말하였다. "절 가까운 마을에서 자고 내일 다시 오는 것이 좋겠소."

이에 작은 고개 하나를 넘어 6, 7리쯤 가니 전장이 하나 나오는데 감곡장甘谷壯이라고 하였다. 

여러 산봉우리가 사방을 두르고 밭두덕이 얼기설기 얽혀 있었다. 벼 포기와 콩 줄기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고.

초가에 닭과 개가 있어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가 자신이 살던 망천輞川 골짜기를 형용해 놓은 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나는 치첨 · 순철과 함께 화여를 따라가서 이씨 집에서 자고 명숙과 경순은 신씨 집에서 잤다.

 

다음 날 아침 처사 이성화李性和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여러 벗들과 함께 장현長峴을 넘어 지름길로 곧장

절 문에 이르렀다. 쑥대가 마당에 가득한데 절간의 요사는 적막하다. 불당 앞에 접시꽃과 봉선화 몇 포기만

있을 뿐이다. 적묵당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 후 치첨과 순칠이 먼저 절 문을 나섰다.

명숙이 말하였다, "이번 행차는 문석을 보기 위한 것이오, 이 절은 문석이 기이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소.

용추龍湫도 보지 않을 수 있겠소?" 나는 좋다고 하였다. 명숙과 더불어 개울을 따라 동쪽으로 가고,

화여와 경순도 따라왔다. 개울이 모두 복류伏流하였다. 평범한 돌은 많지만 문석이 적었다.

사람들이 다 가져갔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개울 양쪽에 푸른 절벽이 마주보고 서있어 마치 겹문처럼

막고 있다. 돌고돌아 안으로 가장 으슥한 곳에 이르렀더니, 반석 위의 우목한 웅덩이에 밝고 푸른

물이 고여 있는데 깊이는 한 길이 채 되지 않았다. 물을 움켜 마시니 번뇌로 가득한 가슴이 문득 씻겨졌다.

 

여기서부터 길을 돌려 골짜기 입구에 이르렀다. 치첨과 순칠이 소나무 그늘 아래 앉아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웃으며 두 사람에게 말하였다. "자네들은 용추의 빼어난 경관을 보지 못하였으니 한 번 헛걸음한

것이 아니오?"순칠이 말하였다. "전에 용추를 본 것이 여러 번이오. 비록 그곳을 보지 않은들 무슨 여한이 있겠소?"

그러나 낮빛을 보니 후회하는 기색이 있었다. 다시 마무곡에 이르러 개울 속으로 흩어져 걸어갔다.

화여가 예쁜 돌 하나를 먼저 주우려고 급히 가다가 넘어졌다. 그러자 치첨이 그 넘어진 틈을 타서 돌을 마구 주워

달아났다. 정말 포복 절도할 만하였다. 명숙이 돌 하나를 주웠다가 무겁자 곧 버리기에 내가 집어들고 갔다.

화여는 내 걸음이 너무 힘든 것을 보고 작은 돌을 주면서 "내가 자네 돌을 운반할테니 자네는 내돌을 가지고

오게"라고 하였다. 힘든 수고를 나누려는 것이다. 애써 고개마루에 올라 등성이를 타고 비봉산 정상에 이르렀다.

 

둥그스름하고 평평하며 단정하고 예쁘장하여 100명이 앉을 만하다. 발근 모래와 맑은 물결이 띠 모양으로 뻗어

그림과도 같다. 광덕산 · 작약산 · 일월산 · 청량산 · 학가산 · 태백산 · 소백산 · 죽령 등 여러 산들이 가까이서

당기고 멀리서 벌려 서서, 봉우리마다 교묘함을 드러내는데 그 모습이 제각기 달랐다. 다시 동천動泉으로 발길을

돌렸다. 또 기이한 돌 하나를 주웠다. 화여의 집에 이르러 각각 수제비를 한 사발씩 먹었다. 가지고 온 문석을 내어

마루에 늘어놓고 살펴보니. 그 무늬가 참으로 기이하다. 어떤 것은 골짜기에 걸쳐 있는 소나무 등걸이 물고기의

비늘을 닮아 마치 진짜 용 같고, 어떤 것은 강에 눈이 내리려 하는데 나뭇가지 끝에 싸라기 눈이 쌓인 것 같으며,

어떤 것은 긴 강 한 굽이에 낙조가 붉은빛을 번득이는 것 같다. 또 어떤 것은 평평한 들판의 멀리 뻗은 풀밭에

비 기운이 어지러운 것 같고, 어떤 것은 강마을과 산마을에 안개 낀 나무들이 연이어 있는 것 같다.

어떤 것은 봄바람 부는 산길에 이름 모를 꽃들이 떨기져 피어 있는 것 같고, 어떤 것은 가을 못에 연꽃이

어리비치며 그림자를 덮으면서 꽃을 토하는 것 같으며 어떤 것은 벼랑길의 물기에 젖은 이끼가 푸른 털을

더부룩하게 늘어뜨린 것 같다. 어떤 것은 들판의 강기슭에 강물이 빠져 흰 서리 같은 뿌리가 거꾸로 드리워

있는 듯하고, 어떤 것은 물가에 이슬이 시원한데 붉은 여뀌꽃이 소복하게 피어 있는 것 같으며, 어떤 것은

중국 서호의 늙은 매화가 가지만 남기고 있는 것 같고, 어떤 것은 오래된 협곡의 푸른 등나무 덩굴이

구불구불 서린 것 같다. 진실로 기이한 볼거리요, 희귀한 종자들이다. 조물주는 역시 일이 많기도 하구나.

 

나는 경순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자네는 아직도 의심을 품고 있나?"

그는 대답하였다. "진즉에 풀렸지."

대개 우리나라이 문석 중에 종성鐘城과 단천端川에서 나는 것을 청강靑剛아러 허는데 석질이 단단하되 그저

황묵색黃墨色의 점이 바둑알처럼 나 있을 뿐이다. 강진康津과 해남海南에서 나는 것을 화반花班이라 하는데

점질이 부드럽되 그저 구름 기운처럼 붉은 잿빛이 서려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것들이 어찌 이곳 문석이 여러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만 하겠는가? 비록 고개지 · 오도자 · 이영구 · 조맹부와 같이 육법六法의 기술을 갖춘

이름난 화가들로 하여금 붓을 적셔 여러 날 마음을 다잡아 그리게 하더라도 비슷하게조차

그릴 수가 없어 머뭇거리다 물러나 포기할 것이다.

 

명나라 때 중국에서 나온 《산당사고山堂肆考》라는 책을 보니, 대리부大理府의 점창산點蒼山에서 돌이 나는데

흰 바탕에 검은 무늬가 있어 산수 초목의 형상이라 하고, 또 계주堺州 북쪽 협곡에서 나는 돌은 소나무 · 잣나무와

시내 다리, 산 · 숲과 누대 · 누각의 형상이 있다고 한다. 그거은 이곳의 문석과 갑을甲乙을 따질 수 있을 것이다.

천지의 영화로운 기운이 이 사이에 모여 진기한 보배를 잉태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처럼 기氣가 모인 것이 명망과 의표로 나라를 빛내고 세상을 상서롭도록 만들 것이다.

믿지 못하겠으면 이 돌을 보라. 화여가 말 하였다.

"그대들은 힘이 이미 지쳤을 테니 내일 내가 사람을 시켜 짊어지고 나르게 하겠네."

마침내 화여와 헤어져 너물녘에 강가의 집으로 돌아와 밤새 곯아떨어졌다.

느즈막이 일어나니 돌이 이미 와 있었다.

그 돌의 문양을 적고 또 유람한 전말을 아울러 적어서, 함께 노닐었던 여러 공들에게 보낸다.

 

 

 

 

비봉산에서 조망한 청송군 진보면 일대.

 

 

 

비봉산 飛鳳山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의 남쪽 중앙부에 있는 해발고도 671미터의 산.

그 남쪽에 태양산(933미터)이 위치하며 반변천이 북쪽으로 가로질러 흐른다. 진보는 삼국시대 칠파화현漆巴火縣과

조람현助攬顯의 2개 현이었다. 동쪽은 영양군 석보면과 영덕군 지품면, 서쪽은 안동시 길안면과 임동면, 남쪽은

청송읍과 파천면, 북쪽은 영양군 입암면에 닿아 있다. 낙동정맥의 서쪽 자락에 위치한 조그만 고을로

현재는 임하댐의 건설로 인해 일부 지역이 수몰되어 있다.

 

 

 

 

 

 

 

이 유산록의 저자는 산에서 아름다운 돌을 채취한 일을 특별히 기록하였다.

저자는 조선 말기, 근세의 학자 허훈許薰(1836~1907)으로 저자가 오른 비봉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남각산南角山으로 나와 있다. 곧 진보眞普의  남각산에 수정사가 있다고 하였다. 또 남각산에는

봉수가 있었으니, 그것이 곧 허훈이 위의 글에서 말한 구봉대이다.

 

현재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의 해발고도 282미터인 대소산에 조선 초기의 봉수대가 남아 있는데,

그 봉수대가 남쪽으로는 별반別畔 봉수대, 북쪽으로는 평해의 후리산厚里山 봉수대, 서쪽으로는 광산廣山

봉수대를 거쳐 진보의 남각산 봉수대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읍지에서는

남각산과 비봉산을 나란히 들어서 별개의 산으로 처리하였다.

 

허훈은 본관이 김해이며 호는 방산이다. 경상북도 선산군 임은林隱(지금의 구미시 임은동)에서 출생하였으며

29세에 허전許傳(1797~1886)의 문인이 되었다. 허전은 이익李瀷 → 안정복安鼎福 → 황덕길黃德吉로 이어진

성호학파의 실학을 이었으니 허훈은 바로 허전의 학통을 이었다. 또 허훈은 유주목柳疇睦에게도 수학함으로써

영남 유학 내에 독특한 학맥을 형성하였다. 유주목은 영남에서 퇴계 학맥의 주류를 이루었던 유성룡의 후손으

로서 일가를 이룬 인물이다. 따라서 허훈은 허전과 유주목 두 스승의 학문을 계승함으로써 이황 연원에서 분파된

이른바 근기학파와 영남학파를 다시 종합하는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는 「심설心設」등의 실학적 논문과

「패수설浿水設」과 같은 역사지리 고증논문, 「해조설海潮設」과 같은 자연과학적 논문 등이 있다.

그중 「염설」은 소금의 제조방법과 매법에 관한 관심을 드러내었다.

 

허훈의 「문인록文人錄」에는 그의 셋째 동생인 허위許蔿(1855~1908)와 구한말의 언론인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이 들어 있다. 허위는 바로 윗 형 허노許魯와 함께 구국의병투쟁에 앞장서서 활동하였다.

허휘는 의정부 참의로 있을 때 「시사를 논한 시사를 논한 소論時事疎」에서 "재용財用이란 나라의 혈맥입니다.

···  무릇 토목 공역과 제작하는 물품으로서 매우 긴급하지 않으면서 조금이라도 겉치레인 것은 모두 정파

停罷하고 오직 농상공업을 확장 제조하는 데와 군비 군물을 넉넉한 예산으로 마련하는 데에만 전념해서

실사구시實事求是토록 해야 합니다." 라는 주장을 하였다. 1905년(을사) 일본 헌병대로 이송되었다가

4개월 만에 석방된 후 사직辭職 상소를 올렸는데, 그 상소에서 인재양성 · 군정 · 농정 · 부국

방안 · 화폐제도 개선 · 노비해방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한편 장지연은 청소년 지기에는 주자학을 공부하였고, 곽종석郭鐘錫(1846~1919) · 이승희李承熙(1847~1916) ·

최익현崔益鉉(1833~1906)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수구계열의 신문인 《시사총보時事叢報》의

주필을 맡게 된 이후로는 실학 또는 개화사상의 인물들과 교유하였고, 이 무렵 정약용의 학문에 접하였다.

그는 천문 · 지리 · 군사 · 상업 등 28장에 걸쳐 그 역사적 시원을 밝힌 《만국사물기원역사萬國事物紀原歷史》를

저술하고, 정약용이 우리나라의 상고시대 이래의 강역을 고찰한 《강역고疆域考》를 증보 간행하였다. 서

구문물에 관심을 가졌으며 자강개화론自强開化論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