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유람록 <주왕산>

댓글 0

자연/취월당

2021. 6. 20.

 

고람古藍전기田琦 <하경산수夏景山水>

19세기 전반, 87.3×35.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그림을 그린 전기는 김정희의 문하에서 서화를 익혀 추사파 중에서도 가장 사의적寫意的인 문인화의

경지를 구사한 화가로 평가된다. 시문에도 뛰어났다. 그림의 제시에는 "청산은 또렷하고 나무는 겹겹인데

절은 구름 깊은 봉 몇 번째 봉우리에 있는가. 민가 즐비한 서산 아래서, 석양의 강설講設 알리는 종소리를 듣네"

라고 하였다. 고요하고도 담백한 경지를 그림과 시로 드러낸 것이다.

 

 

 

 

장현광張顯光 「주왕산록周王山錄

 

 

산의 높이가 대단하지도 않은데, 산의 이름이 드러난 것은 이 산에 예 자취가 있기 때문이다.

또 그 바위 골짝이 기이하다는 것은 내가 들은지 오래였으므로, 한 번 구경하여

먼지 덮인 눈을 씻어 보고자 하였던 것이 한참 되었으나, 소원을 성취할 수 없었다.

이 여름에 친구를 따라서 산의 가까운 구역에 나아가 묵었다. 하루는 두세 친구들과 약속하여 숙원을 풀고자 하였다.

이 날 정오에 비가 내렸으므로 두루 유람할 수는 없었다. 어떤 사람에게 들으니, 산이 주왕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삼한 때의 왕의 호칭을 지닌 사람이 이곳에 피난하여, 산 위에 궁궐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궁궐 곁에는 폭포가

있는데, 그 폭포가 은폐하므로 바깥사람이 거기에 굴이 있는지 모르므로 급한 일이 있으면 숨어서 피하였다고 한다.

날이 저물고 또 비가 내렸으므로 몸소 그 자취는 가볼 수가 없었으나, 산이 그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이것 때문이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일컫기를 이 산은 계곡이 좁고 시내가 험하며, 암벽이 높고 험하며 산마루는 평평하고 넓지만

사방의 길이 막히고 멀어, 난세를 당하여 군사를 숨겨 적을 방어할 수가 있다고 한다. 유관遊觀하는 사람으로 말하면

단지 옛 자취 때문만이 아니라 그 바위가 기이하고 물이 정결하여, 마치 우인羽人(신선)이 은둔하는 곳인 듯하기

때문이다. 계곡洞으로서 이름이 나 있는 것은 둘이다. 동쪽에 있는 계곡은 이른바 주왕周王(중국 동진東晉의 왕족

주도周鍍가 후주천황後周天皇이라 자칭하며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주하여 이곳에서 은거하였다고 전함)

이 난을 피한 곳이다. 폭포의 굴은 변함이 없고, 궁궐의 유적도 여전히 있다. 그리고 계곡으로 서너 리쯤 들어가면

지금 폐허가 된 절이 있다. 서쪽의 계곡은 바위 계곡으로 동쪽보다 아주 기이하다. 그리고 바위의 허리에 인적이

아직 이르지 않은 곳에는 기이한 새가 그 틈새에 둥지를 틀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청학靑鶴이라고 한다.

매번 여름이면 이곳에서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른다. 둥지는 높아서 사람들이 그 새를 볼 수가 없다. 평시에 와서

감상하는 사람들은 모서리에 멈추어 놀래켜서 그것이 날아 나오는 것을 기다린 연후에 그 형체를 볼 수가 있었다.

한 무인이 그 둥지를 활로 쏘아 그 곁부분을 없애버렸다. 이후 학은 결국 더욱 험준한 바위로 옮겨가서

서식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다시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동구는 5리쯤 이르러 벼랑이 끊어지고 길이 다하였다. 길이 다한 곳에는 바위가 있는데 부암이라고 한다.

대개 그 암석이 매달린 듯한 벼랑에 찰싹 달라붙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만약 개미가 들러붙고

이가 더위잡듯이 해서 간다면 그 벼랑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그 길을 통과하여 갈 수가 있다. 그 길로 해서

하나의 고개를 넘으면 산의 형세가 조금 평평해진다. 그다지 기이하거나 아름답지가 않다. 그리고 용연龍淵

의 여러 곳은 폭포 물을 받아서 못을 이루고 있으므로 위험해서 가까이 갈 수가 없고 깊어서 헤아릴 수 없다.

용연의 북쪽으로 해서 7. 8리쯤 떨어진 곳에는 예날에 촌점村店이 있었는데, 이름하여 광혈廣穴이라고 한다.

난리 통에 흩어져 없어지고, 지금은 서너 개 초막만 남아 있을 따름이라는데,

우리 행차가 미치지 못해 모두 보지 못하였다.

 

나는 이번 길에 비록 두루 감상할 수는 없었으나, 산의 대강은 파악할 수 있었다.

가장 기이하게 여긴 것은 여러 바위들이다. 서쪽 골짝에 있는 바위가 더욱 기이하였다.

한 번 이날 눈으로 본 것을 기록한다면, 동구에서부터 길이 다한 곳에 이르기까지 5리쯤 되는 양쪽 기슭이

모두 바위였는데, 서로 포개어지지 않았으면서 아래로 바위 뿌리로부터 위로 바위 모서리까지 그 높이가 몇

장丈 인지 알 수 없이 곧바로 하나의 바위로 수미일관하였다. 그 가운데 작은 시냇물이 있고, 시내를 따라서

작은 오솔길이 있는데, 오솔길에서는 흙을 밟지 않고 돌을 껑충껑충 밟음면서 걸거갔다. 돌은 시내의 좌우에

깔려 있으면서 혹은 높기도 하고 혹은 낮기도 하고, 혹은 거대하기도 하고 혹은 아주 작기도 하며, 혹은 종으로

누워 있고 혹은 횡으로 누워 있기도 하며, 혹은 기울어 있기도 하고 혹은 평탄하기도 하다. 건강한 각력脚力이

아니라면 필시 늘 접질리고 말 것이다. 그 오솔길이란 곳으로부터 두 벼랑의 벽을 우러러 바라보면 바위 뿌리

가 각각 사람으로부터 고작 지척이며, 바위 모서리가 구름길에 곧바로 꽂혀 있어서, 하늘과 태양을 정말로

우물 속에서 바라보듯 하게 된다. 이른바 부암이란 곳의 위에 이르게 되면 좌우가 모두 바위로, 눈앞에 나열

되어 깔려 있어, 천태만상을 그대로 다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없다. 혹은 네모나기도 하고 혹은 둥글기도 하며,

혹은 오그라들어 있기도 하고 혹은 삐죽 나와 있기도 하다. 혹은 좌우로 상대하여 마치 공읍供揖하는 사람이

러하 듯하면, 혹은 피차가 서로 자만하여 마치 누가 크고 우람한지 다투는 듯이 한다. 혹은 부부 사이처럼

서로 짝을 맞춘 것도 있고, 혹은 형제처럼 서열을 이룬 것도 있으며, 혹은 원수 사이라서 서로 등을 돌린

것도 있고, 혹은 원수 사이라서 서로 등을 돌린 것도 있고, 혹은 붕우 사이라서 친근하게 가까이 있는 것도 있다.

 

혹은 바위 하나가 우뚝하게 있고 뭇 바위들이

모두 몸을 숙여 군주나 스승을 존경하여 우러러 받들기라도 하는 듯하다. 낮게 엎어져서 눌려 있는 것은 신하와

첩과 같다. 동쪽 벼랑의 바위가 서쪽 벼랑에 연결되지 않고 서쪽 벼랑의 바위가 동족 벼랑에 이어지지 않은 것은

 마치 문호를 나누고 군진을 따로해서 율법상 서로 뒤섞일 수 없는 듯하다. 혹은 엄연하고 장엄하여 똑바로 서서

기우뚱하지 않은 것은 마치 대인大人 정사正士를 범접할 수 없는 듯하다. 혹은 궤이하고 혹은 기괴해서 모양을

본뜨거나 형용할 수 없는 것은 마치 이도異道 좌학左學(사학邪學)이 우리 윤리를 배반한 것과 같다. 혹은 마치

갑옷과 투구 입은 무사가 절하지 않음을 예법으로 삼는 듯하다. 혹은 마치 용감하고 맹렬한 장수가 살벌殺伐함

을 자기 본령으로 여겨 마음대로 하는 듯하다. 혹은 상고시대의 성인이 소박하고 간략한 세상에 생존하여 도道

로써 천지를 하나로 삼아 정정性情을 드러내지 않는 것같다. 혹은 마치 말세의 경박한 사람이 재에를 믿어 교만

하게 자신을 과시하는 것같다. 혹은 임학林壑에 언건偃蹇하여 자신의 행사를 고상하게 하는 자가 있다. 혹은 정

도에서 어그러져 패려궂어서 별나게 구는 자가 있다. 혹은 남에게 빌붙어서 중인에게 뇌동하는 자가 있다. 혹은

작아서 큰 것을 따르는 자가 있다. 혹은 뒤에 있어서 앞의 것을 따르는 자가 있다. 두각을 움츠려 감춘 자는 마치

시세時勢를 두려워해서 겁내는 것이 있는 듯하다. 모서리를 훌쩍 드러낸 자는 마치 세상의 어리럼에 대해 분해

하고 노여워하는 것이 있는 듯하다. 이것이 그 대략일 따름이다. 자세하게 묘사할 수가 없다.

 

 

 

 

주왕산 <국립공원관리공단>

 

 

 

 

 

 

주왕산 周王山

 

 

경상북도 청송군 부동면에 있는 해발고도 721미터의 산.

역암 · 응회암 · 유문암 등의 화산분출로 이루어진 기암절벽이 병풍을 두른 듯해서 석병산石屛山이라고도 한다.

신라 왕자 김주원金周元이 이 산에서 공부했다고 하여 주방산周房山 또는 대둔산이라고도 한다.

중국 동진東晉의 왕족 주도周鍍에 얽힌 전설도 전한다.

 

 

 

 

 

 

 

 

 

 

 

인조 때의 산림처사 장현광張顯光(1554~1637)은 1597년(선조 30년, 정유) 맹하孟夏(음력 4월)에

「주왕산록周王山錄」을 적어 등산을 하면서 바위의 기형이상奇形異狀을 상고시대 이후의 역사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에 비의比擬하여 인회認會한 내용을 적어 책상에서 기발起發하는 자료로 삼았다.

장현광은 본관이 인동人同, 호는 려헌旅軒이다. 23세 때인 1576년(선조 9) 영남관찰사가 경명행수經明行修

의 선비로 이름을 적어 올려 벼슬에 천거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 높은 벼슬이 내렸으나, 고사하거나 잠깐 

벼슬에 나아가기를 반복하였다. 그가 주왕산을 유람하고 위의 글을 쓴 것은 43세 되던 1596년(선조 29) 

경상도 영양永陽(영천)입암立巖에 은둔해 있던 때였다.

 

그 뒤 1623년 인조반정 후 여러 번 왕의 극진한 부름을 받았고, 높은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번번히 사양

하였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정경세鄭經世(1563~1633)와 함께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을 대었다. 또 문인 조준도趙遵道를 의병장으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장현광은 철학사상에서 퇴계 이황과 한강 정구로 이어지는 학맥을 이었을 뿐 아니라 명나라으 나흠순

과 이이의 이기설도 받아들였다. 또한 영남 일대에 퇴계학파와 긴밀하면서도 독자적인 여헌팍파를 성립시켰다.

문집 《여헌집旅軒集》 이외에 주역 연구서인 《역학도설易學圖設》, 임진왜란 때의 전란 기록인

《용사일기龍蛇日記를 남겼다.

 

앞서 말했듯이, 1596년 무렵에 장현광은 경상도 영양의 입암으로 들아가 은둔하였다.

그곳에서 권극립과 손우남 · 정사상 · 정사진 형제와 교유하였고, 권극중은 왜란 때 피난하여 들어오 세거하고

있었다. 왜란 이후 장현광은 청송의 속곡涑谷에 머물다가 정사진과 권극립의 청으로 입암으로 갔다.

1637년(인조 15)에는 아예 입암에 은둔하려고 하였는데, 그때 권극립의 아들이자

자신의 문도인 군봉을 데리고 갔다. 그해에 84세로 별세하였다.

생전에 그는 입암 부근의 여러 빼어난 경치들을 「입암십삼영立巖十三詠」 으로 노래하였다.

그 후 다른 사람들이 승경을 더 찾아내어 다시 입암 28경이란 말이 있게 되었다.

시조작가로 유명한 박인로朴仁老(1561~1642)도 1629년 경에 「입암 29곡立巖二十九曲」을 지었다.

 

 

정광현은 '홀로 자기 몸을 선하게 닦음獨善其身' 에 주력하였던 처사處士이다. 

'처사'는 향촌사회 속에서 구도적 삶을 살면서 자신의 정신 경계를 시문으로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들은 현실세계에 대한 우환의식을 지니되, 현실을 직접 변혁하려는 의지를 드러내지 않고 산림에 은거 하면서

개인적 · 인격적 자기수양에 몰입하였다. 단 처사의 거처는 '새 짐승과 무리를 이루는' 공간이 아니라 '일상의 도리를

힘써 실천하는' 향촌사외와 연결되어 있었다. 장현광이 바위 형상에서 도덕과 관련된 인간 행위의 긍정, 부정의

여러 모습을 본 것은 이처럼 그가 늘 인간의 사업을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곧 장광현이 주왕산 바위들의 기형이상을 역사 속 인물에 비의한 것은

인간의 사업을 중시하는 그의 사상과 관련이 있다.

장현광은 인생을 곧 사업事業이라고 생각하였다. 사事는 유위有爲, 업業은 종사從事를 말한다.

곧 사업이란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일에 마음을 쏟아서 몸소 실천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명분明分」이라는 글에서 그는 인간에게는 '하여야 할 것으로 주어진 몫' 인 분分이 있다는 생각에 기초하여

인간의 사업을 강조하였다. 각 인간의 분分은 형기形氣에 따라서 도리에 계한界限이 있으며 또 작은 것과

큰 것의 구분이 있다고 보았다. 한 인간에게는 일시에 걸려 있는 작은 분도 있고, 일생에 걸려 있는 커다란 분도 있다.

더 나아가 천지의 시종을 끝으로 삼는 원대한 사업도 있어서, 그것이 바로 덕업德業이라고 하였다.

 

 

주어진 몫의 안에서 마땅히 할 것으로 말하자면,

움직일 때와 고요할 때를 한결같이 하여서 동정動精의 이치를 다하고,

응하고 접하는 것을 한결같이 하여 응접하는 이치를 다하며,

마음에 있어서는 마음의 이치를 극진히 하고,

몸에 있어서는 몸의 도를 극진히 하고,

가향家鄕과 방국邦國에 있어서는 가향 방국의 도를 극진히 하며,

천지 우주에 이르러서도또한 그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에 참여하여

중립하는 도를 극진히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사업이 아니겠는가?

 

 

「공성孔聖」이란 글에서 장현광은 공자의 사업을 인류가 지향해야 할 궁극의 사업이라고 논하였다.

곧 그는 공자 이전의 삼황오제와 요 · 순 · 우 임금의 사업은 모두 일시의 사업인 데 비하여 공자의 사업은

무궁한 사업이라고 규정하였다. 그에 따르면 공자는 후대의 사람들이 '마음으로 삼아야 할 성性과 몸으로

삼아야 할 도道가 있음을 알아서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답고, 형은 형답고, 아우는 아우답고,

지아비는 지아비답고, 아내는 아내답고, 붕우는 붕우가 되도록' 교화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그러한 공자의 사업은 '우주를 가득 채우고 천지 끝까지 가더라도 무궁한 것' 이다. 

 

장현광은 유학의 전통은 바로 그러한 교화 사업의 전통으로,

각 인간도 그러한 교화 사업을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장현광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선인들은 산에 대한 기록에서도 풍광의 묘사에 그치지 않고

사상의 골수를 드러내었다. 땅을 디디고 하늘을 우러러볼 줄 아는 하학下學과 상달上達의

착실한 공부를 온축하였기에, 산놀이의 매 순간에도 그 정신 경계를

확장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인용: 심경호 著 <산문 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