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유람록 <첨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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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2021. 6. 21.

도판 / 조선국팔도통합도朝鮮國八道統合圖

19세기 초기, 50×40.8cm, 개인 소장.

 

 

 

퇴계 이황은 「글 읽기는 산놀이와 같다讀書如遊山」라는 시를 남겼다.


讀書人說遊山似   사람들은 글 읽기가 산 놀이와 비슷하다 하지만

今見遊山似讀書    이제 보니 산놀이가 글읽기와 같구나.
工力盡時元自下    공력을 다 함은 원래 아래에서 비롯되나니
淺深得處摠由渠    얻음이 깊으냐 얕으냐도 모두 거기에 달렸도다.
坐看雲起因知妙    앉아서 구름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오묘한 이치를 알고
行到源頭始覺初    가다가 근원에 이르러 비로서 사물의 시초를 깨닫네.
絶頂高尋免公等    절정을 높이 찾으려고 그대들처럼 힘썼다만
老衰中輟愧深余    노쇠해서 중도에 그만두다니 내가 부끄럽구려.

 

이황은 절정에 올라 깊은 맛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곧 '아래' 에서 이미 결정된다고 하였다.

하학下學하여야 상달上達한다는 뜻이다. 높은 산에 오르려면 굳건한 의지, 명랑한 정신,

충분한 체력 그리고 적절한 도구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하학의 공부는 앉아서 구름 일어나는 것을 보고 가다가 물길의 근원에 이르는 평범한 일에서

문득 참 진리의 소재를 깨닫는 것과 같다. 이황은 당나라 왕유王維의 「종남별업終南別業」

시에 나오는 구절을  따와서 일상의 생활 속에서 매일 접하는 일들을 소중히 하라고 하였다.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우리도 바로 '아래' 에서의 첫걸음에 유의해야 하리라.

 

 

 

 

김만중金萬重, 「첨화령기瞻華嶺期」

 

 

 

첨화령瞻華嶺은 선천부善川府 동쪽 20리에 있다. 옛날에는 이름이 없었으나 그것에 이름을 붙인 것은

내게서 비롯한다. 내가 정묘년 가을에 죄를 얻어 선천으로 귀양가면서 이 고개를 경유하게 되었는데,

홀연 세 개의 봉우리가 깎아 만든 것처럼 구름 가에 솟아나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말몰이꾼을 돌아 보면서

"이것이 서울의 화산華산(삼각산)이 아니냐? 어떻게 여기에 와 있단 말이냐?" 라고 물었다.

초동이 듣고서 우으면서 "손님이 잘못이십니다. 이것은 우리 고을의 이른바 신미도身彌島라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눈을 씻고 자세히 살펴보니, 혼융하면서도 험준하며 한가운데 있으면서 제일 높은 것은

영락없는 화산의 백운대이고, 좌우에서 곁하고 있으면서 정정하게 대치해서 서로 뒤지지 않는 것은 영락

없이 인수봉과 노적봉이다. 또 붉은 벼랑과 비취 벽이 겹치고 늘어서서 마치 구름 비단을 펼치고 사마駟馬에

채찍질 하고 있는 듯한 것은 문수령과 부아령이다. 내가 그때는 그것이 서울의 화산이 아님을 알았지만,

여전히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 내가 도성을 떠나 여기에 올 때, 나를 전송하던 사람들은 모두 근교에서 돌아가고, 오직 화산의 비취빛

만이 사람을 쫓아와서 의의依依하게 떠나지를 않아, 대개 100리가 되어도 그만두지 않았다. 나도 역시 때때

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면서, 장안을 떠나는 중국사람들이 태항산太行山과 종남산終男山에 대한

그리움을 지녔던 것과 같은 그런 그리움을 부쳤다.

 

하지만 송도松都(개성)을 지나면서 화산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는데다가, 살수 서쪽으로는 산천이 쓸쓸하여

돌연 변새의 기상이 있기에, 객회客懷의 불쾌함이 비단 양관陽關을 지나면 술잔 권할 고인故人(친구)이

으리라고 중국인들이 탄식했던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이제 여기에서 이 산을 볼 수 있게 되니 내가 어찌 정情을 두지 않겠는가?

고인의 말(전후鋑珝, 「강행무제强行無題」 100수 가운데 2수)에 "현산峴山을 고개 돌려 바라보매, 마치

고향 사람 같은 이를 보면 기뻐한다" 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인정이 아니랴?

 

마침내 두자미杜子美(두보)의 시어를 따서 이 고개를 첨화瞻花라고 이름 짓고, 언젠가 여지輿地(지방지)

를 기록하는 사람이 있기를 기다리련다. 나보다 뒤에 여기에 오는 자는 반드시 이 글에서 느낌이 있을 것이다.

정묘년 늦가을에 서포거사西浦居士가 쓰다.

 

 

 

 

정황鄭榥, <양주송추楊州松楸>

19세기, 23.6×36.1cm, 개인 소장.

 

이 그림에는 서울의 북쪽 교외인 도봉산과 인수봉의 일부가 나타나 있다.

그림을 그린 장황이란 인물은 겸재 정선의 손자인데, 일생 사적은 분명하지 않다.

 송추란 선영을 뜻하므로, 정황이 자기 선영의 풍광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김만중金萬重(1637~1692)은 51세 되던 1687년(숙종 13, 정묘) 9월에 선천으로 귀양을 가면서

이 「첨화령기瞻華嶺記」를 남겼다. 김만중은 본관이 광산이다.

병자호란 때 부친 김익겸金益兼(1614~1636)이 강화도에서 순국하고 모친이

배로 피신하면서 출산하였으므로, 어려서 부르길 선생船生이라 하였다.

대학자 김장생金長生(1548~1631)의 증손, 광성부원군 김만기金萬基(1633~1687)의 아우, 숙종의 초비 

인경왕후의 숙부이다. 이른바 교목세가喬木世家의 지성인으로 사상의 상대주의 · 관용주의를 주장한

수필집 《서포만필西浦漫筆》을 만년에 남겼다.

 

그런데 김만중은 질녀가 숙종의 초비였지만, 숙종으로부터 다소 냉대를 받았다.

특히 김만중이 우참찬 윤휴尹鑴와 대사허 허목許穆을 탄핵하자 숙종은 그를 '간교하다' 고 비난하고, 심지어

"김만중이 익혀 온 것은 사당死黨(당을 위해 죽는다) 이라는 두 글자 뿐이다" 라고도 하였다.

1687년(숙종 13) 5월 1일에 영상 김수항金壽恒(1629~1689)과 좌상 이단하李端夏(1625~1689)가 새로 정승을

의망擬望할 때, 숙종은 굳이 조대비(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재종제 조사석趙師錫을 중비中批(국왕의 전격적인

특별 임명)하였다. 지경연사로 경연에 참가하였던 김만중은 "후궁 장씨의 어미가 평소에 조사석 집안과 친밀하였

으니, 대배大拜(정승의 임명)가 이 길에 연줄을 댄 것이 분명하다" 고 아뢰었다. 숙종은 김만중을 하옥하고 언근

言根(유언비어의 뿌리)을 추궁하였는데, 그는 여항의 말을 옮긴 것뿐이라고 하였다. 숙종은 "망측한 흉언으로

방자하고 무례하게 군주를 경멸했다" 는 죄목으로 9월 14일에 김만중을 선천으로 유배하였다. 이듬해 1688년

11월 1일 장희빈이 세자(경종)을 낳자 다음 날 영상 김수흥金壽興(1626~1690)이 김만중의 해배를 건의하는

차자를 올려 다음 날 11월 3일 김만중은 선천 유배에서 풀려나게 된다.

 

「첨화령기」에는 도성을 떠난 고신孤臣으 외로운 심사가 절절하게 배어 나온다. 김만중은 유배지 선천에서

화산, 즉 삼각산을 닮은 신미도를 발견하고는 두보의 「협곡에서 경물을 보고」에 나오는 "무협을 홀연 화악 바라보듯하고,

촉강을 되려 황하 보듯 하네"에서 어구를 따서 그 산 모양의 섬을 첨화령이라고 개명하였다.

숙종은 비록 김만중을 '간교하다' 라든가 '사당 두 글자 밖에 모른다' 라고 비난하였지만, 김만중은 직언을 잘하는 강직한

성품이었기에 여러 차례 귀양을 갔던 것이다. 그는 1673년(현종 14) 9월 12일에도 부수찬의 직책으로 있으면서

허적을 탄핵했다가 이듬해 1월 27일 금성에 유배되고, 그해 4월 1일에 방면된 바 있다.

 

그런데 허적은 숙종 6년인 1680년에 이르러 김석주金錫胄(1634~1684)와 결탁하여 1674년(숙종 즉위년) 자의대비

복상 문제로 일어난 제2차 예송에서 승리하여 송시열 · 김수항 등 산당山黨을 몰아내었다. 그러나 숙종은 남인 인사

들을 신임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영의정 허적은 유악油幄(어용장막御用帳幕)을 남용하는 사건을 일으켜 숙종을

격노시켰다. 숙종은 철원에 귀양 갔던 서인의 영수 김수항을 영의정으로 불러들였다. 이 때 서인 중 김석주 · 김익훈

金益勳(1619~1689) 등은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1680)이 종실의 복창군 등 3형제와 역모한다고 고발하였다.

이로써경신옥사, 혹은 경신대출척이라고 말하는 큰 옥사가 일어났다. 참으로 어지러운 시기에 김만중은 서인의

당론을 대변해야 하였으나, 사심으로 당론만 고집하였다고는 논하기 어렵다.

 

1689년(숙종 15) 정월, 송시열은 원자元子의 호를 정하는 일이 급하다고 상소했다가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

또한 숙종이 왕비 민씨를 내쫒고 장소의를 왕비로 명하는 이른바 기사환국이 있자 김만중은 직언을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국문을 받고 윤3월 7일에 남해로 유배가게 되고, 자손들마저 제주나 거제로 유배되었다.

어머니 윤씨 부인은 시름 속에 그해 겨울 사망하고 말았다. 김만중은 모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여 통곡하다

1692년 56세로 일생을 마쳤다. 그는 죽기 두 해 전인 1690년(숙종 16, 경오) 8월, 어머니에 대한 추모의 정을

「선비정경부인행장先妣貞敬夫人行戕」에 쏟았다. 그 글은 훗날 누군가의 손으로 한글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

 

여행로를 따라 견문을 기록하고 묘사와 의론을 아우르는 산문 작품을 유기遊記라 하고, 그 가운데 산천을

여행하고 엮은 기록물을 산수유기山水遊記라고 한다. 산에 오른 기록은 특히 유산록遊山綠이라 부른다.

이러한 산수유기는 지리를 논하는 실용적 관점을 담을 수도 있고, 산수 유람을 통해 정신을 육근六根(삿된

여섯가지 욕망)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체험을 기록할 수도 있으며, 산에 높은 이상을 가탁하여 정신의 운동

과정을 우의적으로 드러낼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소외되어 있는 산수를 보고, 버려져 있는 자신이나 어진

이의 모습을 연상하고 서글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김만중의 「첨화령기」는 그 어떠한 범주에소 속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 산은 그의 서글픈 처지를 위로하는 친근한 동무로서 나타나 있다.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