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유람록 <산향제山響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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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2021. 6. 21.

강세황姜世晃,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중 <화담花潭>

1757년경, 32.8×53.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강세황은 45세 되던 1757년 7월에 송도를 여행하며 16첩의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그 가운데 화담을 그린 것으로, 화담은 서경덕徐敬德의 서재가 있던 곳이다. 그림 위의 제사題詞에서는

화담 가에 있는 조대釣臺가 곧 화담 선생이 낚시하면서 유유자적하던 곳이라고 하였다.

 

 

 

 

강세황姜世晃, 「산향기山響記」

 

 

 

나는 성격상 본래 아름다운 산수를 사랑하지만, 이른 시기에 이미 우울증에 걸려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어,

한 번도 산에 올라 관람하고 싶은 바람을 실천한 적이 없고, 다만 그림 그리는 일에 흥을 부쳐 스스로 좋아하고

즐기고 있을 다름이다. 하지만 기이한 흥취와 아득한 상상이 어찌 참 산수를 즐기는 일만 하겠는가!

이것은 정말로 나의 병을 잊고 나의 바람을 보상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언젠가 책을 읽다가 구양수가 "거문고를 배워서 즐기매, 질병이 몸에 있는 것을 잊었다" 라고 한 말을 보았다.

그래서 다시 거문고에 뜻을 두어 그 한가하고 담박하며 그윽하고 아득한 음을 얻어서 그의 지향에 화답해서 나의

우울증을 흩어버릴 수가 있었다. 지난날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타자 종자기鐘子期가 그의 지향이 산과 물에 있음을

알았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대개 거문고의 소리라는 것이 또한 산수와 합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찌 하면 거문고를

끌어안고 깊은 산골짝과 이이한 바위, 날아 튀는 폭포와 격동하는 물결 사이에서 연주하여 저절로 그러한 바의

소리로 하여금 서로 화답하여 호응할 수 있으랴?

 

마침내 거처하는 작은 서재의 네 벽에 모두 산수를 그려두었다.

층층 봉우리와 겹친 산이 허공에 솟아 뚝뚝 물방울을 떨구듯 푸르고, 달리는 샘과 골짝의 시내가 구름을 뚫고

바위를 칭칭 감고 있다. 세상을 피해 은둔해 사는 사람의 집과 선관仙觀과 범궁梵宮(절)은 무성하게 자란 대숲과

교목 사이에 어른어른 비치고 반쯤 가려져 있다. 또 들판의 다리와 고기잡이 배, 유람 나온 사람들이 줄 잇는 광경,

아침저녁으로 부스스 비나 눈이 내려 어둡고 발고 한 모습과 마주하고 등진 모습이 엄연히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없다. 이른바 참 산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다만 산수의 맑은 소리가 없을 따름이다.

 

나는 때때로 거문고 줄을 튕겨 곡조를 타서 그 사이에서 궁조宮調를 고취하고 상조商調를 격동시키니,

옛 거문고 음조와 우아한 운치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맑디맑게 그것과 부합한다. 거문고 소리는 혹은 놀라

튀는 여울이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를 이루기도 하고, 혹은 가벼운 바람이 소나무에 들어가는 소리를 이루기도

하고 혹은 어부가 부르는 배따라기 노래를 이루기도 하고, 혹은 벼랑에 서 있는 절의 저녁 종소리를 이루기도

하며, 혹은 수풀 사이에 울고 가는 학의 소리를 이루기도 하고, 혹은 강물 밑에서 신음하는 용의 소리를

이루기도 한다. 무릇 산수에서 울려나는 음音 치고 구비하지 않은 것이 없다.

 

대개 이미 그 형태를 다 그려낸데다가 다시 그 음을 얻어서, 그 두 가지가 하나로 되어

홀연 그림이 그림인지 거문고 소리가 거문고 소리인지 모르게 되었다. 이러한 경지를 얻어서 바야흐로

질병을 잊고 평소의 바람을 보상받아, 마음을 평화롭게 하고 우울증을 흩어버렸다.

그러니 내가 하필 지팡이를 짚고 산에 오르기 위한 신발을 다듬어서 육신을 수고롭히고 정신을 메마르게

하면서까지 들쑥날쑥 얼키설키 험준함 산을 오른 후에야 비로소 유쾌함을 맛보아야 하겠는가?

종소문宗小文은 그가 일찍이 실제로 발로 밟아 유람하였던 곳을 방 안에 그림으로 그려두고는

"거문고를 어루만지고 곡조를 타서 뭇 산들이 모두 메아리를 치게 하련다" 라고 하였다.

정말로 나의 심경과 처지를 미리 예견한 말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내 서재에 편액을 걸기를 '산향山響(산 메아리)' 라고 하였다.

 

 

 

강세황姜世晃(1713~1791)은 본관이 진주, 자는 광지光之, 호는 첨재(忝齋)·산향재(山響齋)·박암(樸菴)·의산자(宜山子)·

견암(蠒菴)·노죽(露竹)·표암(豹菴)·표옹(豹翁)·해산정(海山亭)·무한경루(無限景樓)·홍엽상서(紅葉尙書 등이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인예술가로, 32세부터 61세까지 30여 년 동안 벼슬길을 단념하고 안산에 살면서

학문과 예술에 전념하였고, 72세 때 연행燕行 이후 예술의 세계를 확장하였다.

강세황은 조부 백년柏年, 부친 현鋧과 그 자신까지 3대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이른바 '삼세기영지가

三世耆英之家' 이다. 기로소에는 고령의 왕이나 정2품 정경 이상을 지낸 나이 일흔 이상의 문신이 들아가는데

역수각靈壽閣에 영정을 걸어주고 연회를 베풀어 주며 전답과 토지, 노비를 하사하였다.

3대가 기로소에 들어간 가문은 극히 드물다.

(중략)

 

《표암유고豹庵遺稿》에 의하면 강세황은 8세 때(1720) 숙종이 돌아가자 「구장鳩杖」이라는글을 지었고,

10세 때(1722)는 예조판서였던 부친이 도화서 취재取材(인물 선발) 를 할 때 곁에서 등급을 매겼다고 한다.

그의 예술적 재능과 감성은 25세 무렵에 서재 '산향재' 에 대해 쓴 위의 기문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동호인 시선집 《섬사편剡社編》에 수록된 시에서 '취하지 않으면 미칠 수 없고 미쳐야 바야흐로 시를 짓는다'

고 하여 자신의 분방한 예술정신을 스스로 드러내었다.

위의 「산향기」에서 강세황은 "거문고를 어루만지고 곡조를 타서 뭇 산들이 모두 메아리를 치게 하련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은 남북조시대 송나라 인물인 종병宗炳의 전기에 나온다.

(중략)

 

강세황은 61세 때야 비로소 영릉참봉이 되어 서울로 이주하였다.

71세에는 한성부 판윤에 이르고, 72세 때인 1784년에는 청나라 건륭제의 만수절을 축하하는

사행의 부사로 발탁되어 연경에 갔다. 당시 그의 글씨에 대해 건륭제는 '미하동상米下董上(미륵불 보다는

아래지만 동기창보다는 위이다' 이라고 칭찬하였고, 청나라 문인 유석암과 옹방강은 '천골개장天骨開場

(천품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라고 평가하였다. 강세황은 만년에 이를수록 자신의 예술세계를 자부하여

"왕희지의 필筆과 고개지의 화畵와 한퇴지의 문文과 두보의 시詩를 나 광지光之는 겸했다" 라고 하여

호를 '오지五之' 라고도 하였다.

 

 

 

 

 

강세황은 4폭의 자화상과 6폭의 초상화를 남겼다. 54세 때 지은 자찬묘지명인 「표암자지豹庵自誌」나

그 무렵에 그린 미완성의 <자화상>에서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는 자의식을 드러내었다.

강렬한 자의식은 70세 때인 1782년에 만든 자화상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그는 자화상의 자찬自讚 글에서 자신의 학문과 예술의 역량을 자부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 하였다.

 

 

彼何人斯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鬚眉晧白                                        수염과 눈썹은 하얗고

頂烏帽                                            머리에는 오사모(관리의 갓)를 쓰고

披野服                                            야인의 옷을 입었구나.

於以見                                            여기서 알 수 있네

心山林而名朝籍                            이름은 관리 명부에 올랐어도 마음은 산림에 있음을.   

胸藏二酉                                        가슴에는 이유二酉의 많은 서적들을 간직하였고

筆搖五嶽                                        필력은 오악五嶽을 흔들 수 있구나. 

人那得知                                        세상 사람이야 어찌 알겠는가

我自爲樂                                        나 혼자서 낙으로 삼는다.

翁年七十                                        늙은이의 나이는 일흔이며

翁號露竹                                       호는 노죽露竹이라네.

其眞自寫                                       그 화상은 자신이 그린 것이며

其贊自作                                       그 찬도 자신이 지었도다.

歲在玄黓攝提格                           때는 현익 섭제격(임인, 1782)이다.

 

 

‘姜世晃印’ ‘光止’

 

 

이유二酉는 중국 호남성에 있는 대유大酉와 소유小酉의 두 산이다.

산 아래 동굴에 천 권의 장서가 있었다는 데에서 장서가 많음을 가리키게 되었다.

강세황은 스스로의 가슴속에 이유의 장서를 품고 있다고 자부하였다. 필력도 오악을 흔들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재능을 온전히 알아주지는 못하였다.

강세황은 79세 때인 1791년의 1월 23일에 별세하기 직전에 남긴 절명구에서 

"푸른 솔은 늙지 않고, 학과 사슴이 일제히 운다." 라고 하였다.

푸른 솔 같은 선비의 고고한 기상과, 학과 사슴처럼 탈속한 자태를 지켜나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 절명구는 25세 무렵에 서재를 '산향재' 라 하였을 때부터 키 노트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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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마치며 -

 

 

정란은 만년에 성대중成大중에게 '불후첩' 의 서문을 청하자, 성대중은

정란을 마테오리치에 견주어 이렇게 말하였다.

 

 

창혜옹滄海翁(정란)이 일찍이 내 집을 찾은 적이 있다.

손님 가운데 박고博古(골동품에 밝음) 의 사람이 그를 보고 나서는 나를 마주해 말하였다.

"자네 이마두利馬竇(마테오리치)의 초상을 본 적이 있는가?

저 노인이 그와 흡사하네!:

그 손님은 전에 한 번도 창해옹을 본 적이 없었지만 창해이 관상을 보기를 이렇게 하였다.

창해옹은 더욱 흔쾌해 하며 좋아하였다. 이마두는 천하를 두루 구경했고 창해옹은 해좌海左(우리나라)

를 두루 구경하였다. 크고 작음에서 비록 차이가 있으나 두루 구경한 점은 같다.

그의 초상과 모습이 비슷한 것이 마땅하도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두루 구경함', 즉 편관偏觀을 희망하였다.

편관이란 말은 한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대인부大人賦」에서 "팔굉(우주)을 두루 관람하고

사해(천하)를 구경하노라, 아홉 강을 건너고 다섯 물을 넘노라徧覽八紘而觀四荒兮, 朅渡九江而越五河" 라고

한 말에서 나왔다. 편관을 추구한다는 것은 곧 대인大人이기를 추구한 것이다. 사마상여의 「대인부」는

《사기》의 단서 조항에 의하면 한무제가 신선을 좋아하자 제왕의 신선은 산림에 사는 바싹 마른 신선과는

다르다고 간諫하려는 의도에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장자》와 완적阮籍의 「대인선생전大人先生傳」이 말하듯이

대인이란 광대한 공간을 자유자재로 운동하는 초월자를 뜻한다.

그러한 초월의 의지를 경내의 편관이란 개념으로 환치시킨 것이

조선 지식인의 여행 의지였다고 말할 수 있다.

(후략)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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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문기행>을 옮기고 나서 

 

 

읽을만한 도서를 찾아 도서관 위 아래 층을 오가다

오늘은 별 소득이 없음을 애석해 하며 발길을 돌리던 중, 눈길이 가 닿은  한 권의 책.  

심경호 著 <산문기행>

 

 

산문散文인지! 산문山門인지? 몰라도 

일단 뭔가를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적었다는 기행紀行이라는 두 글자가 이내 구미를 당긴다.

돋보기를 걸치고 소제小題를 보아하니 <조선의 선비, 산길을 가다>이다.

 

 

한 마디로 딱 이내 취향이자, 애장서愛藏書 목록의 상위 클래스임이 분명.

집에 돌아와 득달 같이 읽어 내린 것 까지는 좋았으나, 이 후 즐거움과 지난함이 교차하게 될 줄이야.

 물경 46 회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내용을 이 자리에 옮기는 치기稚氣를 저지르고야 말았으니.

 

 

급기야는 <산문기행>의 저자로부터

댓글을 받게 되는 황송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못내 송구할 뿐.

 

 

젊은 날의 이내 꿈이자 소망은, 최소 이 땅에 산재한 산 들(북녘 포함)을 모조리 올라 보는 것이었다.

그 원을 과연 이룰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내 머리속에선 늘상 《茶泉輿地圖》(?)를 그려왔다는 사실.

그것도 산천에 대한 단순한 편린片鱗이 아닌 입체유람立體遊覽의 꿈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