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된 문학, 문학이 된 그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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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2021. 7. 25.

 

이성길, 「무이구곡도」, 비단에 수묵담채, 33.5×398.5cm, 1592, 국립중앙박물관

 

 

 

철학이나 종교는 가끔 한 시대 젊은이들의 영혼을 사로잡는다. 조선중기의 젊은 학자들이 영혼을 바쳤던 철학은

'성리학' 이었다. 성리학은 '나의 본성性이 곧 우주의 이치理' 라는 '성리性理' 의 입지에서 출발한다. 개인 우주 속

의 우주적 본성을 찾아내어 견지할 것을 요구하는 성리학은, 조선중기 학자들에게 철저한 심성수양을 요구하였고,

이른바 올곧은 선비정신을 문인문화 내면 깊숙이 자리 잡도록 하는 데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성리학을 정립시킨 중국 남송의 학자 주희는 조선의 학자들에게 '우리 주자 선생' 으로 흠모되었다.

그리하여 주자가 머물렀던 무이산武夷山 계곡을 그렸다는 「무이구곡도」는 조선중기의 학자들에게 감동을

안겨주는 그림이었다. 「무이구곡도」는 주희가 무이산 계곡에서 배를 띄우고 읊은 노래 「무이도가」와 깊은

상관성을 가진다. 조선중기의 무관 이성길이 그린 「무이구곡도」와 김홍도가 그린 몇 폭의 거작들은

조선의 대표적인 무이구곡도들이다.

 

 

주희가 머문 무이산은 중국 복건성에 자리한 수려한 산이다. 주희는 무이산의 한 자락 굽어지는 계곡에 정사를 짓고,

제자를 가르쳤고 가끔씩 뱃놀이도 즐겼다. 그가 그곳에서 뱃놀이를 하며 읊은 시가 「무이도가」이다. 그 원래의

제목을 보면, "벗들과 웃음을 나누기 위하여 장난삼아 지었노라" 라고 밝히고 있어, 심각한 의도의 작품은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무이도가」는 모두 10수로, 머리시인 1수와 계곡의 아홉 굽이를 차례로 읊은 9수로 구성된다.

즉 2수에서 그 첫 굽이-曲를 읊고 있다.

 

 

 

첫 굽이. 물가에서 고깃배에 올라타니

만정봉 그림자가 맑은 물에 잠겼어라.

구름다리 한 번 끊어진 뒤로 소식이 없고

일만 골짝 천만 바위 푸른 안개 가득하다.

 

一曲溪邊上釣船,  幔亭峰影蘸晴川.

虹橋一斷無消息,  萬壑千峰鎖翠烟.

 

 

 

'무이산' 이란 이름은 원래 '무이군武夷君' 이라는 신선의 이름에서 비롯한다. 

신선 무이군이 이 산에서 마을 사람과 멋진 향연을 벌였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무이군이 마을 사람을

잔치에 초대하였을 때, 마을 사람들은 무이군이 놓아준 '구름다리' 를 건너 산에 들었고 향연을 마치고

돌아갈 때도 그 구름다리를 탔다. 이 구름다리는 이내 불어온 비바람으로 날아가버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 말하는 구름다리는 신선이 놓았던 전설 속 다리이다.

주자는 무이산의 전설과 무이산 특유의 푸르고 짙은 안개를 서로 연결시켜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부각하여 읊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시를 읽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주자 선생께서 허황된 신선 이야기 따위로 감흥을 일으키는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구름다리가 끊어졌다는 것은, 공자와 맹자 이래 도道가 끊어진 것의 비유로

해석하였다. 하서 김인후는 "천년 동안 도가 끊어져 깨달음의 길이 잠겼는데" 라고 이 부분을 해석하여 읊었다.

조익은, 이 시에서 읊고 있는 물에 산봉우리 그림자가 잠긴 것에 대하여도, 아직 도가 선명하지 않은 상태의

비유로 보았다. 조선의 선비들은 이 노래에서, 학문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지의 상황이 어렵고 모호하다는

주자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다. 다음은 주자가 읊은 둘째 굽이二曲이다.

 

 

 

둘째 굽이. 우뚝 솟은 옥녀봉玉女峰

꽃꽂고 물가에 임했으니, 누구를 위한 단장일고?

도인은 다시 양대몽陽臺夢을 꿈꾸지 않으니

흥을 내어 앞산으로 드노라니 푸르름이 몇 겹이구나.

 

二曲亭亭玉女峰,  花臨水爲誰容.

道人不復荒臺夢,  興入前山翠幾重.

 

 

 

무이산에는 '옥녀봉' 이란 이름의 높고 날씬한 바위가 맵시있게 서 있다고 한다. 중국 《무이산지》의 기록이다.

바위 위에 꽃나무가 무성하고 여여쁜 것이 마치 여성의 머리장식 같다고 한다. '옥녀봉' 은 옥玉같이 고운 여성

단장하고 선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바위이다. 주자가 흥겹게 배에 올라 둘째 굽이를 쓰윽 돌자마자 마주친

옥녀봉이다. 이를 쳐다본 주자는 유려한 여인이 남성을 유혹하는 단장, 혹은 잠시 유혹되어도 좋을 남성까지

상상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옥녀봉의 빼어난 모습에 짐짓 흥취를 더하여 본 것일까.

 

조선의 학자들은 옥녀봉에 대한 이러한 해석에 머리를 내저었다. 그들에게 주자선생은 여성 이미지에 흥을 일으키는

따위의 짐승같은 상상을 한 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익은 인간의 물욕 중 여색女色의 해악이 가장 심하기에 도를

배우는 학자는 초반에 이것부터 경계하고 단절시켜야 한다는 것을 주자선생이 강조한 것이라 해석하였다. 고봉 기대승

은 이러한 해석에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편지에 쓰기를, 여색을 금한 후 학문을 하여야 한다면 "저는 죽을 때까지

학문을 할 날이 없을까 걱정됩니다" 라고 하였고, 이어서 이런 말은 스님에게나 할 말이지 유학자에게 할 말이 아니라고

까지 덧붙였다. 후에 이 편지를 읽게 된 조익은 수염을 서너 번 쓸어내렸다. "에헴, 평생 학문을 하신 고봉선생 소견의

그릇됨이 어쩌다가 이에 이르셨을꼬" 라 하였고, 이 글이 후배들에게 혹여 나쁜 영향을 미칠까 몹시 우려 하였다.

 

 

셋째 굽이. 그대는 가학선을 보았는가

정박한 지 몇 년인지 알 수 없도다

뽕밭이 바닷물 되니 이제 어떠한가

물거품과 바람 앞 등불에 나 스스로 가련하네.

 

三曲君看架壑船,  不知停櫂幾何年.

桑田海水今如許,  泡沫風燈堪可憐.

 

 

 

셋째 굽이의 노래에 등장하는 가학선은 오래전에 홍수로 떠내려 와 썩어 허물어진 배이다.

이것이 무이산 골짝에 걸려 있었나 보다. 배 한 척이 땅에서 썩어온 세월을 보며, 뽕나무밭이 바다로 변하는

세월의 흐름을 생각하노라면 문득 우리 인생이란 한순간의 물거품이나 바람에 흔들거리는

등불 같다는 비감이 일 것이다. 인생에 대한 보편적 슬픔이다.

 

그러나 주자를 신봉한 조선중기의 성리학자들은 주자가 이런 애상에 젖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물거품과 바람 앞 등불' 이라는 불교적 용어를 주자선생이 굳이 택한 이유를 곰곰이 따져보고 판단하였다.

"쉬이 변하는 것들의 가련함을 제시하시어 영구불변의 도를 구하는 데 힘쓰라는 주자선생의 권유가 분명하다!"

 

 

 

넷째 구비. 동쪽 서쪽 우뚝한 바위들

바위에 핀 꽃 울긋불긋 아래로 늘어졌네.

금계가 울음을 그치고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달이 빈산에 가득하고 물이 못에 가득하구나.

 

四曲東西兩石岩,  巖花垂露碧氈삼.

金鷄규罷無人識,  月滿空山水滿潭.

 

 

 

금계란 금계동 골짜기이다. 중국의 많은 학자들은 금계동의 신선 선설에 의거하여 이 시구를 이해하였다.

그러나 조익은 이 시에서 읊고 있는 고요한 달빛과 그 가운데 홀로 선 학자의 모습에서 의미를 찾아, 이제 미혹과

사욕이 극복된 밝은 도의 청정한 경지로 보았다. 훗날 조선후기의 성호선생 이익도, 달 밝고 물 맑은 모습에 대하여

자연 속의 도가 쉬지 않고 흐르는 모습이라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뒤에서 감상할 김홍도 그림으로 계승된다.

 

무이산 골짝을 따라가며 주자의 뱃노래는, 구름 이는 다섯째 굽이, 꽃이 떨어지는 여섯째 굽이, 은병정사隱屛精舍와

신선손바닥仙掌의 일곱째 굽이, 고루암 멋진 여덟째 굽이, 도원 별천지 같은 아홉째 굽이 등으로 차근차근 이어진다.

아홉째 굽이에서 주자가 그곳을 도원이라 감탄한 것은 조선의 학자들에게 실로 분분한 논의를 일으켰다. 조선의

학자들이 주자의 노래 한 편을 두고, 그 속의 도학의 의미를 찾느라 지나치게 진지한 것을 보며, 퇴계선생 이황은

주자선생의 본 뜻이 과연 그리 구구한 노설을 담았던 것일까 자문해본다. 그러나 이황의 제안도 중국 학자들처럼

선경에 대한 감흥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을 취하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학자들에게 주자선생의

「무이도가」는 도의 수양에 들어가는 철학적 입문서로 뿌리내렸다.

 

 

「무이도가」를 오랫동안 연구한 오늘날의 한 학자는 토로하였다. 

"만일 「무이도가」가 주자의 작품이 아니었더라면, 그래도 사림들이 그처럼 애호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주자의 「무이도가」는 특별난 묘미가 넘치는 시문이 아니다. 이 정도의 산수시라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주자의 노래이기에 심오한 철학시로 받아들였다. 또한 이 시의 전체를 도와 학문의 세계로 들어가는

방법과 단계를 순서대로 말해주는 비유체로 체계화시켰다.

 

우리 역사에는 완전한 철학자 주자선생이 계셨고, 우리 문학사에는 완벽한 철학시 「무이도가」가 있었다.

중국에서는 그것이 그렇지 않았다. 주희의 「무이도가」에 차운한 중국 역대 문인들의 시문이 조선의 학자들과

매우 다른 것은 이런 이유이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중반기 이래로 이전의 시들을 모아 선집選集류의 시문집을

많이 만들었는데, 이들을 찾아 살피면 주희의 「무이도가」 10수가 온전하게 실린 것이 흔치 않다.

그런데 조선의 학자들은 단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의미를 분석하였다.

 

오로지...!

그가 朱熹였기에, 성리학을 열게해준 주자선생님이었기에 ....

 

 

 

 

이성길의 「무이구곡도」 1곡, 2곡의 일부

 

 

 

 

 「무이도가」의 문학적 가치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듯이, 「무이구곡도」의 회화성도 논의될 일이

아니었다. 「무이구곡도」는 '우리 주자선생' 이 머무시며 학업하신 곳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성지가 아름답지 않더라도 성지순례는 감격적인 일이다.

 

퇴계도 일찌감치 「무이(구곡)도」에 대한 글을 여러 편 짓고 「무이도」를 어루만지며 그의 감개무량함을

토로하였다. 이후로 조선의 문사들은 어느 누구도 「무이도」 감상의 이유나 가치에 대하여 논하지 않았다.

퇴계선생이 그러하였듯, 조선의 학자들은 「무이도」를 펼쳐놓고 시공을 초월하여

주자선생 곁으로 떠나보는 마음의 여행을 누렸다.

 

현전하는 조선중기의 「무이구곡도」 중 수작으로 꼽히는 것은 이성길의 작품이다.

이성길은 병조참판을 지낸 무관이었다. 문인이나 화가가 아닌 그가 이 그림을 그린 데서

무이구곡의 감상이 조선중기에 만연하였던 사정을 엿볼 수 있다. 이 그림은 지그재그로 멋없이 반복되는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이한 구성은 「무이도가」에서 노래하는 아홉 굽이를 차근차근 감상하기 위함이다.

이성길의 이 그림은 당시에 중국으로부터 유전해온 《무이도지》에 실린 판화도의 내용을 충실하게 반영하였지만

아홉 굽이를 평면적으로 나열한 것이나 「무이도가」에 언급된 바위들을 유난히 강조한 것은 이 그림의 특성이다.

 

화면의 가장 오른편 상반부에 유난히 짙게 그려진 봉우리는 「무이도가」의 첫 굽이에서 노래한 '만정봉' 을 그린

것이다. 주자선생 뱃놀이가 여기서 시작된다. 배는 떠내려 와 첫 굽이를 넘어가려 한다. 이 배가 그림의 상단으로

흘러 올라가 둘째 굽이로 넘어 내려올 때 그 오른편에 우뚝 선 '옥녀봉' 을 만난다. 배를 대고 이 봉우리를 구경하는

선생의 모습이 그림에 담겼다. 일곱째 굽이의 선장(신선의 손바닥) 바위도 눈에 띄게 큼직하다. 옛 문인들은

이 그림 속에서 주자선생이 다니는 모습을 확인하며, 「무이도가」 아홉 굽이를 느긋하게 감상하였을 것이다.

 

 

 

 

 

강세황, 「무이구곡도」,종이에 수묵담채, 25.5×406.8cm, 국립중앙박물관

 

 

 

조선후기 강세황은 「무이구곡도」를 그리고 그 위에 「무이도가」 시들을

굽이굽이 적어 넣었고, 무이산의 봉우리 이름들까지 적어 넣었다.

 

조선중기 젊은 학자들을 사로잡았던 성리학은 굳건한 사회 전통으로 성립되어 조선후기로 전달되었지만,

조선후기의 총명한 학자들은 조선중기의 도학적 열기로부터 점점 멀어져갔다. 이들은 서양식 우주관을

터득하였고, 그것이 주자의 말과 같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또한 도를 담은 문장보다는 개인의 취향과

감정이 담긴 문체를 선호하기 시작하였다.

 

정조대왕은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호된 금지령을 내렸다. 정조의 태도에 대하여는 정치적 해석도 있지만,

정조가 고전적 문예 취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대체적으로 사실이다. 정조가 모범적 문체의 하나로 제시한

것이 주자의 「무이도가」였다. 궁정화가 김홍도의 거작들 중 주자의 시문을 담은 작품들이 적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정조의 뜻이 반영된 것이다.

 

 

 

 

김홍도, 「월만수만」, 《주부자시의도朱夫子詩意圖》 8폭 중,

125.0×40.5cm, 1800, 개인 소장

 

 

 

김홍도가 그린 두 폭의 그림을 더하여 감상해보도록 하겠다. 그 하나는 「월만수만月滿水晩」이다.

앞에서 감상한 「무이도가」 넷째 굽이의 마지막 구절, "달이 빈산에 가득하고 물이 못에 가득하구나" 를

기억한다면, 이 그림의 제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조선의 학자들은 이 구절에 대하여 도가 흐르는 고고한

경지로 해석하였기에, 이러한 경지를 그려내고자 김홍도는 달과 물의 단조로운 구성에 밝은 달 맑은 물이

충만한 장면을 표현하였다. 그림 위에는 주자의 「무이도가」 넷째 굽이 전편에 적혀 있다. 이 그림에 주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그의 철학에 대한 지고한 존경은 지극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 학자 이익은

「무이도가의 제4곡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읊었다. "달이 절로 산에 있고 물이 절로 못에 있어 말고 밝음을

그치지 않거늘, 이를 보고 깨닫는 사람이 없더니 오직 이곳을 직접 가서 보고 비로소 깨닫는구나."

 

 

 

 

김홍도, 「무이귀도」, 《고사인물도》, 종이에 담채, 111.9×52.6cm, 간송미술관

 

 

 

 

또 다른 김홍도의 그림은 「무이귀도武夷歸悼(무이계곡에서 노 저어 돌아오다)」 이다.

앞에서 본 조선중기 학자들의 도학적 해설을 따르면, 무이의 뱃놀이는 단계적으로 아홉 굽이를 거쳐

도에 이르는 과정이었기에, 돌아오는 장면이라면 도를 터득하고 돌아오는 경지를 뜻한다.

학문이 높아지고 가슴이 활짝 열린 경지이다. 그림에서 바람을 가르며 시원스럽게 돌아오는

주자선생을 만나볼 수 있다.

 

김홍도의 그림은 이성길의 그림과 사뭇 다르다.

조선중기 이성길이 《무이도지》를 꼼꼼하게 익혀 삼가 무이구곡의 곳곳을 빠짐없이 보여주는 데

급급하고 성실했다면, 조선후기 김홍도의 그림은 도의 터득에 대한 심미적 멋의 표현에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무이구곡' 이란 도가 가득 찬 세계이며 학자들이 전범으로 삼아야 할 정신세계라는 군왕의 주장을 힘껏 전달

하기 위하여, 화가 김홍도는 무이산의 산 주름과 계곡물의 잔 파장까지 기량껏 호쾌하게 표현한 듯하다.

 

 

 

인용: 고연희 著 <그림, 문학에 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