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된 문학, 문학이 된 그림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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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2021. 7. 29.

김홍도, 「송하취생도」, 종이에 담채, 109.0×55.0cm, 고려대학교

 

 

 

 

「송하취생」은 김홍도의 많은 걸작들 중에서도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소나무 아래 신선이 앉아 생황을 부는 장면으로, 구도가 매우 단순하지만 소나무와 소년이 또렸이

부각되어 있고, 붓질에는 힘이 넘친다. 생황의 가락을 전달하는 대화가다운 필력이다.

 

이 그림 위에 적힌 시는 당나라 8세기의 시인 나업의 「제생」이다.

이 시에 담긴 생황 연주자의 전설을 읽노라면, 생황가락의 신비로움과 맑음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그림 속 생황 연주자가 신선이 된 왕자, 왕자진王子晉인 것을 알 수 있고, 그림 속 생황가락은

서늘한 가을저녁 왕자의 자리를 떠나는 작별곡이자 신선의 세계로 오르는 서곡인 것을 알 수 있다.

 

 

 

 

 

 

 

 

생황이란 어떤 악기인가?

조선후기 학자 홍대용이 우리가 이해하기 좋은 설명을 남겨주었다.

 

 

생황에 꽂힌 대나무관은 열네 개인 것도 있고 열일곱 개인 것도 있다.

대나무관들은 길이가 달라 맑은 소리를 내기도 하고 탁한 소리를 내기도 한다. ·····

대나무괸은 통에 박는데, 이 통을 예전에는 표주박으로 만들었으나 지금은 나무를 파고 칠을 하여 만든다.

이 통을 백동白銅으로 만들면 소리가 더 좋다.옆으로 난 구멍을 불면 대나무관들이 울리면서

소리가 난다. 숨을 내쉬기도 하고 들이마시기도 하면서 소리를 낸다.

 

- 홍대용, 《악기(樂記)》 중에서

 

 

옛날에는 악기를 재료에 따라 분류하였다. 금金(금속), 석石(돌), 사絲(끈), 죽粥(대나무), 포匏(박), 토土(흙),

혁革(가죽), 목木(나무)의 여덟 가지이다. 생황은 원래 표주박으로 만드는 악기라 여덟 가지 중 '포匏'에 속했다.

홍대용의 위 설명과 같다. 그러나 오늘날 박물관에 전시된 조선시대 생황들을 보면 대개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당시 지식인들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으므로 이러한 사정을 늘 헤아리고 있었다. 정약용이 만든

문제지 「책문策問」을 보면 생황이 원래 '포' 에 분류되는데 왜 당시에는 나무통을 쓰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라는 주제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생황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소리가 울리는 관, '황엽簧葉' 이다. 홍대용이 또한 위의 글에서 설명하기를,

"황엽은 매미의 날개처럼 가볍고 얇다" 고 하였다. 황엽은 금엽金葉이라고도 하였고, 우리말로 '혀' 라 불렀다.

황엽의 제조법은 매우 까다로웠던 모양이다. 조선시대에는 빈번히 중국에서 생황을 사들였는데 이유는 이 황엽을

만들지 못해서였다. 이에 대하여 조선의 학자들은 여러 차례 불만을 표하였고, 조선 왕실에서는 번번이 황엽

제조법을 중국에서 배워오도록 하였다. 이런 사정을 알고 중국의 예전 기록에서 "고려에는 금과 은이 적고

구리가 많이나므로" 중국의 일부 지역에서 생황의 황엽은 반드시 고려의 구리로 만들었다는

내용을 읽으면, 몹시 억울한 마음이 든다.

 

생황은 입으로 부는 악기들 중 유일하게 화음을 만드는 악기라 중요했다. 울림판 위로

관이 열댓 개이니 여러 구멍을 함께 막아 화음을 만드는 이치이다. 생황은 그 소리의 울림이 좋아,

아악이며 풍류방 연주에 빠지지 않는 악기가 되었다. 조선후기의 그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황 연주 장면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중국 당나라의 시인 나업의 「제생」에는 생황에 얽힌 전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봉의 날개같이 들쭉날쭉 대나무관,

용의 울음보다 애절하게 월당을 울리네.

섬섬옥수 가볍게 움직이리니,

취하여 드리는 넘실대는 술잔을 보시리.

구령에서 홀로 묘한 곡조 잘 하였고,

영대에서 함께 맑은 소리 불었다지.

궁징의 음조로 부채노래 짝하기 좋으니,

낯선 소리로 어지러운 정위음악 만들지 마시길.

 

筠管參差排鳳翅,  月堂淒切勝龍吟.

最宜輕動纖纖玉,  醉送當觀灩灩金.

緱嶺獨能征妙曲,  嬴台相共吹清音.

好將宮征陪歌扇,  莫遣新聲鄭衛侵.

 

 

 

처음 두 구는 봉과 용으로 비유된 생황의 모습과 소리의 묘사이다.

대나무관의 들쭉날쭉함은 봉황의 날개같다고 하였다.

모양이 들쭉날쭉하기로 친다면 참새 날개나 메추리 날개도 그러할 것이지만

봉의 날개라야 고상한 악기에 잘 어울렸을 것이다.

'월당月堂' 은 달빛 비추는 건물을 말한다. '처절凄切' 하다는 것은 애절하게 울린다는 뜻이다.

달밤의 정적 속에서 그 소리는 더욱 멀리 애절하였을 것이다.

이 소리는 '용음龍吟' , 즉 용의 울음보다 크게 울린다.

용음은 울림의 공명이 큰 소리라, 군왕의 어명御命도 용음이라 하였다.

이렇게 시작하는 두 구절은 생황을 근사하게 묘사한다. 그 모습은 봉황의 날개요,

그 소리는 용의 울음이다.

 

'구령緱嶺' 은 중극 숭산의 한 고개이다. 이곳에서 주周의 태자 진晉이 생황을 불며 학을 타고

신선이 되어 올랐다는 전설이 있다. '영대嬴台' 는 춘추시대 진 목공이 딸 농욱을 위하여 지어준 누대의 이름이다.

농욱이 남편 소사와 함께 영대에서 생황과 퉁소로 듀엣을 연주하면 공작과 봉황이 모여들었다.

농욱과 소사는 새를 타고 하늘로 올라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영대에는 또한 신라 소녀 설요의 이야기가 얽혀 있다. 설요는 당나라에 들어가 신선의 도를 꿈꾸며 노래를 지었다.

그 노래가 기록되어 전한다. 신라 소녀 설요는 옥처럼 아리따웠다고 한다. 궁징宮徵은 동양의 오음五音,

궁상각치우에서 취한 이름이며, 정위鄭衛는 음란하여 좋지 않은 음악을 말한다.

 

 

 

 

 

「송하취생도」의 세부

 

 

 

 

김홍도의 이 그림 속 생황 연주자는 구령에서 노닌 왕자 진晉이다.

왕자 진은 중국 주나라의 태자로 태어났으나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산수에만 뜻이 있었다.

산수를 노닐던 그는 열다섯 살에 도사를 만나 생황을 배웠다. 그 다음 해 7월 7이(음력) 밤

왕자진은 부모님께 작별인사를 드리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랐다. 이때 왕자 진은

생황을 연주하며 눈같이 흰 학을 타고 날아갔다고 한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는 "왕자진의 사당 앞, 산에 뜬 달이 밝으면, 사람들이 종종 생황 부는 소리를 듣는다네"

라고 읊었다. 구령의 왕자진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으나 구령에 달 뜬 밤이면 음악이 울려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 후로 사람들은 어디선가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들리면 흔히 '구령의 생황 연주' 라 한다.

 

그런가 하면, 조선초기 유학자 어세겸은 「자진이여, 돌아오라!」를 지어 왕자진을 꾸짖었다.

과연 근엄한 유학자답게, 왕자의 신분으로 왕실과 부모를 모두 버리고 훌쩍 신선계로 오른 왕자진을 심하게

꾸짖고 있다. 충효의 바른 길을 버리고 훌쩍 신선계로 떠나가 서왕모가 따라주는 술이나 얻어 마시며 다니는 것은

잘못이라 지적하고 이제 하늘을 헤매는 짓을 그만하고 어서 고국으로 돌아와 조정과 민생을 보살피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의 많은 문인들은 대개 왕자진의 이야기를 신비로운 신선의 전설로 받아들였고,

그의 생황 연주를 가장 아름다운 음악소리로 상상하여 시를 읊었다.

 

김홍도의 그림 속 연주자를 보면, 머리를 갈라 동글게 말아 올린 헤어스타일로 그가 아직 나이 어린 중국 소년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백학이 날아들면 날아갈 양, 이 소년은 이미 신선의 깃털 옷 우의羽衣를 입고 있다.

양끝이 살짝 오른 봉황형 눈매가 무척 인상적이다. 소년 신선의 이러한 눈매는,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속세를 등한시했던 특별한 고상함과 음악신동의 총민함을 표현하는 듯하다.

 

 

 

 

 

「송하취생도」의 세부도

 

 

 

그림 속 생황 연주의 무대는 소나무 아래이다.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 「감흥感興」의

"생황을 불어 솔바람 타고" 도 이러한 소리의 영상을 반영하고 있다.

생황의 가락은 솔잎의 향기에 어울려 그 푸르름이 짙어진다.

그림 속 소나무 등걸 오른편 곁에는 앞에서 살핀 나업의 시 첫 두 구가 걸려 있다.

 

봉의 날개같이 들쭉날쭉 대나무관에서

용의 울음보다 애절함이 월당을 울리네.

 

筠管參差排鳳翅,  月堂淒切勝龍吟.

 

 

 

봉의 날개같은 생황에서 용의 울음 같은 공명의 번짐이다.

시의 두 구만이 간단히 올라 있을 뿐이지만 이 구절은 시 속에 담긴 전설로 감상자의 상상을 인도한다.

우리는 이 시의 기억 속에서 그림 속 생황소리를 전달하는 솔바람을 느낄 수 있다.

연주자 왕자진이 신선이 되어 오르던 날은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밤(음력 7월)이었다.

또한 이 시의 기억 속에서 영대에 얽힌 음악소녀들의 발랄한 성품과

그들이 연주했던 천상의 소리를 상상하게 된다.

그들의 음악소리는 저 먼 중국 어느 곳 옛 전설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일찍이 봉래선생 양사언이 금강산에 올라 흥에 겨웠을 때

"학 위의 생황 연주에 천지가 늙어가네" 라는 시구를 금강산의 돌 벽에 새겼다.

우리나라 어디서건 산수가 멋지고 흥이 오르면 소년 신선 왕자진의 연주소리가 귀에 울렸다.

위 시구가 얹힌 김홍도의 또 다른 생황 그림으로 「파초생황도가 전한다」.

 

 

 

 

 

김양기, 「월하취생도」 종이에 담채, 20.5×25.3cm, 건국대박물관

 

 

 

파초 잎 위에 쪼그리고 앉은 선비가 저도 몰래 문득 연주에 심취한 모양이다.

생황에서 울리는 소리는 어느덧 "용의 울음보다 애절함이 월당을 울리네月堂淒切勝龍吟" 라고

화면 위에 큼직하게 적혀 있다. 김홍도의 아들 긍원 김양기가 이를 다시 그린 작품이 있다.

김양기의 그림은 「월하취생도月下吹笙圖(달 아래 생황을 부노라)」라는 제목으로 전하고 있다.

 

 

 

 

최북, 「계류도」, 종이에 담채, 28.7×33.3cm, 고려대박물관

 

 

 

신라 문인 최치원의 시 한 구절이 최북의 그림 위에 실려 있다.

이 그림에 실린 최치원의 시 「제가야산독서당」은 그가 말년을 가야산에서 보내며 지은 시로,

계곡의 물소리를 읊고 있다. 조선의 많은 문인들이 이 시에 차운하며

최치원의 문학적 재능과 그의 삶을 기억하였다.

 

최북의 이 그림은 「제가야산독서당」에 부친  조선시대 많은 차운시次韻詩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원시原詩의 뜻과 운을 그림으로 담아낸 그림 차운시쯤 될 만하다는 뜻이다.

외로운 시인의 귀를 울리고 마음을 울렸던 가야산의 물소리를,

최북은 이 그림 속 물줄기에 반영하고자 하였다.

 

 

신라시대 최치원은 열두 살 나이로 중국행 배에 오른 어린 유학생이었다.

그는 낙양의 학원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하여 열여덟 살에 외국인을 위한 과거 빈공과에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스무 살에는 중국의 관직을 받았다. 또한 「격황소서檄黃巢書」의 힘찬 문장으로

중국 문인들을 감동시켰고, 당 황제로부터 금옥대도 하사받았다. 이러한 최치원의 업적은

한국의 한문학사 제1장에 기록되어 있는 일이다.

 

그의 삶에 대하여는 해석이 분분하다. 최치원의 출국 이유는 그가 육두품 출신이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신라의 엄격한 신분제도 때문에 육두품 출신은 진골귀족의 등급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런데 최치원은 중국에 가서

관직도 받고 문명文名도 떨치던 스물아홉 살에 신라로 돌아왔다. 그가 귀국한 이유는 무었일까. 중국에서의 성공이

신라에서의 신분을 바꾸어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신라에 잠시 머물다가 중국으로 돌아갈 요량이었으리라는 연구

도 있다. 그러나 최치원은 이후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리고 육두품으로서 받을 수 있

는 가장 높은 벼슬 아찬이 되어 근무하였다. 그렇게 10년을 보낸 후, 서른아홉 살에 가족들과 가야산에 들어갔고,

후 인간세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되었다고 하였다.

 

최치원이 마지막에 머물렀던 곳은 가야산의 계곡 홍류동이며 이 계곡에서 최치원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이후 수많은 문인들이 차운해준 매우 유명한 시이다. 최북의 「계류도」에는 이 시의 3구와 4구가 옮겨져 있다.

 

 

첩첩 바위 겹겹 산봉을 미친 듯 품으며 울리니,

지척의 사람 말도 분간하기 어렵구나.

도리어 두려운 건 시비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이라,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 감싸게 하였던가.

 

 

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최치원, 「제가야산독서당」

 

 

 

가야산의 물소리가 얼마나 크게 울렸기에,

바위와 산을 모두 울리며 미친듯 품어 댔다고 최치원은 읊고 있을까.

그 물소리가 매우 커서 곁에 있는 사람의 말소리도 들을 수 없다고 한다. 

곁에 있는 사람의 말도 안 들리니  저산 밖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말이 들릴 리 없다.

이 커다란 물소리는 시인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사람들의 시비소리를 듣는 것에 대한 시인의 두려움이다.

'시비是非' 라 표현된 사람들의 소리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시비비의  소리이며, 세상 사람들이

왈가왈부하며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소리이다. 시인이 듣기에는 시끄러운 소리이다.

최치원은, 물소리가 온 산을 둘러준 듯 사람소리 들리지 않는 것을 고맙게 여기면서,

짐짓 물소리만 들으려 한다. 이 '물소리' 는 시비로 떠들썩한 저곳과 고요한 산속의 이곳을

갈라주기에, 시인은 이 '물소리' 로 스스로를 산 속 깊숙이 유폐시키고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

이것이, 그가 산에 머문 이유이다.

 

 

우리 땅에 잠시 머물다 간 최치원이지만,

그의 삶과 시문에 대한 평가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심한 부침을 겪었다.

최치원 사후 그에 대한 이야기는 신화처럼 세상에 떠돌았다.

고려의 정부에서는 이러한 최치원의 명망을 이용하여 최치원이 고려의 창건을 내밀히 도왔다는

내용의 글을 지어내고 최치원 사당을 잘 만들어 숭상하였다. 한편 조선의 유학자 퇴계선생 이황이 최치원을

'불교에 아첨한 인물' 이라 비난한 것은 기록할 만한 사건이었다. 전국의 유생들이 최치원의 문묘배향을 모두

철거하자는 상소를 올렸고, 그러자 불교계가 맞섰다. 서산대사가 최치원을 보호하고자 나섰다.

이후 최치원이 불교계의 일맥을 이끄는 역사가 만들어졌다.

 

그런 한편, 조선전기 김종직이 최치원의 시를 차운하고, 훗날 허균이 최치원의 시를 칭송하고,

또한 송시열의 《송자대전》에도 최치원의 바로 위 시가 다시 기록된 것 등을 또한 보면, 조선시대 시문학의

정통에 자리한 최치원의 우뚝한 지위는 나름의 자리를 지켜가고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의 모든 한국 한문학사 서술에서 최치원은 우리 한문학의 으뜸 선배의 위치에 올려져 있다.

 

조선중기에 한강선생 정구가 가야산에 올랐다. 1579년 늦가을이었다.

가야산 계곡에 물이 흐르고 있었다.

산에든 둘째 날 그는 계곡의 바위에 사람들이 새기고 간 이름들을 바라보다가

최치원의 시구 중 두어 글자가 희미하게 남은 것을 찾아낸다.

그는 이 두 글자로 미루어 알 수 있는 최치원의 원래 시를 읊조렸다.

그 시가 바로 앞에 소개한 「제가야산독서당」이다.

정구의 「가야산유람기록」에는 최치원의 이 시 전문이 다시 실려 있다.

19세기 문인 강준흠은 시에 얽힌 일화들을 모아 긴 책을 엮었는데

최치원의 시로 이 책을 시작하였다. 거기 제시된 시가 「제가야산독서당」이다.

그는 이 시가 가야산 무릉교 옆 바위에 새겨져 있다고 하였다.

 

오늘날, 가야산 홍류동 계곡을 찾아가 보면, 작은 정자 농산정이 새롭게 단장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농산정은 17세기의 김수증이 머물고자 세운 정자이며, 이 시의 끝 두 글자로 이름을 삼은 것이다.

근처의 큰 도로변 바위에는 제법 세월이 묻어나는 흔적으로 최치원의 위 두 시가 새겨져 있다.

이 바위가 곧 정구선생이 어루만진 바위이고, 강준흠이 기록한 바위일까.

누군가에 의해 새로 새겨진 것일까.

시가 새겨진 곁에 '우암서尤庵書' 라 새겨져 있어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 바위글씨가 우암선생 송시열의 필적이라 한다.

최치원의 가야산 시가 이렇게 유명해, 이 시의 운에 부쳐진 차운시가 그리 많았던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최치원의 이 시를 읊으며 대개 최치원의 비범한 재능을

애통해하였고, 많은 경우 신선이 되어간 그의 전설을 미화하였다.

드물게는 유학적이지 못한 최치원의 태도를 의론하여. 자시의 엄격성을 과시해 보였다.

 

 

 

 

최북, 「계류도」의 세부도

 

 

 

최북이 그린 「계류도」에 최치원의 시 「제가야산독서당」이 적혀 있다. 이 그림은 가야산 계곡

홍류동을 흐르던 신라의 물소리를 그린 것이며, 그 곁에 있었던 최치원의 마음을 담은 것이다.

최북은 최치원의 원래 시 중 3,4구만을 적어 넣었다. 눈에 띄는 것은 농聾(귀먹게 하다)을 먼저 쓰고 난 후

그 곁에 농籠(두루다)을 다시 적은 것이다. 이미 조선의 학자들이 최치원의 원시를 쓸 때에도 종종

'귀먹게 할 농聾'을 사용하던 터였다. 농聾을 쓰면, 물소리가 산을 '둘러' 보호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물소리가 아예 산을 '귀머거리로 만들었다' 는 뜻이 된다.

그림 위에 이 두 글자를 다 적어놓아이렇게도 읽어보고 저렇게도 읽어보며 시인의 뜻을 살려두려는

배려가 아니었을까. 단순히 실수를 인정하는 교정의 표시로는 보이지 않는다.

 

최치원이 산에서 읊은 것은 오직 물소리분이었듯이, 최북이 이 그림에 그린 것도 오직 물줄기 뿐이다.

그림 속 물줄기는 화면의 중앙에서 내려오며 화면의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흐른다.

그 나머지山를 모두 제거한 최북의 대담한 구성은 물소리의 청각만을 그린 시각언어의 제작의도를 보여준다.

그런데 최북의 그림 속 계곡물은 왜 이리 쓸쓸하고 서늘하기만 할까.

물가 바위는 젖어 검은색이 짙고 검은색 바위 곁에는 제법 푸른색을 베풀어 물소리마저 푸르게 들릴 뿐

최치원의 시에서의 미친 듯 큰 소리로 뿜어대는 물, 귀 먹도록 요란한 물로는 보이지 않는다.

최북이 그린 그림 속에는 맑고 푸른 가을물이 가슴 시리도록 시원스럽게 흘러내릴 뿐이다.

 

최치원은 신라에서 꿈을 펼칠 수 없었기에 조국을 떠났다. 그는 당나라 과거에 합격하였지만,

그것은 외국인을 위한 과거였고 그는 여전히 외국인이었다. 조국에 돌아와 공헌을 해보려 하지만

신분의 벽은 두꺼웠고 그가 올린 시무책은 실행되지 않았다. 게다가 당나라에서 벼슬했다는 그의 자부심과

중국에서 보낸 젊은 시절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조차 조국 땅에서의 그 자신을 영원한 이방인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최치원은 재능있는 문인이며 의지 굳센 한 인간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성공한듯했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자장 큰 한계를 뚫고 신선이 되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최치원이 신선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중극 신선들의 허황하고 호탕한 이야기들과는 매우 다르게 들린다.

그가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에는 인간계의 영원한 이방인이었던 삶의 고뇌가 짙게 배어나기 때문이다.

 

최치원의 삶과 전설에 대하여 18세기 화가 최북은 각별한 애정을 가졌음직하다.광기의 기질로 유명한

화가였지만, 최북은 스스로 시를 써서 감추어 두고 호생관 자호를 귀하게 사용하면서

누가 물으면 붓으로 먹고살아 호생관이라고 소리 질렀다는 그런 인물이다.

자존과 외로움을 알았던 최북은 최치원의 그 마음을 알았나 보다.

미친 듯 뿜었다는 물소리란 산속의 고요함을 말해 주는 것이고 또한 산속에 홀로 있는 시인의 외로움을

말해주는 것을, 시인이 시에서 읊는 물소리가 크면 클수록 시인 내면의 적막과 외로움이 컸다는 것을

화가 최북이 알았나 보다. "마음 그리 외롭고 산속 그리 적막하니 물소리가 그리 크다 하신 게야.

오죽하면 이깟 물소리에 산이 귀 잡수겠다 하셨을까" 라고 중얼거리며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이 그림 속 계곡에는 최치원이 바라보았던 그 물이 흐르고 있다고,

그 물도 이렇게 쓸쓸하고 서늘했을 것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최북은 가야산 계곡에서 말년을 보내던 최치원 곁에서 하염없이 흘러내렸던 물,

산속 계곡의 맑고 시린 물을 화폭에 담았다.

 

 

 

인용: 고연희 著 <그림, 문학에 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