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역사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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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2021. 10. 2.

존 F. 케네디의 취임 연설

John F. Kennedy' s Inaugural Address · 젊은 대통령. 미국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다.

 

1961년

 

매혹적인 새 대통령이 새로운 세대를 위한 횃불을 들고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연설을 행했다.

링컨의 어조와 성경에서 인용한 언어를 취한 그의 연설에서는 젊은 이상주의, 역사의식,

강력한 아이디어와 상승의 수사가 배어 나왔다.

 

 

 

 

손으로 쓴 케네디의 취임 연설 원고.

1961년 워싱턴의 국회의사당에서 연설하기 사흘 전에 작성됐다.

 

 

맑기는 했지만 추위가 혹독했던 1월의 어느 날. 존 F. 캐네디는 8천만 명의 미국인들이 텔레비전 생중계로 지켜보는

행사에서 제35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젊은 케네디는 2개월 동안 연설문을 작성했다. 노란색 메모지에 메모하고

연설 작성 책임자 테드 소렌슨과 함께 메시지와 원고를 교환했다. 소렌슨은 케네디의 최고 보좌진으로부터 놀랄 만한

아이디어와 유려한 표현들을 끌어 모았다. 두 사람은 완벽한 이미지와 어조를 만들어내기 위해

문장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였다.

 

결과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채용한 기억할 만한 문구들로 이루어진 걸작이었다. 

"두려움과 타협하지 맙시다. 그러나 타협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와 같은 테네디의 문장들은 하버드의 경제학자

존 테네스 갤브레이스의 제안과 비슷했으며, "만약 자유로운 사회가 많은 빈민들을 도울 수 없다면, 소수의 부자도

구할 수 없습니다" 등의 문장은 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애들레이 스티븐슨 2세의 문장을 살짝 바꾸어놓은 것이다.

 

또한 솜씨 있는 수사적 장치들과 인상적인 문장 구조들을 활용해서 만들어낸 케네디의 연설문은 특유의 고전적 형식

으로 메시지들을 전하게 될 것이었다. 국가적 전통과 이상에 대한 감정을 자극하는 고양된 언어를 사용해서, 케네디는

공동선을 위해 시민들이 함께 일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온 국민에게 알립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든 불행이든 관계없이, 우리는 자유의 존속과 승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도 치를 것이며, 어떤 부담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친구를 도우며, 어떤

적에게도 대적할 것이라는 걸 말입니다. (···) 이 모든 것이 대통령 취임 후 100일 동안에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 지구 상에서 우리의 수명이 다해도 끝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시작해야 합니다. (···)

이제 나팔이 울리며 다시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무장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전투를 요구하는 외침도

아닙니다. 언제나 오랜 황혼녘 투쟁, 곧 '희망에 기뻐하며' 고난을 감내하며 인간의 공통된 적에 맞선

투쟁, 독재, 가난, 질병 그리고 전쟁 자체에 맞선 투쟁의 짐을 지라는 부름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동료 미국인들이여, 나라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묻지 말고,

당신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물으십시오.

 

비록 연설문의 길이는 1천 364개 단어에 지나지 않아 역대 취임 연설로는 가장 짧았지만,

대담한 생각과 날카로운 대조, 강력한 문구가 넘쳐나면서 역대 취임 연설 가운데 가장 강렬했다.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어 유명한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은 원본 문서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시안과 보조 문서철들이 케네디 도서관과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보관되어 있다.

 

 

 

 

비틀스와 EMI의 음반 계약

Beatles' Recording Contract with EMI · 비틀즈, 전설의 시작

 

1962년

 

리버플 노동 계급 출신 뮤지션 네 명이 EMI와 음반 제작 계약에 서명했을 때

(그 가운데 두 사람은 너무 어려 부모의동의가 필요할 정도였지만) 그 계약이

관련자 모두에게는 물론이고, 음악계에 어떤 의미일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계약서

비틀즈 멤버 네 명과 21세 미만으로 부모의 동의가 필요했던 두 사람의 아버지들이 서명했다.

밴드 멤버, EMI 임원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1962년 10월 1일에 EMI의 음반 제작자 조지 마틴은 훗날 '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의 하나'로 여겨지게 될

계약서를 코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과 자신이 '다섯 번째 비틀스 멤버'로 알려지게 될 것을 알지 못한 채 비틀스

(뭐라고 부른다고? 아, 그래 맞다, '비틀스'''')로 알려진 대중음악의 밴드와 새 음반계약서에 서명하기 위해 팔을 뻗었다.

 

런던의 세인트존스 우드의 애비로드 3번가에 본부를 두고 음반 제작과 출판업으로 승승장구하는 안정적인 회사의

최고경영자로서 마틴은 6월 이후 엄격한 오디션 과정을 통해 그 밴드를 선발했다. 당시 그들의 매니저였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EMI의 다른 세 레이블로부터 모두 거절당한 후 자신의 고객이었던 존 윈스턴 레논, 제임스 폴 매카트니,

조지해리슨, 리처드 스타키(일명 링고 스타)가 EMI의 팔라폰 레이블에서 연주하는 문제로 협상을 벌였다. 당시 그

계약이 오늘날 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음악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동업으로 평가받게 되리라는 것을 안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랬다.

 

비틀스 멤버 네 사람이 10월 계약서에 서명했고, 조지 해리슨과 폴 매카트니의 아버지도 서명했다.

두 사람이 만 스물한 살이 안 되었기 때문에 부모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리고 계약서에서 비틀스는 밴드가 얼마나 버는

지에 따라 엡스타인(NEMS 엔터프라이즈 사)에게 그들이 벌어들인 수입의 15%, 20%, 25%를 지불하는 데 동의했다.

비틀스는 그런 다음 각종 비용을 제한 후 모든 수입을 똑같이 나누기로 했다.

 

흥미롭게도 비틀스는 이미 1월 24일에 엡스타인과 매니저 계약에 서명했지만, 엡스타인은 서명을 미루고 있었다.

네 젊은이를 도울 만큼 믿음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훗날 엡스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이

나아질 거라고 느껴지면 그들을 의무에서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밴드는 혜성처럼 등장했다. 10월 계약서에 서명하고나서 나흘만에 EMI는 첫 번째 싱글 "러브 니 두Love Me Do'를

발표했고, 영국 차트 17위에 올랐다. 다음은 "플리즈 플리즈 미Pleace Pleace Me'로 2위를, 연말에는 세 곡,

프롬 미 투 유From Me to You" "쉬 러브즈 유She Loves You" 그리고 아이 원트 투 홀트 유어 핸드

I Want to Hold You Hand" 모두 1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EMI의 다른 성공도 혜성과 같았다.

1963년 영국에서 1위를 기록한 열아홉 곡 가운데 열다섯 곳이 EMI 곡이었으며, 다음 해에는

EMI 소속 음악가 여덟 명이 41주 동안 1위를 차지했다. '영국 침공British invasion'이 진행 중이었다.

타자기로 작성된 8쪽 분량의 10월 계약서 복사본이 2008년 런던에서 25만 파운드(48만 달러)에 경매

되었다. 2014년에 비버리힐스포운의 리얼리티 쇼 배우 요시 디나가 그 문서를 손에 넣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내게는 꿈이 있습니다"

Martin Luther King, "I Have a Dream" · 20세기 미국의 가장 위대한 연설

 

1963년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평화 시위를 이끈 미국 최고의 흑인 인권운동가는 만인을 위한 자유와 정의에 대한 주장을

지지해 달라고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그런데 그의 탁월한 웅변술이 담긴 문서의 원본은 어떻게 되었을까?

 

 

뉴욕 소더비에 전시된 킹의 유명한 연설 원고, 이 원고는 애틀란타의 모어하우스 칼리지가

구입한 마틴 루터 킹 소장본의 일부로, 2006년 3천 200만 달러에 판매되었다.

 

 

1963년 8월 28일 링컨기념관 계단에서 마이크를 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성장 중인 미국 민권 운동 사례를

설파했다. 일자리와 자유를 위해 워싱턴으로 향하는 행진에 참가한 25만 명 이상의 군중과 주요 언론사에서

파견된 수십 명의 기자와 방송인들이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에 귀 기울였다.

 

청중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가 읽고 있는 3쪽 분량의 타자된 문서를 볼 수 없었다.

모든 이가 자신들이 듣고 있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킹은 100년 전 수백만 명의 노예를 해방시켰던 노예해방 선언을 적절히 언급하며 연설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수치스러운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하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링컨, 성경, 독립선언문, 국기에 대한 맹세 등의 다른 고전적 작품들에서 인용한 화려한 표현들을

사용하면서, 킹 목사는 솜씨 있는 수사적 장치들도 한껏 담아냈다.

 

그러나 킹의 말에 힘이 없다는 것을 감지한 열정적인 가스펠 가수 마할리아 잭슨이 외쳤다.

"사람들에게 꿈에 관해 말해줘요, 마틴!" 그녀는 킹 목사가 최근 연설에서 말한 감동적인 문구를 언급했다.

사실 킹의 연설문 작가 클래런스 존스는 전날 밤 원고에 '꿈'의 모티프를 넣었다.

그러나 킹은 그것이 진부하다고 생각한 다른 조언자들의 충고에 따라 그 내용을 삭제 했다.

 

적절한 순간이었다. 킹은 미리 준비한 원고에서 벗어나 외우고 있던 내용을 떠올리며

즉석에서 조금 수정한 마지막 부분을 청중에게 전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장 그리고 앞으로 어려움에 처할지라도, 내게는 아직 꿈이 있습니다."

 

"내게는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네 아이들이 언젠가 그들의 피부색이 아닌

그들의 특성으로 판단되는 나라에 살게 되리라는 꿈입니다. 오늘 내겐 꿈이 있습니다!"

 

즉흥적으로 말한 부분이 그의 연설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내용이 되었고, 큰 박수를 받았다.연설을 마치고 나서

킹이 연설원고를 접어 주머니에 넣으려는 순간 농구 선수이자 경호원이었던 조지 레블링이라는 이름의 청년이

그 원고를 자신에게 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킹은 그에게 원고를 주었고, 지지자들에게 휩쓸려 멀어졌다.

 

<타임> 지는 킹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고, 몇 개월 후 그는 최연소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의 완전한 연설문은 1983년 8월까지 볼 수 없었다. 연설문이 출판되고 나서 몇 개월이 지나서

레블링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문서의 중요성을 제대로 알게 되었고, 그 역사적인 물건을 자신의 지하실에서 꺼내 왔다.

이제 그는 후손들을 위해 그것을 원통에 담아 보관하고 있다.

 

여러 설문 조사에서 '내게는 꿈이 있습니다' 가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연설로 꼽혔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정작 그 연설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이 원고에는 없다.

 

 

 

 

통킹 만 결의안

Gulf of Tonkin Resolution · 의회와 국민을 기만하다

 

1964년

 

결의안 원안.

"베트남 공산 정권의 해군이 (···) 미 해군 구축함을 고의로 반복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의회의 합동결의안은 대통령 린든 B. 존슨에게 동남아시아에서의 군사력 사용 권한을 주었다

그로서 미국이 베트남에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준 셈이었다.

그러나 이 문서는 왜곡과 거짓에 근거한 것으로, 의회와 미국인들이 기만당했음을 보여준다.

 

미국방부에 따르면, 1964년 8월 2일에 베트남의 통킹 만을 순찰하는 미 구축함 매독스 호가 세 척의 북베트남

해군 어뢰정과 교전을 벌였다. 이틀 후 구축함 매독스 호와 터너조이 호 모두 또 다른 침략 행위에서

북베트남 어뢰의 공격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하노이의 북베트남 공산 정권은 그런 주장이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지만, 미국의 관료들은 이 사건을 군사적 침략

행위로 규정했다. 8월 4일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TV로 전국에 방영된 이 연설을 통해, 통킹 만에서 북베트남이

미국 전함을 공격함에 따라 필요한 군사적 대응의 인준을 의회에 요청하겠다고 발표했다.

 

존슨은 선거를 3개월 앞두고 있었고, 많은 미국인들은 그를 지지할 것으로 보였다.

매파인 공화당 후보 배리 골드워터에 맞선 선거운동에도 도움이 될 것이었다.

 

통킹 만 결의안은 다음과 같이 공표했다.

"의회는 군통수권자로서 미국의 군사력에 대한 어떤 무장공격도 퇴치하고 추가 공격을

막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려는 대통령의 결정을 승인하고 지지한다."

 

이 결의안은 무기명 투표를 거쳐 하원에서 416 대 0으로 통과되었고, 상원에서는 오리건 주 민주당 출신 상원의원

웨인 모스와 알래스카 주 상원의원 어니스트 그루어닝만이 반대표를 던져 88 대 2로 인준되었다.

(모스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나는 이 결의안이 역사적 실수가 될 거라고 믿는다.)"

 

8월 10일에 존슨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경우 어떤 통상적 군사력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합동결의안(선전포고와 다를 바 없었다)에 서명했다. 그런 다음 존슨은 결의안을 사용해 남베트남에서

미국의 군사적 개입 확대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7년 뒤에 발표된 국방부 비밀 연구는 공식적인 노선과 반대되는 사실들을 드러냈다.

북베트남인들은 통킹 만에서 미군의 구축함에 "명백하고도 논란의 여지 없는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005년에 이보다 먼저 작성된 국가안보국의 기밀문서와 테이프들이 공개되자, 새로운 폭로들이 이어지면서, 고위

정부 관료들이 사실을 왜곡했고 실제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의회와 국민을 속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동남아시아에서 미국이 10년간 전쟁을 지속한 구실이었던 결정적 정보가 심각하게 의심받는 순간이었다.

통킹 만 결의안 원본은 미국국립기록관에 보관되어 있다.

 

 

 

 

 

아폴로 11호 우주 비행 계획

Apollo 11 Flight Plan · '소련'보다 먼저 달을 정복해야 한다!

 

1969년

 

1969년 7월 1일에 작성된 에드원 E. '버즈' 올드린 주니어의 아폴로 11호 비행 계획.

365쪽에 이르는 계획은 대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분 단위의 활동계획표를 제공했다.

 

 

 

최초의 유인 달 착륙을 준비하면서 나사NASA는 우주선과 세 명의 승무원이 케네디 우주센터를 이륙해 나흘 후

태평양에 예정된 우주선 본체의 착수까지 이어질 활동을 분 단위의 시간표로 설계한 우주 비행 계획, 즉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술적 위업 가운데 하나를 위해 상세한 우주 비행 교범을 만들었다.

 

 

소련보다 먼저 인간을 달에 착륙시켜야 한다고 케네디 대통령이 호소한 뒤 8년이 지나 미국의

첨단 우주 프로그램은 전 세계가 경외감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역사를 만들 준비에 착수했다.

 

아폴로 프로그램에는 최첨단 연구와 병참 활동을 하는 2만 곳의 회사와 군대에서 차출된 40만 명의 공학자와 기술자

과학자들이 관여했고 240억 달러의 자금이 투입되었다. 그러나 1969년 7월에 복잡한 준비와 비용 모두 한가지 단순한

질문으로  요약되었다. "이 임무가 성공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 세 우주비행사의 목숨이 위태로움에 처했다.

그리고 이 작전은 전 세계의 텔레비전 시청자들에게 생중계될 것이었다.

 

1969년 7월 1일 휴스턴 유인 우주항공 센터는 7월 16일에 나사가 예정하고 있는 아폴로 11호의 발사를 위한 363쪽

분량의 최종 비행 계획을 발표했다. 역사적 비행을 위해 우주선에는 세 사람의 승무원, 비행사령관 닐 암스트롱,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즈, 달 착륙선 조종사 에드윈 E. '버즈' 올드린 주니어가 탑승할 예정이었다.

 

5부로 구성된 계획은 오전 9시 32분 케네디 우주센터 39A 발사장에서 발사와 이륙을 시작으로,

비행선 승무원 각각을 위한활동을 분 단위 시간표로 제공하고 있었다. 상세한 지침과 자료 추적은

달 궤도, 달 탐사, 귀환 비행, 재진입과 착수에 이르기까지 비행의 전 과정에 지속되었다.

 

아폴로 11호는 7월 19일 달 궤도에 진입하기 전까지 76시간 동안 24만 마일을 여행할 예정이었다. 다음 날 콜린스가

사령선에 남아 있는 동안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달 착륙선 이글 호에 탑승하도록 훈련을 받았다. 두 시간 후 이글 호는

달 표면을 향해 하강을 시작했고, 고요의 바다 남서부 극단에 착륙했다. 달에 머문 21시간 36분 동안 우주비행사들은

사진을 찍고 토양 표본을 채취하고 미국 국기를 꽂고 여러 과학 실험을 하고 전화로 닉슨 대통령과 통화하는 것을 포함해

다양한 종류의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었다. 올드린과 암스트롱은 그날 밤을 달 표면에서 보내고 사령선으로 돌아왔다.

 

아폴로 11호의 임무는 정확히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지구 전체 인구의 5분의 1일 해당하는 6억 명이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동안, 비행에서 얻은 흑백 비디오 영상이 놀랄만큼 선명한 상태로 지구에 전송되었다.

 

공식적으로 '비행 데이터파일'로 알려진 아폴로 8호부터 아폴로 17호에 이르는 비행 계획과

아폴로 프로그램에 관련된 다른 기록들이 텍사스 포트워스 국립기록관에 보관되어 있다.

 

 

 

 

2+4 조약

Two Plus Four Treaty · 통일 독일의 염원을 이루다

 

1990년

 

독일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 끝나고, 점령국이 나라를 분할한 지 45년 만에 두 개의 독일과 4 개의 승전국은

독일이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데 합의하게 될까? 만약 그렇다면 근거는 무엇일까?

 

 

1990년 9월 12일에 모스크바에서 조인된 2+4조약에서

절정을 맞은 독일의 재통일 합의

 

 

1945년 전쟁에 패배한 뒤 독일은 두 지역으로 쪼개졌다. 동쪽은 소비에트 공산 진영이 장악했고, 서쪽은

유럽의 자본주의 진영과 제휴했다. 베를린은 두 영역으로 분할되었고 나중에 베를린 장벽으로 분리되었다.

서독은 '경제 기적'을 이룬 반면, 동독의 소비에트식 경찰국가는 경제적 진보는 덜했지만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1989년 소련의 장악력이 느슨해졌을 때 '평화혁명'으로 알려진 동독의 반란은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자발적인 제거를 가져왔고, 민주적 통치로의 갑작스러운 이행으로 이어졌다. 그런 소란 속에서 서독 수상 헬무트 콜은

동독(독일민주공화국)과 서독(독일연방공화국)의 통일을 주장했다. 앞서 두 차례나 있었던 통일 독일의 침략 전쟁을

고려할 때 이는 세계적으로 큰 함의를 갖는 움직임이었다.

 

1990년 5월 18일에 두 독일 국가가 화폐, 경제, 사회 통합에 합의하면서 동독이 서독에 합병되고 그로써 서독은 공산

지배로부터의 최종적인 이행을 넘겨받게 되었다. 이 '독일민주공화국과 독일연방공화국 사이에 화폐, 경제, 사회

통합을 확립하는 조약'은 1990년 7월 1일에 발효되었다.

 

독일을 점령했던 4개국에서 독일의 재통일이 과연 좋은 생각인지를 두고 몇 개월 논의가 지속되었다.

45년이 지나 냉전이 뚜렷이 완화되고, 두려움과 분노가 어느 정도 수그러들었다. 일부 국가에서는 여전히

여론이 첨예하게 엇갈렸지만 관료들의 반대는 신속하게 극복되었다.

 

그 결과 독일의 두 국가와 네 개의 점령국(소련, 프랑스, 영국과 미국) 사이에 공식 합의가 이루어졌다.

2+4 조약으로 잘 알려진 독일 관련 문제의 최종 해결에 관한 조약이 1990년 9월 12일에 모스크바에서 체결되었다.

 

새로운 합의에 따라 4개국이 포츠담 조약 아래 독일에서 가졌던 모든 권리를 포기했고, 그로써 통일 독일은 하나의

온전한 주권국가가 될 수 있었다. 독일 역시 해외의 추가 영토나 다른 팽창에 대한 어떤 권리 주장도 포기했다.

모든 소련 군대는 1994년 말까지 독일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다른 여러 제한들과 함께 독일 무장병력의 규모는

37만 명을 넘지 못하게 제한되었다. 독일은 또한 유엔 헌장의 조항들을 준수한다는 데에도 합의했다.

그 조약은 1991년 3월 15일에 발효되었다.

 

이후 독일 정부는 통일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베를린에 주둔한 마지막 연합국 군대가 1994년 8월과 9월에 베를린을 떠났을 때,

진정으로 전후 시대가 끝났음이 분명해졌다."

 

 

 

 

 

'빈 라덴, 미국 공격을 결정했다'

Bin Laden Determined to Strike in US · 역사상 가장 유명한 대통령 보고

 

2001년 8월 6일 미 중앙정보부는 텍사스 농장에 있는 조지 W. 부시에게 대통령의 일일 보고를 전하면서,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국에 대한 중요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 문서의 공개로

부시 행정부는 태만 가능성에 대한 조사가 시작될 것이었다.

 

2001년 8월 6일 자 대통령 일일 보고는 9 · 11과 관련해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서 가운데 하나다.

 

공격에 뒤이은 부시의 언급에 자극을 받아 뉴욕에 등장한 포스터.

나는 정의를 원한다. 그리고 오래된 서부 시대의 벽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긴급수배: 생포 또는 사살'

 

 

미국이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공격을 당하고 나서 8개월이 지나 CBS의 이브닝 뉴스는 9 · 11 공격이 있기 36일 전에

작성된 기밀 문서의 존재를 폭로했다. 부시 대통령에게 전달된 이 문서에는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가

미국에 대해 임박한 테러 공격을 모의하고 있다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2001년 8월 6일 자 문제가 된 대통령의 일일 보고는 2004년 4월에 기밀이 해제되어 9 · 11 위원회에 공개되었고,

편집된 형태로 2004년 7월 22일 9 · 11 위원회 보고서에 수록되었다. 보고서는 그날 미 중앙정보부가 부시에게 제출한

일급 기밀 문서에 "빈 라덴, 미국 공격을 결정했다"라는 불길한 제목이 붙었음을 보여준다. CIA 선임분석가 바브라

수드가 작성한 두 쪽 분량의 기밀 경고문은 공격 목표가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을 언급했고, 미국 비행기를 공중

피랍하려는 빈 라덴의 계획을 언급하고 있었다. 또한 그 문서에는 1998년 이후 빈 라덴이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추종자들은 1992년 세계무역센터 폭파범 람지 유제프의 선례를 따라 "투쟁을 미국으로 가져올" 것이라고

암시했던 사실이 언급되어 있었다.

 

이 문서는 훗날 역사상 가장 유명한 대통령 보고로 묘사되었다.

또한 부시 행정부가 대중에게 공개한 유일한 대통령 일일 보고였다. 오늘날 이 메모는 9 · 11 사건과 관련해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서의 하나로 여겨진다. 부시를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은 나중에 8월 6일 자 대통령 일일

보고서는 그 공격이 언제 어디서 일어날 것인지를 특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부시 행정부가 CIA 경고를

무시했다는 비난을 일축하려 했다.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으로, 그 기간 대통령 일일 보고에 접근할 수 있었던 크트 아이첸왈드는 추가 조사를 통해,

부시가 2001년 봄 이전에도 알 카에다 공격에 대한 40회 이상의 직접적인 경고를 더 받았지만 어떤 예방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중앙정보부장 조지 테넷이 부시에게 개인적으로 정보를 보고하고, 부통령 딕 체니와

국가안보보좌관콘돌리자 라이스도 그 자리에 배석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아무런 예방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9 · 11 공격을 막을 수 있었을까?" 아이첸왈드는 묻는다.

"부시 팀은 그런 일일 보고들에 담긴 경고에 긴급하게 반응 했을까?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점이 무엇보다 괴로운 현실이다."

 

 

 

 

 

3차원 우주 지도

3D Map of the Universe · 가장 완전한 3차원 우주 지도

 

2011년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가장 완전한 우주 지도가 우주를 3차원으로 기록했다.

적외선 전천全天 탐지 적색편이 관측은 지금껏 고안된 것 가운데 가장 크고 복잡한 데이터 맵으로 평가됨직하다.

 

적외선 전천 탐지 적색편이 관측 지도는 지구로부터 3억 8천만 광년에 이르는 은하계와 암흑물질을 보여준다.

보라색 점들은 지구에 가장 가까이 있는 은하계들이며, 빨간 점들이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이다.

 

 

2011년 5월에 하버드 스미소니언 천제물리학연구소의 과학자들은 가까운 우주에 대해

지금까지 만들어진 것 가운데 가장 완벽한 3차원 지도를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근적외선이 방해가 되는 먼지들을 가시광선보다 더 잘 파고든다는 원리를 이용해 천문학자들은

이전에 그 누구도상상하지 못했던 더 많은 우주를 보고 스캔할 수 있었다.

세 개의 근적외선 주파대로 세계의 전체 밤하늘의 91퍼센트를 포착했다.

 

우주 시대 망원경, 수퍼컴퓨터, 다른 진보된 기술력을 활용한 300명의 연구자가 함께했음에도 2MRS 관측에는

10년에 걸친 고되고 복잡한 작업이 뒤따랐다. 메사추세츠대학교의 천문학자들은 세계적 수준의 천문대 두 곳,

애리조나의 8천 500피트 높이의 흡킨스 산 정상에 위치한 프레드 로렌스 휘플 천문대와 7천 200피트 높이의

칠레 안데스 산맥 정상에 위치한 케로 톨롤로 인터아메리칸 천문대의 슈퍼 망원경과 보조 도구들을 활용했다.

그들의 스캐닝은 발견한 모든 항성과 은하를 분류했고, 저밀도 항성들에 대한 폭넓은 실측도를 구성했으며,

최초로 '갈색 왜성들'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 조사는 2차원 이미지만 작성했고, 과학자들은 거리를 설명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를 위해 그 프로젝트에는 우주의 지속적인 팽창으로 인해 은하의 빛이 '적색편이되거나' 더 긴 파장으로 확대된다는

지식이 수용되었다. 은하계가 멀수록 적색편이 크기 때문에 적색이동의 길이는 은하계의 거리를 나타낸다.

조사자들은 우주의 대상들 각각의 적색편이를 측정했고, 이는 빛이 색의 스펙트럼에서 붉은색 끝을 향해 가면서

얼마나 변했는지를 나타낸다. 이런 움직임은 이른바 도플러 효과(크리스티안 도플러가 발견한 것으로, 파동원과

관찰자의 상대 속도에 다라 진동수와 파장이 달라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때문에 발생한다. 그것은 광원光源이 우리로

부터 멀어질 때 빛의 파장이 뻗치는 원인이다.(150만 개의 적색편이가 포함될 때, 그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이 프로젝트는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를 수집했다. 한데 어우러진 여러 소프트웨어들 덕분에 연구자들은 엄청난

양의 데이터로부터 하늘을 관찰할 수 있었고, 관찰에 근거한 데이터를 출력하고, 어떤 버전에서는 망원경을 통제할 수

있었다. 복잡한 프로세스를 거쳐 항성 목록집, 3차원 모형과 전산 플랫폼에서 자료가 수집되었다. 이 대규모 작업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데이터뱅크와 지구 상 여러 장소에서 동시에 작업하는 수십 명의 분석가들이 필요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수많은 과학 논문과 데이터가 만들어졌고, 우주 지도 위에 데이터를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2MRS 관측도는 3차원 우주 지도로서 최초의 것도, 최후의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크고, 그래서 가장 광범위한 우주 지도일 것이다.

이 데이터는 스미소니언 우주물리학 관측소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

 

 

 

 

 

에드워드 스노든 파일

Edward Snowden Files · 사상 초유의 국가 사찰을 폭로하다

 

2013년

 

미국의 극비 첩보 기관에서 일하던 스물아홉 살의 컴퓨터 천재가 미국 역사상 최대의 기밀 폭로자가 되어.

자국의 '위헌적'이고 '불법적인' 사이버 사찰을 폭로하는 엄청난 양의 기밀 문서를 유출했다.

미국의 반응은 양분되었다.

 

2013년 10월 31일 작성한 이 편지에서 스노든은 "행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만든" 정부가

"체계적으로 법을 어기는 것을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2006년에 미국인 컴퓨터 전문가 에드워드 스노든(1983~)이 기술자 · IT 전문가로서 최고 등급의 기밀 문서 취급 인가를

받고 미 중앙정보부를 위해 일하게 되었다. 이후 6년에 걸쳐 그는 국가안보국을 위한 높은 수준의 행정적인 임무를

은폐하기 위해 델 사와 부즈 앨런 해밀턴 사에 고용되어 사이버 첩보부의 여러 직책을 옮겨 다녔다.

 

그러나 미국 사이버 첩보 활동의 본질과 범위를 깨닫게 되면서 스노든은 여러 동료 작업자들과 상관 두 사람에게

그 프로그램이 미국의 국내법과 국제법을 명백히 위반한다는 점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상관들은 그의 불평을

무시하고 일을 계속할 것을 명령했고, 그로 인해 스노든은 심한 가책을 느꼈다. 2012년과 2013년 초에 그는 기밀 문서

들을 다운로드하기 시작했다. 하와이에 근거를 둔 특별 보안 허가를 가진 '시스템 행정가'로서 스노든은 자신의 행적을

추적하기 어렵게 만들면서 원하는 파일은 무엇이든 볼 수 있는 '유령 사용자'로, 메린랜드 주 포트 미드의 국가안보국

중앙 컴퓨터에 직접 접근할 수 있었다. 그는 국가안보국 시스템에서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 단순한 USB 드라이버와

웹크롤러 소프트웨어, 그리고 그리 정교하지 않은 다른 기술들을 사용해 엄청나고 지극히 민감한 파일들을 대량 다운

받았다. 정보부의 비밀 사찰에는 수억 개에 이르는 미국 구글 페이지와 야후의 수백만 통에 이르는 이메일, 연락처,

휴대전화 위치 정보와 다른 데이터들을 채집한 프로그램들도 포함되었다.

 

NSA는 기업의 고위 임원들, 외국 국가수반, 유엔 총재와 그 밖의 중요 인물들과 그들의 사적 · 공적 통신을 사찰하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일부 개인들을 불신임하기 위해 성적인 정보를 찾아내기도 했다. 2012년과 2013년 스노든은

선별한 기밀 문서 사본을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브라질, 스웨덴, 캐나다, 이탈리아, 네덜란드, 노르웨위, 스페인,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상급 기자들에게 보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것을 고집했다. 스노든의 폭로는

상당한 논란을 불러왔고, 그는 방첩법 위반과 정부 자산 절도라는 두 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2013년에는

그의 여권이 취소되었고, 이후 러시아로 망명해 살고 있다. 1015년에도 역시 그를 송환해 미국 법정에

세우려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스노든의 폭로의 전체 범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정보부는 파일이 170만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했다.

몇몇 뉴스 기관과 기자들은 이 문서 가운데 일부를 근거로 작성한 기사로 중요한 상을 수상했다.

동시에 스노든은 여전히 논란이 되는 인물로 남았고. 그에 관한 여론은 엇갈린다.

그의 폭로가 정부의 첩보 활동에 미친 영향은 아직은 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인용: 스콧 크리스텐슨 著 <세상을 바꾼 100가지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