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화

키그 2010. 5. 5. 20:16

영화의 스토리 라인


고독한 킬러가 유럽 스페인에 출현한다. 그는 거의 말을 안한다. 거의 먹지도 않는다. 잠도 자지 않는다. 카페에 앉아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과 모를듯한 대화를 한다. 그들에게서 메시지를 받고 그들이 지시하는 대로 나아가면서 사람들을 만나간다. 결국 그의 타겟이 나타난다. 그것은 비밀리에 유럽에서 회담을 하는 미국 정치인이다. 상상력으로 그의 면전에 나타난 킬러. 그는 사악한 정치인을 살해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윤동환의 영화 해설

짐 자무쉬의 영화 '천국보다 낯선'이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 영화를 보았던 것이 어언 십여년이 지나갔다. 낯설고 재미없고 지루했고 뭔지 몰랐던 느낌이 떠오른다. 그 다음에 본 영화는 프랑스에서 본 '담배와 커피', 그리고 조니 뎁 주연의 '데드맨'. 데드맨은 괜찮았다. 그러다가 2009년 최신작 '리미츠 오브 컨트롤 (통제의 한계)'를 보게 되었다. 이 영화는 나의 최고의 영화가 되었다.

좌우의 대립

나의 요즘 몇년 사이의 주요 화두는 '좌우'이다. 그것은 단지 정치적인 테마일뿐 아리라 철학적인 테마이다. 동양의 음양 사상. 그것은 반대되는 두 극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서 만물이 이루어진다는 사상이다. 그 둘은 반대 되기 때문에 서로 싸운다. 그러나 싸우는 것 만이 아니라 둘이 화합을 하여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좋은 것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음과 양은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창조를 일으키기도 한다.

음과 양의 대립과 조화의 극명한 예는 쌀이 밥이 되는 과정이다. 쌀을 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두가지가 필요하다. 물과 불이다. 물과 불은 서로 상극이다. 불이 붙었을 때 물을 부으면 불이 꺼지기 때문이다. 습한 곳에 불을 피우면 습한 것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과 불은 상생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것은 쌀을 밥으로 만들 때이다. 불만 가지고 밥을 만들 수 없고, 물만 가지고 밥을 만들 수도 없다. 이 전혀 상반되는 두가지가 적절하게 작용했을 때 쌀쌀한 쌀이 맛있는 밥이 되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도 그러하다. 남자와 여자는 상극이다. 둘이 만나면 싸운다. 남자는 화성에서, 여성은 금성에서 왔기 때문에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다르다.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전쟁을 일으킨다. 그것이 대부분의 부부들을 보면 보이는 바이다. 그러나 상극인 남과 여가 조화를 이루면 상황은 전혀 다르다. 그들은 엄청난 시너지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성을 통해 만병을 치유하고, 사랑으로 자식까지 만들어 낸다.

이렇게 상극이 서로 조화될 수 있다. 남성만 가지고 창조가 이루어지지도 않고, 여성만 가지고 창조가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이성과 감성이 만나 조화를 이루어야 창조가 이루어진다. 우리의 두뇌가 좌뇌와 우뇌로 되어 있듯이. 여성성, 감성을 무시하는 것은 뇌의 반을 무시하는 것이다. 남성성, 이성, 오성을 무시하는 것은 뇌의 반을 무시하는 것이다.

요컨대, 나의 상극을 수용해야 한다. 좌파는 우파를 우파는 좌파를 수용해야 한다. 좌익은 우익을 우익은 좌익을 수용해야 한다. 한쪽 날개만 가지고는 새는 날아다닐 수 없다. 그는 추락할 것이다. 내용과 형식이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 색과 선이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 그림과 액자가, 콩과 콩깍지가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배우고 수용해야 한다. 종합하는 것. 그것이 인류의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지적인 보헤미안의 허무의 메시지

오페라 '라 보엠'에서 보엠은 보헤미안들을 일컫는다. 뮤지컬 '렌트'는 그 오페라를 뮤지컬로 만든 것이다. 그 뮤지컬에 '라 비 보엠' (보헤미안의 삶)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 영화는 바로 보헤미안에 관한 영화이다.

보헤미안의 어원은 보헤미아라는 나라가 망하면서 그들의 유민들이 유랑생활을 하는 것에서 나왔다 한다. 그들을 집시라고도 부른다. 그들은 노래하고, 그림을 그리고, 명상을 하고, 춤을 추고, 공연을 한다. 거리에서, 공동체 속에서. 그들은 거지처럼 일을 안하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다. 그들이 타락하면 거지나 도둑이 된다. 미국에서는 그들을 히피라 불렀다.

유럽의 집시가 아니더라도, 그들의 유랑, 방랑, 친 예술적, 친 감성적 성향은 인간 자체의 한 속성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좌파적 성향이다. 오른쪽 두뇌의 속성이다.

오른쪽 두뇌의 속성을 가진 보헤미안들은 왼쪽 두뇌의 속성을 지닌 '기능인'들과 끊임없이 대립한다. 마음은 몸이로되 몸이 따르지 않았다는 사도 바울처럼. 마음은 박남정이어도 몸은 나훈아인 사람들처럼,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 이성과 감성이 따로 논다. 이것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 대부분의 인간들의 상황이다. 그들은 갈등을 겪고 내부의 전쟁을 겪는다. 내부의 전쟁은 뫼부로 투사된다. 그래서 자신의 내부의 적을 외부로 돌린다. 좌파적 요소가 적으로 느껴진 사람들은 좌파적 인간들을 싫어하게 된다. 우파적 요소가 적으로 느껴진 사람들은 우파적 인간들을 싫어하게 된다. 두 편이 싸운다. 그것은 사실 내면의 적과의 싸움이다.

영화의 주인공 킬러는 우파적 인간의 우두머리를 살해하는 긴 여정을 밟는다. 그러나 그는 총도 칼도 없다. 그는 기타줄을 가지고 정치인을 살해한다. 우파는 정적을 살해할 때 군대나 경찰력이나 암살범을 사용한다. 영화에서도 좌파 여자가 경찰 차에 의해 체포 연행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게 권력자들은 자신의 뜻에 반하는 사람들을 힘으로 체포하고 수감하고 격리시켜 버린다. 그러나 보헤미안들은 그런 무력을 사용할 수 없다. 킬러가 사용하는 기타줄은 예술을 상징한다. 보헤미안은 폭력이 아닌 폭력, 예술을 무기로 사용한다.

스스로를 보헤미안으로 보는 지적인 짐 자무쉬는 이 영화를 통해 힘있는 우파 권력자들에게 소통을 하자면서 노크를 하고 있다. '당신들의 모습을 좀 보십시오 하고. 당신들이 진정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이 세상에서의 삶. 그 삶은 본질적으로 공(비어있음)입니다. 삶에는 본래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남들보다 잘났다고 크다고 스스로 여기는 자들은 죽어서 교훈을 얻게 될 겁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한줌의 흙일 뿐이라는 교훈 말입니다.' 라고.

지난한 수행의 오디세이


주인공 킬러는 시종일관 눈을 뜨고 있다. 잠을 자지도 않는다. 누워서 눈을 뜨고 휴식한다. 식사도 철저히 조절한다. 매일 에스프레소 커피 두잔을 마신다. 그것은 식생활에서의 절제를 표현한다. 동시에 깨어있음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그는 여성의 유혹의 있어도 성을 절제한다. 자신의 미션이 있는 동안은 절대로 섹스를 하지 않는다. 매일 태극권을 수행하면서 심신을 강화시킨다.

킬러의 생활의 모습은 자신을 통제하는 노력을 보여준다. 그것은 수행자의 수행의 과정과 동일하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좌파의 수장들이다. 그림의 대가, 음악의 대가, 플라멩코 춤의 대가. 혹은 물리학의 이론이나 철학적 이론들을 알려주면서 주인공이 지속적으로 의식을 챙길 수 있게 도와준다.

이것은 화엄경 '입법계품'에 나오는 선재 동자의 선지식 만나기 여행과 동일한 모티브이다. 수많은 스승들을 만나면서 차츰차츰 목표에 가까이 가는 것이다. 그리고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 나오는 율리시즈의 귀환 여행과 동일하다. 많은 조력자를 만나면서 동시에 위험한 인물들을 만난다. 기차에서 만난 일본인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중의 한 사람 중에는 우리 중의 사람이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인생은 연극이다. 인생은 드라마다. 인생은 율리시즈의 모험 여행이다. 인생은 하나의 로드무비이다. 인생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진리라는 고향을 향한다. 그 여정 속에서 조력자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방해자 적들을 만나기도 한다. 힘을 얻기도 하고 좌절을 겪기도 하고 사이렌 같은 유혹자의 유혹을 받기도 한다. 그 모든 과정을 거쳐서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곳은 고향이다. 본래의 장소이다. 본질, 사랑, 자유, 행복, 진리이다. 우리의 인생을 스스로 축복할지어다.

빌더버그 그룹에 대한 메타포


이 영화는 우파의 흐름에 대한 비판적인 정치성을 내포하고 있다. '시대 정신' 이나 '에소테릭 아젠다' 등의 다큐를 통해서 알려진 '빌더버그 그룹'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담겨져 있다. 빌더버그 그룹은 세계의 소수의 지도자들이 사적으로 비밀리에 만나서 세상을 어떻게 제편해 나갈 것인가를 의논한다고 한다. 그들은 철저하게 우파적인 시점을 대변한다. 그들이 좌파적인 시선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태도가 빌 머레이가 연기한 미국의 정치인의 대사를 통해서 드러난다. 그들은 철저히 보헤미안들을 경멸하고 천시한다. 보헤미안들은 삶의 본질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의 태도와 행동 방식이 세상을 살아가는 최선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이루어지는 전쟁터이고, 인간은 본디 유한하고 이기적인 존재들이므로 약육강식의 논리는 당연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대중에 대한 조작과 선동과 착취 등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감독 짐 자무쉬는 그들에게 도전적으로 말한다. '그런 시각이 정말 맞는 시각이겠느냐? 당신들만 옳은 것이 아니다. 수많은 당신들과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논리로 그들의 진리를 말하는 것을 들어보라. 당신들의 통제의 논리에는 한계가 있다.' 하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들의 생각만 고수하지 않고 삶의 다른 측면을 동시에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딩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의학, 법학, 정치, 경제...물론 그런 것들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시를 배워야 한다. 왜인가? 우리가 인류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류의 일원이기 때문에 시, 사랑. 로맨스, 정열... 그런 것들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인류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좌뇌 뿐 아니라 우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생존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선미와 자유, 평등, 형제애, 홍익인간 재세이화, 이데아, 이상의 논리가 필요한 것이다. 우파적 통제에는 그래서 한계가 있다. 그래서 제목이 '통제의 한계'인 것이다.

미니멀리즘과 메타포들

이 영화의 재미있는 점은 이 영화가 미니멀리즘적이라는 것이다. 큰 주제를 이야기 하고 있지만 돈은 최소한만 들였다. 유명하지 않은 배우를 사용했다. 스타급 배우들은 최소 출연료로 우정출연을 시켰을 것이다. 이 영화는 미술에서의 미니멀리즘을 떠올리게 된다. 이 영화는 상업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 자체가 미술 작품이라는 느낌이 든다. 미술과 영화의 중간에 위치한 작품이랄까.

지적인 짐 자무쉬의 작품이기에 수많은 메타포와 알레고리를 배치하고 있다. 그래서 퍼즐을 푸는 듯한 재미를 느끼게 된다. 수많은 애니그마틱한 신비한 대사와 상징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먼저 영화는 랭보의 시를 보여준다. '바다가 잠잠해지면 선원이 필요 없어진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내 친구는 명상의 상태가 되면 명상의 수단이 필요 없어진다고 해석했다. 나는 깨달음을 얻으면 세상의 통제 기구와 정치가들이 필요없어진다고 해석했다.



주인공이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은 전술했듯이 선재 동자가 많나는 24 선지식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주인공이 나아가야 하는 길을 제시하고 실마리를 던진다.

마지막에 주인공이 죽이는 미국의 정치가는 모든 고집스러운 우파성을 대변한다. 좌파성을 혐오하고 무시하고, 약육강식을 당연시하며, 메타적인 반성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가치에 앞서 기업적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부르주아지적 이기성을 대변한다. 주인공이 그를 죽이는 것은 투쟁을 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를 죽이는 것이 총이 아니라 기타줄이었다는 것은 그것이 무력의 방식이어선 안된다는 그의 생각을 드러낸다.

주인공은 끊임없이 핸드폰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것은 문명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낸다. 문명의 이기에 종속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파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처음부터 올 누드로 등장하여 시각적 충격을 주는 아름다운 여인은 섹슈얼리티를 상징한다. 그것은 율리시즈를 유혹하는 사이렌이다. 수행자에게 함정이 되는 성적인 욕망을 상징한다. 그들은 다이아몬드를 좋아한다. 다이아몬드는 재물을 상징한다. 성욕과 재물욕이 맞물려 있음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벌거벗은 여인을 내치지 않는다. 그는 그녀가 거기 있게 한다. 그가 잘 때 여자는 옆에서 같이 잔다. 유혹을 하면서. 그러나 남자는 넘어가지 않는다. 그는 자면서도 깨어있는다. 모든 자극에 대해 물고기처럼 눈을 크게 뜨고 의식을 챙기면서 깨어있는 것이다. 그에게 여성의 유혹은 고통이 아니다. 그것은 악마의 유혹도 아니다. 그것은 그것일 뿐이다. 여성은 미션을 수행하기 직전의 상황에 다시 나타난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갔을 때 그는 자신의 악마성을 죽이고 깨달음을 성취한다. 그리하여 궁극적인 대극의 합을 이루어 하나의 미션을 마친다. mission completed. 여성과의 만남은 궁극적 합일이 된다.

두잔의 에스프레소 커피. 그것은 식생활에서의 절제, 그리고 깨어있기 위한 노력을 상징한다.

태극권 수행. 그것은 명상 수행, 또는 고행을 상징한다.


생각 더하기

대안적 인간형

세기말이 아직 넘어가지 않았다. 끊임없는 위협이 매스컴을 장식한다. 환경 오렴의 극한점, 해수면의 상승, 각종 신종 질병들, 끊임없는 노사 대결, 이라크의 불씨, 아프간의 비극, 이스라엘 가자 지구의 갈등, 등등. 궁극적으로 제 3차 세계 대전이나 자연 재해 등으로 인한 인류 공멸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아직 죽지 않았다. 이런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영화 속에서의 정치인 빌 머레이 처럼, 우파의 논리로 살아갈 것인가?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감독의 시점에 공감한다면, 좌우를 포섭하는 보다 넓은 시각을 찾개 될 것이다. 대안적인 인간형을 찾을 것이다. 그것은 종합하는 인간, 극단에 빠지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인간이지 않을까? 이성과 감성의 조화, 이상과 현실의 조화, 좌파와 우파의 조화, 여성성과 남성성의 조화, 세속성과 성스러움의 조화, 종교와 예술의 조화, 기독교와 불교의 조화, 서양과 동양의 조화. 쾌락과 금욕의 조화를 이루는 인간, 조르바적인 쾌락주의와 붓다의 금욕주의를 통합한 '조르바 붓다 (Zorba the Bhudda)'. 그것이 새로운 세기의 대안적 인간이지 않을까?

Written By 윤동환



개인적으로 짐 자무쉬를 좋아하지만, 가끔은 그를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다. 95년에 처음 '천국보다 낯선'을 보고서도 그랬고, 이번 '금욕적인 킬러의 여정'도 왠지 낯선 거부감을 느끼게 했다. 가만보면 그는 상당히 이질적인 얘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 속에는 어쩌면 우리네의 본질이 숨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위 해설처럼 이 영화는 온갖 메타포들로 무장하고 있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핵심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비주얼만으로 본다면 상당히 회화적인 색채를 많이 띈다. 고전 명화들의 오마쥬가 곳곳에서 나타나며 그 느낌과 해석을 고스란히 다음 이야기들 속에 녹아내고 있다. 로드 무비 형식이지만 아주 간단 명료한 동선을 그리고 있고 단순 반복적인 구조로 일관하고 있다. 그럼에도 감독만의 특유한 스타일이 궁금증과 기대를 갖게 한다.
이 영화는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영화들과 완전히 차별된다. 어쩌면 상당히 싱거운 맛일 수 있음을 염두해 두고 감상해야 한다.



토렌트는 해외이고 속도는 평균 300Kbps가 안되지만, 그럭저럭 받을만 합니다. 자막 파일과 AVI의 파일이름을 같게 하고 감상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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