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국방

무위여행 2007. 6. 2. 10:16
 

안병직, 이영훈類를 배척한다

늙으면 죽어야 된다
먼저 결론부터 말하면 일제시대의 교육과 산업시설 등 식민통치의 수단들이 결과적으로 우리 민족사에 긍정적인 면이 있다는 안병직 교수나 이영훈의 발언은 어떤 관점을 가지더라도 잘못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진실찾기라는 이름으로 민족 앞에 또 다른 죄를 짓고 있음이다. 아니 민족 이전에 인류에 대한 죄를 짓고 있음이다.

왜냐하면 일제시대는 하나의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가한 범죄 이전에 인류가 인류에게 저지른 범죄이기 때문이다. 서양에 의해 저질러졌던 아프리카에 대한 노예사냥이 인류전체에 대한 범죄이듯이, 히틀러의 유태인에 대한 범죄가 단지 유태인들에게만  국한하는 범죄가 아니라 인류에 대한 범죄이듯이 일제시대에 가해진 조선민중에 대한 일제의 범죄는 그 자체로 인류에 대한 도전이며 범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시대를 긍정하는 것 역시 똑 같은 범죄행위나 마찬가지이다.

2005년 3월18일에 필자는 중앙일보 디지털국회 게시판에서 구로다라고 하는 일본 산께이신문 서울지국장의 망언을 비유를 들어 비판을 하였다. 그때 필자는 만일 구로다 지국장의 아내나 딸이 납치되어 외국으로 끌려가 온갖 험한 꼴을 당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외국여행을 가게 되었으니 축복이라 할 수 있겠느냐며 그의 주장을 비판한 기억이 있다.(구로다 그 입 다물라)

마찬가지다. 일제시대를 (결과적인 측면에서 긍정하는)안병직, 이영훈, 한승조 같은 이들의 주장도 마찬가지다.( 늙으면 죽어야 된다 ) (한석조(한승조)는 石鳥이다)

백번을 양보해서 피해자가 왜 가해자를 변호해주는가? 더구나 가해자는 반성조차 하지도 않고 있고 언제든지 기회만 된다면 그 짓을 반복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데도 굳이 피해자가 가해자의 입장이 되어 “결과적으로”라는 말을 사용해가면서 가해자의 행위를 비호할 이유가 있는가?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귀를 후비고 들어도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민족에 최우선의 가치를 부여하는 관점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 민족 논쟁 - 正義가 아니라 작용의 문제다 ) 민족주의가 타민족에 대해 배타적으로 작용하고 우월적으로 작용할 때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인류에게 해악을 끼쳐온 역사적 사실들에 비추어 필자로서는 ‘민족주의’에 대해 그다지 높은 점수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 특히 김일성과 김정일이 민족을 자신들의 폭력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는 이상 더더욱 감상적 민족주의에 대해 경계의 시선을 늦추지 않고 있다.



목적이 善하지 않았다면 어떤 방법과 결과에도 정당성은 없다
어떤 행위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어떤 관점을 취해야 가능할까?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먼저 행위가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에 대한 고찰부터 해야 하는 것이 옳은 태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안병직이나 이영훈 같은 작자들의 주장처럼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후에 근대화된(?) 교육, 사법체계, 산업시설 등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전까지는 조선에는 제대로 된 근대화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그래서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fact)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제시대를 긍정할 수 있을까? 최소한 결과적으로 일제 패망 후에 대한민국이란 신생국가가 발돋음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긍정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그 행위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행위가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에 의해 판가름이 되어야 한다. 행위가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이 善하지 않았다면 그 행위가 어떤 방법에 의해 추구되었던 어떤 결과를 초래하였던 정당성과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받을 수는 없다.

어떤 시대(행위)가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결과도 분명 중요한 판단의 잣대로 작용하겠지만 그것보다는 그 행위가 어떤 목적에 의해 행해졌는가가 먼저 분석되고 그 목적에 얼마나 방법과 결과가 부합되는가에 따라 결정되어져야 할 사안이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즉, 안병직이나 이영훈 교수 같은 부류들의 주장처럼 일제시대에 일제에 의해 조선의 땅과 조선의 민중에게 했던 행위들이 (결과적으로)긍정적인 의미를 부여받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목적에 의해 조선 땅에, 조선 민중에 베풀어졌느냐를 고찰해야 일제시대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일제시대는 일본이 조선의 땅과 조선의 민중을 식민수탈을 위해서 존재한 통치기구였고 시대였다. 소위 그들의 근대화정책이라는 것은 조선의 땅과 민중을 영원히 일본의 땅으로 일본인의 노예로 삼기 위한 목적 하에 수단으로 동원을 했다는 것이다. 즉, 조선의 땅과 조선의 민중을 위해 교육이며 산업이며, 도로를 만든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일본이라는 국가와 일본인을 위해 膏血을 짜내기 위한 수단으로 교육도 하고 도로도 만들고 산업시설도 만들었고, 그들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사법제도를 만들었을 뿐 조선의 땅과 조선의 민중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일제시대에 조선의 땅과 조선의 민중에게 행해진 근대화정책은 목적은 일제였지 조선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구의 자전축이 바뀌고 하늘과 땅이 역전되는 일이 있다 해도 일제시대에 일제가 조선의 땅과 조선민중에게 했다는 소위 근대화정책들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보다 원활하게, 보다 심도 있게, 보다 더 많은 수탈을 위한 오로지 일제를 위한 목적 하에 행해진 것으로 정당성을 찾을 수도 없고 결과적 긍정도 부여할 수가 없다.


따라서 필자가 김일성과 김정일을 이해하고 옹호하고자 하는 세력들을 혐오하고 그들을 증오하는 것처럼 일제시대를 이해하고 옹호하는 부류들은 혐오하고 증오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타도의 대상일뿐 이해하고 옹호할 대상은 아니다. 안병직과 이영훈, 한승조를 용서할 수 있다면 강정구 또한 이해하고 용서해야 한다. 아니 품어야 한다.


일제시대 긍정은 용납할 수 없는 범죄다
언제부터인가, 역사를 재해석하고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이름 아래 일제시대와 김일성, 김정일세습체제의 북한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이 횡행하고 있고 그들의 주장은 교조성을 띄어가고 있다. 그들은 역사를 재해석하고 제대로 알아야 되는 이유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자 함이라고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그렇지만 이 주장이 얼마나 사악한 주장인지는 그들 스스로의 논리를 되짚어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일제시대에 조선의 땅과 조선의 민중에게 일제에 의해 시행되었던 교육, 사법제도, 산업시설 등 소위 근대화정책이라는 것에 대해 결과적으로나마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이유는 해당 근대화정책들이라는 것이 오로지 일제의 식민통치를 위한 목적에 의해서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땅과 조선의 민중이 그 정책들의 목적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는 일본인들 그들에 의해, 그들을 위한, 그들의 시대였을 뿐 조선의 민중과 조선의 땅은 그들의(근대화정책) 목적어는 결코 아니었다.

그들의 수탈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영구적으로 조선의 땅과 조선의 민중을 자신들의 노예로 삼기 위해서 오로지 그런 목적 하에 시행된 정책들에 대해 결과적으로라는 단서조항이 붙는다고 해도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자고 하는 주장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善惡의 문제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 것처럼 극단적인 우와 좌는 서로 통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의 극우와 극좌진영이다. 극좌는 극우를 배척하기 위해 김일성과 김정일을 수긍하고 극우는 극좌를 배척하기 위해 일제시대를 수긍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아무리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상대를 배척하고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惡을 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일제시대에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씨부러대는 족속들이 있는한 우리의 참혹한 역사는 반복되고 또 반복될 것이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국가와 민족이 어떤 길을 걸었던가는 인류의 역사가 잘 증명해주고 있다. 일제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유일한 긍정적인 의미는 우리 스스로 自覺해서 自彊하지 않으면 남의 노예가 된다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