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무위여행 2016. 5. 14. 14:48

훈장이 완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개발의 주역이라는 훈장

필자가 아이들과 여행을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언행이 혹시 너희들의 가치관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웬만하면 이해하고 넘어가라. 광복이 되었을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할 정도로 가난에 찌든 나라였고 그런 나라를 오늘 이렇게 일으켜 세운 세대들이다. 일회용 커피믹스를 처음으로 만든 나라가 우리나라였던 것처럼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가정과 나라를 만들어왔다.

 

물론 오늘의 잣대로 보면 분명 잘못된 부분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하고자 하면 하지 못할 부분도 없다. 인류 역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압축성장을 해왔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어쩌면 당연히(?) 불법과 편법, 각종 부조리들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 속담에 3일을 굶어 남의 담장을 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말처럼 조부모 세대 그분들은 당장의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이 절체절명의 과제였기 때문에 그런 행동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였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실패한 사람들에 대해 이해도 공감도 못하는 것처럼 그분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자부심을 넘어서 어떤 신념 같은 것이 있는 분들이다. 그러니 조금은 이해하고 이해가 안 되면 그냥 가족이니 품고 넘어가자는 부탁을 한다.

 

 

민주화에 대한 훈장

필자가 중학교 3학년 때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러다 광주사태”(그때는 그렇게 불렀고 우리들도 그렇게 인식하였다) 때문에 수학여행이 며칠 미루어졌었다. 그때 우연히 필자의 반에 광주에서 전학 온 학생이 한 명 있었다. 그때 잠시나마 그 친구가 우리의 원성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나중에 광주사태라고 했던 일이 광주학살” “광주민주화운동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기억 못하지만 그때 우리는 사실을 몰랐다는 변명에 불구하고도 광주에서 온 친구에게 참 잘못했었구나 생각했던 기억과 함께 지금도 미안함을 갖고 있었다. 그 외에도 민주화 과정에서 참으로 많은 분들의 희생이 있어야 하였다.

 

지금 필자가 인터넷이란 한정된 공간에 불과하지만 정치에 대해 마음껏 삿대질을 할 수 있는 시대를 살 수 있는 것들이 바로 그런 분들의 기꺼운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죽어가고 몸과 마음을 다쳐야 했던 그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희생에 기억하는 것이 다시는 그런 시대를 만들지 않겠다는 우리의 의지이기도 하다.

 

그때 광주 사람들이 이유 없는 죽음 앞에서 외톨이가 되었다는 생각에 얼마나 두려웠을까 생각해보면 필자가 지금 북한주민들의 인권문제에 대해 우리 대한민국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의 고통도 이해해야

물론 상대방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니체의 말처럼 괴물과 싸우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어야 했던 부분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때문에 배고픔에서 해방된 고마움도 모르는 패거리들, 우리 때문에 대통령을 욕할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갈 수 있음도 모르는 패거리들, 이것이 지금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구절이다. , 자신들의 훈장을 상대방에 대한 완장질로 이용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나의 훈장은 훈장이지만 상대방의 훈장은 완장쯤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경제개발의 훈장도 민주화에 대한 훈장도 모두 완장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아주 더러운 완장질이 되어버렸다.

 

경제개발에 대한 비난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지도자의 역할을 부정한다. 국민들이 열심히 했기 때문이었고 그 시대에는 많은 나라들이 그 정도의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을 정도로 국제적 환경의 덕택이지 경제성장에 대한 지도자의 역할은 없었거나 미미하였다는 주장으로 그 시대를 평가절하하곤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 그때 당시 우리와 출발선상이 같았거나 심지어 잘사는 나라였지만 지금 우리에게 한참 뒤처진 나라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도자의 역할을 부정할 수 있는가? 만일 그런 논리라면 지금 북한이 저 지경으로 사는 것은 오롯이 북한주민들의 탓으로 돌아가야 마땅할 것이다. 김정은 같은 수괴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잘못되었다. 국민들의 몫이 분명 지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도자의 몫이 없거나 미미하다는 주장은 상대방의 훈장을 훈장으로 인정하기 싫은 어깃장에 불과하다.

 

반대로 민주화 투쟁에 나섰던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은 가장 크고 기본적인 인권이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말로 혹은 민주화 투쟁과 이 정도의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것조차 역시 자신들이 배고픔을 어느 정도 해결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며 애써 홍길동의 좌절과 苦楚(고초)의 세월을 부정하고 있다. 이 역시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나라가 가난하다고 해서 반드시 민주주의를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나라가 부자라고 해서 모두 민주주의를 만끽하는 것도 아니다. 경제개발을 위해서 그 정도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논리는 성립할 수가 없다. 상대방의 훈장에 대한 거부를 위한 거부로 여겨질 수 있다.

 

 

훈장은 훈장으로만 존재해야

훈장은 명예의 지위에 머물거나 완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상대방을 억압하기 위한 완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훈장을 받은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훈장을 박탈당하게 되는 것처럼 완장질 하는 훈장은 이제 버려야 한다. 우리 사회의 분열과 대립의 시작점이 아닌가 싶다. 輕重(경중)은 혹시 있을지 모르나 배고픔으로부터의 해방과 민주주의 모두가 소홀히 할 수 없는 가치이다. 더구나 양진영이 지금처럼 反目(반목)만 가지고 있다면 자칫 두 價値(가치) 모두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지나간 시대에 대한 기록과 시대를 헤쳐나온 세대들에 대한 감사를 넘어 강요를 감독들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감정이 과잉된 영화 국제시장과 변호인을 보기를 바란다. 스스로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인 면에서 엄혹한 시대를 서로 방법을 달리하여 싸웠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사족 같지만 필자는 국제시장은 영화관에서 봤고, “변호인은 다운로드 받아서 봤다. 가장이 되어보니 가족들의 먹고사니즘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다고 절실히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