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문화

무위여행 2021. 6. 29. 14:40

어른 아니 꼰대가 부끄러운 날

 

 

 

5월에 접한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경주의 전시회에서 아이가 작품을 훼손하였지만 박대성 작가는 아이니까 그럴 수 있다라며 문제 삼지 않았고 다만 우리나라의 관람문화가 바뀌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하였었다는 기사였다. 작가들에게 작품은 자식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자식을 다치게 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사람은 없다. 설사 그게 아이라도 말이다. 그런 자식 같은 작품을 훼손한 아이를 기꺼이 용서해준 박대성 화백은 진정한 어른이었다.

 

그리고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가상화폐에 매몰된 청년들에게 잘못된 길로 가면, 어른들이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라고 한 것에 대해서도 필자는 감동을 했었다. 그는 그 발언으로 전국민에게 집중포화를 받았지만 필자는 어른으로 마땅히 해야 할 노릇을 했다는 판단을 했었고 지금도 그렇다. 힘이 되지는 않겠지만 박수를 또 보낸다.

 

 

오늘 참담한 기사 하나를 접하였다.

대입을 앞둔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9월에 있을 모의평가 응시자들에게 화이자 백신을 우선 접종해주는 정부의 정책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수험생들보다는 백신을 먼저 맞고 싶어 하는 어른들 때문에 정작 학생과 재수·반수생들이 접수를 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무늬만 수험생인 어른의 비중이 실재로 어느 정도인지 등 아직 정확한 통계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현장에서는 백신을 맞기 위해 모의평가 응시를 한 어른들 때문에 정작 고3학생들은 물론이고 재수생·수험생 들이 접수를 하지 못하였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고 한다. 참담하다.

 

필자의 나이 知天命을 지나 이제 耳順이 훨씬 가까운 나이가 되어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나이지만 가끔 필자는 젊은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일까를 생각해보면 부정하고 싶지만 꼰대에 가깝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그래도 나름 꼰대로만 남지 않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라 자위하고 있는데 세월호 사건 이후 오늘처럼 어른임이 부끄러움을 넘어 참담한 기억이 없었던 것 같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 탄핵 이후 줄곧 우리 공동체를 지배하고 관류하는 이슈는 공정과 정의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역사에 남은 명문으로 출발하였지만 집권 기간 중 보여준 것은 그렇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과 악성 문빠들에 의해 내로남불이 국제정치학용어로 자리 잡은 것에서 증명이 되듯 그들은 공정과 정의를 너나 잘 하세요라는 국민의 좌절과 정치에 대한 외면으로 바꾸어버렸다. 지금의 문재인 정권의 실패는 예비 된 것에 다름 아니다.

 

 

어른들이 백신을 먼저 맞기 위해 모의평가에 거짓 응시한 것은 학생들에 대한 배려의 부족 차원을 벗어나 기회의 박탈의 관점이란 시각에서 봐야할 문제다. 우리 사회에서 학력은 일생을 좌우하는 절대적 기준점이나 마찬가지다. 현대판 카스트제도나 마찬가지다. 자신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평가 받아보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할 수 있는 기회인 모의평가는 그만큼 중요하다. 그런데 백신을 먼저 맞고자 하는 어른들의 욕심 때문에 수험생들은 그 소중한 기회를 박탈당하고 말았다. 젊은이들의 기회에 대한 약탈과 미래에 대한 약탈에 다름 아니다.

 

권리보다 의무가 더 많아지는 게 어른이라 생각하면 된다. 시골 무지렁이에 불과하지만 틈만 날 때마다 아이들에게 아비인 필자가 해주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아비어른도 아닌 꼰대가 되었음을 자인하는 꼴일 수도 있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가 의무 그 이상을 하는 것이 어른이란 생각을 갖고 있다.

 

단지 백신을 먼저 맞기 위해 모의평가 시험에 거짓을 응시를 하였다는 것은 생물학적 어른이 아니라 됨됨이로서, 사회적으로도 결코 어른이 되지 못한 꼰대들의 빌어처먹을 욕심 탓이다.

 

어떻게 정치·사회·문화·경제 등 이 공동체에 만연한 불의와 불평등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참담하다. 대한민국이란 공동체가 이렇게까지 무너져 내렸을까 한탄도 이제는 사치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