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무위여행 2005. 11. 1. 17:38

미필적 고의에 의한 매국행위

어떤 행위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음으로 해서 발생되는 법적 책임을 ''미필적 고의에 의한''이라고 한다.
내가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줄 수 있는 상황(나의 목숨이 위태롭지 않은)에서 구조를 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 사람이 익사를 했다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가 성립될 수 있다고 들었다.

이런 논리를 정치행위 좁게는 선거에도 적용할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되지 않을까 싶다.
어떤 선거의 결과가 나오고 나면 흔한 말로 유권자들이 ''그때 내가 판단을 잘못했어'' ''그때 내가 투표를 했었야 하는데'' 등등 이런 말을 잘하는데 이럴 때 이 유권자의 행위를 ''미필적 고의에 의한 매국행위''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즉, 내가 뽑은 정치인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미필적 고의에 의한 매국행위''가 적용되지 않을까.

主權在民이라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민의 합법적이고 가장 효과적인 정치행위는 바로 투표이다. 얼마나 국가를 위해서 유능하고 깨끗한 사람을 골라 투표를 했느냐에 실질적으로 주권자로서의 정당한 권리행사를 했느냐가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즉 선거에 얼마나 성실하게 올바른 자세로 임했는냐에 따라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냐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국민들이 이런 사실을 망각한 채 자신의 권리이면서 의무이고 거의 유일한 적극적·합법적 정치권력의 행사인 투표를 하지 않거나 혹은 가벼이 여겨 대충 주위 분위기 따라 행사하는 일이 잦다.
그래서 선거가 끝나면 특정 지역이나 지지계층 사람들은 때늦은 한탄과 함께 ''손가락을 짤라야 한다는 등'' 듣기에도 무서운 유행어의 발생지가 되고 있다.

지금의 대선자금 문제를 보면서 본인도 위에서 언급한 ''미필적 고의에 의한 매국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나 하는 심각한 자괴감을 떨 칠 수 없다.

지금껏 본인은 거의 한나라당을 지지해왔었다. 92년 대통령선거에 있어서는 민자당 소속인 ''김영삼후보''를 찍지 않고 기권을 했었지만 그 외는 대체적으로 한나라당 후보를 보고 찍어 왔었다.
어찌되었던 본인은 거의 한나라당으로 상징되는 보수정당이 상대적으로 본인이 가지고 있는 체제지향점이 같다는 생각에 솔직히 말하면 거의 맹목적이다시피 지지를 해왔었다. 87년 선거권이 있게 되면서 대통령선거에서부터 지방선거까지 이런 식으로 투표를 해왔음을 실토하고자 한다.

본인은 가진 것도 없지만(올해 39세로 재산이라곤 5,000만원짜리 아파트와 만8년된 1,500cc승용차와 올 3월부터 월 150만원이 채되지 않는 봉급을 받고 두 아이와 아내가 있는) 나름대로의 논리에 따라 보수주의 혹은 자본주의를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이다.
친구들이 넌 가진 것도 없으면서 자본주의를 신봉하냐? 라고 비난 아닌 비난을 할 때도 본인은 적어도 우리나라에 있었어만은 사회주의가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물론 자본주의도 그렇지만 상대적 가치판단기준으로는 낫다고 생각함) 판단에 자본주의를 적극 지지하는 편이다.
그런 연유로 한나라당으로 상징되는 보수우익정당을 지지해왔었다.

그런데 이제는 깨끗하게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이다. 지닌 시절에 대한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라도 한나라당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를 단연코 철회할 것이다.
물론 한나라당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정당을(특히 한나라당의 반대되는 정당) 지지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십보백보란는 말처럼 그들 역시 똑 같기 때문이다.
진보라고 생각되는 정당 구성원들도 하는 짓이 똑같다. 그때그때의 자신들의 유불리에 따라 정치적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이 바꾸곤 한다. 대통령의 재신임문제에 있어서도 대통령부터 재신임을 받겠다는 이유가 날이 갈수록 입장이 바뀌고 또 논리가 정교해지고 있다. 정당들 역시 국민여론(재신임여부)에 따라 지지와 반대로 입장이 수시로 바뀌고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민련을 처음엔 얼씨구 좋다고 당장 하겠다고 나섰다고 재신임 여론이 높자 슬그머니 발을 빼고 있고 정신적 여당이라는 ''우리당'' 역시 처음엔 결사반대를 했다가 지금은 도리어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이다. 朝變夕改도 이 정도는 예술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본인은 다시는 이런 ''매국노''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 정당이 지향하는 체제(보수와 진보)를 떠나 조금이라도 때가 덜 묻은 후보에게 표를 던질 것이다.
내가 지향하는 체제와 같다고 해서 다소 더러워도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며 나의 이념과는 다른 편이라고 해서 무조건 그의 말조차 듣지 않으려 하는 잘못은 더 이상 범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나의 편리한 사고방식과 편협한 투표행위로 인해 ''미필적 고의에 의한 매국행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투표가 끝난 후 손가락을 짜르고 싶은 충동도 느끼지 않을 것이며 다음 선거가 있기 전까지 나의 투표에 대해 조금은 덜 자괴감을 느낄 수 있도록 국민의 의무와 권리행사에 좀 더 충실할 것이다.

 

2003년10월29일 중앙일보 디지털국회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