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무위여행 2005. 11. 7. 12:42

이익의 충돌(사형제 폐지 권고안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가 국민의 법과 보상적 정서와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어 연이어 말썽이다. 얼마 전엔 위원장이란 사람이 불법위장전입으로 부동산구입을 해서 말썽이더니 이제는 국민 다수가 사형제의 존속을 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형제폐지를 권고하고 나서 뜨아하게 만들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사형제 폐지 권고를 보면서 느낀 점은 우리 사회에서 상호간에 이익의 충돌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조정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는 점이다.

사형제 폐지를 권고한 국가인권위의 주장처럼 순수하게 법리적 관점이나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법의 이름으로 어떻게 생명을 빼앗냐'는 식의 논리는 정당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 국민의 법감정과 피해자의 보상적 감정의 논리로 들여다보면 반대로 인권위의 주장은 정당성의 토대가 사라지고 만다.


<예화 1> : 정치인의 사생활에 대해 언론에 보도되고 그것이 국민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일정부분 정당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정치인의 사생활 보호라는 法益보다는 국민들의 정치적 선택에 기준과 준거를 제공하는 法益이 더 크고 중요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예화 2> : 토지수용법에 의하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공공기관에서 사업시행을 위해 필요할 경우 일정 조건 을 갖추게 되면 개인 소유의 토지를 (유상)수용할 수 있게 되어있다. 이 경우 개인이 아무리 땅을 팔지 않으려해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와 공공기관에서 그 땅을 수용해서 사업을 시행할 수 있도록 법에서 보장하는 이유는 그 해당 기관에서 하려는 사업이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져올 이득이 개인이 토지를 수용당하지 않고 누릴 이익보다 더 크다고 인정되기 때문에 가능하고 법적 정당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위의 예처럼 사회 구성원들 간에 각각의 이익이 상충하게 되었을 때, 다른 서로간에 법적, 경제적, 심리적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효과적으로 조정하고 서로가 수용할 수 있다면 바람직한 현상이 될 수 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늘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충돌하고 그것이 확대되어 사회 공통의 이익까지 침해받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럴 경우에 충돌하는 이익의 상대방끼리 서로가 수용할 수 있는 합리적 방안이 도출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한쪽을 선택하는 수밖에는 없게 된다. 그럴 경우에는 당연이 어느 쪽 이익이 큰지 여부를 따져서, 어느 쪽 이익이 더 법적 정당성을 가지는지를 따져서 선택할 수밖에 없고 이익의 침해를 받은 쪽은 그것을 수용하는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해야 사회가 유지되고 발전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회 갈등의 조정기능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와 국가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지만 각각의 이익이 충돌하게 되었을 경우에 그것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고 조정하고 교통정리할 합리적인 수단이 존재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형제도도 존재해야할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즉, 사형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어떤 이익을 선택해야할까? 범죄자의 생명권의 이익과 피해자의 보상적, 징벌적 이익과 역시 정신적으로는 동질적 피해자라 할 수 있을 일반 국민들의 정서적 이익이 충돌하게 되었을 경우엔 당연하게도 범죄자의 法益보다는 피해자와 일반 국민의 이익(사형제를 존속시키려는)이 우선적으로 고려되고 선택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인권위의 주장처럼 오심의 가능성과 재활의 기회 부여, 그리고 생명을 법의 이름을 빼앗을 수 없다는 논리에 대해서,

첫째 : 오심의 가능성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사형제폐지 주장 중에 가장 논리적 근거가 있고 사형제 존속에 대해 전적으로 찬성할 수만은 없도록 만드는 근거라는 생각이다.
재판관들이 신이 아닌 이상 오심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하고 왕왕 그런 경우도 많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대한불교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曉峰) 스님의 경우에 일제강점기에 판사를 하다 한 피고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으나 뒤에 진범이 잡히자 출가한 경우처럼 오심을 인해 애궂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며 이 경우 사형집행이 되었다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사형제 폐지의 강력한 준거로 제시되고 있다.
대부분 동의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형제폐지의 절대적인 근거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오심의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 3심제가 실시되고 있고 또 현대에 있어서는 피고인이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수 있는등 오심에 의해 사형판결을 받을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낮추기 위한 제도들이 많이 있으며 또한 피고인이 극히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는 경우에는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해도 일정기간(예를 들면 사형죄에 해당하는 범죄의 법적 시효기간 정도)동안 사형을 유예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는 등 행여 있을지 모르는 오심에 의한 '사법살인'을 막을 제도적 장치를 하게되면 될 것이다. 따라서 오심의 가능성 때문에 사형제가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절대적인 조건이 될 수가 없다.
둘째 : 재활 기회의 부여
범죄자의 재활기회의 부여는 그럴 개연성이 있는 경우에만 한정되어야 할 것이다. 사형선고를 받는 범죄자의 경우는 범죄 자체가 잔혹하기 그지 없는 경우보다는 범죄를 저지르고 반성하지 않고 참회하지 않는 경우에 마지막 수단으로써 사회와 영구 격리하는 방법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즉, 재활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사회를 보호하고 또다른 피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사형선고를 받을 정도의 범죄자에게 재활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 자체가 성립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재활을 해서 다시 사회인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재활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지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경우까지 재활의 기회 운운은 누범전과자들의 경우에서 왕왕 보는 것처럼 자칫하면 그들에게 사회에서 또다른 범죄를 저지를 기회를 부여하게 되고 그것이 또다른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 사법살인도 살인이다
하늘이 준 생명을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은 종교적 관점에서 통용이 될 수 있는 주장일뿐이다. 어떠한 조직이든 그 조직이 유지되기 위해선 조직 구성원들이 동의하는 규칙이 있어야 한다. 하물며 종교에서도 교리가 있으며 그 교리를 위배할 경우에 종교적 차원에서 처벌이 가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해선 반드시 사회를 제어하는 룰이 있어야 하며 또한 룰을 벗어난 행위를 한 구성원들에겐 당연하게 그 일탈한 행위만큼의 제제가 사회적 차원에서 가해져야 하는 것이다. 좋은 일을 한 구성원들에게 상이 주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사회의 유지와 발전에 위해를 가한 구성원들에겐 당연하게도 제제(벌)가 가해져야 하는 것이다.
사형제는 그만큼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중대한 룰을 범했다는 것을 뜻하며 그만큼의 제제는 가해져야 하는 것이다.


지난 2004년 11월30일에 디국 게시판에 올린 "효과와 감정으로 본 사형제 "란 글 중에서 결론 부분을 다시 올리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死刑制는 존치를 하되 좀 더 엄격한 법적 장치에 의해 제한되고 낮은 수준에서 집행이 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가령 정치적 문제에 있어서는 원천적으로 死刑制를 폐지하는 것처럼 死刑을 선고할 수 있는 죄목을 좀 더 줄이고 더 엄격한 증거주의를 적용하고 또 대법원에서 死刑이 확정이 되었다고 해도 일정기간 즉 행여 있을지로 모르는 誤審에 의해 저질러질 수 있는 합법적 살인행위를 막기 위해서 집행을 보류하였다가 死刑을 집행하는 방법 등 死刑의 집행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위해선 지금보다 더 강화된 법적 수단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란 것이 본인의 짧은 생각이다."

 

 

2005년 4월6일 중앙일보 디지털 국회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