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 공부

오자키 2009. 6. 14. 02:16

나에게는 좀 무모한 취미가 있다. 이것이 내가 독서를 양적으로 소화하는 데 크게 방해가 되고 있는 것은 아마 확실할 것이다. 그 취미란, 책을 원어로 읽어 보는 일이다.

 

왜 원어로 읽으려고 하는가 하면, 저자가 원래 쓴 글을 읽는 것이 번역된 글로 읽는 것보다 대부분 내용이 명확하고 진한 맛이 나기 때문이다. 번역될 정도의 글은 보통 수준이 높을 뿐만 아니라 저자의 문장 실력도 뛰어나, 섬세한 뜻을 절묘하게 담아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기 나라 말의 특성을 기가 막히게 잘 이용해서 매력적인 표현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번역을 하면 그런 맛은 대부분 사라진다. 그래서 원서로 읽을 때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독서의 양으로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요즘 나는 한국 책을 적극적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주로 한국 사람들이 쓴 것을 골라서 읽는다. 가끔 외국 책에 손을 댈 때도 있다. 나는 영어를 잘 못하지만 그래도 부분적으로라도 영어로 책을 읽는다. 신약성경도 원어인 헬라어로 읽는다. 진도는 잘 안 나가지만, 어떤 번역으로도 느낄 수 없는 필자의 숨결이 느껴진다.

 

몇 년 전에 나는 <어린 왕자>의 일한 대역 교재를 만들기 위해 프랑스어를 배웠다. 출판사에서 집필 제의를 받고 2006년 7월부터 프랑스어 공부를 시작했다. 문법책을 후다닥 읽은 다음, 거의 소화 불량 상태로 <어린 왕자>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진도가 거의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몇 달 걸려서 절반 정도까지 읽으니까 점점 이해하기가 쉬워지기 시작했다.

 

약 2년 반 동안 매달린 끝에 책이 나왔다. 일본어 텍스트 부분은, 시인이자 한국 대학에서 가르치고 계신 일본인 교수님에게 감수받은 덕분에 아름답게 태어났다. 그래도 역시 <어린 왕자>는 프랑스어로 읽는 것이 가장 좋다. 프랑스어로 읽을 때만 느낄 수 있는 내성적이고 아름다운 필치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프랑스어로 인사도 못하고 글도 못 쓰지만 <어린 왕자>는 읽을 수 있다. 원어로 책 읽기를 하나의 취미로 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이 작업을 할 때부터인 것 같다.

 

사실 이런 무모하다 싶은 작업에도 용감하게 손을 댈 수 있었던 것은 선배 덕분이다. 한국에서 박사과정에 다니는 한 일본인 선배가 학술 발표를 한 번 하기 위해 고전 몽골어를 배운 것이다. 한국어학을 전공하는 그 선배는 아마 ‘An Introduction to Classical (Literary) Mongolian’ (Kaare Gronbech and John R. Krueger, 1955)라는 꽤 어려운 교재로 고전 몽골어를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몽골어 교재인 <노걸대(老乞大)>에 대해 연구하고 발표했다.

 

나는 그 선배가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학습 능력이 뛰어난 수제라는 것도 잊고 ‘나도 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덤벼들었다가 고생하게 됐는데, 그래도 먼저 본을 보여 준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된다. 나는 <어린 왕자>의 원문을 해석하다가 막혀서 좀처럼 나가지 못할 때도 걱정하지 않았다. 한 줄이라도 이해하는 것이 기뻐서 작업을 계속했다. 그리고 결국 <어린 왕자> 번역이라는 나에게는 터무니없는 작업을 해낼 수 있었다.

 

처음 번역하는 작업에 1년이 걸렸고, 그 후 1년 반 동안 원서를 반복해서 읽으면서 번역을 고쳤다. 그러면서 점점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어, 드디어 나는 <어린 왕자>의 팬까지 되었다.

 

물론 원서를 읽을 때 이와 같이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읽지도 못한 원서에 매달리다가 책 읽는 기회를 놓쳐 버리기도 한다.

 

나는 신약성경은 더듬더듬 읽고 있다. 그런데 읽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많은 신자들이 반복적으로 읽고 신앙심을 깊게 하고 있는 동안 나는 진도도 별로 안 나간 채로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요새 아예 하루에 한 장씩, 뜻을 모르는 단어나 문법 형태가 있더라도 읽는 것을 일과로 삼기로 했다.

 

그런데,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를 못해서 아주 옛날에 일본어로 한 번 읽고는 아직까지도 히브리어 공부를 시작하는 날만 기다리는 중이다. 히브리 글자를 보고 어떻게 발음하는지 아는 정도로는 한 단어도 읽어 나갈 수 없는 게 히브리어다. 글자를 읽을 수 있어도 한 단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답답함을 경험하려면 터키어나 인도네시아어, 핀란드어, 헝가리어 등으로 쓰인 책을 펴 보면 좋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히브리어나 아랍어를 보면 이게 글씨냐 하겠지만, 나에게 히브리어는 터키어나 인도네시아어 등과 같은 언어다. 대충 어떤 발음인지는 알아도 뜻을 알 수 없다.

 

인구어는 이에 비하면 나은 편이다. 모르는 언어라도 간간이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있는 단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언어를 사전 지식 없이 읽을 수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를 일본어판으로 읽고 아주 좋아서 독일어 원서를 샀는데, 아직 한 줄도 못 읽었다. 아무리 독일어가 영어와 비슷하다 해도 문법적 지식 없이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도 한국어판과 영어판으로 읽은 후 웹 상에서 포르투갈어 텍스트를 발견하여 다운받고 뽑아 놓았는데, 포르트갈어 사전을 뒤적이면서 몇 줄만 읽었을 뿐, 지금은 책꽂이에서 잠자고 있다. 포르투갈어는 프랑스어와 형제 언어지만 프랑스어를 조금 안다고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것은 원어가 아니지만 어느 날 교보문고에서 <어린 왕자>의, 놀랍게도 라틴어역을 발견했다. <Regulus(왕자)>라는 제목이었는데, 바로 사서 읽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잘 아는 작품이지만 라틴어는 어렵다. 나는 <어린 왕자>를 암송까지는 못하지만 어디에 어떤 단어가 쓰여 있는지 정도는 대충 안다. 이런 지식과 라틴어 사전의 도움으로 읽어 봤는데, 그래도 한 페이지도 읽지 못했다. 라틴어는 프랑스어를 포함한 라틴 어족의 조어가 되는 언어인데, 프랑스어와는 꽤 차이가 큰 것 같다. 쓰이는 어휘도 프랑스어와 다른 것들이 많고, 어순도 꽤 다르다. 중요한 말이 뒤로 밀리는 라틴어의 어순은 프랑스어에 비해 무거운 느낌이 든다. 맛을 느끼기는커녕 이질감에 당혹해 하기만 한 후 지금도 쉬고 있다.

 

러시아어는 더 어렵다. <어린 왕자>의 러일 대역본을 꽤 비싼 가격으로 샀는데 도저히 읽을 수 없다. 가끔 라틴어나 그리스어에서 차용한 단어들, 영어에서도 흔한 단어들이 눈에 들어올 뿐이다.

 

이런 일을 하다가는 책을 읽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을 크게 낭비해 버릴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이런 손해를 감수하고 이와 같은 취미를 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런데 이 취미에는 더 큰 문제가 있다. 오해할 가능성 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일본 사람이 한국 소설의 일본어판을 읽었다고 치자. 그 사람이 나처럼 원어가 궁금해져서 한국어 문법을 후다닥 공부한 다음 그 소설을 한국어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오역(?)을 발견했다. 일본어역에서는 두 사람이 싸우다가 한 사람이 상대방을 조롱하며 떠나는데 원서, 즉 한국어를 보니, 그는 상대방을 축복하고 있지 않는가! 한국어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아니, 그렇게 심하게 다투면서도 헤어질 때 이렇게 상대방을 축복할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이 번역자는 엉뚱하게도 조롱하는 말로 번역하다니! 번역자 이름이 뭐지? 으음, 오자키 다쓰지라고? 정말 말도 안 되는 번역자로구먼…….

 

초보자는 이런 식으로 자주 오해를 한다. 나는 <어린 왕자>를 읽을 때 일본어판 전부와 원문 해설서 그리고 한국어판 및 영어판까지 참조했는데, 이와 같이 많은 자료들을 참조하지 않았다면 나의 번역은 ‘잘 먹고 잘 살아라’고 조롱하는 말도 축복하는 말로 번역하는 오류를 수없이 많이 저질렀을 것이다.

 

성경 해석에서도 ‘A little Greek is dangerous.’라는 격언이 있다. 헬라어를 조금만 알고 원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이야기다. 원어로 읽을 때 번역에서는 알 수 없는 뉘앙스를 알 수도 있지만, ‘잘 먹고 잘 살아라’를 축복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과 같은 오류를 저지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헬라어 지식이 부족함으로 인해서 잘못 읽은 것이 중요한 교리까지 건드려 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 원어를 읽는 것은 즐겁다. 한 줄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때 느끼는 뿌듯한 마음은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이런 독서를 할 때 필요한 것은 아래와 같다.

 

첫째, 원문이 필요하다. 포르트갈어로 쓰인 <연금술사>처럼 원문을 구하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고전적 작품이면 웹 상에서 볼 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것을 읽으면 될 것이다. 둘째, 사전이 필요하다. 왜냐 하면 이런 독서는 보통 우리가 잘 모르는 외국어 책을 읽게 되기 때문이다. 사전을 마구 찾지 않으면 도저히 읽어나갈 수 없다. 다행으로 한국에서는 웬만한 언어의 사전이 나와 있다. 셋째, 번역판이 있으면 좋겠다. 여러분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보면서 뜻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에 원문과 번역이 같은 페이지에 대역으로 나와 있는 책이라면 더욱 좋다. 이런 도구들을 이용해서 원문 텍스트가 어떻게 쓰여 있는지 뚫어지게 보는 것이다. 가능하면 원문을 읽기 전에 얇은 입문서로 기초 문법을 훑어 보면 더욱 좋다. 특히 우리가 모르는 글자로 쓰인 언어로 된 원문을 읽을 때는 더욱 그렇다.

 

이런 독서에서는 보통 외국어 학습과 달리 독해 실력을 향상시킨다거나 하는 목적은 없다. 단지 목적은 그 텍스트에 나와 있는 단어 하나, 글자 하나를 아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관점은 우리가 외국어를 배울 때도 중요한데, 학생들 뿐만 아니라 교사들까지도 이런 관점을 잊어버리기 쉽다.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단어의 뜻을 아는 것보다도 쓰인 문장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극단적으로 말하면, 핵심적 내용이 이해가 되면 주변에 흩어져 있는 뜻을 모르는 단어들을 굳이 사전에서 찾을 필요는 없다. 물론 거기에 중요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있을 것 같으면 사전을 찾는 것이 좋지만, 문맥상 대충 그 단어가 사람을 나타낸다든지, 장소를 나타낸다든지 하는 것을 알 수 있으면 더이상 깊이 들어갈 필요가 없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단어들은 번역판을 보면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식으로 읽을 만한 원문을 찾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이 블로그의 독자들은 아마 대부분 일본어를 배우고 있거나, 일본어를 조금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중에는 아직 자신이 일본어로 책 읽는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꽤 많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비록 아직 초급 수준일지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본 책을 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책 옆에 한국어역과 사전들을 두고 한 문장이라도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이 대역 교재로 나와 있으면 다행이겠다. 만약에 문학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은하철도의 밤(銀河鐵道の夜)>을 읽어 보면 어떨까?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의 유고에서 발견된 작품인데, 문장이 아름답고 내용도 감동적이다. 이 작품은 일한 대역본이 나와 있다. 개인적으로는 <어린 왕자>만큼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을 읽는 것이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책이라면 읽으면서 느끼는 만족감으로 계속 읽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책이 좋다는 구체적인 답이 없다. 즐거운 것이 제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