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오자키 2009. 6. 18. 17:01

쉬운 책
장영희의 <내 생애 단 한번> (샘터, 2000)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제는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성당 마당에 책 판매대가 차려져 있었다. 신부님이 직접 그 앞에 서 계시니 예의상 전시된 책들을 훑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 <앗핫핫 하느님! : 가톨릭 유머 모음집>이라는 책이 눈에 띄어 막 집으려는데, 내 직업을 아시는 신부님이 “가톨릭 지성인이면 이런 잡지를 구독해야 한다”고 하시며 <사목>이라는 잡지를 코앞에 내미신다.
  할 수 없이 구독 신청을 하고 와서 책을 들춰보니 ‘속지적 본당 사목구 페러다임의 미래’ ‘담론을 위한 문화의 최소 정의’ 등등 제목만 봐도 골치가 지끈거린다.
  괜히 진짜 ‘가톨릭 지성인’인 척했다 싶고, 그냥 체면 불구하고 <앗핫핫 하느님!>을 가져올 걸 하고 후회막급이다. (<겉과 속> 139쪽)


지성인인 저자가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지성인이 아닌 나도 자기가 읽은 책을 소개할 때는 분식결재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가 많다. 어떤 독서가는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와 같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수치라고까지 말한다. 그런데 나는 이 책에서 돈에 대한 많은 것을 배웠다. 나의 독서 수준은 그 정도인 셈이다.


물론 어려운 책을 노력해서 읽는 것을 얕잡지는 않는다. 일부 사람들은 어려운 책 내용을 읊는 젊은이를 마치 공허한 말을 하는 사람처럼 무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결코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왜냐 하면 그럼으로써 우리의 머리는 단련되어 더욱 섬세한 사고를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요새는 어려운 글을 기피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은데, 그럴 때일수록 어려운 책을 많이 찾아서 읽을 것을 권하고 싶다.


그런데 정작 내가 읽는 책을 보면 대부분 쉬운 책들이다. 특히 요새는 서점에서 훑어 보고 골치 아파 보이는 책은 아무리 내용이 좋다고 해도 손이 안 간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책을 선호하는 것일까?


쉽고도 내용이 깊은 책
아무리 어렵지 않다 해도, 내용이 얄팍한 책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저자는 그 분야에 대해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야 하고, 자기가 쓰는 분야에 대해 열정이 있어야 한다. 또 자신의 경험만 가지고 주장하는 책은 곤란하다. 그러므로 쉽고도 깊은 생각이 담긴 책을 좋아하는 것이다.


가능하면 문학적 향기가 있는 책이 좋다. 문학적 향기란 글재주만으로 풍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깊고 독특하며 새로운 발견을 제공해야 한다. 이외수는 <글쓰기의 공중부양>에서 단어의 속성 찾기를 강조하고 있는데, 어쩌면 우리가 미쳐 생각지 못했던 사물의 속성을 보여주는 분위기가 문학적 향기로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너무 심각하거나 암담한 기분으로 만드는 에피소드가 담긴 책도 별로 읽고 싶지 않다. 특히 가슴 아픈 이야기를 읽으면 나는 자신의 일처럼 큰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아 육체적으로도 힘이 든다. 분노를 저자와 공유하게 하는 에피소드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계속 화가 치밀어서 일이나 공부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 책들이 아니라, 읽으면 행복한 기분이 되거나, 용기를 얻거나 또는 힘이 나는 책에 아무래도 손이 잘 간다.


그렇다고 공허한 말로 힘을 내라고 되풀이하는 책은 곤란하다. <The Secret> (Rhonda Byrne 지음, Atria Books, 2006)과 같은 책은 그런 책으로 보였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인상이다). 좀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 본질을 꿰뚫어 보는 책이 좋다. 물론 아무리 구체적인 것이 좋다 해도, 상황이 달라지면 통용되지 않는, 피상적인 설명만 하는 책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상황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어도 통용된 지식을 얻으려면 본질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이 두껍지 않은 것이 좋다. 보통 200쪽에서 250쪽. 아무리 두꺼워야 300쪽 정도. 더 이상 내용이 많아지면 끝까지 읽는 게 힘들어진다. 물론 필요하다면 읽겠는데, 너무 두꺼운 책은 부담스럽다. 그 이유는 읽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인데, 빨리 읽지 못해도 빨리 끝내야 읽는 맛이 나는 것이다.


노하우 책, 수필 등
내가 좋아하는 분야도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다.


먼저 노하우 책을 좋아한다. 지성인들은 보통 이런 책을 책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노하우 책을 읽는다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노하우 책들을 좋아한다. 특히 공부 방법과 관련되는 책들이다. 이것은 나의 직업이 일본어 교사라는 점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지성인들은 학습 능력이 원래 뛰어나기 때문에 학습 방법 같은 것은 일부러 배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와 같은 일반인들은 학습 방법에 대해 잘못된 인식과 습관들이 많다. 그것을 극복해 주는 책이 필요한 것이다.


수필도 좋아한다. 수필이 좋은 이유는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필이면 뭐든지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집에 <韓國隨筆文學全集1~5> (國際文化社, 1965)이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는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梁柱東, 吳宗植, 趙潤濟, 趙芝薰, 崔貞熙)들이 엄선한 수필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 읽은 수필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 가운데는 왜 이런 글을 실었을까 하는 것들도 있었다. 아마 그때 당시에는 재미 있는 내용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부인인 내가 지금 읽으면 재미가 없는 것이다.


아직 많은 수필을 접한 것은 아니지만, 특히 마음에 드는 작가는 김형석, 법정, 장영희 대충 이 정도밖에 안 된다. 이 세 사람에게 공통된 특징은 자신의 내면을 깊이 관찰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는 점과, 그 사상의 뿌리에 깊은 신앙심이 있다는 점이다. 김형석은 개신교, 법정은 불교, 장영희는 천주교를 각각 믿고 있다.


기타 분야의 책들은 그때그때 흥미가 가는 대로 변덕스럽게 찾는다. 시집을 읽을 때도 있고, 인문 책(역사, 지리, 철할 등등)이나 소설을 읽을 때도 있다. 그런데 이런 책들은 나에게는 기타 여러 가지에 속한다. 기본적으로 나는 유익하고 부담 없는 내용을 좋아한다.


같은 저자의 책
나는 어떤 저자의 책이 마음에 들면 그 저자가 쓴 다른 책도 읽게 된다. 그 저자가 쓰는 분야가 다양할 때는 처음 읽은 책과 비슷한 분야의 책들 중에서 고르게 된다.


이런 저자들에게 공통된 특징은 글 자체가 매력적이라는 데 있다. 이해하기 쉽고, 친근하게 다가오며, 좋은 지식을 제공해 준다. 내가 선호해서 많이 읽는 저자는 구로다 류노스케(黑田龍之助), 사이토 다카시(齋藤孝), 와다 히데키(和田秀樹), 가쓰마 가즈요(勝間和代), 규 에이칸(邱永漢) 등이다. 이런 저자들의 책은 신간이 나오거나 헌책방에서 발견되면 제목도 확인하지 않고 살 때가 많다.


이런 독서 성향은 <전작주의자의 꿈> (조희봉 지음, 함께읽는책 2003)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 책은 독서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전작주의’를 제창하고 있는데, 전작주의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정의하고 있다.

전작주의란,
‘한 작가의 모든 작품(作品)을 통해 일관되게 흐르는 흐름은 물론 심지어 작가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징후적인 흐름까지 짚어 내면서 총체적인 작품세계에 대한 통시/공시적 분석을 통해 그 작가와 그의 작품세계가 당대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찾아내고 그러한 작가의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하는 일정한 시선’을 의미한다. (24~25쪽)


평론처럼 딱딱한 문체로 정의돼 있지만 이 말에 나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전작주의는 위대한 정신을 자신에게 빙의하게 만들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전작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선호하는 작가들도 위대한 정신이라기보다는, 규 에이칸 외에는 대부분 세대가 비슷해서 읽기 편하다는 게 내가 많이 찾는 이유다. 더군다나 이 사람들의 책은 매력적이면서 실질적인 유익성도 있다. 나도 이 사람들처럼 매력적이면서도 유익한 책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으로 읽는다.

 

그런데, 조희봉씨는 <전작주의자의 꿈> 이후에 책을 쓰지 않았다. 나는 그의 다음 책을 기다리고 있다.


자필 원고
그리고 요새 내가 관심이 많은 것은 유명 작가들의 자필 원고다. 마침 근래에 일본에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도련님(坊つちやん)>과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의 <인간 실격(人間失格)>의 자필 원고 사진판이 저렴한 가격으로 나왔다. 유명한 작품의 자필 원고를 읽는 것은 활자로 인쇄된 작품을 읽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경험이 된다.


얼마 전에도 교보문고에서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 (민음사, 2009)이 나온 것을 알게 되어 주문했다. 15만원이나 했지만 이것이 나에게 보물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은 3일후에 입고됐다는 연락이 와서 찾으러 갔다.


사실 그때 이 책을 주문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김수영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었다. 그래서 집에 있는 문학 사전을 꺼내 보았는데, 거기에 맛보기로 작품이 소개되어 있었다. <비>라는 시의 일부다.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悲哀를 알고 있느냐.


命令하고 決意하고
「平凡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
海草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透明한 움직임의 悲哀를 알고 있느냐
여보
움직이는 悲哀를 알고 있느냐.
……


사실 이번에 이 육필시고 전집을 사게 된 이유는 전에 겪었던 가슴 아픈 경험도 한 몫을 하고 있다. 1999년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이 민음사에서 4만원에 나왔을 때 나는 돈이 없어서 그 책을 사지 못했다. 그 후에 경제적으로 약간 여유는 생겼지만, 이미 그 책이 들어가 버린 후였다.


우리가 흔히 아는 윤동주의 시는 표기를 고치고 단어까지 고친 것이다. <원본대조 윤동주 전집 : 하늘과바람과별과詩>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4)를 읽으면 단어가 많이 바뀌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윤동주의 시는 그의 글이 아니다.


저자의 숨결을 알려면 가능한 한 원본에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필 원고는 무척 가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나마 원본이 실린 책을 구할 수 있으니 다행이지만, 1차 정보를 지향하는 나로서는 자필 원고의 유혹은 매우 크다. 딱히 연구자가 아닌데도 자필 원고를 구해다 읽는 것은 이상한 취미인지도 모르지만, 가장 안심하고 읽을 수 있는 것은 자필 원고다.

 

지금은 대충 이런 책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 경향은 점점 바뀌어 가고 있다. 경향은 있지만 이런 책들만 읽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는 지금과는 좀 다른 책들을 선호했다. 그리고 지금부터 몇 년 후에는 또 다른 책들을 좋아할 것이다. 그래서 몇 년 후에 다시 나의 독서 성향에 대한 부끄러운 고백을 해 볼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