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및 일본어 교육

오자키 2009. 6. 28. 12:08

언어 생성 능력을 본다
시험은 수업의 목적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수업의 목적을 생각하는 교사라면 나름대로 시험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하는 시험은 20분을 쓰게 하고 어절 수로 점수를 매기는데, 이는 일본어의 생성 능력을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구두로 시험하는 것이지만, 80명을 넘는 학생들을 시험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에게 똑같은 응시 조건을 제공하기가 어려워 필기 시험으로 대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절 수를 측정한다는 것은 유창성의 공급원인 언어 생성 능력을 측정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왜 생성 능력을 보는가? 이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생성 능력은 언어 능력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눈에 띄는 언어 능력으로는 유창성과 정확성 그리고 언어 지식의 양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 유창성은 그 중 하나다. 이것은 언어 생성 능력에 바탕을 둔 능력이다.


둘째, 언어 평가에서 등한시되기 쉽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시험에서는 정확성과 지식만 측정하고 있지, 생성 능력을 측정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아마 채점 방법이 워낙 까다로운 데다 지적인 일도 아니어서, 책상 위는 완전히 막노동 판이 되고 만다. 게다가 아무리 바빠도 채점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다. 다시 말해, 무식해 보이고 힘도 드는 작업인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셋째, 원리적으로 부정행위를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나의 시험에서도 시험 때 아무것도 참조할 수 없게 하고 있는데, 이것은 부정행위가 점수를 높이기보다는 오히려 낮추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언어 생성 능력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데 방해가 된다. 사실 나의 시험에서 곁눈질할 여유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을 하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써서 상대적으로 점수가 낮아져 버리는 것이다. 한 때 open-book examination을 한 적이 있는데, 어떤 학생이 ‘성실하게 공부한 학생이 손해 본다’고 비난하는 문자를 보내 왔다. 여러분도 이에 동의할까? 하지만 내 경험에서 말한다면 시험 중에 책이나 사전 등을 참조하면 A+를 딸 수 있는 학생도(나의 시험에서 점수를 ‘받는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학생들은 점수를 따가는 것이고, 나는 그것을 기록하고 올릴 뿐이다.) A0를 따기가 어려울 것이다. open-book examination은 나의 시험에 있어서는 기회가 아니라 함정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불순물은 뺀다
물론 언어 생성 능력과 약간 다른 요인들, 즉 불순물 때문에 점수가 높아질 가능성은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암기한 내용만 그대로 반복하는 경우다. 이런 답안은 10%의 불이익을 준다고 애당초부터 선언했기 때문에 나오지 않았지만, 만약에 이런 답안을 채점하게 되면 정말 힘들 것이다. 물론 단어만 나열하는 답안도 마찬가지다. 단, 이번 학기에는 노래 가사를 쓴 답안이 몇 개 있었다. 노래 가사 같은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학기에는 다 점수를 주었는데, 이것은 언어 생성 능력과 약간 다른 것들이다. 다음 학기부터는 노래 가사가 답안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면 전체에서 몇 퍼센트의 어절 수를 제할 계획이다.


둘째, 교과서 본문에서 단어만 바꾼 것을 되풀이하는 경우다. 이것은 외운 것만 쓰는 것보다는 의미가 있지만 순수한 생성 능력의 소산이라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이것도 처음에는 그냥 점수를 주었었는데, 양은 많지만 창의성이 전혀 없는 답안이 되기 때문에 불이익을 주기로 했다. 10%의 어절 수를 제하기로 했더니 한 사람도 그런 답안을 쓰는 사람이 없어졌다.


한 학생의 비판
그런데, 한 학생이 답안지에 이런 시험 방법에 대해 강력한 어조로 반대하는 글을 썼다. 그는 이 시험이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やくに ぜんぜん たたないんです)’라고 ‘전혀(ぜんぜん)’에 밑줄까지 그어서 강조했으며, 다시 ‘이런 시험으로는 아무것도 습득할 수 없습니다(こんな テストでは なにも みにつけません)’라고도 했다. 또 ‘수업에서 배운 표현을 빨리 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じゅぎょうで ならったひょうげんを はやく かくことだけに すぎません)’라는 지적도 했다.


나의 시험에 대해 이 학생과 같은 감정이 일어날 가능성은 아마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정말 시험 방법이 ‘전혀’ 도움이 안 되는지, 정말 ‘아무것도’ 터득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는 논의할 필요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학생이 말하는 ‘전혀’라는 말은 어떤 측면에 있어서도 효과가 ‘제로’라는 뜻이다. 나는 이것을 학생이 나름대로 객관적인 관찰을 통해서 나온 숫자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나도 학생 시절에 강조하는 나머지 ‘전혀’라든가 ‘모두’라는 표현을 썼는데, 小論文(논술)을 지도받을 때 그렇게 썼다가 골탕먹은 적이 있다. 그때는 ‘전혀’와 반대인 ‘全部(전부)’를 썼는데, 이 말에 대해 정말 ‘100%’라는 증거가 있느냐는 추궁을 당했다. 허위 진술의 혐의를 받은 것이다. 정확성과 신뢰성을 추구해야 할 논술에서 나는 감정적으로 강조하고 싶어서 무방비하게 ‘전부’라는 단어를 쓴 것이다. 논리적 글쓰기를 따로 배우지 않았던 사람에게 한 표현에 대한 진위 여부를 추궁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그때 나는 결코 사실과 다르게 쓰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학생이 말하는 ‘전혀’나 ‘아무것도’도 수량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감정적 강조 표현으로 이해하겠다.


이 시험 방법을 내가 지지하는 이유
내가 이런 시험 방법을 취하게 된 데는 앞서 설명했듯이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결과적으로 학생들의 습득도가 가장 높다는 촉감을 찾다가 지금의 시험 방법까지 된 것이다. 그 학생은 두 사람씩 짝을 지어서 말하는 시험을 하는 것이 좋다고 나에게 ‘조언’해 주었는데, 만약에 그렇게 시험을 하면 생성 능력을 제대로 측정하지 못한다. 그저 인상으로 점수를 매길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부정확한 것이다. 나도 가르친 경험이 많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점수를 매길 수는 있지만, 나도 가르친 경험이 많기 때문에 이런 평가가 기분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그런 평가를 좋아하는 것 같다. 점수에 관한 협상의 여지가 생겨서 그런 것일까? 내가 학생이라면 그런 평가가 오히려 불만스러울 것이다.


그 학생이 이 시험을 불편해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쓰기 시험이라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수업에서 배운 표현을 빨리 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썼을 것이다. 사실 이것은 나도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부분이다. 왜냐 하면 말은 입의 운동인 데 대해, 글은 손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시험해 보면서 느끼는 것은 말이 더딘 사람은 글도 적게 쓴다는 점이다. 그런데 말을 수적으로 측정하기가 어려워서 글을 측정하고 있다. ‘전혀 도움되지 않는다’는 말은 혹시 그 학생을 비롯한 몇몇 우수한 학생들에게는 맞을지 모르지만 내가 관찰해 온 결과는 대부분의 학생들에게는 그들이 자각하든 말든 도움은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수한 학생에게는 공부 방법에 대한 쓸데 없는 참견일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에게는 언어 생성 능력을 조금씩 올려 주고 있는 것이다.


만족감
어쩌면 그 학생이 정말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문제삼고 있는 객관적 능력 향상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 아니라, 시험 때 느끼는 만족감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다른 사람이 말하는 단어 하나, 조사 하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 혼란에 빠질 때가 많은데, 정작 그 사람이 말하려는 내용은 그게 아닌 경우가 있다. 이것이 문학이 아니라 어학을 전공한 사람들의 약점이다. 그래서 좀더 문학적으로 더 깊은 뜻을 파악하려고 애써야겠다.


나 자신은 내가 받고 싶은 수업을 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의 뜻 또한 다시 생각하니까 내가 학생 때에 받았더라면 하는 수업인 것이다. 지식은 잊어버리기 쉽지만, 훈련을 통해서 얻은 능력이나 암기한 내용 등은 쉽게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몇 년이 지나서 갑자기 생각나 달달 외우게 될 때도 있다. 만약 학생들이 졸업 후에도 10년, 20년 동안 일본어를 활용하면서 산다면 지금 터득한 여러 가지가 여기저기서 도움될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한국어 공부를 통해서 경험한 일이다.


그런데, 수년 후에 만족할 거라는 말에 과연 학생들이 납득해 줄까? 내가 학생이라도 만약 수년 후에 만족할 거라는 말을 들으면 그 수업을 피할 것 같다. 10년 후, 20년 후에도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수업도 필요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수업도 해야 하는 것이다. 중간, 기말 시험의 의미에 대해서도 훗날에 이해할 수 있는 시험이 아니라, 의미를 이해하고 볼 수 있는 시험이라야 할 것이다.

 

물론 학생들의 취향은 각각 다르기 때문에 모든 학생들이 만족할 수 있는 수업을 하기란 어렵다. 그러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는 수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 까다로운 학생을 불러 내 수업에 참여하게 한다. 그 학생은 ‘나’다.


내가 나의 학생이라면
나는 수업할 때 학생들 중에 ‘나’ 자신이 끼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학생들에게 부드럽게 대하게 되는 이유는 학생들 사이에 끼어 있는 내가 무섭기 때문이다. 그 ‘나’라는 학생은 워낙 깐깐해서 내가 수업을 잘 못했던 날에는 항상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런데, 그도 시험 방법에 대해서는 여태껏 큰 비판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런 지적은 있었다. 그것은 수업의 비전을 공개하고 시험 방법 및 평가 기준을 명확히 하는 것은 좋은데, 부작용으로 시험 때 경쟁이 치열해진다는 점이다. 한국 대학들은 상대평가를 하기 때문에 객관적 실력 수준이 아니라 그 반에서의 위치로 성적이 결정되고 만다. 그래서 나는 경쟁이 치열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수업의 비전이나 평가 기준 등 일부 비공개로 할까도 생각했는데, 그는 이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왜냐 하면, 시험이 치열하지 않은 것은 수업의 비전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험 때 경쟁이 치열해지면 객관적인 일본어 실력은 상대적으로 높아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학생들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학점에 관해서 학생들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만들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좀더 나은 대안을 찾을 때까지 당분간 지금의 평가 방법을 계속하려고 한다.


참고로, 그 학생이 의견을 쓴 글은 모두 62어절. 물론 일본어로 썼다(위에서 인용한 일본어는 한 글자도 수정하지 않았는데, 보시다시피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본어다. 눈에 띄는 오류는 없고, 두어 군데만 고치면 완벽한 일본어가 된다). 이것은 그 학생의 일본어 실력을 나에게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점수를 높이는 데도 도움되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더 이상 쓸 내용이 없어지면 이런 의견을 써도 점수를 올리는 데 도움된다. 단, 의견 중에 수량을 나타내는 표현은 좀더 신중하게 다루어 주시면 고맙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