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생활

오자키 2009. 8. 29. 17:01

논문에 대한 고민
얼마 전에 대학원에 다니는 일본 유학생들과 같이 식사를 했다. 두 사람은 박사과정에 다니는 선배들이었고, 한 사람은 석사과정에 다니는 사람이었다.


지금 석사과정에 다니는 사람이 논문 주제에 대해 고민 중이라고 해서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는 한국어 문법과 일본어 문법의 차이에 관심을 갖게 되어, 지도교수에게 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지도교수는 아무런 건설적 충고 없이 그의 문의를 일축했다.


그래서 우리가 대신 그의 논문 주제에 대해 생각해 주게 되었는데, 그는 일본어와 한국어의 문법 체계를 분석하는 방법의 차이가 궁금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의 말의 뜻을 이해하는 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문제 의식 갖기는 어렵다
우리가 이해한 것은, 그는 일본의 학교 문법과 한국의 학교 문법의 형태 분석 방법이 왜 이렇게 다른가 하는 점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일 대조문법이 되기가 어렵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일본에서도 형태 분석 방법은 학파마다 다르다. 학교 문법은 그 중 하나이며, 일본의 언어학자들 중 그 문법 체계를 이용해서 분석하는 사람은 오히려 예외적이다. 한국 학교 문법의 형태 분석 방법은 일반 언어학에서 하는 방법과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어서 일본에서도 비슷한 분석 방법으로 일본어 문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어 <基礎日本語文法> (益岡隆志・田窪行則, くろしお出版, 1992)는 이와 같은 책들 중 하나다.


결국 그의 문제 의식은 한국어와 일본어의 동사 활용이라는 문제와, 두 나라 학교 문법의 차이라는 문제가 엇갈려 있었다.


만약에 전자를 문제로 삼는다면 활용의 기원이라는 문제까지 언급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연구다. 그래서 한 선배는 적어도 4년은 걸린다고 말했고, 다른 한 선배는 평생 연구하는 주제가 될 만하다고 했다. 나도 아무래도 1~2년으로 석사논문을 쓸 수 있는 주제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활용의 대조 연구라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역사적 비교 연구가 되는 것일까?


그런데, 만약에 후자가 문제가 된다면 일본어 연구가 끼어들 필요가 없다. 한국어 연구에서도 박승빈과 같은 옛날 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있다. 그것과 지금 최현배의 흐름을 이어받은 학교 문법을 대조해서 연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디가 어떻다는 이야기를 할 때, 그런 일을 할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부닥친다. 무엇이 옳다고 하기 어려운 마당에 어떻게 석사논문에서 예를 들어 최현배가 옳다고 결론 지을 수 있을까? 더군다나 아니다, 박승빈이 옳다는 결론이 된다면 정치적 문제를 건드릴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는 우리와 같은 새내기 학자들이 주제로 삼기 어렵다. 아직 마쿠노우치(幕の內)도 되지 못한 스모 선수가 요코즈나(橫綱)와 싸우는 것과 비슷하다.


그가 논문 주제를 잡으려고 할 때 빠진 개념이 몇 개가 있었다.


선행 연구
첫째, 그는 자신이 관심을 갖게 된 분야에서 지금까지 어떤 연구나 논의들이 있었는지 알아보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의 학교문법을 대조한다 하면 일본어 문법 연구의 계보와 한국 문법 연구의 계보를 먼저 알아봤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연구가 되어 도저히 석사논문에서 감당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도 그 단계에서 깨달았을 것이다.


연구 방법
둘째, 그는 연구의 방법론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것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고, 주제에 따라서 지도교수가 인도해 주어야 하는 부분이다. 그리스어에서 교수를 까씨기띠스(καθηγητής)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도자라는 뜻이다. 물론 그의 문제 의식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도 있지만, 그렇다면 주제를 잡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이 교수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한국의 교수님들은 καθηγητής라고 부르기 어려운 분들이 조금 있다.


나는 논문을 쓰기 전에 논문 작성과 관련된 책들을 여러 권 읽었다. 그 중 움베르또 에꼬(Umberto Eco)의 <論文作法> (ウンベルト・エコ 지음 / 谷口勇 옮김, 而立書房, 1991)에는 주제를 잡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이라든가, 자료를 모으는 방법, 모은 자료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에 대해 아주 친절하게 쓰여 있어서 큰 도움이 됐다. 나도 처음에는 가르쳐 주는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일본에서는 논문지도를 발표 수업 형식으로 진행한다고 들었다. 물론 대학마다 다르겠지만 부러울 따름이다.


물론 나의 경우는 대조 연구의 방법론을 지도교수님에게서 배웠다. 나는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서, 그때 마침 교보문고의 일본 서적 매장에서 발견한 대조연구에 관한 논문집을 구해서, 그 중 방법론에 대한 논문을 요약・번역하고 이를 바탕으로 내가 생각하는 연구 계획을 덧붙여서 지도교수를 찾아갔다. 그때 내가 연구 방법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을 지적 받았고, 대조 연구가 어떤 것이라는 것도 배웠다.


나의 경우는 책만 봐서는 대조연구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 그도 직접 지도를 받아야 자신의 연구 분야에 대한 방법을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론
그리고 셋째, 그는 이론적 바탕을 도외시하고 있었다. 연구를 할 때는 기존의 이론들을 바탕으로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고 때로는 조사를 해야 한다. 만약에 새로운 이론을 도입해야 할 때는 나는 모르겠다. 그럴 때는 아마 기존의 이론을 수정하는 이론적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내가 석사논문을 썼을 때는 전에 여러 가지로 배운 이론들을 대부분 잊어버려서 이론적 문제를 건드릴 염려가 있는 부분을 세심하게 피하면서 분석해야 했다. 분석 하나 할 때도 어떤 방법에 의해서 분석한다고 해야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힘들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히려 읽는 사람이 힘들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어야
이와 같이 논문을 쓸 때는 선행연구와 방법론 그리고 이론적 배경이 확실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 중 가장 어려운 것은 방법론인지도 모른다. 이것만은 혼자서 생각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선배라고 해서 충분히 가르쳐 줄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책을 여러 권 봤다고 터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도 교수와 같은 베테랑만이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경우는 잘 모르지만 일본 유학생들의 경우는 의욕이 앞서지만 방법을 몰라 헤매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을 잘 키울 수 있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혼자서 배울 수 있는 것들
그런데, 혼자서 할 수 있는 부분은 분명 있을 것 같다. 먼저 관심을 가지는 일은 혼자서 할 수 있다. 물론 우수한 지도 교수 밑에서는 학생들이 특출한 부분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혼자서도 충분히 관심을 가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관련 연구 성과를 찾는 것. 나의 방법은 먼저 교보문고에 가서 관심 있는 분야의 가장 새로운 연구서를 사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참고문헌 목록을 보고 다시 그 연구서와 논문들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연구 성과를 찾는다. 물론 이런 방법은 완전하지는 않다. 왜냐 하면 학파가 다른 연구에 대한 인용이나 언급을 피해서 그런 연구 성과에 대한 지식을 모조리 빠뜨려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비록 신간이지만 그 학자가 예전에 쓴 논문들을 수록한 경우는 그 뒤에 나온 연구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론에 대한 공부도 어느 정도 혼자서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때 어려운 것은 어떤 이론이 주류가 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도 많이 인용되는 이론들은 주류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그 분야에 관한 연구사가 나와 있으면 더욱 쉽게 연구의 흐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이 무엇인가 하는 고민
나는 혼자서 공부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지식이 무엇인지 모르고 지냈었다. 그러다가 대학원 수업에서 임용기 교수님이 지식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던진 말이 인상 깊게 마음에 남아, 그때부터 지식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그때 당시 나는 돈이 없어서 책도 구하기 어려웠지만 가능한 한 책을 통해서도 지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래서 깨닫게 된 것은 지식이란 반드시 뿌리와 역사가 있고, 우리의 지식들은 그 위에 서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후,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것이 쉬워졌다. 논문을 쓸 때도 먼저 무엇을 알아야 한다는 것까지는 알 수 있게 됐다. 그 정도가 됐을 때 나는 겨우 지도 교수를 찾아 갈 용기가 생겼다.


성경에서도 에티오피아 고관이 이사야서를 읽고 있는데, 필립이 ‘지금 읽고 있는 것을 이해하십니까?’라고 물어봤을 때 그는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소?’라고 대답했다.


또한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うひ山ぶみ>에서 ‘학문에 뜻을 세웠다면 먼저 스승을 잘 골라 그의 업적과 학설을 잘 생각해서 입문해야 한다(物まなびに心ざしたらむには, まづ師をよく擇びて, その立<たて>たるやう, 敎<おしへ>のさまを, よく考へて, 從ひそむべきわざなり)’라고 충고하고 있다.

 

가르쳐 주는 사람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