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와__우 2010. 6. 4. 17:03

죽주산성(竹州山城)을 찾아서

 

  리나라의 역사 속에는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아낌없이 희생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리 안성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더욱이 안성지역은 예로부터 삼남지방과 서울을 연결하는 교통과 군사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외세의 침략이 많았다. 그때마다 안성지역 백성들은 단결된 힘으로 외적을 물리쳤던 것이다.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난 죽주산성을 찾아가 보았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의미있는 답사였던 것 같다.

 

     

 

죽주산성에서 죽주(竹州)는 현재 죽산(竹山)의 옛 명칭이며, 산성은 산에 쌓은 성의 의미를 갖는다. 성은 기원전 1~2세기경 높은 지대에 집단 거주하던 사람들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 주변에 둑을 쌓거나 구덩이를 파놓으면서 시작되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산이 많은 지형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산성이 발달하였다. 그리고 성은 그 목적과 형태에 따라 도성, 읍성, 행재성, 산성, 진성, 장성, 왜성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왕궁과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한 도성, 지방의 행정․경제․군사 기능을 담당했던 읍성, 왕이 행차하여 임시로 머물기 위해 축조했던 행재성, 이민족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방어․도피용으로 쌓았던 산성, 군사적 요충지에 쌓은 진성, 이민족의 침략에 대비하여 국경과 요새지에 쌓은 장성, 왜군이 임진왜란 때 군사적인 기지로 쌓은 왜성들이 그것이다. 이제 성의 이름만으로도 성의 성격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죽주산성은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민족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방어․도피용으로 산에 쌓았던 성인 것이다. 고려 시대에는 몽골군의 3차 침략이 있자 송문주 장군이 백성들을 이끌고 산성으로 들어가 끝까지 항쟁하였다. 그 결과 몽골군은 15일만에 돌아갔고 이후 백성들은 성안에 송문주 장군의 사당을 세워 제를 올리며 뜻을 기렸다고 한다. 여기서 한가지만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몽골’이 맞을까? ‘몽고’가 맞을까? 몽골의 학술적 용어는 ‘mongol'이다. 그래서 ’몽골‘이라 표기하고 그렇게 호칭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몽고’라는 명칭은 한자로 ‘蒙古’라고 쓰는데 ‘무지몽매하고 고루하다’라는 뜻으로 몽골족을 무시하는 단어라 할 수 있다. 마치 일본의 교과서에 조선인을 ‘조센징’이라 표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몽골’이라 표기하고 호칭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인식일 것이다. 이렇게 고려시대에는 몽골족을 막아냈고,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이곳 죽주산성에서 변이중(邊以中), 황진(黃進) 장군의 부대가 왜군과 싸워 크게 승리하기도 하였다.

죽주산성의 둘레는 약 1. 2km이고 삼국시대 처음 축성되어 고려시대에 크게 중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본성, 외성, 내성 3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각 성에서 철기시대의 토기류와 기와 등이 발견되었는데, 당시의 세력과 생활상을 조명할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이렇듯 성은 단순히 성곽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성곽을 둘러싼 자연환경, 성곽의 각종 유물들이 망라되어 역사적인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곽인 ‘수원화성’은 개혁의 시범도시로서가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이 왜곡한 그대로 일개 성곽으로 인식되어 근대 초기의 군사 건축물로 축소된 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죽주산성은 자연미가 그대로 살아있는 성곽으로 산성을 따라 산책하듯 걸어보는 맛이 일품인 곳이다. 더욱이 주변의 울창한 소나무와 침엽수들이 과거 외적을 막아냈던 안성 백성들의 굳건했던 호국정신을 보여주는 듯 하기도 하다. 이러한 내 고장에 있는 죽주산성만큼은 개발이라는 명목아래 성을 둘러싼 자연환경과 문화재가 훼손되거나 왜곡되지 않기를 기대해본다. 또한, 죽주산성을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만들어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과거 숭고하게 희생한 우리 선조들에 대한 보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잘 보고 갑니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소풍가던곳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