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adership

오영석 2005. 3. 12. 13:39

평소 살아가면서 느꼈던 것들, 특히 내가 프랑스에 살며 느꼈던 한국.한국인.한국적인 것 등에 대하여 쓰려고 합니다. 반드시 과학과 기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아마 때로는 좋은 즐거운 이야기도,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도 쓸 것입니다. 지금 생각은 분량이 어느 정도 되면 한데 모아 책으로 내 볼까 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보내주는 해석.주석.논평을 보탬도 뺌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함께 실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한국어로 쓰고 싶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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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의 한 봄날이었습니다. 서울에서 일을 보던 나는 한 친구의 제의에 대찬성을 하였습니다. 경기도 광주의 영능을 방문하자는 제의 였지요. 세종대왕의 묘소는 언제라도 가보고 싶은 곳이었지요. 국민학교 (나는 국민하교를 다녔지요) 때 소풍 가서 본 기억으로는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 넓게 자리 잡은 능이며, 그 앞으로 두 줄로 서 있던 화강암으로 된 조각들이 기억에 남아 항상 또 다시 가보고 싶었던 곳으로 내 마음 속에 남아 있었지요.
영능 정원 안에는 세종대왕 때 만들어 졌던 것으로 알려진 각종 기기들의 모조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기기들을 둘러 보고 있는 우리에게 안내해 주시는 분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니 과연 옛 분들이 큰 일을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각나는 점들도 있었습니다.
국민학교와 중 고등학교 역사시간에 나는 지난 날의 우리 선조들이 이룩하여 놓은 찬란한 발명과 발견의 업적을 배웠으며, 참으로 위대한 과학기술을 이룩하였다고 여기어 왔습니다. 선조들의 위대한 업적에 대한 나의 믿음과 경외김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나, 지금에 와서 한가지 의문이 나는 점이 있다면, 그러한 발명.발견들에 관한 사항들은 항상 과거형으로만 표현이 되어 있으며, 그 세대의 과학기술 발전과 어떠한 연계가 있었는지는 전혀 배운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찬란한 과학기술 문화를 형성 하였으나, 유감스럽게도 시대와 공간적으로 유리되어 이룩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한 시대의 과학기술은 여름 날 비온 후에 돋아 나는 버섯처럼 밑도 끝도 없이 한꺼번에 발전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어떠한 환경이 존재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종 때만 발명 발견을 한 것처럼 내게 비쳐집니다. 설명의 실마리를 찾는 다면 아마도 우리나라에는 체계적으로 발전되어 온 과학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성숙되어 가는 과정에서 기술이라는 꽃망울을 만들고, 세월과 함께 발전하는 기술의 꽃은 활짝 펴 아름다운 자태를 과시한 후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결국에는 과학에게 새로운 꽃씨를 잉태 시킨 후 사람들의 기억의 저 편으로 사라져 갑니다. 지속적인 과학의 뒷받침이 없이 피어난 기술의 일례는 외부로부터 들어 온 문물로부터 받은 자극에 대한 일시적 창조력일 수도 있겠지요. 모방도 그 일례가 될 수 있지요.

과학과 기술이 성장하고 결실을 맺기 위하여 서는 그 것들이 태어 났을 때부터 지속적인 관심과 활용이 없으면 더 크게 발전 할 수 없지요. 그러나 우리 선조들의 경우는 과학과 기술이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나아간 것 같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예로 인쇄기술을 들 수 있겠습니다. 얼마 전에 독일의 조그마한 도시 마인즈 (MAINZ)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구텐베르그 (GUTENBERG) 박물관에 가 보았지요. 내가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며 배운 역사는 우리 선조들이 처음으로 금속활자를 발명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구텐베르그는 우리나라 보다 약 200년 뒤에 금속활자와 인쇄기술을 다시 발명한 것이 되겠지요. 내 관점에서 보면 누가 먼저 발명하고 늦게 발견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발명.발견의 순간부터 그러한 것들이 어떻게 사용되고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기 1234년에 금속활자 발명과 함께 책들을 발간하였으나 현재는 한 권도 전하여지 않으며, 현존하는 제일 오래된 책은 1297년에 발간한 불경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훌륭한 인쇄기술을 발명한 후에 변한 것들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아마 예의 범절과 종교에 관한 몇몇 책들이 발간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 인쇄기술이 더 발전하여 어떤 어떤 책들이 발간되고 그 것이 사회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하여서는 알려진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 백성전체가 쉽게 읽고 쓸 수 있는 한글이 아직 제정되기 이전이었으니 책을 발간하여 널리 배포를 하였다 하더라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수가 적을 수 있었다는 것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러한 인쇄기술의 활용.보급.개량 등에 대한 정책적인 뒷받침이 없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서양에서 하였듯이 인쇄기술을 정보의 민주화를 위한 정보교류의 매체로 발전 시키지 못하였고, 따라서 정보를 공유하여 이룩할 수 있는 공동사회의 발전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는 대조되게 유럽에서는 구텐베르그가 1450년경에 인쇄기술을 (재)발명하여, 이 새로운 기술을 이용하여 많은 양의 성서를 출간하였습니다. 지금도 그 원본들을 박물관에서 볼 수 있으며, 이 성서들은 당시까지만 해도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신의 말씀을 대중이 직접 접할 수 기회를 만들었으며, 이는 성직자들의 세력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직자의 세력약화를 유발한 신기술은 봉건영주에게는 크나큰 선물이 아닐 수 없으며, 세력의 확장을 위하여 하늘의 선물인 인쇄기법의 활용.보급.개량을 정책적으로 펼쳐 나아갔습니다. 이러한 정책적인 뒷받침은 성서의 출판을 넘어서서 지식.기술.정보의 교류를 용이하게 하였으며, 발명의 노력을 경제적으로 활용하게 되어 공동개발협력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발명은 일회용 기술로 끝나는 경향이 많았었는데 반하여 서양은 이를 과학과 연계 시켜 기술발전의 계기로 활용하고 잇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차이점은 국가형태에 기인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봉건 영주 제도 하에서는 누군가가 새로운 발명을 하면 영주는 발명자를 우대하여 자기 성에 묶어 놓아야지만 타 영주에 비해 유리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빨리 퍼뜨려 타인들이 공유할 수 있게 하여야지만 기술보유자가 다른 영주 밑으로 간다고 해도 큰 타격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기술보유자로 보면 자기 기술을 널리 알려 제자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적절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절대 군주 국가에서의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군주로서 보면 기술자는 오도갈대도 없는 자기의 신민으로 기술을 오직 군주인 자기에게 밖에 제공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기술자로 보면 기술을 다 전수하여 주고 나면 본인은 더 이상 군주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될 수 있는 대로 느린 속도로 기술을 전파하거나 아니면 아예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만이 기술을 사용하여는 것입니다.

나는 이 시점에서 질문을 하여 봅니다. 한국에 어떻게 지금까지도 없어 보이는 듯한 (기초)과학을 심고, 기술을 발전 시키며, 나아가서는 – 어쩌면 더 중요할지도 모르지만 – 어떻게 정보들을 공유하고 공동협력을 통하여 과학발전의 심도를 높이고, 기술개발의 질과 속도를 올릴 수 있을 까 하고…

오영석

2002년 5월 27일, 프랑스 리용에서

어제 수업시간의 한 내용이네요.
깨닫지 못한것이었습니다.
항상 자랑스럽게만 생각했던 내용인데..교수님 말씀대로 어떠한 것이든 퍼트리는것 또한 개발에 못지않은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만의 유산이 아닌 그것을 공유할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는것을 배울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교수님의 글에서 다시한번 배우고 갑니다. ^^* 감사합니다.
이런 생각은 님이 아니더라도 전부터 많이 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