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 팔마스

우정(牛亭) 2010. 3. 18. 09:16

라스 팔마스(Las Palmas de Gran Canaria)를 아십니까?(3)

 

1973 8월에 첫 직장이었던 씨티은행 서울 지점을 5 년 만에 그만두고

약간의 우여곡절 끝에 내가 드디어 조그마한 원양회사의 기획실장으로 옮겼습니다. 

 

이 회사는 참치어선 몇 척에 두 척의 트롤 어선을 운영했고

나중에 연안어업 어선도 수 척을 보유했습니다. 

 

트롤 어선은 대서양으로 출어할 어선이지만 유럽 출어 전에 일본에서 출어준비를

다 마친 뒤에, 국내에서 소위 수입선박의 인수선원을 일본으로 보냅니다.

 

 

 (트롤 어선.  배 뒷쪽으로 그물을 내리고 올리고 합니다.)

 

명목은 수입어선의 인수선원인데 사실상은 조업을 할 수 있는 완전한 선원 구성을 갖추고 나갑니다.

배를 인수하자마자 일본을 출항하여 북태평양으로 올라가면 그 때는 거기 명태가 지천으로 있었습니다.

어로 규제도 없었던 때라 몇 번 그물을 내리기만 해도 만선이 되었습니다 

 

이 명태를 싣고 국내로 들어오는데 이 배가 아직 국내에 등기도 되지 않은 배라 어획을 공식

위판장에 올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국내 명태 도매상들과 연락하여 시골

작은 항구에 입항하고 일종의 밀수입을 합니다.  세무자료도 없이 팔아 억대 매상을 올려 회사에

입금하지도 않고, 사장 개인 주머니에 넣었다고 합니다.  30여 년 전인데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일이 그 때는 가능했습니다.

 

 

 

그 해 12, 회사는 이 트롤 어선의 대서양 조업을 위해 스페인라스 팔마스 기지를 운영

해야 하므로 외국어 대학 스페인어 과 졸업생을 두 명 뽑았습니다.  훗날 나를 라스 팔마스

두 번이나 가게 한 그 친구가 그 중의 한 명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해 11 1오일 쇼크가 왔습니다.  1 배럴에 $2.50 이던 원유가 $11

올랐습니다.  원양어업 회사들이 엄청난 큰 타격을 입습니다.  1974년 한 해를 고민 고민하던

회사는 1974년 말에 비용절감을 위해 서울 본사를 닫고 전 직원을 부산 사무소로 내려 보내게 됩니다.

 

 

 (트롤 어선의 조업도.  그물을 바닥으로 내려 고기를 잡습니다.  그러므로 해저가 얕은

  대서양연안이 그 주요 어장이 됩니다.  어종도 도미, 문어 조기 등등입니다.)

 

 

결국 1975 3, 일 년 반 만에 나는 이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우리도 서로 헤어져야 했습니다.  나는 새 직장에 적응해 가느라 그 거칠기 짝이

없던 중소 원양회사를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짧은 기간 만났던 그 친구는

늘 내 기억에 남아 있었습니다.  1977년 나는 다시 새 직장으로 옮기면서 더욱더

바빠졌고 그도 그 때는 이미 라스 팔마스 기지로 파견되어 서로 연락이 완전히 끊어

지고 말았습니다.

 

 1982전두환 대통령의 아프리카 순방이 있었는데 그 일정에 라스 팔마스

들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라디오에서 전두환 대통령 순방 일정을 소개하는데

이 친구의 목소리와 이름이 들렸습니다.  그 현지 통신원이 바로 이 친구였습니다. 

그 때서야 이 친구가 라스 팔마스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친구는 결혼한 뒤 라스 팔마스로 파견되고 기지업무를 시작했습니다.  해외 어업 기지의

업무는 첫째가 선원관리입니다.  승선, 하선과 중도귀국, 환자 치료, 사고처리 등등.

 

심지어는 선상반란살인사건도 있습니다.  내가 있을 때에도 우리 회사 선박이 야간에

소련 국적 대형화물선과 충돌하여 전기사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만선하고 들어오면 하선하는 선원관리가 마치 작전 마치고 귀대한 전투병과 꼭 같습니다. 


망망대해에서 목숨을 걸고 험한 격랑과 사투를 벌이고 어획을 얻어 돌아왔으니 위로하고

다독거려야 합니다.  그 다음이 선박수리출어준비입니다.  뭍에 있는 시간을  한 시간이라도

줄이고 출어를 앞당기기 위해 항상 달음박질을 쳐야하는 생활입니다.

 

1981년, 제2차 오릴 쇼크가 왔습니다.  원유 1배럴 가격이 U$40 으로 올랐습니다.

기름값이 오르니 세계경제가 위축이 되고 생선의 소비는 반대로 줄어들어 다시 원양어업

회사들이 큰 타격을 입습니다.  이후로 많은 중소 원양회사들이 부도가 나고 문을 닫게 됩니다.

 

1980년대  중반 어느날, 우리가 함께 했던 회사도 부도가 나고 말았습니다.  친구는 현지에 남아

독자의 사업을 하기로 한 모양입니다.  내가 그런 사정을 알 리는 없습니다.

 

80년대 후반이 되면서 우리나라도 일본과 꼭 마찬가지로 20년의 시차를 두고 이제

더 이상 그 험한 원양 배를 타려는 선원들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 빈 자리는 당연히

동남아 출신 선원들과 중국의 조선족 선원들로 대체가 됩니다. 

 

 

그러다가  1987년 나는 런던으로 연수를 받으러 가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라스 팔마스에 이 친구가 있으려니 생각하고 런던에서 이 친구에게 편지를 써 보냅니다.

주소는 모르지만 틀림없이 한인사회는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겉봉에 라스 팔마스 한국  영사관

주소를 쓰고 봉투 위에 한글로 이 편지를 OOO 에게 전해 주세요.라고 써서 보냈습니다. 

 

과연 이 친구는 그 때까지 라스 팔마스에 있을 것이며 주소도 모르고 이렇게 보낸 이 편지는

과연 라스 팔마스에서 내 친구에게 배달 될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