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과 스탈린은 왜

우정(牛亭) 2012. 7. 13. 22:49

 

 

 

모택동과 스탈린은 왜 한국전쟁을 시작했나? (4)

 

 

-모택동 한국전쟁에서 이익을 챙기다.

 

 

(압록강을 넘는 중공군)

 

1950년 10월 25일, 드디어 압록강을 넘어 옵니다. 미군의 폭격이 두려워

낮에는 꼼짝 않고 밤에만 이동합니다. 그래서 UN군은 압록강을 넘어오기까지

감쪽같이 몰랐습니다. 일거에 반격을 당했습니다.

 

 

(팽덕회 군대)

 

 

김일성이 신의주를 넘어 만주 땅으로 넘어 갔을 때 팽덕회에게 불려가서 사전

허가도 없이 자기 작전지역에 들어 왔다고 선 채로 귀싸대기를 얻어맞았다고

합니다.  이제 북한군은 75,000명, 그러나 중공군은 450,000 명입니다.

 

 

(펑 드어 화이-彭德懷-Peng De Huai)

 

그러고는 “김일성이 이후 군사작전 지휘에는 전혀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모택동에게 보고했습니다.

 

당연히 김일성의 통수권은 몰수되고 팽덕회가 조중 연합군 사령관으로

모든 작전권을 가집니다. 공식적으로는 1950년 12월 7일 평양을 탈환하고

지휘권을 넘겼습니다.

 

 

(팽덕회와 김일성)

 

 

이제 모택동이 김일성의 전쟁을 인수했습니다.  

UN군이 38선 원상복귀를 위해 "작전상 후퇴"를 해 남진해 내려오면서,

항공 엄호 없이는 길어진 보급선이 여지없이 미군에게 폭격을 당하니

팽덕회는 38선에서 진격을 멈추자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모택동은 “스탈린에게서 최대한 얻어낼 때까지 멈출 수 없다.”

하면서 1950년 12월 13일 “38선을 넘으라!”고 명령합니다.

 

(팽덕회와 모택동)

 

 

1951년 1월 중공군은 서울을 재점령하면서 스탈린에 대한 모택동의 위신을 한껏

세워, 스탈린으로부터 “미국군에 승리한 것”에 대한 축하 전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중공군의 끔찍한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1950년 12월 19일 팽덕회의 보고입니다. “영하 30도의 혹한에 모두 동상이 걸리고

방한복도 방한화도 없이 노지에서 잔다. 미군의 네이팜탄 투하로 다 타버려 신발이

없는 병사도 있다.  상상하지도 못한 손실이다.“

 

러시아 자료는 중국 군수관이 “모두 얼어 죽었다.”고 말했답니다. 

소위 “런하이 짠슈(人海 戰術 : human wave tactics)" 입니다.

 

 

(중공군 포로들)

 

 

영국의 배우인 마이클 캐인(Michael Caine)씨가 저자에게 직접 증언했습니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공산주의에 대해 호의적이었답니다.

 

그러나 한국전에 참전해 중공군이 UN군의 총알이 완전히 떨어질 때까지 죽어도 죽어도

끝없이 밀려오고 또 밀려오는 것을 보고 “자기 국민의 목숨을 저렇게 돌보지 않는

것이 공산주의인가?”하고 영원히 자기 생각을 바꾸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사람뿐이라고 해도 이런 것을 소위 “전술”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문명인이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1951년 1월 25일, UN군이 다시 반격에 나서자 전세는 역전되었고

중공군의 전사자 수는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원산항 폭격)

 

 

2월 25일 팽덕회가 모택동에게 “참담한 어려움”과 “불필요한 대량 희생”

직접 말하려고 베이징으로 날아가 비행장에서부터 “中南海”(공산당 중앙본부.

청와대나 백악관에 해당)로 달려갔습니다. 모택동은 그의 벙커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고 제지하는 경호원들을 제치고 침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습니다.

 

보고를 받은 모택동은 팽덕회에게 말했습니다.

 

 

(현재의 中南海 정문 신화문)

 

“이 전쟁은 오래 간다. 빨리 이기려 애쓰지 마라.”

이런 모택동의 전략이 1951년 3월1일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에 드러납니다.

 

 

“적(敵)은 대량 손실을 입기 전에는 철수하지 않을 것이다. 미군을 없앨 때까지

무한한 인명 자원을 쓰겠다. 현재 십만 명 손실이 났지만 십이만 명 보충하고

2~3년 내에 3십만 명 손실도 각오한다.

 

수년에 걸쳐 수십만 미군의 목숨을 소모시키겠다. 미국을 심각하게 약화시킬

터이니, 우리에게 최강의 군대와 군수산업을 구축하도록 도와주시오.“

 

모택동이 6.25전쟁을 계속 끌고간 이유가 바로 모택동의 군사력 강화,이것이었습니다.

 

(현재의 中南海)

 

 

모택동은 계획대로 전투기 수리 공장 건립을 얻어내며, 60개 사단을 무장할

무기 생산 공장 계획을 제시하고, 속속 소형 기관총 제조 기술 이전 계약부터

하나씩 얻어 냅니다.

 

(B-29 폭격기)

 

 

1951년 6월 3일 김일성은 결국 자기에게 남을 것이라고는 미군의 폭격으로

황무지가 된 북한 땅 밖에 없게 될 것을 인식하고, 중국에게 비밀리에 협상

개시를 타진합니다.

 

그러나 모택동은 한국의 이해와는 상관없이 전쟁을 이용하여 더 많은

군수공장을 얻어내려고 압박을 가합니다.

 

 

(철도 폭격)

 

 

1951년 7월 스탈린도 휴전 협상에 찬성합니다. 그러나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더 얻어 낼 수 있을 때까지 전쟁을 늘이려고 억지의 포로 송환 조건을 가지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1952년 7월 14일 김일성은 모택동에게 협상을 받아들이자고 애원을 합니다.

 

북한 성인 남자의 1/3이 희생됐습니다. 그러나 이제 김일성은 전쟁을 끝낼

힘이 없습니다. 김일성은 이제 미국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기를 제거하려는

모택동이 더 두려운 존재가 됐습니다.(실제로 모택동이 김일성 제거계획 있었음.)

 

모택동에게는 오직 자기 권력 강화 목적 외에는 남북 한국인의 참담한 고난

고사하고, 중국 인민의 목숨도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문명국에서 이런

사람을 국가 지도자라고 하겠습니까? 히틀러와 한 치의 차이도 없습니다.

히틀러 존경한다는 사람 있습니까?

 

휴전 성립까지의 뒷 이야기 계속됩니다.(계속)

 

ㅇㅇ 히틀러는 최소한 자기동족을 위해 싸우기는 했고 진거지만 애초에 모택동은 철두철미한 이기주의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