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 단상

우정(牛亭) 2013. 2. 19. 17:59

 

여단본부 참모실 근무(3)

 

 

낯선 여단본부로 옮겨가니 여간 불편하지 않습니다.

 

2대대는 포항에서부터 모두 낯익은 얼굴이고 익숙했던 분위기였을 뿐 아니라

대대에서는 대대장실이 최고니까 무슨 일이든지 당연히 최우선의 편의가

보장되었습니다.

 

 

 

(고 천자봉이 찾아간 투이호아 해변 모래밭의 청룡 1진 여단 본부 자리의 폐허)

 

 

특히 캄란 후방으로 빠졌을 때, 대대 주계에 들어오는 모든 식재료와

과일의 제일 좋은 것은 당연히 대대장실 배당이었습니다. 운전병 하사와

당번병이 수시로 주계에 드나들면서 그렇게 챙겨 왔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1966년 그 시절에 국내에서는 꿈에도 구경도 못하는

캘리포니아 산 선키스트(sunkist) 오렌지를 몇 박스를 가지고 와서

박스 째 야전 침대 아래에 놓고 하루 종일 까먹었습니다.

 

지금은 주위에 기막힌 맛들이 널려 있지만, 그때는 그 맛이 얼마나

좋던지 평생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단본부에 오니 서열이 한참 뒤로 밀렸습니다. 여단장, 참모장,

그리고 인사참모, 정보참모 다음으로 다섯 번째였습니다.

 

어디로 가도 잘 아는 사람도 없고, 중대에서 파견 왔던 경호요원도

없으니 운전병과 당번병 그리고 나 이렇게 달랑 셋입니다.

 

캄란 후방에서 항만 경비로 남아있는 2대대 생활이 눈에 선했습니다.

 

나는 팔자에 호사할 삶은 없는가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캄란에 남아 있었으면 밖으로 나돌아 다니며 무슨 일을 저질렀을까,

그래서 무슨 위험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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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여단본부 분위기에 적응해 가고 있던 어느 날 오윤진 작전참모

께서 답장을 보내라고 주신 편지가 한 통 있었습니다. 사령부에 있는

선배 대령의 그 편지 내용 중에 “육군은 파월 전부터 강재구라는 군신

(軍神)이 있는데 우리는 아직 군신이 없다. 사령관께서 이점을 유념해

달라고 하신다.“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1966년 8월 11일, 아직 추라이로 이동하지 않은 때였습니다.

 

이인호 대위의 전사 소식이 들어오자마자 여단본부 회의가 소집되어

수 시간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보통의 회의보다 훨씬 긴 시간이 지난

뒤에 이인호 대위의 희생적인 전사 사실이 종군 기자단에 공표되었고

이어서 현장 사병들의 증언이 뒤따랐습니다.

 

이인호 대위의 전사 배경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맹호부대는 사단규모이므로 대체로 작전이 대규모 포위작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패주하는 베트콩은 도망가기에 급급해 무기 회수에 신경 쓸

짬이 없어 노획 무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청룡부대는 교두보 확보 작전이므로 베트콩을 작전구역에서

밀어내는 전투라 패퇴하는 베트콩은 모두 죽은 베트콩의 무기도 모두

걷어서 도망가고 맙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사살 베트콩 수에 비해

노획 무기의 숫자가 적었습니다.

 

노획무기가 적다는 것은 청룡부대는 혹시 양민 학살이 아니었느냐는

의심과 비난을 계속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노획무기

담당인 대대 정보 장교는 작전 때마다 노획무기 숫자를 늘리기 위해

노심 초사해야 했습니다.

 

이런 배경이 이인호 대위가 직접 베트콩 동굴에 뛰어들어야 했던

배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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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단본부에는 또 대대에는 없는 군종실이 있었습니다. 소령 계급의

군목이 계셨고 그 아래 군종병이 한 명 있었습니다.

 

154기 쯤의 견종제 병장이었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을 때에는 자주

군종실로 놀러가서 거기 있는 책을 빌려 읽곤 했습니다.

 

(군종실이 주관한 야외 예배 광경)

 

 

이렇게 지내다가 드디어 투이호아를 후속 백마부대에 넘겨주고

추라이 지역으로 이동해 갑니다.

 

그 때 오윤진 참모께서는 새로 오시는 김연상 장군이 일 년 더

연장하도록 요청을 하셔서 연장하기로 했으니 나도 일 년 더 연장하는

것이 어떻냐고 하셔서내가 펄쩍 뛰면서 손사래를 쳤습니다.

 

 

나는 재학 중에 입대했기 때문에 전역 즉시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드려 겨우 허락을 받았습니다.

 

추라이로 이동한 뒤에는 모두 새 진지 구축에 정신이 없던 11월 초에

드디어 나는 1진의 마지막 7차 귀국팀으로 귀국합니다.

 

 

(진지가 다 구축되는 것도 못보고 귀국한 추라이 여단본부의 여러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