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 단상

우정(牛亭) 2013. 3. 1. 09:57

해병대, 그 이후”(1) - 복학생

 

 

캪틴님이 푸억록과 짜빈동에서 격전 후 철모를 뚫은 총상으로 병원에

후송되어 있었을 1967년 2월 말에, 나는 전역을 위해 영농 교육대

입소합니다. 영농 교육- 당시 대한민국 모든 제대 군인은 영농 교육을

받게 하고 전역을 시켰습니다.

 

 

식량이 절대부족 했던 시절, 미국 공법(Public Law) 480호에 의해 주어진

 원조식량(밀과 옥수수?)으로 연명했던 시절, 보릿고개를 넘기고 식량자급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해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영농 교육은 말하자면 그 시절 사회 진출 적응 교육이었습니다.

 

 

절대 부족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쌀의 증산을 위해 병충해를

이기며 밥맛이 떨어지더라도 수확이 많은 "통일벼"를 개발하여 식재 면적을

늘렸습니다. 쌀 소비를 줄이기 위해 쌀 막걸리 제조를 금지했지요.

 

 

일주일에 두 번 “분식의 날”이라고(수요일과 토요일) 점심은 반드시

분식(국수만 먹도록)으로 하도록 하고, 쌀의 양이 줄지 않도록 쌀을 덜

깎아낸 7분도 쌀로만 밥을 짓도록 했습니다.  (1978년인가 1979년 쯤에

둘러보니 그때까지 7분도 쌀로 밥을 지어 먹는 집은 박정희 대통령과 우리

집밖에 없는 듯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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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하고 2년 반 만에 학교로 돌아와 소위 복학을 합니다. 일 년 넘게

집으로 송금한 돈으로 등록은 할 수 있겠지 했는데, 그 동안 식구들 먹고

사느라고 남은 돈이 전혀 없었습니다.

 

 

귀국할 때 카메라 다시 팔고 하여 겨우겨우 만들어 온 돈으로 복학 등록금

냈습니다. 그나마 등록금이 다른 데보다 싸기 망정이지 (1967년에 한 학기

등록금이 8,000 원인가 했습니다.)

 

 

숙식은 여전히 입주 아르바이트로 아이들 가르치며 해결해야 합니다.

 

 

 

 

 

 

 

복학생 아저씨.   머리는 아직 군인인양 짧게 깎고, 군복 작업복을 검정색으로

염색한 옷 걸치고 검정 고무신까지 신어야 하는데 고무신은 아니네요.

(1967년 6월 27일, 복학생 때 일기를 발견했습니다.  거기 내가 들고 왔던 '흔들이 의자' 그림과 이야기가 있네요.)

 

2년 반 쉬고(?) 오니 머리는 텅 빈 것 같고, 공부 욕심은 나고, 군대 가기 전

낙제 점수 받은 과목도 채워야 하고..   해야 할 공부가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쉬는 시간 만 되면 동급생과 후배들, 월남전 이야기 해 달라고

조릅니다. 질문이 쏟아집니다. 전쟁은 어땠냐고, 어떻게 살아 왔냐고.

얼마나 죽었냐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이렇게 두 학기를 끝내고 마지막 학기는 다시 취직 공부를 위해 친구와

둘이서 학교 뒤에 한 칸 남짓한 방 하나 세 얻어, 식당 밥 사먹으면서 학교

도서관 자유 열람실(24시간 개방)에서 몇달을 밤낮을 보낸 끝에 일자리를

얻어 드디어 취직을 하고 돈벌이를하게 됩니다.

 

 

 

 

취직을 하고 난 두 달 뒤에 가을 졸업을 합니다.   드디어 그 지긋지긋했던

학업을 끝냈습니다.   4년, 아니 군대와 월남전 참전 포함하면 6년 반이

걸렸지만 하루하루 연명하는데 급급해 공부다운 공부를 한 번도 제대로 해

보지도 못했던 그 4년간이 내 생애에 가장 돌아보기 싫은 시간이 되어 끝이

났습니다.

 

 

그래도 등록금 마련이 되지 않아 휴학했다가 복학하고, 또 다시 휴학하고를

반복했던 했던 한 방에서 같이 지낸 내 친구에 비하면 나는 그래도 해병대

된 덕분에 월남전 참전으로 받은 수당으로 식구들도 먹여 살리고 휴학 한 번

없이 끝낼 수 있었으니 해병대는 나에게 큰 축복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