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철원-신약신학 바른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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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앙 연구가들/서철원

2009.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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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신학  바른이해

 

 

1)언어습관

 여기서 두 가지가 있는데 a)αμην(ןמא)이란 말들을 어떻게 사용하여쓴가 하는 것이 아주 독특하다.

 유대교에서는 αμην을 우리와 같이 사용하였다. 우리가 아멘을 어떻게 씁니까?  그것이 학실하다는 우리 수용의 표시로 아멘 그렇게 한다. 그리고 기도의 말미에 우리가 하나님게 드리는 기도와 청원,찬양의 끝에, 지금 우리가 드리는 것이 진정으로  확인하는 의미로 αμην그렇게 한다. 유대인들도 아멘을 꼭 이렇게 사용하였다.

 

 그런데 예수는 아멘을 뒤집어서 사용하였다.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리고 중요한 하나님의 말슴의 선포의 순위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우리 말에 ‘진실로’라고 번역된 것이 그렇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우리 말에 그렇게 번역되어 있다.
    우리, 유대인:    내용      αμην           예수님:    αμην,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내용

 

 

사실 진실로 라는 말이 번역되어서는 안되는 말이다. 그냥 놔두었야 했다.

 

 이유는 헬라어로 쓰여진 우리 신약성경에 셈족어 αμην이 그냥 그대로 나온다.  αμην이 아주 중요한 예수의 독특한 말이었기 대문에 일부러 번역하지 않고 일부러 그 말이 무슨 말인가를 가르친다.

 

 신약에 그런 아주 중요한 말들이 꽤있다. 일마누엘,아멘,아바,마라나타,이런 말들이 다 그렇다. 요새 많이 쓰는 할렐루야도 그렇다. 히브리어 몰라도 할렐루야가 무슨 소리인지 알듯이 물론 고린도 교인이나 갈라디아 교인 로마교인도 히브리어는 몰라도 그런 말들은 알았다. 왜? 그것이 아주 중요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는 기독교적인 특수용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도 번역이 안되고 그냥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니가 그런 정신을 살려서 우리 한글 번역에도 그냥 놔두었어야 한다. 그런데 ‘진실로’ 그렇게 번역해 놓았다. 물론 뜻이야 그렇다.  이게 벌서 αμην을 이렇게 썼다는 것이 중요하다.

 

 αμην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렇게 아멘 하면 내가(강조) 너희에게 말한다가 강조되어 있다. 이미 헬라어 배워서 알겠지만 동사가 인칭변화가 하기 때문에 인칭대명사 주어는 생략된다.  αμην εγω λεγω υμιν 이때는 항상 나온다.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이렇게 ‘내가’가 항상 강조되어 나타난다. 벌서 이 문장 형식에만 해도 내가 말한다는 강조가 되어 있다. 즉 자기의 권위주장이 이 문장의 형식에만 해도 들어 있다.

 

 그런데 이것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가 하려면 성경에 이와 비슷한 언어 습관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한 두가지가 있다.

 

①그중에 한 가지가 랍비드의 자기딜의 가르침을 자기 제자에게 전수할 때  랍비 Meir가 자기의 직접 선생이다. 그 선생이  가르침을 전할 때 자기의 직접 선생이 랍비 요한 흠 벤자카이의 내용을 전하는데 요한 흠 벤자카이는 랍비 헬렐에게서 배웠다. 이렇게 바통 3,4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일을 하였다.

 


랍비 Meir가 랍비 요한흠벤자카이의 이름을 랍비 힐렐의 말을 또 하시기를 ‘네가 안식일에 소를 끌어서는 안된다’고 이렇게 가르쳤다. 이렇게 해서 어디까지 올라간다고 보았는가 하면 모세까지 올라간다고 보았다. 그래서 모세에게 최고의 권위를 호소한 것이다.

 

 이때의 이러한 언어습관은 무엇을 한 것인가? 이것이 내 말이 아니라 나의 위대한 선생의 말라고 그 선생의 더 위대한 선생의 말이고 그 사람말도 아니고 결국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법을 계시한 모세의 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지금 전수하는 가르침의 권위를 성립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자 이것이 랍비들이 하던 언어습관이었다.

 

②선지자들은 어떻게 자기의 말을 시작하였는가? ‘주의 말씀(영)이 나에게 임했다’‘여호와의 말씀이 나에게 임했다고 했다’ 또는 ‘여호와의 영이 나에게 임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에게 임한 말씀을 선포한다.

 

 예수의 이 언어습관은 물론 랍이의 말과는 정대조적인 방법이다. 랍비들은 자기들의 선생에게 거슬러서 올라가서 자기가 한 말의 권위를 부쳤는데 예수님은 ‘자기에게’‘ 내가 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그것의 진리됨을 내가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지자의 말도 ‘주의 말씀이 나에게’ 또는 ‘주의 영이 나에게 임했다’할 때에  자기 청중들의 관심을 자기에게서  주께로 돌려서 지금 자기가 선포하고 있는 말이 주께서 하시는 권위있는 말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기에는 형식적으로는 이렇게 小文이 있다는 것이 선지자들이 말과 랍비들의 말투와 비슷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정반대이다. 즉 랍비들이 자기들의 선생들에게 호소를 했다. 그래서  모세에게 호소해서 그 권위를 의지하였다면 또 선지자가 주의 영이나 주의 말씀에 호소했다면 예수는 그 권위를 자기 자신이다. 내가.

내가 그 말의 진리됨을 선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이 독특한 αμην이라는 말을 쓰는 용법을 보면 이 속에 얼마나 예수의 큰 권위 주장이 들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자기 권위로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됨을 자기의 권위로 보장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몇가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물론 그 내용이 중요하다. 예수가 이렇게 αμην을 사용하는 이렇게 귀중한 자기 주장이 들어 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어떻게 말을 했나? 또 선지자가 어떻게 아멘을 사용하였는가? 것 등과 비교해 볼 때에 비유사성 원칙을 사용하셨을 때에 예수의 독특성이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예수의 독특한 가르침을 확연히 드러나게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렇게 비유사성 원칙이란 방법이 유용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여서 보니까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는 것은 얼핏 보게에는 기독론적인 자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기독론적인 칭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유대교적인 메시야 사상이 반영된 것도 아닌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그러나 그런 자료를 분석해보면 이렇게 엄청난 예수의 자기이해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짐작도 하였다. 예수가 항상 하나님과 긴밀한 교통을 하고 계셨으므로 하나님이 예수에게 어떤 말씀을 계시하면 거기에 아멘 이라고 응답을 하고 이제 내가 그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이 예수에게 무슨 말씀을 계시하면 그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하고 응답을 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렇게 독특한 예수의 언어습관에서 우리는 무엇을 아느냐면 자기가 선지자보다 더 직접적인 그리고 완벽한 하나님의 뜻의 계시자라는 주장이 주는 것이다. 그러한 자기 이해가 이 말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b)abba αββα(אבא)이다.  아빠라는 말은 어린아이가 (압바가 아니라 아빠임) 자기 아버지에게 사용하는 아람어 애칭이었다. 우리말의 아빠와 똑같은 말이었다. 가정에서 아이들이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른다.  서양언어에 papa 아니면 영어의 dad와 꼭같은 말이었다. 단 한가지 우리나라의 아빠와 틀렸다면 우리는 꼭 자기의 육친의 아버지에게만 사용하는데 셈족에서는 이 말의 사용이 좀 확대되어서 장성한 아이가 아버지에게 부를 수 있었고  아버지와 좀더 가까와지면 아빠라고 할 때 시집가고 장가간 뒤에도 사용한다.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사용하는 호칭이었는데 이것이 확대되어서 장성한 사람에게도 자기 아버지에게 섰으며 또 자기 아버지 뿐만 아니고 자기 스승이나 자기 아들의 친구 중데도 쓰는 말이었다.

 

 그러나 원래는 아주 가까운 사람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바로 이렇게 시작이 어린아이가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아주 가까운 관계를 나타내는 것인데,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말을 하나님에게 대해서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못불렀다. 너무 거룩하다 해서 이름을 못 불렀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우리 주, 나의 주, 아도나이 이렇게 대칭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에 상응하는 많은 이름들을 지어내었다. 그래서 가령 ‘하늘과 땅을 지은이’‘막강한 힘을 가진 이’ ‘전능한 이’ 또는 ‘태초부터 계신 이’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무한히 많이 지어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하나님에게 적용한 예는 없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다라는 사상이 구약부터 쭉 있다. 가령 출 4:22부터 쭉 나온다. ‘이스라엘은 나의 첫 아들이라’ 거기에서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라는 사상이 있다.

 

그러나 그런 이해를 하나님에 대해서 아빠라고 부른 것으로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소위 비유사성 원칙에 의해서 예수의 진짜 말로 확인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항상 그의 기도에서 하나님을 부를 때에 ‘아빠’라고 불렀다. 기도에서 하나님을 부를 때 아빠라고 했다. 

 

①예수가 항상 그의 기도에서 하나님을 부를 때 아빠라고 불렀다.

②자기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자기 제자들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도록 가르쳤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가르쳐준 아주 독특한 기도에의 부름이기 때문에 헬라말을 쓰는 바울의 교회들에서도 하나님에 대해서 아빠라고 부르는 이 기도가 계속 남은 것이다. 그러한 구절이 그 흔적이 우리에게 두 곳이 있다. 하나는 갈4:7 하나는 롬8:17 거기에 보면 바울이 그 아들의 영이 우리 안에서 뭐라고 울부짖는다고요?’ 아빠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 우리가 아들들이 되었다는 것이 아들이 영을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것이다.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우리 속에서  예수가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 아빠를 부른다. 예수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의 제자들에게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아빠로,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라 하셨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고 자기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라고 가르치면서도 자기와 자기 제자들을 동급으로 놓지 않는다.

 

 ③자기와 동급으로 놓지 않고 항상 구분한다. 하나님은 또 너희들의 아빠, 또 나의 아빠, 이렇게 구분한다.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자기와 제자들을 포함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자신을 제자들과 구분한다.이러한 세가지 현상을 우리는 발견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러면 어떠한 예수의 자기 이해가 담겨 있느냐?

 

 첫째로는 예수가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이라는 것이다. ①과③이 그것을 말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이라는 것을 나타내 준다 ①과③이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이라는 자기 이해를 나타낸다.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됨을 중계하는 자기의 주종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됨을 중개하는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자기 이해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께 대한 아빠라는 그 기도 속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얼마나 가까이 느꼈고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얼마나 확실한 이해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존은 어린아이가 아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하듯이 의존하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어린아이가 아빠를 경외하듯이 그 하나님에 대한 순종심, 그 하나님에 대해서 포근함을 느끼는 것, 이러한 모든 것이 그 한마디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멘’이라는 말에 신약기독론이 밤송이가 알맹이로 그 속에 꽉찼듯이 말했다면 마찬가지로 이 αββα라는 말에 신약의 기독론이 꽉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예수의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기 이해가 이렇게 확연히 된다.

 

그냥 ‘아빠’라는 말속에 그냥 다 들어 있다.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기 이해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는 것보다 더 훌륭하게 들어 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가 내 놓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안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자꾸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2)예수의 모세 율법에 대한 태도에서  우리는 산상수훈의 예를 잘 들수가 있다.

 마5:21-22을  보면 거기의 문장 형식 ‘옛 사람에  대하여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라’했다.

 옛사람,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여기서 ‘내가’는 강조이다. 새로운 것의 선포이다. 산상수훈에 보면 새로운 것이 무엇이 되어 있는가? 5:27-28/31-32/33-34/38-39/43-44 절에 보면 ‘반대문형’이 나온다.

 

 ‘너희가 옛사람에게 이러이러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가끔 ‘아멘’이라는 말이 동반된다. 이 옛사람에게 말한 것이 무엇인가? ‘살인하지 말라’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모세 율법의 요약인 십계명에서 왔다. 모세의 법이 무슨 법인가? 옛사람에게 말한 옛법이다. 이제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형제에게 화해를 무시하는 자는 벌써 살인행위를 범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27-28절에 보면 옛사람에게 말하기를 ‘간음하지 말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그 사람은 벌써 간음을 한 자이다. 여기에 보면 우선 형식으로 여기에 ‘반대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나중은 예수가 이제 선포하는 새로운 것, 이렇게 반대형식으로 되어 있다.

 

 내용적으로는 십계명을 인용하고 있다. ‘살인하지 말라’ 모세 율법의 핵심인 십게명을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모세 율법은 무엇을 요구한 법인가? 행위의 최소한을 요구하는 법이다. 진짜 누구를 죽이지 않으면 살인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선언하는 복음은 이 행위 이전에 동기의 최대한을 요구하는 법이다. 형제를 미워하는 형제를 무시하는 여기에서부터 살인하는 행위가 나온다. 형제의 죽이는 살인행위가 나온다. 동기의 최대한, 우리 심장의 상태를 추궁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그 내용에 있어서 행위의 최소한을 요구하는 옛법에 비해서 동기의 최대화를 요구하는 과격히 내면화도니 절대화된 법을 예수가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세의 법보다 훨씬 더 완벽화된 법을 선포한다.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하는가? 내가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러한 언어습관으로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내는 예수의 자기 이해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자기가 모세보다 더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계시하는 자라는 자기 이해가 이속에 나타난다. 모세보다 더 직접적이로 완벽하고 더 권위있는 하나님의 법을 계시한다는 것이다. 모세의 법을 능가하는 옛법에 대해서 새로운 능가하는 하나님의 법을 선포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모세보다 더 위대한 더 권위있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유대교의 틀 안에서 모세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없다. 심지어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에 의하면 메시야도 모세 밑에 있다. 신18:15에 의하면 하나님이 어떤 선지자를 약속하는가? 여기가 유대교에 있어서 메시야 사상의 중요한 뿌리 중의 하나인데 어떤 메시야인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 모세와 같지만 모세를 능가하지 않는다. 모세가 기준이다. 거기에 나오는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에 보면 이런 거이 있다. 메시야가 오면 어떻게 해요? 모세의 율법을 잘 가르치는 사람이다. 메시야가 뭐해요? 모세 율법을 잘 가르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모세가 메시야보다 더 우선한다. 유대교의 틀안에서는 모세가 더 위대하다.

 

 그런데 예수가 여기에서의 언어습관은 무엇을 주장하는가? 내가 모세보다 더 위대하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간접적으로 그러나 더 효과있게 우리에게 나타내는 주장이 무엇인가? 하여간 모세를 능가하는 모세보다 더 위대한 더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예수의 언어습관은 이미 유대교의 틀을 벗어난 것이다. 유대교의 틀 안에서는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랍비들의 가르침을 아무리 위대한 ‘힐렐’이고 ‘자카이’고 누구고 할 것없이 그들의 모든 권위를 모세에게 호소하였는데 모세의 권위를 능가하는 것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자는 이미 유대교를 떠난 것이다.

 

  예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비유사성 원칙으로 해봐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것을 음미해 볼 때 예수가 이미 모세 율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그러니까 유대교의 테두리를 벗어난 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에게 메시야적인 카테고리 밖에 더 적용할 게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역사적인 에수의 우리 신앙이 근거하지 않으면 신화가 된다.

 

 이것을 볼때 예수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로, 유대교가 그 당시 기대하였던 메시야 이상의 권위를 가진 ,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으로서는 도저히 부적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유대교의 메시야는 모세의 율법을 잘 가르치는 자이다라고 하나 그런데 예수는 그 보다 더 한 권위주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3)죄 용서

 또 한가지 예수의 특징이 죄용서이다.

 예수님은 죄용서해주는 권위를 주장하였다. 막2:5,10 눅 7:48  ‘ 자기자 죄를 용서해줄 권리가 있고 죄를 용서해 주는 종말론적인 구원행위를 한다는 것을 극으로 표시하였다. 그것이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이다. 불의한 죄인들로 더불어 잔치를 베푸는 것이다. 즉 회개한 죄인들과 그 집에 들어가서 잔치를 베풀므로 그들의 죄를 자기가 지금 용서해 주었다는 것을 드라마로 표시하는 것이다.

 

 구약성경과 유대교의 틀안에서는 누구만 죄용서해 줄 수 있었는가? 하나님만. 왜?  하나님이 창조주이기 때문에 그가 지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뜻을 두었다. 자기의 뜻을 모든 피조물에게... 그래서 하나님 만이 자기가 지은 피조물들이 합당하게 살았는지 않했는지를 판결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만이 심판자가 되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다. 자기의 뜻에 어긋나게 산 피조물을 용서해 줄 수가 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창조주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예수가 자기가 죄를 사해주는 권리를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령 마가 2장을 보면 거기에 둘어 앉았던 서기간들, 요즈음 말로 하면 신학자들이 화가 났다.

 

 그래서 예수님을 참람하다고 하였다.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특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즉 예수 스스로 자기를 하나님으로 만든 자라는 것이다. 스스로 신격화한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그 사람의 아들(인자)이 땅 위에서 죄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너희드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내가 demonstration하겠다고 그래서 중풍병자에게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가라고 하였다.

 이제 예수가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가라는 것이 이 땅에서 예수가 죄사하는 권리가 있음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고 하였다.

 

 아렇게 죄 용서해주는 권리를 선언하고 죄를 용서해주고 죄를 용서해 주는 표시로 무엇을 하였는가? 죄인들을 모아서 먹고 마셨다. 이렇게 먹고 마시니 예수님에게 무슨 별명이 술주정뱅이라고 하였다. 또 탐식하는 자라고 하였다. 먹기 좋아하고 술주정뱅이요 탐식하는 자라고 하였다. 이렇게 욕을 얻어 먹었다.

 

 경건하려면 세례요한의 제자같이 금식하며 얼굴에 머 시커멓게 바르고 다니고 해야 하는데 예수는 이 형편없는 것들-세리들,창기들-과 먹고 마시고 심지어 세리집에서 잔치 베풀고 하니 탐식하는 자요, 술주정뱅이라고 욕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가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하니까 너희들이 귀신들렸다고 하더니 그 사람의 아들(인자)은 와서 먹고 마시니 술주정뱅이요 탐식하는 자라고 욕하느냐? 그리고 이 세대가 분간할 줄 모른다고 하였다. 여기가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그래서 이렇게 죄를 용서해 주는 권위를 선언하고 또 demonstration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가? 여기서 도출할 수 밖에 없는 예수의 자기 이해는 무엇인가? 자기가 하늘의 대권을 행사하는 자라. 자기가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는 자다. 하나님의 대권자이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 대신 권리를 행사하는 자,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대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이해가 있다. 또 예수의 특징 하나가 예수의 중심 메시지가 하나님 나라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그런데 여기서 잠간 보려고 하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가 어떠하다고 선포한 것이 아니다. 예수가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있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가? 라는 것도 가르쳤다. 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내세웠다. 그리고 들어갈 수 없는 조건도 내세웠다. 그것만 해도 상당히 큰 권위주장이 그 속에 있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의 나라의 대문의 열쇠를 가진 것같이.. 그런한 권위주장이 그 속에 들어 있다.

 

 그런데 한발 더 나아가서 어떤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궁극적으로 말하면 죄를 회개하고 옛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믿고 예수를 추종하는 제자들,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는 것만 해도 상당히 큰 권위주장이 내포되어 있는데 한발 더 나아가서 그 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에(예수) 대한 제자도가 그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예수는 자기가 인간의 생사를 경정하는 arbiter. 자기가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으로서 인간의 생사를 결정하는 arbiter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어디에 쓰여져 있는가? 예수의 제자들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얻을 수도 있고 그것을 부인하므로 멸망에 이를 수도 있고 .. 최후 심판자와 구원자로서 자기 이해가 여기에 나타나는 것이다. 막10:15.마7:21.눅12:32.22:29.23:42 등을 한번 살펴보기 바란다.

 

4)마지막으로 예수의 또 하나의 특징은  당시의 선지자들이나 랍비들과는 달리 예수는 후계자를 생각하지 않았다. 흔히 예수의 12제자를 예수의 후계자라고들 하는데 그것은 아주 옳지 않은 신학이다. 예수는 도대체 자기 후계자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가 자기의 사역을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구원사 가운데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는 단회적인 사건으로 단 한번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았다. 단회성이다. 단 한번 일어나는 이것을 이어받은 신약의 신앙고백이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단 한번 ones for all,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한번 일어나는 한번에 완성하는 일인 것이다.

 

 예수가 자기 사역을 이렇게 종말론적인 독특한 구원사역의 중심사건으로서 단 한번 일어나는 사건으로 이해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일을 계승하고 하는 것이 없다. 제자들이 예수의 일을 계속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에게서 일어난 단 한번에 완성될 구원을 가지고 선전하는 것 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은 그 구원에 덧붙인 것이 하나도 없다.  그것을 신학 전문용어로 vollmachsansprud(권위주장)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claim to authority라고 한다. 예수의  아주 독특하고 강력한 절대적인 권위주장인 것이다.

 

 그것을 조금 더 정확히 정의하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종말에 완벽한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있는가?

 자기 제자들, 자기를 추종하는 자들을 , 백성을 모으며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든다는 그리고 자기를 믿고 자기에게 모여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을 회개케 하는 자라는 자기 이해가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이 간접 기독론적인면에서 예수의 자기 이해를 도출하고 보니 예수가 그 제자들에 의해서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로 신앙고백 받고 하나님에 의해서 또는 악령들이 또는 하나님의 막강한 힘을 체험한 소경이나 병든 자들이나 귀신 쫓겨난 자들이 예수의 진정한 정체를 알고 예수를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을 예수가 받아들이는 이유가 나타났다. 예수가 그 고백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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