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K. Barth)의 해석학적 신학

댓글 0

예수 신앙 연구가들/칼 바르트

2011. 5. 26.

click 



바르트(K. Barth)의 해석학적 신학


김영선
I. 들어가는 말
II. 현대 해석학적 신학의 현주소
III. 바르트의 성령론적 해석학
VI. 바르트의 성서해석학
V. 바르트의 변증법적 해석학
VI. 바르트 해석학의 장점과 약점

I. 들어가는 말

해석학은 해석하는 차원에 따라 다양한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석학은 대체로 의미의 해석에 관한 이론이나 철학으로 정의될 수 있다." 특히 신학에서 추구하는 해석학은 "신들의 말을 인간의 말로 옮겨오는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는 해석학적 신학이 추구하는 본래적 차원을 보여주는 행위로서, "성서의 바른 해석 방법을 위한 과학"이라 볼 수 있다. 성서학에서 다루고 있는 성경의 '주석(exegesis)'은 해석학에 의해서 발견되는 규칙들을 적용하는 것이다. 해석학의 우선적인 과제는 독자들이 성서의 말씀에 표현된 참된 의미를 깨닫도록 하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해석학은 신들의 말이 천상의 독백의 언어로 끝나지 않도록, 그리고 오늘의 우리에게 이해되는 말(언어사건)로 옮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학은 하나님의 언어를 인간의 말로 옮기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은 해석학이 되어야 한다. 신학과 해석학의 연관성에 대하여 우리는 신학 해석학, 신학적 해석학, 또는 철학적 해석학, 해석학적 신학 등 다양하게 명명할 수 있다. 물론 명명하는 자의 해석학적인 견해와 입장에 따라 그렇게 다양하게 용어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 글에서는 신학과 해석학 사이에서 신학은 '주어', 해석학은 '술어'가 되어야 한다는 필자의 입장과 견해에 의하여 '해석학적 신학'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신학의 길은 해석의 길이라 볼 수도 있다. 교회의 역사, 즉 기독교의 역사는 전수받은 복음을 오늘의 삶의 자리에서 살아있는 복음으로 고백하고 적용하게 하는 해석 또는 재해석의 역사이다. 따라서 신학은 해석학을 요구한다. 시간과 공간과 차이에 의해 촉발되는 다양한 사상과 문화로 인하여 신학의 해석은 다양한 해석의 길을 걸어왔다.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자신에 의해 구축된 해석학에 안주하게 되는 경향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사고와 판단에 안주하여 다른 해석학에 배타성을 보이거나, 자신의 해석학을 절대화하는 것은 신학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리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언제나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역사와 문화 등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무오한 진리를 터득할 수 있는 해석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학은 진리 이해에 대한 해석학적 조건과 제한성을 알고 언제나 진리에 대한 해석에 개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해석자는 자신에게 있을 수 있는 왜곡과 편견과 그리고 실수와 오해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해석 작업이 경솔하게 진행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항상 타인의 견해와 해석을 존중하고, 자기를 새롭게 발견하는 신중하고 겸허한 자세로 작업에 임해야 한다.

 


해석학은 신학자들만의 선택적인 작업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의 필수적인 작업이 되어야한다. 따라서 해석학은 다양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 특히 신학 분야에서 성경, 교회전통, 신앙고백, 교리, 신학 등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어떤 해석은 자신의 입장과 다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거부감을 일으키는 해석도 있을 수 있다. 수많은 해석학을 자신의 입장과 다르다고 하여 접하여 숙고해보지도 않은 채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그것을 거부하거나 배척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삶의 자세가 아니다. 특히 다원주의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우리들은 자신과 다른 해석이 우리의 삶 속에 어떤 필요가 있을 것인지 고뇌할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는 우리 시대 신학의 한 획을 긋고 지금까지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신정통주의 신학의 대가인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해석학적 신학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해석학적 사고의 폭을 넓히는데 일조(一助)하고자 한다.

II. 현대 해석학적 신학의 현주소

우리의 신학 활동은 인간의 말로 이뤄지고 있다. 따라서 신학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의 자유와 하나님의 권능은 어떤 범주에서 언어화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묻는다. 바르트는 그의 신학을 해명하는데 있어 해석학을 어떻게 적용하고 있을까? 우리는 바르트의 해석학의 이념과 학문적 방법을 통해서 바르트 신학의 깊이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바르트의 해석학적 신학을 살펴보기 전에 현대 신학해석학의 정황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의 논의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신학은 텍스트와 그 텍스트의 해석자 사이에 존재하는 지평의 융합을 위한 해석학적 논의에 초점을 두고 있다. 현대 해석학적 신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는 일반적인 해석학은 '철학적 해석학'과 동일시되어야 하며 '신학적 해석학'은 철학적 해석학의 원리를 성찰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신학적 해석학이 철학적인 토대 위에서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다.

 


현대 해석학의 또 다른 거장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철학적 통찰력(현상학적-실존주의적 접근방법)은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8), 에벨링Gerhard Ebeling, 1912- ), 그리고 푹스(Ernst Fuchs, 1903-1983)와 같은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하이데거 철학은 텍스트와 종교적인 문헌을 오로지 역사 비평적으로 다루는 것을 넘어 인간 실존주의적 토대 위에서 다룰 수 있는 장(場)을 보여줌으로써 "현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의 실존적인 요구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바르트는 자신의 동료들이 하이데거의 철학적 해석학을 신학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거부하였다. 바르트는 신학과 철학 사이의 긴밀한 연합이 신학에 심각한 위험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바르트의 자세는 슐라이에르마허 이후부터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해온 철학적 해석학에 도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성과 신앙의 문제는 역사 이래로 언제나 상충된 입장에서 때로는 어느 한쪽 편이 강조되는가 싶으면, 또 다른 때에 그것이 뒤집어지는 양상을 거듭하면서 논의되어진 문제이다. 지금도 과연 성경 말씀은 과학적으로 정확한 기술(記述)인가? 하나님의 계시를 증거하는 역사적인 기록인가? 우리는 역사와 전통이 제시하는 진리와 이성이 제시하는 진리들 사이의 상충되는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해법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1729-1781)은 역사의 진리들과 이성의 진리들 사이의 넓은 수렁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물으면서 역사적 연구만으로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구축하기 위한 필수적인 기준을 제공할 수 없다고 보았다. 레싱은 역사적인 사건들은 필연적인 진리의 운반자라고 믿을 수 없다고 본다. 레싱은 성경 본문을 역사적으로 취급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 신앙의 토대가 될 수 없으며, 또한 이렇게 하는 것은 기독교의 옛 초자연주의적 주장을 파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레싱 자신이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적 연구를 추구하였지만 그가 얻은 것은 역사-비평적 연구를 넘어 성경해석에 대한 보다 깊은 신학적 해석의 필요를 느낀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가 문법적 해석과 심리적 해석을 결합시킴으로써 이 둘의 종합을 위해 노력했으나 역시 신앙과 이성 사이의 균열은 해소되지 못하였다. 헤겔(Friedrich Hagel, 1770-1831)도 변증법적 도식 위에서 '정신'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이 갈등을 해소해 보려고 노력하였으나 역시 성공했다고 볼 수 없었다. 과학적 비평과 역사 비평은 기독교 교리의 전통과 권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기독교인들은 이들의 공격이 기독교 신앙을 해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들의 과학적 공격으로 인하여 신학적 사고를 위한 새로운 역사-비평연구를 착수하는 신학자들 - 한스 요아킴 클라우스(Hans-Joachim Kraus), 로버트 모르간(Robert Morgan), 존 바톤(John Barton) 등- 이 나오게 되었다.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65-1965)가 『예수의 생애에 관한 연구』에서 결론을 내렸듯이 성경 본문에 대한 순전히 역사적인 분석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역사-비평적 연구는 역사와 신앙을 분리시키는 약점을 노출시켰으며, 역사 비평적 연구만이 순수하고 객관적인 연구라고 여긴 것이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노출시켰다. 역사 비평적 연구는 텍스트에 대한 총체적 해석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지, 전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역사주의(실증주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반면 역사 의식은 텍스트 해석의 비평적인 태도로 인도할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할 수 있다.

 


이 역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바르트는 어떻게 접근하였는가?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통해서 "인간의 도덕성과 기독교 신앙의 종합은 하나의 망상"이라고 생각하게 하였다. 역사주의는 전쟁으로 고통당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의미를 주지 못했다. 독일 제국주의 정치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개신교 자유주의는 불신을 받게 되어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시기에 하나의 돌파구를 제시한 신학자는 바르트였다.

 


바르트의 신학을 '변증법적 신학', '신정통주의 신학'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복음적 신학'(Evangelical Theology)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바르트 신학의 목표는 책임성 있는 설교와 교회의 실천을 강화하는데 두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교회를 위한 신학을 하였으며, 그의 신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복음적 신학"이었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에 속한다. 바르트의 해석학도 그의 복음적 신학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바르트는 그의 교회교의학 1권(CD 1/1 and 1/2)에서 주로 해석학에 대한 진술을 하고 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해석학적인 문제는 본래 방법론적인 관심(이론적 관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누구이며, 나는 누구인가? 라는 궁극적인 신학적 질문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인식은 진론드((Werner G. Jeanrond)가 잘 말해주고 있다: "바르트의 해석학은 실제적인 신학을 시작하기 위한 서론적 성찰이 아니고, 그것은 신학 그 자체의 한 부분이며 따라서 교의학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그의 [교회교의학]을 해석학적 신학적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나는 누구인가?"

III. 바르트의 성령론적 해석학

바르트의 신학적 해석학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특별계시 해석학에 해당하는 성령론적 해석학이라 할 수 있다. 성령론적 해석학이란 해석학 속에서 이뤄질 해석의 과정을 성령에 의한 변증법적인 내적 긴장 속으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의 계시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방법론적으로 이해한다기보다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신학적 진술을 통하여 현실을 해명하고 그 현실을 재구성해내는 바르트의 말씀의 신학의 방법론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론적 해석학은 신학적 진술은 신앙의 명료화를 가능케 하는 성령에 대한, 성령에 의한 진술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 진술은 자기를 명료하게 드러낸 존재나 언어의 자기 드러냄이 아니라 계시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자기 은폐로서 주어지는 신인식(神認識)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해석학적 해명을 신학 본래의 지평으로 보기보다는 그 해석을 하나님 자신의 해명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런 성령론적 해석학에서 해석학적 과정은 이해의 시작이 아니라 오히려 이해의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성격화되는 바르트의 성령론적 해석학은 바르트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적 고찰로써 순전히 형식적인 개념으로 해석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사실 이런 비판은 성령론적 해석학은 해석학적 시도로서 무의미한 것이라는 단정을 낳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르트의 성령론적 해석학은 해석학이 본래 의도하는 해석의 이념을 넘어가고 있다. 우리는 바르트의 해석학적 신학을 논의함에 있어서 그의 해석학이 어떤 점에서 본질적인 해석학으로부터 거리가 있는지, 또는 해석학으로서의 무의미성을 띄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넘어서, 바르트 신학이 무슨 이유로 해석학의 이념을 넘어가고 있는지를 보다 주의 깊게 물어야 할 것이다.

 


바르트의 해석학적 신학을 논하기 위해서 먼저 바르트 신학 내에서 해석학적 적용이 가능한 개념과 사유 방식, 그리고 바르트의 신학이 가지는 내적 구성과 그 신학적 원리를 살펴야 할 것이다. 바르트의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개념은 이들을 포괄적으로 내포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그의 계시 개념의 문제로부터 그의 해석학의 문을 여는 것이 유용하리라 본다.

1. 하나님의 언어화 문제: 계시와 언어

신학의 본질적인 주제인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으로 하늘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이 세상에 동시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기 때문에 우리의 언어화의 사건 속에 임재하신다. 여기서 언어화란 하나님의 계시 사건을 구성하고 있을 어떤 의미연관에 대한 구체적 이해, 즉 하나님의 성육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바르트는 이 언어화의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바르트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강조하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안의 사건을 통해서 그의 교의학 전체의 주제들을 재해석하고 있음은 이미 주지되어 있는 바이다. 예수그리스도 계시의 의미는 우리에게 신학적 해석학의 과정을 통하여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그의 계시에 대한 이해는 그의 해석학적 신학의 핵심을 파악하는 수단이 된다.

 


바르트에 있어서 계시는 절대적 타자의 절대적 자기 계시이다. 따라서 계시의 해석자가 어떻게 그 절대적 타자를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해석적 작업은 중시되지 않는다. 바르트의 신학적 해석은 인간이 하나님, 즉 계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어떤 접촉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건널 수 없는 무한한 차이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함을 통하여 일어난다는데 단초를 두고 있다. 이런 면에서 성서 본문도 이해를 위한 과정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장소이다. 바르트의 해석학에서 중요한 것은 이해하는 인간보다는 이해를 주시는 하나님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실존이 우리의 사고 속에서 계시된다는 것이다. 이는 해석학이 바르트의 신학적 관점을 다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계시 사건은 우리의 이해 작업(해석학)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계시 사건이 불가해성만을 의미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 계시 사건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일은 바르트의 계시 이해가 우리에게 익숙한 해석학과는 다른 어떤 다른 길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길은 어떤 길인가? 그 길은 성서를 하나님의 계시를 담은 책으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성서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해석학에 대한 무지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해석학을 넘어서는 해석학 이후의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다.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적 작업을 계시 이해로써 수행하고 있다. 이는 그가 해석학적인 모델로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타자성에 대한 사유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인식론적으로 확정하고 확인하는 작업을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시켜서 보여주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어떤 개체 인간의 독립적 사유구조라기보다는 계시에 대한 응답으로 찾아지는 신앙의 자기 해명의 구조라 할 수 있다.

 


왜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의 방법론적 근간을 이루고 있던 개념들에 대하여 명백한 철학적 해명을 주려고 하지 않는가? 불트만이나 고가르텐이 한결같이 바르트에게 요구했던 것은 바르트가 사용하고 있던 그 방법론적 개념들에 대한 정확하고도 철저한 철학적 명료화였다. 이것은 정당하고도 바른 요구였다. 그런데 바르트는 그들의 정당한 요구를 후설(E. Husserl)의 현상학적 명제, 즉 "사상 자체에로"(Zu den Sachen Selbst !)를 지적함으로써 그 요구를 해명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바르트가 가지고 있는 특유한 언어이해와 연관이 있다. 방법론적 문제와 연관된 질문과 대답의 맥락에서 볼 때 먼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르트의 신학언어가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 언어의 불연속성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사건으로서의 직접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바로 하나님의 말씀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선포된 말씀"을 말하고 있는데, 선포된 말씀이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현실 앞에 인간이 서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현실에 인간이 노출되어 있지만 결코 인간이 그 말의 중심적 현상으로 등장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의 형태로서 발설되어진 인간의 말의 참된 주체를 인간의 이해가 아닌 하나님 안에서 찾는다. 이것은 인간의 말을 우리에게 위임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신학적 이해를 넘어서 우리의 신학적 해석의 구체적 대상으로 임하는 이 신적 실존의 현존을 우리는 경험하게 된다. 그 대표적 현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기록된 말씀"인 성서인 것이다. 성서가 쓰여진 채로 성서 안의 계시를 우리에게 전해 주는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바르트에게서 성서가 계시의 말씀을 전하는 인간의 말이라는 그 어떤 철학적 이유를 선험적 동기에서 찾을 수 없다. 다만 거기에는 사실적 이유만이 있을 따름인 것이다. 성서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전해진다면 그리고 그 성서에서 그 어떤 표준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여기 현재 하나님의 말씀의 한 현재화로써 그 성서가 우리에게 자신을 열어 보인다는 것이다. 성서가 증거하고 성서가 말하며 성서가 선포한다는 것은 다름아니라 이 성서라는 인간의 말의 경험 한복판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이해가 있을 뿐이다.

 


교회교회학 전체에서 새로운 주제들을 다루기 앞서 항상 되물어 지는 방법적인 고찰들은 그 주제들이 매순간 새롭게 그 빛 자체로부터 드러나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이미 방법적으로 규명되어 있는 가능성을 통해서 단순하게 연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교의학적 언어로써 말하는 것을 사실은 매번 계시의 사태 앞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왜 바르트는 그의 길을 고집하고 있는가? 그것은 신학적 해석으로서 계시의 현상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말을 그의 해석학의 내용으로 삼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자신의 교의학의 명칭을 "기독교 교의학"에서 "교회 교의학"으로 개칭할 때 그는 자신의 교회교의학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적 전제를 "실존인가? 아니면 말씀인가?"라는 양자택일의 방식을 제기함으로써 그 신학적 방법론에 대한 엄격성을 잘 인지하고 있다. 이 때 '말씀'은 분명히 신학의 실존철학적 근거 지음에 대한 대치 수단으로서 바르트가 보기에 신학 본래의 방법론으로 정당한 것으로 선택된 것이다. 이 말씀에 대한 바르트의 이해는 그로 하여금 학문적 근거에서 신학을 전개하는 것보다 더 철저한 성서 중심의 신학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러한 말씀에 대한 이해는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유래되는 신학적 전통을 비판하는 수단이 되었다.

 


바르트는 왜 그의 '교회교의학'안에서 해석학적 문제를 성령의 문제로 바꾸어서 다루고 있는가? 어떤 이유에서 바르트는 방법론적 고찰에 대하여 무심한 것처럼 보이고 있는가?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가 하고 있는 말을 다시 한번 그대로 말하려고 했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시도한 저변에는 그가 일반해석학에 무지했거나 또는 무시했다기보다는 그리고 신학의 언어를 철학적인 언어를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에 반대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신학적 언어 자체가 보다 하나님을 직접 증거한다는 바르트 자신의 신학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 말씀 스스로, 계시 자체가, 성서 자체가 해석을 제시한다. 이 해석에 인간이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의 장인 성서 자체가 주체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 자체는 인간의 경험 한 가운데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해석을 가져다준다. 이러한 차원에서 바르트의 성령론적 해석학은 자리를 잡는다.

2. 바르트와 불트만의 해석학 문제

바르트에게 있어서 해석학적 문제는 역사 속에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하여 어떻게 적절하게 선포하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바르트의 성령론적 해석학의 윤곽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불트만의 해석학을 살펴보자.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불트만은 텍스트와 개인적인 인간실존을 만나는 상황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추구한 신학자이다. 그는 "성경 해석 과정의 형식적(즉 언어학적, 철학적, 문화적, 지리적, 역사적 등의 요소)이며 관점적인 조건들을 명확히 하고자 했다." 그래서 불트만은 '전이해'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불트만은 "성경의 케리그마에 대한 인간의 해석과정 속에 하나님께서 일하신다고 보았다." 바르트나 불트만 모두 신학적 자유주의를 비판하고 하나님의 타자성에 대한 이해를 강조한 점에서 서로 일치하지만 불트만은 바르트보다 세계와 역사 그리고 철학의 중재적 역할을 강조하였다. 바르트는 인간적인 방식이 하나님의 계시를 파악하는데 충분하다고 보는 불트만과는 달리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방법, 인간의 해석학, 인간 해석의 대상일 수 없다고 본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해석하는 주체로 존재한다. 여기서 요청되는 인간의 활동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해석되도록 자신을 복종시키는 일이다. 따라서 "계시가 역사의 술어(述語)인 것이 아니라, 역사가 계시의 술어이다." 바르트는 성서의 단어, 문장 또는 개념들에 대한 세부적인 역사적, 주석적 연구에 얽매이지 않고, 텍스트의 주제 내용을 밝히는데 그의 목표를 둔다. 바르트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다고 보았으며, 하늘과 땅에 있는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성경의 주제이며 동시에 철학의 요약이라고 이해하였다.

 


바르트는 어떤 특정 성경 본문을 해석하기 전에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을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어거스틴과 마틴 루터와 마찬가지로 바르트의 해석학의 특징은 성경의 전체적인 신학적인 의미에 대한 선이해를 가지고 본문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에 있어서 "사랑", 루터에 있어서 "믿음에 의한 칭의", 바르트에 있어서 "하나님의 타자성(및 근접성)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어거스틴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에 언어학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았고, 불트만과 달리 성경해석의 인간학적-철학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다. 이러한 바르트의 성서해석은 성서를 지배하는 어떠한 전제도 배격하기 때문에 '전이해'를 전제하는 불트만의 해석학을 배격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이 이해하는데 있어서 모든 형식적인 해석학적 원칙의 강요를 거부하였다. 즉 이해의 과정을 시작하기 위한 모든 노력에 특정 신학적 교의학이 강요되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진론드(Werner Jeanrond)는 바르트의 해석학을 내용적(material)으로 보는 반면에, 불트만의 해석학을 형식적(formal)으로 본다. 바르트는 인간의 주석을 피하고 성경 자체가 말해지고 들려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신학은 항상 성경 아래에 있다. 바르트는 글자와 텍스트의 정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여 성경주의(Biblicism)를 비난했다. 바르트에게 계시의 사건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활동(성령의 사건)에 기인한 것이지 성경의 활동 때문이 아니다.

 

 

 

따라서 계시의 사건에 대한 적절한 응답은 "순종"(obedience)과 "종속"(subordination)이다. "'종속'과 '순종'은 바르트가 우리의 모든 감정, 공리, 체계, 철학 등에 대항해 성경의 절대적 우위성을 강조하는데 사용한 핵심적인 용어이다. 어떠한 해석방법이나 해석학도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낼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의 독자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은 성경에 순종하며 기꺼이 성경이 자신들을 해석하도록 할 것과 성령이 본문을 통해 독자에 대해 판단의 말씀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령의 증거는 곧 그의 "해석학적 강령"이다. 바르트가 주장하는 바는 우리의 어떤 사고방식 또는 철학이 우리의 성서해석을 결정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VI. 바르트의 성서해석학

상술한 성령론적 해석학의 원리를 따라 바르트의 성서해석학도 규정되어진다. 바르트는 성서를 계시의 유일한 원천과 우리의 모든 신앙, 그리고 신학의 규범으로 만들어서 우리를 복음의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데 그의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성서해석학은 하나님의 말씀이 현대인에게 들려지게 하는 일이다. 따라서 성서해석학은 교회와 신학의 가장 큰 과제가 된다.

1. 바르트의 성서해석학의 의미
바르트는 그의 『교회교의학』 제1권에서 조직적으로 성서 해석을 취급하고 있다. 그는『교회교의학』에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또한 "성서는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하였다. 특히 성서가 오늘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말은 성서해석학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바르트에게 성서해석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인간의 처분적 작업이 아니라, 인간이 이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관계되어 있는지를 찾아보려는 인간의 노력과 교회의 노력으로 보았다. 이 말은 성서해석학은 인간의 사색적, 추리적 작업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일어나게 하는 작업이라는 말이다. 성서해석학에 대한 이러한 바르트의 이해는 그의 성서해석의 근본적 지침과 원리가 된다.

2. 성서해석의 원리
바르트의 성서해석의 첫째 원리는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것이며, 둘째 원리는 "하나님은 그의 영원한 사랑을 인간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였다"는 것이며, 셋째 원리는 "성경 본문은 그 자체, 즉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이 원리들은 모두 신약성경에 대한 바르트의 특별한 해석학적 경험으로부터 나온 원리이며, 종교개혁자들이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취해졌던 성경해석 방법과 조건들에 대한 철학적 성찰에 맞선 원리이다. 바르트의 성서해석의 원리들은 다음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1) 말씀 아래 있는 인간의 자유에서 성서의 해석이 일어난다.
바르트의 신학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하는 것은 인간의 신학과 성서를 해석하는 신학자의 머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수동적인 상태에서 성서 자체의 해석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신앙의 헤아림에 따라서 해석에 적극적으로 봉사하는 방식으로 해석에 참여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말로 해명되기를 바란다면 인간은 성서 해석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2) 우리의 사고와 신념을 하나님의 계시(성서)에 종속시켜야 한다.
해석은 나의 모든 사고와 언어를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종속으로서의 바르트의 성서해석학은 우리의 사고의 개념과 신념을 성서에 집어넣으려는 것이 아니고 성서에서 사고와 의미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즉 인간의 사고와 개념, 확신을 계시의 증언(성서)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여기서의 종속은 우리의 사고와 개념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 해석에 있어서 우리의 관점을 성서 자체(계시의 증언, 또는 예수 그리스도)에 두거나 성서자체를 따라가는 것이다.

 


종속개념으로서의 성서해석은 텍스트가 해석을 이끌어 간다. 텍스트로부터 신학이 나오고, 해석이 나온다. 바르트의 신학은 텍스트에 종속된 신학이다. 그의 신학은 텍스트에 속박된 신학이지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서의 주석은 텍스트를 새롭게 발음하는 것에 해당하며, 성서가 제공하는 텍스트의 해석에 불과하다. 따라서 바르트의 성서해석학에서는 우리가 텍스트를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나를 밀고 나에게 온다.

3) 성서가 성서를 해석한다.
성서해석학은 일반 해석학의 원리를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성서를 계시의 증언으로 보는 바르트에게 성서를 인간의 말로 이해하는 시도는 불가하다. 따라서 성서해석학은 특수한 형태를 가지게 된다. 성서는 인간의 해석이 필요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서는 해석이 필요하지 않다. 바르트는 "성서가 성서를 해석한다"(Scriptur Scripturae interpres)는 것이 성서해석의 근본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성서 자체가 인간의 해석을 요구하며, 성서 안에서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증거하신다.

3. 성서 해석의 3 단계

상술한 성서 해석학의 원리 아래서 바르트는 성서 해석의 단계를 1) 해명(explicatio), 2) 사고(meditatio), 3) 적용(applicatio)의 세 단계로 구별한다. 첫째로 해명(explicatio)은 성서를 해명하기 위한 성서의 문학적, 역사적 연구와 내용을 연구하는 것이다. 즉 텍스트의 구조와 의미의 문학적이고 역사적인 제시를 하는 것이다. 둘째로 사고(meditatio)는 텍스트를 따라서 생각하고 텍스트를 평가하는 것이다. 이 단계는 '해명'과 '적용'의 사이에서 충분한 주의를 가지고 합리성과 비합리성에 대한 숙고를 하고, 또한 우리 자신의 사고 형식에 대한 비판도 시도한다.

 

 

 

셋째로 적용(applicatio)은 성경 본문을 자신의 이해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증거를 자신의 책임성있는 지식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성서의 독자와 계시의 증언이 '동시적'이 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동시적'이 되게 한다는 말은 성서의 독자와 성령의 내증이 서로 통일되고 일치되는 것을 말한다. 이로서 성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적용은 우리가 성경을 우리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목적 수행을 위해 성경이 우리를 취하도록 우리 자신들을 내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4 바르트의 성서해석학의 특징

1) 계시의 해석학
바르트의 해석학에 반대하는 이들은 성경 본문의 주제 내용이 현대 독자인 우리들에게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르트도 불트만과 같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연결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다만 불트만에게 그 연결점이 '해석의 그 과정 자체'라면, 바르트에게는 '텍스트가 증거하는 하나님의 계시'였다. 진론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바르트는 "우리 밖에서(extranos)" 출발했고, 불트만은 "우리 안에서"(intranos) 출발했다.

 


이미 논술한바와 같이 바르트에게 성경해석은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순종이다. 따라서 바르트의 해석학은 형식적인 언어학적 고려에 일체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의사소통의 차원들을 논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언어의 기능에 대한 성찰에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인간의 의사소통의 차원을 중시한 슐라이에르마허의 해석학을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슐라이에르마허의 해석학은 바르트 해석학이 추구하는 공리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융엘(Eberhard J ngel)이 지적한바와 같이 바르트의 해석학은 '계시의 해석학이었고 의미작용(signification)의 해석학이 아니었다.

2) 비언어적 해석학
바르트의 해석학의 특징을 비언어적 해석이라고 언명하는 것은 바르트 해석학이 언어의 중재적 기능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는데서 나온 말이다. 언어의 중재와 그것이 일으키는 의미의 애매모호한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로고스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 진론드는 바르트는 텍스트 해석에서 언어의 기능들이 갖는 중요성, 특징, 내용을 이해하는데 소홀히 하였다고 보았다. "바르트는 성경에 대한 자신의 읽기, 관찰 성찰, 전유를 통해 얻은 자신의 공리를 자신의 해석활동에 적용하였으나 이 공리들은 비평적 성찰 없이는 교조주의적인 것이 되며 우리의 해석 결과에 너무 많은 것을 미리 결정해 버린다."

 


바르트의 해석학이 비언어적 해석이라고 해서 바르트가 역사비판을 반대한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의 성서해석의 3단계에서 보듯이 그는 역사비판을 수용한다. 그러나 그 역사비판은 다만 성서 이해의 예비적 역할만을 한다고 본다. 바르트에 의하면 '역사비판'은 성서 주석의 목적이 될 수 없고 성서를 이해하기 위한 서론에 불과하다. 바르트에게서 성서해석은 다름 아닌 바로 성령의 내증, 즉 텍스트를 통한 그리고 텍스트 속에서 성령에 의한 성서의 자기 증거이다. 따라서 바르트의 성서해석학은 언어의 중재가 결여된 비언어적 해석학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5. 바르트 성서해석학의 평가

한 마디로 평가를 내린다면, 바르트의 성서해석학은 우리의 사고와 개념을 성서의 증언에 두고, 그것의 인도를 받는 성령론적 해석학이라고 할 수 있다. 바르트의 성령론적 성서해석학은 역사적 연구의 결과, 즉 역사적 비판의 역할을 소홀히 다루고 있다. 즉 계시의 언어를 현대 문화와 인간의 언어로 바꾸어 세상에 도달하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런 결과는 바르트 자신이 해석학에 관심이 없었다기보다는 계시를 계시 자체로 보아야 한다는 그의 특별계시적 헤석학 또는 성령론적 해석학에 충실하려는 바르트 자신의 신학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보여진다. 바르트의 해석학은 해석학의 방법론 또는 기술적인 면보다는 해석학의 근본 원리에 초점을 두었다. 바르트는 이 근본원리 위에서 성서의 언어를 오늘의 언어로 바꾸고자 하였으나 그 기술적인 개발을 이루지 못하고 그 과제를 우리들에게 넘겨준 것으로 보여진다.

V. 바르트의 변증법적 해석학

바르트의 해석학은 그의 독특한 변증법을 통하여 정립되어 진다. 그의 변증법적 해석학은 그의 핵심적인 신학 개념에서 더욱 많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계시자이신 하나님과 계시되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치를 말하는그의 기독론에서 그러하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의 말로 나타나지만 동시에 인간의 말로 나타내어 질 수 없다는 절박한 하나님의 현실이 신학적 문제가 된다. 바르트는 이 문제를 그의 독특한 변증법적 도식을 통해 해석한다. 19 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자, 하르낙(A.v. Harnack)과 헤르만 (J.W. Herrmann)에 의해서 주도된 자유주의 신학에 도전하여, "성서 만으로(sola scrpitura)"라는 표어로 종교 개혁적 전통을 재수립하고, "말씀의 신학"을 전개한 칼 바르트(K. Barth, 1886-1968)의 신학을 우리는 "변증법적 신학"이라고 일컫고 있다. '변증법적 신학'이란 이름은 바르트가 1922년 엘거스부룩

 

 

 

(Elgersburg)에서 "신학의 과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Das Wort Gottes als die Aufgabe der Theologie, 1922)이란 제목으로 행한 강연에서 어느 무명의 청중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다. 바르트의 사고가 변증법적 사고임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논문은 바르트가 1919년 탐바허(Tambacher)에서 강연한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Der Christ in der Gesellschaft)이다. 바르트는 이 강연에서 "명제", "반 명제" 그리고 "종합명제"란 단어를 즐겨쓰고 있으며, 주제를 전개하는 방식이 다분히 변증법적이다. 바르트가 "이 논문에서 제시한 종합명제는 "세상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변증법적 종합명제이다.

 


그의 종합명제에는 언제든지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 사이의 전적 분리가 전제된다. 그러나 바르트는 신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의 분리를 기독론적으로 극복한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사건을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분리를 극복하는 사건으로 본다. 하나님은 인간과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분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생명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땅에 직접 오신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분리에도 불구하고 그 양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극복되는 과정은 변증법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인간되심"을 소위 명제(Thesis), 반명제 (Antithesis), 그리고 종합명제(Synthesis)란 변증법적 용어를 빌어서 설명한다. 그의 변증법은 명제에 대한 반명제 그리고 그 반명제와 명제의 종합으로서의 종합명제라는 도식의 헤겔의 변증법이 아니라 오히려 근원적인 것을 종합명제(Synthesis)로 보고, 이 종합명제로부터 반명제(Antithesis)와 명제(Thesis) 자체가 나온다는 독특한 변증법을 사용하고 있다. 바르트의 변증법에 있어서 명제는 반명제의 전제가 아니라, 오히려 반명제 속에 있는 부정과 긍정 사이의 갈등을 극복해야 하는 종합명제의 전제로 본다. 이러한 바르트의 변증법적 도식은 '동시성'의 특징을 갖는다.

 


이런 변증법 도식은 바르트의 기독론에서 특히 인간과 하나님의 갈등이 극복된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 사건에서 크게 부각되고 있다. 바르트에 따르면, 세상의 나라 혹은 현세의 나라는 역사적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나라의 반명제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반 명제로 있는 이 세상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극복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갈등이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간 되심으로 극복될 수 있는가?

 


바르트에게 있어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갈등이 기독론적으로 종합되는 것은, 쌍방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바르트에게서,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과의 분리는 영원한 분리로 끝나지 않는다. 이러한 분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의 선택(신앙)으로 극복한다. 이 선택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인식"과 세속적 지식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는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에 의해서 쓰여진 성서가 어떻게 모든 세속적 지식 내지는 인식을 초월한 하나님 인식을 제공해 줄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바르트도 성서가 하나의 종교적 문서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서의 증언은 그 속에 하나님에 대한 통찰이 있기 때문에 다른 문서와 다르다고 강조한다. 바르트가 본 성서의 통찰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통찰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인간의 부정적인 요소들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하나님의 긍정이라는 점에서 성서의 증언도 다분히 변증법적이라고 그는 확정한다. 이러한 바르트의 논리 전개는 우선 먼저 성서의 특성, 즉 인간의 종교적 문서와 하나님에 대한 통찰을 분리시키고, 그 다음 분리되어 있는 내용이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한 증언이라는 하나의 사실로 종합함으로서 양자의 분리를 극복하여 성서의 독특성을 증언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전개 방식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하나의 사실 혹은 사건이 갖고 있는 양면성(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역설적이면서 동시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해야 한다는 과제는 갖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은 질적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해야한다는 과제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로 남게 된다. 그러나 '해야 한다'는 과제와 '할 수 없다'는 인간의 현실적인 질적 차이 속에 내재해 있는 이러한 변증법적 대립이 극복 될 수 있는 방법은 "새로운 사건"의 발생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사건"은 인간 편에서 일어날 아무런 가능성이 없다. 바르트는 이 "새로운 사건"을 하나님의 계시 사건으로 특징짓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 사건은 바로 말씀의 화육사건, 즉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사건"이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에서 두 명제의 갈등은 기독론적으로, 즉 "말씀의 성육신", 곧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으로 극복되어진다.

 


바르트가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은 단순히 자기 자신 안에 머물러 있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는 또한 무엇인가 다른 존재가 되실 수 있는 분이다. 그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다. 이와 같이 자신을 긍정으로서 우리의 부정 속으로 들어오시는 곳, 즉 "하나님의 인간되심"의 사건이 전제된 곳에서만이 갈등이 극복되고 부정이 긍정으로, 긍정이 부정으로 해석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해야 한다'는 과제와 '할 수 없다'는 이러한 변증법적 대립을 바르트는 "하나님의 인간되심의 사건"으로 극복한다. 이러한 변증법적 도식은 명제와 반명제가 종합명제에서 나오는 변증법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재진 박사가 바로 본대로 바르트는 변증법적 전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혹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봄으로서의 자신이 제시하는 종합명제의 출발점으로 삼았으며, 화육된 말씀(하나님의 인간되심)을 그의 신학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해결점으로 삼는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갈등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바르트는 언제든지 신(神) 중심, 더 자세히 말하면 그리스도 중심의 극복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트의 변증법적 해석학은 그의 성령론적 해석학과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VI. 바르트 해석학의 강점과 약점

바르트 해석학의 장점 및 강점은 성경 본문의 의사소통적 관점을 재발견하고 우리로 하여금 성경 텍스트의 신학적 메시지에 주목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우리가 오늘날 이 메시지를 어떻게 파악해 낼 수 있는지, 이 텍스트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 그리고 성경 독해에 다양한 정당한 방법들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러한 점이 바르트 해석학의 약점이라 볼 수 있다.

 


진론드는 바르트의 해석학은 적합한 텍스트-해석 이론을 발전시키는 일과 동시에 적합한 세상-해석 이론을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을 아울러 거론하지 못했다고 평하였다; "바르트는 현대의 해석학적 과업에 공헌하기보다는 자기자신을 신학적 해석학의 특별한 형식을 옹호하는데 제한시켰고, 현대에도 계속되고 있는 문화에 대한 다른 해석들을 정당한 것으로 수납하기를 거부했다." 진론드의 분석에 따르면, 바르트의 해석학은 텍스트-해석의 원리들과 현대 해석자들이 제시하는 지평에 대한 도전을 비평적으로 성찰하고 있지 않다.

 


에벨링(Ebeling)은 바르트의 "하나님 말씀의 신학", 성령론적 해석학을 간접적으로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성령의 역사는 이해되어야 할 해석학적 과제라는 것이다. 그는 바르트의 신학이 해석학적 과정을 무시하고 있다고 본다. 에벨링은 직접적인 방법으로 바르트의 신학을 비판하는 것을 피하고 있지만, 바르트가 이해의 문제를 곡해 또는 오해하였다고 본다. 에벨링은 바르트는 신학의 본래적 사명인 하나님 사태가 언어로 전달되어 오는 중심적 현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책임적으로 말할 수 있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왜냐하면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처한 보편적 해석학적 지평 위에서 검증할 수 있어야 하는데 바르트의 해석은 그 검증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에벨링이 뜻하는 바는 신앙의 언어는 언어에 의한 사건으로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에벨링의 시각으로 보면 바르트의 신학이 해석학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신학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사실 바르트를 해석학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바르트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 신학에서 만약 어떤 해석학적 과정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성령론적 해석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으며 이는 바르트 신학의 다른 이름인 "말씀의 신학"인 것이다.(김영선)


cli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