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철원-20세기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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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앙 연구가들/서철원

2009.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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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신학            칼 발트는 1913년 자펜빌이라는 조그만 알프스 산골 동네의 교회에서 목회를 했다.그러나 교회에 와야 할 사람들은 오지 않고 주일에는 모두 다 들로 산으로 놀러들 나간다.  더군다나 바르트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다른 교회가 하나 있는데, 동네 사람들은 자기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를 지나서 그 교회로만 속속히 들어간다.  발트는 뒷짐지고 가만히 서서 유리창 넘어로 그 지나가는 사람들만 물끄러미 쳐다 보고만  있다. 그 당시 그 옆교회 목사는 당대에 유명한 목사였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거기에 많은 상심을  했지만 그러나 거기에 멈추지 않고 성경과 신학에 매진했다. 몇십년이 흘러 결과에서는 그 사람의 이름은 아는자 없지만 오늘날 바르트는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신학자로 자리 매김한다. 

그래서 20세기는 숫자상으로 1901년부터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제1차세계대전이 나던 1914년 이고,경제적으로는 미국이 대공항을 겪던 1929년이요, 신학적으로는 칼 빨트의 로마주석이 나오던 1919년 이라고 할 수 있겠다. 1922년에 다시 수정재판이 나오고 2년뒤엔  박사학위 조차도 없는 이 발트에게  대학교수로 초빙이 들어온다. 발트의 이 로마서 주석 때문에 세계 신학계가 발칵 뒤집혀 소용돌이 치게 된다.

 19세기는 과학의 발달로  구라파의 산업혁명이 거의 완성됐을 때 이다. 구라파는 새로운 무기들을 생산해서  대규모 노예사냥, 세계곳곳의 식민지 정복, 그들의 통치 영역을 전세계적으로 확대했다. 같은 시기에 사상적으로는 무한한 진보가능성을 믿는 학설들이 많아졌고,  특히 1859년 다윈의 진화론에서 '종의 기원'은 서구인들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했다.

그러므로 19세기 유럽사람들은 무한한 진보 가능성을 믿었고 이성을 지도자로 나가는한 모든 것이 분명히 유토피아 세계가 실현될줄 믿었다. 그래서 세계제1차 대전이 나기전 1899엔 하르낙은 베를린대학교 강의 중에 '이대로 나가면 우리의 생활영역이  완전히 변화될것' 이라고 말했다. 

 각국 식민지에서 대량의 싼물자들이 구라파와 미국으로 마구 쏟아져들어왔다. 그래서 서구인들은 자기들 이상으로 또 기독교 정신으로 무한 가능성을 개발 진보발전하면 결국엔 이상세계 유토피아를 이룬다고 믿었다. 그러나 1914년 세계제1차 대전은 자기들의 손으로 건축했던 그 찬란한 서구문명을 헐어버리게 됐던 것이다. 

아리스토 텔레스(BC384-322)는 인간본질의 정의를 합리성에 두었다. 그래서 18세기는 이성이 종교를 낳는 해이기도 했고 그렇게 이성으로만이 모든 것을 이룰줄 알았는데 세계1차 전쟁을 만나 외부세력이 아닌 자기손으로 자기들이 만든 문명을 다 부숴버린 것이었다. 이것이 서구인의 큰 충격이었다. 

18세기에  서구에 나타난  고전주의와 산업혁명의 대량생산 자본주의의 발달과 전통적인 삶의 방식은 온통 뒤바뀌게 됐다. 그래서 이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주관·개성·공상·상징·신비·초자연적 문학예술은  프랑스 대혁명(1799)으로 민주화가 가동은 됐지만, 나폴레옹의 보수의 등장으로  나폴레옹의 제1제정→왕정복고→워털루대전 패배와 백일천하→7월 혁명→2월 혁명→제2공화국→제2제정으로 이어지는 불안한 정치상황은 고전주의의 정신을 그 뿌리에서부터 흔들어 놨다. 

영국의 산업혁명 완성은 농경사회였던 유럽 사회 전체를 점차 산업사회로 탈바꿈시키는것과 동시에 수공업 소량생산에서 기계공업에 의한 대량생산체제로 바꾸어지고,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신분은 보잘것없지만 경제력을 가진 대중이 등장하게 되고, 그들은 시장경제를 통해 부의 축적을 꾀하게 된다. 

예술품이 상품화되고, 창작 개념이 일반화된다. 문학의 향유층이 귀족층이나 상류사 살롱 문학에서 벗어나 일반대중으로 바뀐다. 세계를 논리적인 법칙이 아니고, 감각적인 인식과 우연, 그리고 직관적인 힘의 유기체로 인식하게 되는것과 개성의 존중이 강했던 낭만주의가 한창팽배하고 있을 때 포루투칼 리스본에 지진이 일어나 그날이 만성절이어서 시민의 대부분이 교회에 모였다가 시민 23만명중 거의 100,000명이나 죽는다.

 얼마전에도 아이티 지진 23만명  칠레지진 300명이 죽었고, 몇 년전에도 중국 서남부 쓰촨(四川)성에서는 리히터 규모 8.0급의 강진으로 약 10조원의 경제적 손실, 사망실종자 7만4천명, 2천100만채 건물 파손됐고,   미얀마는 사이클론(열대성 태풍)으로 인해 13만명의 사상자.  또한 1995년 발생한 일본 고베 지진 재산 피해액이 우리돈으로 120조원, 사망자는 6434명(일본 지리통계요람, 2008)이고, 또 2004년 발생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지진으로 리히터 규모 9.0에 재산 피해액은 10조원 달하고 사망자는 무려 28만명으로 추정되며,  1976년 7월 규모 7.8급 중국의 탕산 지진으로 사망자 24만명을 기록.  1970년 방글라데시에서 발생한 사이클론에  사망ㆍ실종자 수는 5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때 하나님이 이세계를 합리적으로 지으셨는데 왜 이런 불합리한 천재지변으로 사람이 죽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렇게 이성을 신뢰하고 확신에 차있던 서구 지성인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전쟁을 일으켜 문명을 헐어버리고, 그리고 수많은 재해로 인한 사망과 손실로 결국 그들의 절대이성사고가  깨어지기 시작해 인간은 합리적 존재가 아니라 불합리한 존재란 것을 깨닫게 되면서 항상 외부로만 지향하던데서 내부로 돌아와 인간실존의 연구가 다시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실존에 대한 책들이 나오면서부터 인간의 기본이 무었인가를 생각하게 됐고, 인간의 지성은 실용적이 아니고 진리자체만를 탐구하는것이라고 했다. 인간은 불합리하고 유한하며 그 유한이 죽음을 만들어 내므로 실존주의에서는 남의 일처럼 여겼던 죽음을 자기문제로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칼 빨트(1886-1968)는 회상했다. 그렇게 사랑의 종교를 외치던 자기선생 하르낙을 위시해 97명의 신학자들이 1차대전 수행에 가표를 던져 서명했던 것을 회상하면서 죄의 심각성을 의식해 다시 칼빈의 글로 되돌아 갔다. 

칼빈의 인간 전적부패를 발트는 예리하게 통찰했다. 마치 우리나라에도 본인이 직접 TV 생중계 과정을 지켜본바에 의하면 1980년 8월에 당시 국보위 전두환 장군을 위해 조찬기도를 열었던 23명의 각계교단 중진급 지도자들처럼 신촌 성결교회 원로목사 정진경을 위시해서 보안사 군목 문만필목사 (강림교회 ), 조향록목사(전 기장총회장), 김지길(감리교 전감독회장), 김인득 장로 (벽산그룹 회장),  한경직(예장 통합 증경총회장 작고), 장성필 목사(사망),  강신명 목사(새안교회 원로목사), 지원상 목사(루터교 증경총회장), 이봉성(한기총 전총무), 신현균(성민교회 원로목사), 김창인(충현교회 원로목사), 김준곤목사(대학생 선교회 전회장), 이경재(감리교 증경감독), 박정근(순복음 중앙교회), 김용도(침례교 총무) 등 이들중에 신현균목사와 지원상목사만이 양심이 거리껴 참회의 성명을 내기도 했지만 그외 21명은 전혀 반성의 기미도 없이 지금도 마치 의인처럼 행동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 당시 동영상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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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은 우리타락한 본성은 죄를 필연적으로 짓는다고 했다. 우리가 죄지으면 죄과에 대한 용서에 끝나지 않고 또하나의 메카니즘을 형성해서 제2천성으로 역사하여 죄를 더 짓게끔 죄를 끊을수 없도록한다.  복음의 권세가 아니면 도저희 끊을수 없도록 행사한다는 것이다. 

빨트는 이렇게 인간의 죄과를 말하는 종교개혁 글들로 소위 키엘케고올의 변증법.즉 실존주의 사상으로되돌아간다. 그러므로 20세기 실존주의는 빨트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하이덱거가 발트이후에 존재와시간이란 책을 써서 20세기 최대의 형이상학자로 인정을 받지만 그러니까 발트이전까지 종교는 저 하나님에 대하여 연구한것이 아니고 인간이 왜 종교적인가를 연구하여 특히 종교의식을 분석과 해명으로 여겼다. 

그러니까 슈라이 막헤르 이후의 내재신학은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여 하나님께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종교감정을 연구하여 인간으로 끝난다. 물론 발트가 완전개혁신학으로 되돌아왔다고는 할수없으나 최소한 신학의 흐름의 판도는 바꾸는데 공헌을 한 것이다. 그래서 신학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묻고 이제까지 내적인 종교체험과 내재종교의식만 생각한데서 돌이켜 전통적인 종교개혁이 출발한 하나님 말씀에로 되돌아가는일이 시작되었는데 그런면에서 발트가 로마서 강해를 냈던 1919년이 신학적으로 큰의미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19세기 내재신학이 서양의 사고에 있어서 이성의 능력과 그 범위가 무한데까지 미칠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칸트(1724-1804)는 순수 이성자체만을 연구하여 그 이성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밝히기 시작했다. 칸트이전엔 합리론이었다. 

이제까지 이성이 영원하고 무한의 세계까지 확장하고 침투못할부분이 없지마는 칸트에게는 그 범위를 현상계의 영역으로만 좁히고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온 경험의 내용만 더 중요시 했다. 보편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 그리고 영원한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것, 그리고 이성의 진리가 아니라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온 사물의 이해가 중요했고 그것이 진리의 표준이고 진리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영원한 진리같은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사물의 경험, 구체적인 내용의 이해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영국의 데이빗 흄(1711-1776)의 영향이 칸트에게 크게 작용했다. 이제까지 칸트도 합리론을 생각 했으나 감각기관을 통해서 구체적인 외계상을 받아들인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데이빗 흄은 지식이란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온 그런 인상이 연상작용,즉 습관에 의해서 이뤄진 결합의 경험으로 생각했다. 칸트는 감각기관을 접촉하여 경험이 가능한 영역까지만 이성이 알 수 있는 영역이며 그것이 현상계라고 하는데 그것이 곧 경험세계 즉 시간과 공간세계 물질의 세계 뿐이다.  그것은 두뇌사고에 의해 활동할뿐 영이 보이지 않아 증명할길이 없기 빼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내세를 말하고 영혼을 증명할것인가 성경으로 증명한다는데 성경은 어데서 왔다는 말인가? 

종교사학적으로 그 출처를 파해쳐도 그런증거가 없는데 영감 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믿을수 있는가? 루돌프 뿔트만 같은 사람은 궁켈의 제자로서 양식사학파를 완성한 사람인데 복음이 순수한 계시의 전개가 아니라 초대교회가 예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것이 복음서로 나타났을뿐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수 없다고 했다. 칸트이후 슈라이막헤르(1768-1834)에 의하면 종교는 증명이 불가능하므로 지식의 일로가 아니라 감정의일로 다루기 시작했다. 신의 세계는 느낌으로 온다는 것이다. 절대의존감정이라고 한다. 

그는 개혁파교회 목사아들로서 감정의 일로 정함은 그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서있기 때문이다. 또한 칸트 배후엔 흄이 있다. 예를들면 건축가가 집을지으면 다음에도 그 경험을 되살려서 그와같은 집을 지을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강남 잠실에 롯데 월드측은 그 롯데월드 빌딩을 과거에 지어본 경험으로 다시 112층짜리 555m 높이로  세우지만 그러나 우주는 단 한번이므로 증명할길이 없다는 것이다. 

칸트는 하나님에 관한 것은 알수가 없고 드러나지 않는 감각할수 없는 것은 예지계, 드러난 것은 현상계라 하여 흄의 도식을 받은 칸트는 신은 현상계에 속하지 않고 예지계에 속한 다고 하여 인간의 감각 영역밖으로 쫏고 지식영역만 현상계에 국한했다.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하나님을 우리가 알수 없으니 지식의 대상에서 제외시켜버렸다. 

슈라이막헤르가 내재신학을 인간의 감정에서 출발한 것은 그가 진센돌프에서 나온 경건주의 운동에 가담하여 모라비안파와 접촉을 했고 소위 느낌을 강조하는 낭만주의 시인들, 문인들, 그리고 철학자들과 많이 어울렸기 때문이다. 루터교도 중생체험을 많이 강조하지만 슈라이 막헤르가 전통적인 신학을 180도로 전한시켜 놓았다. 예수가 하나님 아들-예수에겐 신의식 종교적 체험,또한 그 의식도가 무한하기 때문에 그런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것이다. 

이렇게 헤겔의 영향으로 다윈의 진화론을 힘힙어 무한한 진보가능성을 내다보고 기독교 사랑정신으로 잘되어가는 것으로 철저히 믿었던 서양인들에게 1차 세계대전으로 문명이 파괴되자 합리론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키엘케골도 변증법적으로 전개하여 하나님을 우리와 전적으로 다른존재로서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무한한 거리가 있다고 했다.인간의 이성만 취택케되면 자연은 필요없게 되고 은혜를 취택하면 이성의 길이 배척되게 된다. 그래서 중세가 끝날 때 이성과 자연을 많이 택하여 근세계몽주의가 되고 은혜만을 택하는 종교개혁이 나왔다. 

자연의 개념으로 기독교를 배척하기 위하여 최초로 나온 것이 영국이신론 자연신론이다. 여기 이신론이 무신론의 원조이다.키엘케고올은 무한이 질적으로 다른 영원하신이가 시간속으로 들어오셨다. 즉 무한하시이가 유한세계로 들어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유한속에 무한이 담겨질수 있겠는가? 작은그릇에 큰그릇을 담는 것이 불가능하듯 그럴수 없다는 것이다. 루터는 종교개혁때 중생의 체험을 했다.그것이 합리주의 교의학인데 그 반박으로 모라비안파의 경건주의가 나오게 되었고 결국 루터에 의해서 겨속되고 그것이 다시 웨슬레에게 넘어갔다. 

메소디스트 웨슬레가 갔던 그 신앙의 길로 가고 있는데 그것이 알미니안 신학과 합세를 해서 미국의 부흥운동이 되고 성결운동이 되고 오순절 운동이 되었다. 칼 빨트는 슈라이막헤르를 저지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전적인 타자로 해야했다. 그분은 그냥 우리속에서 말씀하시는분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말씀으로 오셔야 한다. 

와서 우리의 소유가 되면 또 내재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말씀이 내안에 들어와 일을 이루는 것을 부인하고 다만 밖에서 위기의식만 일깨우고 떠난다고 한다. 빨트는 우리처럼 선택유기가 없고 단지 선택뿐 만인 구원설이다. 그에겐 성경자체가 계시자체가 아니고 단지 계시사건을 지시하는 지시물에 불과하는 기록뿐으로서 다만 계시사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과 일치할 때 비로서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자체로서 하나님 말씀의 기능을 다 한다. 말씀의 영원한 가치가 시간적 현상가운데 비추이고 말씀의 신적인 광채가 인간적 본질에 비추이는 세계가 되기 때문이다.
(פרופסור  שְׂצְליוּ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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