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철원-구속사 바른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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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앙 연구가들/서철원

2009.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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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 바른 이해

 

 

                                                                                                (갈라디아서 3장 1절~4절).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참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복을 받는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도 율법으로서가 아니고 믿음으로 받는다고 했다.  

 

왜 율법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는자들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미 믿음으로 세상을 구원 할 것을 율법이 오기  43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의롭게 됐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들을 주신다고 하는것은  '많은 자손이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라 곧 그리스도의 씨가' 자손이라는 것을 바로 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바울이 말한다.

 

아브라함이 믿는 그 똑 같은 믿음을 우리가 가졌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었고, 우리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믿었다.  세상의 약속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어서 동일한 믿음이다. 그래서  율법을 지나 믿음을 지키는 이방인들이 참 아브라함의 씨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의 백성이고,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우리가 받는다.  아브라함이 믿는 그 믿음으로 인해서 우리가 의에 이르고  성령도 받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의 영을 보내셔서 (갈4:5-6)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기 때문에 이방인인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들이 된다고 갈라디아서 4장은 말한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율법을 지킨 유대인들의 성경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의 성경이 되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경이 되는 것이다.  구약 성경이 말하는 근본 중심과 모든 핵심은 다 그리스도이다. 바로 아브라함이 믿고 바라던 그 그리스도를 구약성경 전체가 말한다.   그리스도 이름이나 약속이  언급이 없는 곳 일지라도, 그러나 구약은 전체로서 모두 다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그래서 구약이 모두 다 교회 성경이 된다.  

 

구약 자체로서는 완결되지 않고, 늘 불안해서 안식과 쉼이 없으나, 구약 전체가 다 그리스도를 목표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를 향해 달리고 결국은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성경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을 읽을 때 반드시 그리스도로 부터 읽고 이해해야  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을 이루셨고 바로 그 동일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구원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의를 이루셨던 것이다.

 

  유대주의는 문자적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바울과 신약의 저자들은  신약을 증명할 때엔 항상 글자 그 대로서가 아니고, 바로 구약의 그 약속이 구약의 문맥을 떠나서 신약에서 성취되므로, 그 문맥이 이루어진 것으로 설명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신 구약이 하나의 성경으로 되어 있어 별 문제가 없지만,  초대교회에서는 4복음서나, 바울의 서신들을 읽을때  구약이 어떻게  교회성경이 되느냐 하는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구약성경이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의 성경이 아니고 바로 율법을 지키는 그들을 지나서 교회의 성경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무단히 노력했던 것이다. 초대교회는 구약을 인용해서 신약에서 성취된 것을 말할 때는 일단 그 문맥을 떼어다가 그리스도에게 맞춤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것을 분명하게 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메시야적으로 해석된 70인경을 성경으로 택했으나,  유대인은 자기들이 번역했던 그 70인경을 메시야적으로 해석됐다고 해서 그것을 버리고, 순전히 문자적으로 해석한 책으로 되돌아갔다. 초대교회가 형성될 당시에 구약은  다 희랍어로 번역됐다.

 

유대교 랍비들은  구약 전체를  그리스도와 상관 없는 것으로 보았다.  헬라 디아스포라 유대교는 구약을 순수한 철학과 윤리로만 이해하는  주석을 발달시켰다. 이것은 특히  헬레니즘 문화와 전통을 집대성 한 것으로 알려진 알렉산드리아에서 발전하였다.

그래서 구약과 희랍의 철학이 만나 조화를 이룬 것이 알렉산드리아인데 이때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라고 하는 유대인 학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과 동시대 사람으로서  구약 해석을 희랍 철학 특히 플라톤의 철학을 가미시켜 우화적으로 해석하는 소위 알레고리칼 해석을 발달시켰다.

 

이 해석이  알렉산드리아의 교부인 오리겐과 클레멘트를 통해서  교회로  들어와 루터의 종교개혁 때 까지 계속 돼 지금까지도  그렇게 이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이것을 영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영해로서 우화적인 해석을 하게 된다고 한다. 이 해석이  중세 천년이상 유지했다.

 

다음은  미래의 구원시대의 약속에 중심을 두는 묵시문학과 광야분파인 쿰란학파의 해석인이다. 쿰란 에세네파들은 자기들만이 메시야를 맞을  선택된 백성들로 여겼기 때문에, 메시야가 오셔서 구약의 모든 약속을 이루실 때 그 구약의 복을 다 자기들에게만 줄 걸로 믿었다.

 

 

그래서 구약은 전체적으로 앞으로 성취되어야 할 선지자적인 선포이다. 초대교회는 성경 해석을 이 묵시문학과 소위 광야분파들의 성경해석에  출발점의 근거를 갖고 있다. 이유는 그 쿰란파와 묵시문학이 기다리는 그 구속주 구원시대가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됐고 도래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복음이 잘 전달될 수 있는것은   소위 세례요한이 나온 광야분파의 성경 해석이 그 랍비들의 성경 해석보다는 더 가깝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가  광야분파보다 한발 더 나간것은 메시야 시대를 기다리는 기다림의 단계가 아니고 완전히 성취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쿰란파의 구약 이해와  신약교회의 구약 이해는 전혀 각도가 다르다. 초대교회의  구약에 대한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 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자신의 신적 권위와  성경말씀의 권위도 반복해서 강조했고, 또 자기가 왔지만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룬다는것과  랍비들과 바리새인들의 유전 뿐만 아니라 토라 자체까지 그 비판을 가했다.

 

결례에 대해서도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으로 이혼 문제에 있어서도 모세의 이혼증서에도 비판을 가함에 있어 본래 그것들은  바른 법이 아니고,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은 사람이 결코 나누지 못할뿐 아니라  너희들의 완악함 때문에 그런 것이지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한다. 그래서 모세가 신명기에서 준 법이 처음부터 타당한 법이 못된다고 하는 모세의 권위까지 시비를 한 것이다. 토라가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는데, 토라 자체까지, 시비를 한 것이다.

 

산상수훈에서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옛사람이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음에 음욕을 품은 자는 이미 마음에 간음하였느니라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이미 살인하였느니라' 성경 자체를 근본에서 바로 해석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모세보다 훨씬 더 높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의 종말론적인 성취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모세의 권위를 시비할 수 있는 것이다.그래서 자기 오심을 옛 언약에서 말하고 있는 사건 중에 모세가 말하기를 너희를 위하여 하나님이 선지자를 세우실 터인데 나를 순종한 것처럼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심은 바로 구약에 약속하신 그 종말론적인 성취가  구약이 해소 되면서 재창조를 강조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성전을 능가하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성취로서 성전이 더 이상 필요없는 것이다(요 2:19).

 

요나 보다도 크고 솔로몬 보다도  크다고 하는 것은  종말론적인 해석의 의미이다.  그리스도가 구약에 약속한 모든 약속의 성취이기 때문에  하나의 장이 열리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전적으로 새로운 국면의 시대를 여는 것이다.바울 역시 구약에 예비되었던 구속이 신약에서 성취됐다고 보았다. 그래서 교회가 참 이스라엘이고 영을 따라서 난  그리스도인이 참 이스라엘이다고 한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 아니며, 표면적 육신의 할례도 참 할례가 아니다.

 

오직 내면적 유대인 유대인이며 의식법의 문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마음에 받은 할례가 참 할례이다(롬 2:28-29).  여기 표면적 유대인 즉, 물리적으로 아브라함의 피를 받는 유대인이 진짜 유대인이 아니고, 또 유대인들의 할례가, 진짜 할례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예수를 믿는 이방인이 진짜로 유대인 이라는 것이다.

 

육체의 할례가  하나님의 법을 못 지킨다. 진짜 할례는 마음에 받는 성령을 받는 것이다.  글자에 있지 않고 영으로 된 할례가 중요한 것이다.  참 유대인은  성령으로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이 참 유대인이고 교회가 참 이스라엘이고 영으로 따라 난 이스라엘이 진짜 이스라엘인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할례나 무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것이 더 중요하다(갈라디아 6:15).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게 되어 오늘날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어지지 않은채 그대로 남아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고후 3:14).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벗겨진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갔다 왔을 때 모세의 얼굴에 하나님의 광채로 인해 두려워서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웠다.  그 수건때문에 모세가 증거한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볼수 있는 것은 먼저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건이 벗겨져야 구약을 바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바로 믿는 자들의 조상이기 때문이다.우리는 구약은 읽을때 바로 이 종말론적인 성취로부터 읽어야 한다. 옛 언약의 약속과 선지자의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고 성취됐다.

 

옛 질서는 해소하고 전혀 새것이 생겼다. 옛 구원의 질서가 완전히 제거되고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지막이다. 롬 10:4 율법의 마침이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율법을 다 지키고 성취하므로 폐쇄해 버렸다. 그리스도가 성취하셨을 뿐만 아니라 율법의 모든 정죄를 다 담당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서 적용되지 않는다.  

이전에는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에 이르고 의롭게 됐다고 여겼는데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지키고, 그 율법의 저주를 다 받고, 또 다 성취 됐는데 누가 그것을 요구하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빚을 지고 살 때에 빚독촉을 받고 살지만 빚을 다 갚았으면 빚장이가 나에게 뭐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정죄를 그리스도가 다 담당하여 버리셨으니 내가 이제 더이상 율법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의 길로서 율법이 정확히 끝났 버린 것이다. 그러니 구원의 길은 더이상 율법에서 나오지 않고 믿음에서 나온다.  모든 율법의 기능이 종결되고 그 세력이 파괴돼서  더 이상 그것이 나에게 구속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완전 무력화 돼 버렸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그 율법의 길로 갈라디아 교인들이 지금 돌아갔다.  예수를 믿어 세례받는 자들에게는 율법의 적용이 사라졌다는것이 사도행전 15장에 사도들의 공회의의 결정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방인 교인들이 구약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율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율법을 계속해서 지켜오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키며 예수를 믿었는데 이방인들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할례받을 필요가 없고,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없고,  절기를 지킬 필요가 없고, 의식법인 십일조까지도 지킬필요가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성취됐고 끝났으니  예수를 믿기만 하면 바로 구원을 얻는다. 루터는 그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이해할 때 먼저 율법을 선포하고  복음으로 불러내서 그 짐을 벗겨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율법이 구원의 길로 타당하다는 데에 서 있다.그게 루터의 잘못이다.

 

그러나 바울의 이해는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선포할 필요가 없다. 처음부터 예수  믿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만 뿐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율법은 지킬수 없으니까 율법을 지킬 필요없이 예수만 믿으라고 전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분이 넘치고 이가  갈렸다.  자기들의 신성한 종교에 율법을 지킬 필요없이 예수만 믿으면 된다고 하니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바울에 의하면 이방 그리스도인 우리가 구약을 하나님의 성경으로 갖고 있을지라도,  신약은 완전히 새 창조 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종말론적 성취라며  성경증명적 예표론과 우화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구약의 예언이  있는 그 본문을 떼어가지고 신약의 그리스도에게다 적용을 하다보니  그 문맥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예언이 아닌데도 그것으로 그리스도 사건을 설명하고 해석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성취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예언이 가장 많이 들어있는 이사야이다.  이사야가 신약에 있는 4복음 다음에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제 5복음서라고 까지 한다.  이사야 7장14절이하를 보면 그리스도의 예언으로 마태가 인용해다가 그리스도의 성취로 분명히 한다.

 

마태복음 1:23절에 보면 구약의 역사적인 사건이 나온다. 

즉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서로 동맹을 맺고 유다를 침공했다. 침공한 시기는 BC734년 경이다. 이때 남유다 아하스 왕은 자기 부친 요담과 공동 청치를 하던때이다.    당시 근동의 최 강대국으로 급부상한 나라는 앗수르였다. 이때 그 동맹국 두나라는 남 유다 아하스왕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동맹에 동참토록 요구 했지만, 그러나 오희려 반대로 남 유다왕 아하스는(731-716) 그 강대국 앗수르왕에게 금은보화를 몽땅 주면서 자신을 보호 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사실을 알아버린  북이스라엘과 아람동맹국이 위기감을 느껴 먼저 유다를 선수 침공했다.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개입하셔서 이사야 선지자를 남유다왕 아하스에게 보내서 위로 하면서 말씀 하셨다. 하나님게서 말씀 하시기를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동맹국이 곧 멸망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 의지 할 것을 권면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하스는 이사야의 예언과 권면을 믿기를 거부하자 하나님께서는 그 예언의 확실한 신빙성을 확증하기 위해 임마누엘 징조주신 것이다.

 

 

그래도  유다왕 아하스는 그 임마누엘 징조도 믿지 않자 하나님은 아하스가 돈,금은보화를 몽땅 주고 의지했던 그 앗수르를 통해서 다시, 거꾸로 남유다를 징벌하실 것을 선포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해 주신다고 했는데도 아하스는 정치적으로 인위적으로 다 해놨기  때문에 믿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예언대로  강대국 앗수르를 통해 아람.북이스라엘 연합군은 구원 받았지만,  그후 30여년만인 BC 701년 앗수르의 침입을 받아 남유다 전역이 초토화 되어 버렸던 것이다.

 

 

사7:14~17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러기 때문에 마태는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망하는 그 문맥을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십자가를 종말론적 구속 사건으로 설명을 했다.  역사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사건을 설명한것이 아니고  그 문맥에서 그 내용을 떼어다가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될걸로 신약을 설명한다. 그것이 성경적증명이다.  

 

 

개별적으로 여기 저기에 그리스도에 대한  암시와 예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문 전체로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약속하신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온전히 성취된 것을 말한다. 

 

이 본문만 보면  신약에 나와 있는 구약의 예언들이 거의 다 그렇게 해서 맞춘다. 구약의 역사적인 문맥에서 떼어다가 그리스도에게 성취될 걸로 설명한다. 제일 많이 인용된 곳이 바로 마태복음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이 신약성경에 제일 먼저 나와 있는 이유이다.  구약의 성취를 가장 분명하게 말한 책이 마태복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적증명이다. 꼭 역사적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사건으로 설명한다.두번째로는 예표론적인 해석으로서 신약에서  구약을 볼때에  예표론적으로 해석을 바울이 이미 이해 했다.

로마서 5:14에서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이다 고 한것이 한 예이다. 그런데 아담이 모든 인류를 죄악에 빠뜨린 자인데 어떻게 해서 아담이 그리스도 표상의 예표가 되는가.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아담을 세상의 구속주로 오실 그리스도에게  조상이 되는 것과 구원론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말한다.

 

 

고전 10:1~4 에서 출애굽 홍해사건도 하나님의 백성이 세례받는것을 표상으로 보았다.  예표는 역사적인 인물, 과정, 재료들이 다 종말론적인 예수 그리스도 사건의 사전 예표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약은 종말적인 사건의 사전 표상으로 볼 수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다 예표가 들어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구약의 모든 제도들이 그림자다 라고 한다.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다. 구약의 모든 제도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므로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예표로 했다.  이 약속들이 다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하는 것을 밝히는  예표론과 성경적증명이  연관되어 있다.

 

 세번째로, 우화적 성경해석

 

인데 이것은 헬라파 유대교에서 생성됐다. 이 우화적 해석은 역사적 본문과 문자적 의미는 상관이 없다. 홍해를 지나는 것을 세례로 보고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세례 받은 것으로 본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십계명을 쓰실 때에  영구 보존하기 위해 돌에 썼는데 그러나 그것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갈 때 그것이 없어졌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기 전 예례미야가  예언했다. 새 언약의 때가 올 터인데 그 때는 그 돌비에 기록한 계명을 심령에 기록할 것이다(고후3:3). 그래서 율법을 다 지킬 것을 말씀했다(렘 31:31에).

 

 

 

하나님이  돌에 기록한 계명이 지금  예수 믿는 우리에게 '성령' 받음으로  우리 마음에 심은 것으로 해석한다. 그것이 곧 일종의 예표다. 바울은 갈라디아 에서 '하갈과 사라를'  하갈은 지금 육체적으로 시내산이고 사라는 예루살렘 같다고 말한다(갈 4:21~31). 그 두 여인의 사건을 통해서 우화적 해석과 예표론적으로 설명하는데 바로 사라에게서 난 우리가 참 이스라엘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육으로 난 유대인이 진짜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다 라고 한다. 너희는 하갈의 자손밖에 못되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못 된다는 말이다. 이 우화적 해석이 신약과는 조화를 이룰수 없으니 예표론과 합친다. 이를 성경이 증명하기 때문이다. 기록한대로 지상 역사에서 일어나는 것이 진짜 하나님의 구원이다. 이 감각세계 시간과 공간에서 하나님이 구원사역을 이루셨다고 신약이 선포한다.

 

 

말시온은 신.구약이 동등치가 않다고 한다. 왜냐하면 물질을 만드신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구원의 하나님,  비하면  아주 정도가 많이 떨어진다고 한다. 그러니까 구약의 질투와 전쟁의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표시하는 구약을 신약과 같은 자리에 놓을 수 없다. 그러니까 완전히 구약 전체가 필요 없는 것이다. 그것이 말시온과 그노시스 주장이다.

 

 

반대로 랍비들은 이 구약의 문자적인 의미만 보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여기서 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글자대로 보아야 한다고 하는 랍비들의 성경해석과 구약은 통채로 필요 없다고 하는 말시온과 그노시스 주장에 있어서, 이 양면에서 교회가 택한 것이 즉 구약은 하나님의 계시의 책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율법이 폐지됐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을 하나님의 책으로 구원의 책으로 계시의 책으로 불변의 신적인 권위의 책으로 받는것이다.

 

 

또 그렇게 율법이 구원의 길로 일단 폐기 됐어도 '오직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을 정당화 한다.  그래서 말시온이나 그노시스주의를 초대교회가 수정을 가해서 의식법은 완전히 폐지되고 성취된 것으로 보고 그 다음에 도덕법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과 부합되면서 더욱 강화되고 그리고 모든 예언은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됐다고 본다. 그렇게 함과 동시에 구약을 그대로 받는다. 뿐만 아니라 구약의 의식법과 제사법도 예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믿음의 때가 오기까지 율법은 사람을 얽어매는 노예의 가정교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래서 그가 바로 아들이이지만 또한 자유자이고 아버지의 상속자이고 그리고 모든 재산과 종들 위에 권세를 받아 가질 자이지만 아직 상속의 때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상속의 날을 정해서 아들에게 권한과 모든 재산을 다 양도해 주기까지는 노예 가정교사 밑에 있다.

 

 

그래서 비록 주인일지라도 노예 가정교사 밑에 있는 동안은 종들과 같다. 노예들이 사는 똑 같은 법도와 방식으로 산다. 주인의 아들이라고 우리처럼 주인 행세를 하고 특권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노예 가정교사와 똑 같이 산다. 때가 차기까지 그 아들은  노예 가정교사의 매로 다스려 진다(갈 4:1-11). 

 

 

그와 마찬가지로 율법 아래 사는 자들도 돌 위에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살고 절기를 지키며 살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때가 차매 보내사 여인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들로 하여금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 우리가 아들이 되니 그 아들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셨다.

 

 

로마인들은 아들에게 상속식 때에 자기 반지를 빼서 아들의 손에 끼워주므로 그가 주인인 것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한다. 이처럼 우리 마음에 성령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분명히 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했다. 이제 더 이상 종이 아니다. 이제 그 상속식을 한 후에는 종이 아니다. 그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의 유업을 잇는다. 우리가 이제까지 율법에 매여서 그렇게 살았는데 이젠 그 율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로 성령을 모시고 살게 됐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서 그 천하고 약한 그런 것들에 종노릇 할 필요가 없다. 완전한 해방과 자유를  이루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여인의 몸에 나게 하시고 우리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

 

 

그런데 루터는 이 복음의 도를 이해할 때에 아직도 율법 아래 사람을 가두어 두었다가 거기서 해방시켜 복음으로 자유롭게 해야 진정한 구원으로 이루어지는 줄 알고 아직도 복음과 율법이 생명으로 마주 서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이 개신교로 하여금 바울의 복음의 이해를 잘못하게 한 근원이 된다. 구약의 본문들은 단순히 일어나는 사건들의 기록이 아니라 지상 역사 내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역을 신앙 증거로 해석한 것이다.  

 

 

역사 내의 하나님의 사역을 그저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라 신앙증거에 의해서 해석을 선포 한 것이다.  본문들은  사실기록과  신앙의 증거 기록둘이 합쳐져 있다.구약의 본문들의 선포가 하나님이 이룩하신 사건이기 때문에 따로 떼어서는 말할 수 없다.  구약은 하나님의 창조적 말씀에 의해서  그 종말론적인 목표를 향해서 운동하는 역사를 증거한다.

 

 

예례미야가 직면했던 제일 큰 문제가 지금 이스라엘이 망해 버리면 이스라엘에 남아있는 여호와의 종교의 마지막 등불이 꺼진다.  이스라엘의 존재 의의가  다 없어지니 도저히 이해를 못한 것이다.   이 사건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유다가 멸망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리고 이 사역이  이스라엘을 벌하기 위한 사건이라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질 마지막 종말론적인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것이다. 그래서 예례미야가  나라의 멸망을 지켜 보면서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열왕기하  25:27-30 본문만 보면  마지막 사실만 기록해 놓은 것 처럼 보이지만, 열왕기가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어떻게 이루어질것을 열어놓은 것이다.  그 이후는 어떻게 됐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호야긴이 잡혀간지 37년만에  여호야긴을 옥에서 풀어놓아 죄수복을 벗기고 많은 왕들 위에 높이고  그리고 왕의 상에서 먹게 했다. 그 의미는 깊은 절망 가운데에도  여호야긴을 옥에서 풀어 놓아서 그를 높인 것으로 이 열왕기 기자는 마지막 결론을 맺음으로 열왕기를 끝낸다.

 

 

역대기는 제일 마지막에 쓰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포로 생활중인데 이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썼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분명히 가까이 진행되고 있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대로 이스라엘의 회복됨이  가까이 오게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간지 반쯤 살았을 때, 이런 사건이 벌어졌다고 하면서 그리고  거기에 신앙을 담았다. 그렇게 하므로서   거의 모든 성경들이  다  하나님의 역사적인 사역을 신앙으로 고백한 선포라고 하는 것이다. 일반 사건들의 기록이 아니라 신앙으로 기록한 선포인 것이다.

 

 

교회의 신앙고백과 하나님의 선택해서 인도의 문제는 항상  역사 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다룬다. 이스라엘은 항상 자기 역사를 이해할 때에  세계와 민족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주권적인 행동으로  보았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이해한 역사의 큰 해석이다. 세계 어느 민족에게도 이런 역사 이해는 없다. 자기 역사가 바로 하나님께서 이룩하신 행동인데 그것은  자기만 위한 것 뿐만 아니라  세계 민족을 위해서 이루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인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세계사 자체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들어온다.  구약 역사는 세계 역사의 파노라마에 함께 실려있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전개된다. 누가복음의 처음장에 보면 누가는 그리스도의 출생을 말하면서 로마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2장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명을 내렸다. 그는 로마의 황제다. 이 사람이 황제가 됐을 때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고 로마 전역 전체에서 축제를 벌리게 했다. 그가 황제가 되어 첫번째 한 일이 평화의 시대 새로운 시대가 되었다고 했다. 바로 그 황제 때 천하가 다 호적하는데 이때 예수 그리스도도 출생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러니 세계 역사하고 구원사하고 상관이 있게 한다. 이스라엘 역사도 구원사이지만 항상 세계 역사와 연결해서 자기 역사 내로 세계사가 들어오게 한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목표하신 그 목표속으로 인도되는 걸로 분명히 믿었다.

 

 

바벨론으로 잡혀간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세계를 재패하려는 정복자의 야욕 때문에 정복되고 망한 걸로 이야기하지 않고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벌 하기 위해서 느부갓네살을 일으켰다고 한다. 포로로 잡혀간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벌을 갚고 다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하는 것이다.

 

 

전부 다 인과적, 필연적인 과정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으로 말한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세계사의 당연한 사건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주권적으로 역사안에 들어올 때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이고 이 사역으로부터서 만물의 시작과 끝을 해석할 수 있다. 무엇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렇게 진행하시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자기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한 신앙에 의해서 해석한다. 그래서 그 역사는  사실의 역사뿐 아니라   이미 발생한 사건들도 하나님께서 하신 사역들이라고 선포한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갖는 다른 민족과 전적으로 다른 역사 이해다. 앞으로 이루어질 사실을 신앙고백 하는것과 역사적 사건을 신앙고백하는 것의 사이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해할때는 항상 신앙고백된 역사로 해석 해야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지금 우리에게 현재화해서 설명해야 된다. 이 마지막 부분의 역사를 열어 놓은 것도 하나님께서 구원의 사역이 진행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스라엘에게 소망을 주는 것이다. 구원사적 설교는 하나님이 교회를 향해 늘 눈에 두고 살핀다.

 

 

설교는 반복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사역의 미래를 말 한다.  그런데 끝 부분에 가서는 이렇게 여호야긴을 옥에서 풀어서, 37년의 옥중 세월이 지난후에 끌어 올러셔 다시 왕의 자리로 앉혀 왕복을 입히고 왕의 식탁에서 먹게한다.

 

 

이스라엘 해방이 가까이 왔고 그렇게 진행되고 있음을 분명히 알리고 이제 회복될 것을 말한다. 그래서 구원사적 설교는 하나님의 사역이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늘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선포를 듣는 교회는 약속이 되고 위로가 된다.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에 미래도 하나님의 손에 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하나님이 역사적 사역이 현재 이 교회의 하나님의 사역으로 현재화하고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과거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현재 교회의 역사하시는 걸로 현재화 하고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그렇기 때문에 신약교회는 구약의 역사 사건들을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으로 신앙고백한다.  모든 역사의 증거는 선포된 역사다.  역대기 기자가 사실들을 나열해 놓은 기사가 아니라 선포된 사실이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중심을   11장~15장까지 기록하고 있다. 3년의 사건을 10장에 기록하고 나머지 한 주간의 사건을 6개장 에다 기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다 모든 것을 집중한다.  마가복음이 중심하고 있는 기사의 전체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다. 그러니까 한 주간의 사건에 16장 중에서 6장을 할애했다.

 

 

그런데 바울이 읽으면 이 사건들이 전부 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으로 해석한다. 역사적으로 나사렛 예수가 죽은 것은 예수 자신이 왕이라 주장하니  로마의 왕인 가이사의 통치에 대한 반역으로 보인 것이다.  유일신 사상에 보면 이스라엘 해방은 커녕 메시야로서 주장을 하니까 신성모독과 참람죄로 몰아 죽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죽은 그가 어떻게 우리의 구원자가 되는지를  공관복음서에는 없고 요한복음만이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사역이 모두 하나님의 구원사건으로 해석한다. 그러니 바울의 해석이 구원계시가 되고 계시 자체가 되는 것이다. 구약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이 신약에서 역사하신 그 하나님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지상 역사에서 생존하시고 그 행동을 새로 해석하고 현재화하고 그리고 선포해야 하는 것이 구원사적 해석이다. 구약의 본문들은 선포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은 이스라엘의 후기에 와서 신명기 6장4절 유일신 교리이다.  보통 문장으로 써 놓은 명제로서의 교리 체계가 없다. 이것은 항상 하나님의 창조적 말씀에 의해서 역사의 결과를 증거하는 것이 신앙고백이다.  역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이 이룩한 것이 교회의 신앙고백이다. 교회의 신앙고백은 늘 이 지상의 역사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사건들을 상관한다.  신앙고백과 사실 사건의 선포가 항상 긴밀히 뗄 수 없도록 결합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실을 이루실 것을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선포된다.   선지자적 사실들이 진행될 때 사건이 일어나고 말씀이된다.  바로 신앙으로 해석된 그 신앙의 고백대로 사건을 이해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성립하지 않는다.왜 느브갓네살 왕이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멸망시켰느냐? 강력한 군대가 들어설 때는 항상  정복자의 침략이 있었다. 그런 침략은 정복자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서 일어난 사실로 이해된다.

 

 

허지만 이스라엘은 느브갓네살의 그 원정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죄를 위해 만드신 하나님의 채찍이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느브갓네살한테 가서 순종하며  신앙고백으로 살 수 있다.  고대 아시아 국가 중에서 제일 큰 나라요 제일 오래 지배한 나라도 페르시아인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해방시킬려고 고레스를 기름부어 세웠다고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역을 자랑하는 것은 선지자적으로 끌어올려서 하나님의 사역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이 신앙고백으로 성립된다. 그런까닭에 과거를 항상 객관적 대상으로 보지 않고 예표론적으로 확대 해석한다. 이미 있는 것은 오실자의  표상과 종말론적인 성취 예표론으로 하나님이 고레스 왕을 세워서 중동지역을 다 통일했다.  이스라엘과 파샤의  싸움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한 사전의 사역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니까 종말론적인 성취 예표니까 이 역사에는 하나님이 항상 미래에 어떤 큰 구원을 이루실건가 하는 미래가 역사와 함께 결합되어 있다.

 

역사는 미래가 와봐야 아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은 미리 역사를 알고 있다. 이런 일들이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성취를 위한 예표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진짜 완전한 구원이 미래에 온다. 이스라엘이 역사 이해는 다른 이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만일에 사실로 일어난 사건과 지상의 역사와 관련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앙고백이 아니다.

 

 

역사하고  사건하고 떼어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섭리만 말하면 그것은 신화가 된다. 사가가 된다.  역사 이전의 일이니까 신화는 이 세상의 일을 저 세상의 일로 표현한다.

 

 

역사에서 떼어내 버리면 이스라엘의 신앙고백도 신화가 된다.구약의 선포는 항상 지상역사에서 자기들이 경험과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지상의 역사를 하나님의 인도와 주권과 심판들로 이해한다.  구원사적 해석은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이 신앙고백으로 이해할 때만 가능하다. 이 신앙고백이 증거된 것들이 역사성과 함께 넘어지고 함께 선다.

 

 

 구약의 모든 중심과 목표가 그리스도이고 그것의 성취가 바로 그리스도이므로  신약에 의해서 구약을 이해하고 해석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유대인들이 율법을 유일한 삶의 길로 생활의 길로 한 것처럼 유대주의가 된다. 또한 영지주의가 된다. 지난 역사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다 무시해 버리고 영혼의 구원만을 말하면 영지주의가 된다.

 

 

구약을 해석하는 문맥이 신약이다. 해석의 근본 문제점은 양 성경의 메세지가 어떻게 서로 연관되며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당시 구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무엇을 뜻하는지 그것을 묻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출현은  신약의 저자들이 말한대로  새 아담으로 그렇게 기술해 놓았다.

 

 

마가복음도 1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환경에서 지내는가를 기술한다. 40일을 광야에서 지내신다. 광야는  아담의 동산과 대비를 시킨다. 아담이 동산에서 짐승들과 함께 살았다. 그때는 아직 하와가 생기기 전이다. 그리고 천사가 수종들었다. 첫 아담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천사가 함께 했을 것으로 본다. 대비를 시키면 새 아담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잘못은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자기들의 것으로만 생각했다. 전 인류를 위한 사역으로 보지않고 자기들만 생각했다.  구약에서 구원을 위해 역사하신 하나님이 신약에서 그리스도에게서 아버지로 증거된 그분이 구원을 이루셨다는 고백이 성립한다.그런 의미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결합하는 그 연속성과 통일성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사 선택하시고 구속과 심판에서 역사하셨다. 구약의 역사는 부르심으로 시작한다.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선택한다. 부름 그것이 선택이다.

 

 

또  이스마엘과 이삭에서 이삭을 선택하시고 그리고 야곱을 선택하시고 그리고 야곱의 자녀들에게서 12자녀를 선택하시고 그들의 구원자로 요셉을 선택하시고 그리고 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고 구속하시면서 남은자들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구속과 심판에서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창조주 구원사역이 늘 새롭게 역사해 들어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구원을 역사하시기 때문에 이 역사의 내적인 연관과 더불어 마지막 목표를 향해서 달음질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인 신실성 때문에 가능하다.  구원사역을 구약에서 이루신 하나님이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렇게 이루시기 위하여 일해오셨다.  신약에서 구약을 해석하고 구약이 신약을 해석할 때  늘 구약에서 시작해도 신약에 오고 신약으로 시작해도 구약으로 끝난다.

 

 

 항상 해석할 때는 하나의 원이 성경을 연결하는 원이 성립한다. 그러니까 구약을 바로 이해할려면 신약의 증거를 들을 때만 바로 이해된다.신약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구약도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에  양 성경이 함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그리스도가 구약을 주권적으로 전폭적으로 해석하고 동시에 구약이 그리스도 사건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이해 해석한다.  구약교회의 선택과정에서 역사하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신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말한 그 하나님이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그래서 신약이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고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약속의 성취이다. 성취를 이루시기 위해 모든 역사에서 하나님이 일해 오셨다.  구약이란 말은 유대교에 없다. 없는 말을 구약이라고 붙혀서 정경으로 정한다면 신약 때문에 그렇다. 신약과 연관해서 그렇다.  항상 구약이라고 하는 말은  신약과 연관해서 읽어야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교회가 구약을 정경으로 넣었는데 교회가  구약을 어떻게 읽고 이해할 것인가를 말해준다. 구약이 바로 신약 없이는 완결되지 못한 책이고 또 생명이 없다.  구약의 모든 성취가 신약이다.

 

 

신약의 증거로부터 구약을 읽을 때만 구약이 바르게 이해된다.   주님 자신은 구약을  이해할때 문둥병자를 집에 돌려 보낼 때에도 그냥 돌려 보내지 않고 먼저 제사장한테 가서 제사장에게 보여라. 정결의 법으로 제사하고 제사장의 정결 판결증서를 가지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 정결의 제사가 주의 피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해야 바르다. 그러니까 해석을 하는데 한 본문을 해석할 때 항상 그 문맥을 연관해서 해석해야 한다. 한 문장의 문맥이 그 책이 될 수 있고 장이 될 수 있고 구약이 될 수 있고 신약이 될 수 있고 전체가 다 된다.

 

 

한 부분이 전체 이해를 돕고 전체 사건이 조직 구도에서  부분을 이해한다. 예를 들면 왜 출애굽이 생겼느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과 자손을 주시기 위해서  했다면 구약으로만 끝나는 것이다.  신약을 전제해야 한다. 전체 사건이 그리스도 사건이기 때문이다. 전체가 늘 귀결되는 결말이 다 그리스도 사건이다. 그렇게 연관해서 구약을 이해해야 바른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사건이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사역이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연결해서 구약을 다 이해해야 된다.

 

 

구약의 제사와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과 모든걸 다 그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된다. 그러니까 항상 구약을 해석하는 가장 합당한 문맥은 신약의 그리스도다.  구약만 이야기하고 이렇게 신약의 증거에 그리스도의 증거에 함께 연관해 이해해서 말하지 못한 구약학자는 유대교다.  어떤 사람들은 그 전체 문맥에서 통일성을 배제한다. 그 시대 시대별로 각각 목소리만 듣는다. 전체 통일된 전체 구도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새 구원사역 종말론적 구원사역을 통해서 이 문맥이 확정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준 그 약속을 율법의 그늘 아래서 이해한 것이 후기 유대교 이다. 그러나 바울은 계명을 약속 밑에서 이해했다. 갈라디아서 5장이 그렇다. 그런데 유대교는 그리스도와 연관해서 읽을 수 없고 약속을 율법 아래 계명 밑에 다 종속시킨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인정 안하고 배척한다.그러므로 유대교의 해석을 구약해석의 문맥으로 본받을 수 없고 고대 동방 종교들의 발전사의 하나로 보는 이 종교사적인 이해도 구약이해의 문맥이 될 수 없다.

 

 

이 사람들에게는 구약의 이스라엘에 종교라고 하는 것이 그 전부터 발전해온 종교의 마지막 꽃이다. 의식 그런 것들이 제일 발달한게 구약교회다. 그 종교사가 마지막 꽃이 구약교회의 의식으로 본다. 그러니까 전혀 이 종교사적이 이해 방법도 결코 구약을 이해하는 바른 법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니까 의식 자체만 중요시하지 그 의식이 제사가 어떻게 신약에 연관되는지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 앞에서 조그마하게 발전된 것들이 이스라엘에게 와서 얼마나 꽃피었느냐만 밝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사역을 다 이루셨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에서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역사해오신 모든 구원사역의 목표점이었다. 그러니까 신약을 빼놓고 구약을 바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고 진행된 역사 이 역사가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고 이루신 역사다. 이 신앙에 근거해서 구약해석의 문맥으로 신약이 결정된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은 구약 자체로 종결된 역사가 아니고 그것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에게로 나가서 거기서 성취된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해할 때 합당하게 해석된다.

 

 

역대하 마지막장인 마지막 부분 대하36장 22절23절(페르시아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아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니, 그가 온 나라에 공포하고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한다.여호와 하늘의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나라들을 내에 주시고,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고 나에게 명령 하셨으니, 너희 가운데 그분의 백성은 모두 올라가라.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한다.")

 

 

구약 맛소라에서는 이 역대하 이 부분이 성경 마지막 부분이다. 이것만 보면 완결된 역사가 아니다. 시작만 말했지 결말이 없으므로 열려져 있다. 열어놨다. 일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 어디서 끝나는가? 고레스가 명해서 지으리라는 성전이 마지막 훼파되어 버릴 때 끝난다.그러니까 구약은 구약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고 구약 자신을 넘어서서 그리스도를 목표하고 진행되고  성취한다.  구약 본문들의 그 자체 이해는 그 자체에서 확인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로 향하여 운동하는 역사하고 연관해서만 확신된다.

 

 

그리스도와 연관없이 그 자체로만 이해하며는 각 시대별로 각각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 된다.  사사기에서는 뭘 말했고, 여호수아는 뭘 말했고, 룻기에선는 뭘 말했고 그런 이야기 뿐이다. 전체로 문맥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구약신학 해석이 필요가 없다.  구약이 전체로 말하려 하는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가 이스라엘에 오셨고, 그러므로 세상에 오셨으면 그가 바로 우리가 들어야 할 구약의 해석하는 문맥이다. 그리스도로 구약을 해석하는 문맥으로 분명히 해야 한다. 구약만 해석한 사람은 유대교 구약학자이다.

신약은 구원사적 전체를 세상과 교회에 말씀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사역으로 이해한다. 교회에게만 또 이스라엘에게만 아니고 세상과 교회 전체에 향하신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다. 이것이 구약 해석에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구약 옛 언약에 약속하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바로 구약도 세상과 교회에 향하신 하나님의 창조사역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구약의 역사도 항상 그 역사를 삼위일체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선택과 언약, 약속과 성취, 축복과 심판에 나타난 것은 늘  성령을 목표로, 아들의 오심을 목표로 하고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이다.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고 언약을 주시고  이스라엘을 선택 해서 언약을 주시고  출애굽기 20-22장까지는 언약장이다. 거기에 계명이 들어가 있는데 언약책이라고 한다.그리고 약속하신 것이 성취됐다. 궁극적인 성취는 아니어도 아브라함에게 씨를 약속하셨는데 430년 후에 4~5백만이 되어서 나온다. 장년 60만이니까 전체 인구가 6백만이 된다. 그 약속이 출애굽 때 성취된다.

 

 

그 다음에   여호수아의 땅의 정복으로 실현되고 완전한 성취는 다윗 때다. 그런데 다윗도 미완성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에 가까이 땅을 늘렸지만 실제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것은 유브라데 강에서 나일 강까지 그렇게 경계가 넓지못했다. 이런 약속과 성취, 심판하고 모든 역사들이  아들의 오심을 목표로 하고 이루어진 창조사역이다. 아들의 오심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옛 언약의 첫 역사가 그리스도를 목표로 그리스도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구원의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때 이것은 조상들에게도 그러했고 홍해 교회에게도 그러했고 포로 이후 성전교회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에 이를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표현한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므로 이루어진다. 구약이 죄로 타락해서 이제 마지막 심판 뿐이나  인류을 구속하려는 하나님의 역사다. 그 역사 시작이 이스라엘에게서 시작되서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됐다. 죽음에로 나아가고 있는 세계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상실되어 죽음 밖에 없는 세상에 행하신 사역이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역이다. 삼위일체 사역이다.

 

 

삼위일체론적인 해석은 옛 언약의 역사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역과 선지자의 멧세지와 교회신앙을 위해 역사하신 성령의 사역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성령의 열매이니까. 또 이 해석은 기독론적인 해석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성령의 사역과 아버지의 사역이 아들의 오심을 목표하고 그리고 그의 영화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삼위일체 해석이 기독론적 해석이다. 기독론적 해석이 삼위일체 해석이다.  하나님의 백성됨, 하나님의 백성 만들어 내심이 이것이 마지막 목표이다. 기독론적으로만 아니라 교회와 연관을 해서 성령의 사역과 연관해서 늘 봐야 한다.

 

 

그러니까 아들의 사역, 기독론적인 사역을 교회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로 삼위일체론 해석의 방식이 되는 것이다. 항상 이 세 가지가 아버지의 사역, 아들의 사역, 성령의 사역이 항상 한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그리스도가 구속사역을 이루시면서 교회가 생겨났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백성 만드신 것이 모든 구원사역의 목표다. 구약에 증거된 전 사건이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관련되었으니 늘 해석 작업을 하기 전에 이미 사전에 문맥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다.

 

 

종말론적인 성취와 폐지,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것이 성취되므로 구약의 모든 제도들이 폐지된 것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영화에서 실제가 됐다. 구약의 모든 것이 종말론적인 성취와 폐지이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영화로서 교회가 이루어지면서 실제가 된 것이다. 종말론적인 성취에서 신약은  옛 언약의 약속과 기대가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됐고 또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성취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우리는 이제 신약을 이해할 때에 구약의 성취이기 때문에 신약에서도 그 성취가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을 또 기다린다. 약속으로 남아 있다. 약속과 성취의 모든 도식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다.  궁극적인 성취가  그리스도 재림 때 신천신지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우리는 루터 교회처럼 영혼만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니다. 루터교회는 종말이 되면 우리의 구원받는 영육하고 선한 천사들만 남고 창조가 전부 다 해소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모든 만물이 회복된다.  신천신지가 된다. 이렇게 루터교회와 우리와 차이가 많다. 하늘과 땅의 차이다.  여러 방식으로 여러 모양으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마지막 말씀이 바로 그리스도다. 그러니까 새 교회 즉 신약의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모든 구약의 사역이 목표에 이르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아담을 연구하면서 갈라디아에서 교회가 참 이스라엘이라 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이다.

 

 

요한복음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이것이 성취이다. 반면에 종말론적인 폐지, 예수의 비판은 유전 뿐만 아니라 구약 자체에도 행해졌다. 이제는 우리에게 그 옛 질서와 옛 법이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에게서 전적으로 무관하게 됐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구약의 율법이 우리에게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은 자기의 값없는 은혜로 새 시작을 열으셨다. 구약도 마찬가지다. 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이다. 구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 사역이 자기들만 위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러나 신약에 와서 바울의 이해는  세상 모든 죽은 자들을 살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해했다. 그러니까 유대교와 기독교의 구약에 대한 차이가 거기에 있다.

 

 

지금 세대론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마지막 사역이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새 언약으로 넘어오기 전에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에 하나님의 심판이 서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심판해서 멸해 버리셨다. 예루살렘 성전만 멸해 버리신 것이 아니고 바 코크바 전쟁 때 맨 마지막 마스라 성에서 마지막 게릴라전을 하다가 로마군인의 손에 의해서 완전히 타도됐다. 그 때부터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살지 못하도록 됐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불레셋 사람들이 됐다. 그래서 가나안 땅이 팔레스타인과 불레셋 땅이 된 것이다. 그후 팔레스타인이 1800년동안 살아왔는데 오늘날 이스라엘이 돌아와서 쫓아내 버렸다.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 감정을 해소하기 힘든다. 이스라엘이 떠날 때는 사막의 이슬리 그쳤는데 이스라엘인이 오자 이슬이 내렸다. 어떤 면에서도 이사야의 예언대로 된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언약과 선택들이 잘못된게 아니다. 그 언약에서 자기의 의로움을 세울려고 하기 때문에 부서진다. 하나님의 언약이 해소되고 부서진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것이다. 인간이 언약에서 넘어졌다. 하나님의 구원질서에서 인간이 부서지고 나태한 것이 신약과 구약의 중간기간에 실패한 것으로 서 있다.

 

 

새것으로 이루시기 위해서 구약의 모든 마지막 제도를 하나님이 심판해서 헐어 버리셨다. 이런 면에서 방언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경내에서 방언이 일어난 것은 결국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결국 끝장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상실된 자들에게 행하심으로 새 시작이 열린 것이다. 이 귀결에서 볼 때에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율법을 마침이다. 

 

구약이 증거한 구원사건의 중심은 하나님의 택하신 교회가 맺은 여호와의 언약이다.  언약은 여호와의 신실성과 그 뜻에만 성립한다. 언약을 맺으며는 하나님이 미래에 어떻게 구원을 이루실 것인가 하는 약속을 받고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늘 교회는 약속이 행동으로 나타날 것을 기대한다. 마지막까지 살아가는 하나님의 교회는 이 언약사건에 늘 들어있는 그의 구속하시는 것을  늘 만나는 것이다. 언약을 통해서 구원하신다.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성에 의해서 언약의 모든 약속이 성립한다.

 

 

하나님의 신실성 때문에 이 교회가 존속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언약 사건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구원하심을 늘 경험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늘 약속이 성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선지자들 사상에는  약속을 하면은 이루실 것을 기대하고  그것이 성취될 걸로 늘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구약 조상들의 역사는 신앙고백적으로 해석하고 약속과 성취도 늘  기대 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이 역사적으로 야곱의 인도와 요셉과 그 형제들의 구출에서 그리고 출애굽에서 성취되고 그리고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에서 성취됐다.

 

 

이렇게 눈에 볼 수 있도록 성취됐다. 이것이 언약교회가 살아가는 이정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늘 약속하시고 가깝게 성취하시고 그리고 성취를 통해서 마지막 약속을 기다리게 하셨다.애굽에서 해방하시고 가나안을 정복하사 시온산을 자기의 수도로 정하시고 다윗을 자기의 왕조로 세우시고 이런 약속들이 성취됐다. 후기 선지서들에게 보면  이루어진 가시적인 약속의 성취가 없어지고 새 역사가 시작된다.

 

 

이스라엘이 끝나가고 돌비에 기록된대로 살던 것을 마음판에 기록한 그 언약을 바라보고 살게 했다. 약속들이 이전의 성취가 끝나고 새 약속들을 통해서 그 이전의 성취를 넘어서 더 큰 것을 바라게 했다(렘 31:33이하). “구약은 약속의 기대이고 신약은 성취다”가 아니고, 구약에서도 약속과 성취가 있고 궁극적인 성취가 신약에 다 있다. 신약이 궁극적으로 성취됐으면 더이상 성취가 없느냐? 아니다.궁극적인 성취를 또 기다린다. 신천신지 때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나타날 때 이루어진다. 항상 약속되고 성취되고 그러면서 나아간다. 그래서 마지막 성취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건은 약속되고 선포되고 항상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것인지를 미리 말씀하심으로 이루신다.  항상 교회는 그의 역사적인 사실을 그 선포한 말씀에 따라 구원을 이루신다. 항상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 추후적으로 해석을 해서 갖다 붙인 것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나기전에 선포하신 말씀이 일어난 사건을 구원사건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멸망해 갈 때 오랜 반성을 거쳐서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례미야 입을 통해서 바로 심판을 준비 하지만 그것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선포하게 한다.

 

 

홍해에서 구출되기 전에도 “잠잠하고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보라 너희들이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선포했다. 이것을 뒤로 해서 역투사 한 것이 아니다. 홍해를 건넌 후에 그것을 뒤로 역투사 한 것이 아니다. 출애굽기 3:7이하의 내용이  출애굽기 14장에 가서 이스라엘이 구출되기 전에 이스라엘의 구원을 미리 선포하신다. . 그러니까 모세의 사역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이다.  

 

 

이렇게 구원사건을 약속하시고 성취하셨다.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 출 15장에서 보면 항상 교회가 찬양으로 응답이 동반한다. 하나님이 하신 사역을 하나님의 구원의 성취로 응답한다. 이것을 해석하므로 지금 현대교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원사역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성취된 역사가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이다.

 

 

그러니까 옛 언약의 모든 사건은 닫혀진 것이 아니라 개방적이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성취하기까지 열려져 있다. 그러니까 이 역사적 성취들이  마지막에 성취가 있기까지 그리스도 사건에게로 집중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지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은 구약의 영적인 구원과 물리적인 축복의 구분이 없다. 왜냐하면 구약에 있어서 모든 약속들은 시간 역사에서 성취되면서 물리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신약교회는 마지막으로 신천신지를 기다린다. 하나님의 완전한 백성의 출현을 기다린다.  그 약속을 바라고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구속 사건으로 생겨난 교회이다. 그리고 구원이 여기서 실현된다. 현재 우리의 역사 내에서 우리에게 구원이 와 있다.

 

 그 구원이 완전한 인류로서 신천신지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구원사역의 결국은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의 통치가 되는 것이다. 기대들은 역사 내에서 성취되면서  마지막 종말론적인 성취를 바라보게 하였다.  신약 교회는 믿음으로 약속을 기대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 기대가 신천신지, 곧 마지막 새 인류의 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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פרופסור  

שְׂצְליוּ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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