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neo-orthodoxy)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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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앙 연구가들/칼 바르트

2011.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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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정통주의(neo-orthodoxy)

1. 서론: 20세기 초반 수십여년 동안 서구 문화의 위기로 인하여 종교적 자유주의가 처하게 된 곤경은 흔히 바르트주의라고 불리는 신학적 르네상스를 위한 하나의 기회였음이 입증되었다. 이 바르트주의라는 명칭이 때때로 이 신학적 르네상스 운동에 주어지게 된 이유는 이 운동에로의 최초의 발발이 한 젊은 스위스 목사였던 바르트에 의하여 아주 극단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이 바르트는 과거에 독일의 자유주의 사상 안에서 철저히 훈련받았던 인물이었다. 최초로 출판된 바르트의 글은 상대주의의 문제와 씨름을 하는 것이었다.현대인은 더 이상 자기 자신 밖의 그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그는 불만을 토로하였다. 그리하여 설교자가 사람들에게 접근을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율법을 적은 판은 설교자의 손으로부터 빠져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로마서에 관한 그의 주석 [Der Romerbrief]가 1919년에 최초로 나타나면서 그 이후 바르트는 종교적 자유주의에 대한 한 비평가요 신학의 고유한 주제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택하는 그런 한 신학의 투사로서 계속하여 왔다. 이러한 새로운 신학을 주도해 가는 대표자들 가운데 몇몇은 보다 neo(곧 '새로운 것'이라는 의미)적이고(틸리히와 니버가 그렇다), 그밖의 사람들은 보다 orthodox(곧 '정통적'이라는 의미)적이다(바르트와 브루너가 그렇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전체로 일관하여 자유주의적인 사람이 아무도 없고 또한 그 누구도 전체로 일관하여 정통적인 사람이 아무도 없다.

2. 종교적 권위: 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신정통주의자들도 유신론자들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과는 달리 이 신정통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 위에 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였던 것처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절대적으로 질적인 차이가 있고, 그러므로 인간은 한 삼단론법의 결말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는 전혀 없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계시, 곧 하나님의 인격적인 '자기 계시'(self-dis-closure)이고, 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구체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계시는 "위로부터 수직적으로 내려오는"(perpendicular from above; 바르트) 것이기 때문에, 예수를 '설명'하려고 애쓰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곧 내재) 사이의 본질적인 연속성을 가정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예수 사건(Jesus-event)은 이 자유주의자들에 의하여는 종교적 체험의 유비에 의하여 설명되어질 수 있는 역사상의 한 사실로서 보여졌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를 찾기 위한 아무 유익없는 탐구가 있게 되었다. 사실 '역사적 예수'란 위대한 예언자, 종교적인 영웅이요,천재, 거룩한 사람, 위대한 모범을 보여주신 분, 진.선.미 아니 간단히 말한다면 그 모든 것을 사랑하신 분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참 모습은 하나님이셨고 또한 지금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과는 달리 신정통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역사 그 자체란 측면에서는 이해될 수 없다. Finitum non est capax infiniti(유한은 무한을 포착할 수 없다). 예수 안에서 영원은 시간 속으로 뚫고 들어왔고, 무한은 유한이 되었으며, 신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이 되었고,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다. 예수 안에서 그리고 바로 그 예수 안에서만 오직, 하나님은 진정으로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모습이기 때문에 신정통주의자들은 정통주의자들과는 달리 복음서의 이야기들이 믿을만한 것인가 하는 점에 관한 비판적 논의에 다소간 무관심하였다. 비록 기독교가 "모든 역사적 기반들에 대해 독립하여 있는" 한 종교로서는 절대로 존재해 나갈 수 없다고 하지만(Schweitzer), 기독교는 역사 그 자체 위에 근거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상대적인 것들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그리스도는 성서비판주의자들이 말하는 '역사적인 예수'는 아니다. 오히려 신앙의 그리스도는 사도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고 인간들의 유일한 구세주로서 고백하고 전도하였던 바로 그분인 것이다.

확실히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이 증언은, 우리가 성서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데 이것은 유일하고도 독특하게 영감을 받은 것이다. 신정통주의자들은 성경을 단순히 위대한 종교문헌으로서 여기지 않는다. 이런 점에 있어서 자유주의자들은 매우 큰 오류를 범했다.그렇지만 이 케리그마는 말씀(the Word)에 대한(to) 하나의 증언이기 때문에,성서에 나와 있는 말씀들과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을 동일시하는 것은 정통주의자들에게 있어서의 한 실수였고 이것은 아주 심각한 결과들을 낳는 것이었다. 오류를 저지르는 것은 인간적이다. 그리고 성경은, 비록 그것이 유일하고 독특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적인 것이고 따라서 성경은 다만 흠이 있고 또 불완전한 형태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여 준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신정통주의자들은,어떤 사람은 많이 또 어떤 사람은 적게, 정통주의자들에 의하여는 보통 거부되어지는 성경에 대한 고등비판적인 견해들을 많이 수용하고 받아들인다. 어디에다 선을 그을 것인가, 그리고 믿는 개개 신자들에게 어떤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고, 어떤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을 것인가 하는 점이 이 신정통주의 운동의 풀리지 않은 문제들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바로 이것이 복음서 전승의 '비신화화'(demythologizing)에 대한 바르트와 불트만 사이에 논쟁이 있게 된 원인이며 바로 이것이 신정통주의가 발생하던 거의 그 무렵부터 신정통주의를 여러 갈래로 나뉘게 만든 원인이다.

간단히 말해서 신정통주의자들은 내재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교리에 반대하여 행동하였으며, 그들은 종교에 있어서의 권위 문제를 신학에게 그 신학의 고유한 주제, 곧 계시를 회복시켜 줌으로써 그리고 이 문제를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소망없는 과학적 반계몽주의(obscurantism)로서 나타나는 바 그러한 것을 포함하게 되는 성경에 대한 한 견해에 몰입됨이 없이 찾으려 하였다.

3. 실존적인 방법: 신학적인 방법에 관해서 이 신정통주의자들은 죄렌 키에르케고르에 의하여 뚜렷한 영향을 받았다. 이 키에르케고르는 덴마크 국교회의 생명력없는 정통주의에 반대하여 싸웠고 각 개인으로 하여금 진리에 대한 열정적 참여(passionate commitment)를 촉구하였다. 이러한 열정적 참여는 그 개인의 실존의 바로 그 형태를 변화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실존주의라는 용어가 나왔다. 이러한 실존적 진리는 한 신조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이러한 실존적 진리는 하나의 합리적 형태를 갖추어 정신이 그것을 이해 포착할 수 있도록 꾸며진 신앙의 명제들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명제화된 진리(과학상에 있어서는 이 명제화된 진리가 유일한 진리의 종류이고, 여기에서 이성은 그 자체의 고유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한 신자의 지식을 증가시킨다. 그러나 이 진리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둔다. 그러는 반면에 실존적 진리는 개인을 구체적으로 지금 바로 여기의(here-and-now) '삶의 자리'(Sitz im Leben) 속에서 변화시킨다. 형식에 치우친 정통주의와 무감각한 자유주의에 대한 하나의 해독제로서 이 실존적 진리에 대한 강조는 아주 이로운 것이었다. 최상의 프로테스탄트 전통은 종교개혁자들이 fides historica라고 부르던 것, 즉 기독교의 진리에 대하여 단순히 지적으로만 승인하는 것과 그리고 비교종교학적 접근의 학문적인 중립성, 이 모두에 대해 항상 비난하여 왔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이러한 쪽에서의 강조는,흔히 교의와 신조들을 단순히 성경적 진리들을 희랍적이며 합리적인 사고의 틀안에 억지로 집어 넣은 것이라고 격하시켜 생각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하여 기껏해야 모든 신조들과 모든 신학서적들(여기에는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쓰여진 책들도 포함된다)은 글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명제화하려는,즉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려는 것밖에는 안된다. 바로 이 점이 왜 모든 신학이 그 자체가 역설들로 가득차 있는가라는 이유인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신정통주의 신학에 대해 역설의 신학 또는 변증법적 신학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신정통주의자들에 의하면 정통주의에 있어서의 난점은 정통주의는 이러한 역설들을 하나의 합리적인, 그리고 논리적으로 일관된 체제 속에 용해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정통주의는 성경적인 내용상의 불균형에 폭행을 가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정통주의는 한 얼어붙은 폭포수, 즉 그 형태로는 강력한 흐름을 가진 듯 하나 사실은 움직이고 흐르지 않는 그런 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런 반면에 성경은 역설들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동시에 삼위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시다. 인간은 'non posse non peccare'(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다)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자유하다. 신앙은 행위이며 동시에 선물이다 등. 이런 신앙의 위기(crisis) 가운데에(바로 여기서 위기의 신학이라는 명칭이 나왔다)신앙인들은 이러한 역설들을 뛰어넘어 이 역설들 안에 그리고 이 역설들 너머에 있는 진리들을 붙잡으려고 애쓰게 된다. 그런데 그것을 붙잡는 방법은 이성적으로는 명쾌하게 파악을 할 수가 없다. 만일 그것이 이성으로 명쾌하게 파악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신앙은 더 이상 필연적인 것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신정통주의자들은 본다. 모든 수수께끼같은 합리주의를 버리고, 그리고 하나의 완전한 체제를 갖추려는 중세기적 스콜라주의의 꿈을 포기하고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의 일치를 발견한다. 이점에서 루터가 얘기하는 'Christus dominus et rex scripturae'(성경의 주인이시요 통치자이신 그리스도)는 무겁고도 그러면서 모호한 부담 아래 놓여져 있다. 모든 성경의 내용은 완전성의 정도에 있어 다소간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가 한 사람(예수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진리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소크라테스라도 절대 말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성경적인 의미상에서의 그 진리는 추상적인 사고로 볼 적에는 역설들로서 귀결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인격적 실존을가지고 계시든지, 아니면 하나님은 전혀 존재하고 계시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의 사변적인 방법으로서 하나님의 인격성을 이해할 수 없다. 오직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인격적으로 하나님께 관련시킴으로서만, 즉 객관적 제3자인 하나님을 자기자신의 인격의 대상인 당신으로서의 하나님으로 삼음으로써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관계는 인간의 영적인 삶이 요구하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 자신께서도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가 발생하면 모든 사변작용 및 모든 형태의 신학적 학식들은 불가능한 것으로서(eoimpso) 중시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사물들이라면 그것을 합리적으로 분석하고(analyze), 인격체라면 그를 만난다(meet)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적 만남'(divine-human encounter; 브루너)이 있기 전까지는 우리는 하나의 타당한 신학을 전혀 가질 수 없다. 신앙의 위기 속에서 나는 역사상의 그리스도와 '동시대적'(contemporaneous)이 된다.

4. 인간의 타락: 아마도 다가오는 신학적 진리에 대한 이실존적 방법이 인간의 타락에 관한 교리에서보다 더욱 뚜렷이 드러나는 곳은 없을 것이다. 한길 또는 다른 길을 통하여 신정통주의자들은 예수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을 내리면서 또한 그들은 인간에 대한 자유주의적 견해도 포기하였다. 물론 이 점은 부득이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 대한 성경적 증언을 생각하고도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그 어떤 진정한 시도도 반드시 그와 함께 인간을 죄인으로서 보는 성경적 증언을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경건한 신앙을 가진 사상가들의 경우에 있어 그들로 하여금 인간이 필연적으로 진보하게 되어 있다는 이론은 하나의 천박한 낙관주의요 또 무책임한 자만심이라는 결론으로 이끌어 간 것은 사물에 대한 논리라기보다는 인간의 체험과 인간의 역사였다. 유럽대륙에 있어서 제1차 세계대전은 인간의 선에 대한 천부적 능력들에 관하여 비관적 견해를 조장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심지어는 전쟁의 위기가 보다 덜 예리하게 느껴졌고 또 보다 덜 날카롭게 진단되어졌던 미국 내에서조차도 라인홀드 니버는 성경적인 원죄 교리에로 되돌아갈 것을 주창하여 1920년 말에 '시대를 위한 소책자들'(tracts for the times)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 신정통주의 사상가들이 믿기에 이른 것은, 창세기에 나와 있는 인간 타락의 설명이 왜 뱀은 다리가 없을까, 왜 잡초들이 자라날까, 왜 사람들은 옷을 입을까 하는 등의 이유들을 설명하기 위한 원시적인 이야기들의 한 합성물에 불과하다는 가정을 하고 있는 자유주의적 견해가 무미건조하고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비록 타락이 더 이상 한 역사적 사실로서 생각되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이 타락은 인간 본성 안에 감추어져 있는 악성(flaws)을 고의적으로 보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필요한 관련성이 있다. 물론 바울-아우구스티누스-칼빈주의적 전통 안에서는 타락의 교리는 경험적인 차원 위에서의 한 사건임을 늘 암시하여 왔다. 신정통주의자들은 이러한 경험적 형태의 타락 교리는 과학과 충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충돌은 단지 유감스러운 결말만을 보게 된다(바르트는 성경의 원시 역사<창 1-11장>와 경험적인 사실의 관계성이라는 이 전체 문제에 대해 모호하게 그 의미를 전문화하였다-그러나 바르트의 이름을 딴 신학운동<소위 바르트주의>전체가 다 이런 것은 아니다-네덜란드에서 바르트는 정말로 에덴동산에서 뱀이 말을 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당했을 때, 그는 뱀이 말한 것이 무엇인지를 주의해 보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라고 답변하였다. 부루너는 바르트의 이런 태도 특히 네델란드에 있어서의 바르트의 이런 태도를 피할 수 없는 질문을 피하는 것이라고 일컬었다).

신정통주의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과학적으로 시대착오가 되어버린 그런 교리 형태를 우리는 고집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실인즉 우리는 전통적인 견해를 불가능하게 만들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해야만 할 빚을 현대 과학에게 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타락을 과거의 어느 시점에선가 실제로 일어난 일로 생각하는 한 우리는 그 타락을 실존적으로 생각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이다. 타각이란 우리 모두가 저지르는 그 어떤 무엇이다. 이제 우리는 Pithecanthropus Adamus(아담인)에 대해 더 이상 책임을 뒤집어 씌우지 말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진정한 기독교인의 신앙에 필수적인 요소인 두번째 아담(그리스도)의 복종이 역사 안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이 었다고 주장하면서, 역사 바깥에 있는 첫번째 아담의 불복종을 실존화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이 신정통주의적 접근에 하나의 이율배반으로서 계속 남아 있다.

5. 속죄론: 인간의 죄성을 중요시하는 신학이라면 어떤 신학이든지 물론 당연히 그리스도의 죽음을 단순한 한 역사적인 사실 이상으로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종교사학파의 역사 안에서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되풀이해서 암송할 수 있었던 사도신경의 한 부분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한 지"라고 고백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신정통주의자들에게 있어 신앙고백을 이 부분만 한다는 것, 즉 예수가 자기의 시야를 넘은 상황들의 한 희생물에 불과하고, 한 선한 목적을 위해 고상한 순교를 한 순교자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유주의가 그들의 '역사적 예수'를 향한 탐구 속에서 무심코 드러낸 그 똑같은 깊이의 결여를 보여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단순히 하나의 예언자로서만 여긴다면, 또 만일 우리가 예수의 생애를 시간과 공간 상의 연속체(time-space continuum) 내의 한 사건으로 축소시킨다면, 그렇게 되면 자연히 예수의 죽음은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던 것과 똑같은 범주 안에 위치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익명의'(incognito) 그리스도의 베일을 꿰뚫어 보는 그런 신앙, 인간적인 인격을 넘어 신적인 인격에까지 도달하여 보는 그런 신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죄.죽음.악에 대해서 승리하시는 것까지 감지한다. 그리고 이런 신앙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다"(고전 5:19)는 사실을 고백한다.

이 이상을 넘어,신정통주의 학파 내의 모든 저술가들을 총괄하는 그런 일반적인 진술을 형성해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 속죄에 관한 모든 이론들을 한낱 인간의 해석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그러한 한 신비를 설명하려는 인간적인 시도들로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이론들 중의 어떤 것들은 다른 이론들보다 더 많은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중의 그 어떤 것은 그 자체로 타당하지는 않다. 우리가 신루터파(neo-Lutheran)라고 부를 수도 있을 구스타프 아울렌은 그의 연구서 [Christus Victor] 안에서, 아벨라르두스주의적인 견해 및 그 이후에 자유주의 안에서 주관주의적이며 범형론주의자 계열들(범형론: exemplarism; 희랍 철학에서 이데아가 만물의 범형이라고 주장한 데 대하여 하나님 곧 창조주가 인간 및 만물의 범형이며 인간은 신의 모습을 닮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중세의 학설)을 따라 발달한 학설들이 너무 인본주의적인 것이라 하여 비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안셀무스에서 발전해 나온 정통주의자의 보속이론(satisfaction theory)이 비록 진리에 더욱 가깝기는 하지만 너무 '합리적이며', 치밀하고, 이론적이라고 느끼고 있다.

아울렌은 중세의 견해 및 프로테스탄트의 견해를 위하여 '이론'(theory) 이라는 단어와 '교리'(doctrine)라는 단어를 모두 계속 사용하고 있고, 또한 그는 초대교부들 가운데에서 발견되는 속죄 관념, 즉 그가 이른바 '고전적인 관념'(clas-sic idea)이라고 부르는 것을 옹호한다. 이 고전적인 속죄 관념이란 인간의 합리적인 체계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신학적이며 심리학적인 이율배반들을 포함한, 악으로부터 인간을 구해내시는 그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속죄에 대한 이 신정통주의의 이론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는 것은 무지개의 끝이 어디냐라고 묻는 것같이 희미하고도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관점의 영향력 아래 있음을 나타내는 저술들 속에서 우리는 별로 큰 노력이 없이도 수많은 이론들이 반영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6. 종말론: 세계 갱신을 기대하던 진화론적 낙관주의(곧 "기독교적 아메리카주의)는 기독교 종말론의 사생아였고 또한 한 르네상스적 인류학(Renaissance anthropology)이었다. 계시를 역사 그 자체와 인접하며 또한 "전체 피조물이 향하여 나아가는 어떤 아득히 먼 신적인 사건"에서 절정을 이루는 그런 한 과정이라고 보는 것은 현대신학이 저지른 치명적인 과오들 중의 하나였다. 하나님이라는 역사적인 유비체 및 인간의 윤리적 성취 그 너머에 있다. 하나님 나라는 역사 저편에서부터 역사 속으로 침투하여 들어온다.이러한 점에서 볼 때 신정통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정통주의자들의 편에 서 있다. 다만 그들이 어떤 특정한 근본주의자들의 신학적 도식이나 종말론 형시들에 편만하여 있는 문자주의(literalism)와 아무런 공감을 갖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이 신정통주의자들은 아무런 도표도 내놓지 않고 또 그들은 다니엘서나 계시록 관점에서 현대의 사건들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는다. 신앙은 세상 끝날의 역사(end-history)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그 종국(the end of his-tory)에 관심이 있다.

7. 유아세례: 신정통주의 안에서 작용하는 실존적인 동기를 잘 나타내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렇게 중요한 발전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러나 또 다르게 재미있는 것은 신정통주의자들의 지도자들 중 몇몇, 특히 바르트 같은 신학자들이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을 '시간과 영원의 교차로' 위에 위치시키고(키에르케고르) 그리고 진리에 대한 열정적인 귀속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그런 신학 안에서는 대리인이 행하는 세례 서약의 이론적 설명이 어려워진다.바르트는 성례전 뒤에 숨어 있는 신학에 대해 공개적인 도전을 한 최초의 인물로서-그는 교회의 풍습(practice)에 대해 무엇이라고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는 현명하게도 그것을 직접 행하는 당사자들에게 맡겨버렸다-한 사람이 세례에 의하여 들어가게 되는 관계성을 인격적으로 수용하는 것의 이런 면에서의 필요성을 계속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밖의 사람들은(브루너) 사도들이 오늘날 행하고 있는 교회의 관습에 대하여 뭐라고 말씀하실까 라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임을 시인하고 있다. 한편 이에 대한 완강한 반대들이 쿨만(Cullmann) 같은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 운동 내에서도 생겨났다. 그리고 교회의 풍습을 조사 연구하는 특별위원회들이 몇몇 교단에 의해서 후원을 받게 되었다. 프랑스 교회개혁 위원회는 그 연구 결론에서 바르트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고, 한편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바르트의 견해들에 반대하는 반작용을 꽤 강력하게 펼쳤다.

8. 사회이론: 신정통주의 안에서 인간이 죄인이라는 교리는 이 신정통주의 신학 안에서의 실존적 방법론을 잘 드러내주는 것으로서만이 아니라, 이 신정통주의 운동 내에서의 하나의 분수계로서도 의미가 깊다. 이 분수계로부터 두개의 서로 다른 흐름의 강조점들이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내재라는 자유주의적 낙타가 자신의 진영에 코를 들이밀까봐 겁을 집어먹고는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에 무한한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고 강조하는 경향을 띠었다. 그리고 그는 브루너가 하나의 자연신학으로서 발달해가는 것을 조금 의심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더욱 경계하는 빛을 띠어 갔다. 성령은 성령 자신이 창출하는 그런 접촉점 말고는 복음을 위한 어떤 다른 접촉점(point of contact,Anknuepfungspunkt)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브루너.니버 및 그밖의 신학자들은 바르트의 인간 본성에 대한 비관론에 대해 같이 참여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점을 주장하였다. 즉 타락한 인간은 아직도 어느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의 사랑의 진정한 정의인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역사 안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은, 비록 그것이 역사를 초월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은총은 그 현재의 역사적 및 사회적 형태들과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신학자들은 우리 시대의 다른 그 누구보다도 이 현재의 악한 세계 내에 가능한 한 최고의 상대적인 정의를 구해야 하는 우리 기독교인의 의무에 종사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심각히 씨름하여 왔다.이러한 행위 가운데에서 이들은 인류학.심리학.사회학.역사학으로부터 추출된 통찰들과 성경의 가르침들을 연결해 보려는 노력을 하여 왔다.


그들의 신학적 언명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이론에 있어서도 이 신정통주의자들의 대표적 저술가들은 서로 제각기 의견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가 일치하는 바는 우리가 사회 내의 악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고, 오히려 각 믿는 신자의 구속주이실 뿐만 아니라 사회질서의 구속주이기도 한 예수님의 뜻을 찾기 위하여 그리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언제나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브루너는 하나의 재구성도고 또 통제된 자본주의를 제창하였고, 한편 니버는 사회주의 좌파로까지 나아갔었다. 이 양자는 모두 우리 시대의 가장 올바른 형태로서의 국가를 하나의 민주적 정치.경제 체제로 보는 데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인생의 이상적인 것으로서 아가페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제창하면서도 한편 기독교적인 견해를 비현실적으로 감상화하는 자유주의자들의 평화주의를 거부하였다. 그러한 평화주의는 우리 당대의 사회 안에 있는 그러한 정의마저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참조: 신정통주의와 윤리, 위기신학, 신개혁주의 신학, 보수주의 신학, 장로교회, 개혁교회, 기독교강요, 칼빈주의 5개 신조,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 범형론, 변증법적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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