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 (K. Barth)의 "성령 세례"와 "물 세례"(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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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앙 연구가들/칼 바르트

2011.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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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바르트 (K. Barth)의 "성령 세례"와 "물 세례"(I)


I. 들어가는 말

 

세례는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종교예식 가운데 하나였다. 뿐만아니라 세례는 종교개혁 전통에 의하면 성만찬과 더불어 중요한 성례전의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서 루터는 (M. Luther, 1483-1546)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엄밀하게 말해서, 하느님의 교회에는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두 가지 성례전이 있다. 이 두가지에 의해서만이 우리는 신성하게 세우신 표징과 죄의 용서에 대한 약속을 발견한다."


그러나 세례의 重要性 만큼이나 세례의 根據, 意味, 그리고 目的 등은 교회사를 통하여 수많은 논쟁의 주제가 되어왔다. 더 자세히 말해서, 세례의 정당성 내지는 성례전적 의미 (sakramentalischer Sinn)는 여러세대, 여러 차원에서 많은 도전을 받아왔다. 특히 종교개혁 당시 유아세례의 정당성에 대한 쯔빙글리의 (H. U. Zwingli, 1484-1531) 反論은 개신교 신학사에서 看過 할 수 없는 가장 획기적인 세례 논쟁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유아세례의 타당성에 관한 논쟁은 1960 년대 독일 신학계에서 또 다시 재현되었다. 더 나아가 이 논쟁은 기독교 교회 안에서 전통적으로 실시해 오던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구별 하는데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논쟁을 야기시킨 학자는 칼 바르트 (Karl Barth, 1986-1968) 이다.


바르트는 "물 세례"의 구원론적 내지는 성례전적 의미를 거부한다. 그에 의하면,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일어났다. 그러므로 "물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하여, 하느님에 의해서 일어난 구원역사을 반복하거나, 그 의미를 더하거나 減 할 수 없다. 따라서 "물 세례"는 인간 구원을 위한 절대 필요 불가결한 전제 조건이 될 수 없다. 세례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구원 사건에 대한 표징 (Signum)이요, 증거이며, 모상 (Abbild)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바르트는 "물세례"를 단지 기능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는, 세례가 인식적인 (kognitiv) 기능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일어난 화해 사건에 대한 회상적인 기능을 (erinnerische Funktion) 갖고 있는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세례를 집행 함으로써 수세자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의 사건을 회상케 하는 것이고, 동시에 그 사건의 의미를 인식 시켜주는 것이 세례의 의미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트는 "성령세례"와 "물 세례"를 구분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또한 유아세례의 無意味性를 주장한다.


이상 바르트의 "물세례"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 "물세례"의 성례전적 의미와 구원의 방편으로서의 의미 거부 - 우리에게 그가 주장하는 "성령 세례"의 優位 (Primat)에 대한 신학적 논증 내지는 성서적 근거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야기시킨다: 바르트는 어떠한 신학적 근거에서 교회 안에서 전통적으로 아무런 의심없이 수행되어져 왔던 "물 세례"에 대한 의혹을 자아내게 하였는가? 어떠한 근거에서 바르트는 "물 세례"를 비성례전적으로 이해하고, "성령 세례"만를 성례전적인 것으로 주장하는가? 과연 "물 세레"와 "성령 세례"는 구별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답변하기 위하여 우리는 아래의 작은 논문에서 바르트가 세례론과 관련된 성서의 본문들을 어떻게 해석함으로서 "물 세례"에 대하여 소극적으로 해석하고, 반면에 "성령 세례"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강조하게 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제 2 장에서는 "성령 세례"와 "물 세례"을 개념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그리고 제 3 장에서는, 바르트가 "성령 세례"와 "물 세례"에 대하여 어떠한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지 알아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1970 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급성장을 촉진시킨 소위 "성령운동"을 올바로 분석하기 위한 신학적 근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神靈主義的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은 참된 영적체험 내지는 성령체험에 대한 신학적 근거가 무엇인지를 認識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제도적 혹은 형식적 종교예식 속에서 벗어나 성례전에 대한 참된 인식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제도적 성례전을 극복하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참된 성례전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II. 세례이해의 출발점으로서의 화해 사건

II,1. 인간의 행위로서의 기독교적 세례와 이를 가능케 하는 성령의 역사

바르트는 세례론을 倫理의 영역에서 다루고 있다. 그가 세례론을 윤리의 영역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그가 세례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성례전적인 요소로 간주하지 않고, 오히려 은총의 사건에 대한 인간의 도덕적 혹은 신앙적 응답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암시해 준다. 바르트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답볍은, 즉 윤리적 응답은 "물 세례"를 받는데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심지어 바르트는 "교의학은 ... 윤리"가 되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즉 바르트에게 있어서 윤리는 교의학의 한 부분이다. 윤리가 교의학의 한 부분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단지 홀로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속에서 역사하신다. 바꾸어 말하면 하느님의 "단독사역 Gottes Alleinwirsamkeit)" 속에는, 인간의 응답을 포함하는 "하느님의 통전적 사역 (Gottes Allwirksamkeit)" 을 포함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바르트가 세례를 윤리의 차원에서 다루었다고 해서, 그에게 있어서 세례가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인간의 단독적 行爲 혹은 使役이라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세례의 근원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느님의 구원사역 그 자체에 근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세례를 하느님의 은총의 사건에 - 더 자세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사건 - 대한 人間 편에서의 "감사(Dankbarkeit)"에 근거한 행위로 본다. 즉 바르트에 있어서 세례는 하느님께서 값없이 베풀어 주신 구원 사건을 인간이 자신을 위한 사건으로 是認 (Anerkennung) 하는 인간의 행위이며, 그 구원 사건을 자신을 위한 사건으로 받아드리는 응답 (Beantworten) 행위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주어진 은총의 삶에 새롭게 참여하는 인간 삶의 새로운 시작 (Neue Anfang) 이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화해사건에 대한 인간 편에서의 수용(Aufnehmen)이고, 하느님의 구원사건에 대한 회상 (Erinnerung) 이다. 그리고 동시에 세례는 그 구원사건을 통하여 계시해 주신 약속에 대한 희망(Hoffnung)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 주신 은혜를 받으며, 구원의 미래를 희망하게 된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트는, 세례는 受洗者가 자기의 삶을 하느님께 맡기는 행위이고, 미래의 구원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그 구원사건의 증인으로서 보냄을 받는 사건이다고 한다.
이상 앞에서 진술한 바와 같이 세례는, 바르트에게 있어서, 인간의 행위이다. 그러나 그 행위의 근원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사건,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전환 (die g ttliche Wendung)" 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서 친히 인간에게로 내려오시고, 자신을 인간에게 개방하신 사건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인간의 행위로 현실화 (Rreali- sierung) 시키는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이다. 그래서 이와 상응하게 바르트는 세례론의 명제를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한 사람이 하느님께로 향한 충성심으로 돌아와서 그분을 부르게 되는 것은 성실하신 하느님 자신의 행위이다. 이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속에서 온전하게 일어나며 그리스도인을 일깨우시고, 가르치시고 비추시는 능력의 덕분으로, 곧 바로 성령의 세례로서, 그 사람 삶의 새로운 시작이 된다."

세례에 대한 바르트의 이러한 진술은, 세례가 하느님의 화해사건에 근거한 인간의 행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표현해 준다. 그러나 그 인간 행위는 인간의 독자적인 행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성령의 역사 속에 있는 인간 행위이다. 그렇다면 왜 바르트는 구태어 "물 세례"와 "성령세레"를 구별하고 있느가? "물 세례"와 "성령세례"는 전혀 다른 차원 속에서 수행되어지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바르트에게 있어서의 "성령 세례"와 "물 세례"에 대한 槪念을 分析해 볼 필요를 느낀다

 

II,2 화해 사건에 근거한 세례

우선 바르트는 "성령에 의한 세례 (Die Taufe mit dem Heiligen Geist)"에 관한 논증을 다음과 같은 질문의 개연성을 갖고 시작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성실하심에 답변하는,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한 인간이 갖는 성실함의 원천(Ursprung), 시작(Anfang) 그리고 발단(Einsatz)에 대하여 질문한다." 이러한 질문이 의미하는 바는, 하느님의 인간 구원의 성실성에 인간이 그에 상응하게 성실하게 응답해야 하는 그 근원과 시작과 발단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응답의 행위를 가능케 하는 하느님의 성실함 내지는 역사가 (Werk) 문제된다. 그런데 바르트에게 있어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신 사건 속에서 보여주신 그의 성실함에 상응하는 인간의 행위는 인간 스스로의 의지와 능력에 의해서 수행 될 수 없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여 행하여 지는 인간의 행위도 하느님의 사역에 속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인간의 하느님께 향한 전환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우리가 이러한 질문들에 (인간들이 어떻게 하느님의 성실하심에 상응하게 성실히 행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 역자 주) 대하여 성서에서 얻은 답변들은 ... 결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들을 암시한다: 즉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자유안에서 인간 자신들에게 일어나는 전환 (Wendung) 이다. 그 전환은 인간이 그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으며, 그렇게 될 수도 없었던 것이 전환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그 이전에는 하지 않았고, 또 할 능력도 없었던 것을 행할 수 있는 전환이다. 즉 하느님께 대하여 성실해 지는 것이다".

 

이러한 진술이 뜻하는 바는, 인간의 하느님께로 향한 "전환 (Wendung)"의 可能性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 주신 하느님 자신의 전환 (die g ttliche Wendung)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인간의 하느님에게로의 전환을 가능 하게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구원하신 하느님 자신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환이 하느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단지 자신의 은총에 대한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은총 속에서 인간의 책임있는 응답을 요구하신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윤리는,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는 수동적인 인간의 행위와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은 인간의 능동적인 참여를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인간을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는 신적 전화 내지는 기독교적 전환은 과연 무엇인가? 바르트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우선 이러한 신적 전환은 - 언제든지 그가 모든 신학적 논증을 기독론 내지는 화해론에서 출발하듯이 - 예수 그리스도에게 낮아지시고,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 사건이다. 그는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속에 기독교인들의 삶의 근원과 시작이 있다. 그리고 그 속에 불가능한 것이 단순히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화 되어지는 신적 전환이 있다:

 

즉 저 하느님의 성실함의 깊이과 능력에서 유래한 믿음에서 ( ), 그에 상응하는 한 인간의 믿음에로 ( ) (롬 1,17) 의 전환이다." 바꾸어 말해서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사건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성실함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도록 촉진하는 신적전환의 사건이다. 그런데 화해 사건에서 인간에게 자신의 성실함을 보여 주신 하느님은, 바르트에 의하면, 바로 이스라엘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다시말해서 이스라엘 조상과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이시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성실함이란 계약의 성실한 준수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계시된 하느님의 계약의 성실함이 바로 인간이 하느님에 대하여 자신의 결단 속에서 하느님 뿐만 아니라 인간을 성실히 섬겨야 하는 근거이며, 근원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스라엘 조상과 맺은 계약을 성실히 지키시는 그 성실하심이 곧 신적 전환이며, 이 전환이 바로 인간이 하느님께 자기 삶을 통하여 성심함을 보여야하는 원인이며, 근거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한 인간이다. 그 인간의 삶 속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저 인간 역사의 주체로서 들어오셨다. 그리고 그 인간들에 의해서 인정받고, 인식되고 그리고 고백되어진 주님인 바로 그러한 분이 되셨다. 그 인간들에게 그 분은 바로 그러한 것을 통하여 자신의 역사에 단지 잠재적인 것이 아닌, 능동적인 참여을 부여하셨다."


이제 여기서 잠정적으로 요약하면: 인간이 하느님께 대하여 성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 스스로의 능력에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 주신 계약의 성실함에서 오는 가능성이다. 따라서 인간의 결단은 인간 의지의 자유나 인간의 능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 하느님의 인간에로의 전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삶의 원천 (Ursprung)과 근거 (Grund)를 갖는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성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합일 (Einheit)"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제기 된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의 합일이 인간에게 일어 날 수 있을까? 어떻께 예수 그리스도을 통하여, 그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대리적으로 일어난 신적 전환이 개개의 사람들에게서 현실적으로 실현되어 질 수 있을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우리들 밖에서 (extra nos) 행하였던 사건이 우리 안에서 (in nobis) 재현되어 일어 날 수 있을까?

 

II,3 "신적 전환의 총괄개념으로서의 성령세례"

바로 앞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 바르트는 이제 비로서 "성령 세례"를 언급한다. 즉 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안에서 일어난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 사건, 곧 하느님의 전환은 그 당시 우리 밖에서 (tunc extra nos)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사건은 성령의 역사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 안에서 (hic in nobis) 얼마든지 재현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령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사건이 어떻게 현실화 되어지느냐 하는 질문과 관계된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성령 세례"란 아주 포괄적인 의미를 갖는다. 즉 그는 "성령 세례"을 성령의 역사를 지칭하는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그래서 그는 "성령 세례"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아주 포괄적인 의미로 정의한다:


"성령세례란 개념은 모든 기독교적 삶의 기초가 되는 신적 전환의 총괄개념으로 곧 신적전환을 표시하기 위한 중심단어 (Stichwort) 로서 고유화 되어졌다."
"성령 세례"에 대한 바르트의 이러한 정의는, "성령 세례"가 단순히 밀의종교적 신비체험이 아님을 단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령 세례"는 언제든지 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역사 (Heilsgeschichte)를 개개인의 삶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현실화 시키는 것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 되어있다. 뿐만아니라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윤리적으로 살아가게 끔 돕는 성령의 사역과 아주 밀접하게 관계 되어 있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규정짖고, 가능케 하는 원동력 내지는 근원으로서 이해 되어진다. "성령 세례"의 이러한 양태 (Aspekt)는 바르트가 "성령 셰레"의 5 가지 의미로 설명하고 있는 것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첫째로 바르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자기증언과 자기 전달 속에서 일어난다. 즉 성령의 능력 안에서 지금 여기서 (hic et nunc) 구체적인 한 인간에게 선포되어지고 있는 능력과 행위의 말씀 속에서 일어난다." 여기서 분명히 들어나는 것은, "성령에 의한 세례"는 하느님 말씀의 역사 (Werk)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즉 오늘날 교회에서 선포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화해 사건에 관한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르트가 자신의 교회 교의학 "하느님의 말씀론 (die Lehre vom Worte Gottes" 에서 말씀의 세 가지 양태중 "선포된 말씀 (Das verk digte Wort Gottes)"의 유효성을 여전히 계속해서 견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령 세례"란 한 마디로 말해서 말씀의 使役을 통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認識 내지는 信仰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는 히 12,2: ( ) 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 신앙의 처음 곧 창시자이며, 완성자라고 한다.


둘째로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성령 세례"을 정의한다: "기독교인의 삶을 기초하는 것은, 그 기초가 하느님에 의해서 온전히 수행된 (신적: 역자 첨부) 전환 속에 있다는 면에서, 그리고 그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증언이며, 자기 전달이고, 그리고 또한 성령 세례라는 면에서, 하나의 전적 사역이 가능한 그리고 세상을 실제적으로 주님과 화해하게 하는 하느님의 은총이다: 즉 기독교인의 삶을 기초하는 일이 구체적으로 이제 한 인간에게 돌려진 바로 이러한 은총의 양태이다." 이러한 진술이 뜻하는 바는, "성령 세례"가 바르트에게 있어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창조적 행위에 속함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의미를 보다 자세히 설명한다: "성령 세례는 모형 (Bild)과 상징(Symbol)을 통한 암시(Hinweis) 내지는 지시(Anzeige) 이상의 것이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또한 제공(Angebot)과 기회(Chance) 이상의 것이다. ... 성령세례는 인간에게 그리고 인간 안에서 효과적이고, 원인론적이다. (성령세례는: 역자 첨부) 그렇다 창조적인, 그리고 뿐만아니라 신적으로 역사 할 수 있는, 신적으로 동기를 부여 하는, 신적으로 창조하는 행위이다." "성령 세례"가 바로 하느님께서 독자적으로 행하시는 창조적 행위라는 의미에서 "성령 세례"는 "물 세례"와 대조적으로 인간의 행위가 전혀 전제되지 않은 참된 "성례전적 사건 (sakramentale<s> Geschehen)"이다.


세째로 바르트는 "성령 세례"를 인간의 윤리적 행위와 연관시켜서 설명한다: "그것은 (성령세례; 역자 주) 감사 (Dankbarkeit)을 요구한다. 성령세례는, 성령세례가 인간에게, 인간이 가지지 않았다면, (하느님께서: 역자 첨부) 필요한 것을 줌으로써, 감사를 요구한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성령 세례는 감사를 요청한다. 성령 세례는 그러기에 전적으로 포괄하면서 선물하는 은총의 행위이다. 그리고 성령세례는 또한 인간을 급격히 그리고 효과있게 변화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증언이고 자기전달이다. - (반면에: 역자 첨부) 감사는 성령에 의한 인간의 세례로서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제시된 하느님의 계명(Gebot) 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구속사건에 대한 감사는 단순히 인간의 도덕적 결단이 아니다. 그 감사도 바르트에 의하면 여전히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참된 감사는 자기의 공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감사의 원천은 역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구속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참된 감사가 어떻게 인간의 결단이요, 행위가 될 수 있는지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감사는 단지 이러한 길 (인간 삶의 앞 뒤가 모두 하느님에 의해서 포괄되어진 인간 삶의 길: 역자 주)에 이르는 인간의 고유한 자유로운 결단이 될 수 있다: 곧 하느님의 의해서 둘러싸여진 존재 속에서 이제는 실제적으로 성령에 의해서 ( ) 변화 되어야 할 그 속으로 스스로 자기 자신의 발로 들어가는 것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성령 세례"에 대한 설명을 바르트는 시편 139,5 절: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루시며, 내게 안수 하셨나이다" 로 보완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느님에 의해서 처음과 나중이 규정된 인간의 삶 속에서 인간이 하느님께 유일하게 행 할 수 있는 인간의 윤리적 행위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감사"라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은혜로우신 하느님은, 그가 자기 자신을 한 인간에게 은혜로우신 분으로 나타내심으로서, 하느님께 향한 "인간의 감사 속에서 영위되는 전적인 삶의 행위 (dieses Menschen in Dankbarkeit zu vollziehenden totalen L e b e n s a k t)"을 요구하신다.


네째로 바르트는 "성령 세례"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윤리적 행위의 차원에서 설명한다: "한 인간의 새로운 기독교적 삶의 시작은 ... 아주 특별한 의미에서 인간애 (Mitmenschlichkeit) 속에있는 삶의 시작이다." 이러한 진술은 하느님께서 결코 자기 폐쇄적으로 계신 분이 아니라, 언제든지 인간을 자기 자신의 피조물로, 더 나아가 인간의 친구로 자기자신을 내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자기를 내어주시는 사건을 바르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을 자신의 능력과 행위의 말씀 안에서 인간들에게 그들의 주님으로 증명해 보이시고, 그들의 형제로 계시 하시므로서, 이제 더 이상 자기 자신 안에 폐쇄되어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을 포기 하신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역시, 그 자신이 ... 그들의 주님으로 그리고 형제로 증언하고 계시한 모든 사람에 속해 있는 자기 자신의 소속을 Zugeh rigkeit) 현실화 하실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령 세례"는 사람들을 교회의 일원으로 모으는 예식적 세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독교적 인간애: die christliche Mitmenschlichekeit) 성령에 의한 세례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성령세례는, 마가복음 3,34의 불가타 (Vulgata- bersetzung) 번역 성경에 의해서 '그의 곁에 둘러 앉은자들 (in circuitu ejus sedebant)' 로 번역된 그 무리들, 그리고 개념적으로는 참으로 하느님의 의지를 수행하여야 할 존재들, 곧 교회 (Kirche)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일치된다."


다섯째로 바르트는 "성령 세례"를 성령의 역사 속에서 완성되어질 기독교적 삶의 시작으로 해석한다. "새로운 기독교적 삶의 시작은 바로 성령에 의한 인간의 세례이고, 그리고 사실상 시작으로 머물어 있다. (성령세례: 역자 주)는 완료가 아니고, 충분한 것도 아니고, 최종적인 것도 아니고, 온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미래에 판명되어질 발단이고, 아직은 현재화 되지 않은 도약에로의 약진이고, 미래를 끌어 안으며, 그 미래를 전망하는 발단이다." 이러한 해석을 바르트는 고후 5,17 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로 뒷바침 한다. 다시 말해서 미래의 새로운 피조물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고, 그 새로운 존재는 "성령 세례"을 통하여 현실화 되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 세례"가 성령의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 날 것이라는 "필연적인 연속성"을 내포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성령에 의해서 새로운 존재로 전향하였다는 것은 단 한번 "물 세례"를 통하여 외적으로 증언되는 것이다. 바르트 자신의 말을 빌리서 바꾸어 말하면: "물세례 속에서 증언된 성령의 세례는 하느님의 사역이다, 곧 세례 받은 자 안에서 그리고 그와 더불어 모든 것을 위하여 단 한번 (ein einmal f r a l l e M a l e) (우선 일반적으로 말해서) 여러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다.


바르트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 반복 될 수 있다는 개념과 관련하여 두가지 서로 다른 양태가 있음을 진술한다 첫번째 양태는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게 한 성령 세례의 주체인 성령은 갈라디아서 5 장에 의하면 하느님의 역사 (Werk)이고, 하느님의 역사는 성령 세례 받은자 각 사람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곧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이 열매를 맺는다. 둘째는 날로 새로운 열매를 맺어가는 "성령 세례" 받은 기독교인의 삶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종말론적 기대요, 부활을 고대하는 것이요, 하느님 나라를 예비하고 준비 하는 삶의 시작이다. 직접 바르트의 말을 빌리면: "새로운, 그리스도의 삶은 그러나 - 그것은 계속해서 새로운 열매를 맺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서 - 다음과 같은 뜻에서의 시작이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전체 속에서 자신의 삶 (한계선) 저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아니 오히려 그에게로 닦아오고 있는 목적지를 향해 서둘러 가는 것이다." 이를 뒷 닫침하기 위하여 바르트는 고전 15,51, 마태 6,9 을 인용한다. 즉 한 마디로 말해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처럼,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고대하면서" (마 6,9f.) 그 나라를 예비하고 그 나라를 향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령 세례"는 기독교인의 삶의 근거요, 시초요 발단이다. 결과적으로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령 세례"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화해의 사건을 인식하고, 하느님께서 화해 사건 안에서 보여주신 그 성실함에 상응하게 살아가도록 성령 하느님 자신에 의해서 각 개개인에게서 이루어진 성령의 역사 그 자체라고 특징지어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II,3 신앙적 응답으로서의 물 세례

바르트는 우선 "물세례"가 어떠한 신앙적 상황 속에서 베풀어지는지에 대하여 설명한다. 즉 상황이 어떻게 설명되어지느냐에 따라서 "성령 세례"와 "물 세례"는 함께 볼 수도 있고, 또 분리시켜 놓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는 그 근거와 원천에 있어서 하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물 세례"는 하느님의 자유와 성실함에 뒤따르는 인간의 응답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응답이 전혀 인간의 자기 결단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행동으로 간주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물 세례"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역 (Werk) 안에서 통일성을 갖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실존적 삶과 관련해서 말하면, "성령 세례"가 하느님의 은사와 더불로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과 관계된다면, "물 세례"는 하느님 은사의 수용자인 인간에게 부과된 그리고 그 은사에 의해서 인도되어지는 신앙의 순종이다.


신앙적 상황 속에서 바르트는 "물 세례"를 윤리적 전망을 갖고 규정한다. 즉 "물 세례"는, 그에 의하면, 하느님의 모든 은사를 받아드리는 수용의 행위이며, 감사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 편에서의 결단이고, 하느님 자신이 예수 그리시스도 안에서 인간을 위하여 행하신 구원 사건에 대한 긍정 (Ja)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적 긍정은, 곧 인간의 신앙은, 그에 의하면 구체적인 수용의 행위인 "물 세례"로 표현되어진다. 그러나 그 수용의 행위는 어디까지나 순종의 행위이지, 인간이 주도권을 갖고 아무런 전제 없이 결단한 주체적 행위는 아니다. 그 속에는 어떠한 인간적 의도가 첨부되지 않은, 오로지 "신앙의 진실성 (Die Echtheit des Glaubens)"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신앙의 진실성"에서 발로한 인간의 결단, 곧 하느님의 모든 역사에 순종하고 따르겠다는 단호한 결단이다.


이러한 모든 의미를 바르트는 예수의 예증적 삶 속에서 발견한다. 그래서 예수의 세례는 바로 "물 세례"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한 마디로 바르트는 "물 세례"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이러한 아주 단순한 의미와 특징 속에서 ... 기독교적 세례는 하느님의 전환에 상응하는 인간적인 결단의 양태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물 세례는: 역자 첨부) 기독교인의 삶을 기초하는 것이다".


이제 바르트는 "물 세례"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7 가지 문장으로 요약한다:
"1. ... 기독교적 세례는, 이러한 행위의 형태로 일어나는 것은, 물로 몸을 씻는 것이다." 이를 뒷 바침하기 위하여 바르트는 " " 혹은 " " 이란 동사가 우선 "씻음"의 의미를 갖고 있음을 주지시킨다.
"2. 기독교적 세례때 물를 사용 하는 것이 뜻하는 바는, 단지 물이 형식으로 단지 몸을 씻는다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 점에서 중요하다." 더나아가 바르트는 물이 갖는 구원적인 의미를 고전 10,1이하가 이스라엘 백성의 홍해를 건넌 사건을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증빙한다. 뿐만아니라 베드로 전서 3,20 하에 나타난 " "을 증언하고 있는 점으로 뒷바침한다.


"3. 기독교적 세례는 언제든지, ... 물 세례이고, 그 세례는 후기 유대교에서 유대교 회당으로 들어오기 원하는 이방인 (소위 이방인 <<Proselyten>>) 들에게 의해서 요구되어졌고, 또 그들에게 시행되어졌다."
"4. 기독교적 세례는 물 세례로서 신약성서 시대의 교회 안에서, 익히 인식 될 있는 바와 같이, 처음부터 전반적으로 아주 자명하게 통용되어졌다." 특히 바르트는 요 3,5: " " 을 근거로 "물 세례"와 "성령 세례"가 유기적으로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었음을 제시한다. 그리고 바르트는 "물 세례"가 그렇게 통용 될 수 있었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세례를 받았다는데 그 근거를 갖고 있다고 본다.


"5. 그보다도 더 어쨋든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세례가 실행 되어진 것에 비하여, 결코 그 만큼은 빈번하기 않게, 그리고 강조 한 것에 비하여, 그렇게 자세하지는 않게, 그리고 특별히 예외적나 주제별로 기독교적 세례에 관한 언급은 없다." 바르트는 그렇지만 분명 니케아 콘스탄티노폴 (Nicaeno-Constant: 381) 신조에는 "credo in Deum Patrem ... Filium ... Spiritum Sanctum"이라고 고백되어 있고, 적어도 라틴어 번역에서는 "c o n f i t e o r ( ) unum batisma"로 되어있음을 주지시킨다.


"6. 어느 한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신약성서의 진술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그리고 확실히 그에게 일어날 (이미 일어났던지 혹은 미래에나 비로서 일어날) 자유로운 신적 구원 사역과 말씀의 개방 덕분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런데 그 구원의 사역과 말씀에로 세례 받는자 자신은 저 개방을 통하여 준비 되어있고, 부름을 받은 존재로 발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물 세례"는 바르트에게 있어서 이중의 특성을 갖는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의 말씀과 사역에 기초한 인간의 소명이라는 것이다.


끝으로 바르는 "물 세례"의 수동적 의미를 강조한다. 즉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세례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어느 누구도 교회의 공동체에서 떨어져 독자적으로 세례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물 세례"는 인간의 결단에 의한 것이면서도 언제든지 수동적일 수 밖에 없으며, 공동체적 의미를 갖을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7. 누구든지 그를 세례하는 공동체에서 떨어져 자기 자신 세례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공동체가 그를 세례 줌으로써, 공동체가 그에게 자신의 신앙에서 나온 인정 (Anerkennung)과 공동체에 대한 자신의 소속 (Zugeh rigkeit) 그리고 또한 예수에 대한 봉사 이상의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 만큼이나 신약성서에서 낯 선것이다.". 이상 7 문장으로 된 "물 세례"에 대한 특성을 기술하고 바르트는 세례의 근거, 목적 그리고 의미를 조직신학적으로 전개한다.

III. 세례의 신학적 특성

III,1 세례의 근거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예수의 세례)

왜 세례가 교회에서 필연적인 요소가 되어야 하는가? 어떠한 범위에서 세례가 교회 존립에 필요 불가결한 요소 중 하나가 되었는가? 이러한 질문은 바르트에게 있어서 마 28,19: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라는 세례 명령 (Taufbefehl)과 관계된다. 그런데 그러한 명령은 예수의 세례에 기인한다. 예수가 스스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이 예수는 세례의 필요성 내지는 필연성을 명령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역고 성립한다. 앞에서도 수 차례 언급하였듯이 기독교 세례의 필연성 내지는 정당성을 바르트는 예수의 세례에서 보고자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의 세례는, 그에 의하면, "신적 전환과 인간적 결단의 기점"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의미에서 예수의 세례가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결단이 만나는 기점이 될 수 있을까?


바르트는 예수의 세례가 갖고 있는 의미를 - 윤리적 차원에서 - 순종으로 본다. 즉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느님의 의지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을 인간에게 순종하는 존재로 계시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에게 있어서 세례는 앞으로 자신의 삶이 바로 인간을 구원하는 救援史임을 알리는 하나의 개명 (Er ffnung) 이였다. 그것은 바르트에 의하면 하느님의 구원의 의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행워였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의 세례는, 바르트에 의하면, 바로 "성령 세례" (마 3,13-17; 병. 막 1,9-11; 눅 3,21-22) ) 였음을 바르트는 주지 시킨다 . 여기서 우리는 바르트가 기독교적 세례의 기점을 "예수 세례"로 보는 것은 형식상 내지는 외연상의 근거 (formaler Grund)이고, 실질적인 근거는 (materialer Grund) "성령 세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수의 세례가 순종의 행위였다는 의미에서 기독교적 세례의 의미도 바로 하느님의 구원의 의지를 순종하겠다는 인가적인 결단 곧 순종의 행위로 규정짖는다. 그러기에 그는 기독교적 윤리에 관한 교리를 윤리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예수의 세례는 기독교적 세례의 예증적이고 (exemplarisch)이고 의무적인 (verbindlich) 모범이다. 예수의 셰례가 자신의 救援 使役의 서두에 일어났듯이, 기독교인이 세례를 받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시작에 상응하는 행위에서 그의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파악되어 질 수 있다.


이제 간단히 종합하면: 기독교 세례의 근거에 관한 질문은 바로 세례의 필연성에 관한 질문과 일치한다. 따라서 기독교적 세례는 필연적으로 예수의 세례와 연관되어 있다. 예수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를 부르시는 하느님에 순종하였듯이 사람들은 세례를 받음으로서 예수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그의 계명을 따라서 사는 순종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예수의 순종 행위를 받아 주셨듯이 그렇듯이 믿음과 순종에서 나온 세례를 통하여 인간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받아주시는 은총이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셰례 명령"은 단순한 계명의 차원이 아니라, 은총의 차원에 속한 것이면서, 동시에 윤리적 차원에 속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르트 세레론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바르트는 기독교적 세례의 근거를 오로지 "예수의 세례"로 본다. 그렇다면 왜 세례를 받는가? 세례의 목적은 무엇인가?

 

III,2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화해의 행위"로서의 세례의 목적

바르트는 세례의 목적을 세례 양식문 속에 나타난 " " 에서 찿고자 한다. 즉 세례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든지 타자와의 관계를 위한 세례이다. 그것은 세례의 형식문에서 전치사 의 목적어로 나타나 있다. 즉 세례는 분명 그것이 지향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 목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따라서 세례는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목표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이다. 역으로 말하면, 세례는 도래하고 있는 하느님 나라와 더불어 오고 있는 하느님의 심판 그리고 죄의 용서로 닥아오고 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그러기에 세례 받은자들에게는 하느님의 미래가 현실화 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에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화해의 행위"이다.


이러한 세례의 목적은 기독교의 세례가 요한의 세례와 구별되는 특징이기도 한다. 또한 동시에 이러한 세례의 목적은 오순절 이전의 유대교적 세례와 기독교 세례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즉 기독교 셰례의 목적은 단순히 "죄 용서" 내지는 "씻음"의 유대교적 차원에서 보편성을 갖은 "화해의 행위"로 고양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기독교 세례의 목적 내지는 독특성 (요한의 세례와 구별된다는 의미에서)을 바르트는 6 가지로 분류하여 진술한다. 그 6 가지의 특징을 쉬리터 (Richard Schl ter) 다음과 같이 요약 될 수 있다:


"1. 기독교 세례는 긴박하게 그리고 약속으로 가득찬 하느님 나라의 도래 속에서 그리고 인간들 속에서 일어났다."
2. 기독교 세례는 오순절 이후에 형성된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세례로서 성령의 부어주심 (Ausgie ung)과 전달로 부터 생긴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세례는 하느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길 고대하는 일종의 기도이다.
3. 기독교 세례는 회개를 촉구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주로 이 세상에 왔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이를 마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는 세례요한의 증언으로 뒷바침한다. 그러므로 바르트에 의하면 기독교 세례는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예리한 경고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하느님의 義의 성취에 참여 하게 되는 것이다.


4. 기독교 세례는 요한의 세례 비하여 더 근본적으로 "죄 용서 속"에서 수행되어지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구원의 계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세례받은 자는 "Credo ... r e m i s s i o n e m peccatorum"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죄 용서는 장래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을 단지 믿음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 (행 5,31; 11,18). 왜냐하면 "죄 용서"의 약속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5. 기독교 세례는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 공동체를 불러모으는 형식적인 역활을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사람을 불러 모아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소명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 받은 자는 모두가 형제와 자매로서 교제 (Gemeinschaft)를 나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자들의 교제 (Gemeinschaft der Zeugen Jesu Christi)"를 나누는 것이다.


6. 더 나아가 기독교 세례는, 바르트에 의하면, 세례 요한의 세례와 연속성을 갖고 있으면서, 그 의미, 즉 회개 촉구, 계승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은 모든 사람에게 -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 - 회개 촉구의 사건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그의 이름으로의 세례를 요구하는 것이다. (엡 3,6; 2,19)
요한의 세례와 비교하여 이상의 기독교적 세례의 특징이 있다고 하더라도, 양자는 그 목적에 있어서 일치한다. 즉 양자는 모두 하느님의 구원사역을 회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자의 세례가 궁극적으로 목적하는 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구원사역이 성령의 역상를 통하여 실현되어 질 것을 고대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르트는 성령의 계속적 사역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끝으로 종합하면, 바르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의심할 여지 없이 세례의 근거이며, 동시에 목적이다. 세례의 목적 (Telos)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느님의 구원 사역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각 개인에게서 현실화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사역에 인간은 성실하게 응답하고 그 사역에 순종함으로 동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종의 표현이 바로 기독교의 세례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세례는 동시에 인간의 신안적 결단이다. 그렇다면 세례의 의미는 무엇인가?

 

III.3 비성례전적 인간 행위로서의 기독교의 세례

바르트는 세례의 의미를 논 할 때에 언제고 다시금 "세례의 근거와 목적"에로 되돌아간다. 그에 의하면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한 자유로운 순종의 행위로 일어나기 때문에, 세례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희망속에서" 그에게로 닥아간다는데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례는 언제든지 윤리적 차원에 있다. 왜냐하면 만일 세례가 內재적인 신적 사역으로 이해 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세례 찬양 (Lob der Taufe)"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세례의 고유하고도 독특한 의미는 오히려 다음에 있다. 즉 세례는 인간의 행위로 즉 세례는 인간의 행위로 표시되어진다는 것이다. "세례는 성령세례로 인한 물세례이고, 물세례는 성령세례로 가고 있다: 그러나 물세례는 그 자체는 성령세례가 아니라, 물세례는 여전히 물세례로 머물러 있다" 이러한 통찰은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결론에 이른다: "물 세례"는 신비도 성례전도 아니다. 신비와 성례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고 성령의 부어주심(Ausgie ung)이다. 물세례는 이러한 사건들에 대한 인간적인 응답이다.


세례가 비신비적인 인간의 결단에 의한 행위라는 점에서 바르트에 세례론은 초대 교회적이라고 지금까지 지배적인 ( berwaltigend) 교회-신학적 전통과 일치하지 않는다. 즉 로마-카톨릭적 은총론적 세례론 - ex opere operatio - 같은 것이라든지 은총의 방편 (Mittel der Gnade)으로서 ex opere operato 혹은 ex verbo locuto 같은 전통적 루터교회의 세례론 이라든지 그리고 칼빈 전통주의 신학자의 세례론 - externa media vel adminicula, quibus Deus in Christi societatem nos invitat et in ea retinet - 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심지어는 Calvin의 세례론 (Calvin, Institution IV,14f) 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칼빈은 세례를, "하나님과 천사들과 인간들 말에서의 기독교 신앙을 의무적으로 고백하고 증언하는 주체적인 행위" 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참. KD IV,4 S.113ff.) 오히려 바르트의 세례론은 Huldrich Zwingli 에게 더 가까이 간다. 왜냐하면 Zwingli는 세례의 성례전적 의미를 아주 분명하게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가 제기된다: 교회-신학적 전통 (kirchlich-theologische Tradition)에 대한 바르트의 反論이 신약성서를 통하여 과연 증명되어 질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변을 바르트는, 우선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신비-성례전의 개념이 신약성서 안에서 사용되고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 "세례는 나타내기 위하여 이러한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신약성서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바르트는 이를 위하여 " " 이란 신약성서적 언어사용의 의미를 증거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신비 (Mysterium) 내지는 성례전(Sakrament)라고 언명하는 의미를 깊숙이 주석적으로 분석 하기전에 해석학적 관점들을 숙고하고 있다. 어쨋든 종합적으로 바르트에게 있어서 세례는 비성례전적 세례로서 아래와 같이 이해 되어진다: "기독교적 세례 행위는, 신약성서에서 그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는 바에 의하면, 단지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높고 가장 높은 개연성 (Wahrscheinlichkeit)을 갖고 있다. 그리기에 세례는 인간을 청결케하고 새롭게하는 신적인 은총의 역사 그리고 은총의 말씀이다. 따라서 그것은 (기독교적 세계행위는) 지배적이 되어버린 신학적 전통의 의미에서 신비나 성례전으로 결코 이해 되어질 수 없다. 인간을 정결케 하는것과 새롭게 하는것은 신약성서에 의하면 예수의 죽음속에서 완성된 예수의 역사속에서 일어나고,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중재된다. 신약성서는 이 구원의 사건과 구원의 중재에 의해 그리고 그 곁에 이어 다른 아무것도, 이러한 고유한 하느님의 행위와 말씀의 중복(Duplikat)을 알지 못한다.".


이제 바르트는 "물 세례"의 의미를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물 세례"는 단순히 "복사적 특징 (Duplikat-Charakter)"가 아니다. "물 세례"는, 수차 언급되었듯이, 하느님의 행위와 말씀에 응답하는 인간적인 행위로 이해 되어진다. 즉 세례행위 (Taufhandlung), 곧 물로 씻는 것으로서의 세례는 하나의 구체화 되어진 행동이다 (eine konkretabbildende Aktion)). 그러나 그것이 뜻하는 바는 결코 완전히 육체의 씻어 냈다는 뜻이 아니다 (참.벧전 3,21)). 인간적인 행위로서 세계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곳에 있다: 세례(물)는 예수의 역사속에서 하느님의 행위를 "대략, 대체로"(ann hernd) 모방하는데 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행위를 회상하는 것이고, 그 하느님의 행위에서 유래하는 것이고, 그러나 그것을 지시하는 것이고 그 행위에 닥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모사적 (nachbildende) 응답은 "하나의 확실한 객관성 속에서" 일어난다.


둘째로 세례행위는 하나의 "교회의 사건"이다. 세째로 세례 행위속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유롭게 세례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 응답은 자유로은 순종 속에서 일어난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오로지 자유로운 순종이 있을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셨으며, 인간을 성령을 통하여 자유롭게 하고 계시고, 무엇보다도 그 어떤 다른 종살이와 외적 강요로부터 해방된 자신을 위한 삶과 서로를 위하여 자유케하고 계시다.


그러나 바르트에 의하면 세례행위가 갖는 의미중 무엇보다도 가장 확실한것은 회개의 표시라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위한 세례"였다. 즉 세례자들 세례 행위를 통하여 옛길을 떠나고 하나의 새로운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 그 자체는 "옛길에서 새로운 길로 넘어가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와 세례받은자들이 하느님에게로 공동으로 되돌아 가는것, Umkehr)을 진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 轉向이 뜻하는 바는, 인간이 정결케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사역과 말씀을 인식 하였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인식하고 믿는 자에게, 곧 회개의 세례를 받은 자들은 하느님을 義롭다 인정하신다 (Luk.7,29f).
이러한 세례행위의 의미 속에서 바르트는세례를 "주권교체 (Herrschafts- wechsel)"로 나타내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지금까지 추구한 주장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주권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세례는 단지 독재자로 명명(命名) 되어지는 것에로의 회귀(Umkehr)가 아니라, 오히려 무엇보다도 그러한 존재로 권한이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주장을 회피하는 것이 오직 피할수 없는 주권이라는 것이다(156). 그래서 하느님의 義의 수여 (das Gottrecht- Geben)는 질적으로 向上된 인간적인 행위" 가 된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이러한 명백한 사실을 피해 가고자 하는 자는, 그리고 세례행위를 하나의 內在해 있는 신적인 행위나 말씀으로 기술하고자 하는 자는 세례의 의미를 그릇된 고대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밀의종교 (Mysterienreligionen)의 길로 가는 것이라고 바르트는 강조한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하느님에게도 돌아섬(Umkehr)은 위로부터의 von oben 증명이 必要하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심판이 必要하다. 곧 세례는 실재로 하느님에게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는 이러한 신적 증명의 성취(Antizipation)이 아니고, 또한 인간적 자기 의인화(der menschlichen Selbstrechtfertigung)의 행위도 아니다. 물세례는 신적 심판의 고대(Erwartung)속에서 수행되어지고, 그의 은총에 대한 갈망속에서 집행되어진다. 세례속에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고 말씀하신 하느님에게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아직도 역사하고 계시고 말씀하고 계시며, 다시금 일하시고 말씀하실 하느님에게로의 돌아서는 급진성 (Radikalitat)은 모든 다른 일반적인 전환과 변화와 회심(Bekehrung)과는 相反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세례가 기독교적 삶의 첫번째 발걸음으로 갖는 의미를 살펴보았다. 바르트는 이제 무엇이 자유로우면서 책임적인 인간적 행위속에서 일어났는지 기술 한다. 첫째는 세례의 행위속에는 인간의 순종이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리고 그에게 결합된 사람들"의 자유로운 행위이다. 즉 세례 행위의 의미는 자유에로 인도되어지는 순종에 있는 것이지, 인간에 의해서 추구 되어질 수 있고, 발견되어 질수 있는 그어떤 다른 피할 수 없는 높고 혹은 깊은 것에 있지 않다. 따라서 바르트에 따르면, 세례는 신적 구원사역 (Heilswirkung) 그리고 구원계시의 매개체(Mittel)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르는 순종의 행위이다.


그러나 순종의 행위로서의 세례 행위 속에는 그 裏面에 하나의 구체적인 거절 과 긍정이 내포되어 있다. 즉 세례주는자와 세례받는자는 서로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났고 그리고 온전히 계시된 칭의와 구원와 치유 (Heiligung) 아래 서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아니요 (Nein)과 하느님의 긍정 (Ja)이 세례 행위에서 증명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례는 완성(청취)되지 않았다. 세례는 그러나 하느님에 의해서 이끌려 들어간 위기(Krisis)를 인정하고 선포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례행위는 우선 거부의 특징을 갖고 있다. 세례는 죄와 잘못의 고백, 즉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속에서 용서받은 잘못으로 인식할 수 있는 죄와 잘못의 고백이다. 왜냐하면 롬 6,4, 골 2,12 에 의하면, 세례는 옛인간의 땅에 묻힘으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땅에 묻힘이란 죽은자들에게 대한 거부이다". 그래서 세례는 땅에 묻힌 옛 인간과의 이별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비는 죄된 인간의 구원에 관하여 그리고 새로운 삶 에로의 전환에 대하여도 증언하고 있다.


끝으로 세례의 의미는 바르트에 의하면 신앙고백에 있다. 세례는 "공동으로 선포된 서약 (Schwar)"이다. 이러한 점에서 바르트는 또다시 사람들이 라틴어 단어 "Sakramentum" 이란 단어의 의미를 수정하여 수용하고자 한다. 즉 "Sakramentum" 이란 단어가 근원적인 의미에서 따르기를 원하고 따르고자 한다면, 그것은 "공동으로 선포된 서약" 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세례를 "성례전 (Sakrament)"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언제든지 그것은 "신적 전환 (g ttliche Wendung)"에 상응하게 뒤따르는 인간적인 결단(menrchliche Entercheichung)을 뜻한다. 그런데 세례를 받을 때에 내려지는 인간적 결단은 결코 인간의 절대적 자유의지 기인한 것은 아님을 바르트는 강조한다. 세례 행위 속에 있는 인간의 결단은 오직 하느님에 의해서 주어진 "선택의 자유 (E n t s c h e i d u n g sfreiheit)" 에 기인한 것이다.


이제 바르트에게 있어서의 세례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 아래 있는 인간의 윤리적 결단의 표현이라고 특징지어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개념적인 단어로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 사건의 인식에서 발로한 것으로서 앞으로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 처럼 하느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겠다는 서약이요, 약속이며, 결단이다. 이러한 결단에 대하여 하느님은 자신이 약속하신 모든 은총을 성령을 통하여 그에게 설실히 수행시켜 가시겠다는 약속이 주어지는 것이 세례이다.


맺는말

바르트의 세례이해의 출발점은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 사건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로서의 세례도 화해사건에 기인한다. 다시 말해서 화해의 사건 속에서 일어난 "하느님의 전환 (die g ttliche Wendung)" 이다. 결과적으로 바르트에게 있어서, 세례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화해의 사건을 인식하고, 하느님께서 화해 사건 안에서 보여주신 그 성실함에 상응하게 살아가겠다는 "인간적 결단"이라고 특징 지어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느님의 화해 역사 곧 "하느님의 전환"을 각 개개인에게 현실화 시키는 것은 성령의 역사 그 자체이다.


따라서 "성령 세레"란 바르트에게 있어서 포괄적인 의미를 갖느다. 즉 다시 말해서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처럼,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고대하면서" (마 6,9f.) 그 나라를 예비하고 그 나라를 향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령 세례"는 기독교인의 삶의 근거요, 시초요 발단이다.
신앙적 상황 속에서 바르트는 "물 세례"를 윤리적 전망을 갖고 규정한다. 즉 "물 세례"는 하느님의 모든 은사를 받아드리는 수용의 행위이며, 감사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 편에서의 결단이다. 그리고 "물 세레"는 하느님 자신이 예수 그리시스도 안에서 인간을 위하여 행하신 구원 사건에 대한 긍정 (Ja)이다. 이러한 신앙적 긍정은 구체적인 표현하는 행위가 "물 세례"이다. 그러나 그 수용의 행위는 어디까지나 순종의 행위이지, 인간이 주도권을 갖고 결단한 주체적 행위는 아니다. 그 속에는 어떠한 인간적 의도가 첨부되지 않은, 오로지 "신앙의 진실성 (Die Echtheit des Glaubens)"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신앙의 진실성"에서 발로한 인간의 결단, 곧 하느님의 모든 역사에 순종하고 따르겠다는 단호한 결단이 바로 바르트의 "물 세례" 개념이다. 그런데 "물 세례"의 원천이 "예수의 세례"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물 세례"는 언제든지 수동적인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기독교적 세례는 필연적으로 예수의 세례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셰례 명령"은 단순한 계명의 차원이 아니라, 은총의 차원에도 속한다.


기독교 세례의 근원이 "예수의 세례"라는 점에서, 세례가 하느님의 화해사건에 근거한 인간의 행위라는 사실이 분명해 진다. 그러나 그 인간 행위는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의 독자적인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 속에 있는 행위이다. 따라서 바르트가 "성령 세례"와 "물 세례"를 구별하는 것은 "물 세례"의 근원이 본래 "성령 세례"인 "예수의 세례"에 기인하여 있기 때문이고, 기독교적 "물 세레"를 비성례전 행위로 보는 것은 Sakramentum 이란 단어의 원 뜻이 하느님의 독자적 행위로 보기 때문이다.


이상의 진술에 근거하여 바르트에게 있어서의 세례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한마디로 요약하면, 기독교적 세례란 하느님의 은총 아래 있는 인간의 비 성례전적 윤리적 결단의 표현이라고 특징지어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윤리적 차원에서 설명하면, 기독교적 세례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 사건의 인식에서 발로한 것으로서 앞으로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 처럼 하느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겠다는 인간 편에서의 서약이요, 약속이며, 결단이다. 이러한 결단에 대하여 하느님은 자신이 약속하신 모든 은총을 성령을 통하여 그에게 설실히 수행시켜 가시겠다는 약속이 주어지는 것이 세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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