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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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앙 연구가들/칼 바르트

2011.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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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

 

- 성서 안에 한 새로운 세계, 하나님의 세계가 있다 -  

말씀과 신학(칼바르트 논문집1), 대한기독교서회

 

< 성서 안에 있는 새로운 세계 >

 

성서 안에 한 새로운 세계, 하나님의 세계가 있다... 우리가 성서의 내용을 더 깊이 파악하려면, 우리 자신을 훨씬 초월해야 한다. 성서의 내용 자체가 그 밖에 다른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성서는 각자에게 그가 벌어들이고, 그에게 알맞는 것을 주기 때문이다. 성서는 한 사람에겐 많이 주고, 다른 사람에겐 얼마간 주고, 또 다른 사람에겐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성서는 우리의 근시안과 서투른 손가락으로써 그 안에서 대답을 발견했을 때, 우리가 진지하다면,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p.11)

나는 거기에 머물 수 없다. 성서는 우리가 사용한 분명한 태도에서 뚜렷하게 친절하게 말한다. 그것은 너이지, 그러나 나는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너의 과음의 필요와 견해들의 요구와, 너의 시대와 주변의 요구, 너의 종교적인 철학적인 이론의 요구에 걸맞는다. 너는 내 안에서 네 자신을 반사하기를 원한다. 너는 실제로 네 상을 내 안에서 다시 발견했다. 이제 가서 나를 찾으라. 거기에 있는 것을 찾으라.
.. 우리는 자신을 초월하여 최고의 대답을 붙잡기 위하여 성서에 있는 이 충동을, 이 영을, 이 강을 감히 따라야만 한다. 이 모험이 믿음이다.(p12)

성서에는 무엇이 있는가? 역사가 있다.(p.13) 성서는 하나님이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하나님이 살아 있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시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이란 역사가 일어난다.(p.14)


어떤 결정적인 점에서 성서는 우리의 선과 악의 개념에 대하여 놀랍게도 무관심함으로써 우리를 놀랍게 한다.(p.16)

우리가 옛, 일상적인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근면, 정직,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도덕이 다스리는 세로운 세계가 문제다. 이 세계는 건설되었고 자란다. 이 오는 세계의 빗속에서 다윗은 그의 간음과 피묻은 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인간이다. 하나님이 그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복되도다! 세리와 창녀들이 좋은 사회의 비난을 전혀 받지 않은 고상하고 의로운 백성들 앞서 이 세계로 들어간다. 이 세계에서 참된 주인공은 전적으로 잃은 돼지를 먹인 아들이지, 도덕적인 형이 아니다.(p.17)


성서의 내용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바른 생각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바른 생각이다.(p.20)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찾고-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한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종교, 그리스도교를 갖고 초보 학자와 서투른 사람들과 함께 그 앞에 선다. 우리는 그것을 슬퍼할 수 없고 즐거워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주된 것을 갖는다. 이 주된 것이 없다면 모든 경건은, 가장 깊은 경건은 허구며 사기다.(p.21)

 

하나님은 하나님이다.(p.24) 하나님은 누구인가? 나의 중보자가 된 아들이다. 그 이상으로 그는 전 세계의 중보자이며, 만물의 처음에 있었던, 그리고 모든 만물이 간절하게 기다리는 구속하는 말씀이다. 그는 나의 형제들과 자매들의 구속자다. 그는 길잃은 인류와 악령들과 악한 세력들에 의해서 인류의 구속자다. 그는 우리를 에워싼 탄식하는 피조물들의 구속자다. 모든 성서는 힘차게 선포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고. 성서 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이미 영광스러운 시작, 새로운 세계의 시작임을.


하나님이 누구인가? 믿는 자 안에 있는 성령이다. 그는 아들로부터 우리에게 열리고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수정처럼 맑게 고요한 마음 속으로 흐른다.(p.25)

 

 

<성서적 질문, 통찰과 전망>

 

전형적으로 종교적인 관심의 초점, 즉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에 관한 설명에 관하여 성서는-신화와 신비주의가 성적 욕망을 온갖 무지개 색깔 속에 집어 넣어서, 이 관계를 풍성하게 묘사하는 것과 비교해 보면-기이하게 주저하며 냉정하고 무색하다.(p.67)

 

부활
부활은 새로운 세계, 새로이 결정되고 빚어진 세계다. 세계의 의미의 폭로, 죽음으로부터 올라온 그 생명, 우리 자신의 시초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 덕분에 세계의 시초도 하나님 안에 있음을 깨닫는 것-이것은 원칙적으로 혁명적인 사건이며, 이것은 주어진 것, 이미 형성된 것, 영적인 것이든 자연적인 것이든 이미 기존해 있는 것의 연속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다. 아무리 발전적, 개혁적, 낙관주의적으로 이해되는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현실은 진리에 의해 확증되지도 않고 성화되지도 않는다. 현실은 진리의 빛 안에서 새로운 현실이 된다. 질적으로? 전적으로 다르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여기엔 아무런 이행과정, 혼합, 중간단계도 없다. 여기엔 순전한 전환, 결단, 새로운 통찰이 있다.(p.85)

 

부활의 체험
아직도 마지막으로 할 말이 남았다. 부활은 인간의 유일한 체험이다. 나는 오해받지 않기를 희망해도 될 것이다. 우리의 체험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 경외 속에서 우리가 자칭하는 체험이 끝장나는 바로 그때에, 진정한 체험이 시작된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개인은 그의 가장 인격적인 생활과 함께 그의 의무만이 아니라 그의 권리도 갖는다.

 

"나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는 자는 그것을 찾으리라." 성서의 역사는 먼저 무엇보다 인간의 역사인 한에서만 자연의 역사, 정신의 역사, 세계의 역사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이 역사의 주체이시다. 그분만이 홀로 그러하시다. 그러나 인간 배후에, 너머에 계신 하나님은 인간이 처음부터 생존하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데 필수적인 생활요소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추구되고 발견되길 원하시며, 인간에게 영의 첫 열매를 주길 원하신다. 사람의 아들인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모든 것이 통일되어 있다. 인간의 심장에 영원히 주어져 있으며, 덧입혀질 것,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것이 바로 새 인간이다. 우주, 일반 역사, 이른바 무리나 건물, 물줄기나 운동으로서의 인류, 조직화되거나 조직화되지 않은 수많은 민족들, 계급들과 정당들이 아니라 완전히 개별적인 인간, 자연에 속해 있고 역사 안에 있는 인간, 고통 당하고 행동하며 인식하는 사회의 주체로서 자신의 고난을 지고 자신의 희망을 기뻐하면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안에서 인식하는 인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개인이야말로 최초의 피동자다.

당신은 인간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생각하신다. 당신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약속하셨다. 그리고 당신에게서 그 약속이 이루어져야 한다. 당신은 믿어야 한다. 당신은 모험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인내를 요구하신다. 당신은 부활,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될 때 결정되는 무대다. 하나님의 관객은 없다. 물론 주제넘은 하나님의 동역자도 없다. 그러나 그분의 은혜로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존재한다. 아직도 여전히 출현하지 않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이러한 우리의 존재, 하나님의 체험이 되기를 언제나 원하는 이러한 우리의, 나의 그리고 당신의 체험- 이것이 바로 부활절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말을 이미 늘어놓은 것일까?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모든 말이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일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철저하고 가장 포괄적인 말들은 너무 적게 늘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성서는 우리가 듣고 실천과 진리로 옮겨 놓을 수 있는 것이 많고 적음에 따라 어떤 때는 많이, 또 어떤 때는 적게 우리에게 말한다. 선택의 문제를 가지고 우리는 시작했다. 우리는 또 이 문제로 끝맺어야 할 것 같다.


궁극 이전의 성서적 전망은 결국 불가피하게 우리 자신의 존재의 문제점을 다시금 꿰뚫어 보도록 방향을 바꾼다. 그러나 또한 이 불안, 바로 이 불안의 뿌리는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의 추구와 실패, 우리의 서고 넘어짐, 우리의 기억과 망각, 우리의 긍정과 부정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에워싸여 있고 지탱되어 있다.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피조물인지 하나님은 아신다. 우리는 먼지임을 하나님은 기억하신다. 우리가 인식하기도 전에, 우리는 인식되었다. 이 말은 너무 많은 말도 아니고 너무 적은 말도 아니다. 그리고 아무튼 이것은 궁극적인 성서적 전망이다.(p.88-89)

 

<신학의 과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모든 출발점과 심각성
여기서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서 지금 언급되고 있는 존경할 만한 사람들의 이름 속에 슐라이에르마허의 이름이 빠져 있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 싶다. 나는 슐라이에르마허가 천재적인 자질로 작품을 썼다는 것을 인정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훌륭한 신학의 스승이 못된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는 한 그는 인간은 인간으로서 곤경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헤어나올 길이 없는 곤경 속에 있다는 사실을 치명적으로 불분명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 예레미야가 유다의 왕들과 제후들과 그 땅의 백성들, 특히 자신의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대립해서 서 있었던 그 부정성과 고독, 유대주의에 물들어 있었던 종교의 세계에 대항했던 바울의 전체 삶을 규정지었던 그의 새로운 방향 전환, 비경건함과 싸운 것이 아니라 중세의 경건과 싸웠던 루터의 중세의 경건과의 간격, 그리스도교를 공격했던 키에르케고르의 공격, 이 모든 것들에 슐라이에르마허는 결코 접근되어 있지 않고 있는데, 바로 이런 것들이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언급될 수 있는가의 특징들이다...


... 인간과 우주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것은, 질문이 대답을 발견하는 것은, 실존의 곤경에서 끝나는 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사건인데, 즉 불가능한 것 자신이 가능한 것이 되고, 죽음이 삶이 되고, 영원이 시간이 되고,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사건이다. 이 새로운 사건에 이르는 길은 없고 그 사건에 접할 수 있는 기관을 인간은 갖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 길과 그 기관은 그 자체로서 새로움이고 계시이고 믿음이고 새로운 인간이 보고 또 보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의 '심각성'에 대해서 그 '출발점'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곤경 밖의 어떤 곳에도 연결점은 없다. 바로 이 곤경 속에서 곤경을 곤경으로 질문으로 파악하는 것을 은폐하려는 모든 허상들은 파괴된다. 이것이 이 곤경의 심각성이다.(p.103-105)

 

 

< 그리스도교적 선포의 필요와 약속>

인간
가령 회중이 우선 인간 삶의 큰 문제를 교회로 가지고 와서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답을 찾는다해도 성서는 그와 반대로 우선 대답을 가지고 와서 이 대답에 일치하는 문제를 찾는다. 질문하는 인간들은 이 대답 자체이고 바로 상응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이해하여 찾고 그리고 발견하고자 한다. 성서의 사고 세계가 움직이는 노선도 역시 생애의 결산에서 부정적 요소들의 지배를 통해 일련의 크고 가치있는 가능성에 대하여 질문이 제기되고 있는 거기에 그리고 바로 우리 인간 편에서 "도대체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문제를 일으키는 바로 그 점들을 공개적으로 건드린다.


성서는 낯선 편파성을 가지고 인간 삶의 모든 단계들을 뛰어넘는다. 바로 거기에는 이 위기가 아직도 날카롭지 않고, 또 거기에는 인간이 아직도 금간 데 없는 순진성으로 하나님의 면전에서 버찌나무나 교향곡이나 국가나 하루하루의 일과에 아직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생의 무대를 뛰어넘는다. 그러나 성서는 그 사람을 더욱 격렬하게, 그리고 의심이 그를 사로잡는 바로 그 단계에서 흥미를 자아낸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의심하던 거기가 가장 높은 단계인가 혹은 가장 낮은 단계인가? 성서에서 보면 찬양과 감사와 환희와 확실성은 이쪽에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저쪽에서 나타난다. 거기서 인간은 찾는 자이고 구하는 자며, 문을 두드리는 자가 되었다. 그리고 저 어쩔줄 모르는 마지막 갈망이 그를 사로잡고 그야말로 한번쯤은 그를 교회로 이끌어 준다고 한다.(p.143)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는 단순히 그것이 참인가 묻지 않고 오히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나를 버리셨습니까?"하고 물으신다. 사람들은 그것은 진정한 절망의 표현이 아니라고 애써 변명함으로써 이 말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예수를 모면시켜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로 그것이 의심과 절망보다 못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그것은 우리의 옛 교의학자들이 알고 있었던 바와 같이 버림받음이었고 상실됨이며 포기당함이었다. 성서에서 말하는 고난은 하나님께 대한 고난이며, 죄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며, 의심이란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이며, 수정을 행하는 것도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사람이 자신의 생명과 소멸에서 명백히 얻을 수 있는 인간성의 한계로 들어가는 고통스러운 통찰에서 성서에 나오는 십자가의 사신은 지금 여기서 단번에 정해진 하나님의 거룩한 규정이 된다. 십자가는 모든 질문들이 다 해결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질문에 더 이상 회피하거나 거절해서는 안되는 것으로서 우리가 하나님께 살아 있는 한 묻고 있는 하나님의 요구다. 이 사신은 분명하게 그리고 점점 더 분명하게 신구약 성서 전체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오해됨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다. 그 사신은 하나님께 질문할 수 있고 또 질문하고 싶어하는 인간을 찾는다. 인간들은 각자의 작은 질문들이라는 처지에 있다. 그러면 어떤 질문들이 작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그 작은 질문들은 십자가, 즉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는 큰 질문 속에서 나타날까? "너희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사람들은 나에게로 오라!" 무엇을 위해? "나의 멍애를 너희 어깨 위에 걸며져라!" 이 말이 자명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또한 이 말은 가장 각성하고 가장 열렬한 사람들에게까지도 자명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비록 수천 번 깨달았어도 아직도 깨닫기가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것을 결코 깨닫지 못했다. 이제까지 우리는 성서의 독특한 점에 대한 첫 번째 서술을 했다.(p.145-146)

 

 

<계시, 교회, 신학>

계시
계시의 인식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실제적 관계의 인식, 그것은 거기로부터 힘과 존속을 가질 수 있는 거기에 근거되어 있는,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본성이나 이성이나 우리의 사랑의 이중적인 진리에 근거되어 있지 않고, 영원하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결단에 근거되어 있는 관계의 인식이라는 것이다. 그 관계를 아직도 하나의 문제로 여기는 사람, 계시를 부인할 수도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 행위, 이 개입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계시의 인식은 추상적 인간에 대한 추상적 하나님의 인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발견된 구체적 인간에 대하여 인간을 찾으신 구체적 하나님의 인식을 뜻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우세한 기선의 사건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인간의 인식을 말한다.(p.166-167)


우리는 계시 자신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말한 다음 계시를 우리의 사고의 출발점으로 되게 함으로써, 계시에 대해서도 오직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계시는 권위다.(p.167) 화해는 계시를 통하여 비로소 우리에게 알려져야 할 하나의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화해는 그의 계시 속에서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선사하시는, 능력있으시고 거룩하며 영원한 자기 자신을 무력하고 속되며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선사하는 하나님 자신의 진리다.(p.170)


우리는 계시를 성화의 행위, 곧 하나님이 이 인간에게 자기의 계명을 주시며, 그를 자기에게로 부르시며, 자기 자신을 위하여 요구하시며, 아무 공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자신이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하고 그를 위하여 살며 그를 위하여 고난당하며 그를 사랑하며 그를 찬양하도록 허락하는 성화의 행위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는 계시를 약속의 행위라고, 다시 말하여 하나님이 이 인간과 그의 온 세계에 희망을 주시고, 앞을 향한 전망을 주시고, 장차 올 그의 나라에 대한 기다림을, 하나님이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첫 번째의 것이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죽음과 고난과 울부짖음과 고통이 없을 이 나라 안에 있을 구원과 기쁨과 평화에 대한 기다림을 주시는 성화의 행위라고 부를 수 있다.(p.171)
계시는 모든 사건들 중의 사건이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의 말은 옳지 않다. 우리 자신의 실존은 이 사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실존보다 더 불확실하다.(p.172)

 

교회
교회는 하나의 기관으로 변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다. 곧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 진리와 은혜가 초자연적 권능과 인식과 힘의 특수한 총화의 형식 속에서 인간의 소유나 지배와 관리로 넘어가 버린 것이 아니다.(p.172) 교회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부여되었다고 생각하는, 계시를 근거로 특수한 확신들을 형성한, 특수한 결단들과 삶의 법칙들과 관습으로 되어버린, 사람들의 경건성과 도덕의 중심점이 된 인상들과 경험들과 자극들을 가꾸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자유로운 결사도 아니다.(p.173) 자연적 권능과 인식과 힘의 기구도 아니고, 현대주의적 개신교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자유로운 종교적 인격성도 아니다.(p.174)

 

오히려 이 하나가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유지하며, 이 하나에 있어서 교회는 참으로 크고 참으로 작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듣는다는 것이다. 교회가 단지 두세 사람으로 구성된다 할지라도, 이 두세 사람이 엘리트이기는 고사하고 평균치도 되지 못하며 오히려 인류의 배설물에 속한다 할지라도, 이것이 일어나는 거기에 교회가 있다. 이 두세 사람이 그들이 들은 것을 가지고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하며 아무 용기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거기에 교회가 있다.


또한 그들이 그 속에 살고 있는 주변세계와 사회 속에서 아무 영향력도 없고 의미도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말씀을 듣는 거기에 교회가 있다. 교회가 거짓된 용기와 거짓된 의미를 포기할 때, 다시 말하여 큰 숫자, 도덕적 자질, 행동주의적 프로그램, 외부를 향한 작용과 의미를 포기하고 교회를 세우고 유지하는 것,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신 것을 바로 또 열린 마음으로 함께 듣는 것을 신뢰할 때, 교회는 어디서나 즉시 참 용기와 참 의미를 얻을 것이다.(p.174)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신 것을 인간이 듣는다는 이 하나가, 그리고 이 하나만이 교회를 교회로 만든다. 이것이 일어나지 않고 단지 거룩한 교회기구가 작용하거나 종교적 단체가 활동할 때, 사람들을 너무 크게 신뢰하고 하나님을 별로 신뢰하지 않을 때, 거기에는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가 가장 큰 무리의 대중들이나 가장 뛰어난 인물들을 끌어들인다 할지라도, 가장 풍성한 삶을 전개하고 국가와 사회 속에서 크게 인정을 받는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p.175-176)

 

 

<교회와 신학>

 

신학은 계속 추구하는 신학이다. 선조들의 해명에 의하면 순례자의 신학이다. 이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형식화된 신학과는 다르다. 성취의 신학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나 성인들의 신학이 아니다-그러니까 시간 안에 특정한 입장에 있는 지상적 인간의 신학은 또한 은혜로 받는 것이다. 이것이 신학의 객관성이다. 계시다. 계시와 계시에 대해 봉사하는 신학이라는 양자의 특정한 형식, 곧 권위와 복종에 대한 이 형식은 특정한 입장에 상응한다.
영원히 편재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의 직접성 없이는 신학은 없다. 이 하나님의 말씀과 영 안에서 신학의 자유, 곧 오직 하나님에게 속한 믿음의 자유가 가능하다.(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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