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철원-신자 사후 바른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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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앙 연구가들/서철원

2009.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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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자 사후 바른이해

 

종말론의 중심기론이 천년기론이다. 죽음은 하나님께로 부터 분리이고 영과 육체의 분리이며 또 인간의 거주환경인 우주로부터의 분리이다. 죽음후란 과학은 영혼이 육체와 별도의 존재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 과학이 다 부인한다.

 

과학은 감각적인 기관에 의해서 대상들을 탐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이 감각에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죽음은 육체로 끝나고 그 이상에 대해서는 전혀 없는 것으로 과학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없는 것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특히 현대 의학에서 영혼이 없는 전통이 그대로 받아져서 지금 육체안에 독립적인 존재로서 영혼이 존재한다 하는 것에 대해서 거의 인정하지 않고 있다.


길버트 라일이라고 하는 20세기의 영국의 경험론 철학자에 의하면 “우리 몸 안에 육체하고 구분되는 독립된 별도의 존재가 있다고 하는 것은 마치 기계 안에 유령이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우리 안에 별도의 독립적인 존재가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은 마치 공장의 기계가 돌아가는데 그 안에 옛날처럼 유령이 들어 앉아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과학적으로는 전혀 불가능하다.”고 한다.

 
정말 과학적으로는, 감각기관을 통해서만 모든 걸 탐구하는가?  칸트에 의하면 물리학 시간의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기관이 상을 만든다. 사물의 이치를 즉 그 사물 자체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기관이 사물들을 볼 수 있도록 상을 만들어 준다.

 

그렇게 상이 이루어지는 것만 감각기관으로 좇아갈 수 있는 것이어서 그것만 과학의 대상이라 고 있다. 전반적으로! 그래서 심리학이나 의학에서 영혼은, 그것을 만일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두뇌의 기능, 작용일 뿐이지 별도의 독립적인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영혼이 두뇌와 별도로 활동할 수 있고 존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영혼은 출생하고  창조된다. 영혼은 그러기 때문에 육체의 사후에도 존재하고 또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러나 육체를 통한 에너지의 공급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의 습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생존시에 가졌던 모든 것이 다 기억을 갖고 있다. 우리의 몸을 완전히 신진대사를 한번 하는데 7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면 기억을 담고 있는 물질들이 7년이면 완전히 바뀌는데도 그 물질 자체에만 기억이 들어있다면 이게 완전히 바뀌어 버렸는데도 어찌해서 기억은 계속 존재할 수 있느냐?


자, 과학적으로 두뇌와 독립된 존재로서 영혼이 존재한다. 그리고 사후에도 존재할 뿐만 아니라 기억을 갖고 있다. 나아가서 이 영혼은 출생한다.  지금 현재 알려진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가 추정치이지만 1에다가 0을 66개 한 것 만큼 된다. 그런데 두뇌 안에 있는 뉴우런을 형성하는 그 결합들은  7에다가 0을 2,783,000개 붙인 것 만큼 이다.


 칸트가 18세기에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영혼이 인간의 지성의 능력으로 알 수 있는 세계는 이 감각기관으로 표상할 수 있는 세계 뿐이고 내세라든지 하나님이라든지 초월의 세계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인간의 이성의 능력으로는 저 영원의 세계를 전혀 알 수 없다.


세계는 어떤 사람도 경험해 보지 못한 통일의 원리.  우리의 경험을 통합하기 위한 통일의 원리로 그 체계를 구성하기 위한 한계개념으로 세계를 필요로 한다.   단지 경험을 통합하기 위한 통합의 원리로서 세계를 한계개념으로 체계 구성에 도입한 것이지 실제로 그런게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면 신은 무엇이냐? 이와 같은 모든 세계에, 우리가 경험하고 살고 있는 세계 내에 있는 모든, 전체를 하나로 통일하고 있는 통일의 원리,    이것은 체계를 구성해 주기 위한 한계개념으로 필요한 것이다.


세계나 신이나 이런 것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우리의 감각적인 기관을 통해서 세계나 신에 대해서 이런 총체적인 경험을 할 수가 없다.  칸트의 철학으로는 이런 존재에 대해서 도대체 있다 없다 말할 수 없다.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에 오면, 실천이성이란 말은 윤리적인 이성 도덕적인 이성이다.

 

혹은 윤리 공동체가 바른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데 그 바른 삶의 법칙을 제시해 내는 일을 하는게 실천이성비판이다. 우리의 윤리적인 행동, 사람으로서 행동하는 이 윤리적인 행동하는데 있어서 칸트는 이제 순수이성비판에서 지식에 대해서 도저히 알 수 없다고 하는 내세와 하나님과 자유의 개념을 도입한다. 인간이 우리가 덕을 닦고 살아야 하는데, 칸트는 의무감에서 하는 행동, 그것이 윤리적 의무감에서 하는 행동들이다한다.


이 세계에서는 칸트가 80을 살았는데도 그 바른 도덕을, 덕을 함양하는 데는 이 기간이 너무 짧다. 그러니까 내세가 있어야 되겠다. 하나님이 계셔서가 아니고 우리의 윤리생활을 바로 하려면 내세도 있어야 하고 또 하나님도 있어야 한다. 그것 뿐이다. 강제 아래서 선을 행한다면 그건 의미가 없다. 


결국 자유와 내세와 영원의 불멸,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가 요청된다. 이건 지식적으로 증명되는 상황이 아니고 요청된다. 그런 식으로 칸트는 하나님과 내세를 요청한다. 이건 증명되는 상황이 아니고 윤리 생활이 가능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요구되는 상황이다. 철학적으로도 내세를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과학처럼 부정확하고 불확실하다. 가장 확실한 건 하나님 말씀이고 하나님 계신다.

 

하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영혼이 사후에 존재한다. 그리고 죽으면 신자는 하나님 품으로 가고 불신자는 여기 음부라고 되어 있는데 지옥으로 간다.

 

자, 죽으면 영혼이 어디로 가느냐? 주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계신 그곳으로 간다. 그곳이 어디냐? 그렇게 증명을 하고 말하라 그러면 어렵다. 그러나 그 세계는 시간이 지배되고 있는 이 세계는 아니다. 그럼 은하계 밖이냐? 은하계 밖이면 그럼 시간이 없느냐? 또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시간이라는 것이 명암으로, 상태의 변화로 나타나니까 영혼은 육체를 벗으면 그와 같은 상태를 벗어난다. 그래 영원의 세계로 간다.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그러면 낙원하고 음부는 무엇이냐?  신자들이 죽으면 낙원에 가고 주님 오셨을 때는 천당에 가는 걸로 알고 있고, 불신자는 음부에 가고, 주님 재림하신 심판 후에는 지옥으로 가는 걸로 알아서 중간기 처소가 따로 있는 걸로 대부분 믿고 있다. 그런데 낙원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계신 곳하고 별도의 처소로 낙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상에 못 박힌 그리스도께서 강도를 향해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는데, 낙원이 천당과 별도의 곳에 있기 때문에가 아니다.

 
처음 낙원이 소실되니까 후대 유대교에서 낙원의 사상을 발전시켜서 하늘로 올렸다. 지상에 있던 낙원을 후기 유대교가 하늘로 올려서 낙원이 메시야의 처소이다. 그래서 낙원이 하늘로 올라가 형성되는데 메시야의 처소를 낙원이라고 말한다. 그 바로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그 사상을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하심으로 밑에 사람들이 즉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백성들이 다 듣고 있는데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하심으로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내가 너희들이 못 박은 내가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하신 것이다.

 

 바로 이 낙원을 사용하심으로 자기가 메시야이신 것을 백성들에게 선언하신 것이다. 그런 것이지 낙원이 천당보다는 증간지점, 우리가 아브라함이,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품처럼 아직 천당과 같은 상태 이전의 곳이 아니라, 죽으면 다 주님 계신 곳에 가지 낙원이란 별도 처소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음부는  지옥을 뜻한다. 음부와 지옥을 말하고 별도의 처소가 아니다.


죽은 자들의 세계란 인간의 인격에는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가 필연적인 구성요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육체가 없는 영혼은, 육체를 벗은 영혼은 산 자의 세계에서 끊겨있고 적극적인 활동을 못한다. 그래서 죽은 자에게 속한다. 그리스도의 품에 가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도 죽은 자들은 주님께로 간 영혼들은 죽은 자에 속하지 산 자에 속한다고 할 수 없다.


중간기는 있으나 중간기 처소는 없다. 그것이 지금 말하려고 하는 요점이다. 중간기 상태는 있으나 중간기 처소는 없다. 개인 영혼이 죽을 때부터 주님 오실 때까지가 중간기 상태이다. 별도의 처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자, 그것이 바른 기본이고 죽으면 죽은 자가 일단 산자의 세계에서 끊긴 것이니까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공중에 배회하는 것도 아니고 바로 저쪽 가야 할 자리로 간다.  인간의 영원한 운명은 죽은 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입고 살아 있는 생존기간에 결정이 된다.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자기 갈 곳으로 간다. 신자는 주님의 품으로, 악한 자는 다 지옥으로 가지 중간 상태는 없다. 그런데 억울하게 죽은 경우, 그런 경우는 귀신이 그 한을 가지고 죽은 사람의 경우에 그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명분을 얻고 그 일을 하는것이지 사람의 영혼이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영이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악령들이 있는데 그 악령들이 그렇게 죽은 사람들의 한을 받아가지고 지상에 산 사람들에게 악을 행사하는 것이지 산 사람의 영혼이 죽으면 귀신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면 사무엘서에 사무엘을 불러 올리지것은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성경이 구약의 그러한 현상까지 부인하는 게 아니다. 인정은 해도 그렇게 하는 것을 금했지 그러한 현상까지 부정하지 않았다. 영들의 활동은 인정을 한다. 귀신이 신접한 자의 영매에 의해서, 주술에 의해서 귀신이 사물엘의 형태를 입고서 나타난다. 예언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무엘 자신이 예언한 것이 아니라 사무엘이 말한 것처럼 사무엘의 형태로 예언을 한 것이다. 사무엘의 영이 땅으로 부터 올라오는 것이 아니다.


 신자들, 선한 사람의 영혼은 주님의 품으로 가고 악한 자들의 영혼은 지옥으로 가지 이 산 자의 세계를 넘나들며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칸트에 의하면, 칸트가 제일 강조하는 것이 윤리이다. 물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제일 훌륭한 저서이고 그 책이 근세를 만든 분수령이다. 칸트 이전의 신학하고 칸트 이후의 신학은 180도 반대극에 서 있다. 근세 신학 이후에 전개되는 것을 알려면 칸트를 이해하지 않고는 도대체 근세신학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고 왜 그렇게 내용이 바뀌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근세철학과 신학에서 분수령이 칸트이다.

 

그런데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으로 인간의 이성이 알 수 있는 영역을 제한해서 이 감각세계, 시간과 공간의 세계로 제한을 했다. 그런데 칸트가 그렇게 한 기본 이유 중에는 오히려 윤리 세계의 생활이 바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그와 같이 한 것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중심점은 순수이성비판, 즉 지식을, 순수한 지식을, 과학적인 지식을 탐구하는 그 영역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인간이 바르게 살 수 있는가 하는 윤리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칸트 만큼 의무를 강조하고 윤리의 법을 도덕을 강조한 사람이 없다. 그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칸트 속에 칼빈이 들어있고 또 둘이 서로 영향을 주었다. 한쪽은 16세기 사람이고 한쪽은 18세기 사람인데, 200년의 차이가 있는데도 그런 소리를 했다. 그만큼 칸트가 윤리를, 법을 강조를 했다.


그러기 때문에 칸트에게서 영향이 한 세 가지로 나타나는데 기독교 영향으로는 슐라이어막허가 그와 같은 신학을 했고 슐라이어막허의 윤리주의 학자들이 있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의 영향을 입은 사람들이 윤리의 진보를 많이 강조하게 되었다. 그래서 죽은 후에 이것이 운명이 완전히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죽은 후에도 발전하고 윤리를, 인간의 덕을 함양하는 진보의 단계가 있다고 주장을 했다. 19세기 이야기다.

 

죽을 때 일이 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계속적으로 완전한 운명을 결정하는 일이 차후에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걸 반대한다. 전통적인 우리의, 특별히 개혁주의 입장에 의하면 살아있을 때, 중생 후의 성화의 과정이 어떠했든지 간에 죽는 순간 하나님의 그의 특별한 영적인 은혜의 역사로 성화를 종결시키고 완결시킨다.

 

그래서 주님 앞으로 갈 때에는 완전히 죄과를 벗고 죄의 몸을 벗고 깨끗해진 영혼으로 주 앞에 간다.  죽은 후에도 지상에서 성화가 계속되는 방식으로 성화가 진행되지 않는다. 죽을 때 하나님께서 그 순간 특별한 하나님의 역사로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켜서 완전하게, 깨끗하게 해서 주님의 품으로 데려 가신다.

 

그때는 비록 어린 아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을 듣지 못한 어린 아이라도, 선택된 경우는 성령의 특별한 공작에 의해서 그를 중생시켜서 완전히 깨끗하게 해 가지고 주님 품으로 간다. 그러기 때문에 죽은 후에 성화같은 진행이 주님 품 안에 가 있는 동안, 천국에 가 있는 동안 진행되지 않는다. 그런데 윤리주의자들은  죽은 후에도 계속적으로 덕의 진행이 이루어진 다음에 사후에 완전한 운명이 결정된다.

 

 18세기가 분수령인데, 개신교의 신학자들이 신학하는 원칙을 정했다.  신약의 복음을 그 당대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 그것이 신학작업이다.  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복음의 내용을 그 당대의 언어로, 그 당대의 사상으로 번역하는 것, 그래서 그 당대의 사람들이 알아 듣도록 하는 것이 신학 활동의 기본작업이라고 정했다.


이 원칙 이후 때문에 18세기 이후에 그렇게도 많은 신학이 일어났다가 사라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철학이 나올 때마다 그 철학에 맞추어서 신학을 새로 만든다. 칼 바르트도 그렇고, 불투만도 그렇고, 틸리히도 그렇고, 지금의 몰트만도 그렇고, 판넨베르크도 그렇고, 다 철학 없이는 생각할 수가 없. 다 그 배경이 전부가 철학이 결정하고 있다.


연옥은 로마교회가 중요한 교리로 확정을 하고 있지만 연옥교리는 로마 교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희랍정교회도 갖고 있다. 희랍정교회가 갖고 있다는 말은 초대교회 교부들에게도 이 연옥 사상이 있었다는 말이다. 근자에 와서 연옥 사상이 생긴 것이 아니고 초대 교부들, 그레고리, 대 바실, 그런 사람들에게 벌써 연옥 사상이 있었다.

 

 로마교회는 계속적으로 교리를 발전시켜 왔는데 이 희랍정교회, 동방정교회는 5세기가 제일 분수령이다. 451년 칼세돈 공의회가  신학자들의 활동의 최고 피크이고 그 이후에는 거의 없는 것처럼 신학 활동이 없어진다. 그 이후에는 완전히 서방측으로 논의 주도권이 넘어온다.

 

그런데 787년 제 2니케야 공의회는 거의 신학활동이 없다가 동방교회에는 그전에 이미 형성된 교리만 붙여가고 있기 때문에 자기네들이 정교회라고 주장한다. 정통교회 즉 희랍정교회는 연옥에서 정화의 과정을 밟는다는 것은 인정은 하나, 로마교회는 지상에서 하는 행동이 그 연옥에서의 정화과정과 시기를 결정한다고 하는 것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로마교회는 미사와 선행과 많은 헌금을 통해서 연옥에 가 있는 자들의 정화기간을 단축하고 천국으로 들일 수 있다. 그러나 희랍정교회는 지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선행이라든지 교회의 많은 헌금이라든지,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큰 일을 하는 것이 이 연옥에 가 있는 사람들의 정화과정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도 보면 죽은 자가 바로 지옥에 가고 또 나사로가 바로 아브라함의 품에,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갔지, 중간기 처소에 가서 정화하는 기간을 거치지 않았다. 그런데 완전히 선한 사람들은 천국에 가지만 세례받고 완전하지 못한 사람은 연옥으로 가고, 그래도 악한 자들은 지옥으로 가고, 그리고 이제 세례도 받지 못하고 어렸을 때 죽은 선악을 가부간에 행하지 않은 어린 아이들은 림보에 간다.

 

로마교회에 가면 천국, 연옥 림보, 지옥, 세례도 받지 않고 선악을 행하지도 않은 어린 아이들은, 세례도 받지 않았으니 구원받을 수 없다. 로마교 교리에 의하면! 그렇다고 지옥으로 보낼 수도 없기 때문에 림보로 보낸다. 림보는 적극적인 악과 고통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자연적인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림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이전에 죽은 사람들, 구약 교회 조상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흘리지 않았기 때문에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 천당에 못갔다.  조상들의 림보에 가 있어요. 그래 또 그럴 만한 성경구절이 어디에 있느냐


베드로전서 3장 18절,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바울에게도 사로잡힌 자들을 땅에 내리셨던 그가 하늘로 올리시면서 사로잡힌 그들을 하늘로 데려가셨다고 되어 있다. 조상림보라고 하는 것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좋은 것이다. 왜 그들이 천당 못 갔느냐? 아직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흘리기 전에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 천당 못 가서 조상림보에 가 있다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셨을 때  영으로 옥에 있는 악한 자들에게, 전파했다고 하는데 바로 이때 주님이 그들에게 가서 옥 문을 열고 조상림보에 갇혀있는 아담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 이전에 죽은 유대인들을 다 끌어 내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는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지금부터 2,000년 전에 흘려졌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영의 권능에 의해서 그의 피와 그의 의가 그의 조상, 택한 백성들에게 전가되게 하심으로 물론 그들의 죄도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용서되었지만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서 그의 피의 공로가, 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의 의가 구약 백성에게 전가되게 하심으로 그의 공로에 의해서 하나님 품으로 간것이다. 시간적으로 사고하는 현대인들에게 로마교회의 조상림보가 더 설득력이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흘리기 이전에도 아담과 셋과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택한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가 역으로 진행되어서 하나님의 품에 가 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기 이전에라도!

 

그런데 조건적 영생설이라는것이 있다, 본래 사람은 다 죽도록 창조되었는데 예수를 믿은 사람은 영생에 이르고 믿지 않은 사람은 멸절된다. 또 조건적 영생설과 비슷한 말이다. 본래 사람이 죽지 않도록 창조되었지만 죄 때문에 다 죽게 되었고, 멸절설, 죄 지은 사람은 다 죽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죄 지은 사람으로는 살 수 있는 사람이 없고, 그거나 멸절설이나 같은 이야기이다. 예수 믿는 사람을 구원에 이르고,  믿지 않는 사람은 멸망에 이른다. 이 설에 의하면 얼마나 좋은가? 예수 믿으면 영생하지만 예수 안 믿으면 끝나니까 뭐 세상에서 마음껏 살다 죽어도 두려울게 뭐 없 끝나는데, 다. 멸절하는데, 죽으면 멸절이 아니다. 멸절하고 죽은 것 하고는 다르다. 오히려 죽으면 적극적인 행동이다. 존재방식이 변하다.

 

이런 것들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에 배치, 만일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선행을 하고 하나님을 봉사하는 사람이 영생에 이름이 합당하다면 하나님을 배척하고 훼방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끝까지 거부한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 의해서 영벌을 받아야 맞지 그냥 죽어버린다, 멸절해 버린다고 하는 것은 맞는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인들의 사고에는 죽으면 무로 돌아가는 것이 끝이다. 죽음이란 모든 것의 마지막이다. 죽음이 무엇이냐? 하이데거의 강조가 죽으면 무로 돌아간다. 아무 것도 없는 거다. 열반으로 되돌간다.  열반이라고 하는 곳은 우리처럼 영원히 있어서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흐름이 불교에 있어서 도는 것이다.

 

그래 영혼이 저 극락세계로 간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민족 사상을 원효가 토착화해 놓은 것이고, 불교 이름으로! 본래 불교 용어로는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흐름만 있다. 그것이 해탈하면 더 이상 사이클에서 놓여나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 형태로 구애받지 않는다. 그래 의식이 소산되는 것이다. 죽음으로 의식이 흩어지고 없어진다.

 

완전히 의식의 흐름이! 그것이 입적이고 열반이다. 그것이 소위 불교가 말하는 우리 무식한 한국 백성들이 믿고 열심히 시주하게 한 그 극락세계에 가는 것. 없어지는것. 불교에서는 죽으면 끝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선인들이 영생에 이른다고 믿는다. 영원한 상급에 이른다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끝까지 거부한 사람들은 영벌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하다고 믿는다.

 

그런데 지옥이 정화처이기 때문에 종말에 가면 지옥이 소실된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이것이 근세에 20세기에 들어와서 칼 바르트의 신학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초대교회 부터 이 사상이 있었다. 오리겐에 의하면 하나님이 만유를 회복하신다. 하나님의 지으신 존재 중에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지 못할 존재가 아무도 없다.

 

마지막에 모든 것을 회복하시고 완성하실 때에 심지어 사탄까지 정화되어서 그 완성된 단계에 포함된다. 그래서 지옥은 정화하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를 완전히 회복하신 그 때에  지옥에 있는 모든 영들이 다 정화되어서, 원상 회복이다.  사탄까지도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한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의 역사의 드라마가 끝난다.

 

칼 바르트가 20세기에 와서 구원론을 폈는데, 전통적인 개혁신학에 선택교리가 있다. 선택교리, 이것 때문에  개혁교회와 개혁신학이 욕을 먹는다.  그 때 칼빈이 죽었을 때 교황 이름이 피요스네스인데 그 사람이 칼빈이 죽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 교황이 나도 내 신하 중에 저와 같은 이단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칼빈이야말로 정말 돈에 욕심 안부리고 복음만을 위해서 일생을 자기 뼈를 갈아서 바친 사람이다.

 

한번은 카디날이 칼빈을 방문했다. 처음부터 자기를 추기경이라고 소개하지 않고  제네바의 삐에르 성당, 교회당과 자기의 집들을 다 보여 주었다. 너무 비참하게 살고 있기에 칼빈이 금으로 된 권총을 하나 주니 카디날이 그걸 받아서 헌금함에 넣었다. 그리고는 자기가 카디날이라고 소개를 했다. 그러자 칼빈이 크게 사과를 했다.

 

 제가 추기경이신 줄 알지 못하고서 추기경의 존귀에 합당하도록 처음부터 예우하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했다. 그런데 칼빈은 로마교회도 싫어하고 루터교회도 싫어하고 복음주의요 감리교 계통도 싫어하고 다 싫어한다. 그의 선택 교리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20세기에 와서 칼 바르트가 완전히 뒤집었다. 칼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선택은 그렇게 악한 자와 선한 자와, 구원 얻을 자와 구원 얻지 못할 자와, 야곱과 에서로 나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과 함께 인류 전체를 선택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기된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 유기됨으로 모든 인류가 다 유기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선택하므로 모든 인류가 그 안에서 다 선택되었다. 그러므로 칼 바르트에게 있어서 선택교리는 밝은 태양불이지 어둠이 없다. 모든 인류가 다 선택되었다. 그러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과 교회 밖에 있는 사람과의 차이가 무엇이냐?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선택된 사람인 줄 아는 것이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복음의 전달이라고 하는 것은 선포하고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서 알게 해 줘야 한다. 그들도 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다 선택되었는데 누가 유기되느냐. 다 선택되었는데 어느 종교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인가? 그래서 종교간의 대화가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이 사상에 근거해서 로마교회도 종교간의 대화를, 교회 밖의 그리스도,  칼 라너가 참 비상한 정력가 이다.

 

 윈스터 대학에서 가르쳤는데, 칼 바르트가 14권의 조직신학 책을 썼다. 그런데 이 사람도 14권을 아티클들로, 제목들로 썼다.  이렇게 굉장히 방대한 책을 썼다. 그 중에 무명의 그리스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다 가증적으로 그리스도인, 다 이미 은혜에 접해 있는 사람,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다. 라너에 의하면 이성의 자기를 계시하신다.

 

이성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모를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것이 20세기 로마교회 신학자의 논리이다. 20세기 개신교 신학자인 칼 바르트의 논리도, 논의가 시작이다. 그러면 모든 인류가 다 선택되었다. 지옥에 가서 마지막에 멸망으로 끝맺음 해야 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바르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지옥이 정화처로서 지옥이 종말에 의무를 다한다. 그래 지옥이 종말에 소실된다. 그래 다 불로 정화해서, 악을 제거해 가지고 만유가 회복되었을 때 거기에 동참할 수 있게 했는데 지옥이 더 이상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 종말에 지옥은 없어진다. 이것이 만인구원설의 결론이다.

 

만인구원설이 되면 예수 안믿어도 된다. 지옥에 가서 고생 좀 해도 최후에는 다, 사탄도 정화되어서 완전히 창조에 회복되는데  회복된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 믿으려고 필요가 없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복음으로 구원할 자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복음 외의 방법으로 또 한번의 구원의 길을 내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로 복음을 내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예수의 구원을, 이 방법 외에 다른 물리적인 방식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바울이 복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세라, 권능이라고 했는데 로마서 1장 16,17절에 복음의 충족성에 배치가 된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 외에 다른 방법으로 구원이 또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경륜, 구원의 경륜을 근본적으로 해치는 것이다.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의 사람들은 또 구원에 이르는 길은 이스라엘 밖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셨고, 그 이후의 구원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셨다. 그러니까 더 이상 구원의 방식외에 다른 방식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그의 영원한 경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그의 작정에 전적으로 배치된다. (

פרופסור  

שְׂצְליוּ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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