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대신 십일조를 지고 가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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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정신 나갔어!

2012. 12. 5.

 

십자가 대신 십일조를 지고 가는 교회 (신성남)

 

 

 

많은 성도들은 가톨릭과 유대교는 물론 전 세계 대부분의 교회에서 하지 않는 현대 십일조를 왜 미국의 일부 교회와 한국교회만이 유독 강조하고 있는지 큰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율법의 십일조는 그 임무를 완료하여 종결되었고, 중세 십일조는 그 어처구니없는 부당성으로 인해 스스로 폐지되어 강물처럼 멀리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많은 교회는 그 흘러간 물을 한 줌 떠다가 부패한 역사의 물레방아를 다시 돌려보겠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글에서는 아직도 십일조 존속을 주장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그 정당성에 대해 간략히 재론하고자 합니다.

율법의 십일조와 중세 십일조

먼저 구약 율법의 십일조가 왜 생겼는지 그 목적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구약 의무적 십일조의 우선적 역할은 '성전 제사 제도'에 기인합니다. 가나안 정복 당시 농사일이 아닌 제사직을 수행해야 할 레위 지파만이 토지 분배를 받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나머지 지파들은 '토지소산'의 십 분의 일을 성전에 가서 레위 제사장들에게 현물로 바쳤습니다.

이는 제사 업무가 국가 행정의 최우선 순위에 있던 공적 직무이었으며 오직 '신정국가'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십일조의 다른 부가적 기능을 보아도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을 주고 남은 재원으로 가난한 과부나 나그네를 돌보고 또한, 일부는 성전 관리비로 충당했습니다. 이 모두가 국가적 복지나 관리 차원에서 한 것입니다. 따라서 십일조를 구약 유대 지역의 특수한 종교적 세금으로 보는 것은 매우 타당합니다. 실제 십일조와 유사한 형태의 세금이 이스라엘 주변의 다른 고대 근동 국가에도 있었습니다.

물론 율법 이전에도 아브라함이나 야곱의 십일조가 성경에 언급되고 있지만, 이는 일회적인 것이었으며 의무적 십일조가 아니므로 현대 십일조와는 크게 다른 별개의 사안입니다. 그리고 신약 초기 교회에서 일부 교부들에 의해 간헐적으로 어떤 종류의 십일조가 제기되었다고 주장하더라도 그것은 율법에 규정한 본래의 십일조가 아니라 마치 후대의 중세 십일조처럼 임의로 '변형된 십일조'임을 밝힙니다.

현대 십일조 논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사도들의 교회와 신약 교회에 구약 율법에 따른 십일조는 결코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걸 어떻게 단정하냐고 반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대답은 사실 초등학생이라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아는 대로 주후 70년 헤롯 성전은 로마군에 의해 포위되어 처참하게 파괴되었고 당시 수십만의 거주민들이 몰살했습니다.

신정국가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따라서 더는 성전과 제사장이 없는데 어떻게 십일조를 바칠 수가 있겠습니까. 설사 누가 일부러 먼 예루살렘까지 가서 꼭 바치고 싶더라도 기술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율법의 십일조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세기 동안 잠잠하다가 한참 나중에 교회가 점차 비만해지자 마치 몸속의 종양처럼 새로운 '변종 십일조'가 등장했습니다. 구약 십일조를 제멋대로 변형하여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냥 각 지역 교회에 와서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미 성전과 제사가 사라진 지 아주 오래인데 과거처럼 다시 현물 십일조를 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법령으로 강제성을 지니게 된 것은 겨우 주후 800년경 샤를레망(Charlemagne) 대제 때의 일입니다. 어째 그 모양새와 하는 행동이 요즘 한국 교권주의자들의 주장만큼 억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십일조를 정당화할 만한 성경적 근거는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배부른 종교 지도자들의 자의적 해석과 탐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 결과 중세 교회 십일조는 종교개혁의 강력한 철퇴를 맞고 안개처럼 사라졌습니다. 심지어 현대 가톨릭조차 그런 억지 십일조의 부당성을 인정하고 스스로 폐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위 가톨릭을 개혁한다고 나온 한국의 개신교가 이런 중세적 십일조에 다시 몰입하고 있으니 정말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가 외적으로 성장하면 직분자들의 부패와 타락을 동반하고, 그 악한 열매는 항상 헌금을 많이 걷어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모습으로 표출되었습니다. 말라기 시대, 바리새인 시대, 중세 시대, 19세기 영국 교회, 그리고 작금의 한국교회가 바로 그런 시기입니다.

십자가 사역을 대적하는 십일조의 부활

우리는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신 말씀에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전을 헐라는 것은 구약 제사 제도의 종결과 완성을 의미합니다. 성전이 없으면 제사도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 십일조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성전 제사 제도를 유지하는 것이고, 그 제사는 십자가 사역을 예표하였다는 점에서 십일조의 역할 역시 십자가 사역으로 완결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는 더는 십일조가 전혀 언급되지 않고 단지 연보만이 강조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구약 십일조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그 외형적 이유가 제사이든 구제이든 결국 그 근본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 이웃 사랑의 정신이 신약에서는 연보로 계승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이 십일조를 하라고 하셨으니 우리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이 할례를 받았으니 우리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만큼 용감 무식한 주장입니다. 십자가 사역 이전까지는 예수님 역시 십일조는 물론 할례와 안식일과 절기 등 구약의 율법을 모두 지키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율법의 십일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지금도 중보적인 구약 제사 제도가 필요하다는 억지 논리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교권주의자들도 율법의 원칙에 따른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는 감히 직설적으로 주장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수십 년 동안 고심해서 겨우 만든 논리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하자'는 것입니다. 참으로 살다 살다 이렇게 미끌미끌하고 요상한 논리는 처음 봅니다. 구약 율법의 십일조 자체가 의무적이며 강제적인 것인데 무슨 '자원하는 십일조'가 다 있을까요. 자원하는 십일조란 더는 십일조가 아닙니다. '자원하는 세금'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는 마치 붕어가 없는 붕어빵처럼 모조품일 뿐입니다. 더구나 성전과 제사장이 필요 없는 신약 교회에 무얼 하겠다고 그런 쓸데없는 자원을 해야 합니까. 이는 언어의 조잡한 유희에 지나지 않으며 중세 십일조보다 더 질이 나쁘고 그 의도가 더 간교합니다.

무슨 근거로 사도들조차 하지 않은 '현금 십일조'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성전도 아닌 교회에 바쳐야 합니까. 중세 십일조가 그나마 '변형적 십일조'라면, 한국교회 십일조는 아예 '기형적 십일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세교회는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었는지 그래도 율법대로 '토지소산'인 '현물 십일조'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모든 소득'에 대한 '현금 십일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원래 율법에 따르면 목수나 이발사처럼 서비스업의 소득에는 십일조가 부가되지 않았습니다. 토지를 배당받은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소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여기에 있습니다. 율법의 십일조는 무조건 '소득이 있기에 내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정복 시 '토지를 배당받았기에 내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 십일조는 '토지소산'의 십분의 일로 명확히 제한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교회에서 누가 무조건 '소득의 십일조'를 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아무런 성경적 또는 논리적 근거가 전혀 없는 종교적 사기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상당수 교회들은 여기에 '자원하는'이라는 바리새적 누룩을 슬쩍 발라 놓고 신도들을 오도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부터 '힘에 지나도록' 솔선수범해야

그래서 필자는 한번 역으로 묻고 싶습니다. 그런 유치한 논리라면, 귀족 목사들에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재산의 반을 거룩한 교회에 바치라고 권한다면 그들은 뭐라고 대답할지 정말 궁금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데 왜 더 안 바칩니까. 그러면 아마 그들은 성경 어디에 재산의 반을 바치라는 말이 있느냐고 얼굴을 붉히며 반발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자원하는 십일조'란 가르침도 절대로 없습니다. 반면에 사도들은 그 어떤 형태의 십일조 대신 단지 '힘에 지나도록, 기쁘게, 그리고 자원하는 연보'를 가르쳤습니다. "내가 증언합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하였습니다(고후 8:3)."

그런데 참 희한합니다. 요즘 귀족 목사들은 십일조는 죽기 살기로 강조하면서 정작 그 십일조의 중요한 용도인 구제는 별로 언급을 안 합니다. 웬만해서는 '힘에 지나도록' 구제(연보)하라고 설교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 설교를 자주 들어 보셨나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십일조는 얼마든지 강조해도 자신들에게 별로 무탈하지만, 이 '힘에 지나도록' 하는 구제 설교는 자승자박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정말 글자 그대로 힘에 지나도록 구제하려면 자신들은 모두 마치 중세 수도사처럼 소박하게 절제하며 살아야 합니다. 과연 힘에 지나도록 구제하고 난 후에도 고급 승용차를 탈 수 있을까요. 수십억대의 재산, 고가 주택, 해외 나들이, 자녀 유학, 그리고 호의호식 등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온갖 부와 권력이 정당화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위선이 되고 기만이 됩니다. 그러니 그런 설교를 감히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종교 상인들은 체질상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구제 생활을 할 능력도 없고 또한 그리 할 의사도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교회는 더욱 철저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허구한 날 이미 유효 기간이 끝난 십일조를 가지고 잔 수 부리지 말고, 사도들의 권면대로 '힘에 지나도록' 하는 구제를 직분자들부터 성실하게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귀족 목사들도 저절로 사라질 것이고, 대형 교회를 만들겠다고 무리하지도 않을 것이고, 아울러 고생길이 뻔한 교회 세습도 굳이 안 할 것입니다.

하여튼 주변에 혹시 필요 이상으로 부유한 목사를 보시면 일단 '힘에 지나도록' 하는 구제를 지극히 소홀히 하는 삯꾼 목사로 의심해도 무방함을 분명히 알려드립니다. 특별한 예외는 다소 있겠지만,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자면 사실 신도들은 직분에 관계없이 결코 큰 부자로 살 수가 없습니다. 힘에 지나도록 주고 나누기 바쁜데 언제 부를 쌓을 여유가 있겠습니까.

신도의 개인적 구제가 중요하다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과연 교회가 열심히 십일조를 걷어 신도들이 궁핍할 때에 정말 열심히 도와주는가 하는 점입니다. 실직한 내 동생, 파산한 처남, 학비가 없는 조카, 비정규직에 힘든 외삼촌, 셋방살이 하는 고모, 은행 빚에 허덕이는 시동생, 그리고 홀로 사시는 이웃의 독거노인을 얼마나 도와주던가요. 그런데 이들을 외면하고 교회에 십일조만 잘 바치면 고르반(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다고 만족하십니까. 그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신도들이 먼저 자신의 형제와 가까운 이웃을 손수 돌보기 원하십니다.

모든 구제를 교회에서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내 형제나 친척까지 그 사정을 알아 일일이 직접 돕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교회가 구제에 힘쓰는 것은 옳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구제 전문 기관은 아닙니다. 따라서 신도들은 개인적으로도 열심히 구제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너무 비대해진 중대형 교회라면 이미 이천 년 전에 시효가 말소된 십일조 대신에 그저 교회 운영에 필요한 약간의 연보만 하시기를 권면합니다. 반대로 미자립 교회나 작은 교회에는 가능한 많은 연보를 하십시오. 그리고 내 주변의 친인척과 친구들과 이웃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생계를 걱정하는 사촌에게 우선 쌀 한 가마니라도 보내 주십시오. 절약하며 고생하시는 형수님께 반찬값이라도 자주 쥐어 드리십시오. 이번 휴가 때는 장모님을 모시고 꼭 치과로 가십시오. 해산한 직장 동료에게 아기 옷을 들고 찾아 가십시오. 월세를 못 내 한숨 쉬는 후배에게 작은 봉투를 전해 주십시오. 가난한 이웃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십시오. 그리고 끼니를 거르는 기아 국가 어린이를 후원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가정이 변하고, 친인척이 변하고, 직장이 변하고, 그리고 이웃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진정한 십일조의 정신이며 동시에 신자가 기쁘게 져야 할 십자가의 짐입니다. 왜 요즘 전도의 문이 잘 안 열릴까요. 신도들의 피땀 어린 헌금으로 고작 직분자들이 호사를 누리고 툭하면 건물이나 삽질할 궁리만 한다면 그런 교회를 누가 기뻐하겠습니까.

모든 헌금은 각자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

신도들은 이미 충분한 세금을 국가에 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세적 십일조로 이중과세하는 것은 매우 부당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자기 십자가를 잘 지고 가라고 했더니 시킨 일은 제대로 안 하고 엉뚱하게도 철 지난 십일조를 무겁게 지고 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업 방향과 예산과 관심과 설교가 온통 이 십일조에 쏠려 있습니다. 과연 요즘 중대형 교회 직분자들의 기름진 모습에서 정말 십자가의 정신이 보이십니까.

한국교회 초기에는 십일조란 매우 드물었고 이는 믿음이 좋은 극소수의 직분자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아주 특별한 헌금으로 생각했습니다. 십일조를 몰라도 교회 생활에 아무런 불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요. 십일조 안 내면 마치 정상적인 신자가 아닌 것처럼 교회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교권주의자들의 꼼수입니다. 따라서 십일조 개혁 없는 교회 개혁은 공허합니다. 한국교회는 온통 돈으로 부패하였고 그 안에서 기생하는 종교 업자들의 비대한 밥줄이 바로 이 중세적 십일조입니다.

이제 그 썩은 줄을 끊어야 합니다. 신약 교회에 십일조란 결코 없습니다. 개혁 교회는 흘러간 저질 유행가보다도 더 천박한 그 십일조 복 타령을 그만 멈추고 바울의 가르침을 성실히 실천해야 합니다. "각자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 : 7)."

한국교회는 이렇게 명쾌하고 훌륭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왜 딴청을 부리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십일조 논쟁은 단순한 신학 토론이 아닙니다. 이는 진실과 거짓이 겨루는 비장한 영적 싸움입니다. 여기서 양측이 모두 함께 옳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양의 탈을 썼으나 속은 늑대인 거짓 목동들에게 절대로 속지 마십시오. 십일조를 복의 근원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십일조는 단지 예수님 십자가 사역의 그림자인 성전 제사 제도를 밑받침하던 '한시적 도구'였을 뿐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에게 진정한 복은 십일조가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샬롬!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3)."

(필자 주: 십일조에 대한 본 칼럼은 필자의 극히 개인적 견해를 정리한 글입니다. 따라서 만일 이글에 어떤 신학적 오류가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은 <아멘넷>의 편집 방향과는 관계가 없으며 모두 필자의 책임으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필자와 견해를 달리하는 반대 의견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댓글로 알려주시면 비록 많이 부족하지만 성심껏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성도님들의 허심탄회한 조언과 질책을 기대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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