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기복신앙을 문제 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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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정신 나갔어!

2014. 9. 26.

 

왜 기복신앙을 문제 삼는가?

 

기독교 복음의 진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행하면 복을 받는다. 복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는데, 31절을 보면 “이 모든 것”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즉 육신적 삶에 필요한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그리하면”이 말해 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그런데 많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믿는 사람은 무조건 복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그럴듯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은 외면하고 복을 받는 데에 역점을 둔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그들은 복을 받기 위해서 믿고 복을 받기 위해서 기도한다. 이러한 신앙을 우리는 기복신앙이라고 말한다. 기복신앙은 샤머니즘, 즉 무속신앙과 별로 다르지 않다.

 

샤머니즘에서는 자기는 노력하지 않고 건강하게 해달라고 성공하게 해달라고, 다시 말해서 복을 달라고 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을 외면하면서 육신의 복만을 구하는 신앙은 기독교 복음의 중심으로부터 아주 먼 샤머니즘적인 기복신앙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내 육신의 복을 구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 반대로, 남을 위해서 예수님처럼 낮은 데로 나아가고, 나의 것을 나누어 주고, 나를 희생하고,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복음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 우리의 기도가 내 육신의 복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여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기도여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기복신앙을 문제 삼는 이유는 기복신앙에 빠질 때 육신의 일에만 관심을 갖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복신앙의 문제점을 지적해 왔지만, 갈수록 기복신앙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 지금 한국교회는 무엇보다 먼저 기복신앙을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바로 설 수 있다. 이 중대한 일을 위해서 신학자들, 목회자들, 그리고 교인들이 힘을 합해야 한다. 샤머니즘의 힘 샤머니즘은 오래 전부터 한국인의 민간신앙이 되어 왔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의 문화 안에 스며들어와 있다. 우리는 주변에서 집을 지을 때나 새 점포를 낼 때, 심지어 자동차를 샀을 때도 고사를 지내는 것을 흔히 본다. 돼지 머리를 놓고, 돼지 입에 돈을 끼워놓고, 절을 하며 복을 빈다.

 

그리고 복을 달라고 조상에게 빈다. 이 조상숭배에서 우리의 제사의식이 나왔다. 이 제사로 인해서 명절에 민족 대이동이 일어난다. 이렇게 샤머니즘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 이토록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샤머니즘은 우리의 삶의 형편을 우연, 운명, 조상, 집터의 탓으로 돌린다. 운대가 안 맞았다든지, 그것은 운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잘 되는 것도 못 되는 것도 조상 탓으로 돌린다.

 

조상을 명당에 모시면 발복한다. 건강이 안 좋은 것은 조상을 잘 못 모셨기 때문이거나 신이 노했거나 귀신이 들어왔거나 집터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운을 강조하고 조상이나 귀신의 탓으로 돌리는 샤머니즘에서는 내가 잘 살거나 못사는 것이 나의 노력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무조건 산신령에게 기도하면, 조상을 잘 모시면 복을 받게 된다고 믿는다. 샤머니즘에는 외래 종교를 기복신앙으로 바꾸는 힘이 있다. 삼국시대에 전래되어서 1,600년 이상 이 땅에 자리 잡은 불교는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아서 집착하지 말라는 불교의 기본 교리와는 맞지 않는 복을 비는 기복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때때로 절에 가서 치성을 드리고, 특히 시험을 보기 전이나 시험 당일에 어머니들이 절에 가서 합격하게 해 달라고 빈다. 절 뒤편에 가면 산신각이 있는데, 이것은 산신을 섬기는 샤머니즘의 영향이다. 그리고 무당의 집에 불상이 있는 것을 흔히 보는데, 여기서는 불교가 샤머니즘의 도구가 된 것 같이 보인다.

 

샤머니즘은 한국의 기독교 신앙 역시 기복신앙으로 바꾸었다. 그리스도교에는, 불교와 달리,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가르침이 있다. 그런데 샤머니즘에서도 기도를 중시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를 전해준 미국 교회에는 새벽기도회가 없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 새벽기도회가 성황을 이루는 것은 어머니들이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가족을 위해서 빌던 샤머니즘적 습속의 영향이다.

 

집착을 버리라고 강조하는 불교에 복을 비는 기복신앙의 옷을 입힌 샤머니즘이 자체 안에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를 기복신앙으로 물들이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한국교회와 기복신앙 샤머니즘은 기독교를 기복신앙으로 오염시킨 주범이다.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기독교가 유례없이 크게 부흥한 것은 기독교와 우리의 민간신앙인 샤머니즘 사이에 유사점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샤머니즘에서도 하늘에 신이 있다고 믿는다. 기독교의 천당과 지옥처럼 샤머니즘에도 천계와 지하계가 있다.

 

특히 기독교와 샤머니즘에서는 모두 기도하면 그 기도가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이러한 유사점으로 인해서 한국인의 토속신앙이 한국교회에 깊이 들어오게 되었다. 샤머니즘이 한국교회의 부흥에 도움이 된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샤머니즘은 한국의 기독교를 기복신앙으로 오염시켰기 때문에 그 폐해 역시 막대하다. 기독교가 샤머니즘적 기복신앙으로 변질되는 것은 한사코 막아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선교지의 토착적 신앙이나 관습을 받아들이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수준이어야지 복음의 본질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육신의 복에 힘쓰는 샤머니즘은 영적인 삶, 나누는 삶을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불교에 기복신앙의 옷을 입힌 샤머니즘이 기독교에 들어와서는 복음의 본질을 흐려놓고 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바로 보고 기복신앙을 경계해야 한다. 육신의 복을 위해 비는 샤머니즘의 기복신앙은 한국인이 원하는 오복에도 영향을 미쳤다. 유식한 사람들은 보통 중국의 고서들에 기록된 수, 부, 강녕, 유호덕, 고종명을 오복이라고 말하지만, 우리 서민층에서는 수, 부, 귀, 강녕, 자손이 많은 것을 오복으로 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 서민의 오복에서는 중국의 오복 중에서 유호덕(덕을 베푸는 것), 고종명(주어진 생을 유감없이 마침) 같은 정신적인 복을 빼고, 강녕이나 자손 같은 육신의 복만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성경에서는 팔복을 말한다. 성경의 팔복에서는 우리의 오복과 달리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화평하게 하는 자에서처럼 모두 정신적이고 윤리적인 행위를 강조한다. 그렇게 행하면 천국을 얻고, 땅을 얻고, 하나님을 보는 복을 얻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여덟 가지 복을 받기 위해서는 여덟 가지 선행을 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교인들은 팔복을 받을 만한 삶을 살려고는 하지 않고, 무조건 육신을 위한 오복을 달라고 기도한다. 복을 받을 만한 행동은 하지 않고 육신을 위한 복을 비는 것이 샤머니즘의 특징이기 때문에, 오복을 달라는 우리의 기도는 샤머니즘의 영향인 것이 분명하다. 한국교회에서 기복신앙이 세력을 떨치는 다음 요인으로는 소위 번영신학이 뒷받침하는 성장주의를 들 수 있다. 교회의 성장에 주력하는 목회자들은 육신적 복을 받기 원하는 교인들의 입맛에 맞게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설교한다.

 

또한 헌금을 많이 내면 더 많은 물질의 복을 받는다고, 헌금을 내는 것은 물질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라고 헌금을 독려한다. 특별히 십일조를 내면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준다는 말라기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십일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 말을 듣고 식구들의 건강과 사업의 번창을 위해서 정화수를 떠놓고 새벽마다 치성을 드리던 어머니들이 복을 받기 위해서 교회로 모여든다. 그들은 교회에 와서도 복을 달라고 계속 기도한다. 그리고 복을 받기 위해서 헌금을 바친다.

 

그들이 드리는 감사헌금조차 이미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헌금이라기보다는 더 많은 물질을 달라는 헌금이다. 그래서 그들의 헌금은 복을 달라고 바치는 일종의 뇌물이다. 이렇게 교인들이 헌금을 많이 드리면 교회는 물질적으로 풍성해지고 성장한다.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는 데에 맛을 들인 목사들은 교인들이 받을 세상적인 복을 더욱 강조하게 된다. 그런데 물질이 풍성한 곳에 부패의 균이 들끓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한국교회를 타락하게 만드는 근본원인은 기복신앙이다.

 

한국에서 교회성장을 꾀하는 사람들은 삼박자 축복을 내세운다. 삼박자 축복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흔히 요한삼서 2절을 그들의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다. 요한삼서를 기록한 요한 장로는 가이오에게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했다. 요한은 단순히 가이오를 위한 자신의 기도 내용을 언급한 것인데, 목사들은 여기에 기복신앙의 옷을 입혀서, 예수를 믿고 기도하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형통하고 병이 낫는 복을 받는다고 말한다. 목사들의 이러한 말은 실상 요한삼서의 내용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요한은 가이오가 진리를 행하고 나그네들을 돌보아 주었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그를 위해 기도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삼박자 축복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믿고 기도하면 세 가지 복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진리는 행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돕는 일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교회로 몰려와서 물질을 달라고 건강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라 칭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행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살지 말고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을 본받을 것을 강조한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부자의 비유에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12:21를 어리석은 자라고 말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는 가진 것을 나누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며, 이웃을 사랑하는,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런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복을 구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 것은 생각하지 않고 받을 것만을 생각하면서 복을 달라고 기도한다. 이것이 기복신앙의 맹점이다. 기복신앙을 문제 삼는 것은 기복신앙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설 자리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접근한다. 그들은 사도행전에서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을 때 사람들이 술에 취한 것처럼 여러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하고, 그 후에 사도들이 병을 고치고 기사와 표적을 행한 것을 주목한다. 오순절에 임했던 것과 같은 성령을 생각하는 교인들은 “성령이 오셨네”를 열창하면서, 박수를 치고,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열광적인 분위기에 휩쓸리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부흥집회나 기도원의 간증집회를 찾아가서 기적을 체험하고 병을 고치기 원한다. 그들은 성령을 통해서 방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등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무당이나 점쟁이들이 영과 통하여 황홀경에서 춤을 추고, 운세를 보고, 병을 고치는 것을 생각나게 한다. 성령의 힘을 빌려서 육신의 질병과 고통을 해결하고 이 세상에서의 평안과 번영을 성취하는 데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성령에 대한 생각은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니다. 예수님도 병을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셨지만, 병자들의 병을 고쳐 주신 것은 고통 받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련의 기적은 실상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의 본질이 아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5:16)고 언급하고 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하신 말씀에서도 성령은 육체의 복을 비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역사하신다. 개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나 교회의 성장에 있어서 성령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손잡고 역사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육에 속한 우리를 구원하고 변화시켜서 새로운 피조물로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성령이 인도하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반면, 기복신앙은 육신의 욕심을 구한다.

 

성령은 우리 삶 가운데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바울이 말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그리고 절제는 나의 이기적인 욕심이나 복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남을 돌보고 이웃을 위해서 나를 죽이는 삶이다. 기독교인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갈 5:24). 그리고 개혁자들의 이신칭의 교리에 근거해서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예정론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기복신앙의 올무에 걸리기 쉽다.

 

그들은 행동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고, 오직 믿음으로, 만세 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다고 믿기 때문에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다. 실상 구원은 이미 완료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시작되었고, 우리의 삶을 통해서 현재 진행 중이며, 재림 때에 완료될 일이다. 그런데 구원을 완료된 것으로 믿고 경건한 삶을 게을리 하는 사람은 그의 본능적 욕구에 휩쓸리기 쉽다. 그래서 본능적 욕구를 제어해야 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하게 된다.

 

우리는 그러한 극단적인 예를 구원파에서 본다. 그들은 구원에 대한 깨달음이 있으면 이미 구원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그 후에 어떻게 살든지 한번 받은 구원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선행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복음대로 사는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멀어지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게 된다.

 

지난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구원파 사건에서 구원 중심의 신앙이 물질 중심의 신앙으로 쉽게 변질되는 것을 보았다. 구원파 신도들은 죄를 범하고도 가책을 받지 않고, 지도자들은 헌금을 모아서 기업체를 세우고, 땅을 사고, 사리사욕을 채웠다. 행위를 외면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강조하는 한국의 교인들은 무의식에 자리 잡은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인해서 더 많은 은혜, 더 많은 복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육체의 안일과 복을 비는 기복신앙에 빠진다.

 

중요한 것은 받은 은혜를 감사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행함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의 의와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을 지닌 인간이기 때문에, 육신적인 삶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구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앞에 놓고 그 죽음을 면하게 해 달라고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다. 우리가 병이 들었을 때, 사업이 기울었을 때, 그래서 정상적인 삶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육신을 위해서도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아흔아홉 섬 가진 사람이 백 섬을 채우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기복신앙이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부자의 경우처럼 그 사람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탐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기복신앙을 극복하기 위해서 불교의 경우에는 집착을 버리라는 부처의 가르침과 기복신앙이 병존한다. 불교에서는 승려들이 법회를 통해서 불교의 중심교리를 설법하고 교인들이 금강경 같은 경전을 읽으면서 그 교리를 마음에 새긴다.

 

그래서 의식이 있는 지식인층에서는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는 한편 민간신앙에 물든 일반 불교인들은 기복신앙에 의지하고 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목사들이 기복신앙을 설교하기 때문에 이러한 병존이 어렵다. 교인들이 성경을 열심히 읽지만, 목사들이 가르치는 기복신앙의 눈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신학교에서 기복신앙이 그리스도 복음의 뿌리를 흔든다는 사실을 예비목회자들에게 중점적으로 강조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현재 목회하는 목사들을 위해서는 목회자 세미나나 문서를 통해서 기복신앙의 해악을 교육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교회가 기복신앙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교인들이 기복신앙의 문제점을 깨닫고 기복신앙을 극복하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목사들은 교인들이 신학책을 읽거나 신학을 공부하는 것을 싫어한다. 목회하는 후배를 만나서 필자가 신학을 공부했다고 말했더니 “그러면 담임목사님 닭살 돋겠네요.”라고 응답했다. 교인이 신학공부를 하면 왜 담임목사가 긴장할까? 자기가 잘못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교인들이 담임목사에게만 의지해서는 신앙이 바로 서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목사를 잘 만나야 한다. 한국교회를 휩쓸고 있는 기복신앙의 바람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질식시키고 있다. 따라서 기복신앙을 극복해야만 그리스도의 복음이 살아난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는 소명을 받은 신학 교수들과 목사들은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살아야 하는 평신도들도 기복신앙을 극복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 최재석 출처 :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3490 click ⊆〓∵ Retrn to A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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