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드-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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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앙 연구가들/죠나단 에드워드

2007. 6. 24.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구원(조나단 에드워드)
(God's Sovereignty in the Salvation of Men)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케하시느니라”(롬 9 :18).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부인한 유대 민족을 생각하고 자기 마음이 심히 걱정되고 슬프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마음으로 바울은 하나님이 택한 유대인과 그렇지 않은 유대인의 차이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 기독교인 사이의 차이를 언급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성경의 다른 어떤 장에서보다 택함 받아 영생에 이르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문제, 곧 그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


선택의 교리를 확실히 제시하기 위해 구약에서도 여러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이스마엘보다 이삭을 하나님이 택했음을 알려줄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무엇이라 했던가.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맘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롬 9 : 9). 그리고 에서에 앞서 야곱을 하나님이 택했다고 리브가에게 어떻게 말했는가 보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13절에는 말라기에서 인용한 말씀을 적고 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15절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말이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그리고 17절에는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인용한 구절 중에서 특별히 모세에게 하신 말씀인 15절과 바로에게 하신 말씀인 17절 말씀에 관심을 둔 듯하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라 했다. 이 구절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도 언급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했다는 구절은 이밖에도 자주 언급된다. 바로와 관련한 말씀에서 특히 뒷부분인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케 하시느니라.”에 초점이 맞춰 있다고 보인다.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설교할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사람마다 다르게 다룬다. 어떤 사람에게는 긍휼을 베풀고, 어떤 사람은 완악하게 만든다. 본문 말씀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자식들 중 일부를 강팍케 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이 어떤 적극적인 효율적 수단을 사용해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이 그 심령을 강팍케 하는데 일정한 힘을 가할지는 몰라도 적극적으로 역사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든다고 가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죄를 짓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강팍하게 만드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하나님 영의 강력한 영향력을 철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그 마음이 강팍하게 되고 점차 더 완악해진다. 하나님의 영이 떠남으로써 그 사람을 강팍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볼 때 사람이 패역한 짓을 하면 강팍해진다. 하나님은 자기 말씀과 성찬식을 인간에게 주었는데 인간이 이를 남용하여 스스로 강팍해진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성찬에 잘못 참여한 자 중에 죽음을 맛보는 자도 있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은 또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 말씀하셨다.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이 6 : 10).


이사야의 말은 그 백성을 보다 나은 상태로 돌이키려고 역설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지나치면 그 백성의 마음이 강팍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강팍하게 하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거짓 선지자의 입에 거짓말하는 영을 붙이는 경우도 있다(열왕기하 18 : 22). 즉 하나님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거짓 선지자들에게 들어가게 한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시므이에게 다윗을 저주하게 하였다 한다(사무엘하 16 : 10,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도망갔을 때 사울 가계의 한 사람인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한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저주하게 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 역자).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한 것이 온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이와는 반대이다. 하나님은 통치자를 분명히 저주하지 말라고 했다(출애굽기 22 : 28 - 너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그러나 이때는 너무나 패역한 때라 시므이로 하여금 다윗을 저주하게 하였고,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함을 나타내는 표시로 이 일을 촉발시킨 것이다.
 
2. 이렇게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게 다루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그 마음에 달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케하시느니라.”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전혀 긍휼을 보이시지 않고,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긍휼을 베풀기를 거부하거나 긍휼을 베풀기 싫을 땐 항상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능동적인 자세를 지닌 종이 그 주인의 명령에 순종할 때 주인의 의지에 전혀 반하지 않으며 단지 즐겁고 기쁘게 순종할 뿐이다. 그러나 종은 본문 말씀처럼 자기 의지대로 행한다고 할 수는 없다. 결국 긍휼을 베풀고 말고는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의지와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런 제한이나 구속이나 의무조항도 없는 거룩한 의지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교리를 세울 수 있겠다.
 
* 교리 : 하나님은 인간을 영원히 구원할 때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신다.
하나님은 독자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 구원의 문제를 결정하는 주권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뜻하기만 하면 어떤 일이든 주권적으로 행할 수 있고, 아무도 하나님이 자신의 권한을 넘어섰다고 비난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갖고 있는 권리를 합당하게 실제적으로 행사하신다. 이와 관련해 이제부터 다음 네 가지 내용을 언급하겠다.
 
I. 하나님의 주권이란.
II. 인간을 구원할 때 하나님의 주권.
III. 인간을 구원할 때 하나님은 실제로 주권을 행사하신다
IV. 하나님께서 이런 주권을 행사하는 이유
 
I.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피조물들을 자신의 마음에 따라 그 운명을 정해줄 수 있는 절대적이고 독립된 권리이다. 이에 대해 세부적으로 알아보자. 하나님의 의지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내켜하는 기분이다.
 
1. (하나님의 주권은)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되어도 거기엔 어느 정도 제약이 따른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한 가지 일을 하게 되었을 때 모든 것들을 고려하여 그 일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 일을 할 때 두려움이 있을 수 있고, 그 일 자체가 짜증나고 그의 의지에 거슬리는 것일 수 있다. 이렇게 일을 할 때 이것은 단순히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그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없다.
 
2. 다른 것(존재)의 의지 아래 있지 않다. 종은 주인의 명령을 이행할 수 있고 그것도 기꺼이 즐겁게, 주인의 뜻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기분(마음)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자유롭게 행한다. 하나님의 뜻을 선택한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먹을 고기이고 마실 음료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그들 기분 내키는 대로 임의적 의지로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의지는 보다 우월한 의지의 지시 아래 있기 때문이다.
 
3. 어떤 의무에 매여 있지 않다.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을 자유롭게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자기 자신의 의지와 기쁨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의 기쁨으로 행하는 자는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자다. 하지만 어떤 의무 아래 놓여있는 사람은 자유롭지 못하다. 묶여있는 셈이다.
 
이제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해 보자. 하나님은 앞에서 설명한 그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기분에 따라 자기의 모든 피조물의 운명을 정하는 권리를 갖고 있다. 이 권리는 절대적이고 독립된 권리이다. 사람에게도 어떤 것들을 자기 기분에 따라 처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 권리는 절대적이고 무제한적인 권리가 아니다. 사람에게도 자기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권리는 절대적이지 않다. 분명한 한계와 제한이 있다.
자신이 속한 국가의 법에 어긋나지 않고 하나님의 법에 거슬리지 않는다면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가 있다. 자기 마음대로 재산을 처분할 수 있는 이 권리는 독자적이지 않기 때문에 절대적이지 않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한 독자적인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이 권리는 부분적으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속하고 전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사람이 갖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한 권리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자기 피조물을 자기 의지대로 다룰 수 있는 절대적이고 무제한적이며 독자적인 권리를 하나님이 갖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II. 인간의 구원에 작용하는 하나님의 주권이란 어떤 의미인가?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하겠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속성)의 영광에 조금의 손상도 없이 사람의 자식들에게 구원을 부여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기꺼이 원할 때 구원을 부여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의 명예에 조금의 손상도 없이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을 베풀고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을 주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절대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을 부여한다고 선포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약속에 묶여(구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이들에게 절대로 구원을 베풀지 않으리라고 주저없이 선언한다. 즉 성령에 거슬러 범죄한 자에 대해선 구원이 전혀 없다. 성령에 거역한 경우 하나님께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성령을 거스르면 어떤 경우든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이것이 영예로운 진리를 손상치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고, 성령을 거스르는 자에겐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선포할 때 자신의 주권을 행사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할 것이라고 약속할 의무는 없었다. 성령을 거슬려 죄를 지은 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한다고 선언할 의무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꺼이 이를 선포하셨다(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겠다는 약속과 성령을 거슬리면 구원이 없다는 선언). 이런 구속을 하나님 스스로 기꺼이 만들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약속하고 선포한 이 일과 관련해서 하나님이 지금도 계속 자기 마음대로 구원을 주기도 하고 거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의 성품 중 어떤 것이라도 손상을 입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성품이 손상을 입는다면 하나님은 구원을 베풀고 말고하는 문제에 절대적인 주권을 행사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이 손상을 입게 되면 구원을 결정하는 주권적 사역이 (아무런 권위도 얻지 못한) 자의적인 일에 머물고 말기 때문이다. 구원을 결정하는 문제는 절대적 자유로 할 일인가, 필연적인 일인가 아니면 의무적인 일인가로 귀결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에 조금의 손상이 있어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아니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운 성품에 정반대되는 것이다.
 
그래서
Ⅱ-1.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스러운 성품에 조금도 손상을 입히지 않고 사람의 자식들 중 합당한 자에게 구원을 베풀 수 있다.
물론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한 자들은 제외다. 그래서 인간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구원할 영원한 목적과 계획을 계시하였다. 천사들이 보기에 사람의 자식들을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의 성품과 완전히 어긋나는 일이었다. 타락한 사람의 자식 단 한 명이라도 그 인간을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 지닌 영예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의 자식들은 그 자체로 타락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함, 위대함, 공의로움, 진리와 같은 의로운 성품과 일치하는 구원의 방식을 고안해내지 않았다면 인간 구원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하기 힘든 일이란 아무것도 없으며, 자신의 권능과 지혜와 능력이 미치지 않는 것도 없음을 계시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구원의 사역에 쓰시어 순종으로 율법을 완성케 했으므로 이제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을 조금도 손상하지 않고 구원될 수 있게 되었다.
단,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한 좌들은 제외다. 하나님이 특별히 구원을 베풀지 않겠다고 선언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성품에 거스르지 않는 자는 구원될 수 있다. 하나님이 굳이 누구를 구원하고 말고를 주권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공의와 법과 일치되도록 인간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또 하나님이 지닌 긍휼이라는 성품이 구원을 베풀 만큼 크지 않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가 이들을 죄에서 깨끗케 하는데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나 내세에서 죄는 절대 용서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어떤 현명한 이유들이 있는 것이다. 죄를 지은 자를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반한다. 죄를 선포함으로써 엄청난 죄인의 모습을 밝히 알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성품에 아무런 손상도 입히지 않고 그런 죄인을 구할 수 있다.

 

만약 그가 살인자, 간통자, 위증자나 우상숭배자나 불경스러운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이 하시고자 하면 자신의 영광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 비록 사람들은 오랫동안 죄악에 빠져 있었고, 완악했으며, 가증한 죄를 수천 번이나 지었고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죄악에 있으며 점점 더 중한 죄 아래 있어 갈수록 그 도가 심각한 지경에 이를지라도, 심지어 이들이 위대한 빛 아래 범죄했더라도, 뒤돌아본 자(타락한 자)일지라도, 또 성령이 빈번히 엄중한 경고를 하고 죄를 막으려고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범죄했을지라도, 일반적 섭리의 차원이지만 그 나름대로의 긍휼을 받으면서 저지른 죄악의 위험성이 다른 죄인들보다 훨씬 더 심각할지라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그리스도를 위해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 조금의 손상도 가하지 않고 구원을 베풀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긍휼을 주고자 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푼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자기 성품의 영광이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고 최악의 죄인에게도 긍휼을 베풀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충족된 의이다. 하나님이 지니신 어떤 거룩한 성품도 이 구원의 길을 막지 않으신다. 동시에 그리스도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구원해내도 하나님이 지니신 영광된 성품은 전혀 고통 받지 않는다.
 
1.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함을 조금도 손상하지 않고 죄인을 구원할 수 있다.
하나님은 무한히 거룩하신 존재다. 천국조차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깨끗하지 않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보다 순결하신 눈으로 악을 보시기 때문에 불의를 그냥 묵과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죄를 묵인한다면 그래서 그 죄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이 혐오하고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손상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조금도 묵인하지 않고도 아무리 큰 죄인일지라도 구원하실 수 있다. 너무나 오랫동안 복음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무서운 죄짐 아래 있었던 자를 하나님이 구원한다면, 또 빛을 거부하고 해적질하는 자요 불경한 자로 있던 자를 하나님이 구원한다면 이럴 경우에도 이 죄인들의 악함을 조금도 묵인하지 않고 구원의 역사를 이룰 수 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와 불쾌함은 이미 그리스도의 고난에 충분히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혐오하는지를 충분히 입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 그리스도는 바로 그 죄 때문에 죽었다. 이 십자가의 고난 이상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감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없다. 만약 악인 자신이 지옥에 밀려들어가 거기서 최악의 고통을 겪게 된다고 해도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당한 고통보다 더 확실하게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를 나타내주는 것은 아니다.
 
2. 하나님은 사람의 자식들을 자신의 위엄에 조금의 손상도 입히지 않고 구원하실 수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조롱했어도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이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풀고도 자신의 위엄에 조금의 손상도 입히지 않는다. 만약 하나님이 아무런 변제도 없이 자신을 모욕한 자를 구원해 준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위엄을 더럽히는 것이 된다. 무한한 하나님의 위엄에 경멸을 받으면 이로 인한 상처가 고쳐지지 않는 한 하나님의 명예가 더럽혀지고 이 경멸은 거룩한 위엄의 명예에 어둠을 덮은 꼴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은 이 상처를 충분히 고치셨다. 경멸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가 죄인을 위한 중재자로 일을 하고 대신 고난을 담당하기 때문에 인간을 정말 죄 없게 해 준다.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최악의 죄인이 천국의 위엄에 가한 상처를 충분히 고친다.
 
3.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죄인을 구원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로 보면 죄는 반드시 벌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 최고 심판관이고 이 세상을 하나님 공의의 규칙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심판받을 자에게 은총을 주는 것은 재판관이 할 몫이 아니다. 재판관은 오로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공의의 규칙대로 결정해야 한다. 재판관으로서 하나님은 긍휼을 보이시 않지만 주권자로서 하나님은 긍휼을 보이신다. 그러므로 죄인들을 긍휼로 구원할 때 문제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긍휼을 베푸는 것과 심판주로서 엄격한 공의를 적용하는 것이 어떻게 서로 합치하느냐이다.


이 문제를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해결했다.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죄에 대한 징벌이 온전히 이루어졌고, 이로써 하나님 공의의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지금까지 있었던 가장 큰 죄인의 죄악에 해당하는 징벌을 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심판할 때 엄격한 공의의 규칙을 적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죄인의 죄를 사해줄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그리스도의 고난 외에 더 이상 사람의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로마서 3:25 - 26을 보라.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4. 하나님은 자신의 진리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도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죄인은 반드시 사망의 벌을 받는다고 말씀했다. 여기서 사망은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 모두를 뜻한다. 하나님은 반드시 죽게 된다는 위협하는 말씀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최대의 죄인을 구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그 죄값을 이미 치렀기 때문이다.


사람의 경우도 증인이 있으면 합법적으로 죄를 면하게 되는데, 예수님이 우리의 보증이 되는한, 우리의 죄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그의 고난으로 우리가 받을 징벌을 담당하였다.
이런 이의가 있을 줄 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먹으면 죽으리라 했고,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벌을 받는다고 했다. 그런데 왜 이와 동일한 진리를 지금 적용하지 않는가?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하겠다. 아담에게 주신 말씀은 죄를 지은 아담 자신에게 국한한 말씀이 아니다. 아담은 자기 후손도 그들이 죄를 지었든 짓지 않았든 다 하나님의 말씀에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 안에서, 그를 보증인으로 죄를 지었다면 ‘너희가 먹으면’이라는 말씀은 ‘너희가 자체적으로 또는 너희 보증인 안에서 먹으면’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죽으리라’는 말씀 역시 ‘자체적으로 또 너희 보증인 안에서 죽으리라’는 의미가 된다. 이사야 42 : 21을 보라.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인하여 기쁨으로 그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케하려 하셨으나”
 
II-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품의 존귀를 조금도 손상치 않고 어떤 죄인에게라도 그 구원을 거절할 수 있다.
 
자연 상태에 있는 사람치고 이들에 대해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조금도 손상치 아니하고 구원을 베풀기를 거절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예를 들어 현명하든 그렇지 않든, 또 성품이 선량하든 악질이든, 비열한 부모를 두었든 존귀한 부모를 두었든, 즉 악한 부모나 거룩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든, 도덕적이든 비도덕적이든, 또 그 자가 얼마나 많은 선행을 하고 경건하고 수많은 기도를 하여 구원될 만한 자이든, 아니면 저주받을까봐 걱정하고 고통을 받았든, 아니 그가 어떤 상황에 있든 하나님은 자신의 완전함을 이루는 요소 중 어떤 것도 조금의 훼파됨 없이 이 자의 구원을 부인할 수 있다. 하나님이 그 누군가를 구원하지 않기로 했다고 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여하한 상황에서도 전혀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1. 하나님은 자신의 의의 영예로움을 손상하지 않고 자연인에 대한 구원을 거부할 수 있다.
하나님이 구원을 거부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거기에 어떤 불공평함이나 부당함이란 없다. 자연인은 그가 어떤 상황에 있게 되더라도 살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이 그의 구원을 부인하고 그를 지옥에 던질 것이며 이것은 조금도 의롭지 않다거나 불공평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인은 그 자체로 지옥에 합당한 자이기 때문이다. 정당한 심판관이라면 그 자에 합당한 벌을 가하는 것은 전혀 부당한 일이 아니다. 자연인은 저주에 합당하기 때문에 그 짐을 전혀 벗어버릴 수 없다. 속죄될 수가 없다. 이 자는 자신에게 합당한 처벌을 면하기 위해 뭐라도 작당하여 하나님이 처벌을 내리는데 조금의 부담이라도 느끼게 하지 못했다.
 
2.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된 선하신 성품에 조금의 손상도 입히지 않고 회심하지 않은 자의 구원을 거부할 수 있다.
죄인들은 자신들을 질책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반대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긍휼에는 합치하지 않는다고 착각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을 전혀 불쌍히 여겨지지 않고 지옥에 던지는 것이 하나님 긍휼에 불명예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죄인들은 생각하기를 자신들을 지옥에 보내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고 가혹한 일이며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부드러운 성품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긍휼과 선하심을 전혀 상하지 않고도 자연인 중 누구라에게라도 구원을 거부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에 반하는 않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에도 반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저주를 내린다면 긍휼 역시 그 합당한 대상자를 택하여 베풀어지는 것이다. 죄인들은 하나님 긍휼의 본질을 잘못 판단하고 있다. 즉 이들은 하나님이 지닌 긍휼의 속성이 경우에 따라 공의에 상반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의 공의로 드러난다. 로마서 9장 23절 말씀을 보라.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
 
3.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지 않을지라도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전혀 손상치 못한다.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 자연인에게 구원을 베풀겠다고 말씀으로 맹세하지 않았다. 자연적 상태에 처한 인간은 약속의 자녀들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의 저주에 놓여있는 자다. 만약 이들이 어떤 약속이라도 지니고 있다면 이런 처지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III. 인간을 구원할 때 하나님은 실제로 주권을 행사하신다
하나님이 주권을 행사하시는 특별한 사례 몇 가지를 살펴보겠다.
1. 어떤 사람이나 민족을 불려 은혜의 수단들을 주고, 또 어떤 사람이나 민족에게는 주지 않는다.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에 따르면 온갖 은혜의 수단 가운데 구원이 베풀어진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가끔 그다지 실효성이 없어 보이는 방법을 이용해도 그런 불리한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구원을 베풀기도 한다. 하지만 은혜의 수단이 전혀 없으면 하나님이 은총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은혜의 수단들을 부여할 때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신다. 모든 인류는 본성적으로는 하나님께 향할 수 있는 비슷한 환경에 처해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부여된 은혜의 수단이나 환경에서 각자가 처지는 확연히 서로 구별된다. 미국 오지에서 이교도의 암흑 아래 살고 있는 인디인 야만인들이나 아프리카 대륙 거주자들은 본성적으로는 우리와 함께 하나님께 향할 수 있는 비슷한 상황에 있다. 본성으로 보면 이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소외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특별히 짐을 지운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이들과 우리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나게 되지 않았는가! 여기서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을 행사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득한 옛날에 주권을 행사했다. 하나님은 단 하나의 백성만을 약속의 백성으로 택해 은혜의 수단들을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족속들은 이교도의 암흑과 마귀의 압제 하에 넘겨주었다. 이때 이 땅은 수많은 강성한 민족들도 북적거렸다. 당시 이집트인들은 지혜롭기로 유명했다. 앗시리아인과 칼데아인은 덩치가 크고 지혜로우며 힘있는 민족들이었다. 페르시아인들도 힘이 강하고 정치적 전략이 뛰어나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스와 로마 민족 역시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유명한 족속이었는데 이들 족속은 시민 정부의 발전 측면에서 뛰어났고, 전쟁과 평화를 다루는 지혜와 기술이 뛰어났다. 그리스와 로마 족속은 군사력을 이용해 차례로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했다.


그러나 이들 민족들은 모두 버림받았다. 하나님은 이들 민족들을 택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이교도의 암흑에 이들 민족들을 남겨 비전이 없어 망하게 했다. 그리고 오직 한 족속만을 선택했으니 야곱의 후손들로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은 이들에게 온갖 은혜의 수단들을 주었다. 시편 147 : 19, 20을 보라.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


이 민족은 당시의 다른 많은 족속들과 비교하여 규모가 작고 돋보이지 않는 족속이었다. 신명기 7:7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또 이 민족을 택함은 이들이 특별히 의롭기 때문도 아니다. 이들 민족도 다른 민족과 다를 게 없었다. 신명기 9:6을 보라.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택하시는 사랑으로 이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들을 사랑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신명기 7:8보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 즉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마음에 달린 것이라는 말이 된다.


하나님은 또한 동일한 조상을 두었지만 그 중에서 누구를 자기 백성으로 택하고 어떤 민족들을 버릴지 선택할 때 자신의 주권을 보이셨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비롯한 아브라함의 다른 아들들의 후손들은 버림을 받을 때 이삭의 자식들은 선택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에서의 자식들은 버림을 받았고 야곱의 자식들은 택함을 받았다. 로마서 9:7을 보라.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또 10절에서 13절까지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사도 바울은 이스마엘과 에서보다 이삭과 야곱을 택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까지도 언급하고 있다. 말라기에서 하나님은 각 민족들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 민족은 에서와 야곱의 후손들이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유대인을 버리고 이방인들을 부를 때 자신의 주권을 발휘했다. 육으로는 아브라함의 자녀요,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었으며 유일한 참 하나님을 저들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민족인 유대민족을 버렸고 유대 민족 앞에서 음탕한 이교도들을 택하여 하나님 백성으로 부르셨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고대했고 구세주가 저들의 혈통에서 태어났으나 메시아는 유대민족을 버렸다. 요한1서 1:11을 보라.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 영광된 복음이 전파될 때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지나치시고 그간 이방인이었던 자들을 불러 복음의 특권을 향유하게 하였다. 유대인들은 끊어졌고, 이방인들이 접붙여졌다고 하겠다.(롬 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율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이제 전혀 사랑받지 못했던 이방인이 사랑스러운 자라 불리게 되었다.
“또 남편있는 자의 자식들보다 홀로된 여인의 자녀가 더 사랑받게 된 것이다.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劬勞)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사 54:1).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은 버림을 받았고, 돌들인 자들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기르신다. 하나님이 존귀히 여겼던 유대민족은 그때부터 오랫동안 버려진 채로 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으니, 참으로 놀랍고 거룩한 징벌이 아닌가. 이제 하나님은 이방 민족 중 몇몇 민족을 확연히 분별해내었으니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 마음에 따른 것이다.
 
2. 하나님은 특별한 개인에게 유리하도록 자신의 주권을 행사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구원을 필요로 하며 자연 상태에서는 모두가 똑같이 구원에 합당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람 중 일부에게는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엄청나게 유리한 조건을 주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경건하고 종교적인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고,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의 교훈과 여타 교육을 잘 받게 되며, 그 부모들이 경건하여 자식들이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이끌고 자식들을 위해 많은 기도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더 강력한 목회를 하는 교회에 속하게 되어 거기서 보다 많은 하나님의 영의 부음을 받는다. 또 어떤 사람은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성령의 수고와 각성시키는 영향을 받는다. 이는 다 하나님의 주권적 마음에 따른 것이다.
 
3. 하나님은 가끔 현명하고 위대한 자에게는 구원을 베풀지 않고 저급하고 미천한 자에게 구원을 베풀면서 자기 주권을 행사한다.
그리스도는 주권적으로 왕족과 귀족들의 집을 지나쳐 오두막에 들어가 거기서 거하면서 그곳의 미천한 거주자들과 교제한다. 하나님이 매일매일 호화롭게 산 부자의 구원을 거부하고 부자의 대문에 앉아 구걸한 거지 나사로에게 구원을 베푼 것도 하나님의 주권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 세상 왕들과 그들의 모든 빛나는 위엄을 경멸한다. 또 하나님은 때때로 지혜있는 자, 이해력이 뛰어난 자, 많이 배운 대학자들을 지나치고 성경의 쉬운 구절과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를 간신히 이해하는 그런 사람에게 구원을 베푼다.

 

 그렇다.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인간치고 부름을 받는 자가 적은 것은 사실이다. 고린도전서 1:26, 27, 28을 보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 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4. 별다른 장점이 없는 자에게 구원을 베풀기도 한다.
하나님은 때때로 훌륭한 수단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할 때 연약한 방법을 활용하여 놀라운 결과를 낳기도 한다. 하나님은 또 가끔은 경건한 부모의 자녀들에게서 구원을 거둬들기도 하고, 사악한 가정에서 양육된 자에게 구원을 베풀기도 한다. 여로보암 가계의 선한 아비야(Abijah)의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며, 또 사악한 아하즈의 아들이지만 거룩하기만 한 히스기야와 악한 아몬의 아들이면서도 거룩한 성품을 지닌 요시아의 사례가 성경에 나온다. 이와는 반대로 거룩한 다윗의 아들들인 암몬과 압살롬은 악한 자였으며, 선량한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도 악한 자였다. 탁월한 은혜의 수단을 지닌 자 중에서도 버려져 멸망에 처하기도 하고, 은혜의 수단과는 거리가 먼 자들 중에서 구원될 자도 있다.


이와 같은 원리로 너무나 많은 빛과 성경적 지식을 지니고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거의 모두 버림받았으며, 가난하고 무지한 세리는 구원을 받았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서 매일같이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으며 그리스도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본 자 중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떠났고, 사마리아의 여인은 택함을 받았고 또 그리스도가 사마리아를 지나가면서 전한 말씀만 들었던 다른 많은 사마리아인들도 구원을 받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나안 여인은 택함을 받았다. 이 여인은 유대 족속이 아니요 단지 예수님을 한 번 보기만 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듣고 그리스도가 행하는 기적들을 보았고 또 사도들이 애써 말씀을 전했던 자들은 구원받지 못했다. 하지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지나치듯이 들었던 이방인들은 그들 중 많은 사람은 구원의 소식을 붙잡고 회심했다.
 
5.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으로 아주 가증스러울 정도로 사악한 자 중에서도 일부를 구원하기도 하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을 구원하지 않기도 한다.
바리새인들은 유대인 중에서도 아주 엄격한 종파였다. 이들의 종교성은 유별났다. 누가복음 18:11을 보자. 이들은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바리새인들에겐 도덕성이 있었다. 이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자기 모든 소유의 10일조를 냈다. 이들은 종교적이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버림받았고 세리나 창기나 그밖에 공개적으로 악했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보다 먼저 하나님 왕국으로 들어갔다(마 21:31).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 자신의 의가 어떠했는지 빌립보서 3:6에서 설명하고 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한 부자 청년은 그리스도께 와서 무릎 꿇고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데, 이 청년은 도덕적인 사람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계명을 지키라고 하자 이 청년은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이 사람은 환경이 좋은 가정에서 자란 것이 분명하고 품행이 방정한 젊은이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여 말한다고 했다. 이 젊은이는 구원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도둑은 바로 십자가 위에서 선택되어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은 가끔 죄인의 괴수와 살인자, 이교도, 불경스러운 자 등에게 긍휼을 보이사 자신의 주권을 보인다. 어떤 경우는 사람이 늙어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부름을 받는 자도 있다. 인생의 대부분을 사탄에게 봉사하며 보냈고 하나님께 예배할 것이 별로 남지 않은 이런 자들 중 일부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베푸는 긍휼의 은총을 받는 것이다.
 
6. 구원을 찾는 자들 중 누구는 구원을 받고 누구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구원을 찾으면 성경에 나타난 경우나 현실적 경험으로 보는 것처럼 곧 회심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오래도록 구원을 추구하지만 끝내 구원을 얻지 못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사는 동안 겪어야 할 온갖 난관을 극복하도록 도움을 준다. 이런 사람은 사단을 누르고 미혹에서 구원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살면서 만나게 되는 미혹에 그냥 멸망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온갖 분명한 확신들을 기꺼이 주면서 어떤 자에게는 아예 각성조차 못하게 한다. 어떤 사람은 중간에 미끄러지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어 끝까지 간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의를 신뢰하여 끊어진다. 어떤 자는 살아 있는 동안 자기 삶에 등장하는 장애를 전혀 극복하지 못한다. 엄청난 수고를 하지 않고도 회심하고 구원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엄청난 수고를 하고도 멸망하는 자가 있다.
 
IV. 이제 하나님께서 왜 사람의 자식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베풀 때 자신의 주권을 이렇게 행사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겠다

1.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창조하면서 자신의 모든 성품을 발휘하여 그 성품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나타내려고 계획했다.

창조 시 하나님의 계획은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 자신의 본성이 지닌 핵심적인 영광스러운 점을 발견하는 것이다. 무한한 영광이 빛나야 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며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이해하도록 계획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피조물들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다 이해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제대로 드러내고 자신의 모든 성품이 반영되도록 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만약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 중 어떤 것은 영광스럽게 하고 다른 성품은 그렇지 못하게 된다면 이는 결점이 있는 상태이고 그러면 하나님 영광의 구현은 완성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는 구현되는데 하나님의 거룩함은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 지혜의 영광은 그 자체로 구현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지닌 지혜라는 속성이 영광스러운 부분이라면 그 지혜는 거룩한 지혜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함은 구현되는데 지혜는 그렇지 못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지닌 거룩함의 영광은 그 모습 그대로 구현되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의 거룩함의 영광에 속한 것은 지혜로운 거룩함이다.


긍휼과 공의의 덕목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의로운 긍휼이 아니라면, 즉 하나님 공의와 합치하는 긍휼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지닌 긍휼의 영광스러움이 그 자체로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이 지닌 모든 다른 성품의 영광을 반영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이 지닌 긍휼의 일환이다. 주권적 긍휼이다. 이렇듯 하나님의 모든 속성은 서로서로 영광을 반영해 준다.


하나님의 어떤 성품의 영광도 다른 성품의 구현 없이는 그 자체로 구현될 수 없다. 다른 성품의 영광 없이는 어떤 성품도 결점이 있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성품의 구현도 결함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속성(성품)을 구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선언적 영광은 종종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려진다. 왜냐하면 그 이름이 하나님의 본질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자신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의미하지 못한다면, 즉 하나님의 어떤 성품도 나타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이 지닌 속성 중 하나요 자기 영광의 일부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크고 작고를 막론하고 모든 피조물에 대한 절대적 주권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여기서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위대함과 거룩함이 나타난다. 따라서 자기의 주권을 구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자신의 다른 속성과 마찬가지로 그 주권을 행사하는 데서 구현된다. 하나님은 자기의 권능을 행사하면서 자기 권능을 영화롭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기 주권을 행사할 때 자기 주권을 영화롭게 한다.
 
2.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피조물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또 그가 하는 일이 위대하면 위대할수록 하나님의 주권은 더욱 영광스럽게 된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사람보다 열등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보다 더 영광스럽다.
그리고 천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아직까지는 인간에 대한 주권보다 더 영광스럽다.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피조물이 더 존귀할수록 이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더욱 위대하고 고귀하게 나타난다.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짐승을 통제하는 것보다 인간에게도 더 큰 영예가 된다. 더 나아가 왕족이나 귀족을 지배하는 것이 평민을 지배하는 것보다 더욱 위대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주권은 아주 고귀하고 뛰어난 피조물의 심령에 미칠 때 영광스럽게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은 이런 고귀하고 뛰어난 자들에게 미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권세가 또 다른 고귀한 피조물에게로 확대되면 그 존귀는 더욱 위대해질 것이다. 사람이 누구를 지배할 때 단지 그 사람의 일부만을 지배하게 되면 그 사람의 생명과 재산과 그가 지닌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것만큼 빛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그 사람의 모든 면에까지 미칠 때 영광스럽게 나타난다. 하나님 자신의 마음에 따라 사람들의 모든 측면을 고려하여 그 운명을 정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은 또 가장 중요한 일에 미칠 때(예컨대 인간 심령의 영원한 상태나 조건을 결정하는 문제) 영광스럽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주권은 물론 어떤 제한이나 경계가 없이 무한히 중요한 일에까지 미친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구현하는 것이 자신의 계획이듯이 인간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행사한다. 인간의 육체와 영혼에 대해서는 물론 영원한 구원과 같은 가장 중요한 문제에까지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된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케하는 것이다.
 
* 적용
1. 우리 심령의 영원한 구원이라는 중차대한 문제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구원의 문제와 관련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에 의지할 뿐만 아니라 구원의 문제가 단지 하나님의 의지나 기분에 좌우되기도 한다고 인식해야 한다.


발끝에서 머리끝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지에 달려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마음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인간이라도 구원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우리의 구세주로 삼았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감찰하사 타락한 천사가 아니라 구세주를 보냈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마음(기분)에 따른 것이다. 어떠한 방법을 쓰든 그건 하나님의 주권적 기분이다. 우리에게 성경을 준 것이나 성찬을 준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이다. 이러한 은혜의 수단들을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에게 주고 또 하나님 영으로 우리를 각성케 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나 구원의 은총을 베푸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이러한 자에게 빛이 있으라” 라고 할 때 이것은 무한한 권능과 주권적 은총의 말씀이다.
 
2. 내가 최대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경외롭고 절대적인 주권을 찬양하겠다.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은 뛰어난 인간의 심령에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그의 영원한 구원을 비롯한 그 인간의 전부에 대하여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속성 중 유독 돋보이는 속성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위대성과 하나님이 우리 인간보다 훨씬 더 고귀하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이 주권이 하나님을 크게 영광스럽게 한다고 성경에서는 말한다. 신명기 32:39을 보라.
“나 곧 내가 그인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시편 115:3을 보라.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다니엘 4 :34-35을 보라.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을 구원함에 행사하는 주권으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고 영광을 돌렸다. 마태복음 11:2 -26을 보라.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의 주권에 영광을 돌리자.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과 비교하여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권세와 주권은 크니 그 종으로서 마땅히 겸허히 존경과 존귀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제한이 없으니 최대로 겸손하게 최대로 존경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 뜻하는 대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 이런 분에 대한 겸양과 존경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3. 구원의 상태에 들어선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이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 덕분으로 돌리고 자신을 다른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구별하신 하나님께 모든 찬양을 드리게 된다.
거룩함이 하나님 안에 있지 않으면 거룩하다는 이유만으로 영광스러워지지는 않는다. 고린도전서 1:29-31을 보라.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구원을 받은 자들이 지닌 거룩함이나 안전하고 행복한 현 상태와 조건이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과는 확연히 다른데 이것이 타고난 차이 때문이라거나 자기들의 힘이나 의로움 때문이라고 조금이라도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를 높일 만한 이유가 조금도 없다. 하나님을 높여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을 택하여 사랑을 주고 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아니 창세 이전부터 이들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높여야 한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이 아닌 이들을 사랑하여 택한 이유를 묻는다면, 아니 그 이유를 하나님으로부터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건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다.


택함 받은 자들은 성자 예수님을 찬양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택할 백성의 이름을 가슴에 지니고 계셨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 의로움과 권능을 받는다. 택함 받은 자는 성령님을 찬양해야 한다.
성령님은 이들을 암흑 속에서 주권적으로 불려 경이로운 빛으로 인도했다. 또 성령님 스스로 즉각적이고 자유로운 활동으로 이들이 악을 이해하고 죄악의 위험을 알게 했다. 동시에 자기 자신의 의를 내세우지 못하도록 하며 이들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향유할 수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부요함을 알게 했다.
성령님은 이들을 성화시키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이 얼마나 악한지 이야기를 듣거나 악한 사람을 보게 될 때 자기 자신들도 한때 얼마나 악했는지 또 하나님을 얼마나 화나게 만들었는지, 그래서 죄악 속에 영원히 멸망에 처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들이 저들과 다르게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임을 안다.


고린도전서 6:10에 많은 종류의 죄인들이 열거되어 있다. fornicator(간음자), idolater(우상숭배자), adulterer(간부), effeminate(나약한, 여자같은), abusers of themselves with mankind(세상사람과 어울려 자신을 방탕히 하는 자 - 남색하는 자).<고린도전서 6 : 10 원문 -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오히려 9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전략 -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로 됨.


그리고 11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도 더 크고, 하나님을 사랑할 이유도 더 많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단지 자신의 주권적 기분으로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긍휼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4. 그러므로 우리는 왜 하나님의 은총을 찬미해야 하는지를 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겸비하셔서 우리와 언약 관계를 맺어주셨는데, 하나님은 본래 우리를 지배하시는 우리의 절대소유주로서 하고자 하신다면 우리와 함께하시지만 우리에게 그렇게 해야 할 의무는 없으시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절대주권을 포기하고, 신자들에 대한 섭리에 있어 주권을 행사하시지 않는다면, 신자가 더 풍성한 위로를 받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은 신자에게 종속당하게 된다.


하나님이 흙 속에 뒹구는 벌레같은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우리에게 (스스로) 묶여 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하나님이 얼마나 놀랍게 자신을 낮추시는 것인가! 하나님은 자신의 말로, 약속으로 자신을 구속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만으로 만족하시 않았다. 히브리서 6:13 이하 구절에 언급된 내용을 보면 하나님은 맹세하여 자신을 구속하는데 이것이 우리에게는 더욱 강력한 위로가 될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 6:13-2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힘써 순종하자.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특히 우리에게 가장 중차대한 문제인 우리 자신의 영생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한다.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아 그것이 장애물이 되어 거기에 걸려 넘어져 멸망했다. 우리가 하나님 주권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과 다툰다면 이것은 우리의 영원한 파멸이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절대적 주권자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케하듯이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 심령에 임한다.
 
5. 마지막으로 억측(presumption)과 낙담(discouragement)이라는 두 가지 극단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추구하는 자들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교리를 적용해 보겠다. 먼저 하나님의 긍휼을 값싸게 얻을 수 있다고 억측하여 죄악에 있는 자신을 위로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의 긍휼은 무한하기 때문에 당장 구원을 찾는 일을 늦추고 나중에 찾아도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 또 그런 설교를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이 풍부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주권적이기 때문에 하나님 마음에 따라 그를 구원할지 말지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당신이 구원을 나중으로 연기한다 하더라도 구원은 하나님의 마음에 달린 것이지 당신 힘으로 정할 수 없다. 따라서 구원에 관한 한 당신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구원을 찾을 때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최선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오늘날에도 들린다.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면 당신 마음을 강팍하게 하지 말라.”


그리고 또 낙담을 조심하라. 절망적인 생각이 드는 것을 조심하라. 당신은 엄청난 죄인이기 때문에, 또 너무나 오래도록 죄악 속에 있었고 뒤돌아보았으며 성령을 거부했기 때문에 절망적이기 쉽다. 명심할 것은 당신이 처한 현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당신이 너무나 중한 죄인임을 인정하되, 당신이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하지만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도 당신이 더럽힌 하나님의 영예로운 거룩함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당신이 모욕한 하나님의 영예로운 위엄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으며, 또 당신이 대적으로 삼았던 하나님의 영예로운 공의와 하나님의 진리와 그 밖의 여러 가지 속성들의 영예가 손상을 입지 않는다. 당신이 어떤 죄인인지 인정하라. 하나님은 원하기만 하면 당신을 구원하여 하나님 자신을 영화롭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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