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죤스-참 회심의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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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앙 연구가들/로이드 죤스

2008.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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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회심의 증거(창32:24)

 이 부분은 성경에 나오는 가장 위대하고 극적인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위대한 이야기 중 하나는 됩니다. 여러분은 사실 이 사건의 배경을 모르고서는 이 장을 읽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형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가축들과 처자식들을 줄줄이 늘어 세우느라 앞뒤로 왔다 갔다 하는 야곱을 지켜보려면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그 일을 다 끝낸 다음 야곱은 마침내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이 자리까지 오게 된 야곱의 생애 중 상세한 내용 몇 가지 만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이삭의 두 아들이었습니다. 비록 쌍둥이였지만 에서가 장자였으며 두 사람은 아주 달랐습니다. 야곱은 어머니가 편애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이 잘되기를 너무 바란 나머지 그가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얻어 낼 수 있는 계책을 짜냈습니다. 야곱이 자기 형 에서처럼 꾸민 후 나이 많아 눈이 멀어 잘 보이지 않 는아버지 이삭 앞으로 들어간 일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늙은 아버지가 자기를 만져 보고 틀림없이 털 많은 에서라고 생각을 하게 될 만큼 털가죽으로 자기 팔을 쌋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마침내 아버지의 축복을 얻어냈고 그의 형 에서는 분노와 불만에 가득 차서 야곱을 죽이기로 작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머니 리브가가 이 사실을 알아채고 야곱에게 차라리 도망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합니다. 야곱은 고향을 떠나 외삼촌 라반에게로 갑니다. 오늘의 본문 앞에 나온 장들을 보면 그가 외삼촌을 위해 어떻게 일했으며, 또 그의 두 딸을 어떻게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는지 나와 있습니다. 또 비록 그의 행동 가운데 정죄 받을 만한 일들도 몇 가지 있긴 하지만, 아무튼 어떻게 그가 그토록 번성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처자식을 거느리고 엄청난 재산을 갖게 된 이 야곱에게 라반을 떠나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오늘의 본문 32 장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야곱은 이미 라반을 떠났으며 이제 처자식과 소유물을 다 거느리고 고향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형 에서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자기가 과거에 에서에게 어떻게 행했는지도 정확 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에서가 자기에 대해 품고 있을 그 감정들을 상상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자기 재산이 걱정이었습니다. 처자식이 걱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계책과 묘안을 짜냅니다. 그래서 형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종들을 먼저 보냅니다. 여러분은 야곱이 짜낸 계책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영리한 계책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야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 야곱이 있습니다. 그는 과연 어떻게 형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요?

 

이 이야기는 아주 극적인 위력을 갖고 계속 진행됩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 야곱은 안전을 위해 자신이 갖고 있던 소유물과 사람들을 여러 떼로 나누어 먼저 강을 건너게 합니다. 두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두 여종과 잠시 함께 있다가 그들을 모두 앞서 보냅니다. 그런 다음 얍복강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이제 자기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이 특이한 일이 발생합니다.

 

여기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하고 있는 야곱이 있습니다. 그는 비록 부자지만 다음날 자기 형 에서를 어떻게 만나야 좋을지 몰라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형 에서가 무장한 남자 400명을 거느리고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소리도 이미 들었습니다. 자기는 그 공격에 대 해 전혀 손을 쓸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자신은 물론 처자식까지 분명히 살해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모두 다 얍복강을 건너갔으며 야곱 혼자 남아 있습니다. 왔다갔다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잠도 이루지 못한 채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하며 불길한 예감으로 가득 차 있는 야곱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이 장 마지막에 기록된 그 엄청난 결과들로 인도될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물론 야곱의 전 생애에서 하나의 전환점입니다. -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떤 의문도 제기될 수 없습니다. - 야곱이 정말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은 바로 이 시점입니다. 그때까지 야곱은 종교를 이용하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곤란에 빠지거나 어려움이 생기면 항상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까지 그는 단지 종교를 가지고 놀았을 뿐입니다. 그것은 이주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외적인 것으로 자기에게 편리할 때나 꽤 괜찮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가 맨 처음 자기 집을 떠날 때 하나님과 흥정했던 사실 -“당신이 저를 축복하시면 제가 이것을 하겠습니다” - 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러나 이 시점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이 사건이 야곱의 이상야릇하고 변화 무쌍한 인생사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시점부터 그는 종교를 참으로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그는 형에서를 만나기 전날 밤에 이 체험을 한 이후로부터 그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야곱의 인생사에 나타난 전환점을 보여 주기 때문에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 이야기에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데는 이것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이야기가 기독교와 하나님을 진정으로 체험하는 것, 회심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완전히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기독교의 복음이 무엇이며 그것이 한 개인 속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을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일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많이 드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주변에는 교회 바로 밖에 있는 세상에 대해서는 몹시 신경을 쓰면서 이 점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에 대해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부터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필요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기독교에 흥미를 갖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진짜 체험, 이 중요한 체험을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혹시 이 브니엘 환상을 체험하기 전의 야곱과 같습니까, 아니면 이 브니엘 환상을 체험한 후의 야곱과 같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이런 중요한 체험을 했습니까? 이 같은 결정적인 중대한 변화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즉 하나님을 만난 후로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 그런 변화를 체험한 적이 있으십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이야기는 하나님을 실제로 체험한 성경의 고전적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을 보십시오. 이와 똑같은 체험들이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모릅니다. 그 중 어떤 것은 직접적인 서술 형식으로 또 어떤 것은 가르침과 설명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의 생활 속에 나타난 놀라운 예들 속에 기록되어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위대한 주제로서 한번의 설교로는 도저히 다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야곱이 겪었던 이 극적인 체험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 이 허락하신다면, 다음 주에 이 점에 대해 좀더 상세히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주제를 다음과 같이 둘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전반적인 성격을 알아본 다음, 그 체험을 통과하게 되는 상세한 방법과 그것이 어떻게 효과를 발하는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 사건을 전반적으로 살펴볼 때, 거기에는 우리가 반드시 물어 보아야 할 아주 단순하고 기본적인 질문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 깔려 있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했는가? 나는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사람이 체험한 것과 똑같은 체험을 했는가? 이렇게 말하면 제게 이런 질문을 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질문을 하는 것도 좋지만 대체 그런 체험의 특징들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제가 그 체험을 했는지 안 했는지 어떻게 테스트해 볼 수 있습니까? 제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가 브니엘 체험 이전의 야곱 상태에 있는지 아니면 브니엘 체험 이후의 야곱 상태에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그럼 이제부터 이 지극히 중요한 체험의 특징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첫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특징은 회심은 항상 강렬한 개인적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이 체험에 관한 첫번째 사항은 그것이 항상 우리를 격리시킨다는 사실입니다. 그 체험은 우리를 따로 떼어 홀로 있게 만듭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개체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는 모두 이것이야말로 바로 현시대를 살면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 중 하나라는 사실에 틀림없이 동의할 것입니다. 특히 지금 현재와 같은 세상에서는 아주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마치 인생의 모든 것들이 서로 짜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개체성과 독립된 정체성을 잊게 만들려고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이 자기 일에 파묻혀, 자신의 전문직에 파묻혀, 자신의 직업 속에 파묻혀 자신을 망각하기가 얼마나 쉬운 세상입니까? 자기 가족에 파묻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온 세계 속에 휩쓸려 자기를 잃어버리기는 또 얼마나 쉽습니까? 이 세상이 점점 더 대중과 군중 단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기정 사실화되었습니다. 그 것은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도 그랬지만 그 전쟁 때문에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수많은 대중, 수백만의 사람들에 대해 연구합니다. 세상은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개인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집단과 그룹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그 단위가 점점 더 커집니다.

 

이런 현상은 실업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소자본을 가진 개인이 합병된 기업이나 체인점들에 의해 먹히는 세상입니다. 이런 현상은 정치계에서도 볼 수 있으며, 노조라는 조직 하에 노동자 개인이 사라지고 마는 산업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난이 아닙니다. 이제 고용주와 피고용자 사이의 개인적 관계가 이전 같지 않다는 것은 이미 기정 사실입니다. 이제는 그 관계가 좀더 기계적으로 조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부서의 전체 생활이 그 부서에 속한 개개인에 기초하기보다는 그 집단 전체에 기초해서 생각되고 있습니다.

 

국제 관계나 원자 폭탄 같은 것들에 대해 생각할 때도 이와 똑같은 현상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개개인은 자신을 하찮은 존재 -지구상의 전쟁, 세계 대전, 원자 폭탄은 많은 사람들, 아니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죽일 수 있습니다 - 로 생각할 수밖에 없게되었습니다. 대체 개인은 어디로 사라진 것입니까? 한 개인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숫자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 방식만큼 지금 우리가 함께 논하고 있는 이 중요한 체험에 역행하는 것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고 방식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갖게 되는 체험에 가장 역행하는 것입니다. 이 체험을 하기 위한 첫번째 단계는 항상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개체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그런 다음 “한 사람” 즉 하나님과 단둘이 남게 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오시는 데는 참으로 여러 가지 방법들이 동원됩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 속에서 보는 이 방법은 아마 가장 극적인 방법 중 하나일 것입니다. 야곱은 문자 그대로 자신의 처자식은 물론 자신의 모든 소유물로부터 분리되어야 했습니다. 야곱의 위험은 자신을 이것들과 동일시하는 데 있었습니다 -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그것들로부터 떼어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해서 이 분리 작업을 하십니다. 때로는 질병이라는 수단을 통해 이 일을 하십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 사업이나 재산에 많은 흥미를 갖고 있으며,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이주 행복하고 단란하게 삽니다. 그는 이런 것들을 위해 삽니다. 그는 절대 잠시 멈춰 서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영혼을 가지고 있는가? 이 인생이 다 지나간 후에는 내게 어떤 일이 생길까? 라는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다른 관심사들에 온통 빠져 자기 자신을 잊고 삽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병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하던 사업으로부터 그를 분리시켜 놓으십니다. 그의 소유물과 관심사들로부터 그를 떼어놓습니다. 어쩌면 가족들과 떨어져 병원에 입원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자기는 결국 한 개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자기는 절대적으로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원 침대 위에서 이런 체험을 했습니다. 물론 자기 집 병상에 누워 이런 체험을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다만 하나님이 이런 체험을 하게 해주시는 방법들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삶 속에 찾아오시어 실망을 안겨 주시기도 합니다. 우리의 돈을 앗아가고 우리 사업을 망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친구와의 우정에 금이 가거나 그보다 더 깊은 애정 관계에서 실망하여 이 지점에 도달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성도들의 인생 에 대해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바로 이런 식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격리시키셔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자기 자신도 잃고 자기 영혼도 잃은 채 빠져 있는 것들로부터 그들을 단절시켜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격리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은 개인이라는 것, 자기 혼자 문제들에 직면해야 한다는 것, 이런 사실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이것이 설교가 하는 일의 전부입니다. 설교가 하는 첫번째 일은 우리 모두에게 우리 각자에게 우리는 개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강단에서 사회적 여건이라든가 경제 및 정치 상황 또는 국제적인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다 어떤 의미에서 이 복음을 설교하는 것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선 지나칠 정도로 언제나 개인적입니다. 복음은 여러분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우리는 개개인이 따로 서 있다는 것, 이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 바로 복음의 첫번째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혼자 태어납니다. 죽을 때도 모두 혼자 죽습니다 - 무리를 지어 죽지 않습니다. 사망은 아주 개인적인 것입니다. 복음의 두번째 메시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한 개체라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개인적으로 책임을 물으실 거라는 것, 이런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떼를 지어 한꺼번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서 서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각자 가서 심판 받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여러분과 제가 행한 모든 것, 심지어는 “무익한 모든 말”까지 적힌 개개인의 기록이 거기 다 있다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고 행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며 우리 각자 그 점에 대해 개인적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여러분은 이렇게 격리된 상태에서 자신을 바라보신 적이 있습니까? 자신이 이 세상과 이생에서 하나님 앞에 선 한 개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제가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제발 군중과 대중들로부터 떨어져 나오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격리시켜, 지금 이 시간 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홀로 서서 여러분에게는 개인적인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십시오. 이 복음의 첫번째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그것은 항상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산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는 사실, 그 외의 다른 어떤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도 책임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 있다가 내일이면 없어질 것이요 각자 혼자서 심판대 앞에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제 두번째 특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심은 항상 우리를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 주는 체험입니다 저는 특히 이 점을 강조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이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와 있는 이야기가 강조하고 있는 위대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극히 중요한 체험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한 개인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나 기독교를 단순히 도덕과 행실의 문제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또 단순한 개념이나 원리의 문제로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기독교는 어떤 견해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평화와 전쟁, 교육이나 산업에 관한 어떤 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를 위해 행해질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는 - 한 인간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브니엘에서 이 일을 체험하기 전의 야곱은 이주 달랐습니다. 우리 중 아주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야곱도 항상 하나님을 자기가 필요로 할 때 축복을 주는 일종의 힘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자기에게 힘과 능력이 필요할 때 돌아서서 그 힘과 능력을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하늘 어딘가에 있는 위대한 능력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얻은 후에는 하나님에 대해 새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대면한 이 극적인 밤에 그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모든 회심 체험의 본질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제가 현재의 우리 기독교계, 특히 신학생들을 볼 때 가장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징조가 있다면, 바로 이런 개념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는 그 동안 너무 오랫동안 사회 복음에 관심을 쏟아 왔습니다.

 

기독교를 단순히 윤리의 문제요, 사람을 정신적으로 고양시키고 소생시키는 것, 추상적인 신학의 문제로 보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인 관계가 기독교의 참 본질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새로운 관심은 지금으로부터 l00년 전에 살았던 그 유명한 덴마크인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저서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특별한 면을 아주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종교적인 개념을 갖고 노는 것이 아니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 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 인간은 그 점에 대해 무언가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 이것이 소위 결정적인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나와 당신(I and Thou)라는 아주 의미심장하고 흥미로운 제목의 책을 통해 최근 더욱 보편화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나와 당신”이라는 인격적 관계로 생각하는 대신 천국 어딘가에 있는 “그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을, 진짜 인생은 인격간의 만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관념의 영역에서 살면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지극히 중요한 체험의 두번째 표지로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 철학 속에 있는 단순한 추상적 부호가 아니라는 것, 우리가 자신의 술책을 이루기 위해 가서 엎드려야 하는 어떤 개념 -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외딴 곳에 있는 어떤 개념 - 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이따금씩 우리를 축복해 주는 어떤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요, 하나님은 참이시며,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고 들을 수 있는 분이요 우리와 용무가 있는 분이요, 우리가 관계해야 할 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눌 수가 있습니다.

 

브니엘 체험을 하기 전에는 야곱도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비인격적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브니엘에서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 아니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야곱이 홀로 남았더니 그 “사람”(그는 바로 하나남 자신이었습니다)이 야곱 과 이야기하고, 야곱과 씨름했습니다. 야곱은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챘습니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이 진짜입니까? 하나님이 이처럼 인격적인 존재입니까? 하나님이 실재입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입니까? 제가 말씀드리지만 이 체험의 두번째 특징은 그것이 항상 우리를 즉각적으로 하나님과 직접 만나게 해주는 인격적인 관계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주 단순하고 솔직하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무릎 꿇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정말 거기 계시다고 믿습니까? 여러분의 기도 생활은 어떻습니까? 단순히 몇 가지 경건한 소원과 소망 사항을 중얼거리는 정도입니까? 여러분 자신에 대해 말하고 어떤 가능성들에 대해 단순히 물어보는 정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 적이 있습니까? 거기 정말 살아 계신 거룩한 인격체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안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이 체험을 해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정말 그리스도 안에 살아 계신 참 하나님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에 비추어 볼 때 그 체험의 세번째 특징은 이것입니다. 이 체험을 한 사람은 항상 그것을 그의 인생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것은 여기 이 오래된 이야기 속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간단히 끝맺는 말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여기 야곱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하며, 에서에 대해 그리고 자기 소유물에 닥칠 위험을 생각하며 불길한 예감에 가득 차서, 걱정 근심에 싸여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야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체험을 하기 시작하고 그 체험이 진행되는 동안 야곱은 에서에 대해 새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자신의 가축들, 소떼와 양떼들, 그 많은 재산, 심지어 처자식들에 대해서도 다 잊어버립니다. 이 분, 이 놀라운 체험, 그에게 제시된 이 축복의 가능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잊어버립니다. 그것은 너무 자명하고 불가피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바로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체험이라 할 수 있는 회심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항상 나타나게 되어 있는 현상 아닐까요? 야곱은 이 축복을 받기 위해 씨름했습니다. 그는 그 축복을 간청하며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날은 밝아 오고 에서가 올지도 모르지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절대 당신을 가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설사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더라도 나는 이것을 반드시 갖고야 말겠습니다.” 이 말은 항상 그리스도인에게 지극히 중요한 체험을 할 때면 반드시 터져 나오게 되어 있는 말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이 누군지 아십니까? 그는 하나님이 자기 인생 속에서 가장 중요한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자기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과 자기가 그 영혼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영혼의 운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일들에도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영원히 살지만 그 외 모든 것은 다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습니다.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 때문에 이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 -“나는 구원받아야 한다. 나는 용서받아야 한다. 나는 새 생명을 받아야 한다. 나는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 ” - 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를 도와줄 사람이 있을까요? 아, 있습니다. 그는 그 리스도께로 돌아서서 “저는 당신을 절대 가게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 축복을 반드시 갖고 말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는 이것을 간청하며, 이것을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이제 이것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다시 한번 간단한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여러분 인생 속에도 이것이 가장 큰 것이 됩니까? 제가 지금 강단에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이 다 없어져도 꼭 붙잡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라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리스도께 꼭 매달려 있으시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그는 자기 죄를 사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기에게 새 생명과 새로운 본성이 주어지며 하나님 앞에 새롭게 설 수 있는 신분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압니다. 사망과 무덤을 이기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에게 영광스러운 영원한 유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보고 “비록 모든 것을 다 빼앗긴다 해도 내게 그리스도만 계신다면 아무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이처럼 그리스도가 최고입니까?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여기서 야곱이 느끼고 있는 심정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모든 참 그리스도인들의 심정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낙심시킬 수 있다. 나를 핍박할 수도 있으며 내게 뭐든지 행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만 나와 함께 계시다면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항상 영원한 변화가 뒤따르는 체험입니다 저는 여기서 그 변화는 영원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체험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감정적인 체험을 하고 자기가 회심했다고 고백하지만 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령 심리적인 회심 같은 것들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런 감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체험이 진짜라는 특징은 그로 인해 그 사람이 영원히 변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브니엘 체험 이후 다시는 전과 같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리를 절었습니다. 그 몸에 표지를 갖게 되었고 그 이름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이 시점에서부터 계속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야곱이 전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옛 야곱은 이제 없어졌습니다. 이제 그는 어떤 의미에서 절름발이지만 새사람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체험에는 항상 영원한 변화가 수반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은 새사람입니다. 그는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 옛날의 그가 사라지고 그가 달라진 것을 세상이 압니다. 비록 남은 여생을 절름발이로 살긴 했지만, 누구든지 야곱을 보면 그가 이전의 야곱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와같은 중요한 체험을 한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이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는 자기 위에 표지들을 얻게 되었고 새 생명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을 강하게 믿던 야곱, 그 야곱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불구의 야곱 - 이스라엘이 “다리를 절뚝거립니다.”

 

그것이 마지막 특징입니다. 따라서 이 지극히 중요한 체험의 마지막 테스트는 그것이 영원한 변화를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이전의 그가 아닙니다. 그는 새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옛것이 모두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것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이 브니엘 체험을 하셨습니까? 혼자 격리되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보셨습니까?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 분으로 다가옵니까? 하나님을 아십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이 현재의 여러분이 되었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안에 있는 새사람, 새 생명, 새로운 흥미, 새로운 능력, 새로운 존재를 의식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안에 여러분이 이해할 수 없는, 여러분 자신을 뛰어 넘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바울과 같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혼자 격리되어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찾아오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그분을 발견하고 만나 본 적이 있습니까? 그분이 여러분에게 주실 수 있는 축복을 간청해 본 적이 있습니까? 만일 이 순간까지 그런 적이 한번도 없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간이 여러분의 브니엘이 될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한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께 매달려 여러분을 축복해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여러분에게도 이런 체험을 달라고 구하십시오.

 

믿음으로 구하면 하나님도 거절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그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난, 브니엘 체험 이후의 사람으로서 앞으로 계속 전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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