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 -참 크리스찬인지 어떻게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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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앙 연구가들/죠나단 에드워드

2007. 6. 30.

 

참 크리스찬인지 어떻게 아는가

                                        

 

1. 마귀도 하나님을 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야 2 : 19)

 

당신이 하나님께 속했는지 어떻게 아는가? 위 말씀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접했다는 증거로 무얼 내세우는지 알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악한 사람들만큼 나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께 인정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로 자기 가문의 역사(오래 전부터 믿음을 유지했다는 역사)와 교회에 가입해 속해 있다는 것을 내세운다. 공통으로 사용되는 복음주의 프로그램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사람들에게 하도록 되어 있다.

 

그 중 하나는 이것이다. “당신이 오늘 죽는다고 가정해 보라. 그때 하나님께서 왜 당신을 천국에 들어오게 하신다고 생각하는가?” 이에 대한 공통적인 대답은 “내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사도 야고보는 이와 똑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즉 하나님의 여러 종교적 교리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음을 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지식이 좋다는 것을 야고보 사도도 인정한다. 좋을 뿐만 아니라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 더 엄밀히 말해 홀로이신 참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누구라도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은 야고보 사도를 잘 알던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들은 야고보 사도로부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야고보 사도가 겪었던) 직접적 경험을 들을 수 있었다. 한 번 상상해 보라. 야고보를 알면서도 하나님 믿기를 거부한 자의 엄청난 죄성을 말이다. 이들에 대한 저주가 분명 더 클 것이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유일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선한 일의 출발에 불과함을 안다. 히브리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 : 6)

 

하지만 야고보는 이런 믿음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명백하게 그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야고보가 다음과 같이 말한 의미는 무엇일까? “너는 기독교인이라 말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고 하는구나. 하나님이 너를 천국으로 허락한다고 생각하고 그 증거로 너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구나. 그러나 그것은 전혀 증거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귀들도 믿으니 이들은 분명히 지옥에서 벌을 받게 되어 있는 자라.” 마귀들도 하나님을 믿는다. 분명한 사실이다. 마귀들은 하나님이 계시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거룩한 하나님이요, 죄를 미워하는 하나님이요, 진리의 하나님으로 심판을 약속했고 마귀들에게 보수(報讎)하실 분임을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들이 벌벌 떨고 전율한다. 마귀들은 대부분의 인간들이 인식하는 것보다 더 명료하게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은총을 나타내는 어떤 분명한 표시도 그 가슴속에 없다. 마귀도 하나님을 인식하고 벌벌 떨기까지 하는 체험을 하는데 말이다.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추론해 보자. 마귀들도 자기들 안에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는 은총을 나타내는 증거를 지닐 수 있다면 (우리가 그걸 발견할 수 있다면) 마귀는 아마 천국에 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야고보의 말은 틀리게 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전혀 가당치 않다. 성경은 마귀에게 절대 구원의 소망이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마귀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이들이 미래에 받을 징벌을 벗어버리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마귀에게 구원의 증거가 아니다.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2.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으로는 구원의 증거가 되지 않는다

 

마귀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 보면 문제가 보다 명료하게 보인다. 마귀들은 거룩하지 않다. 이들이 경험하는 일은 어떤 일이든 거룩한 경험일 수 없다. 마귀는 완벽하게 사악하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요 8 : 44)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요1서 3 : 8)

 

그러므로 마귀들은 악령, 더러운 영, 어둠의 권세 등등으로 불리는 것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에 6 : 12)

이로 볼 때 마귀의 마음속에는 어떤 것도 거룩하지 않고 또 그 자체로 참된 거룩함에 이를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마귀들은 하나님과 종교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거룩한 지식은 없다. 이들이 마음속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이들 심중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 마귀가 하나님에 대한 매우 강한 느낌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하나님에 대한 이들의 느낌은 너무나 강해 벌벌 떠는 것이다(shudder). 그러나 마귀는 성령의 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에 이들의 느낌은 전혀 거룩한 느낌이 아니다. 이것이 마귀가 체험하는 것이라면 (거룩함이 없는) 사람의 체험 역시 이러하다.

 

주목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마귀의 생각이나 느낌이 얼마나 진짜고 얼마나 진지하며 얼마나 강력한 것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마귀들은 영적 피조물로서 지상의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이들의 인식(앎)은 어떤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구체적이다. 마귀들은 선한 세력과의 싸움에서 갇힌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들 또한 성실히 지식을 습득하고 있다. 예수님이 마귀 몇을 던질 때 마귀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소리쳤다. 그리곤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 8 : 29)라고 했다. 이것보다 더 명료한 체험이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다시 한 번 강조하면 마귀의 생각이나 느낌이 아무리 진정하고 강력한 것이라도 그것은 거룩하지 않다.

 

그리고 또한 명심할 것은 마귀가 생각하는 대상이 거룩한 것이라고 해서 이들의 생각이나 느낌이 거룩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마귀들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안다. 마태복음 8 : 29을 보면 사람들보다 더 많이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다. 예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언젠가 예수님이 저들을 심판하리라는 사실을 마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거룩하고 영적인 것들에 대한 생각이나 느낌이 진짜이고 신실한 것이라도 심중에 하나님의 은총을 담고 있다는 증거는 아니다. 마귀들은 그런 생각과 느낌이 있다. 그리고 이들은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어 있다. 만약 인간이 마귀와 동일한 것만을 갖고 있다면 인간도 똑같이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3. 종교적 체험은 구원의 증거가 아니다

 

이상 언급한 진리에 바탕하여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첫째,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구원의 확실한 징표는 아니다. 타락하기 전의 마귀는 빛나는 새벽별들 중의 하나였고 불꽃이었으며 힘과 지혜에서 뛰어난 자였다. (이사야 14 : 12, 에스겔 28 : 12 - 19) 천사장들 중 하나인 사탄은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제 사탄이 타락하였지만 그가 죄를 지었다 하여 과거의 기억마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죄는 영적 본성을 파괴하지만 기억력과 같은 자연적 능력을 파괴하지는 않는다.

 

 타락한 천사들은 많은 자연적 능력들을 보유하고 있음을 성경의 많은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6 : 12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에 6 : 12) 성경은 또 사탄이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도 “주도면밀하다”고 말한다. (창 3 : 1, 고린도 후서 11 : 3, 사도행전 13 : 10). 그러므로 악마는 항상 강한 영적 능력을 보유해왔고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알 수 있으며,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해, 그밖에 많은 것에 대해 알 수 있음을 우리는 주시한다. 애초에 사탄에게 부여된 일은 하나님 앞에 천사장이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앞에서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을 이해하는 것은 사탄에게는 항상 제일 중요했고 그의 모든 활동은 사고와 느낌과 지식의 영역들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었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의 천사가 되는 것이 사탄의 원래 직무였고 죄로 인해 그의 기억이 파괴되지 않았으며, 다른 피조물에 대해서보다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타락 이후 사탄은 미혹자 등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 4 : 3) (미혹자로서 활동하기 위해) 사탄은 시간을 할애해 관련 지식을 쌓고 적용 방법들을 개발하고 있다. 사탄의 지식이 대단하다는 걸 어디서 알 수 있는가 하면 그가 사람들을 미혹할 때 얼마나 기막힌 재주를 부리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사탄은 주모면밀하게 거짓말들을 엮어 자신의 명석함을 과시한다. 기만술책을 제대로 먹혀들게 하려면 여러 가지 사실에 대해 실제적이고 올바른 지식으로 알아야 한다.

 

사탄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자기 일에 대해 잘 알았다. 욥기 38 : 4 - 7을 보면 사탄은 창세 때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 그 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느니라.” 이 구절을 보면 사탄은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고 우주의 모든 일들을 어떻게 통치하시는지 잘 아는 게 틀림없다. 게다가 사탄은 하나님이 세상에서 어떻게 자신의 구원 계획을 발동시켰는지도 알았다. 순수한 구경꾼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적극적 대적으로 말이다. 사탄은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고 노아와 아브라함과 다윗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것을 보았다. 사탄은 인류의 구원자시요 하나님 말씀의 화신인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음이 분명하다. 사탄이 얼마나 세밀하게 그리스도를 관찰했는가? 얼마나 신중하게 예수님이 보이신 기적들을 관찰하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었겠는가? 사탄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적하고자 작정한 자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성공적으로 전개되는 것을 사탄이 볼 때 그것은 그에게 고문이요 고통이다.

 

자, 사탄은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사탄은 무엇보다 천국을 안다. 그는 또 지옥도 안다. 사탄은 개인적으로 지옥에 처음 거주한 자이고 수천 년 동안 지옥의 고통을 겪었다. 사탄은 성경에 대해서도 아주 많은 지식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적어도 우리의 구세주를 미혹하려고 시도할 정도의 성경 지식이 있는 걸 우리는 안다. 그리고 사탄은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마음을 연구했다. 인간의 마음은 사탄이 우리의 구세주에 대항해 싸울 전쟁터이다. 인간을 미혹할 때 지난 오랜 세월에 걸쳐 사탄은 어떤 수고와 노력과 신경을 집중했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고 그와 관련된 지식을 알며 인간의 마음을 아는 사탄은 참된 종교를 흉내내고 스스로 광명한 천사로 변모할 수 있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1 : 14)

 

그러므로 하나님과 종교에 대한 지식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로 한 사람이 죄에서 구원되었다고 판별할 수 없다. 누구라도 성경과 하나님과 삼위일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하신 모든 일에 대해 설교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라. 누구라도 구원의 방법과 죄인의 마음속에 역사하는 성령의 일을 말할 수 있고 어쩌면 남들에게 기독교인이 되는 방법을 가르칠 수 있다. 이런 모든 일들은 교회를 세우고 세상을 계몽하는 정도의 역할은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한 사람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총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되지 못한다.

덧붙여 성경의 내용에 단순히 동조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 역시 구원의 확실한 징표가 아니다. 야보고서 2 : 19에서 보듯이 마귀들은 정말로 진실로 진리를 믿는다. 하나님 한 분만이 있다고 마귀들이 믿듯이 마귀들은 성경의 모든 진리에 동의한다. 마귀는 이교도가 아니다. 마귀의 믿음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이 진리 안에 확고히 수립되어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 은총이 가슴에 있다는 증거로써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으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단순히 그 진리에 동의하라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류의 믿음임을 이해해야 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요한1서 5 : 1) 이런 류의 믿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디도서 1 : 1) 진리로 향한 영적 붙들어줌(holding)이 있다. 이점에 대해선 뒷 부분에서 계속 설명하겠다.

 

 

4. 이의(Objection)  # 1 - 사람은 마귀와 다르다

 

어떤 사람은 강력한 종교적 체험을 하고 그것을 하나님이 자신의 가슴에 역사하신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종교적 체험을 통해 종종 사람들은 영적 세계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신령한 것의 실재함을 인식한다. 하지만 이런 종교적 체험 역시 구원의 확실한 징표는 아니다. 마귀나 저주받은 인간들도 많은 영적 체험들을 한다. 이런 체험은 그것을 체험한 사람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영적 체험을 한 사람들은 영적 세계에서 살게 되며 영적 세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직접적으로 보게 된다. 이들은 영적 세계의 고통을 보고 구원이 얼마나 가치있으며 인간의 영혼이 너무나(상상할 수 있는 최대로) 가치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누가복음 16장에는 영적 세계에서 받는 고통에 관한 비유가 나온다. 고통받는 자가 (하나님께 부탁하기를) 나사로를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 (자기 형제들은) 이 고통의 자리를 면하게 해 달라고 말한다. 지금 지옥에 있는 사람은 이 생이 얼마나 짧으며 이후의 영원 세계가 얼마나 긴가를 분명히 안다. 영원 세계의 경험과 비교하면 이 생의 모든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 이제 지옥에 들어간 자들은 시간의 소중함을 절감하고 지금 복음을 듣는 특권이 있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좋은 기회를 얻었음을 잘 안다. 이들은 자기 죄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짓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아 안다. 죄인들이 개인적 경험으로 죄의 최종 결과가 어떤 것인지 보게 될 때는 “울며 이를 감이 있다”(마 13 : 42). 그럼으로 가장 강력한 종교적 체험을 해도 그것이 자기 가슴에 임한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확실한 징표는 아니다.

 

마귀와 저주받은 인간들도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강력하신 분인지 안다. 하나님의 권능은 자기 대적들에 대한 성스러운 복수를 집행하는 것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만약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용납하시고”(로 9 : 22) 마귀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강력히 인식하고 떨면서 자기들에게 임할 마지막 형벌을 기다리고 있다. 마귀는 바로 지금 떨고 있지만 최대의 형벌은 미래에 나타날 것이다. 그때는 우리 주 예수님이 “자기의 권능있는 천사들과 함께 타오르는 불에 휩싸여 하늘로부터 나타날”(데살 후 2 : 7 ?) 때이다. 그날에 마귀들은 도망쳐 하나님의 존전에서 숨고자 할 것이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계 1 : 7) 이렇게 모든 사람이 아버지의 영광 속에 있는 예수님을 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을 본 모든 사람이 구원되지는 않을 것이다. 

 

 

 

 

5. 이의(Objection) # 2 - 사람은 마귀가 못 느끼는 종교적 느낌을 갖는다 

 

이 세상에서 경건치 못한 자들이 마귀하고는 다르다고 말하면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들도 있을 줄 안다. 이들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경건치 않은 자와 마귀는 다른 환경에 처해 있고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마귀의 눈에는 보이며 지금 실제하는 것들이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고 미래의 것이다. 게다가 사람은 영혼을 제약하는 육체라는 불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어 영적인 것들을 직접적으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마귀들이 하나님의 것들을 직접 체험하고 그와 관련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은총은 지니고 못한다 하더라도 그런 결과가 (인간인) 나에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또는 이런 식으로 말할지 모른다. “만약 사람이 영적인 것들을 이 생에서 갖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 가슴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확실한 징표라고 보는 게 당연하다.”

 

이러한 이의에 답하겠다. 이 세상에서는 어떤 사람도 마귀가 누렸던 것들 이상으로 영적 체험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마귀만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벌벌 떨지도 않는다. 이 세상의 사람은 그 누구도 마귀 수준과 동일한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 마귀와 저주받은 인간은 영원함이라는 그 아득함과 저승 세계의 중요성을 어떤 살아있는 인간보다 더 분명하게 알고 그래서 더욱더 이들은 구원을 갈망한다.

 

하지만 이 세상의 사람들도 마귀나 저주받은 인간이 경험하는 것과 동일한 것들을 경험할 수 있다. 인간도 마귀가 지닌 것과 동일한 영적(정신적) 조망(전망)과 동일한 견해와 감정 그리고 이성과 감성에 대한 동일한 느낌을 갖는다. 이 점에 대해 사도 야고보는 확실히 그렇다고 주장한다. 야고보는 만약 사람들이 하나님 한 분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라고 생각하는데 마귀들도 동일하게 믿기 때문에 그것은 증거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야고보는 믿음의 행위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함께 병행하는 정서와 행위 모두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벌벌 떤다는 것은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정서적 현상의 한 예이다. 사람이 마귀와 동일한 영적 전망을 하고 마귀와 동일한 방식으로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정서적 반응을 한다고 할 때 그러한 정서적 반응은 확실한 은혜의 표징이 아니다.

 

성경에는 이 세상 사람들이 어느 정도나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가슴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지 못하는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정확히 어느 정도 자신을 특정 사람들에게 계시할지 또 거기에 사람이 가슴으로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선 모른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일정한 분량의 종교적 체험 내지 일정 분량의 진리 체험을 했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구원된 거라고 말하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가슴속에 은총을 지니고 있는 사람보다 더 큰 체험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니 경험이나 지식의 양으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가슴속에 진정한 성령의 역사함이 있는 사람은 뭔가 다른 경험과 지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다.

 

 

6. 참된 영적 체험은 그 근원이 다르다

 

이런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당신 의견에 동의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위대하심과 거룩함을 바라보고,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 제 가슴속에 은총이 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지요. 마귀들 역시 이런 것들을 알 수 있다는 말에 동감입니다. 하지만 마귀들이 지니지 못한 것들도 전 갖고 있습니다. 기쁨, 평안, 사랑이 그것이죠. 마귀들은 이런 걸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구원받았음을 확실히 보여준 것이죠.”

 

네. 당신이 악마가 가질 수 있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을 지니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마귀가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게 전혀 없다. 사람이 사랑과 기쁨 등을 경험하는데 그것이 마귀와 다른 것, 다른 환경에서 연유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런 느낌의 원인들이랄지 그 출처라는 것이 악마적인 것과 완전히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경험들이 하등 악마적 경험들보다 나은 게 없다는 얘기다. 좀더 설명을 하겠다.

 

앞에서 마귀와 저주받는 자들에 대해 논의했는데 이들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본성적 이해 (natural understanding)와 자기애(self love)라는 두 가지 주된 원인에서 나온다.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 본성적 이해와 자기애 이 두 가지 요인이 자신의 느낌과 어떤 상황에 대한 반응양태를 결정한다. 비록 자신은 사악하더라도 본성적 이해로 보면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걸 알게 된다. (본성적 이해에 입각해 보면) 하나님은 무한하지만 사람들은 유한하다.

 

 하나님은 강력하지만 사람들은 연약하다. 자기애 때문에 종교와 영원의 세계의 중요성을 느끼고 그리고 구원을 추구하게 된다. 본성적 이해와 자기애 두 가지 요인이 함께 작동하면 마귀나 저주받은 인간도 하나님의 경외로우신 위엄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자신들의 심판주가 되리라는 것도 이들은 안다. 하나님의 심판은 완벽하고 이들에게 내려질 형벌은 영원하리라는 것도 이들은 안다. 그래서 마귀와 저주받은 인간들은 본성적 이해와 자기에 대한 사랑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감각 때문에 심판날에 그리스도와 그 성도들이 외적으로 드러내는 영광을 보게 될 때 그들에게 임하는 고통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마귀는 그렇지 못한데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기쁨과 평안과 사랑을 느끼는 이유는 마귀나 인간의 마음밭이 다르기 때문이라기보다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마음속에 들어있는 요인은 마귀나 인간이나 똑같다. (마귀가 처한 것과 인간의 환경이 다른) 예를 들어 보면 성령이 지금 세상에서 모든 인간이 가능한 사악하지 않도록 만들려고 역사하고 있다. (데살로니가 후서 2 : 17) 이것은 가능한 대로 줄곧 사악하기만 한 마귀와는 대조적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사 곡식들에게 비를 주고(마 5 : 45) 태양의 온기를 주는 등과 같이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준다. 이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인간관계, 쾌락, 음악, 건강, 등등 행복에 이르는 많은 것들을 자주 받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죽으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런 환경에 사람들이 처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본성적 이해로 보면 마귀가 절대 느낄 수 없는 것들을 사람들은 느낄 수 있게 된다.

 

자기애는 인간의 가슴에 작용하는 강력한 힘이다. 너무도 그 힘이 강력하여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한다. 그러나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누 6 : 32)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분임을 알고 하나님을 믿어 나쁠 것도 없다는 걸 알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단지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또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죽었다는 복음 등을 들어서 생긴 당신의 감정에서 나온 것일 뿐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의 근원은 자기애일 뿐이다. 이런 자기애는 마귀의 마음속에서도 활개치고 있다.

 

마귀의 상황을 생각해 보라. 마귀는 자신의 사악함이 끝이 없다는 걸 안다. 하나님이 지금 현재 자신들의 대적이고 앞으로도 늘 그러하리라는 사실도 마귀는 안다. 마귀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지만 이들은 여전히 활동적이고 전투적이다. 그런데 한 번 바꾸어 생각해 보라. 사람이 갖고 있는 희망을 마귀에게도 있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 마귀의 사악함이 움츠려든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극에 달한 나머지 하나님이 마귀의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고 마귀가 갑자기 상상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마귀를 용서하고 그 죄와 모든 것들을 용납하여 마귀를 천국에 들어오게 할까? (그렇게 되면) 오, 우리가 천국에서 참된 기쁨과 경이로움과 감사함을 보게 될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데, 그렇다면 마귀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니) 하나님을 그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마귀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니 이것보다 더 짜릿하고 흥분되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미혹을 당하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마귀는 이런 미혹을 점점 강화시키고 있다. 마귀는 이런 짓을 오래도록 수행해 왔으며 이 일에 능통하다.

 

 

7. 참된 영적 체험은 정서를 변화시킨다

  

자, 이제 이런 질문을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 열거한 이런 모든 다양한 체험과 느낌이라는 것들이 마귀가 조작할 수 있는 것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어떤 류의 체험이 진정으로 영적이며 거룩한 것인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확실한 징표가 되려면 내 가슴속에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 성령으로부터 온 것은 마귀의 것과 어떻게 다른가?

일단 이렇게 답을 드리겠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선한 은혜의 징표로 나타나는 느낌이나 체험은 마귀의 체험과 그 근원과 결과에서 다르다.

 

하나님께로 온 것은 그 근원에서 느껴지는 것이 너무나도 거룩한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것으로 드러나는 사랑스러움이다. 마음속에서 그것을 감지해 볼 때 아니 자기 자신의 가슴으로 느낄 때 성스러운 마력(하나님의 잡아당김)에 포로가 되는 것 같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라는 분명한 징표이다.

 

마귀나 지옥에서 저주받은 자는 이와 같은 것을 지금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절대 조금도 경험할 수 없다. 타락하기 전 마귀는 하나님에 대한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타락하면서 마귀는 이것을 상실했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만은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도 하나님의 전능함과 공의로움과 거룩함 등을 명백하게 알고 있다. 마귀는 하나님에 대한 많은 사실들을 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이 진정 어떤 분인지 마귀는 조그마한 단서조차 잡지 못한다. 마치 소경이 색깔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마귀들은 하나님의 경외로운 위엄을 강하게 감지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보지 못한다. 마귀들은 수천 년 동안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아주 가까이서 주의깊게 지켜보았지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약간이라도 보지 못했다. 마귀들이 아무리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안다 하더라도 (실제로 하나님에 대해 앞에서 언급했듯이 많이 안다) 마귀의 지식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보다 높고 영적인 지식에는 절대 이르지 못한다. 오히려 마귀가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면 알수록 마귀는 하나님을 더욱 더 미워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주로 하나님의 거룩함과 도덕적 우월에 있다. 이것을 마귀는 가장 미워한다. 하나님이 거룩하기 때문에 마귀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덜 거룩하다면 아마 마귀도 하나님을 덜 미워할 것이다. 마귀는 그 어떤 존재라도 거룩한 존재이기만 하면 미워할 것이 분명하다. 무한히 거룩하고 무한히 지혜롭고 무한히 전능하신 하나님을 마귀는 가장 확실히 미워한다.

 

오늘날에 살고 있는 자를 포함해 사악한 자들은 심판날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들을 보게 될 것이다. 단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사랑은 보지 못할 것이다. 환히 빛나는 심판의 날에 가장 강력한 빛이 비치니 사악한 자들 앞에 그리스도에 관하여 드러나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악인들은 볼 것이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마 13 : 26) 악인들은 그리스도의 외적 영광을 볼 것이다.

 

 이 영광은 우리가 지금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훨씬 더 대단할 것이다. 악인들도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분명히 확신하고 있다는 걸 당신은 안다. 악인들은 자신의 모든 죄악이 재연되고 평가될 때 그리스도의 전지전능함을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형벌이 선언될 때 그리스도의 공의를 직접적으로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을 때, 모든 이들이 예수님을 주라 고백할 때 그리스도의 권위는 확고히 서게 되리라. (빌립보 2 : 10, 11) 악인들이 지옥에 던져지고 고통의 죽음의 최종 상태에 이르게 될 때 거룩한 위엄은 너무나 분명히 악인들에게 나타날 것이다. (계 20 : 14, 15) 이 일이 일어날 때 하나님에 대한 악인의 모든 지식은 그것이 아무리 참된 것이고 강력한 것일지라도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관계로 아무 소용이 없으며, 전혀 모르는 것만도 못하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느냐 마느냐가 성령의 구원의 은총과 마귀적 체험을 구별짓는 잣대가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고 느끼는 것이 다른 모든 체험과 참된 기독교인의 체험을 구별한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한다. 택함받은 백성은 참으로 뛰어난 복음을 접할 때 거룩한 구원의 계획에 담겨있는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감지한다. 그의 마음은 이것이 하나님이구나, 내가 전심으로 이것을 믿는구나, 라는 확신을 하게 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4 : 3 - 4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즉 앞서도 설명했듯이 불신자는 복음이 있음을 보고 복음의 사실들을 이해하지만 복음의 빛을 보지는 못한다. 복음의 빛은 그리스도의 영광이요 그 거룩함과 아름다움이다. 고린도후서 4 : 6 말씀을 보자.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 복음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하는 믿음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우리 마음에 비췬 거룩한 빛 때문이다. 이 초자연적인 빛 때문에 예수님의 최상의 아름다움과 사랑이 가득함을 우리가 보게 되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로서 부족함이 없음을 확신하게 된다. 바로 이렇게 영광스럽고 엄위로우신 구세주만이 우리와 같이 죄악에 절어 지옥에 가야 마땅한 죄인과 무한히 거룩한 하나님 사이에 서서 중재자가 될 수 있다. 이런 초자연적 빛이 있어 우리는 다른 어떤 걸로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확실히 지키시는 그리스도를 인식하게 된다.

 

 

8. 진정한 영적 체험은 다른 결과를 낳는다         

 

아주 사악한 죄인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을 보게 될 때 왜 하나님이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구원하려 하는지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피가 어떻게 죄값을 대신하는지 그는 과거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알 수 있고 그 보혈이 극악한 죄의 대가라는 것이 얼마나 보배로운지 알 수 있다. 이제 이 영혼은 자가 자신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중보와 보혈과 순종의 가치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그리스도의 가치를 보게 될 때 이 불쌍하고 죄만은 영혼도 어떤 설교나 책자에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안식을 갖게 된다.

 

누구든 자기 자신의 눈으로 온전한 믿음과 신뢰의 토대(기초, 원천)를 보게 될 때 그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구원하는) 믿음(saving faith)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요 6 : 40)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요 17 : 6 ~ 8)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이, 그 모습이 인간의 의지를 사로잡고 인간의 가슴을 마력처럼 끌어당긴다. 외적으로 하나님의 장엄함을 나타내는 영광스러운 모습에 인간들은 압도당하게 되며 어쩌면 그 모습을 견디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 영광의 모습을 심판날에 볼 것이다. 그때 악인들은 하나님 앞에 불리워 갈 것이다. 악인들도 이 영광의 광경에 당연히 압도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 가슴속에 있는 적의는 그대로 강력하게 남아 대적하고자 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적이며 영적인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지고의 사랑을 담은 한 줄기 광선이 가슴속에 비취어 그 안에 있는 모든 적대감을 압도한다. 이 광선의 비췸을 받은 영혼은 마치 전능한 권능으로 이끌리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사랑의 구세주를 이해하게 될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영접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 참된 회심자의 삶을 살면서 참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시작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위해 죽었다고 막연하게 느끼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 정도의 애매한 느낌만으로도 일종의 사랑과 기쁨을 갖게 해준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로 인한 처벌을 면하게 된 것에 감사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은 사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기애에 기초한 느낌이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거짓된 믿음으로 미혹되어 있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가슴속에 느낄 때 하나님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갖게 해준다. 바로 거룩한 빛이 하나님 본성인 최고의 사랑을 비추어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에 기초한 사랑은 자기애에서 나오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자기애에 기초한 사랑은 인간은 물론 마귀도 가질 수 있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참된 사랑은 그 영혼에 영적이며 거룩한 기쁨을 누리게 해준다. 이 기쁨은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이요 예수님 안에서 뛸 듯이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 안에는 기쁨이 없다. 하나님 안에서만 참 기쁨이 있다.

 

 

9.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모습 - 하나님이 준 최대의 선물

 

거룩한 것들에게 드러나는 아름다움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것들을 따르고 싶어하는 진실하면서 간절한 욕구를 갖게 한다. 이런 욕구는 마귀의 욕망과는 다르다. 마귀는 자신의 파멸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그런 운명이 어떻게든 달라지기를 소망한다. 이런 소망에 기초하여 마귀의 욕망은 발생한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나온 욕구는 어린아이가 젖을 달라고 갈망하듯이 자연적이며 자유로운 욕구이다. 기독교인의 욕구가 마귀의 욕망과 아주 다르기 때문에 그 욕구와 욕망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은총에서 나온 경험과 거짓 것을 구별하는데 도움이 된다.

 

거짓된 영적 경험은 교만을 낳는 경향이 있다. 이 교만은 마귀가 지은 특별한 죄이다.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디모데전서 3 : 6) 교만은 때론 큰 겸손으로 위장을 하기도 하지만 거짓된 영적 경험의 필연적 결과이다. 거짓 경험은 자아로 무장되어 있고 자아를 토대로 자란다. 거짓 경험은 이런 저런 식으로 자기를 과시하며 살아간다.

 

 하나님에 대해 큰 사랑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자기 사랑이 큰 것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매우 겸손하고 자기의 겸손에 대해 아주 자랑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오는 감정과 경험은 이와는 정확히 정반대이다. 하나님이 마음속에 진정으로 역사할 때 겸손이 생긴다. 과시하거나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은 전혀 생기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경외로우며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을 인식하면 교만은 죽으며 그 심령은 겸손해진다.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아니 그 빛만이 그 심령의 추함을 드러낸다. 누구라도 이 빛을 참으로 잡으면 하나님을 더욱더 크게 하고 자기 자신을 더욱더 작게 만드는 그런 지속적인 과정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총이 마음속에 역사하게 될 때 나타나는 또 다른 결과 하나는 모든 악을 미워하게 되고 거룩한 마음과 삶으로 하나님께 응답한다는 것이다. 거짓된 경험을 했을 때도 일정한 정도의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다. 흔히들 말하는 종교적이라는 그런 열정이 굉장히 발휘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열정은 선한 역사에 적용될 열정이 아니다. 이들의 종교는 하나님에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바치는 예배다. 이런 맥락을 생각하면서 사도 야고보가 하는 말을 들어보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마귀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야 2 : 19 ~20) 다시 말해, 행위 곧 선한 역사가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총을 진정으로 경험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요한1서 2 : 3 ~ 4)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마음속에서 뛸 듯이 기쁠 때 그 기쁨을 어떻게 달리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나오는 내적 선량함과 참된 종교성은 얼마나 뛰어난 것인가? 여기 있는 여러분은 천국의 천사와 성도들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경이로운 경험들을 갖고 있다. 여기 있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자체를 경험하는 최상의 경험을 갖고 있다.

 

우리는 단지 피조물에 지나지 않지만 하나님 자체의 아름다움에 참여한 것이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베드로 후서 1 : 4)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를 징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히 12 : 10)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하심의 권능으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은 서로 내주하게 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한 1서 4 : 16)

 

이런 특별한 관계 때문에 이 관계에 들어선 자는 어떤 피조물 못지 않게 행복하고 축복될 수밖에 없다. 이 관계는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다. 이 선물은 하나님이 특별히 좋아하는 자에게만 주는 것이다. 금이나 은이나 다이아몬드나 세상 왕국들은 성경에서 이르는 개나 돼지에게 하나님이 줘 버리라고 내버려두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보는(beholding) 이 엄청난 선물은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만 주는 특별한 은총이다. 육과 혈로는 이 선물을 줄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선물을 하사할 수 있다. 이런 특별한 선물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써 자기 택한 자들을 위해 얻은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사랑을 최고로 나타내는 징표요, 그리스도의 수고로 얻은 최상의 열매요, 그리스도의 피로 산 가장 귀한 품목인 것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 선물을 받음으로써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이 선물이 다른 어떤 것보다 성도들의 위로가 된다. 이 선물을 소유한 심령이 멸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로 영생의 선물인 것이다. 영생이 시작된 것이다. 이 선물을 가진 자는 절대 죽을 수 없다. 영광의 빛이 밝아오는 것이다. 이 선물은 천국에서 오며 천국의 품성quality을 지니고 있다. 이 선물을 가진 자를 천국으로 옮길 것이다. 이 선물을 가진 자들이 황야에서 방황하거나 파도에 떠밀려 바다 위에 던져질 수도 있다. 그러나 끝내는 천국에 도달할 것이다. 천국에서 천국의 불꽃이 온전해지고 늘어날 것이다. 천국에서는 성도들의 영혼이 환히 빛나며 순수한 불꽃으로 변할 것이며 아버지의 왕국에서 태양처럼 빛을 발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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