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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 - 의의 전가의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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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앙 연구가들/죠나단 에드워드

2007. 7. 7.

 

조나단 에드워즈의 의의 전가의 교리 |

이 소논문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칭의 교리에 대해, 구속사적으로 접근하여 아주 핍진하게 논의를 전개한다.

저자는 에드워즈의 칭의 교리의 핵심은 전가에 있으며, 그 이유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주장은 개혁주의 노선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에드워즈의 전가의 교리를 파고 들어가면, 그리스도의 연합이라는 핵심적인 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칼빈이 주장한 바 있으나. 칼빈의 그것보다 에드워즈의 연합은 매우 내밀한 관계에 있다.

 

그리스도와 연합은 예수님께서 성부와 인간 사이에서 연합하게 된다. 하나님과 구속사적으로 연합함으로 그리스도는 자신의 성육신과 공생애와 희생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만족시킨다. 인간의 편에서는 그리스도는 성도를 연합시켜, 한 지체가 되게 하시며, 신랑 되신 예수님의 신부가 되게 해 주시어,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가 인간에게 전가되게 하신다. 그러나 이 전가는 법적인 허구가 아니라, 실효적인 의의 전가이다. 더 나아가면 의가 주입된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의롭게 된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에서 전가되는 실제적인 의다. 이른 강 교수님은 ‘구성적인 의’라고 보고 있다.

 

강 교수님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리는 개념을 통해 에드워즈의 칭의론에서 전가의 교리의 핵심을 제시하며, 이 전가의 교리는 법적인 허구라는 개혁주의 교리보다 한층 더 발전되고 내밀해진 에드워즈의 칭의 교리를 제시한다.

-강웅산 교수님의 이 논문에서 눈에 띄는 것은 순종과 고난, 수동적 의와 능동적 의, 소극적 순종, 적극적 순종이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순종이자 의라른 것을 주장한 점이다.

 

이 주제에 관햐여 프린스턴대학의 이상현 교수님은 <삼위일체, 은혜, 그리고 믿음> '믿음만으로 칭의를 얻음'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신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믿음에서 선한 행위와, 믿음의 견인을 이끌어 낸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을 향한 경향성이  주어지고,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죄를 이기시고 끝까지 견디셨기 때문에 그 견인이 신자의 믿음에 내재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우리 믿음이 무언가 능력이 있어서 칭의를 전가받게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 있는 자연적 전합성에 의해 의롭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믿음에 있는 경향성의 요소가  거룩함의 토대를 제공해주고, 자연적 적합성을 제공해 주어 의를 전가받게 된다고 한다. 이 의는 법정적 의이자, 실제적인 의지, 아르미니안이 주장하는 것처럼 법적 허구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의는 죄에 대한 고난(십자가의 죽으심)과 율법에 대한 순종이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인해 의롭게 되었기에 실질적인 순종으로서 의롭게 된것이다.  

-믿음에서의 경향성, 믿음의 견인, 믿음의 선한 행위의 성격, 법정적 칭의이자 실질적 칭의에 대한 개념이 매우 잘 정리되어 있다.

 

이 논문에 관한 논평은 좀 더 정리해서 업데이트 하겠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의의 전가의 교리

 

강웅산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는 로마서 4장 5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어떤 모양의 덕과 선행을 통해서도 아닌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칭의된다”는 교리를 형성한다.1)  이 교리에서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뜻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써만 우리가 칭의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교리 속에서 신학적 해석을 요하는 문제로 부상하는 질문은 그리스도의 의가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되어서 우리가 칭의 되느냐는 점이다. 즉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문제인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에드워즈의 칭의의 개념의 기초가 되는 의의 전가가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아보는데 그 목적을 둔다.  그 의의 전가의 개념을 파악하는 목적을 위해 첫째, 의의 전가의 필요성, 둘째, 그리스도의 의의 구속사적 의미, 그리고 셋째, 의의 전가의 특성을 논할 것이다. 이 논문은 방법론적인 의미에서 에드워즈는 의의 전가 개념의 구성과 전개를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의 개념을 통해 하고 있음을 아울러 보이려고 한다. 즉 그의 구속사적/약신학적 그리고 기독론적 이해가 이 연합의 개념을 통해 어떻게 의의 전가의 개념에 나타나는지 살피게 될 것이다.

 

I. 의의 전가의 필요성

A. 도덕적 결함

에드워즈의 칭의론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의인이 아닌 아직 죄인이었을 때 칭의 하셨다는, 소위 “죄인에 대한 칭의 justification of the ungodly)”에서 출발한다.2)  여기에서 에드워즈는 칭의 받기 전의 인간의 상태가 바로 의의 전가를 필요로 함을 지적한다. 

 

아담의 타락의 결과로 죄의 오염(pollution)과 죄책(guilt)을 안고 태어나는 인간의 현실을 말하는 언약신학에 근거한 그의 인죄론은 칭의 전 상태의 인간을 이해하는 그의 신학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3)  아담과의 연합을 통해 함께 저주받고 진노 가운데 놓인 인간은 그 진노가 거두어지고 죄가 가리어지기 전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 없을 뿐 아니라,4) 만약 그런 죄인을 하나님이 용납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에5) 의의 전가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 진다. 특히 죄의 정도와 심각성에 대한 에드워즈의 이해는 의의 전가의 필요성을 한 층 더 고조시킨다. 그에 따르면, 죄의 정도는 “[어떤] 대상에 대해 부인하거나 손상시킨 것에 대해 비례하는데, 즉 그 대상의 존엄의 위대함이나 가치에 비례 한다”는 것이다.6) 즉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영광과 그의 고귀하신 도덕성을 훼손했기 때문에 그 죄의 정도는 “무한대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무한대한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 드리기에 역시 부적합한 존재인 것이다.7)  결국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인간의 도덕적 상태, 즉 도덕적 결함은, 의의 전가를 필요로 하게 되는데, 인간의 부적격함을 대신 할 수 있는 존재는 자기의 무한대한 가치(의)로 인간의 무한대한 악을 덮을 수 있는 분이어야 만하는 것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순종을 할 무한대한 존귀의 사람이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불순종했던 상대적으로 우리의 무한대한 악함 때문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존재는 그의 손종의 가치로 우리의 불순종의 무가치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인데, 우리가 무가치한 만큼 위대하고 고귀한 존재가 우리는 필요한 것이다.8)

그 존재에 대한 에드워즈의 답은 그리스도이다.“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대신하되, 즉 우리 안에 마땅히 있어야 할 그 완벽한 내적 의를 대신하여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다.”9)  고로 에드워즈는 인간이 칭의 되는데 있어서 의의 전가가 필요함을 말하면서, 일차적으로 인간의 도덕적 결함, 즉 인간이 칭의 되기 전에는 죄인이었다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필요성을 찾았다.

 

B. 칭의의 법정적 특성 (forensic nature)

에드워즈는 “칭의는 성경에서 그 용어가 쓰이는 것을 볼 때, 명확하게 법정적 (forensic/judicial) 용어이며 판결의 활동이다”라고 밝히고 있다.10)  즉 그에게 있어서 법정적 개념이란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판사의 역할로 설명될 수 있다.“판사의 역할은 판결이 법대로 이루어졌나를 주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판사로서 판결을 내리실 때, 악한 자를 의롭다고 한다거나 유죄를 무죄라고 할 수 없으며, 당연히 의가 없이 칭의 할 수 없는 것이다.”11) 재판의 결과에 따라 칭의(justification) 또는 정죄(condemnation)가 선언되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12) 내려지는 것으로, “이 법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원히 변치 않는 의의 규칙으로써, 심판의 규칙이기도 하다. … 그 법에 따라 한 사람이 칭의 또는 정죄 될 수 있는데 어떤 죄도 법에 의하지 않고는 정죄될 수 없다.”13)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칭의의 법정적 특성이라면, 에드워즈가 애초에 말한 “죄인에 대한 칭의(justification of the ungodly)”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에드워즈는 칭의라는 것이 법정적 개념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의가 없이 한 사람을 칭의 하시지도 않을 뿐더러 하실 수도 없다”고 잘라 말하고 있다.14)  즉 의가 없는 죄인을 칭의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부적합한 것이므로, 칭의의 법정적 개념은 실제로 의가 없는 죄인을 칭의하기 위해서는 의의 전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논리이다.

 

특별히 여기에서 에드워즈의 법정적 개념의 칭의는 허구(fictitious)나 가상(hypothetical)이 아니라 실제(real)로 우리의 것이어야 한다.“우리의 재판장은, 우리 스스로 이루었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이룬 것이 우리의 것으로 간주되던지, 어떻게든지 우리 속에서 완전한 의를 찾지 못하면서 우리를 의롭다 할 수 없다.”15)  그러므로 죄인에게 전가되어 칭의의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의는 실제로 그리고 사실상 “우리에게 속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죄인에 대한 칭의”라는 표현에서 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죄인으로 이 때 그리스도의 의가 사실상 그 죄인의 것이 되는 것이다.“하나님은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실제로(actually) 그들에게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기신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의 실제(actual) 유익(communion)을 누리는 것이 당신의 지혜 속에서 합당하다고 여기시기 때문이다.”16)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성경이 말하는 법정적 칭의의 개념은 죄인을 가상적으로 또는 허구적으로 의롭다고 간주해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의가 실제로 죄인의 것이 되는 의의 전가에 근거하여 칭의가 된다는 논리인 것이다. 언약의 개념에 근거한 그의 연합의 개념은 스스로는 도덕적 자격이 없는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가 칭의의 법정적 특성을 만족시키게 한다. 고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칭의의 법정적 특성은 의의 전가가 있어야만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C. 칭의의 이중 효과

에드워즈는“칭의란 한 사람이 죄책과 당연히 받아야 할 심판으로부터 자유해지고 생명의 상급을 보장하는 의가 그에게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용납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17)  여기에서 에드워즈가 주장하는 것은“칭의는 두 가지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하나는 죄 용서와 화해를 통한 죄책의 제거로 이것은 단지 소극적(negative) 의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제거하는 것이고, 둘째는 죄인을 적극적(positive)으로 의롭게 보아줌으로써 단순히 더 이상 진노의 대상이 아닌 것 이상으로 은총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18)  에드워즈의 강조는 칭의의 결과는 죄책의 제거나 원래의 순수(original innocence)로의 회복 그 이상의 것이라는 것이다. 즉 칭의의 의미 속에는 “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뭔가 적극적인 것이 필요”함을 지적하고 있다.19) 에드워즈는 그 예를 먼저 아담의 경우에서 찾았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킨 결과로 영생할 수 있었다고 가정해 볼 때, 완전한 순종의 삶으로 인해 의롭다고 인정되는 그의 칭의에는 죄로부터 사함을 받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아담은 그가 그의 행위를 다 이루었을 때까지 의롭다함을 받지 못했을 것이며, 그때 그의 칭의는 [행위를 다 이루었다는] 확증이었다. [칭의는] 그가 행위를 다 이루었으며 상급을 받을만한 자격으로 설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승인이었을 것이다.20)

 

에드워즈에 따르면 아담의 칭의는 (1) 그의 순종에 삶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과 (2) 영생의 상급으로 이해될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 아담인 그리스도의 칭의는 에드워즈에게 칭의의 이중적 효과를 설명하기 위한 또 다른 예가 되고 있다.  이 경우에는 죄 사함 외에도, 높임을 받는 적극적인 의미가 포함하고 있다.

우리의 두 번째 보증인 그리스도는 (사실 그가 보증이 되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칭의를 통해 [같이] 칭의되었는데) 그가 아버지가 명한 일을 다 완성할 때까지 그리고 모든 고난을 통하여 아버지의 명령을 다 준수할 때까지는 칭의되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그의 부활을 통해 칭의된 것이다. 그가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셨지만 성령에 의해 다시 살아나셨을 때(벧전3:18), 육신으로 다시 나타나신 그가 성령에 의해 칭의된 것이다(딤전3:16).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칭의하셨을 때, 죄의 모욕에서부터 그리스도가 놓임을 받게 하셨으며 그(죄)로 인한 더 이상의 고난으로부터 사하셨을 뿐 아니라, 그가 한 일에 대한 상급으로 그를 영생과 존귀의 시작으로 옮기셨다.21)

 

그리스도의 칭의를 에드워즈는 (1)“고난으로부터의 놓임”과 (2)“영화의 상급”으로 이해하면서 아담의 가상의 칭의에서 없었던 죄로부터의 사함의 의미가 그리스도의 칭의에서는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에드워즈는 믿는 자의 칭의는 정확하게 그리스도의 칭의의 특성을 따르고 있음을 지적한다.

신자의 칭의는 죄 사함 또는 죄책으로부터의 방면을 의미할 뿐 아니라, 의의 상급인 영광에 대한 권리를 갖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주 분명하게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데, 특히 로마서 5장 1-2절에서 사도 바울이 칭의를 통해 이 이중의 효과(joint benefits)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2)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칭의는 단순히 아담의 원죄 이전의 상태로 복귀되는 것이 아니라 의의 상급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화평을 누리는 것,” 즉 죄 사함 이외에도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 또는“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는 의미가 칭의의 결과/효과로 내포된다는 것이다. 결국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우리가 칭의의 이중 효과/혜택(remission과 reward)을 누린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결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의 칭의의 결과를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칭의의 효과/혜택을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됨으로써 가능하게 되는 것으로써 에드워즈에게는 성도의 칭의의 개념을 논하는데 있어서 의가 먼저 전가되어야 함은 당연한 논리인 것이다. (차후에 그리스도의 의가 갖는 구속사적 의미가 칭의의 이중 효과에 대해 어떻게 근거가 되는지 다루게 될 것이다.)

 

D. 하나님의 영광의 만족

하나님의 법의 관점과 하나님의 법이 준수됨으로써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관점에서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필요성을 추가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을 나타내며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세우는 점에 있어서 중요하다. 에덴동산에서 주신 하나님의 법은 아담에게 있어서 영생의 길이었다. 그것은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권세에 합당한 영광을 돌림으로써 영원한 행복을 획득할 수 있었던 기회”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맥락에서 에드워즈는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만족 시킨다는 관점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시키고 있다.

 

하나님은 아담을 영원한 축복 가운데 두시기 전에 그의 적극적인 순종을 요구하셨는데 즉 아담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법을 주시어 아담이 그 법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회로 삼으셨다. 이 법이 합당한 존귀를 받지 않는 일이 없도록 법의 만족을 요구하신 것이다.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의 순종은 아담의 순종이 하나님의 법에 돌렸을 존귀보다 훨씬 더 큰 영광을 돌렸다는 것이며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은 만족을 하셨다.23)

그리스도가 둘째 아담으로 오셨다는 의미는,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법이 요구하는 것을 다 이룸으로써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일에 드러나는 법의 모든 형벌을 당하시며(소극적인 면) 그리고 법의 모든 요구를 완전하게 지킴으로써(적극적인 면) 법을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비를 우리의 가슴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법 자체를 성취되어져야 하고 만족되어져야 할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 중심으로 인정하며, 그 법을 세운 권세를 그리고 그 법의 무한한 존귀가 유지됨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24)

 

여기에서 법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법의 소극적인 면(법을 어긴 것에 대한 심판을 받는 것) 외에도 적극적인 면(법의 모든 요구를 성취하는 것)도 만족시키는 것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에드워즈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법의 권세와 존귀는 이 두 가지 면에서 충족되어져야 한다고 이해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능동적(active) 순종에 의해 칭의를 받는다. 그의 능동적 순종은, 그의 고난이 법을 어긴 것에 대해 필요하듯이, 하나님의 법의 존귀를 회복하는 일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하나님은 여기셨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범한 그 법에 자신을 복종시키며 그 법에 순종하였던 것은 그 법을 지극히 존귀하게 한 일이며 그 법을 세운 권세 또한 존귀하게 하는 일이다. 고로 우리는 그의 죽음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그의 순종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다.25)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인간이 법을 어긴 것은 결국 법을 세우신 하나님의 존귀와 권세를 훼손한 것이기에 법을 완전하게 만족시키는 것만이 훼손된 하나님의 존귀와 권세를 회복시키는 길이었다. 결국 그리스도는 법의 소극적 요구사항(형벌)과 함께 적극적 요구(순종)를 모두 만족시킴으로써 인간을 대신하여 법을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존귀를 돌려드리는 일을 하신 것이다. 이미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형벌 하에 놓여 있으며 법의 적극적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인간에게 있어서,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법을 이중적인 면에서 만족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와 권세를 회복케 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 되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칭의 개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필요성을 인식하며,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가 갖는 구속사적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II. 그리스도의 의의 구속사적 의미

A. 그리스도의 의의 이중적 의미

이미 언급된 데로, 칭의의 개념에 있어서 에드워즈의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구속사적 이해는 “적극적 의(positive righteousness)”와 “소극적 의(negative righteousness)”로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은 율법이 갖는 언약신학적 특성에 근거한 그의 결론이기도 하다.  율법이 지니는 언약적 특성을 고려할 때, 인간은 죄 없는 상태로서 영생의 상급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완전하고 적극적인 하나님의 법에 대한 순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갈라디아서 3장 10절 이하의 내용에 근거하여“율법은 율법에 기록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않는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가 있음(10절)을 못 박는 만큼, 율법 안에 있기 위해서는 율법을 행하는 것 또한 강조(12절)하고 있다”고 말한다. 특별히 이미 율법을 어긴 우리 인간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갖는 언약적 또는 구속사적 의미는 우리가 해야 할 율법에 대한 순종과 우리가 받아야 할 율법의 처벌을 대신 답하는 일이라는 것이다.26)

 

그러한 언약적 특성에 의해서 에드워즈는 “소극적 의”를 “죄책으로부터의 해방” 또는 “단지 죄책이 없는 상태”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죄인인 신자는 무죄로, 죄 없는 그리스도는 유죄”로 여겨진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소극적 의”를 이루기 때문 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가 부활함으로써“우리가 지어야 할 죄책이 더 이상 그에게도 없고 우리에게도 없다”는 것이 그리스도의“소극적 의”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우리의 보증(surety)이 되신 그리스도가 전에는 [우리 대신] 유죄하고 매인바 되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유죄하지 않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의가 되신 것이다”27)

 

그러나 율법의 언약적 특성은 소극적 요구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의의 “적극적” 의미를 찾는다. 이미 언급한대로, 아담이 단순히 무죄하다는 이유로 영생을 받지 아니했다. 만약 죄가 없기 때문이라는 소극적 의만이 기준이었다면, 아담은 창조 즉시 영생을 받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 에드워즈의 논리이다. “그러나 아담은 단순히 죄를 범치 않았다는데 근거해서가 아니라 능동적(active) 순종을 통하여 영생의 상급을 받은 것이다.”28) 에드워즈는 같은 논리를 그리스도에게서도 찾는다. 

 

인간의 죄가 그리스도의 속죄(atonement)를 통해서 제거 되었다는 것만으로 그의 칭의를 이루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인간을 칭의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단순히 무죄하며 죄책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지배하는 율법에 대해 온전히 서 있다는 의미에서 의롭기 때문에 영생이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자연의 이치와 이성과 하나님의 정하신 법칙에 의해 완벽한 적극적 의라고 한다.29)

 

적극적 의는, 에드워즈가 볼 때, 소극적 의가 이루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음으로써 이룬 소극적 의의 목적은 단지 우리를 죄책과 형벌에서 구해낸 것이지 하늘에 대한 권리를 주는 것은 아니다. … 그리스도의 적극적 의가 [우리를 위해] 하늘을 사신 것이다.”30) 이른바 “사신 바 된 소유(purchased possession)(엡1:14)”또는“하늘나라를 사심(purchasing heaven)”등이 그리스도의 적극적 의의 결과인 것이다. 특별히 칭의의 의미와 관련하여 볼 때, 죄 사함만 강조하는 것은 칭의의 바른 정의가 될 수 없으며 동시에 의로운 자가 받을 영생의 상급이 같이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다.31)  그러므로 에드워즈의 칭의의 개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적극적 의와 소극적 의는“동등한 값”을 지닌다.32) 하나님의 율법의 언약적/구속사적 특성에 따라 그리스도의 의의 적극적 그리고 소극적 의미는 공로(meritorious)의 힘과 대속(satisfactory)의 힘을 가진다. 상급(reward)과 용납(acceptance)은 그리스도의 적극적 의, 즉 순종에 근거하고 있고, 죄 용서(remission)와 사함(absolution)은 소극적 의, 즉 대속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적극적, 소극적 의는 성도들을 위한 구속사적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B. 순종으로서의 의

그리스도의 의의 개념을 적극적 의(positive righteousness)와 소극적 의(negative righteousness)의 개념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에드워즈가 볼 때, 그리스도의 의 자체가 본질상 양분(dichotomy)되는 특성 때문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이 소극적 의의 개념으로 설명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 속죄의 사역이 그리스도의 의가 되는 것은 우선적으로 그리스도가 성부께 행한 순종의 일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삶 전체를 아버지와 맺은 구속언약(covenant of redemption)에 충실하기 위한 순종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단순히 속죄의 개념, 즉, 우리를 대신하여 어긴 율법에 대한 형벌을 지어야만 하는 의미만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신을 고난에 복종시킴으로써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는 순종의 행위”라는 것이다. 로마서 5:18-19에서 에드워즈는 먼저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우리가 칭의 되었음을 밝히면서 계속해서“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다(19절)"는 근거를 통해 결국“우리는 순종으로 집약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칭의된 것”이며 이 말은 “우리가 그의 순종으로 칭의되었다”는 말로도 압축된다.

 

여기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그리스도의“순종”이 그리스도의“의”를 이룬다는 지적과 함께 그것이 곧“하나님 앞에서의 도덕적 선(moral goodness)”을 이룬다는 것이다. 같은 본문에서 에드워즈는“의가 죄에 대해서 즉 도덕적 악(moral evil)에 대하여 반대의 개념으로 쓰이고 있는 것은 결국 의가 도덕적 선이라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에 대한 모욕의 반대 개념으로 쓰인 의가 결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계명을 어겼던 불순종의 반대 의미인 순종이 실제로 계명을 지키는 적극적인 순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 고 설명한다.33)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순종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단순히 율법이 요구하는 형벌을 계산(transactional)하는34) 의미만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을 자아내는 요소, 즉 순종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미를 소위 개혁주의 전통에서 말하는 적극적 그리고 소극적 순종이라는 구분을 반기지 않을뿐더러35) 그러한 구분은 성경도 익숙하지 않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한 순종은 좀 더 쉬워 보이고 다른 순종은 좀 더 어려워 보일 수 있으나 그것도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며, 이것을 더욱이 “능동적-수동적이라는 전혀 반대 의미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지적이다.36)

 

에드워즈가 그리스도의 고난(death)과 순종(life)을 하나의 종합적인 순종(grand act of obedience)의 의미 속에 포함하는 데에는 그가 갖고 있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이해와 관련이 있다. 즉 구체적인 내용의 법 준수를 요구하는 모든 법령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도덕법을 이룬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담의 선악과, 아브라함을 향한 이삭의 제사 요구, 유대인들의 할례 등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정신은 법은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법의 요구가 고난이든 순종의 삶이든 모두 공통적인 특징은 법에 대한 순종이란 점이다. 비록 아담과 그리스도에게 각기 요구되었던 구체적인 순종의 모양은 달랐지만, 지켜졌어야 하는, 그리고 마침내 회복된, 법 정신은 하나님의 권위와 존엄이었던 것이다.“그래서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은 것은 정확히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법령의 내용이 아니었지만 우리가 칭의 되는 순종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37)

 

여기에서 에드워즈가 그리스도의 삶(죽음 포함) 전체를 통해 동시에 속죄(propitiatory)와 공로(meritorious)의 의미를 찾는 것이 그리스도의 속죄의 의미를 약화시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결론은 그의 글들 가운데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38)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그의 강조는 오히려 “속죄를 이룬 것만이 아니라 영생을 사신”것이며, 우리를“죄로부터의 구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의 구원”인 것이다. 결국 흔히 수동적 순종으로 여겼던 그리스도의 죽음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순종 전체를 놓고 볼 때 가장 절정에 이르는 사건이며 더 나아가 그 사건 속에서 능동이니, 수동이니 식의 의미를 나누는 것이 무의미 하다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순종의 삶의 최고의 표현으로써 성부가 보시기에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는 행동에는 우수한 의와 초월적인 도덕적 선이 있기 때문에”단순히 속죄의 값(ransom)을 지불하는 것 이상으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되는 것이다.39)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순종이 아버지에게 최고의 도덕적 미(beauty)가 되는 것은 그의 언약신학적 이해와도 관련이 있는데, 특히 언약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이 능동적(active)이고 자발적(voluntary)인데 그 이유를 두고 있다. 그 이유로써 에드워즈는 먼저 그리스도가 원래는 성부에 대해서 종속관계가 아닌 동등한 관계였음을 지적한다.“원래는 그가 자신을 인간의 위치나 인간의 법 밑에 또는 하나님께 대해 자신을 어떤 상태라도 복종시킬 의무가 있지 않았다.”그러나“온전히 자신의 권리로써”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어야 되며 인간의 법 밑에 놓여야 되는 언약의 내용에 능동적으로 자발적으로 자신을 복종시키신 것이다.40)

 

인간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종의 위치가 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한, 그 이전에 “그는 오로지 동의와 언약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이 되신 것이다”는 강조이다.41)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언약에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복종한 것이 아버지의 기쁨을 유발하기에 충분한 미(beauty) 즉, 의(righteousness)가 된다는 에드워즈의 미학적 이해는42) 기능적 삼위일체(economical Trinity)와 구속언약(covenant of redemption)과의 관계에서 기인한다.43) 간략히 정리하자면, 물론 그리스도가 중보자로 오시는 것이 그의 기능적 특성에 따라 가능한 것임을 인정하지만, 그 기능적 특성 때문에 자동적으로 기계적인 복종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성자의 기능적 특성은 삼위일체의 존재론적 동등을 전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부가 성자에게 그의 영광에 어긋나는 굴욕을 요구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성자가 성부에게 구속사역상 종속의 관계에 놓이기 위해서는 그 사이에 어떠한 동의가 전제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언약신학에서 말하는 구속언약(covenant of redemption)이다. 이 언약에서 성자는 능동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순종하였기에, 그 자체가 성부가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며, 그의 기쁨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것이며, 고로, 의가 된다는 에드워즈의 주장이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부분 까지도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순종의 의미에 포함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삶 전체가 아버지의 훼손되었던 존귀와 영광을 회복하며, 그래서, 아버지를 기쁘시게 했던, 의가됨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에드워즈의 칭의의 개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다고 할 때, 그 의미는 곧 바로 그리스도의 순종의 전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어떻게 그리스도의 순종이 구속사적 의미에서 의가 되는지가 에드워즈의 의의 전가 개념에서 지적되어야 할 내용인 것이다.

 

III. 의의 전가의 특성

A.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의 의의 전가

에드워즈의 칭의의 개념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사상은 의의 전가가 칭의의 신학적 논리적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44)  죄인에게 전가된 의는 하나님 보시기에 도덕적으로 아름답고, 신학적으로 의로운 것이기에 죄인을 의인으로 부르시기에 충분한 것이 된다. 이렇게 말을 하는데 있어서 에드워즈가 전제하는 것은 의의 전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먼저 우리가 그[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그가 우리에게 의가 되고 칭의가 된다. … 우리가 그 안에 있는 것이 우리가 용납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45) 

 

그리스도의 것이 우리의 것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어야만 되는 이유를 에드워즈는 두 가지 관점, 즉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연합, 그리고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연합의 관점에서 설명한다.46) 중보의 의미는, 에드워즈가 볼 때, 그리스도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 양쪽 모두와 동일시(identified) 되는 의미도 내포한다는 것이다.47)

 

먼저,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의 의의 전가는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연합을 전제한다고 말한다. 에드워즈는 그 이유를 (1) 그리스도의 신성과 (2) 성부의 성자에 대한 사랑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먼저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연합이 우리의 의의 전가를 위해 근거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무한대한 고귀함은“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남을 위해서도 가치가 있는”효과가 있기 때문임을 지적한다.48)

 

아버지와 동등한 그리스도의 무한한 고귀함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진노를 풀고 그 분의 공의를 회복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존재론적(ontological) 삼위일체에 근거한 그리스도와 성부의 동등함만이, 성부의 관점에서 볼 때, 성부를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며, 에드워즈는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이 점을 전제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둘째, 성자에 대한 성부의 사랑의 관점에서 볼 때 역시 우리의 의의 전가는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연합을 전제하고 있다.

 

에드워즈는 그 이유를 하나님의 존재론적 삼위일체가 구속의 사랑보다 앞서는데서 찾고 있다. 즉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삼위일체적 사랑은 아버지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아들이 치른 고난과 모든 과정에 대해 무한한 가치를 부여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전가 받게 될 그리스도의 의는 결국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으로 인해 더욱 가치를 인정받는 의라는 개념이 숨어 있다. 아들에 대한 성부의 존재론적 사랑은 아들의 자발적인 중보 사역을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 보게 되며, 성부를 더욱 기쁘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에드워즈에게는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를 위해 의(미)가 되는 근거인 것이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와 성도가 한 몸 됨을 근거하여 이렇게 말한다.“만약 하나님이 그  거룩과 사랑할만함 때문에 머리를 사랑하고 용납하신다면, 그는 머리와 지체를 결코 분리하지 않으실 것이며, 오히려 그 머리의 고귀함으로 인해 지체들을 용납하시고 기뻐하실 것이다. … 우리가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그를 덧입고 있음을 보심으로써, 즉 우리가 덧입은 그의 아름다움 때문에 우리가 용납되고 사랑받게 되는 것이다.”49)

 

둘째,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의의 전가는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연합을 전제하는데, 역시 (1) 그리스도의 인성과 (2)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먼저 그리스도의 인성의 관점에서, 에드워즈는 그리스도가 성육신을 통해서 인성을 입으심으로써 자신을 우리에게 연합시키셨다고 말한다. 이 말의 중요성은 그가 우리와 같이 되심으로써 우리의“큰 형”이 되셨으며 하나님 보시기에 택함을 받은 자들을 자신 안으로 연합시키셔서 그가 정당히 우리의 머리로 보이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인성을 입으심으로써 우리와 연합하셨다는 것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다는 말, 즉 신자가 그의 인성이 의미하는 것을 취한다는 말로써 이해할 수 있으며, 결국 신자가 그리스도의 영을 취한다는 의미”로써 종합 될 수 있다고 해석된다.50) 여기에서 에드워즈는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을 취하는 것, 즉 그리스도의 영의 내재와 연결짓고 있다. 성령의 내재를 통해 신자는 신화(deification)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인성을 통해 이룬 구속사적 사역의 효과와 의미가 전가됨을 말한다.51) 둘째,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관점에서, 에드워즈는 연합의 근거를 찾는다.

 

 “사랑을 주는 사람(lover)이 기꺼이 사랑하는 사람(beloved)을 위해 대신하는 그 사랑(love), 즉 최후의 지경까지도 … 심지어 완전한 파멸과 파괴에 이르는 경우에서도 대신 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이야말로 완전한 연합을 이룬다. 즉 하나님은 기꺼이 그리스도가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한 일들과 고난당한 것들이 그들에게 전가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기시는 것이다.”52) 에드워즈의 어거스틴 식의 표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함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성부와 성자 간의 삼위일체의 사랑이 아들과 혼인하여 있는 신부에게까지 연장된다는 것이다.

 

 이 사랑이 에드워즈에게 특별히 의미가 있는 것은, 이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는 신부를 품어 안는데 수반되는 값(고난)을 지불한다는 것이다. 즉 그(lover)의 사랑(love)의 크기가 그가 사랑하는 신부(beloved)를 위해 어떠한 고난을 감수하는지로써 표현되고 있다. “만약 그들의 죄책과 형벌을 짊어질 여지를 보이지 않으면서 그리스도가 죄인들과 사랑으로 연합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53)  즉 그의 사랑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의 신부의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대속이 연합을 이룬 사랑의 필연적인 귀결이 되는 것이다. 이 점이 에드워즈에게는 의의 전가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 만족시킴으로써 칭의의 법정적 특성 또한 충족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런 의미에서 의의 전가의 환경(context)인 동시에 그 의미를 규명하기 위한 신학적 논리적 전제가 되는 것이다.

 

B. 전가의 구성적 실제(constitutive reality)의 의미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의의 전가가 이루어진다고 할 때, 그렇다면 실제로 전가를 통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에드워즈의 법정적 칭의의 개념에서 알 수 있었듯이, 그에게 있어서 전가(imputation)란 단지 가치나 권리가 이양(transfer)된 것으로 간주하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즉 죄인이 칭의 되기 위해서는, 그는 주장하기를, “죄인의 실제적 (real) 의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정당하게 그들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의가 없는데 아무것도 근거하지 않고 죄인을 의롭게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은 것을 그런 것처럼,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보지 않으신다. 이것은 개념이 아니라 실제(reality)이다.”54)  앞에서 죄인에 대한 칭의가 단순히 개념상의 간주가 아니라 실제적 사실에 근거한다는 의미에서 의의 전가의 필요성을 말하였다. 거기에서 의의 전가가 칭의의 사실적 근거가 된다는 것은, 에드워즈가 볼 때에,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됨으로써 우리의 실제적 의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즉 법정적 의미의 칭의는 소위 말하는 “법적 허구(legal fiction)”나 “마치(as if)”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의의 전가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할 때, 에드워즈는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는 이제 실제로 그와 연합한 자들의 것이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의 연합을 통해 실제(what is real)가 법적인 것(what is legal)의 근거가 된다.”55)

 

에드워즈는 연합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의 전가가 존재론적 변화는 절대 아니어도 사실상 칭의의 근거를 형성(what is real)하는 의미로 말하고 있다. 이 개념을 Gaffin-Murray 용어를 빌어 “구성적 실제(constitutive reality)”라고 말할 수 있다. Richard B. Gaffin Jr.는 부활을 통해 공증된 그리스도의 의가 그와 연합되어 있는 자들에게 “법정적 구성의 선언(forensically constitutive declaration)”이 됨을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와 더불어 같이 일어났다는 의미와 연결되는 칭의의 개념은 신자의 주관적 회복이나 변화(존재론적)보다도 그리스도의 부활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가 연합 안에서 신자의 것이 되는 실제를 이룬다는 의미의 지적이다.56)

 

그런 의미에서 개핀의 “법정적 구성의 선언”은 에드워즈가 의도했던 연합 안에서 의의 전가가 “구성적 실제”를 이룬다는 개념과 일치하고 있다고 하겠다. 같은 개념을 John Murray의 “관계(relation)”라는 표현에서 찾을 수 있다. 머리(Murray)의 칭의 개념에 따르면, “어떤 사실의 선언은 그 사실의 존재를 전제한다”고 한다. 즉 죄인에 대한 칭의는 의롭다는 선언 외에 또 다른 동작을 전제하는데 이 동작은 “칭의가 선포될 수 있도록 하는 관계(relation)를 형성하는 것이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칭의에 있어서 선포하시는 일 외에도 선포의 근거가 되는 상태도 구성(constitute)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머리는 구성적 활동(constitutive act)라고 부르는데, 이 활동은 칭의의 법정 개념을 만족시키는 “새로운 법적 관계의 구성(constituting of a new judicial relation)”이 된다. “의의 전가가 있다는 말은, 그 구성적 활동이 이루는 뭔가가 있다는 가장 명백한 지적이 된다.” 즉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구성적 활동으로서의 의의 전가는 그 선포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57)

 

에드워즈가 “실제의 것(what is real)이 법적인 것(what is legal)의 근거가 된다”고 할 때,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전가됨으로써 실제로 우리의 것이 된다는 이해 속에서 하는 말이다. 다시 강조하면, 에드워즈의 의의 전가의 의미는 존재론적 구성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연합의 개념을 통해, 즉 언약의 개념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활동의 모든 의미가 연합되어 있는 신자들에게 “구성적 실제,” “법정적 구성의 선언,” “새로운 법적 관계의 구성”이 된다는 말이다. 

에드워즈는 의의 전가의 이론을 연합의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의 개념을 통해 부각되는 전가의 실제적 의미(what is real)의 강조는 그의 언약신학적 이해를 배경으로 한 그의 연합에 대한 이해와 매우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보게 된다.58)

 

IV. 나가는 말

이 논문에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이론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칭의의 개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그의 강조는 결국 의의 전가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로 잘 알 수 있었다. 인간의 도덕적 의로 칭의 될 수 없음과, 단순한 법적 허구(legal fiction)가 아닌 칭의의 법정적 특성과, 칭의의 이중적 효과하나님의 권위가 회복되는 일 등이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 의의 전가를 필요로 하는지 드러내고 있다.  에드워즈가 지적하는 의의 전가의 필요성은 결국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답을 찾으려고 하는 그의 신학적 방법론을 시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의가 갖고 있는 신학적 의미를 살피는 것은 전가를 통해 어떤 의미와 효과가 전가되는지를 말해 주는 중요한 작업이었다. 한 마디로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의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성부로부터 얻는 모든 것을 종합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삼위일체적 그리고 구속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개념임을 보았다.

 

그리스도의 적극적 소극적 의의 개념은 그의 순종과 속죄의 사역의 효과를 종합하는 개념으로 앞서 언급했던 칭의의 이중적 효과에 대해 구속사(historia salutis)가 어떻게 구원의 적용(ordo salutis)의 문제에 신학적 근거가 되는지 보여 주었다. 특별히 에드워즈가 그리스도의 삶 전체를, 적극적-소극적 의의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한 종합적 순종(a grand act of obedience)으로 이해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능동적 자발적 순종이 어떻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기쁘시게 하는 의가 되는지 볼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에드워즈의 구속사적 이해가 결국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전가된 의의 신학적 의미를 결정지음을 확인했다.

 

이 논문의 마지막 주제로 전가의 특성 자체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특기할만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개념이 전가의 개념의 신학적 논리적 배경(context)이 된다는 것이다. 먼저 연합이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며, 그것이 결국 어떤 의미에서 의의 전가의 근거 또는 환경이 되는지 살펴보았다. 구체적으로, 연합을 통하여 전가는 구성적 실제를 이룸으로써 그의 공식 “실제의 것(what is real)은 법적인 것(what is legal)의 근거가 된다”를 성립시켰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사상을 통해 집약된 그의 언약 개념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것이 그와 연합된 자들의 것이 되는 지를 잘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에드워즈의 궁극적인 관심사인 칭의는 인간의 어떤 선이나 행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실제)이 되는 사실에 근거한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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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in the Theology of Jonathan Edwards

 

Kevin Woongsan Kang

Credentials: Ph.D.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Assistance Professor of Systematic Theology

Chongshin Theological Seminary

 

This paper is to investigate the doctrine of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in the theology of Jonathan Edwards particularly in conjunction with his doctrine of justification. To that objective this paper will discuss about the need of imputation, the redemptive-historical significance of Christ's righteousness, and the nature of imputation. A theological method or framework that brings together Edwards' conception of the imputation of righteousness is union with Christ. For Edwards, the union with Christ sheds the light of the Trinitarian, covenantal/redemptive-historical, and christological perspectives into the subject matter in view. A significance of such attempt of Edwards can be appraised when a discussion on ordo salutis has been accomplished in light of historia salutis.

 

As to the need of imputation, the four reasons have been provided, namely, the lack of moral goodness, forensic nature of justification, dual effects of justification, and satisfaction to the glory of God. As to the redemptive-historical significance of Christ's righteousness the double meaning of Christ's righteousness and Christ's righteousness as an act of obedience have been discussed. As to the nature of imputation the paper reveals that imputation should be understood under the rubric of the theological implications of union with Christ and that the covenantal-theological character of imputation can be summed up as constitutive reality. This paper concludes that Edwards' doctrine of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can be best understood in light of union with Christ.

 

1) 에드워즈는 1734-35년에 Northampton에서 있었던 부흥 사건을 자세히 기록한 “Faithful Narrative”에서 알미니안 신학을 공격하는 목적으로 1734년 로마서 4장 5절을 근거로 이신칭의 설교를 한 것이 부흥의 불을 당기는 결과를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Faithful Narrative,” in The Great Awakening, ed. C. C. Goen, vol. 4,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2), 148.

 

2) Jonathan Edwards, Justification, in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ed. Edward Hickman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834; reprint, 1992), 1:622. (이하, Banner판 에드워즈 전집은 Works(Banner)로 Yalevks 전집은 Works(Yale)로 표기한다.)  종교개혁 이 후, 특별히 로만 가톨릭 신학에 반대하여, “죄인에 대한 칭의 (justification of the ungodly)”는 개혁주의 칭의론의 특징적 입장이다.

 

3) 에드워즈는 그의 Original Sin에서 체험과 이성을 통한 증거와 성경적 근거를 통해서 원죄를 변호하는데 특히 아담과 후손의 연합에 대한 언약신학적 이해가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담을 “공인 (public person),” “인류의 머리 (head of the human species),” “몸의 머리 (head of the whole body),” “나무의 뿌리 (root of the whole tree)” 등으로, 그리고 후손을 “가지 (branches)”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Original Sin은 전통적 칼빈주의 원죄의 개념을 부인하는 John Taylor의 The Scripture Doctrine of Original Sin에 대한 변증적 성격을 띤다.  Original Sin, ed. Clyde A. Holbrook, vol. 3,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0).

 

4) 요한복음 16장8절에 대한 설교에서 그는 죄인 된 상태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받아들여 질 수 없음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아무도 순결하고 무한하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죄인은 그 죄가 제거되기 전에는 받아들여 질 수 없으며, 그리고 의가 없이 은총으로 받아들여 질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 그의 거룩과 무한대한 지혜와 그의 거룩의 표현인 법과 일치하지 못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칭의에 있어서 죄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Sermons and Discourses, 1723-1729, ed. Kenneth P. Minkema, vol. 14,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7), 394.

 

5) “[하나님의] 거룩한 법의 공의에 의해 정죄 받은 악한 자로부터, 그 정죄가 제거되기 이 전에, 아무것이라도 용납한다면 그것은 천지의 왕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에 어긋나는 것이다.  법은 범법한 자를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버림을 받도록 정죄하였기 때문에 [정죄가 제거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를] 용납하는 것은 아직 [유효하게] 남아있는 정죄에 대해 일관성이 없는 것이며 모순이 되는 것이다.” Justification, 629; cf. “Miscellanies,” No.812.

6) Justification, 628.

7) “존중이라는 것의 가치는 그 대상에게 드려지는 그 존중의 가치에 비례하는 것인데, 그것은 의심할여지 없이 [존중을 드리는] 주체의 가치, 또는 그 주체의 존중의 가치에 비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존중을 드리는 그 주체는 자기 자신 이상의 것을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Justification, 628.

8) Justification, 628.

9) Justification, 635.

10) Justification, 636.

11) Justification, 637.

12) Justification, 623.

13) Justification, 639.

14) Justification, 636.

15) Justification, 637.

16) Sermon on Romans 4:16, (Beinecke Rare Book and Manuscript Library, Yale University), MSS.

17) Justification, 623.

18) Sermon on John 16:8, Works(Yale), 14:394; 에드워즈는 칭의 설교에서 법정적 개념을 적극적 소극적 의의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우리는 그 말(칭의)을 재판장이 한 사람을 소극적 의와 적극적 의가 그에게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에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뿐만 아니라 옳고 의로와 적극적인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원학상으로도 한 사람을 심판에서 의롭게 통과시킨다는 자연스런 의미일뿐 아니라 성경이서 사용되는 용어와도 가장 적합한 것이다.” Justification, 623; Robert A. Sungenis는 그의 Not by Faith Alone: The Biblical Evidence for the Catholic Doctrine of Justification (Santa Barbara, CA: Queenship Publishing Company, 1996), 580-81에서 에드워즈를 오해하여 카톨릭의 변화의 의(transformational righteousness)를 설명하는데 인용하고 있다.

19) Justification, 623.

20) Edwards, Perseverance of Saints, in Works (Banner), 2:597.

21) Edwards, Justification, 623.

22) Edwards, Justification, 623.

23) Edwards, “Miscellanies,” No.161; cf. No.498

24) Edwards, Concerning Faith, in Works (Banner), 2:591. 괄호 안의 설명은 필자의 것임.

25) Edwards, “Miscellanies,” No.261.  에드워즈는 No.322에서 더 자세하게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

26) Edwards, Justification, 636.

27) Edwards, Sermon on John 16:8, Works(Yale), 14:396-7.

28) Edwards, Justification, 636.

29) Edwards, Justification, 637.

30) Edwards, Sermon on John 16:8, Works(Yale), 14:396. 에드워즈가 애독하였던 Francis Turretin은 그의 Elenctic Theology에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두 가지 효과를 낳는다고 한다. “그[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의 전가로부터 두 혜택(죄의 용서와 영생의 권리 즉 양자의 권리)이 나간다. 즉 의의 전가는 칭의의 기초이며 공로적 원인으로써, 양자(adoption)와 사함(absolution)은 칭의의 두 효과로 서로 나뉘울 수 없는 의의 전가의 효과이기도 하다. 이 두 효과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의의 이중적 특성에서 나오는 것으로, 동시에 속죄와 공로의 의미를 갖는다.  전자의 의미로서 전가된 의는 죄용서의 근거가 되며, 후자의 의미로서 전가된 의는 영생의 권리의 원인이 된다.” Elenctic Theology, 16.4.5.

31) Turretin도 칭의의 정의를 분류하면서 죄사함 만을 칭의의 의미로 정의하는 입장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였다. Ibid., 16.4.2.

 

32) 에드워즈는 “Miscellanies,” No.447에서 “그리스도의 적극적 의, 또는 그가 벌은(merited) 그 값은 그가 만족시킨(satisfied) 값과 같은 가치다”라고 밝히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의 가치가 무한대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순종 또한 무한대한 가치라는 주장이다.

33) Edwards, Justification, 638.

 

34) Charles Hodge의 죄의 전가의 의미는 죄의 결과에 대한 계산상의 전가를 강조하는 듯하다. “성경에서나 신학적 용어에 있어서 죄의 전가라는 것은 죄책(guilt)의 전가이다.  그리고 죄책이란 범죄성이나 도덕적 결여나 결함이 아니며 도덕적 오염은 더더욱 아니며 그것은 정의를 만족시켜야 되는 법정적 의무를 의미한다.”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95), 2:194. 

 

35) Charles Hodge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능동적” “수동적” 구분을 하는 것은 원래 루터란의 전통으로 Fomula of Concord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덧붙이기를, “성경은 이런 구분을 그리 두드러지게 하지 않는다.  우리의 칭의 전체가 어떤 때는 그리스도의 피의 탓으로 돌려질 때도 있고,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돌려질 때도 있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순종의 가장 최고의 표현은, 그리고 그것이 없이는 다른 모든 것이 아무런 효과가 없는데, 그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 놓으신 것이다.” Systematic Theology, 3:161.  이 점에 대해서 Hodge는 Edwards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36) “능동적이니 수동적이니 하는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구분은 성경에 없으며, 단지 성경의 논리를 상하게 할 뿐이다. . . . 어느 성경 저자의 마음에도 그런 구분은 없었다고 본다. . . . 내 생각에 이것은 순종이란 말에 대한 현대적인 용법이라고 간주되는데 분명히 성경이 잘 알지 못하는 단어의 의미이다.” Justification, 638.

37) Edwards, Justification, 638. 특히 구체적인 법령에 대한 순종과 법정신과의 관계에 대해 그의 “Miscellanies,” No.381과 No.399을 참고 할 수 있다. 

 

38) Edwards, Justification, 639. 이 외에도 “Miscellanies,” No.452, No.497, No.497 그리고 시편 40:6-8과 요한복음10:17-18, 16:8, 18:11에 대한 언급에서 그리스도의 삶의 전 과정이 동시에 속죄와 공로의 의미를 이룸을 말하고 있다.

39) Edwards, Justification, 640.

40) Edwards, Justification, 637-38.

41) Edwards, “Miscellanies,” No.454.

42) 에드워즈는 소위 “자연적 타당성(natural fitness)”과 “도덕적 타당성(moral fitness)”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리스도의 순종이 어떻게 성부에게 아름답게 보여서 성부의 도덕적 선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의가 되는지 설명하여준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Justified by Faith in Christ: Jonathan Edwards' Doctrine of Justification in Light of Union with Christ” (Ph.D. diss.,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2003), 125-131 참조 할 것.

43) 자세한 내용은 Edwards, Observations Concerning the Scripture Oeconomy of the Trinity and Covenant of Redemption, in Writings on the Trinity, Grace, and Faith, ed. by Sang Hyun Lee, vol. 21, Works of Jonathan Edward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3)을 참조 할 것.

 

44) 흔히 Calvin이 칭의를 정의하기를 “죄 사함(remission)”과 “의의 전가(imputation)”로 구분하였다고 한다. 이에 반해, Turretin은 칭의를 “죄 사함(remission)”과 “의의 상급(reward)”으로 정의하는 차이를 보인다고 말 할 수도 있다 (Elenctic Theology, 16.4.2-6, 8-9.). 그러나 Calvin이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하셨다고 하는 것은 죄와 의의 정반대적(antithetical) 특성을 전제하는 것이며, 죄가 용서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mputation)가 아니고서는 될 수 없는 것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Inst., 3.11.3, 2, 6. 참조). 굳이 Calvin과 Turretin과의 차이를 말한다면 Calvin은 의의 전가를 통해 의인이 되는 것에 강조를 두었다면, Tuerretin은 의의 전가를 통해 의인됨으로 인해 누리게 될 상급/특권, 즉 양자(adoption)의 개념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지적을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에드워즈는 Calvin처럼 그리스도의 연합 속에서 칭의의 개념을 설명하지만, 칭의의 효과에 대해서는 양자의 개념을 포함하는 Turretin과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칭의의 신학적 논리적 근거로 여기는 것은 세 사람 모두에게 동일한 강조이다. 

 

45) Edwards, Justification, 625. 

46) 에드워즈는 이 연합의 특성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고 소화했다는 말하는 것은 지나친 가장”이라며 인간의 말로 이 거룩하고 신비로운 연합을 설명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인정한다. Sermon on John 16:8, 14(Yale):401.  Calvin도 여러 차례 같은 뜻을 표명했었다.  Comm. on John 14:20, 1 Cor. 11:24, Inst., 4.17.7, 32.

47) 에드워즈는 “Miscellanies,” No.764a에서 그리스도가 중보됨이 쌍방(하나님과 인간) 모두와 연합되어야함을 전제하는 말임을 지적하면서, 그리스도가 죄인의 모든 죄값을 “자발적으로” 자신이 짊어 질 때에 진정으로 연합의 의미를 이룬다고 말한다. 

48) Edwards, Sermon on John 16:8, Works(Yale), 14:401-402.

49) Edwards, “Miscellanies,” No.385.

50) Edwards, Sermon on John 16:8, Works(Yale), 14:403.

51) Anri Morimoto는 에드워즈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개념을 존재론적 개념으로 이해함으로써 에드워즈의 구원론뿐만 아니라 개혁주의 구원론 전체를 아직도 Catholic 신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Jonathan Edwards and the Catholic Vision of Salvation (University Park, PA: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5), 71-130. Calvin 시대에도 Andrea Osiander의 “essential righteousness”가 전가의 개념을 존재론적 융합으로 주장하였었다. Institutes, 3.11.5-12.

52) Edwards, Sermon on John 16:8, Works(Yale), 14:404.

53) Edwards, “Miscellanies,” No.483.

 

54) Edwards, Sermon on John 16:8, Works(Yale), 14:395.

55) Edwards, Justification, 626.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와 성도의 언약적 관계를, Calvin이 표현했듯이, 머리와 지체의 유기적 관계로 설명하면서, 그 유기적 연합은 법적 연합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 신자는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최고의 재판장을 통해 법적으로 하나가 된 것을, 또는 하나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연합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속성을 취하시면서 머리가 되시고 우리를 그의 지체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의 속성을 입고 행하신 모든 것이 . . . 우리의 것으로 여겨진다.” Ibid., 637.

56) Richard B. Gaffin, Jr., Resurrection and Redemption: A Study in Paul's Soteriology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87), 132-134.

 

57) John Murray, "Justification," in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vol. 2, Systematic Theology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84), 206-210.

58)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개념은 아담과의 연합의 개념과 평행관계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담의 원죄가 연합의 개념을 통해 어떻게 전가되는지 살펴보는 것 또한 매우 유익한 작업이 될 것이다. 필자의 “Justified by Faith in Christ,” 158-16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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