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 -의지의 자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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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앙 연구가들/죠나단 에드워드

2007. 7. 4.

 

의지의 자유>에 대하여 |

에드워즈 목사님의 <의지의 자유>에 관해서 양낙홍 교수님이 해설한 내용이 있어 인용한다.

에드워즈 목사님에 의하면, 의지의 자유는 없다. 즉, 의지 스스로의 자유-자결적 의지의 자유는 없다. 의지는 본성에 속해있다. 따라서 본성에 따라 의지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자유의 소속은 의지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의 본성에 의지가 속해 있으나, 의지는 그 본성 안에서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자유롭게 어떤 것을 의지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본성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선택할 수 없다. 자연적 능력은 있으나 도덕적으로 무능력한 것이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인간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능력이 없다면, 죄에 머무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처벌할 수 없다고 했다. 즉,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실 수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의지의 자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의지로서 회개하고 하나님게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의지의 자유는 ‘자결적 의지의 자유’와 ‘우연성’이라는 핵심적인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즉, 의지는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할 능력이 있으며, 인간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좀더 포괄적으로 말하면 우연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에드워즈 목사님은 자결적 의지의 자유는 모순된다고 한다. 의지는 본성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본성이 원하는 대로 의지가 발현된다. 따라서 본성이 자유로우면 의지는 그 자유가운데서 본성의 뜻에 순종한다.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처럼 도덕적 행위자로서 행할 수 있다면, 인간의 본성에서 자유롭게 발현되는 의지는 그에 순종해서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다. 따라서 의지에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본성에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의 본성은 타락했기에 타락한 상태를 의지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같은 도덕적 행위로서의 본성은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인간의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 인간은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유로우시며, 성화된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물론, 이때도 의지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성화된 인격이 자유로운 것이다.

 

정리-자유는 어디에 있는가?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본성에 있다.

왜냐하면 의지는 인간의 본성의 하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의 지정의 가운데 하나일 분이다. 즉, 의지는 인간의 본성에 종속되어 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의지로부터 독립하지 못한다. 따라서 자유는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있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이 자유한가? 죄를 지음으로 자유하지 못하다. 선악은 알지만 행할 능력이 없다. 도덕적으로 완전 무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자유하려면 외부로부터 자유를 공급받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최고로 자유하는 분은 누구인가? 자유의 소유주는 누구인가? 하나님이다. 따라서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자유하게 된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 인용글

<의지의 자유>는 알미니안주의를 반박하기 위한 에드워즈의 포괄적 시도이다. 알미니안주의란 용어는 칼빈주의를 반대하는 많은 교리들을 의미하기 위해 종종 아주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에드워즈의 공격의 직접적 목표인 알미니우스가 제시한 논제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가 양립불가능하다는 것,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죄인들을 위한 보편적 속죄를 확고했으므로 단지 택한 자들만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 중생된 인간은 옳은 것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에드워즈가 볼 때, 그러한 가르침들은 잘못된 것으로 당시 부항하고 있던 “유행성” 신학체계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물리쳐야만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토론을 첨예하게 하기 위해 에드워즈는 세 사람의 견해들을 공격했다. 그들은 성격상 아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반칼빈주의 교리들의 지지자들로 인정된 사람들로서 토머스 첩, 대니얼 휫트비, 그리고 아이작 와츠였다. 첩은 한때 잡화상 점원으로 그리고 장갑 제조공으로 있다가 신학적, 철학적 주제의 글을 써서 꽤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으로 교회에도 다녔으나 이신론자로 공언하고 다니면서 삼위일체를 비판하고 자유의지에 대한 신념을 견지했다. 그 점이 에드워즈의 공격의 목표였다. 휘트비는 영국교회의 성직자로서 일찍이 로마 교회를 공격하는 논문들을 통해 악명을 떨쳤다. 그러다가 후에 다섯 항의 신학적 주제에 대한 영향력있는 논문을 썼다. 그 논문은 제목의 길이가 열줄이나 되었는데 에드워즈가 ‘5개 항목에 대한 논문’이라는 제목으로 줄였다.

 

 이 논문에 대한 에드워즈의 언급은 대부분 네 번째 포인트인 “시험과 테스트 상태의 의지의 자유”에 관한 것이었다. 아이작 와츠는 에드워즈 자신의 전통으로부터 이탈한 자로서 그가 쓴 유명한 찬송시들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몇 편의 신학서들의 저자이기도 했다. 에드워즈는 와츠의 이름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과 피조물 안에 있는 의지의 자유에 관한 논문들의 저자”라고 지칭한다.

 

에드워즈는 “계몽된” 신학자들과 이신론자들이 자기들의 것이라 주장하던 로크의 재료들을 가지고 무기를 만들었다. 그는 이 우주가 질서정연하다고 주장했다. 램지의 표현을 빌면 “우연이나 자기 결정의 자유는 이 세계로부터 추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쫓겨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기뻐하는 것을 선택한다. 의지는 가장 강한 동기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이 우리의 행위와 본성 간의 관련이다. 그러나 인간의 선택과 인간 본성의 이러한 고리는 불가피하게 숙명론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부패하고 죄로 인해 타락했기 때문이다. 이 글의 근본적 논지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것은 에드워즈가 첫머리에서 존 로크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의지”의 자유를 고려하는 것은 잘못 제기된 이슈라고 말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본질적 질문은 인간 혹은 전체로서의 자아의 자유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강조점을 바꾸었다. 이유는 알미니안주의의 입장이 의지의 자유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자신의 목적에 아주 잘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가 이 책을 쓴 가장 큰 목적은 인간의 책임이라는 성경적 가르침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결정할 능력을 가진다는 알미니안 교리를 어떻게 부정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의지의 결정 능력이 없는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이유를 입증하는 것이 이 책의 일차적 의도였다. 만일 정통 교리가 가르치는 대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능력이 인간에게 없다면, 왜 그가 죄에 머무는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가? 만일 인간의 전적 무능력이 진리라면, 인간은 더 이상 자유로운 행위자가 아니며 강제에 의해 행동한다는 말이 아닌가라고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반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에드워즈는 인간은 정신, 의지 등 모든 자연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자유로우며 그 때문에 책임이 있다고 대답한다. 인간이 영적 선을 행하기에 전적 무능력한 이유는 물리적 능력의 결여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능력들의 그릇된 도덕적 성향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런 식으로, 에드워즈는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책임있고 자유로운 행위자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의지는 항상 인간의 도덕적 본성의 명령에 의해 행동한다. “의지는 모든 경우에 있어 도덕적 필연성에 의해 움직인다. ...... 인간이 현재의 성향에 반하는 선택을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선택은 그의 타락한 본성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은 강요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경향들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경향들에 반하는 선택을 하는 것은 자유롭지 않다. 인간의 책임과는 전혀 양립불가능이 아닌 이 무능함이야말로 바로 그들의 지극한 죄책과 죄악됨의 본질이다.“

 

<의지의 자유>는 네 부분으로 나뉜다. 제1부는 용어들을 정의하고 관련된 이슈를 설명한다. 즉, 의지의 본질과 결정, 필연성, 자연적 필연성과 도덕적 필연성의 구분, 능력, 불가능, 우연의 의미, 도덕적 행위자와 자유의 본질을 다룬다. 의지를 정의하면서 에드워즈는 의지를 몰아가는 어떤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의지로 하여금 이것 대신 다른 것을 책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의지는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결정된다. 무엇이 의지를 결정하는가? 가장 강력한 동기가 의지를 결정한다. 아마도 이 동기는 우리 본성의 주된 본질일 것이다. 에드워즈는 그것을 단순히 본성이라고 부른다.

 

위의 생각들을 에드워즈는 그가 ‘도덕적 무능’이라 부르는 것과 연관시킨다. 그것은 ‘경향의 결립이나 반대“라고 정의한다. 이 도덕적 무능, 혹은 바울이 죄의 본설이라고 부르는 것이 의지를 지배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의지는 그것의 숙명에 따라 행동한다. 그것은 그 아래 깔려 있는 본성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한다. 그것은 그 아래 깔려 있는 본성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의지는 자유하다. 우리는 어떤 것을 의지하고 많은 일들을 할 자연적 능력이 있다. 그러나 죄 때문에 우리는 도덕적 무능한데 이 도덕적 무능이 의지를 지배한다.

 

에드워즈의 견해에서 기초가 되는 것은 자연적 필연성과 도덕적 필연성의 구분이었다. 전자는 사물들 사이에 필요한 인과 관계와 관련이 있다. 후자는 도덕적 원인들-성향과 동기들의 힘-과 결과적 행위에 고나한 것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 필연성은 양쪽 모두의 경우에 동일하다. 차이점은 용어들의 성격에 있다. 알미니안주의에 대한 그의 주된 주장은 도덕적 필연성과 자유 사이에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양립불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유란, 자유 혹은 어떤 방해가 없을 때 사람이 기뻐하는 대로 행할 기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에드워즈는 이것이 “일상의 언어”안에서 자유라는 말의 의미라고 상정하고 있었다. 그는 이 지점에서 앞에서 언급한 그 애매함, 즉 문제가 인간의 자유나 아니면 의지의 자유냐에 관한 애매모호함을 이용하여 전자라고 주장한다. 자유는 사람에게 속한 것이지 의지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결적 의자라는 개념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선행하는 조건으로부터도 독립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한한 복귀로 연결된다. 즉, 어떤 자유로운 행위가 있기 전에 다른 자유로운 행위가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식으로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 복귀를 정지시키기 위해서는 자유롭지 못한 첫 번째 행위가 있어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어떤 후속되는 행위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이 논문 전체의 기초가 되는 주장이다. 에드워즈는 그것으로 알미니안적 입장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2부는 알미니안주의의 입장을 고찰하면서 자유에 대한 알미니안적 관점이 타당한 것인지를 검토한다. 말하자면 도대체 자기결정의 자유라는 것이 있는지, 혹은 있을 수 있는지에 과한 사색이다. 자기결정의 자유야말로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칭찬이나 책망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라 간주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 견해의 모순들을 지적해 내면서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작정들이 이 자유에 대한 알미니안적 개념에 대해 제기하는 도전들을 숙고한다. 알미니안적 자유의 개념은 자기 결정력과 우연성을 동반한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자기 결정력이란 “의지가 그 스스로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가지는 어떤 주권인데 의지는 그것에 의해 그 자신의 의사를 결정한다. ...”우연성이란 “모든 필연, 혹은 어떤 그 전의 근거나 그 존재 이유와의 고정되고 확실한 연관에 반대되는 것”이다. 알미니안주의에 의하면 이 두 가지가 “자유의 본질”을 제공한다. 그것들이 업으면 인간은 “아무 참된 자유가 없다.” 자유에 대한 이러한 견해가 도덕적 행위자와 책임에 대한 알미니안적 개념의 저변에 깔려 있다.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도덕적 행위자들만이 그들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입장은 의지에 대한 죄의 영향을 너무 과소평가하여 자유의 참된 의미를 놓치는 것이라고 본다. 만일 자유가 선택 및 자기 결정력 외의 어떤 것에 관련되어 있다면 어떻게 되는가? 에드워즈는 다른 또 하나의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이 질문에 대답한다. 인간이 가장 자유로운 것은 언제인가? 그것은 인간이 하늘나라에서 영화로운 상태에 있게 될 때라고 그는 대답한다. “성화된 성도는 어떤 면으로든 자신의 자유가 조금도 감소되지 않는다.” 그는 또 가장 큰 자유를 소유한 존재가 누구인가라고 묻고서 그것은 하나님이라고 대답한다.

 

양자의 경우 모두 자유는 자기결정력이나 우연성이라는 의미의 선택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자유는 그의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과 관련된다.

만일 자유가 자기결정력이나 우연성과 무관하다면, 도덕적 행위자들도 그것들을 요하지 않는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도덕적 행위자가 되는 것은 “도덕적 질, 즉 도덕적 의미에서 선이나 악이라 이름붙일 수 있는 행위들을 할 수 있는 존재” 그리고 “도덕적 선악, 혹은 광과나 합당함과 같은 것, 칭찬이나 책망, 상이나 벌에 대한 감각”을 가진 존재를 필요로 한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도덕적 행위자로 봄으로써 이것을 예증한다. 그는 하나님을 도덕적 행위자의 최고 모법으로 본다. 이 과정에서 그는 필연성을 우연성과 대조시킨다. 우연성은 선택을 포함함하나 필연성은 그렇지 않다. 결과적으로, 도덕적 행위자는 우연성에 근거하지 않는다.

 

제3부는 진정한 책임은 선택에 의해 정의된 자유를 요한다는 반론에 대한 답변에 할애된다. “만일 모든 인간의 행위들이 필연적이면 미덕과 악덕은 공허한 말들이 될 것이다.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을 한다고 어떻게 탓할 것인가? 회피할 수 없는 일을 한다고 누가 그를 칭찬할 것인가?”라는 대니얼 휘트비의 말을 인용하여 에드워즈는 노예 상태에 있는 의지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길게 논한다. 이 반론은 아마도 예정 교리에 대한 영속적 걸림돌이 될 것이다. 에드워즈는 책임성과 심판이 공정하기 위해 자유가 필요하다는 알미니안적 견해에도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 반대는 사실상 성경에 대한 반대가 된다.

 

제4부에서 에드워즈는 자유의지에 대한 알미니안적 인식에 대해 최종 답변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그 분 자신의 무한한 지혜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계속해서, 에드워즈는 일련의 반대 의견들을 검토하면서 거기에 답변을 제시하고 칼빈주의 입장이 성경적, 이상적이며 일관성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논문의 말미에서 그는 의지에 관한 우리의 입장이 내포하는 의미를 요약하는 간단한 결론을 제시한다.

 

<의지의 자유>는 길고 정교하며 읽기 힘든 책이지만 에드워즈가 결론 부분에서 자신의 중심적인 주장을 요약한 것이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에 있어 대부분의 쟁점들의 결론은 도덕적 행위자에게 필수적인 의지의 자유에 관한 이 항목을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달려 있는.” 그는 그렇게 믿은 이유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오류가 모두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지와 별도로 피조계 속에서 작용하는 이차적인 원인들을 인정했다. 인간의 전적 부패 및 유효하고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거부, 칭찬과 책망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 결정의 자유가 요청된다는 주장, 참된 미덕이 다른 존재, 즉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마음속에 생겨날 수는 없다는 신념, 이 모든 알미니안주의적 주장은 자결적 의지의 교리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에드워즈는 이 자유의 개념을 파괴하면 일거에 알미니안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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