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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 과학기술시대를 향한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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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앙 연구가들/죠나단 에드워드

2007. 7. 2.

 

과학기술시대를 향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외침

 

조지 M.마든

 

조나단 에드워즈는 오늘날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는 우리가 오직 멀리서 경외할 수 있는 과거의 영웅이고, 복음 전도자이고, 신학자이고, 성인인가? 시대와 종교적 형식의 변화들이 그와 우리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장벽을 놓았는가? 우리는 그의 예리한 통찰력을 단지 역사적 골동품 이상으로 접근할 수는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에드워즈는 오늘의 이 시대를 향하여 많은 것들을 말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적 교리들뿐 아니라 현대의 주요한 몇 가지 경향들에 관한 통찰력을 가지고 그것들을 제시하고 있다.

 

에드워즈는 현대가 시작되는 시기에 살았다. 그는 오늘날의 기독교와 문화 양자의 형태를 형성지었던 두 가지 주요한 경향들, 즉 부흥운동과 과학혁명의 출현을 보았다. 이러한 경향들은 에드워드 시대에는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것들이 사람들의 세계관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부흥시대의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경험

우리는 먼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관한 에드워즈의 통찰력을 볼 수 있다. 뉴잉글랜드에서 에드워즈가 이끌었던 부흥운동은 보다 폭넓은 경건주의 부흥운동의 일파였다. 경건주의는 1600년 후반에 독일에서 출현하였다. 그 후 모라비안 교도들과 같은 단체들의 선교적 노력을 통해 다른 나라들로 퍼져 나갔으며, 프로테스탄트 세계의 전반에 걸쳐 갱생운동과 융합되었다. 에드워즈 시대에 영어를 사용하는 세계에서는 이러한 힘들이 모아져 대 부흥운동을 창출하였다. 미국의 대각성운동, 영국의 존 웨슬리 감리교 운동 그리고 미국과 영국의 각성운동을 잇는 조지 휫필드의 사역 등이 그것이다. 경건주의 사상은 개인의 종교적 체험의 중요성과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역 가운데 나타나는 능동적인 헌신을 재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강조는 다양한 복음 전도자들에 의해 표현되어 다양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에드워즈와 다른 뉴잉글랜드의 칼빈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이 부흥운동의 강조점들이 개혁신학의 본질에 충실한 것이냐 하는 것이다.

 

자신의 교구에서 “놀라운 회심의 사례들"을 경험해온 에드워즈는 부흥운동과 개인적인 종교 헌신의 옹호자였다. 그는 이것들을 뉴잉글랜드의 청교도적 전통에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흥운동가들이 무책임하게 사람들의 감정을 이용하여 피상적이거나 거짓된 종교적 경험들을 만든다고 주장했던 당시의 각성운동 비평가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었다. 1739년에서 1740년 사이에 휫필드가 미국을 방문했던 이후로 그를 모방했던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각성보다는 감정적인 열기로 군중을 감동시키려는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비평가들의 주장은 더욱 타당성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부흥운동의 옹호자였던 에드워즈는 중요한 문제에 직면했는데, 그것은 계속해서 현대복음주의의 문제가 되어왔던 질문이었다. 즉 그리스도인의 헌신에 있어서 감정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우리의 정향(affection : 情向)이 진정한 종교적 경험에 중심적인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가 말하는 ‘정향'이란 우리 마음이 사물을 향해 기울어지거나 그렇지 않는 성향이나 사랑을 의미했다. 에드워즈는 “성서는 모든 곳에서 종교를 두려움, 희망, 사랑, 증오, 열망, 기쁨, 슬픔, 감사, 동정, 열심 등의 정향들 가운데 위치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감정주의를 비난했던 부흥운동의 비평가들이 기독교를 단지 올바른 교리를 믿고 도덕과 윤리를 유지해 나가는 ‘머리의 종교'로 만들었다고 지적하고, 이에 대해 ‘마음의 종교'를 변호했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마음의 종교를 옹호했을 때 그는 그의 시대에서보다는 지금 우리 시대에서 더욱 심각한 암적 요소가 되고 있는 경건주의와 복음주의 그리고 부흥운동의 전통에 대한 중대한 오류들을 경고했다. 에드워즈는 먼저 단순한 감정주의를 비판했다. 그는 고조된 감정이 진정한 종교의 명확한 증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흥운동가들은 감정만을 흥분시켜서 거짓된 회심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논문 Religious Affections에서 에드워즈는 진정한 종교적 경험에 대한 성경적 기준들을 상세히 제시했다. 이 기준들은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에 초점을 두고 있는가, 성경의 계시와 일치하는 교리인가,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는 삶인가하는 사항들을 포함하고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대한 성경적 표준들을 기술하는 가운데 에드워즈는 우리 시대에 더욱 필요한 또 다른 교훈을 강조했다. 그는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오류를 지적했는데,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신학적 분석에서 최우선으로 두고 때로는 숭배의 대상을 삼기도 하는 점이다. 이 경향은 에드워즈 시대에 이미 시작된 것으로, 신학적 분석의 초점을 하나님에서 점차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말한다. 또한 이것은 오늘날 복음주의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다. 자아와 자아실현을 찬양하는 신학이나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인간의 놀라운 경험들 쪽으로 미묘하게 강조점이 바뀌고 있는 간증집회에서 볼 수 있다.

 

에드워즈 신학은 이러한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항상 인간의 종교적 경험에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음을 명백히 하였다.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강조한 것은 정적인 교리와는 다르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개념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우주를 창조한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고, 하나님 자신을 그의 피조물에게 전하기 위한 것이고, 그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그들에게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종교적 경험의 진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압도되고, 그의 완전함의 영광에 이끌려지고, 그의 저항할 수 없는 사랑을 맛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과 사랑에 의하여 영적으로 황홀해지는 이 경험은 위대한 예술작품의 아름다움에 압도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러한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우리의 자아에 대한 의식을 잃고, 자기 본위적인 생각들을 모두 떨쳐버리고 그 장엄한 대상에게로 흡수되어진다. 그때 진실로 사랑스러운 인격체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은 역사한다.

 

우리의 마음은 그의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변화된다. 그러나 그 힘은 우리의 의지를 압도하여 작용하는 물리적인 힘이 아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 우리가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과 사랑의 포로가 될 때, 자격 없는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의 아름다움을 통하여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삶의 중심적 원리로서 자아에 대한 사랑을 기꺼이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 중생의 경험을 여섯 번째 감각 -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과 사랑의 감각과 같은 것으로 묘사한다. 그는 성경이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자주 말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중생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은 성경에서 새로운 감각을 주는 것으로 종종 비유된다. 즉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주고, 귀머거리의 귀와 눈먼 자의 눈을 열어주고,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적 경험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식은 ‘느낄 수 있는' 지식이며 단순한 사색적인 지식과는 다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참다운 기독교 교리들을 알고 확증하는 것에서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향적인 지식(affecting knowledge)혹은 기독교적 교리가 나타내는 진리에 대한 감각을 의미한다. 에드워즈는 그의 특징적인 진술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영광스럽다고 이성적으로 믿을 뿐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 그것에 대한감각을 가진다”고 말한다.

 

과학기술시대의 그리스도인의 경험

에드워즈의 사상은 과거와 동일한 부흥운동이 계속되고 있는 현 시대에 진정한 하나님 중심의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대한 분석을 제공해 준다. 또한 그의 사상은 이 시대를 형성해 나가는 또 하나의 거대한 힘인 과학혁명에 대하여 반응하면서 그 다른 짝을 제시한다. 폭넓은 시각에서 볼 때, 과학기술혁명은 대부분의 현대인에게 사물을 생각하는 방식과 일상적인 경험에 속하는 것들에 대하여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실험실에서 적합한 과학적 방법이 이제는 우리의 전반적인 생활과 여가활동에 적용되는 모델이 되었다. 이 모델은 근본적으로 실체를 객관화시키려는 시도를 내포한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고 마음만 산란하게 하는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것들을 중요한 활동으로부터 제거하려고 한다. 사업과 기술분야에서 우리의 문명은 대체로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을 발견하려는 탐구정신에 의해 형성되었다. 일반적으로 합리성과 효율성은 우리가 사물을 객관적으로 볼 때 더욱 고양된다. 그래서 정부기관과 사업체에서는 추상적인 숫자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다룬다.

 

우리 현대인들은 동료 인간을 대상이나 고객, 기부가 그리고 우리의 명부에 첨가하여 올리는 숨자 등으로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유사하게 우리는 자연을 객관화하는 데 익숙해져 있어서 자연도 우리의 기술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될 어떤 것으로 본다. 최근에 우리는 생태계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자연을 단지 과학기술 체계의 연장으로 생각하는 객관화된 시각의 결과이다.

 

에드워즈 시대에는 이러한 경향들이 특별한 양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대 세계의 기초가 된 첫 원리들은 그 당시에도 존재했다. 18세기 철학자들은 하나님을 그의 창조물인 우주와 분리하여 이해함으로써 실체에 대한 객관화의 길을 열었다. 그들은 이신론자들이 말하듯이 하나님은 시계 제조인과 같은 존재이고, 오래 전에 우주라는 큰 기계장치를 만들어 오늘날까지 자연법칙에 의해 스스로 돌아가게 하였고, 이 자연법칙은 과학에 의해 탐구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18세기 사상가들은 하나님을 부정했다기보다는 그를 은퇴시켰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의 하나님은 실체에 대한 중요한 분석에 간섭하지 않게 되었다.

 

에드워즈는 사물에 대한 이러한 관점의 해악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에 반응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실체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 즉 세계관의 중심무대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즈워즈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고,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들에게 그의 성품과 아름다움과 사랑 그리고 영광을 끊임없이 전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우주와 동떨어져 있는 오래 전 과거의 창조자가 아니라 매순간 우주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이를 유지하고 이를 통하여 말씀하고 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하나님과 우주와의 관계는 인간과 언어와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물인 우주와는 명확하게 구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우주는 어떤 분명한 인격적 자질을 갖고 있다. 우주는 하나님 자신의 언어의 일부이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들에게 그의 선하심과 영광을 표현한다. 성경에서 자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이 신성한 ‘빛'을 통하여 모든 자연세계는 생명과 아름다움과 기쁨으로 가득 찬다. 중생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과 선하심의 빛을 볼 수 있는 눈이 주어진다.

 

우주와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어떤 감각을 갖는다는 것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일들과 일상생활에서 과학적이며 기술적인 추구나 과학기술의 사용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실체를 다루는 객관화된 방식들이 비록 제한된 목적들에는 매우 유용한 것일지라도 분명 인위적인 것이며 사람을 그릇 인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민감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제한된 방법론들이다. 그것들은 실체가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방식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민감한 반응을 가지고 끊임없이 그들 자신에게 우리의 활동들 중 어떤 것도 우리의 영적 차원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또한 그렇게 느껴야 한다. 우리는 자연이 단지 우리의 기술적 대상인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비록 우리가 자연을 이용하고 관리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아름다움의 표현이며, 그와 같은 관계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인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동료 인간들을 우리의 판매와 선전 전략들에 이용되어지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로 보게 될 것이다. 비록 우주가 몰락하고 인간성이 타락하여 어두워져 있어도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모든 피조물을 통하여 여전히 빛나고 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는 눈을 갖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사랑에 의해 변한다면 우리의 행동 또한 변할 것임에 틀림없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아름다움을 봄으로써 변화를 받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풍성한 성품을 나타내는 모든 덕스러운 행동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빛에 의해 압도된다면 우리는 그의 모든 피조물들 속에 반영된 그 영광을 볼 것이고, 그가 창조한 것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생애 가운데 결코 완전하게 변화 받지 못할지라도 진정한 비이기적인 덕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정향들이 자기애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모든 것에 대한 사랑으로 팽창하는 것에 의해서이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은총적인 사랑은 모든 피조물에 대한 이와 같은 사랑으로 집약된다. 그것은 반역적인 인류의 사랑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해 매혹된다면, 우리는 타고난 자기애의 강력한 힘에 저항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면 우리의 변화된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비이기적인 사랑을 하게 될 것이고, 우리의 삶은 세상을 향한 영광스러운 사랑의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이 빛은 우주의 어두운 풍경을 비추고, 또한 우리의 과학기술문명의 세계관까지도 비추며, 그것들을 변화시킬 것이다. 에드워즈의 메시지는 오늘날과 관계가 있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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