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바빙크- 카이퍼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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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앙 연구가들/헤르만 바빙크

2007. 9. 24.

 

카이퍼와 바빙크의 관계 |: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는 어떤 관계일까? 카이퍼(1837-1920)와 바빙크(1854-1921)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이고, 그리고 소위 신칼빈주의(neo-calvinism)의 주요 대변자들이었다. 그리고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의 벤쟈민 B.워필드(1851-1921)와 더불어서 세계 3대칼빈주의자로 칭해진다. 그러면 이제 카이퍼와 바빙크를 비교하는 일을 시작해 보자.
 
1. 카이퍼는 1837년에 화란 국가교회(NHK)의 목사의 아들로 마아슬롸이스(Maassluis)에서 태어났고, 바빙크는 1854년에 국가교회에서 1834년에 분리한 기독개혁교회(CGK) 목사인 얀 바빙크의 아들로 호-허페인(Hoogeveen)태어났다.따라서 카이퍼는 바빙크 보다 17세 연상이다. 둘다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양자가 속한 교단은 달랐다.
 
2. 카이퍼는 초등 교육을 집에서 교사 출신의 어머니에 의해서 홈스쿨링을 받고서 아버지의 목회지 레이든에서 김나지움을 마쳤고, 1855년에 국립 레이든 대학교에 진학하여 문학과 신학을 공부한 후에 1862년에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바빙크는 그 유명한 깜뻔시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조금더 큰 도시인 즈볼러(Zwolle)에서 김나지움 교육을 받은 후에, 깜뻔에 소재한 신학교를 잠시 다니다가 카이퍼처럼 국립 레이든 대학교에 등록을 하여(1874년 9월) 신학 공부를 한 후에 1880년에 역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3. 이처럼 카이퍼와 바빙크는 출신 교단이 다르지만 신학부 동문인 셈이다. 국립 레이든 대학교(Rijksuniversiteit te Leiden)는 16세기에 빌렴 판 오란여를 주축으로 하여 스페인을 대항하여 일어난 네덜란드 독립 전쟁시에 레이든 시민들이 세운 공에 대한 보답으로 세워진 대학교이다. 스페인 군대가 레이든에 대한 공성전을 펼치는 중에 레이든 시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쥐까지 잡아먹어가면서 굴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버텼는데, 빌렴 판 오란여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이런 저런 것을 제안했으나, 레이든 시민들은 대학교를 세워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1575년에 네덜란드 내에서는 최초로 세워진 대학이 레이든 국립 대학교이다. 그러니 이 대학에 대한 네덜란드 국민들의 자부심이 오죽이나 강할까! 

 

그러나 카이퍼와 바빙크가 수학하였던 시절의 레이든 대학교 신학부는 자유주의 신학의 견고한 성채, 근대주의의 아테네로 불리우고 있었다. 카이퍼와 바빙크의 지도 교수는 동일한 사람인데, 요한네스 스콜턴(Johannes H. Scholten,1811-85)이라는 사람이었다. 스콜턴은 네덜란드 자유주의의 대변자였다. 그의 지도하에 카이퍼는 <존 칼빈과 존 아 라스코의 교회론 비교 연구 Disquisitio historico-theologica, exhibens Joannis Calvini et Joannis a Lasco de ecclesia sententiarum inter se compositionem >로 1862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바빙크는 <츠빙글리의 윤리 De ethiek van Zwingli>로 1880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두 사람 다 종교개혁 신학을 연구한 셈이다.
 
신학부 재학을 통하여 카이퍼는 정통 신앙을 상실하고 자유주의 신학도가 되지만, 바빙크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신앙을 잘 지켜낸다.
 
4. 신학박사를 받은 후에 카이퍼는 Beesd, Utrecht, Amsterdam 세 곳에서 약 11년 동안 화란 국가 교회의 목회자로 시무하고(1863-1874), 바빙크는 약 2년간(1880-2) 프라너꺼르(Franeker)에서 목회를 하게 된다.
 
5. 카이퍼는 바빙크가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던 해인 1880년 10월에 암스테르담에 자유대학교(Vrije Universiteit)를 설립하고, 교의학을 비롯한 여러 과목의 교수가 된다. 그리고 이제 갗 학위를 취득한 젊은 바빙크를 교수로 초청했지만 거절을 당한다. 카이퍼는 당시 아직 국가교회 소속의 장로였지만, 바빙크는 기독개혁교회의 목회자였다. 두 사람이 소속된 교단이 서로 달랐다.
 
6. 카이퍼나 바빙크는 단순히 신학 교수로서 혹은 저술가로서만 지낸 것이 아니고 공적인 활동을 했다. 물론 카이퍼가 바빙크 보다 훨씬 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공적인 생애를 보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기독교 학교 운동에 가담했고, 또한 바빙크도 상원의원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바빙크는 카이퍼가 창당한 반혁명당(Anti-revolutionaire Partij)의 당원일 뿐 만 아니라 지도적 인사중 하나였다. 1915년 경에는 당지도자로서 카이퍼에 대한 비판의 글을 동료들과 같이 출판하기도 하였다.
 
7. 카이퍼는 1880년부터 20년간 자유대학교 신학부 교수로, 신문 편집인으로,  반혁명당 지도자로, 그리고 돌레안치(Doleantie)라고 불리우는 교회 개혁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한다. 교회 개혁운동의 결과 카이퍼는 국가 개혁교회에서 정직을 당하게 되고, 그를 추종하는 목회자들과 교회들은 새로운 교단을 설립하게 된다(1886년). 그리고 1892년에 이르러서는 1834년에 일차 분리 운동(afscheiding)을 통해서 국가교회로 부터 분리 교단을 세웠던 기독개혁교회-바빙크가 소속된 교단-와 연합하여 화란개혁교회(GKN)를 설립하게 된다.


한편 바빙크는 1882년 8월에 개최된 기독개혁교회 총회에서 깜뻔 신학교의 신학교수로 임명을 받고, 1883년 1월에 교수 취임 연설을 한다. 그로부터 1902년에 자유대학교 신학부 교수로 떠나기까지 약 19년간을 깜뻔이라고 하는 전원적인 소도시에 머물면서 교수 사역과 신학 연구에 전념하게 된다. 이와 같은 절차탁마의 기간을 거친 후에 바빙크는 불후의 명저 <개혁 교의학 Gereformeerde Dogmatiek, Reformed Dogmatics>을 간행하게 된다.

 

초판은 1896년 부터 1901년에 걸쳐서 깜뻔에 소재한 잘스만(Zalsman)출판사에 의해서 간행되었고, 총 네 권으로 구성되었다. 바빙크는 이 주저(opus magnus)를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후 1906-11사이에 2판 증보판을 내게 된다. 그리고 나서 1918년에 제3판이 나오게 되지만, 2판에서 변경된 것은 거의 없었다. 바빙크의 개혁 교의학은 칼빈 이후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의 만개, 혹은 완성이라고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바빙크는 이 불후의 명저를 바로 깜뻔에서 조용히 보낸 세월들을 통하여 저술한 것이다.
 
이처럼 1880년대, 1890년대 20여년의 세월동안 카이퍼와 바빙크는 각기 다른 길을 걸어가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카이퍼는 대학설립자, 정당당수, 신문편집인, 교회개혁자등의 다방면에 걸친 공적 생애를 보낸다. 그러나 바빙크는 이 기간 동안 깜뻔 신학교의 교수로 지내면서 개혁 신학 교본을 저술하는 일에 전념하였던 것이다. 그와 같은 작품을 통하여서 1세기가 지나가는 이 시점에서도 바빙크는 큰 신학적 기여를 한 셈이 된다. 그래서일까? 카이퍼의 책은 헐값이라면, 바빙크의 개혁 교의학은 여전히 고가로 팔리고 있다.
 
8. 아브라함 카이퍼는 1901년에 네덜란드 수상이 되어 자유대학교 교수직을 휴직하게 된다. 그는 1901년부터 1905년까지 수상직을 수행하게 된다. 카이퍼가 휴직함으로 교의학 교수직이 공석이 되는데, 카이퍼는 이전에도 두 세 차례 바빙크를 러브 콜 한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후임자로 바빙크를 초청하게 되고, 바빙크는 이번에는 카이퍼의 초청에 응하게 된다. 바빙크는 카이퍼가 자리를 비운 자유대학교 신학부 교수로 1902년에 취임하여 1921년 급서하기까지 약 19년 동안 교의학 교수직에 머무르게 된다. 이 시기 동안 바빙크는 물론 이런 저런 신학 서적들도 저술하고,특히 1909년에는 한국에도 두 번역본으로 소개된 바 있는 Magnalia Dei(하나님의 큰 일)을 출간하기도 하지만, 그의 주요 관심 분야는 교육학과 심리학에 향하게 된다.
 
9. 카이퍼는 1920년 11월 8일에 83세로 소천하고, 바빙크는 그 보다 약 9개월이 지난 후인 1921년 7월 29일에 67세의 아까운 나이에 소천하게 된다.
 
이상에서 우리는 신칼빈주의의 대변인인 카이퍼와 바빙크의 생애를 간략하게 비교해 보았다. 두 사람은 커리어상 비슷한 점도 있지만 전혀 다른 점들도 많다. 두 사람은 칼빈과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을 좋아했으며, 화란 국민이 자랑하는 시인 빌렴 빌더데이크(Willem Bilderdijk)를 사랑했다. 그리고 개혁주의 원리가 신학이나 교회 영역에 제한되지 아니하고, 학문과 예술 그리고 사회 제 방면에 쓰며들어가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따라서 두 사람다 비단 정통 신학자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넓은 세상에 대한 섬김이로서 활동했다고 할 것이다. 
 
특히 카이퍼는 복음이냐 혁명이냐는 식의 모토에서 보여주듯이 반정립(antithesis)를 강조했다. 그는 자유주의나 세속주의에 대해서 비타협적이고 전투적이었다. 그래서 오죽하면 그는 교만하다는 평이나 독선적인 평을 들었다. 당시 신문의 캐리커처를 그리던 한은 Abraham de geweldige(아브라함 더 흐벨더흐)는 그림을 그려서 화란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끔찍한, 혹은 무시무시한 아브라함 (카이퍼)!
하지만 바빙크의 성격은 반립적이고 전투적이기 보다는 종합적이고 평화적이었다. 그는 신학적 적수의 사상 가운데서도 장점을 인정하려고 애를 썼다. 이 사람은 이런 면에서 옳고 저런 면에서는 잘못되었다는 식이다. 19세기 자유주의나 윤리신학에 대한 균형잡힌 평가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그의 저술은 시대가 지나도 사랑을 받고 있다. 바빙크는 카이퍼의 그림자 뒤에서 살았다고 하기도 한다. 카이퍼는 전면에 나서서 전투를 지휘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같은 imperator라면, 바빙크는 뒷전에 물러나서 조용히 전략을 짜는 모사와 같은 역할을 맡았다.
 
바빙크의 후기 제자인 T. 훜스트라(T. Hoekstra 깜뻔 신학교의 실천신학교수를 지냄)는 카이퍼와 바빙크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나열하고 있다.
 
대략 뜻만 옮겨적어보면,
바빙크는 아리스토텔레스 적인 정신을 가진 반면 카이퍼는 플라톤적이고,
바빙크는 명료한 개념의 사람인 반면, 카이퍼는 불꽃티는 이념의 사람이고,
바빙크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건축하는 스타일이라면, 카이퍼는 직관적으로 파악한 사상으로 사변하는 사람이며,
바빙크는 주로 귀납적이라면, 카이퍼는 연역적인 사람이다.
  * 본문에서 사용된 약자 NHK - Nederlandse Hervormde Kerk 네덜란드 국교회CGK - Christelijke Gereformeerde Kerk 기독개혁교회GKN -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 화란개혁교회GTT - Gereformeerd Theologisch Tijdschrift 개혁신학잡지

 

http://jonathanedwards.cyworld.com

 에서 퍼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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