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바빙크 - 그리스도인의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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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앙 연구가들/헤르만 바빙크

2007. 9. 13.

 
그리스도인의 소명

 

헤르만 바빙크

 

우리를 그리스도 자신과 또한 그의 은택들의 교제 속에 들이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교회 안에 부어 주신 성령을 사용하시며, 뿐만 아니라 교회를 가르치고 교훈하시기 위하여 그가 주신 말씀도 사용하신다. 그리고 그는 그 둘을 서로 연결시키셔서, 그 둘이 그의 선지자적, 제사장적, 왕적 직분 수행을 섬기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건전한 사고를 갖거나 혹은 그 관계를 명확하게 규정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하여 말씀과 성령의 관계에 대해서 언제나 매우 다른 견해들이 있어왔고, 또한 이 다른 견해들이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함께 존재해 오고 있다.

 

한 쪽에는, 말씀의 선포 그 자체로서 충족하다고 생각하며 성령의 역하하심을 부당하게 대하는 이들이 있다. 먼 과거나 최근에나 이런 이단을 따르는 펠라기우스(Pelaglus)의 추종자들이 있다. 그들은 기독교를 순전히 하나의 교리로만 바라보며, 예수님에게서도 오로지 숭고한 모범만을 보며, 복음을 그저 하나의 새로운 율법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들은 죄가 사람을 연약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면서도, 사람이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에게 자유 의지가 있으며, 따라서 사람이 원하기만 하면 복음을 선포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예수님의 일과 행위의 모범을 따르게 되기에 족하다고 주장한다.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역사에 대한 필요성은 전혀 느끼지 않고, 그리하여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부인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아주 잘 보아야, 성령을 그저 하나님께로부터, 혹은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하나의 힘 정도로, 일종의 도덕적인 기질과 이상적인 목적을 교회에 불러일으키는 힘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쪽에는, 그와 전혀 다른 입장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광신자들, 반(反)율법주의자들, 열광주의자들, 혹은 신비주의자들로 불리는 자들로서, 성령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면서 사람의 회심에서 말씀이 하는 역할을 과소 평가한다. 그들은 말씀은, 성경은, 복음 선포는 영적 실체 그 자체가 아니고 그저 그 실체의 증표요 상징일 뿐이라고 본다. 말씀 그 자체는 죽은 조문(條文)으로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을 수가 없고, 새 생명의 원리를 그 마음에 심을 수도 없다고 한다. 말씀은 기껏해야 그저 지성에 빛을 비추어 주는 영향력밖에는 없고, 마음을 변화시키고 바꿀 수 있는 능력이나 힘은 발휘하지 못한다. 그런 일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으며, 성령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사람의 내적 존재 속으로 곧장 들어가 그 사람을 그 실체 속에 참여하게 하지만, 말씀은 그저 그 실체의 표징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신령한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나며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으며, 오직 그런 사람만이 성경을 깨달으며, 조문 이면으로 들어가 그 핵심과 본질을 깨우친다고 한다. 이 신령한 사람이 일시적으로 성경을 하나의 규범과 지도 원리로 사용하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신앙적 지식의 근원은 아니라고 한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주관적으로 가르침을 받으며, 점점 자라나서 성경을 넘어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영향력을 성경과는 별개로 취급하면 할수록, 그 사람의 마음은 그리스도에게서와 역사적 기독교 전체에게서 더 멀어지고 독자적으로 서게 된다. 그런 방향으로 더 나아가면, 신비주의가 합리주의로 바뀌게 된다. 성령의 내적 활동을 성경 말씀과 분리시키게 되면, 그 활동이 특별한 성격을 잃어버리고 그리하여 사람의 이성과 양심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성령의 일상적인 활동과 구별할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견해는 하나님은 본성적으로 성령과 더불어 각 사람 속에 거하시며 사람은 날 때부터 마음 속에 기록된 내적인 말씀을 지니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이 말씀에게 그저 어느 정도 변화를 주기밖에는 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본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라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는 근원적인 자연 종교가 된다. 그것은 세상만큼 오래 되었고, 그 본질상 역사상의 모든 종교들의 기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된다. 신비주의가 언제나 합리주의에로 빠지며, 합리주의는 주기적으로 신비주의에 다시 빠져 들어간다. 양 극단은 서로 상합하며 손을 맞잡는 법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회는 언제나 이런 이단들을 피하고 말씀과 성령의 상호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애써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다른 고백들을 통해서 여러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예를 들어, 로마 교회는 성경과 교회의 전통을 실질적인 은혜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오로지 진리의 근원으로만 보며, 이 진리를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순전히 찬동(approbation)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으로는 구원을 위하여 부족하며, 따라서 구원을 위해서는 하나의 예비적인 기능 정도로밖에는 볼 수가 없다. 로마 교회는 진정한 구원의 은혜는 성례에서 비로소 처음 베풀어졌다고 보았고, 그리하여 성령의 사역을 무엇보다고 가르침과 목양과 제단에서 섬기는 직분들로 교회를 세우고 보존하는 데에서 찾으며, 그리고 그 다음으로 성례를 수단으로 하며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초자연적인 은혜와 덕성과 은사들에서 찾는 것이다.

 

이처럼 성령의 구원하시는 활동을 말씀과 분리시키고, 그 활동을 오로지 성례에만 결부시키는 처사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종교개혁은 성경을 전통을 포함하여 진리의 유일하고 명백하며 충족한 원천으로 회복시켰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은혜의 한 수단으로 높였으며 성례와의 관계에서 말씀의 우위성을 회복시켰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스스로 말씀과 성령의 관계에 대해서 더 깊이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사망에서 옛 이단들이 되살아났고 그 이단들을 추종하는 강력한 지지자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소치니파(Socinians) 가 일어나 아리우스와 벨라기우스의 가르침에로 되돌아가서 복음을 하나의 새로운 율법으로 간주하며 성령의 구제적인 활동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한편, 제세례파(Anabaptists) 가 다시 신비주의의 노선을 취하여 내적인 말씀을 높이고 성경을 하나의 죽은 조문이요 알맹이가 없는 상징으로 취급하였던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올바른 길을 찾는 데에는 굉장한 노력이 소모되었다. 루터 교회와 개혁 교회는 각기 다른 노선을 취하였다. 루터 교회는 말씀과 성령을 거의 완전하게 연합시킨 나머지 그 둘을 동일한 것으로 만들어 그 둘 사이의 구별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위험에 처하였다. 그들은 심지어 성령의 구원하는 은혜를 말씀 속에 가두어 두고서 성령이 오로지 말씀을 통해서만 사람에게 임할 수 있다고 보는 데까지 나아갔다. 성경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기게 되었으므로, 그 성령이 그의 회심시키는 능력을 말씀 속에 두셨고, 이를테면, 그 능력을 마치 그릇 속에 담아 두듯이 말씀 속에 저장해 두셨다. 빵이 영양을 주는 능력을 속에 지니고 있듯이, 성경도 그것을 생겨나게 하신 성령으로부터 사람을 구원하는 내적인 영적 능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루터 교회는 성경이 지성에 빛을 비추어 주고 도덕적으로 의지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이 있는 것만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시는 영향으로 말미암아 마음을 새롭게 하여 구원시키는 내적인 능력까지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성령은 말씀을 통하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떠한 방식으로도 일하시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개혁 교회들은 결코 이런 견해를 취할 수가 없었다.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을 결코 포용하고 납득할 수 없다는 그들의 원리가 이 문제에도 그대로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씀과 성령이 매우 친밀하게 서로 관련을 맺고 있으나, 그 둘은 서로 구별되어 있다고 보았다. 성령께서는 말씀 없이도 역사하실 수 있고, 때때로 그렇게 역사하신다. 성령이 친히 말씀과 함께 역사하실 경우는 그가 친히 그렇게 하시기로 자유로이 정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선하신 뜻에 따라서, 그는 보통 말씀과 연결되어 역사하시며, 말씀이 있고 또한 선포되는 곳에서, 즉 은혜 언약의 영역에서, 교회에 교제 속에서 그렇게 역사하신다. 그러나 그때에도 성령께서는 루터파의 생각처럼 성경이나 선포된 말씀 속에 사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몸으로서의 교회 속에 사시는 것이다. 또한 성령은 말씀이 마치 그의 능력의 통로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도 아니다. 말씀의 역사와 자신의 활동을 함께 묶으시기도 하지만, 성령께서는 개별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꿰뚫으시고 그것을 새롭게 하셔서 영생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는 것,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선한 사람은 그 마음의 선한 보고(寶庫)에서 선한 것을 내어놓는 법이다(마7:17,12:33.35) 중생이 과연 마음 속에 생명의 새로운 원리를 부어 넣는다면, 그 영적 생명에게서 나오는 행위에서 그 원리가 반드시 분명히 드러나야 하고 또한 드러나게 된다. 이는 주로 두 가지이다. 지성의 편에서는 믿음이요, 의지의 편에서는 회개다.

 

아주 일반적으로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말하는 대로 말하자면, 믿음이란 어떤 증언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는 보지 못했거나 믿지 못했다 하더라도, 과거에나 현재나 어느 다른 믿을 만한 사람이 구두로나 문서로 그 사실에 대해 이야기했을 경우에, 우리는 그 사실을 믿게 된다. 종교적인 영역에서도 이 단어의 기본 의미가 그대로 보존된다. 그리고 그 의미가 그대로 보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서 받은 것 이외에는, 복음의 내용 전체에 대해서나,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가 젼혀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그들의 말씀을 통해서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고(요17:20) 사도들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아버지와 또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요일1:3)

 

그러나 믿음이라는 단어가 종교적인 영역에서 사용되고 특히 성경에서 천국에 이르는 길을 지칭하는 데 쓰일 때에는, 이런 특별한 용례로 인하여 그 의미가 상당히 바뀌어진다. 마치 어떤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증언을 받아들이는 식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도 있으나, 그것은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며, 그 경우 그것을 받아들이는 믿음도 참된 믿음이 아니다. 모든 선지자들과 설교자들과 사도들과 말씀의 종들이 교회 내에서나 이교도 세계에서 얻은 경험은-그렇다, 예수님 자신의 경험도 마찬가지다-언제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리하여 아무런 효과도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사53:1)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그 복음에 대해서 매우 다른 태도들을 취하며, 매우 상이한 입장들을 취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다양한 태도와 입장들을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묘사하신 바 있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는 믿음의 씨가 밭과 경계하고 있는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린다.이들은 무관심한 자들이요, 무감각하고,전혀 반응이 없는 자들로서, 말씀을 듣지만 자기들과는 전혀 상관 없는 일로 받아들이는 자들이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복음에 조금도 관심이 없고, 그것이 자기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말씀이 그들의 마음 밭에 떨어지지 않고, 그 옆에, 딱딱하고 메마른 길 위에 떨어지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그들은 복음의 말씀을 기억조차 하지 않는다.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 보내버리므로, 조금만 지나면 마치 복음을 전혀 듣지 않는 것처럼 되어 버린다. 악한 자가 새들을, 곧 온갖 종류의 모순과 가볍게 여기는 자세와 불신앙과 망령된 자세들을 도구로 사용하여 그 말씀을 그들의 생각에서 지워버린다. 그것을 듣기는 들어도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것이다(마13:4,19)

 

또 어떤 사람들의 경우는 말씀의 씨가 흙이 깊지 않는 돌밭에 떨어진다. 흙이 깊지 않기 때문에 속히 자리지만, 태양이 떠오르면 뿌리가 없어서 말라 죽고 마는 것이다. 이들은 깊이가 없고 얄팍하며 변덕스런 자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그냥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즉시 기쁨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인다. 복음이 그 아름다움과 그 숭고함과 그 단순함 혹은 사랑스러움 때문에 그들에게 매력을 주고, 그들에게 어느 정도 감동을 주기까지 한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감동을 받고 격려를 받으며, 그 속에서 일종의 힘 같은 것을 느끼고, 그 결과로 온갖 좋은 결단들을 행한다. 그러나 진리가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그 마음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도록 하지는 않는다. 진리에 대해 기억하기도 하고 생각하기도 하고 추리도 하지만, 그들의 존재의 길은 곳은 진리에게 열어주지 않는다. 말씀이 떨어지는 곳 표면에 얇은 흙이 있으나, 그 밑에는 온통 차갑고 무기력하며 딱딱한 바위뿐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반대가 오고 유혹이 오며, 박해가 오고 환난이 오면 그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런 것들이 오면 곧바로 넘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들의 믿음은 일시적인 것이다(마13:5,6,20,21)

 

그 다음에는 씨가 가시떨기에 떨어지는 경우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있다. 씨 주변에 가시들이 자라고 있어서(눅8:7) 그것들이 기운을 막아 버리고 결국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된다. 이들은 세상적인 마음을 갖고서 말씀을 듣는 자들이다. 그들의 마음은 가시들, 곧 세상이 염려와 재리(財利)에 대한 유혹으로 가득 차 있으며, 세상의 온갖 근심거리들과 유혹거리들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때로는 말씀이 그 모든 세상의 염려와 쾌락을 꿰뚫고 마음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그리하여 때로는 세상과 결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러나 말씀의 씨가 싹이 돋는 시점에 이르면, 가시들이 나타나고, 세상의 염려와 정욕이 나타나 질식시켜서 새 생명의 탄생을 막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에수님을 따르는 데까지는 절대로 이르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세상의 힘이 너무나도 큰 것이다(마13:7,22)

 

그러므로, 복음에 찬동하고 받아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믿음이 아닌 것이 있다. 물론 빌라도와 같이 복음을 하찮게 여기고 경멸하는 미소로 물리치는 교만하고 무관심한 자들도 있다(요18:38) 그리고 교만한 바리새인들과 지혜로운 헬라인들처럼 십자가를 거침돌과 미련한 것으로 여기며, 명렬한 적의와 증오로 대적하는 자들도 있다(마12;24;요8:22;고전1:23) 그러나 믿기는 믿으면서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는 자들도 있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칭찬을 더 사랑하는 자들도 있다(요12:42-43) 그런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평생토록 말씀을 듣는 자들로 남아 있으면서도 말씀을 행하는 자들은 되지 않는다(요1:11;3:3;3:39-20;6:44;8:47;고전2:14)

 

사마리아의 시몬처럼, 그들은 복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표적과 큰 이적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기도 한다(행8:13이하) 아그릴바처럼 그들은 어느 한순간에 마음에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려 하기도 한다(행20:27-28) 데마처럼 그들은 여러 해 동안 복음을 섬기다가 다시 이 세상을 사랑하는 데 빠지기도 한다(딤후4:10) 믿음에는 온갖 종류가 있다. 일시적인 믿음, 역사적인 믿음, “이적적인” 믿음, 즉 표적과 기사로 인하여 일어나는 믿음 등이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은 믿음이라는 이름을 갖고는 있으나, 실제로는 믿음이 아니다. 경건의 모양은 드러내 보이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이다(딤후3:5)

 

구원 얻는 참된 믿음은 세 가지 점에서 다른 종류의 믿음들과 구별된다. 첫째로, 그 믿음은 기원이 다르다. 역사적 믿음이나, 일시적 믿음, 혹은 이적적인 믿음도 그 자체는 그릇된 것이 아니다. 전적인 불신앙과 명렬한 적의(敵意)보다는 낫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저 하나님의 일반 은혜의 선물들일 뿐이며 따라서 자연인들에게도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 얻는 믿음은, 모든 구원이 그렇듯이 하나님의 선물이다(엡2:8)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 은혜의 선물이요(빌1:29) 선택의 결과다(행13:48;롬8:30;엡1:5)그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이요(고전12:3)또한 회개의 열매인 것이다(요1:12-13)

 

자연적인 출생만을 누리는 자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요, 아래로부터 난 자들이요, 빛보다는 어둠을 더 사랑하며,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복음의 부르심을 따르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데, 이는 중생으로 인하여 그렇게 되는 것이다(요1:12-13),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며, 진리에 속하며, 아버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로 이끌림을 받으며, 그의 음성을 듣고 그의 말씀을 깨달으며 그를 따른다(요3:3,5:6;44;8;47;10;5,27) 그들은 성령으로 나며, 또한 성령은 그들의 영으로 더불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고(롬8:16)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주이심을 입으로 시인하게 하신다(고전12:3)

 

둘째로, 구원 얻는 참된 믿음은 이러한 기원 덕분에 또한 그 본질에서도 다른 믿음들과 구별된다. 그 믿음에는 물론 지식의 요소가 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은 우리 스스로 본 일도 없고 볼 수도 없는 불가시적이요 영원한 것들에 대한 증언과 결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듭난 생명을 근거로 진리를 세울 수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주관적인 종교적 경험과 느낌에 근거해서 진리를 세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신자가 비록 거룩하신 자 곧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을 기름 부음받아서 모든 것을 안다 할지라도(요일2:20) 그들이 받은 바 그 성령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따라서 그들은 그들이 처음부터 들은 바 진리의 말씀에 여전히 매여 있는 것이요(요일2:21-24) 또한 온 교회와 더불어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엡2:20)

 

그러나 구원 얻는 믿음에게만 있는 그 지식은 특별한 종류에 속하는 지식이다. 그것은 오로지 지성과 기억으로만 취하고 그 이외에는 사람을 차갑고 무관심하게 내버려두는 그런 순전히 이론적인 지식이 아니다. 그 지식은 탐구와 사고를 통해서 얻어지는 과학적인 지식과 동일한 수준에 있는 것도 아니요, 과거에 일어난 어떤 일에 대한 역사적인 보도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것도 아니다. 믿음의 지식은 실천적인 지식이다. 머리보다는 마음의 지식이요, 인격적이며, 깊이가 있고, 영혼 전체를 사로잡는 그런 지식이다.

 

그 지식은, 자아의 가장 깊은 내면의 본질과 결부되는 문제, 나의 존재와 나의 삶, 나의 영혼과 나의 구원이 개입되는 문제와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어떤 한 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요. 그분에 대한 증언에 대한 지식이며, 동시에 그 증언을 인정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것이요, 하나님을 전하는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이은 것이다(살전2:13) 그것은 복음을 하나님이 특별히 나 개인에게 보내시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서 내 것으로 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셋째로, 구원 얻는 믿음은 다른 믿음들과는 그 대상이 다르다. 역사적 믿음은 외형적인 보도(報道)에서 멈추고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일시적인 믿음은 그 보도에 어느 정도 매력을 느끼고 그것을 즐거워 하지만, 그 진정한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는 사실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이적적인 믿음은 그 보도에다 표적과 기사를 결부시키지만, 그 이적들을 이루시는 그분에 대해서는 정작 무관심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참된 마음으로 복음을 하나님이 우리 개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런 구원 얻는 믿음은 우리를 그냥 텅 빈 채로 열매 없이 내버려두지를 않는다.  마치 여행을 하는 중에 자기 가족이 큰 위험에 처하여 있는 것을 알았을 때에 그냥 묵묵히 여행을 계속할 사람이 없듯이, 복음을 믿고 그것을 진정 자기에게 적용시키는 사람은, 그리하여 자신이 죄악되며 잃어버린 상태에 있다는 사실과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을 진정 깨달은 사람은 그 모든 사실에 대해서 차갑고 무관심한 상태로 있을 수가 없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참된 믿음은 복음을 받아들인 사라들 속에서 즉히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들을 가만히 있게 내버려두지 않고, 그들을 몰아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런 믿음은 외형적인 보도에 만족하지 않고, 그 보도가 다루고 있는 바로 그분 자신에게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구약에서도 이미 그랬었다. 우리 앞에 나타나는 성도들은 모두가 항상 하나님 자신에게 관심을 가졌고  그와 더불어 살았다. 이것을 가리켜 ‘믿는다’는 말로 부르는 경우가 여러 차례 있으나(창15:6;출14:31;대하 20:20;사28:16;합2:4)이 ‘믿는다’는 것은 그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납득한다는 뜻이 아니라, 온 영혼으로 그 하나님께 의지하며 그의 말씀대로 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믿는 것’ 혹은 ‘믿음’ 혹은 ‘신앙’을 다른 용어들로 표현하는 예가 자주 나타난다. 구약의 성도들에 대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께 피하며, 하나님을 바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에게서 모든 일을 기대하며, 하나님을 기다리며, 하나님께 기대며, 하나님을 찾는다는 등등의 표현들이 계속 나타나는 것이다.

 

신약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 준 사도들은 일상적인 의미의 역사적 작가들이 아니고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그들이 보고 듣고 손으로 만진 바를 증언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에 살며, 그 제제를 말씀하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그저 사도들이 제시한 바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다(요1:12) 그것은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요(갈3:27)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이요(롬6:4) 그와의 교제 속에서 사는 것이요(갈2:20) 참 포도나무이신 그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성도들의 아버지가 되시며, 그들이 그의 아들들과 딸들이 되는 것이다(고후6:18)

 

요컨대, 구원 얻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인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증언에 대한 지식이요, 견고한 확신이며, 의심없는 확실함일 뿐 아니라, 동시에 마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신뢰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진리를 충만히 드러내시는 그리스도 자신을 든든히 신뢰하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서로 분리될 수가 없다. 지식이 없이는 신뢰도, 의지(依支)도 불가능하다. 알지도 못하는 그분을 어떻게 신뢰한단 말인가? 그러나 반대로, 지식이 신망과 신뢰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애초부터 올바른 지식이 아니었다.

 

여호와의 이름을 아는 자는 반드시 그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다(시9:10) 그러나 그를 신뢰하지 않는 자는 아직 그의 말씀에서 그를 알기를-그가 과연 누구신지 알기를- 배우지 못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 바깥에서 오로지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만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을 시험할 기준을 상실하게 되고 결국 자기 자신의 영을 그리스도의 영과 동일시애 버리는 데에까지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 없이 말씀을 연구하는 자는 누구든지 초상화는 연구하면서도 정작 그 초상화가 그리고 있는 그분은 무시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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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과 그의 영, 둘 다를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은 성경 말씀에서와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동일하게 증거하신다. 중생에서 성령깨서는 우리 마음속에 말씀을 심으시고(약1;18,21 벧전1:23,25) 신자들의 영적 삶을 그의 본성에 따라 지도하셔서 언제나 말씀으로 돌아가 양식을 얻어 그 삶을 강건하게 유지하도록 하셨다. 이 땅에 있는 동안 우리는 절대로 성경을 필요로 하는 상태를 넘어서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성경이야말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이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이나, 동시에 현재의 종교이기도 하다. 기독교에는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려주는 말씀이 있고, 동시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는 성령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지식이며 또한 신뢰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이라는 의복을 입고 계신데, 믿음은 바로 그 의복 속에 계신 그리스도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다.

 

믿음이 지성의 편에서 중생의 열매인 것처럼, 회개는 의지의 편에서 나타나는 새 생명의 표현이다. 구약에서 이미 이 사실을 거듭거듭 거론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해방된 후 여호와의 이끌림을 받아 시내산에 이르렀고 거기서 그와 언약을 맺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은 그 언약을 지키고 하나님의 음성을 순종해야 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출19:5-6) 그러나 광야에서 벌써 그 백성은 불성실함과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말았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이러한 배도(背道)의 상태가 더욱 심화되었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이방 백성들과 어울려 살았기 때문이다. 처음 세대가 죽고, 그 후에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는 다음 세대가 일어나자,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긴 것이다(삿2:10-11)

 

그리하여 회개에 대한 설교가 이스라엘에게 절실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셔서 그 백성을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시 여호와를 섬기도록 이끄셨다. 그리고 사무엘 이후부터는 선지들을 세우사 이스라엘이 그 악한 행위를 회개하고 그가 조상들에게 주신 바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도록 그들에게 경고하게 하셨다(왕하17:13)

 

사무엘이 맨 먼저 이런 경고를 개시하였고(삼상7:3) 모든 선지자들이 이 경고의 설교를 되풀이했다. 그들은 모두 회개의 회심을 전한 설교자들이었으나, 동시에 죄 사함과 완전한 구속을 전한 선포자들이기도 했다(렘3:12,14:18;11;25:5;겔14:6;18:30-32;33:11;호12:6;14:3;욜2:12-13등)그리하여 때때로 회개의 모습이 백성들 가운데서 보이기도 했다. 원수들에게 종이 되어 압제를 당할 때에, 그들은 여호와께 부르짖기 시작하였다(삿3:9.154,3등) 아사, 여호사밧, 요시야, 히스기야등 경건한 왕들이 각기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백성들 중에서 개혁을 이루었다(왕상15:11이하;22:47;옹하23:15;대하33:12) 요나는 심지어 니느웨로 갔고, 그의 설교를 들은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베옷을 입으며 그들의 악행을 회개하였다(욘3:5,10) 아합에 대해서는 엘리야의 심판의 경고가 있은 후 그가 여호와의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다고 말씀하며(왕상21:27,29)또한 므낫세에 대해서도, 생애 말기에 그가 여호와께 돌이켰고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대하33:12)

 

그러나, 물론 이 회개가 진실하고 진지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우도 있었겠으나, 대다수의 백성들에게는 그저 곁모양의 변화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레미야가 보도하듯이, 그들은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고 그저 거짓으로 할 뿐이었다(렘3:10) 그리하여 선지자들은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계속 하였다.

 

계속해서 회개를 요구하였고, 회개의 의무를 전했다. 백성 전체만이 아니라 각 개개인이 반드시 회개하고, 악행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을 계속해서 강조하였던 것이다(겔18:23,32;32:33:11)그러나 백성들이 계속해서 이러한 권고들을 무시하자, 선지자들 가운데서 그들의 설교가 백성들에게 심판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사6:10) 이스라엘이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어버렸고(렘2:25)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스라엘도 회개할 수가 없으며(렘13:23) 그리하여 하나님이 회개를 허락하시고 새 마음을 주셔야 한다는 생각이 무르익었다(시51:12;렘31:18;에5:21)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 새 언약을 세우시고 그 백성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시고 그의 법을 그들에게 기록하실 그날을 사모하고 기다렸다(신30:2,6;시22:28;호3:5;렘24:732:33)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설교에 따라, 천국이 가까이 올 때에 그날이 동터온다. 이들은 모두,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도 바리새인의 자기의(自己義)도 소용없고, 오직 회개와 믿음으로만 그 나라와 그 모든 은택을 누리는 길이 열릴 수 있다고 선포하였다(막1:4,5) 이러한 회개를 신약성경은 원문에서 두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한다. 그 첫째는 명사 혹은 동사인데(마3:2,8,11;9:13;11:20;행2:38;고후7:9.10) 내적인 영적 변화, 도덕적 기질의 변화를 의미한다. 나머지 용어(마13:15;눅1:16,17;22:32;행9:35;11:21;14:15;15:19;26:18,20등)는 외형적인 변화, 삶의 방향의 변화, 내적인 변화의 결과요 표현인 그런 변화를 지칭한다. 사도행전3:19과26:20에서는 이 두 단어가 함께 합쳐져서 나타난다. 곧, ‘회개하고 돌이키라’가 그것인데, 이는, 너희의 기질과 너희의 행실을 바꾸고, 너희 자신을 돌아보고 얼굴을 돌이키라는 뜻이다.

 

사도 시대에 복음이 유대인과 이방인들게게 전해지고 그들이 그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에, 그 복음은 또한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겉모양의 변화도 요구하였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행위, 특히 할례와 희생 제사 의식 전체를 중단해야 했고, 이방인들은 그들의 우상숭배와 온갖 종교적 행위들과 결별해야 했다. 기독교로 개종하는 데에는 굉장한 자기부인과 용기가 필요했다. 그렇게 행한 사람들은 대개 진지하고도 참된 마음의 확신 때문에 그렇게 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명예나 이득이 생기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와 회심을 나타내는 두 헬라어 단어에서 표현하는 그 두 가지 문제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다. 내적인 변화와 외적인 변화가 함께 나아간 것이다.

 

이처럼 내적이며 외적인 근본적인 전환은 거룩한 세례로 인침을 얻는다. (행2:38) 세례를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과거와 단절했고, 친족을 버렸고,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와 함께 장사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에로 살아났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고-즉,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자신을 내어 보이시는 그 새롭고 다른 옷을 입었고-그리스도의 제자, 동역자, 종, 군사가 되었고, 그의 몸의 지체가 되었으며, 성령의 전(殿)이 되었다(롬6:3이하;갈3:27;골2:11,12)기독교 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세계 속에 퍼져 나가는 동안에는, 그저 내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외적인 변화가 함께 나타났다. 곧, 말 못하는 우상을 섬기는 일과(고전12:2;살전1:9) 천하고 허약한 종교적 원리들과 초등학문과(고전6:10;엡2:2-3;골3:5,7;딛3:3)을 청산하고 그때부터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고(히9:14;살전1:9) 주를 따르는 일(고전6:15-20)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의 시기가 지나고 교회 자체가 대대로 영속화되자, 회심이 물론 그 본질에 있어서는 변하지 않았으나, 과거에 표현되던 회심의  특정한 외적인 형식이 상황에 따라서 뒤로 제쳐지게 되었다. 자녀들이 날 때부터 연약 속에 취하여졌고, 그것에 대한 표징과 인침으로 거룩한 세례를 받았고, 그리하여 그들 개인이 의식(意識)과 시인이 있기도 전에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자연히, 어린 시절에나 혹은 장성하여 세례를 받은 교회의 일원들 중에서 후에 가벼운 혹은 위중한 죄를 범하는 사례가 자주 일어났다. 몬타누스주의자들(Montanists)과 노바티아누스주의자들(Novatians) 등의 분파들은 위중한 죄는 교회가 사해서도 안 되고 사할 수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교회 자체는 이와 입장을 달리하여, 과거에 타락했거나 범죄했더라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돌아와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고 스스로 교회가 지정하는 징계에 복종할 경우에는 다시 교제 속으로 복귀시켰다.

 

이로부터 점차 고해 성사(告解聖事)가 생겨났다. 곧, 신자들이 가볍거나 위중한 죄를 지었을 경우 이를 사제 앞에서 고백하고, 완전한(자신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를 범한 사실에 대해 안타까워할 경우)혹은 불완전한(죄의 결과를 두려워하여 안타까워할 경우)후회나 뉘우침을 보이며, 또한 고해 신부가 회개하는 그 당사자에게 지정하는 기도와 선행들을 수행한 것이다. 이렇듯 로마 교회에서는 회개가 전적으로 외형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문제의 핵시이 내적인 기질의 변화로부터 고백과 보속(補贖)에로 옮겨가 버린 것이다. 불완전한 후회로도 죄 사함을 얻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범죄자들에게 일시적으로 지정된 형벌들은 면죄부(免罪符:indulgence)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면할 수가 있었다.

 

루터가 종교 개혁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 바로 이 점이었다. 그는 신약을 읽음으로써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회심이란 로마 교회가 만들어낸 고해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루터는 아직 회개와 믿음을 서로 너무 멀리 분리시켰다. 그는 자기의 양심으로 율법의 저주를 느꼈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죄인의 칭의(稱義)에서 의로를 찾았다. 그는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후회, 뉘우침이라는 의미에서의 회심은 율법을 수단으로 오며, 믿음은 복음을 수단으로 온다고 보았다. 그 후에 칼빈은 이 관계의 본질을 더 면밀하게 보고, 다소 다르게 가르쳤다.

 

성경이 그렇게 하듯이, 그는 거짓 회심과 참된 회심을(렘3:10), 세상적인 근심과 경건한 근심을(고후7:10) 죄악된 행위에 대한 후회와 근심과, 또한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켰다는 것 때문에 마음에 뉘우침이 있는 상태를 서로 구별하였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서도 죄악된 행위에 대한 뉘우침(후회)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죄로 인하여 기대한 것과는 다른 결과가 나타날 때에, 죄로 인하여 손실과 수치가 생겨날 때에, 세상도 얼마든지 죄를 뉘우치는 것이다. 가인도(창4:13),에서도(히12:17),유다도(마27:3)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그런 뉘우침은 참된 회개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로 이어지고 절망과 쓰라림과 마음의 완악함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회심과 회개는 그저 죄의 결과들을 뉘우치는 그런 근심이 아니라, 오히려 상한 마음이나(시51:19;행2:37), 혹은 죄 그 자체 때문에-죄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키기 때문에-오는 슬픔에 있으며, 진지한 뉘우침과 죄를 미워하고 죄를 멀리하는 것에 있다. 그런 회개는 옛 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회개는 구원 얻는 믿음을 전제로 하며, 또한 구원 얻는 믿음의 열매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시고 또한 하나님을 향하여 일어나는 뉘우침이요, 또한 그것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고후7:10) 탕자는 정신을 차리고서 집을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말하기를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나이다”(눅 15:18)라고 한다. 그는 아버지께로부터 멀리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 그는 감히 아버지께로 나아가서 그를 대면하고 그의 죄를 고백한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 아버지가 자기의 아버지이심을 믿기 때문이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우리의 죄의 고백을 받아들여 주시고 용서해 주신다는 내적인 확신이 우리의 영혼 속에 주어지지 않는다면, 감히 하나님께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참된 회개는 구원 얻는 참된 믿음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회심은 비참과 구원의 교리에서만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의 교리에서 충만히 다루어지는 것이다(하이텔베르크요리문답;서른세 번째 주일) 때로는 회심이라는 말이 좀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어, 한 개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데에서 일어나는 그런 변화 전체를 포괄하는 뜻을 지니기도 한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3장에서는 거듭남에 대해서만 말씀하시고, 다른 곳에서는-예슬 들어서 마가복음16:16에서는-오로지 구원에로 인도하는 길로서의 믿음에 대해서만 말씀하시는 것처럼, 마태복음 4:17에서는 오로지 회개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하튼, 다른 유익이 없이 한 가지 유익만을 소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믿음과 회개는 근본적으로 중생의 새 생명에 포함되어 있고,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서 반드시 겉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 둘이 서로 분리될 수는 없으나, 서로 구별될 수는 있다. 그렇게 보면 회개는 중생의 열매요, 이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역사다. 시초에만 그런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그런 것이다(렘31:18;애5:21;행5:31;11:18) 그러나 그것은 또한 사람에게 부어진 새 생명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바 사람의 행위로서(행2:38;11:21;계2:5,16이하)한순간도 제한을 받지 않고 평생토록 지속되는 것이다.

 

회개는 그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지만, 그것이 일어나는 사람에 따라서, 또한 그것이 일어나는 정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걷는 길은 한 길이지만, 그들이 그 길로 인도되는 양상은 매우 다양하며, 매우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여러 족장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얼마나 서로 다른가! 므낫세의 회심과 바울의 회심과 디모데의 회심이 서로 얼마나 다른가! 다윗과 솔로몬의 경험이, 요한과 야고보의 경험이 또한 서로 얼마나 다른가! 또한 성경 바깥에서도 교부들의 삶이나, 종교개혁자들의 삶이나, 모든 성도들의 삶에서도 동일한 차이를 접하게 된다. 영적 삶의 이러한 풍성함을 보게 되면, 그 순간 우리의 하찮은 분량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행위를 버리게 될 것이다.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는 모르기 때문에, 자기와 똑같은 영적 체험을 고백하지 않으면 결코 회개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사람들의 편협한 사고보다도 훨씬 더 풍성하고 넓은 것이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4-6)라는 말씀이 이런 점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참된 회개는 사람이 이러저러 이야기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다양하신 섭리와 경험이 있으며, 동시에 반드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다시 사는 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옛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켰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뉘우침이요, 그로 인하여 점점 더 그런 죄들을 미워하고 거기서 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새 사람이 다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선한 행실로써 사는 일에 대한 욕망과 사랑을 갖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