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지 휫필드-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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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앙 연구가들/죠지 훳필드

2008. 8. 9.

 

2007년 1월 14일은 평양 대부흥이 일어난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런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면서 부흥의 열풍이 후끈하게 달아오르고 있어 매우 고무적이다. 우리 예장 총회를 비롯한 교계에서 기념행사와 집회를 준비하는 실무진들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지금 시점에서 100년전에 있었던 부흥을 갈망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진정한 부흥은 분위기나 프로그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부흥은 인위적인 노력의 산물이 아니다. 더욱이 현대 교회를 위협하는 인본주의와 세속주의의 독을 빼지 않으면 부흥의 진가를 맛볼 수도 없다. 그것이 바로 역사의 산 교훈이다.

사도시대 이후 가장 강력한 부흥으로 역사의 획을 그었던 시대는 18세기이다. 그런 부흥 시대의 주역 조지 휘트필드는 1714년 12월 16일 영국 중부지방의 글로스터에서 태어났다. 지난 16일로 휘트필드가 태어난지 292주년이 되는 셈이다. 그런 뜻깊은 날을 보내면서  ‘진정한 부흥’에 대해서 다음 몇 가지를 제언하고 싶다.
 첫째, 진정한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 휘트필드는 한 번도 부흥을 위해서 인위적으로 조작하거나 노력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주도했던 부흥은 오직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참된 부흥은 쇼맨쉽이나 선정주의나 어떤 분위기를 통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한국 교회는 밤낮으로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부흥을 앙모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려야 한다.
 둘째, 역사적인 부흥은 설교에서 시작되었다. 설교의 황태자 찰스 스펄젼 조차도 휘트필드를 '설교자의 우두머리'로 극찬할 정도였으니 그의 설교 기량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설교학자 다간까지도 “사도 시대 이후 설교의 역사에서 휘트필드 만큼 위대한 이름은 찾아 볼 수 없다”고 했다면 설교자로서 그의 위대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 위대한 설교자의 말씀이 18세기 부흥을 일으켰던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딱딱하고 틀에 박힌 교리를 풀어나감으로써 강단의 영적 권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설교자들이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교조주의의 틀에 매여 있을 뿐이었다. 사회적인 분위기조차 술취함과 방탕함이 난무해서 냉냉한 설교로 사회를 변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휘트필드는 기도의 진액을 바른 후 성령의 옷을 입고 폭포수와 같은 말씀을 선포했다. 
 셋째, 부흥과 부흥주의를 구별해야 한다. 참된 부흥은 회개와 성령의 역사를 강조한다. 하지만 부흥주의는 자리를 탐하고, 이름을 내세우며, 인원을 셈하는데 시간을 소비한다. 부흥은 거룩을 추구하지만, 부흥주의는 누가 순서를 맡느냐에 열을 올린다. 거창한 부흥주의로 교회를 살리지 못한다. 부흥주의로는 참된 부흥을 맛볼 수도 없다.
 휘트필드 탄생 292주년을 보내면서, 부흥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은 다음과 같은 휘트필드의 고백을 귀담아 들어볼 필요가 있다. “휘트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고, 모든 사람의 발길아래 짓밟히게 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이름이 영화롭게 될 수 있다면.”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조지 휫필드는 1741년 12월 16일 영국 글로스터(Gloucester)의 벨 여관에서 여관을 경영하던 토마스 휫필드(Thomas Whitefield)와 엘리자벳(Elizabeth)을 부모로 하여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죄에 대한 자각을 했고 성령께서 자신에게 감화를 주고 있음을 느꼈다고 고백한 대목에서,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목사가 되기를 원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큰 그릇"으로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리고 어머니의 재혼으로 들어온 의붓 아버지의 방만함으로 인해 번창했던 벨 여관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열다섯 살때 휫필드는 어려워진 여관 일을 돕기 위해 학업을 포기하기도 했지만 1년여 후에 다시 학교에 나갔고, 17세가 되는 해에 옥스퍼드의 펨브로크 칼리지에 입학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와 함께 18세기 대부흥을 주도했던 웨슬리를 만나게 됩니다. 연대기는 21세에 회심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그 회심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큰 결심과 전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이후 그의 생애는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진 것임을 우리는 그의 육필 일기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1세에 그는 준목이 되었고 24세 되던 해 1월 14일, 옥스퍼드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소년 시절부터 웅변의 귀재로 일컬어지던 그는 그 웅변력을 그릇으로 하여 뜨거운 영성을 셀 수도 없이 많은 영혼들에게 양식으로 제공하여 하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그는 23세 때 이후 여러 차례 뉴잉글랜드(미국 동북부 6개주)로 건너가 선교 사역을 감당하여 고아원을 설립하는 등 빈민 구제에도 크게 힘을 썼습니다. 그는 설교할 강단을 얻지 못하여 주로 순회 노천 설교를 했는데, 배를 이용하거나 말을 타고 동역자들과 함께 이동했습니다. 25세가 되던 1740년 10월 20일 일기에서 읽을 수 있듯 그는 죠나단 에드워즈를 만난 후 다음 설교지로 이동하다가 말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거듭되는 설교 요청에 일일이 응하다가 건강 또한 급속히 악화되기도 했습니다. 휫필드는 영국과 뉴잉들랜드를 오가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외치는 일에 피땀을, 아니 생명을 쏟다가 보스톤으로 여행하던 중 엑세터의 여관에서 한밤중에 몰려온 청중에게 마지막으로 설교한 후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쁘게 달려갔습니다. 1770년 9월 30일 주일, 향년 55세였습니다.


챨스 스펄젼은 휫필드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조지 휫필드와 같은 사람에게 관심을 쏟는 것은 결코 끝이 없다. 종종 그의 생애를 읽을 때 어느 부분을 펼치든, 즉각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는 "살았다." 다른 사람들은 단지 반만 살다 간 것처럼 보인다. 휫필드의 모든 삶은 불이었고 날개였으며, 힘이었다. 나의 주님께 순종하는데 있어 나에게 모델이 있다면 그것은 조지 휫필드이다. 비등하지 못한 발걸음일지라도 그의 영광스러운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휫필드가 쓴 일기를 살펴보면


1. 겸손한 영혼의 고백

휫필드의 심령의 겸손한 고백이 실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를 붙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심한 반대와 핍박 만큼 대중의 그에 대한 인기도 대단하였습니다. 야외 집회의 대성공은 전적으로 그의 설교의 능력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심령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한결같이 겸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2. 하나님을 향한 지극한 열심


그의 생애는 기이한 것으로서, 엄청난 그의 삶의 수고와 업적은 한 사람이 감내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것으로서 오직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의 결과로서만 해석될 수 있습니다. 휫필드는 한결같은 열심과 열정으로 주님을 위해 충성하였습니다. 그의 삶은 온통 하나님께 사로잡혀 있었으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하는 단 한가지 열망으로 불타올랐습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게 여겨졌다. 그의 생애는 참으로 존경할만한 것이었습니다.

3. 진정한 온유와 사랑


웨슬리와의 논쟁에 대한 휫필드의 수록된 편지를 보면 휫필드가 얼마나 온유와 사랑의 정신의 소유자였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그와 견해는 달리하는 사람들과 그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고난과 핍박과 시련에 대처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많은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18세기의 뛰어난 순회 설교자
조지 휫필드

요한 웨슬리의 동생이며, 동역자인 나 찰스 웨슬리는 주 안에서 사랑하는 나의 귀한 친구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를 주님의 곁으로 보내면서, 그를 위해 537행의 시로 내 마음을 달래면서도 이렇게 다시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진리를 찾아 학문의 숲에서 배회하던 휫필드는 생각에 잠긴 듯한 겸손한 청년이었고, 내 눈에는 가식도 슬책도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요, 천사와도 같이 비쳤다.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기 전, 우리는 함께 열성을 다해 종교적인 선을 진지하게 추구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각기 우리의 열심으로 그분께 도달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고, 스무 살(1735년) 때 그가 우리 형제보다 먼저 회심하여 구원받게 되었다.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길과 산기슭으로 가서 강권하여

설교를 한다는 것과 목회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에 대해 그가 얼마나 깊이 염려했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 목회는 한 직업으로서의 일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분명한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으로 하여금 그분의 교회를 이끌도록 하지 말아 주실 것을 수도 없이 기도했다.

"주님, 저는 갈 수 없습니다. 나는 교만에 들뜰 것이고, 마귀의 올무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옥스퍼드를 떠나 있던 그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너무나 분명했다. 그가 목자로서 글로스터에서 설교하기 시작한 후, 그에게는 설교해 달라는 초청이 여러 곳으로부터 쇄도했고, 초청받는 곳곳에서 그는 거듭남의 교리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아 어떤 이들은 높은 오르간 난간에 매달려서, 교회의 함석 지붕으로 기어올라 가서까지 그의 설교를 듣고자 했다. 교회 전체가 사람들이 내뿜는 숨결로 후끈 달아 올라 기둥들에서 마치 빗방울이 떨어지듯 물방울이 맺혀서 떨어졌다. 설교자가 설교단으로 걸어나가기 힘들 정도로 운집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휫필드가 세례받은 신자들에게까지 거듭남이 필요하다고 설교했기 때문에, 다수의 교회들은 자존심이 상했으며 분개하기 시작했다. 결국 조지아에서 돌아온 휫필드는 교회들에서 거부당하고 밀려냄을 당했다.

현실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당시 교회 건물 안에서만 전해지던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찾아나서지 않고 있었을 때, 그들을 위해 휫필드는 창조적인 방식, 배척과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야외 설교의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 그는 먼저 일생에 한 번도 교회에 가본 적이 없는 광부들에게로 갔다. 브리스톨 부근의 킹스우드(Kingswood)의 한 얕은 언덕 위에 휫필드가 섰을 때, 그의 주위에는 새까만 얼굴의 광부들이 모여 들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바로 죄인들의 친구였으며, 나와 여러분 같은 죄인들을 회개시키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여러분을 대신해 죽으셨습니다..."

그 언덕에 서서 목청이 터져라 외치는 그의 설교를 듣던 그들의 새까만 두 볼에는 어느 새 회개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말씀을 전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밝게 빛나는 태양 아래 나무와 울타리에도 사람들이 가득 올라서서 뇌성과도 같이 또렷하고 분명하게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심하고,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런던, 무어필드, 케닝톤 등 영국 각 지방과 새로운 개척지 미국의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그는 그의 목자를 대신해서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다녔다. 그 길이 광야든, 험한 바다이든 가리지 않았으며, 그저 안락한 곳에 앉아서 태만하게 죄인들이 자신을 찾아오기를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34년 동안 18,000회의 공중집회를 이끌었다.

'이 세대의 자칭 의인들이 그들 자신을 무가치한 자로 간주하기에, 나는 길과 산기슭으로 나가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을 강권하여 내 주님의 집이 채워지게 했다."

휫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라

설교자로서의 휫필드는 그가 원하기만 했다면 거의 무한정의 "인기"를 그대로 유지할 수도 있었다. 청중들의 환호와 호의와 박수갈채는 갈수록 커졌으며, 심지어 그를 천사로까지 불렀다. 그러나 그 가운데 있으면서 휫필드는 자신을 파멸시킬 용광로의 뜨거운 불 사이로 걷는 자처럼 두렵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다. 그분의 칭찬 외에는 모든 천사가 헛된 것임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우리 웨슬리 형제들도 설교자로서 동일한 유혹과 죄의 공격을 받아 왔기에, 설교자로서의 사역이 기쁨과 동시에 더욱 큰 영적 싸움임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내 자리를 안다."고 말했던 휫필드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소망을 전했다. "나는 내 명성을 깨끗하게 지워 버릴 심판날이 올 때까지 만족하며 기다린다. 그리고 내가 죽은 뒤 묘비에는 '여기 G.W. 눕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위대한 심판날이 밝혀 줄 것이다.'라는 말 외에는 쓰지 말라."

모든 사람의 종으로 있게 하라

휫필드는 복음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섬겼다. 킹스우드의 광부들, 더머(Dummer)에서 만났던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 미국의 흑인 노예들, 미국의 프랭클린이나 벨쳐, 영국의 볼링브로크나 체스터필드, 그리고 학식있고 위엄 있는 일단의 귀족들까지...

그 섬김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뿐만 아니라 폭도들의 생명의 위협과 폭력 속에서도 줄어들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사실 그러한 위협들은 신앙 부흥이 일어나고 있던 기간 내내 휫필드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웨슬리)의 사람들, 해리스의 인도 아래 있던 사람들과 모라비안들도 감당해야 했던 수난이었다.

휫필드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남으려 했다. 누군가는 엄청난 액수의 생활비를 주겠다고도 제안했으나, 그는 영광 중에 안식하기까지는 안식할 생각이 없었다. "이생에서 나는 영원한 갈등과 고난을 찾을 뿐이며, 내가 영원 세상의 이편에 있는 동안 십자가 외의 다른 어떤 평화도 소망하지 않는다."

그는 아무도 속박하려 하지 않았으며, 교단을 결성하지도 않았다. 그의 추종자들은 끝까지 그를 그 단체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려 했지만, 그는 자유롭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꾼으로 남고자 했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자 했다.

주님의 일에 지쳐 있기는 하지만 싫증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내 사랑하는 친구 휫필드는 1770년 9월 29일 주일, 북 아메리카 뉴베리 포트에서 55살의 아까운 나이에 갑자기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여려 해를 계속해서 보통 40시간, 곧잘 한 주에 60시간 씩, 수천 명의 청중들에게 설교했다. 30여 년 동안 조금도 쉬지 않고 그토록 무거운 짐을 졌던 그였다.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의 반대를 이겨내야 하고, 모든 청중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며, 바람불고 비오는 험악한 날씨에도 한두 시간씩 설교를 강행했던 그는 늘 피곤과 싸워 이겨야 했다. 미국 남부의 더운 날씨에서의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었다. 때때로 그는 더위와 피로로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복음을 선포할 책임에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소생시키곤 했다. 격심한 정신적, 육체적 활동의 시간이 되면,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건해지곤 했다. "나는 조금씩 자고 조금씩 먹었으며,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일했다."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는 데 걸린 시간과 중간중간에 잠간씩 휴식을 취하거나 그 다음 일정을 준비하는 데 걸린 시간을 제한다면, 그의 전생애는 계속 이어지는, 거의 중단없이 설교로 소진된 삶이었다. 휫필드는 그의 생애 동안 미국을 일곱번 방문했고, 스코틀랜드에 열 다섯 번, 아일랜드에 두 번, 지브롤터와 버뮤다와 네덜란드에 각각 한 번씩 갔다. 더욱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캐나다와 서인도 제도에까지 가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교회들의 신앙은 퇴색해 가고, 교회 안에는 형식적인 신자들 투성이었다. 아무도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우리들은 주님대신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들로 산으로 나선 것이었다.

잃어버린 바 된 많은 사람들을 염두에 두라. 그들의 눈이 감겨진 채로, 그들의 귀는 거짓말에 속은 채로, 그들의 양심은 부패하고 더러워져 모든 감각을 상실한 채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멀리 떠나 있다. 누군가가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불쌍하고 가련한 그들의 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울리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진리를 붙들지 못하고 영적으로 시들어 버린 차지도 덥지도 않은 교회들을 염두에 두라. 주님의 편에서는 그들의 영적인 잠을 깨워 진리에 바로 설 수 있도록 그들에게 도전을 줄 자들이 이 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2.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홀리클럽에 멤버 였고 설교에 있어서는 존 웨슬리도 따라 가지 못한 그 유명한 조지 휫필드
대부분에 사람들은 웨슬리 목사님은 잘 알아도 휫필드라는 이름은 생소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는 웨슬리 못지 않게 그시대에 대각성 운동을 일으켰고 영국사회와 미국의 부흥을 일으킨
주역이었습니다.

대부분에 사람들은 감리교 창시자가 존 웨슬리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휫필드가 만들었지만
신학의 견해차이로 완강했던 웨슬리와 함께 가지 못하였고 그의 말처럼  "휫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으시게 하라...." 며 웨슬리에게 넘겨 주었다고 합니다.  
웨슬리가 5년 동안 순회전도를 했었는데 그 계기는 휫필드에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순회전도를 하게 되었고 야외설교도 휫필드가 먼저 시작하여 웨슬리가 뒤를 이었습니다. 

 

웨슬리와 휫필드는 공통점이 두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두명 다 과부와 결혼을 했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두명다 "탁월한 야외설교자" 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야외설교를 할 때는 교통편이 어려웠던 그 시대에 많게는 1만명~8만명까지 모여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내가 설곳을 달라 지구를 흔들어 보이겠다."고 외쳤고 그영향은 실로 지구를 흔들게 되었습니다.

 

죠지 휫필드에 대하여 마틴 로이드 존스(martin Lloyd Jones) 는 "가장 위대한 설교가요 연사"라고 말하였습니다.
휫필드는 1714년 12월 16 일 영국의 글로우스터(Gloucester)에서 태어났습니다. 두 살 때 부친은 세상을 일찍 떠났고

그는 가난한 여인숙을 경영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는데 "거짓말을 좋아하고, 욕설 및 하찮은 농담을 잘하며, 안식일을 범하며 극장에 드나들고 카드 놀 이를 좋아하고, 연애 이야기 읽는"것을 좋아하던 평범한 아이였습니다. 그는 가난하였지만 시립

중학교에 무상으로 진학하여 라틴어와 헬라어를 배웠고, 웅변술도 읽혔다(Ryle 15). 18세가 되면서 옥스포드 대학교의 펨브로그 대학에 근로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을 입학한 후 웨슬레 형제가 1729년 "홀리클럽"을 결성하여 성경공부와 기도모임을 하고 있었고
찰스 웨슬리가 휫필드의 종교적으로 열심히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아침 식사에 초대했고
이것은 그 두 사람이 역사적인 우정을 맺게 되는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는 회심체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홀리 클럽의 멤버로 그 영향 아래서 휫필드는 찰스 웨슬리가 준 책 한 권을 접하게 되고
헨리스쿠갈의 "인간의 영혼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책을 통하여 회심하였습니다.

웨슬리를 만나며 엄격한 종교 계율과 성경읽기, 기도, 그리고 경건한 청교도들의 서적들을 읽으며 Holy Club 멤버중 가장 먼저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고 견고하게 붙잡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 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카스타누자(Castanuza)의 "영적 투쟁"(Spiritual Combat)과 같은 책을 읽으면서 금욕주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러나 스 쿠갈(Scougal)을 "인간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윌리엄로(William Law)의 "진지한 부르심"(Call to the Unconverted),알린(Allein)의 "회개치 않은 죄인들에 대한 경 고"(Alarm to Unconverted Sinners)등을 읽으면서 영적인 무지로부터 해방 되었습니다.

 

1736년 그는 22세의 나이로 성직에 임직하였고 그는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옥스포드에 가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런던의 여러 교회를 돌며 설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설교를 통하여 그의 명성은 높아만 갔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1737년 요한 웨슬리가 신대륙의 죠지아에 있는 사바나(Savannah)에 고아원을 설립하고 모금 운동을 위하여 휫필드에 동행할 것을 요청하므로 잠시 미국에 다녀오게 됩니다.

휫필드는 1738년 죠지아에서 돌아왔지만 그의 명 설교에도 불 구하고, 그에게 강단을 부탁하는 교회는 없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그는 1739년 2월 부터 브리스톨 근교의 킹스우드(K- ingswood)에서 소외된 광부들을 위한 옥외 집회를 열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두달 뒤, 그는 런던으로 가서 그의 친구의 교회당에서 설교 허가증이 없다는 이유로 그의 설교를 방해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교회당 밖에서 설교하여야 했고, 이러한 그의 행동은 결국 야외집회를 보편화 시켰습니다. 야외 집회는 새로운 운동이 되었고, 그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강단이 되었습니다. 같은 해 4월 그는 무어필즈(Moorfields)에서 3만명의 사람에게 설교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시작한 그의 집회는 18,000번에 달하 게 되었습니다 (Ryle 26).

그는 겨울철이면 전도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런던에서 정규적인 목회를 하였는데 그의 주간의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매주일 아침 6시30 분에는 수백명의 신자들에게 성찬을 베풀고, 주기도를 낭독하였습니다. 아침과 오후에 설교를 하고, 다시 5시 30분이면 설교를 했고, 그 뒤에는 남아있는 각계 각층의 사람들에게 적당한 강론을 하므로 하루를 마쳤습니다. 월요일, 수요일, 목요일 아침 6시에는 설교를 했고, 월요일, 화요 일, 수요일, 목요일 토요일 저녁에는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의 전도 여행 역시 괄목할 만한데. 그는 스코틀랜드를 14회나 방 문하였고 대서양을 13번이나 건넜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대서양을 횡단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생애의 1/3을 미국에서 보내었는 데, 미국에 머무는 동안 전도여행과 죠지아의 사바나에 있는 고아원을 돌아보는 일에 전념 하였습니다. 그는 여행으로 늘 지쳐 있었고, 매주 13 개의 설교를 행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가 행한 설교는 약 12, 000개나 되지만 현재 남아있는 그의 설교는 약 75개 정도됩니다.

벤쟈민 프랭클린은 말하기를 "나는 그를 30년 이상이나 가깝게 알고 지냈다. 모든 선한 사업을 집행하여 가는 가운데 그는 순수함, 사욕 없음, 지칠 줄 모르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칼빈주의적인 감리교도 (Calvinistic Methodist)였습니다.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미국과 영국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은 휫필드의 칼빈주의적인 설교에 의하여 일어났다는 점이다. 물론 복음적인 대각성은 휫필드와 웨슬리에 의하여 일어났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옥스포드에서 홀리 클럽(Holy Club)을 만들어 신앙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예정론과 구속의 범위에 관한 견해, 차이로 갈라서게 됩니다. 웨슬리 는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 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으며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보편속죄설을 주장하므로 알미니안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그러나 휫필드는 철저한 칼빈주의적 입장을 고수하였습니다.

결국 이 두 사람은 신앙적인 차이로 1741년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휫필드는 한 때 웨슬리가 천국에
올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 두사람의 신학이 다른다는 사실을 알았던 한 사람이 휫필드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웨슬리 목사님과 신학과 진리에 대한 이해가 다른데,
목사님께서 천국에 가시면 웨슬리 목사님을 만나실 수 있을까요?"
그러자 휫필드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아마도 우리는 천국에서 웨슬리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웨슬리는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움 곳에 앉아 있을 것이고,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온유한 휫필드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적으로 타협하지 않았으나, 인간적으로 화해하였고 웨슬리는 휫필드의 장례 설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습니다.

한번은 냉담하고 권위적이던 체스터필드(Chesterfield 1694-1774)경이 청 중속에 앉아 있었는데 휫필드는 그때 회개하지 않은 죄인의 가련한 상 황을 눈먼 거지를 통해 예증하였습니다. 눈먼 거지는 자신을 인도하던 개 를 잃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밤길을 향하여 걸어 가고 있었습니다. 설교 자가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청중은 숨소리까지 죽이며 조 용하여졌습니다. 눈먼 거지가 죽음의 벼랑에 떨어져 내리게 되는 순간,체 수터필드 경이 벌떡 일어나 그 거지를 구하려고 달려 나가며 큰 소리 로 `그가 떨어진다, 그가 떨어진다`고 부르짖었다.(Ryle 40-41) 또한 휫필드가 침몰하는 배를 묘사할 때 사람들은 생명선으로 옮겨 타려고 그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도 할 정도였다.(Adams 119).  설교에 있어서 진지하였다. 그는 사자처럼 설교하였다. 거룩한 격렬함이 있었으므로 조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열정과 연민으로 가득하였고 그의 말년에 그와 함께 전도여행을 하였던 코넬니우스 윈터(cornelius Winter)는 말하기 를` "그는 설교를 눈물을 흘리지 않고 끝낸 적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의 설교는 그의 열정적인 기도의 덕분이었습니다.(Demaray 211 -212) 그는 불신자에게 설교하면서 `저를 믿어 주세요. 저는 당신을 위하여 감옥에도 죽는데도 기꺼이 가겠습니다.그러나 당신 없이는 천 국에 혼자 가고 싶지 않습니다.(Demaray 212-213). 6. 설교의 영향에 라일은 말하기를 "그가 34년 동안 청중을 사로잡았던 것처럼 자기의 영향력을 유지한 설교자는 일찌기 없었다. 그의 인기는 수그러드는 법이 없었다.

그가 설교를 시작했던 날과 죽는 날이 같았다"고 합니다. (Ryle 37)벤자민 프랭클린은 말하기를 "참으로 신기한 일은 그의 설교를 듣자마자 필라델피아 주민들의 생활 자세가 급속히 변하는 것이다. 종교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무관심하던 세상이 온통 종교적으로 성장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

 

휫필드는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을 일으킨 조나단 에드워즈와 함께 미국에서 대부흥을 일으킵니다.
하바드와 뉴헤븐(예일)대학에서도 설교를 했는데, 몇 주 후 콜렌박사는 하바드의 분위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학교가 완전히 변했다. 학생들은 하나님으로 충만해 있다. 정말 거듭난 것 같아 보이는 학생들도 많다. 기도와 찬양소리가 학생들의 방을 가득 채우고 있다....그 날 설교를 들은 백여명의 학생 중 일곱명만 아무 감동도 못 받았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예일대학에 관해서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뉴 헤븐에서의 각성 분위기는 ...한동안 매우 크고도 보편적으로 일어났다. 대학당국은 이 일에 한몫 끼지도 못했다. 학생들은 전반적으로 아주 진지해졌고 주목할 만한 정도로 달라진 학생들도 많았다...휫필드의 설교는 그 대학의 많은 학생에게 행복하고도 지속적인 인상을 남겼다.'

휫필드를 적대시했던 사람중의 하나인 영국인은 1756년에 쓴 한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휫필드 씨에게는 십만명가량의 추총자가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있는 데 그들 대부분이 설교를 듣기 전에는 지독히 비열하고 나쁜 사람들이었으나 지금은 건전하고 경건한 사람들이요 사회의 훌륭한 일원이자 왕의 충직한 신민들이 되었다고 한다. 웨슬리씨의 설교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들 한다.....' 라고...

휫필드는 감리교의 수장자리를 맡게될 기회를 가졌으나 스스로 포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수많은 추종자들이 감리교 수장자리를 포기하면 휫필드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질 것이다 라고 말하자

 

그때 그는 "휫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으시게 하라. 내 이름은 모든 곳에서 죽어 없어지게 하고 내친구들도 나를 잊게하라.그렇게 함으로써 복되신 예수의 대의가 진작될 수 있다면...생략...나는 내 명성을 깨끗하게 지워버릴 심판 날이 올 때까지 만족하며 기다린다. 그리고 내가 죽은 뒤 묘비에는 '여기 G. W.눕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위대한 심판 날이 밝혀 줄 것이다.'라는 말 외에는 쓰지 말라" 라는 말을 남김으로 수장의 자리를 포기했고 그 결과 감리교회 창시자는
요한 웨슬러로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의 마지막 죽음의 순간처럼 그의 전 삶을 대변하는 메시지도 없는 것 같습니다.
1770년9월29일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휫필드는 보스톤으로 가는 중에 엑서터라는 마을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한 노인이 그에게 말했다. '선생님, 당신은 설교보다는 침대로 가는 게 더 어울리겠습니다.' 그러자 휫필드는 '맞습니다. 노인양반'이라고 말하고는 얼굴을 돌려 하늘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주 예수여, 저는 주님의 일에 지쳐있기는 하지만 그 일에 싫증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제가 아직 갈 길을 다가지 못했다면, 저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들판에 가서 당신을 위해 말하게 하시고 당신의 진리를 인치게 하신 뒤 죽어 본향에 가게 하옵소서' 휫필드는 여기서

 

55세의 나이에 소천을 하게됩니다. 그는 죽기 전날 밤까지 힘든 몸임에도 2시간의 야외 설교를 감당했고, 그 피곤한 몸으로 여관에 돌아와서도 그를 만나러 온 사람들에게 촛불이 다 탈 때까지 마지막 설교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 밤 그는 지병인 심한 천식으로 고생하였고, 그것이 결국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정말 그는 촛불처럼 마지막까지 그의 전 몸을 불살라 드림으로 인생을 마무리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삶을 아는 찰스 스펄전은 그리스도 다음으로 휫필드를 따른다고까지 고백하였고 또한 라일은 18세기 위대한 영적 지도자를 기술하면서, 다른 누구보다도 그를 먼저 다루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휫필드를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언급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자료는 그의 사역의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는 것이 아쉽습니다.

 

3.

요한 웨슬리의 동생이며, 동역자인 나 찰스 웨슬리는 주 안에서 사랑하는 나의 귀한 친구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를 주님의 곁으로 보내면서,

그를 위해 537행의 시로 내 마음을 달래면서도 이렇게 다시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옥스포드 대학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진리를 찾아 학문의 숲에서 배회하던 휫필드는 생각에 잠긴 듯한 겸손한 청년이었고,

내 눈에는 가식도 술책도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요, 천사와도 같이 비쳤다.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기 전, 우리는 함께 열성을 다해 종교적인 선을 진지하게 추구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각기 우리의 열심으로 그분께 도달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고,

스무 살(1735년) 때 그가 우리 형제보다 먼저 회심하여 구원받게 되었다.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길과 산기슭으로 가서 강권하여"

 


설교를 한다는 것과 목회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에 대해 그가 얼마나 깊이 염려했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

목회는 한 직업으로서의 일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분명한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으로 하여금 그분의 교회를 이끌도록 하지 말아 주실 것을 수도 없이 기도했다.

"주님, 저는 갈 수 없습니다. 나는 교만에 들뜰 것이고, 마귀의 올무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옥스포드를 떠나 있던 그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너무나 분명했다.

그가 목자로서 글로스터에서 설교하기 시작한 후, 그에게는 설교해 달라는 초청이 여러 곳으로부터 쇄도했고,

초청받는 곳곳에서 그는 거듭남의 교리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아 어떤 이들은 높은 오르간 난간에 매달려서,

교회의 함석 지붕으로 기어올라가서까지 그의 설교를 듣고자 했다.

교회 전체가 사람들이 내뿜는 숨결로 후끈 달아올라 기둥들에서 마치 빗방울이 떨어지듯 물방울이 맺혀서 떨어졌다.

설교자가 설교단으로 걸어나가기 힘들 정도로 운집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휫필드가 세례받은 신자들에게까지 거듭남이 필요하다고 설교했기 때문에, 다수의 교회들은 자존심이 상했으며 분개하기 시작했다.

결국 조지아에서 돌아온 휫필드는 교회들에서 거부당하고 밀려냄을 당했다.

현실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당시 교회 건물 안에서만 전해지던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찾아나서지 않고 있었을 때, 그들을 위해 휫필드는 창조적인 방식,

배척과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야외 설교의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

그는 먼저 일생에 한 번도 교회에 가 본 적이 없는 광부들에게로 갔다.

브리스톨 부근의 킹스우드(Kingswood)의 한 얕은 언덕 위에 휫필드가 섰을 때, 그의 주위에는 새까만 얼굴의 광부들이 모여들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바로 죄인들의 친구였으며, 나와 여러분 같은 죄인들을 회개시키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여러분을 대신해 죽으셨습니다..."


그 언덕에 서서 목청이 터져라 외치는 그의 설교를 듣던 그들의 새까만 두 볼에는 어느 새 회개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말씀을 전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밝게 빛나는 태양 아래 나무와 울타리에도 사람들이 가득 올라서서

뇌성과도 같이 또렷하고 분명하게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심하고,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런던, 무어필드, 케닝턴 등 영국 각 지방과 새로운 개척지 미국의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그는 그의 목자를 대신해서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다녔다.

그 길이 광야든, 험한 바다이든 가리지 않았으며,

그저 안락한 곳에 앉아서 태만하게 죄인들이 자신을 찾아오기를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34년 동안 18,000회의 공중집회를 이끌었다.

 

"이 세대의 자칭 의인들이 그들 자신을 무가치한 자로 간주하기에,

나는 길과 산기슭으로 나가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을 강권하여 내 주님의 집이 채워지게 했다."

 

 

 

"휫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라"

 

설교자로서의 휫필드는 그가 원하기만 했다면 거의 무한정의 "인기"를 그대로 유지할 수도 있었다.

청중들의 환호와 호의와 박수갈채는 갈수록 커졌으며, 심지어 그를 천사로까지 불렀다.

그러나 그 가운데 있으면서 휫필드는 자신을 파멸시킬 용광로의 뜨거운 불 사이로 걷는 자처럼 두렵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다.

그분의 칭찬 외에는 모든 찬사가 헛된 것임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우리 웨슬리 형제들도 설교자로서 동일한 유혹과 죄의 공격을 받아 왔기에, 설교자로서의 사역이 기쁨과 동시에 더욱 큰 영적 싸움임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내 자리를 안다."고 말했던 휫필드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소망을 전했다.

"나는 내 명성을 깨끗하게 지워 버릴 심판날이 올 때까지 만족하며 기다린다.

그리고 내가 죽은 뒤 묘비에는 '여기 G. W. 눕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위대한 심판날이 밝혀 줄 것이다.'라는 말 외에는 쓰지 말라."

 

 


"모든 사람의 종으로 있게 하라"

 

휫필드는 복음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섬겼다.

킹스우드의 광부들, 더머(Dummer)에서 만났던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 미국의 흑인 노예들,

미국의 프랭클린이나 벨쳐, 영국의 볼링브로크나 체스터필드, 그리고 학식 있고 위엄 있는 일단의 귀족들까지...

그 섬김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뿐만 아니라 폭도들의 생명의 위협과 폭력 속에서도 줄어들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사실 그러한 위협들은 신앙 부흥이 일어나고 있던 기간 내내 휫필드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웨슬리)의 사람들, 해리스의 인도 아래 있던 사람들과 모라비안들도 감당해야 했던 수난이었다.

휫필드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남으려 했다.

누군가는 엄청난 액수의 생활비를 주겠다고도 제안했으나, 그는 영광 중에 안식하기까지는 안식할 생각이 없었다.

"이생에서 나는 영원한 갈등과 고난을 찾을 뿐이며,

내가 영원 세상의 이편에 있는 동안 십자가 외의 다른 어떤 평화도 소망하지 않는다."


그는 아무도 속박하려 하지 않았으며, 교단을 결성하지도 않았다.

그의 추종자들은 끝까지 그를 그 단체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려 했지만,

그는 자유롭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꾼으로 남고자 했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자 했다.

 

 


"주님의 일에 지쳐 있기는 하지만 싫증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내 사랑하는 친구 휫필드는 1770년 9월 29일 주일, 북 아메리카 뉴베리 포트에서 55살의 아까운 나이에 갑자기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여러 해를 계속해서 보통 40시간, 곧잘 한 주에 60시간씩, 수천 명의 청중들에게 설교했다.

30여 년 동안 조금도 쉬지 않고 그토록 무거운 짐을 졌던 그였다.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의 반대를 이겨 내야 하고, 모든 청중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며,

바람불고 비 오는 험악한 날씨에도 한두 시간씩 설교를 강행했던 그는 늘 피곤과 싸워 이겨야 했다.

미국 남부의 더운 날씨에서의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었다.

때때로 그는 더위와 피로로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복음을 선포할 책임에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소생시키곤 했다.

격심한 정신적, 육체적 활동의 시간이 되면,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건해지곤 했다.

"나는 조금씩 자고 조금씩 먹었으며,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일했다."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는 데 걸린 시간과 중간 중간에 잠깐씩 휴식을 취하거나 그 다음 일정을 준비하는 데 걸린 시간을 제한다면,

그의 전 생애는 계속 이어지는, 거의 중단 없이 설교로 소진된 삶이었다.

 

휫필드는 그의 생에 동안 미국을 일곱 번 방문했고,

스코틀랜드에 열 다섯 번, 아일랜드에 두 번, 지브롤터와 버뮤다와 네덜란드에 각각 한 번씩 갔다.

더욱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캐나다와 서인도 제도에까지 가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교회들의 신앙은 퇴색해 가고, 교회 안에는 형식적인 신자들 투성이었다.

아무도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우리들은 주님 대신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들로 산으로 나선 것이었다.

 


잃어버린 바 된 많은 사람들을 염두에 두라.

그들의 눈이 감겨진 채로, 그들의 귀는 거짓말에 속은 채로,

그들의 양심은 부패하고 더러워져 모든 감각을 상실한 채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멀리 떠나 있다.

누군가가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불쌍하고 가련한 그들의 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울리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진리를 붙들지 못하고 영적으로 시들어 버린 차지도 덥지도 않은 교회들을 염두에 두라.

주님의 편에서는 그들의 영적인 잠을 깨워 진리에 바로 설 수 있도록 그들에게 도전을 줄 자들이

이 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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