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지 휫필드-웨슬리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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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앙 연구가들/죠지 훳필드

2008. 8. 3.

 

 

휫필드와 웨슬리|



1. 생애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는 1714년 12월 16일 글로스터에 있는 벨이라는 여관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에 부친을 여의었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 자신은 젊은이들이 빠지기 쉬운 거의 모든 죄를 저질렀다고 하였다. 그는 행복하지 못하였고 예민한 양심은 죄책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결국 그가 일하던 술집을 나와 옥스퍼드로 향하였다. 그는 18세에 옥스퍼드의 팸브록 칼리지에 근로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수학함으로서 그의 일생이 변화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두명의 웨슬리, 요한과 그의 동생 찰스를 알게 되었고 엄격한 생활 방식(method) 때문에 처음으로 Methodists로 불렸던 경건한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당시 옥스퍼드에는 신앙적으로 열심이 있는 학생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그들은 '성경 벌레들', '성경꾼들', '성찬 증시자들', '형식주의자들', '홀리 클럽' 등으로 불렸다.

 

그 모임에 속한 사람들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긴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을 실천했다. 그 모임 회원의 한 사람인 찰스 웨슬리가 휫필드의 종교적으로 열심히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아침 식사에 초대했다. 이것은 그 두 사람이 역사적인 우정을 맺게 되는 발단이 되었다. 홀리 클럽의 영향 아래서 휫필드는 그의 사고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은 책 한 권을 접하게 된다. 그것은 스코틀랜드 사람 헨리 스쿠걸이 쓴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그때까지 휫필드는 '중생'의 기적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선행으로서 천국의 도상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책을 읽고 그는 지금까지의 그런 생각들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1735년에 회심하여 1736년부터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1736년은 그의 부흥운동에서 중요한 해로서 6월 20일 그의 나이 21세에 글로스터의 감독 벤슨으로부터 안수를 받고 일주일 후 6월 27일에 성마리아 크립트 교회에서 처음으로 설교하였다.


8월에는 런던의 비셥스게이트에서 큰 군중을 모아 놓고 설교집회를 열었고 런던타워 예배당의 대리목사로 봉직하였다. 두 달 후 햄프셔에서 교구목사로 일하기 시작하였고 죤 웨슬리의 영향을 받아 죠지아 선교에 대한 소명을 느끼게 되었다. 1731년 1월 브리스톨에서 첫설교를 하고 1737년 5월까지 이곳에서의 설교활동은 계속되었다. 휫필드는 광부 등의 가난한 자녀들을 위해 킹스우드 스쿨을 설립했으며, 웨일즈 장로교회로 불리는 웰쉬 칼빈적 메도디스트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1743년에 이 교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그의 영향은 스코틀랜드를 거쳐 미국으로 확대되었다. 1740년 이후 휫필드가 미국 교회에 끼친 영향은 1735년 제1차 대각성운동을 능가하는 제2차 대각성운동이었다.
그는 미국을 일곱차례 방문하였으며 대서양을 일곱 번이나 건너는 선교의 열정은 그가 34년간 18,000회 이상의 설교를 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2. 설교와 설교의 방식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사람을 낚는 어부의 일을 함에 있어서 한결같았으며 하늘 아버지의 일을 수행하고자 바다와 육지를 넘나들었다. 단순한 설교를 했다. 설교에서 목표로 삼아야 할 첫 번째 조건은 이해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지닌 스타일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아울러 자신이 지닌 학문의 명성을 희생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거룩하신 주님을 본받아 예화와 일화를 풍부하게 사용했으며 자연 속에 있는 모든 것에서 여러 가지 교훈을 이끌어 냈다.


불같은 열정으로 말씀을 전했으며 마치 그들이 전하는 것이 진리이며 그 말씀을 듣는 것이 청중에게 가장 중요한 것처럼 선포했다. 하나님이 청중에게 하신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처럼 반드시 그 메시지를 전해야만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메시지를 청중이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처럼 말씀을 전했다. 자신이 전하는 설교 속에 그들의 마음과 영과 정서를 쏟아 부었으며 그 말씀이 청중의 심령에 깊이 박히도록 했다.

3. 설교의 내용과 주제

첫째, 성경의 완전성과 탁월성을 끊임없이 가르쳤다. 사람의 판단 능력으로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검토하거나 거절하거나 혹은 받아들이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오류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믿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고정시켰으며 그 말씀과 생사를 같이했다. 성경을 존중하고 사랑했다.
둘째, 인간 본성의 전적 부패를 끊임없이 가르쳤다. 모든 사람이 죽었고 반드시 다시 살아나야 하며 그들이 죄를 지었으며 잃어버린바 되었으며 무기력하며 아무 소망이 없으며 영원한 멸망의임박한 위기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포했다.


셋째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인간의 죄를 대신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고 끊임없이 가르쳤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그분은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속죄의 보혈을 묵상했다.


넷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이라는 위대한 교리를 끊임없이 가르쳤다.
다섯째 누구든지 성령으로써 새롭게 거듭나고 회심해야 할 것을 끊임없이 가르쳤다.
여섯째, 진정한 믿음과 개인의 거룩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가르쳤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그의 열매로 나타나야 하며 또한 이 열매는 삶의 모든 관계 속에서 명백하게 드러나야 하며 의심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곱째, 하나님은 영원히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들은 영원히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의 풍성함을 드러내며 모든 죄인에게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해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계속 간청했다.

4. 복음 사역

성령의 강권하심을 느끼고 주님이 주신 원칙에 따라 그런 사람들을 찾아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채우기로 결심하고 야외에서 설교했다. 순수한 신앙 운동이 전전되었고 사탄의 손아귀에서 영혼들이 구출되었다. 한 가지 일에 그리고 늘 주님의 일에 몰두했던 특출한 사람이었다.

 

병으로 누워 있는 시간은 제외하고 쉬지 않고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와서 구원함을 받으라고 사람들에게 간청하면서 세상 곳곳을 돌아다녔다. 31년 동안 이런 방식의 일에 몰두했으며 늘 영광스러운 복음을 선포했고 그의 사역은 항상 놀라운 효과를 가져 왔다. 그는 34년의 사역 기간에 18.000번이나 공중 앞에서 설교를 한 것으로 추산된다. 스코틀랜드를 14번 방문했으며 성경을 사랑하는 나라라면 어는 곳이든 기꺼이 방문했다. 대서양을 일곱 번이나 횡단했으며 아일랜드로 두 번 건너갔다. 영국 국토 끝에서 북쪽 끝까지 두루 다녔다. 야외 설교를 할 수 없는 겨울 동안 런던에서의 그의 규칙적인 사역은 놀라운 것이었다.


5. 휫필드 부흥운동의 특징 -위대한 설교가

휫필드의 설교의 주된 내용은 원죄와 중생이었으며, 성령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이고 내적인 영향을 믿었다. 그의 설교의 또다른 주제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는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설교는 중생치 못한 자연인의 마음의 부패성과 신생의 필연성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신학적인 면에서 웨슬리와 차이를 느끼고 결별하였는데, 웨슬리는 알미니안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었는데 비하여 휫필드는 칼빈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웨슬리와 휫필드는 다같이 평생 영국성공회 성직자로 남아 있었다. 영국성공회는 오랫동안 청교도와 투쟁하는 동안 극단적인 칼빈주의를 배격하게 되었고, 알미니안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웨슬리는 이러한 전통을 따라서 알미니안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브리스톨을 떠나면서 휫필드는 웨슬리가 "예정(predestination) 교리에 관해서는 아무런 논쟁을 하지말기를" 기원했다. 웨슬리는 휫필드가 바로 칼빈주의라는 신학 체계를 지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상황을 볼 때 예정론에 관해 "논쟁하지 말라"는 휫필드의 권고는 웨슬리로서는 따르기 힘든 권고였다. 결별은 필연적인 것처럼 보였다. 복음적 알미니우스주의와 예정론의 결별이 이뤄진 것이다.

 

휫필드는 1737년 런던에서 중생에 관한 일곱 편으로 이뤄진 설교를 출판했는데, 여기서 "중생은 외적인 고백뿐 아니라 내적인 변화요, 마음의 정결이요, 성령의 내주이고, 그러므로 신비적으로 참되고 생동감 있는 신앙에 의하여 신비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로부터 영적인 덕목을 받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또한 그는 주장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칭의와 중생을 구별하는데, 그러나 이것을 구별하려는 것은 중대한 잘못이라고 못 박는다. 휫필드에 의하면 물세례는 결코 참된 신자의 표징이 될 수 없다. 참된 신자의 표시는 외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데에 있다. 그 내면적인 것이란 성령으로 말미암는 중생을 말한다. 휫필드는 물세례가 아니라 성령세례가 참된 신자의 표징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가 말하는 성령세례란 곧 중생을 말한다.


대중의 귀를 사로잡았다는 것과 그의 생애 동안 쉬지 않고 설교를 했다는 것은 그가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는 증거다. 모든 계층의 사람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높은 사람이나 비천한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을 막론하고 존경을 받았다.

6. 공헌

죠지 휫필드는 옥스퍼드의 "거룩한 모임"의 회원이었으며, 그의 업적은 신학적인 면에서 웨슬리와 약간 상이했다고 인정할 수 있으나 웨슬리와 병행했다. 휫필드가 기독교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그가 모든 면에서 감리교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 그의 신학은-자신은 칼빈을 읽은 일이 없다고 강력하게 말하지만-알미니우스주의자라기보다는 견실한 칼빈주의였다는 점이다. 그와 동시대 사람들은 그가 웨슬리보다도 더 설득력 있는 설교가라고 생각했으며, 그의 활동은 급기야 웰쉬-칼빈주의-감리교-교회(Welsh Calvinistic Methodist Church)를 탄생시켰다. 휫필드의 18세기의 위대한 설교가로서의 면모는 당시의 잡지였던 "신사의 잡지(The Gentleman's Magazine)" 기사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엿볼 수 있다.

 

기사에 의하면, "한 사회 내에서 열등한 사람의 근면은 그 부요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휫필드 목사와 같은 사람이 5,6천 명의 대중으로부터 매일의 노동을 그의 설교로 앗아간다면 적은 시간이지만 그 사회에 가져오는 손해는 얼마나 큰 것인가! 내 견해로는 만일 이 신사가 킹스우드의 광부들에게 자진해서 설교를 시작한 것처럼 여기서도 계속 설교를 해 나간다면 브리스톨 시 근방에서 얼마만큼의 석탄 가 폭등이 일어날지 모르겠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은 그의 설교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매료되었으며, 그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했는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평일이나 주일이나 그가 전도하는 곳의 교회는 청중이 빽빽이 들어찼고 굉장한 평판을 낳곤 하였다. 명백한 사실은 참으로 웅변을 잘하고 즉석에서 아무 준비 없이 설교를 하는 전도자가 순수한 복음을 보기 드문 목소리와 훌륭한 몸짓으로 전하는 것인데, 그 때 런던에서는 전혀 새로운 체험이었다.

 

그의 청중들은 놀라고 황홀해진 나머지 넋을 잃었다. 1739년부터 1770년 그가 사망하기까지 31년 동안 그는 오직 한 가지 일에 매달리는 사람이었으며, 항상 주 예수의 일만을 추구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혼신을 다해 청중들에게 설교했다. 휘필드는 웨슬리의 정확한 논리성과 비상한 행정력, 그리고 깊고도 강인한 성품이 결여되었으며, 웨슬리는 그보다 좀 느리기는 하지만 더욱 확고한 편이었다. 휫필드는 보다 신속하고 열렬하였으며 충동적이지만 그러나 웨슬리와 같은 종교적인 심원함을 소유하였으며, 더욱이 그는 웨슬리가 알지 못할 정력적인 영역에서 살았다.

 

거기에 첨가하여 그는 웨슬리로서는 당할 수 없는 웅변가였다. 그는 그의 일생에 걸친 설교사역에서 엡 2장 8절의 말씀을 주제로 삼았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개혁자의 신앙을 이어받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에 진력한 휫필드의 삶은 굳어진 18세기 교회의 문을 부수고 무뎌진 명목상 신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에 감격하였고, 내면적 부흥운동의 큰 줄기로서 그들을 중생의 길로 인도하였다


존 웨슬리

1. 존 웨슬리

웨슬리는 하나님이 영국의 개혁을 위해 사용하신 전도자이다. 웨슬리는 부모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것을 그의 전도사역에 중요한 기조로 삼았다. 존 웨슬리의 부친 사무엘은 영국국교의 교구목사였다. 사무엘 웨슬리가 그의 아들 존에게 미친 가장 중요한 영향은 첫째, 성경관이었다. 그는 청교도들과 똑같이 성경을 사랑했으며, 집중적인 성경 연구와 성경과 관련된 저술에 몰두하였다. 둘째, 세계관이다. 사무엘은 교회가 세계를 향한 선교적 차원에서 사역을 감당해야 된다는 환상과 확신을 갖고 있었다.

 

 선교는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에서 나오는 삶을 나눔으로, 현지인의 언어를 배움으로, 그리고 기도로 한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 사무엘 웨슬리가 그의 아들에게 미친 영향은 사무엘의 신도회에 관한 자세였다. 사무엘 웨슬리는 신도회들을 옹호하였고, 후에 스스로도 신도회를 만들었다. 존 웨슬리는 아버지로부터 신도회에 대한 자세를 물려받아 복음적 회심 이전에도 가는 곳마다 신도회를 만들었다. 존 웨슬리의 어머니, 수잔나 웨슬리의 경건 생활은 이미 철두철미한 청교도 가정에서 형성된 바 있었다. 수잔나 웨슬리는 그녀의 자녀를 청교도 지도자들의 가르침으로 엄격하게 키웠다. 수잔나 웨슬리가 이런 방법으로 자녀를 키운 목적은 첫째, 자녀들의 영적 생활을 체계화 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자녀들을 거룩하게 성장시키기 위해 기독교 신앙의 교훈을 위한 지침서를 만들었다.

웨슬리 아버지는 "성경 그 차체다. 성경 원문에 비교하고 또한 성경을 서로 배교해 볼 때 여러 가지의 역본과 수 개 국어로 된 번역판이 있지만 내 생각에 성경 자체가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주석보다도 정직하고 경건하고 부지런하며 겸손한 사람에게는 훨씬 더 유익하다."고 말했다.

웨슬리의 어머니는 "네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세상적으로 즐거워하는 것을 버리고 더 숭고하고 영적인 것에 더 진지하고 친밀하게 되도록 너의 마음을 준비하고 정돈하기를 바란단다. 너의 이성을 약하게 하는 것, 너의 양심의 부드러움을 손상시키는 것,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의식을 모호하게 하는 것, 영적인 것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즉 네 육신이 네 마음을 지배하도록 부추기는 모든 것은 비록 그것이 그 차제로서는 무죄하고 해도 너에게는 죄가 된다."고 웨슬리가 안수받을 하신 말이다.

2. 웨슬리의 삶

근면, 시간관리, 자기 부인의 생활로 스스로를 철저하게 훈련했으며, 이런 습관을 그가 죽는 날까지 지켰다. 하나님은 자신의 방법으로 도구들을 알맞게 조절하시고 준비하신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하나님의 방식이 최선임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방식은 인간의 방식과 다르다. 영혼 안에서 실제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종이 된 것이다.

우리는 영혼을 구원하고 영혼을 위로하는어떤 진정한신앙 없이도 대단한 열심과 종교성르 가질 수 있으며 내적인 기쁨이나 평강, 혹은 한나ㅣㅁ과의 교제가 없이도 금식과 기도와 예배 형식과 성례와 주의 만찬을 부지런히 행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신자가 되거나 죽어서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지도 않은채 도덕적 삶이나 선한 일에 열심을 낼 수 있다. 그러나 웨슬리는 어디에 가든지 죄와 무지를 공격했고,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에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선포했다. 죄인을 일개웠으며 구도자엥게 길을 안내해 주었고 성도들을 세워 주는 일에 결코 지치지 않았으며 자신이 세운 길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3. 웨슬리를 특별하게 만든 독특한 자질
1) 한 가지 일에 대한 집념과 끈질긴 목적의식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 선한 일을 위해 수고하는 일,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애쓰는 것이 그의 유일한 목적이었으며, 그의 삶을 지배하는 열정이었다.
2) 비범한 부지런함, 자기부인, 시간 절약이다.
게으름을 혐오해야 한다. 우리는 시간을 아껴야 한다. 가장 많이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3) 다양한 일을 해 낼 수 있는 놀라운 다재다능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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