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창조와 시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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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앙 연구가들/어거스틴

2009. 1. 13.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조와 시간론

정기철(호남신대, 기독교 철학)

0. 들어가는 말
아우구스티누스의『고백록』11권은 영원한 창조자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시간 창조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는 창조 교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하기 위해서 시간에 관한 분석을 하고 있다. 그의 시간에 대한 논의는 결코 '시간 일반이 존재하는가?'라는 논의에서 시작하지 않고 시초, 곧 창조와 관련해서 전개된다.


이 글의 관심은 창조의 시간에 대한 분석인데, 그 분석의 모델을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찾았다. 그가 전개한 시간 분석이 왜 오늘날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시간을 창조와 관련하여 설명하는 것이 왜 성서적 사고인지 밝히고자 한다. 또한 왜 시간을 창조와 관련하여 설명해야만 올바로 규명되는지 살피고자 한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그가 시간의 본질에 대해 분석할 때, 무엇보다 일상적인 시간 개념을 이해하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분석할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시간 개념을 뛰어넘어 영원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간을 규정하려고 노력했다. 시간은 영원과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근거해 시간을 설명하지 않고는, 일상적인 시간 이해 속에 숨겨져 있는 시간의 본질이 올바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나님만이 시간의 근원이고 시간의 창조자이시라는 생각이 그의 시간 논의의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따라서 그의 시간에 대한 탐구는 영원한 말씀에 대한 탐구이다.


우리의 논의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간론을 주관적 심리주의라 지적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간론이 그의 시대 때부터 오늘날까지 왜 신학에서 중심이 되는 이론이고 역사신학의 출발이 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더 나아가 앞으로도 시간에 대해 신학이 논할 때 그의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한다. 즉 시간을 영원과의 관계에서 규정하기 시작한 플라톤 이래로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과 달리 시간을 어떻게 기독교적으로 설명해 나가고 그 설명을 오늘날 우리도 기독교의 중심이 되는 사상으로 계승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의 존재와 본질을 어떻게 규명하고 설명하는지 살펴보고 그것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여러 후학들의 의견을 곁들어 지적하고자 한다.

1. 시간의 존재와 본질
시간의 존재는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같은 것이다. '시간이 존재하느냐?'라는 물음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시간이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여기 책상 위에 연필이 있다'는 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그렇다고 '있으면서 동시에 없다'는 시간의 존재와 비 존재는 '존재를 결여한 존재'라는 말과 같은 의미에서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이를 인정하면서 시간의 본질과 존재를 파악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실토한다: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누가 쉽게 그리고 간략하게 그것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그것을 잘 이해하여 그 대답을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일상 대화에서 시간보다 더 친근하게 그리고 잘 이해하고 있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시간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시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만일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묻는 자가 있어서 그에게 시간을 설명하려고 하면 나는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일 아무 것도 흘러 지나가지 않으면 과거의 시간이란 없을 것이요, 만일 아무 것도 흘러오지 않으면 미래의 시간이 없을 것이며, 만일 아무 것도 현존하지 않는다면, 현재라는 시간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11권 14장 17절).


아우구스티누스는 무엇보다 시간의 존재를 시간의 세 존재 방식과 연결하여 설명한다.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가지의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적당치 않습니다. 아마 과거 일의 현재, 현재 일의 현재, 미래 일의 현재라는 세 가지의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11권 20장 26절).
그러면 과거와 과거 일의 현재는 어떻게 다른가? 현재와 현재 일의 현재 그리고 미래와 미래 일의 현재가 어떻게 다른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에 따르면 그 차이는 과거나 현재 또는 미래라는 그것 자체보다도 지나가고 없으며 오지 않아 알 수 없는 시간의 측량 문제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인식하는 데서 생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시간이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가? 어디에 존재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세 가지의 시간이 어떤 면에서 우리의 마음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 밖의 다른 곳에서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11권 20장 26절).

2. 시간에 대한 인식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의 존재를 시간에 대한 인식과 분리하여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가 직관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시간 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나 우리 자신에게만 해당하지 사물 자체나 도덕적인 나 혹은 영원하신 하나님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앎은 확실히 내 안에서, 즉 내 생각의 집안에서"(in domicilio cogitationis, 11권 3장 5절)이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방법은 우리가 잘 아는 경험과는 아주 다르다. 하나님은 독립적으로 시간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의 "본성 안에는 아무런 시간도 공간도 없다. 그러면서도 시간과 공간과 자기에게 부속된 피조물을 움직인다." 우리의 논의의 출발점은 시간이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아직 잘 모른다는 것이다:


"시간 안에 있는 모든 사건 - 아직 없고 앞으로 있을 사건이나, 현재 눈앞에 있는 사건이나, 지나가서 없어진 사건이나 - 들을 하나님은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현재의 순간에 보신다. ---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보시더라도, 거기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지식과 달라서 하나님의 지식은 시간이 현재와 과거와 미래로 변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다. --- 스스로는 시간적으로 움직이시지 않으면서 시간 속의 물건들을 움직이시는 것과 같이, 시간 속에서 인식 활동을 하심이 없이 시간 속의 사건들을 아신다."

3. 시간과 창조
3.1. 창조의 주체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의 주체를 하나님이라 한다. 창조는 하나님만이 가능하다:
"시간의 기간들을 창조한 분이 하나님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하나님이 물체들을 만드시고, 그것들이 움직임으로써 시간의 경과를 표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모든 시간을 창조하셨고, 모든 시간을 앞서 계시니, 시간이 없었을 그 때에 어떤 시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11권 13장 16절).
시간뿐 아니라 인간도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다:
"우리가 존재하게 된 것은 우리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ideo sumus, quia facta sumus). 그러므로 우리가 존재하게 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만들 수 없었다. --- 이 모든 것을 만드신 이는 당신이옵니다"(11권 4장 6절).

3.2 창조의 이유
하나님은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이 질문에 플라톤은 '신이 선하기 때문'(quia bonus)이라는 "선한 신에 의해서 선한 것들이 창조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플라톤은 선한 신에 의해 선한 것들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주가 완성되었을 때 신이 기뻐했다고 덧붙인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창조의 善'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플라톤과 달리 창세기 1장 31절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을 통해 선하신 하나님이 선한 피조물들을 만드셨다는 것이 창조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설명한다. "모든 존재는 그것이 존재하는 한 선하다." 따라서 그는 악을 선의 결여(privatio boni)로 규정한다. 선의 결여란 무에로의 타락과 선의지의 결핍을 뜻한다. 그는 창조는 다만 창조주의 자유의지와 그의 선하심과 은총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창조된 세계는 선하고 아름답다는 존재에 대한 긍정의 세계관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피조물 세계의 선함을 창조자의 선하심에서 찾았다.

3.3 창조의 방법
하나님은 어떻게(방법) 세계를 창조하셨는가? 하나님은 영원하신 말씀으로 세계를 창조하셨다:
"당신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11권 7장 9절).
말씀은 시간과 변화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원하고 불멸한 존재로 시작하는 것도 없고 끝나는 것도 없는 "영원한 이성"(aeterna ratio, 11권 7장 9절)이다. 이 영원한 이성이 바로 '처음'(principium)으로 "육신이 되어"(요 1: 14)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요 8: 25)라고 설명한다. '처음부터' 곧 '태초'란 라틴어 in principio로 영원한 말씀 속에 있는 원리 또는 영원한 이성을 뜻한다. 이 때의 '태초'는 "시간의 시작이 아니라 - 그 때는 시간이 없었으므로 - 그 존재의 기원"(12권 15장 20절)을 뜻한다.

3.4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세계가 무엇으로부터 창조되었는가? 이 질문에 플라톤(Platon)의 형성설과 플로티누스(Plotinus)가 주장한 유출설 그리고 신학적인 무로부터의 창조를 주장한 신학적 창조설 등으로 대답되어 왔다. 이 중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무로부터의 창조설을 지지한다. 그 이유는 무로부터의 창조설이 하나님의 주권과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해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물질 혹은 원초적 질료도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이 선재하는 질료로 세계를 만들었다고 주장하게 되면, 그 때는 하나님이 마치 인간의 장인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또한 물질이 창조되지 않았다면, 물질이 불변성을 가지게 되나 그것은 우리의 일상 경험과 상반된다.


그러면 무로부터의 창조설이 가지는 의의 및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무로부터의 창조설은 하나님께 절대 의존성과 우연성을 잘 드러내 준다. 우연성이란 피조물이 존재할 수도 있고 또한 존재를 상실할 수도 있음을 뜻한다. 우연성은 따라서 하나님께 절대 의존성을 이미 전재하고 있다. 그래야만 행복을 누릴 수 있고 시간의 변화를 초월할 수 있다:
"하나님에게 항상 의존해 있음으로써 행복을 누리고 있는 그곳은 시간의 변화와 연장을 초월해 있는 것이다"(12권 15장 22절).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보존해 주시는 능력 없이 자신이 존재의 근원이 될 수 없고 또한 존재의 능력을 가질 수도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무로부터의 창조설이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를 그리고 시간과 영원과의 관계를 기독교의 관점에서 이해하려 할 때,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무로부터의 창조론이 피조물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당신 아래 있는 모든 것을 내가 보니 그들은 아주 있는 것도 아니오, 아주 없는 것도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당신께로부터 왔으니 있는 것이요, 당신처럼 있는 것이 아니니 아주 있는 것도 아닙니다. 참으로 있는 존재는 항상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고로 당신께 의지하고 사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11권 11장 17절).


둘째, 무로부터의 창조설은 모든 피조물이 무로부터 창조되었으니 무로 돌아가는 가변성(mutability)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가변성은 시간의 존재론적 근거가 된다. 반면에 창조주는 완전한 존재이시고 영원불변하시며 항상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어떤 형상이나 운동의 변화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시며, 당신의 뜻은 시간의 경과에 의해 변하지 않는다"(12권 11장 11절). 모든 피조물은 무로부터 지음 받았기에 항상 무에로 되돌아갈 가변성 아래 있다. "모든 것은 정해진 운동과 형상이 변화로 인하여 시간의 무상성의 지배를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12권 12장 15절). 형체가 없는 질료는 무엇으로 형상화될 수 있는 가능성(capax)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무엇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바로 가변성의 조건이 된다. 다시 말하면 무형의 질료가 모든 변화의 주체가 되고 가변성의 원리가 된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무형의 질료와 가변성을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사물의 자체들을 보고 그들의 가변성을 깊이 음미해 보았습니다. 그들은 가변성에 의하여 과거에 있었던 그들의 모습이 없어지고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모습을 갖게됩니다. 이처럼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화하는 것은 본래의 무가 아닌 어떤 무형의 질료와 관계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12권 6장 6절).


셋째, 무로부터의 창조설은 창조의 목적을 종말론적 목적(telos)을 향해 가는 역사적 시간을 통해 설명한다. 존재의 형성 과정이나 역사의 운동과정이 우연이거나 맹목적이거나 순환적 반복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즉 안식에 이르는 목적을 지향한다. 창조 때 시작된 시간은 유한한 것으로서 종말론적인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역사적인 시간이다. 역사의 시간은 전자 시계처럼 자동으로 진행하는가? 아니면 섭리 속에서 시간이 진행되는가? 섭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로 성취되어 가는 목적인가? 개별적 역사 사건 속에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일어나지 않는가? 하나님의 섭리가 개별적인 역사 사건 속에 일어남으로서 그 의미를 갖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영원하고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창조주의 본체는 시간에 의해서 변하지도 않고 또한 그의 뜻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는 한 때는 이것을 다른 때는 저것을 뜻하시지 않으시고 뜻하신 것은 모두 한 번에 동시적으로 항상 의도하신다. 그는 자기의 뜻하는 것을 또다시 반복하시지 않으시고 지금은 이것을 뜻하셨다가 나중에 저것을 뜻하시지 않으신다. 또한 그는 이전에 뜻하시지 않으신 것을 후에 뜻하시지 않고 이전에 뜻하신 것을 후에 바꾸시지 않으신다. 그렇게 변하는 뜻은 영원한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영원하시다"(12권 15장 18절).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영원 속에서도 내용적으로 동일하게 있고 확정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지금(Schon Jetzt)과 아직 아님(Noch Nicht)의 긴장을 교회와 천년왕국 사이의 긴장으로 나눠 두 왕국을 통일시킨다. 즉 교회의 평화와 구원의 시간이 악과의 투쟁을 통해 천년 왕국이 종말론적으로 실현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다스린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영원한 나라와는 어떻게 다른가? "마귀가 결박되어 있는 동안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왕 노릇 한다. 이 천년은 곧 그리스도가 처음 오신 기간이다. 교회는 --- 현재 있는 교회와 미래의 교회[로 나누인다]. 그러므로 현재 있는 대로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하늘나라이다." 영원한 나라라 할 때, 그 말은 계속을 뜻하기 보다 끝이 없으리라는 의미의 '그의 나라가 무궁하리라'(누가복음 1장 33절)를 뜻한다.

3.5 창조의 시기
창조의 시기에 대한 질문은 다음의 몇 가지로 주어진다. 첫째, 마니교도들은 언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는가? 라고 묻는다. 이 질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과 더불어 이루어진 창조'(creatio cum tempore) 개념으로 대답한다:
"우주는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시간과 동시에 만드셨다(non est mundus factus in tempore, sed cum tempore). 시간 속에서 만드신 것은 어떤 시간의 이후와 이전에 만드는 것이다. 지나간 시간 후이며, 앞으로 올 시간 전이다. 그러나 그 때에는 과거가 있을 수 없었다. 그 때에는 피조물이 없었고, 그 운동으로 시간의 길이를 측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변적 운동(mutabilis motus)의 창조도 우주 창조에 포함되었다면 우주는 시간과 동시에 창조되었다."


둘째, 하나님은 세계를 시간 밖에서 창조하셨는가 아니면 시간 안에서 창조하셨는가? 시간의 시작은 시간에 속하는가 아니면 영원에 속하는가? 만일 그것이 시간에 속한다면 시간 이전에 시간이 있었을 것이며, 만일 그것이 영원에 속한다면 시간 자체가 영원할 것이다.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에는 어떤 물체도 없었다. 만약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에도 어떤 물체가 있었다면, 그것은 시간 안에서 창조가 되어버린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이 세상과 함께 창조되었기 때문에, 창조 이전의 시간이란 없다고 대답한다. 활동과 변화는 시간이 가지는 속성이기 때문에, 활동과 변화가 없는 창조하기 전의 시간에 대해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영원 속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 그러므로 만일 창조가 일어나지 않았고 변화될 수 있는 존재가 창조로부터 나오지 않았다면 시간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주 창조와 시간은 기원이 같으며, 어느 한 쪽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운동과 변천이 없으면 시간이 없는 것이며, 영원에는 변천이 없다는 것이 시간과 영원의 올바른 차이점이라면, 어떤 피조물이 생겨서 운동함으로써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으면 시간도 없었으리라는 것을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운동과 변천의 여러 부분은 동시에 있을 수 없고 서로 잇따르며 따라서 그 계속되는 부분 사이의 길거나 짧은 기간이 시간의 기초가 된다. 하나님의 영원성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으며, 하나님이 시간의 창조자와 제정자이시다."
셋째,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우주 창조 이전의 무한히 긴 시간에 무슨 까닭에 하나님은 일을 하시지 않았는가?" 마니교도들의 이러한 질문에 하나님이 태초에 세상을 시간 안에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창조 이전에는 시간의 흐름이 없었고 다만 영원만이 있다는 말로 대답한다.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에는 하나의 형상에서 다른 형상에로 변화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었기에 시간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창조 이전에 '이전'이라든가 '이후'라는 말을 적용할 수 없다:


"만일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에 시간이 없었다면 '당신은 그 때에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하고 질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없을 때엔 그 때(tunc)도 없기 때문입니다"(11권 13장 15절).
넷째, 왜 하나님은 좀더 일찍 창조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은 그 때까지 창조하시지 않았던 천지를 무슨 까닭에 그 때에 창조하기로 결정하셨는가?" 이런 질문을 하는 에피쿠로스파와 마니교도들은 우주는 영원하며 시초가 없으며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그 때 창조하시고 좀더 빨리 창조하시지 않으셨느냐? 라는 질문은 창조 이전에도 시간이 있었음을 전제한 질문이다. 이런 질문 외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에는 아무 것도 하시지 않고 계셨다가 왜 갑자기 무엇을 만들려고 생각을 하셨을까?' 라고 또 물으면, 그 질문은 하나님의 세계 창조가 시간 안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질문이다.

4. 시간과 영원의 관계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이 영원을 무 시간성으로 정의하는 것과 세상은 영원하고 무한하다는 견해를 반박하고 하나님만이 영원한 존재라는 사상을 중시했다. 그는『고백록』11권에서 플라톤이 정의하고 있는 영원의 상으로서의 시간을 반복하고 있지 않다. 그에게 시간은 영원과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는 차원에서만 관심의 대상이다. 따라서 연대기적 보고가 끝나는 그 곳에서 시간에 대한 해명이 가능하다. 영원과 시간의 관계를 하나님의 불변성과 피조물의 가변성 사이의 질적인 차이로 규정했다. 모든 피조물은 무로부터의 창조되었기 때문에 가변적인 존재이지만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은 불변하시고 영원하시다:


"하나님의 존재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그의 존재에 비하면 피조물의 존재는 비 존재와 같습니다. 그러나 피조물이 하나님의 존재에는 비교되지 않지만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그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비하여 피조물이 비 존재와 같다함은 참 존재는 불변하신 하나님만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 개념을 영원과의 관계에서 규정하는가? 그것은 그가 영원 개념을 인간의 존재 양식인 시간의 존재론적 결함을 극복하기 위한 매개 개념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시간의 문제가 시간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창조된 시간 자체가 악하다거나 타락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타락할 수 있는 시간은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떠나 불완전하고 변화 무쌍한 피조물 세계로 향함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시간으로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한 시간의 특징들이 바로 연장이고, 흩어짐(dissiliatio)이며 분산(multiplicatio), 곧 무상성이다. 시간의 분산 속에서 시간을 통일하는 일이 중요한데, 그것은 시간을 양적으로 연장하여 더 긴 시간을 만듦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영원과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10권 11장 18절). 영원에로 향하는 마음의 지향(intentio)에 의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흩어지고 분열되는 인간 마음의 연장과 흩어짐이 극복된다:


"나는 이제 흩어진 마음으로가 아니라 마음을 지향하여 하늘의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해 따라 갑니다."
시간을 영원과의 관계에서 규정하고, 통일되지 않은 시간을 통일시키며 그리고 영원과 시간을 함께 생각함은 영원한 현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적 말씀에 있다는 사상이 그의 출발점이다. 하나님의 영원성은 시간의 양적인 연장이 아니라, 모든 시간을 초월하면서 항상 머물러 있는(semper stans) 영원한 현재(nunc stans)를 뜻하는 그 탁월성(eminence)을 특징으로 가진다. 반면에 시간은 지나가고 변하는 것으로 항상 머물러 있지 않음(numquam stans)이다.


시간과 영원의 관계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시간과 영원은 질적인 차이를 가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원과 시간의 질적인 차이를 '영원한 현재' 개념으로 설명한다. 영원한 현재는 시간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의 근원이다. 그것은 시간의 창조를 가능하게 했으며 시간 속에 흐르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시간이다.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이다. 영원은 결코 무 시간성이 아니며 오히려 시간의 초월이라 해야 옳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시간을 인간의 시간과 비교하여 설명한다. 그 점에서 영원은 시간과 질적으로 다르며 또한 다른 점은 시간의 길이인 연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본성인 절대 불변성, 곧 영원성에 있다:


"그러나 당신은 항상 동일하신 분이시며 당신의 햇수는 끝이 없습니다. 당신의 햇수는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햇수는 그 질서를 따라 모두 지나가고 맙니다. 당신의 햇수는 항상 머물러 있음으로 모두 동시적으로 존재합니다. --- 당신의 햇수는 하루와 같고 당신의 그 하루의 날은 다른 날로 이어지지 않고 항상 오늘로 남아 있습니다. 당신의 오늘은 내일로 되지 않고 또한 어제를 뒤따르지도 않습니다. 당신의 오늘은 영원입니다(hodiernus tuus aeternitas)"(11권 13장 15절).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햇수"(anni) 또는 "오늘"(hodiernus) 등의 개념은 시간의 연장 또는 무한한 시간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초 시간성을 뜻하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나타내는 말이다(11권 13장 16절).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시간성을 부정하는 초 시간성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시간성을 플라톤처럼 이데아의 형상으로서나마 영원 속에 내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또는 '오래 전부터 항상 존재해 왔었다'라는 식으로 시간의 무한성으로 표현할 것인가? 영원은 결코 무한이나 시간의 연속이 아닐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 앞에선 모든 시간과 모든 존재가 다 현존하게 되기 때문에 그리고 시간은 항상 지나가는 것이지만 영원은 항상 머물러 있는 현재(nunc stans)이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영원성을 절대 불변성으로 특징화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성을 뜻하는 영원한 현재는 모든 시간보다 앞선다는 의미의 전 시간성이고 모든 시간보다 탁월하다는 의미의 초 시간성이며 모든 미래의 시간 이후에도 있다는 의미의 후 시간성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성을 영원의 탁월성으로 설명한다:


"당신은 항상 현재이신 영원의 탁월성으로 모든 과거의 시간 전에도 계시고 모든 미래의 시간 후에도 계시는 것입니다. --- 당신은 모든 시간을 창조하셨고, 모든 시간을 앞서 계시니, 시간이 없었을 그때에 어떤 시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11권 13장 16절).


둘째, 하나님의 영원성과 사람의 시간성은 불변성과 가변성으로 특징화된다. 영원은 동시적이며 항상 머물러 있는 현재(nunc stans)지만, 시간은 항상 지나가고 동시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새로운 사물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사실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동시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것이 아닌가? "시간은 변하면서 흐르기 때문에, 불변하는 영원과 동등하게 영원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 자체에 있어서 변하지 않으시고(incommutabilitas), 모든 면에서 동일하시며(idipsum), 지나가는 시간에 예속되지 않는 영원(aeternitas)한 존재이시다. 반면에 시간 속에 존재하는 피조물은 늘 변하는 가변성과 죽는 유한성을 그 속성으로 가진다. 피조물은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창조함을 받았기 때문에 존재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존재와 비 존재(esse et non esse)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시간성의 기초가 되고 있는 것이다.

 

" 시간이란 피조물의 존재 양식을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서 없었던 것이 있게 되고 있었던 것이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그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고 말할 수가 없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면, 그는 시간의 어느 때에 존재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그는 불변한 존재, 동일한 존재, 영원한 존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동시에 존재하고 있음으로 그에게만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영원성, 불멸성, 불변성을 적용해 말할 수가 있다.

5. 시간의 측정
물체의 운동을 재는 시간에 대한 문제는 시간이 물체의 운동이 아니기 때문에, 물체의 운동과 그 운동의 기간을 재는 것과 아주 다르다고 해야 한다. 물론 시간이 운동이라면 운동은 시간 자체의 척도가 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시간은 물체의 운동이 아니다." 해와 달과 별의 운동이 시간이 아니다. 시간의 장단을 잴 때 물체가 운동하는 시간을 어떻게 잴 수 있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詩句를 예로 든다.

 

시음절의 길이가 종이 위에서 문제이라면 우리가 측정하게 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겠다. 만일 목소리에 의해서 발음된 시구를 문제 삼는다면 시간과 길이의 불일치는 다른 형태 하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짧은 구절이라도 장단을 길게 뽑아서 부르면 오히려 긴 구절을 빠르게 부르는 것보다 더 오래일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11권 26장 33절). '언제 시간이 측정되는가?'라는 측정의 시간에 대한 질문도 피아노 소리를 들을 때를 예로 든다. 피아노 소리를 들을 때, 피아노가 소리나는 동안 그 소리를 듣고 있다.

 

이 지속은 의식에 현존하는 재 기억이 아니고 그렇다고 새로운 것도 아니고 강한 인상을 포함하는 유지이다. 마음은 시간 체험 속에 현상학적으로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 측정의 난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그는 마음에서 시간을 재므로 그 난제를 해결한다. 그는 시간을 "마음의 연장"(distentio animi)(11권 26장 33절)이라 정의한다. 마음의 연장은 곧 시간의 연장(distentio temporis)을 뜻한다. 이 때 연장이란 의식의 시간적 팽창이고 의식이 시간 속에서 "산산이 분열"(11권 29장 39절)되어 있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고 마음의 연장이 시간의 근원이나 시간 그 자체를 이루고 있음을 결코 뜻하지 않는다. 마음의 연장은 결코 자연적인 것도 아니고 단순히 철학적 의식 영역에 해당하는 것도 아닌 신적인 빛의 입자와 같은 것이다.

 

또한 시간의 원인이나 근원 혹은 시간 그 자체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의 본질(natura temporis)을 이해할 수 있는 장소는 인간의 마음(homo interior)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다. '마음에서 시간을 잰다'는 말은 마음에서(in animo) 기대(expectat)하고 직관(attendit)하고 기억(meminit)하는 마음의 시간 속의 긴장과 팽창으로 시간의 양식들을 인식한다는 말이다. 긴장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좇아가는"(빌 3, 12-14)이다:
"과거를 잊고, 미래의 덧없는 일들이 아니라 앞에 놓여 있는 일들을 향해, 그리고 나를 팽창(distentus)시키는 것이 아니라 긴장(extentus)시키는 일로 향함으로써 --- 저 높은 곳에서 나를 부르는 영광의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11권 29장 39절).


과거의 일은 이미 지나가 현재에 있지 않으나 우리 마음에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현재라는 시간은 순간적으로 지나가기 때문에 아무 연장도 없지만 마음의 직관은 지속이 되고 그것을 통해 있을 것(미래)은 없어질 것(과거)으로 진행하여 나간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길고 과거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길다. 현재의 연장은 없으나 마음의 직관은 지속한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영혼 속에서 마음의 눈으로 지나간 일을 지금 눈앞에 그려보는 행위이며, 기대는 이런 마음의 눈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앞서 생각하며 그것을 지금 눈앞에 그려보는 행위이다.

6.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에 대한 평가
칼 뢰비트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역사철학을 수립한 최초의 사상가"라고 추겨 세운다. 그러나 그의 시간 이론을 철학적으로 평가할 때 풀기 어려운 면들도 있다.


첫째, 시간에 대한 측량의 문제이다. 그의 시간 탐구가 창조의 시간을 해명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지만, 분명 일상적인 시간 의식도 분석하고 있는데서 어려움이 생긴다. 주관적 시간이 인격적 시간과 같은 것인가? 주관적 시간과 자연의 시간이 어떻게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가? 그는 일상적 시간과 자연적 시간을 나눠 해석하면서 과거는 더 이상 없고, 미래는 아직 없고, 현재는 팽창하지 않는데 어떻게 시간을 측량할 수 있을까 어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실재로 '마음속에서만 존재하는 연장이 시간이다'는 마음의 연장을 시간의 연장으로 일치시켰고, 마음속에서만 측량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시간을 측량하는 것을 자신의 고유한 주제라 생각하는 자연과학은 시간을 주관적으로 마음에서 측량하는 것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은 자연과학의 시간론과의 대화의 단절을 가져오고 말았다. 그러면 과연 성서의 시간은 심리적인 차원에만 멈추고 자연과학적인 차원을 말하지 않는가? 둘째, 시간의 방향성에 대한 논의 때도 어려움이 있다. 바르트는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하고 있는 존재자의 흐름으로" 시간의 흐름을 설명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이 미래에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흐르는 것이라 한다:


"그것은[시간은] 미래에서 와서 현재를 통하여 과거로 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시간이란 아직 있지 않은 것에서, 연장이 없는 것을 통하여 이미 있지 않은 것으로 흘러 지나가는 것입니다"(11권 21장 28절).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의 흐름에 대해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모든 미래가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흐른다면 '과거'가 시간들의 존재론적 우위를 가지지 않는가?-- 미래로부터 과거로 향하는 시간의 흐름의 돌이킬 수 없는 성격은 사실상 모든 것을 과거로 만든다. 이리하여 '과거적인 과거', '현재적인 과거', '미래적인 과거'가 있을 뿐이다. 시간들 중에 영원에 가장 가까운 시간이 있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그것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이다. 과거는 모든 사물의 끝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에 대한 피조물의 시간의 근본적 차이는 아우구스티누스로 하여금 시간을 과거와 동일시하게 하고 피조물의 시간을 죽음의 시간으로 규정하게 한다."
하나님은 세계를 허무와 죽음을 향하여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영광과 세계의 영원한 삶을 향하여 창조하였다. 몰트만의 지적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의 이 차원을 분명 중시하지 않았다."
슈미트(Schmidt)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이 결코 미래를 중시하지 않았음을 제시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고백록』11권은 미래를 시간성의 본질로 설명하지 않는다. 미래가 어떤 큰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 다음에 따라 나오는 것이다. 미래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음의 연장(distentio animi)의 의미에서 시간의 본질을 미래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원을 미래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영원을 통해 미래를 제거했다.

7. 나오는 말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탐구는 인간 인식의 시간 조건과 인간 본질의 시간성에 대해 논의했다. 인간의 사유는 늘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 진리는 영원한 것이지만, 진리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시간과 결합되어 있다. 우리의 사고는 정신적인 내용들이 시간 조건하에서만 다다를 수 있는 한에서 간접적이다. 그리스도는 시간에서 자유롭게 하기 위해 우리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영원하게 되도록 시간 속에 오셨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심은 그가 우리를 영원하게 만듦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의 존재(존재론)를 세계 창조와 관련하여 설명했고, 주관적인 마음(심리주의)에서 파악했으며, 영원과의 관련해서 인간의 가변성을 실존론적으로 규정했다. 그가 시간 문제를 중시한 것은 인간의 영적 신앙 생활과 그 의미성을 찾기 위한 종교적인 관심 때문이었다. 시간 문제를 통해 인간과 하나님 그리고 시간과 영원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했다. 이런 관계를 설명함으로써 창조주를 떠난 피조물인 인간의 존재는 늘 불안하고 소멸하므로 영원하신 하나님께 의지하며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영원을 떠나서 시간을 논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의 시간에 대해 말하고자 하면서도 일상적인 우리의 시간 경험에 기초해 그것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 잘 논고해 주었다. 시간의 본질은 창조의 시간을 통해서만 설명되며, 시간의 본질에 대한 논의는 영원하신 말씀이신 하나님만이 시간의 근원이고 시간의 창조자이시라는 결론을 내리게 만든다. 시간의 의미는 시간이 창조자에 의해 피조된 것으로 가변성과 무상성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지속시키고 끝을 향하는 데서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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