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 교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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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앙 연구가들/어거스틴

2009. 1. 19.

 

 

어거스틴의 교회론                    

                                                      - 도나투스트파와의 논쟁을 중심으로 -


                                                                             이 찬    

Ⅰ. 서  론

 

A.논문의  의의와 목적

우리가 살고있는  20세기를  에큐메니칼시대라고 한다.   이는  교회의 일치 운동이 20세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며 의미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펙커( J.I. Packer ) 는 말하기를 오늘날 신학적 관심이  가장 집중된 분야 가운데 하나가  교회론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앞으로 다루어야할 교회론에 대하여 그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지 않더라도 그 의의는 결코 퇴색될 수 없다.  특히  일치운동을 주장했던  그의 교회론은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귀중한 교훈을 준다.
이 논문은 신학적으로 교회론을 최초로 종합적인 정리를한 어거스틴의  교회론을 연구함으로써 초기 기독교의 교회론에 관하여 이해하여  참다운 교회론을 정립하고자하며, 또한 어거스틴과 도나투스트파와의 논쟁의 과정과  결과를 연구함으로  오늘의 교회 일치운동의 하나의 모델로 삼아 교회 연합운동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B.논문의 범위 및 전개방법.

어거스틴은 75세의 삶을 살면서 유년기와 초기 청년기를 제외하고는 끊임없는 저작  활동을 계속하여 232권의 책으로 구성된 92개의 단행본 이외에도 교리문제와 여러가지 쟁점등에 관하여 그리스도교 변호의 내용이 담긴 220개의 서신을 포함한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그러므로 당시 어거스틴과 서신을 왕래한 사람중의 하나인 밀레비스(Milevis)는 어거스틴을 가리켜 " 분방한 꿀벌"이라고까지 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방대한 저술들은 신학이 정립되지 못한 시대의 격변기 속에서 교회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의 답변이었다.
이처럼 어거스틴의 신학은 방대하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는 도나투스트파와의 논쟁의 와중에 정립된 그의 교회론에 그 범위를 제한하고자 한다.
본 논문은 어거스틴의 교회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먼저 서론 부분에서는 본 논문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며, 본론에서는 어거스틴의 신학의 중요성 과 어거스틴의 생애, 어거스틴 시대의 역사적 배경, 로마제국과 기독교의 박해, 도나티즘, 그리고, 어거스틴의 교회론과 어거스틴의 교회론을 비판하고자 한다. 또한 결론 부분에서는 지금까지의 전체 내용을 요약하고, 어거스틴의 교회론을 통한 교회일치운동에 있어서 나아가야 할 길을 제언 하고자 한다.


Ⅱ. 본 론

 

  A.어거스틴 신학의 중요성

 

암브로시우스,제롬,어거스틴은 다 카톨릭 교회가 로마제국에 승리를 거둔후에 야만인들이 침입할때까지 짧은 기간에 활동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죽은후에 이탈리아,스페인,아프리카의 주인공들은 야만인들과 아리우스파의 이단들과  도나투스트파의 사람들이었다. 아무튼 이들의 권위는 암흑 시대와 중세 시대를 통하여 언제나 존중되어왔다. 이들의 공적은 누구보다도 교회에 대하여 고정된 체제를 부여한 것이었다.   대체적으로 암브로시우스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확립하였고, 제롬은 서방교회에 라틴어 성경과 수도원 생활의 기초를 닦아 놓았으며, 어거스틴은 종교개혁이 일어날때까지의 교회의 신학을 체계화하였다.


최초로 서방의 신학에 명확한 방향과 독특한 특징을 부여한 것은 터툴리안과 시프리안이었으며, 또한 서구(로마)신학의 독특한 성격은 어거스틴의 저작의 영향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형성되었다. 오리겐이 동바의 신학에 큰 영향을 미친것처럼 어거스틴은 서방의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 영향은 전자의 것보다 휠씬 더 위대한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실로 서구 신학의 아버지였다.


이처럼 어거스틴이 영적으로나 혹은 지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것은 로마 카톨릭, 개혁교회,성공회등 거의 모든 서구 기독교 주류들이 그의 뒤를 잇는다고 자처하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또한 한철하 교수는 그의 책  [ 고대 기독교 사상 ] 에서  " 나느 고대와 중세와 현대를 통하여 어거스틴의 사상에서 발견되지 않는 어떤 중요한 사상이 있는지 모른다.  카톨릭 주의가 그 속에있고,서양의 개인주의(데카르트의 자아의식)가 그 속에있고,오늘의 실존 주의가 그 속에있다.헤겔에서 부활된 역사 철학이 그 속에 있고, 현대에 있어서도 언제나 참고하여야 할 사회 이론이 그 속에 있고, 바르트의 시간론이 그 속에 있고, 오늘의 도이벨 철학의 수론이 그 속에 있다. "고  거스틴의 신학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신학은 그의 생애에 있었던 3대 논쟁의 와중에 형성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보너 ( G. Bonner )는 다음ㄴ과 같이 말하고 있다.  " 크게 말해서  어거스틴이 기독교 저술가로서 활동한 시기는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번째는, 마니교를 공격하고 논박하는데 관심을 기울였으며, 두번째 시기는,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을 하였으며, 세번째 시기는 펠라기우스 주의자들과의 논쟁을 통하여 그의 신학이 형성되었다. "  이러한 모든 것을 종합하여 볼때  어거스틴의 신학적인 특징을 알 수 있다. 즉 그의 신학은 명상만으로된 이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의 신학이 아니라 체험적이고도 고백적인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그리스도교가 체험적이며 고백적인 종교라는 점에서 어거스틴의 신학과 일매 상통하며 이 점은 그의 신학의 중요성을 더욱 높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중요성은 또한 비단 교리사에서 뿐아니라  일반 문화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가 저술한 작품들은 신학 이외에 철학,문학, 교회정치, 그리고 법률 분야에 이르기까지 두루 영향을 미쳤다.

 

B.어거스틴의 생애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 Aurelius  Augustine  A.D 354 - 430 )은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 Numidia )의 타가스테( Tagaste )에서 태어났다.  그것은 제롬보다 9년후의 일이었으며, 암브로시우스보다 14년 후의 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파트리키우스( Patricius )는 타가스테에 사는 가난한 한 시민으로 본래 성격이 대단히 친절하지만 성질이 불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르는 난폭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년에 가서야 믿었는데 그전에 아내의 신앙 생활에 대하여 반대하거나 방해하지 않았던 종교에 대하여 관대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는 어거스틴의 나이 17세때에 세상을 떠났는데 말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주님을 영접한 후에는 과거의 불경건� 생활을 끊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떠났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 Monica )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독교사에 있어서 칭찬받는 어머니중의 하나이다.  그녀는 경건하고, 고상하며, 성실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자식에 대한 신앙의 열의가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거스틴의 그의 책 고백록에서 모니카는 자식에게 존경을 받으며, 남편에게는 주를 섬기듯이 섬기는 착한 아내였고, 행동으로 참 그리스도인의 표상을 드러내었기에 남편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흠모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파트리키우스의 성격을 잘아는 이웃 여인들은 모니카가 맞았거나, 가정의 싸움이 하루를 넘기는 일이 없음을 보고 경의를 금치 못하였다.   모니카는 시어머니에 대해서도 인내와 온유함을 가지고 섬겼기 때문에 서로 사이가 좋은 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모니카의 가장 큰 은사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거나 불화할때 힘이 미치는 한 화평케하는 평화의 사람이었다. 이런  모니카의  삶의 가장 큰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어거스틴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아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이 일에 있어서 모니카는  남편을 이기었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부모 밑에서 2남 1녀 중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어거스틴은 유아기의 시절은 다른 아이들을 관찰함으로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 당신의 종 내가 어디서나 언제나 죄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까 ?  "  즉 어거스틴은 자신의 유아기 역시 죄인이었음을 고백한다.
어거스틴의 소년시절은 경건한 어머니의 신앙의 영향을 받은 시기였다. 그는 또한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이해력이 허락하는 한도내에서 하나님을 배워 알았다고 고백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소년이었지만 자신이 학교에서 매를 맞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드린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던 사건이 자신에게는 매우 심한 마음의 고통이 되었다고 고배하고 있다.  그는 소년 시절에 학교에서 매를 맞는 것을 두려워 하였지만 주어진 과제를 항상 태만히한 학생이었다.  어거스틴은 학습에 있어서 희랍어는 매우 싫어하였지만  라틴어는 좋아하여 학교에서 초등 교사들이 가르치는것 이외에 이름있는 문법 학자들이  가리치는 것을 좋아할 정도로 잘하였으며, 그의 웅변술 역시 뛰어났다. 

 

 어거스틴은 소년시절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세례를 갈망하였는데  그의 배아픈 병이 일찍 나았음으로 그의 세례는 훗날로 연기되었다.  이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세례가 연기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였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만일 더 오래살면 더 더럽혀질 것이 불가피하며, 또 세례받은 후의 죄짓는 것은 더 크고 위험하기에 하나님의 섭리로 연기되었다고 고백한다.  소년 시절의 어거스틴은 자신이 싫을 정도로 거짓말을 잘하였고, 가정의 것을 좀도적질하는 소년이기도 하였다.  어거스틴의 좀도적질의 이유는 무엇이 먹고 싶어했기 때문일때도 있었지만 다른 아이에게 무엇을 주어서 놀이에서 이길려고 그러하였다.  이러것을 보면 어거스틴은 어릴적부터 강한 승부욕이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어거스틴의 청년기는 그의 말대로 3가지의 특징을 지니 시기였다.  첫째로, 세상적인것에 만족하려는 욕망으로 불타 있었고 ,  둘째로, 여러가지 허망한 사랑을 추구하였으며,  세째로, 다른 사람의 눈에 잘 보이려고 애쓰는 소년이었다.  그는 소년기에 친구들로부터 찬사를 받기 위해  그들보다 더 못된 짓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때에  배도적질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배가 고프거나 궁핍해서가 아니라 착한 일을 무시하고 싶은 마음과, 죄를 짓고자하는 강한 충동에서, 그리고 나쁜짓 그 자체를 사랑해서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카르타고 유학 시절에는 육적인 사랑을 즐기는 자가 되어 "나는 사랑을 받을 뿐 아니라 쾌락의 극치를 경험하기까지 하였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또한 이때 연극을 매우 좋아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욕정의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이었기 때문이며, 또한 슬퍼하기를 좋아하여 자신을 슬프게 해주는 것들을 찾아 헤매었기 때문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 때 그는 수사학 학교에서 수석을 차지하는 학생이었다.  그리고 "뒤엎는 자들"과는 거리를 두고 지냈었다.  또한 19세 때 학교의 공부를 밟아가는 과정속에서 키케로(Marcus T.Cicero)로가 쓴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를 읽고 불멸의 지혜를 추구하는 자가 되었다.


이 시절에 어거스틴은 마니교에 빠져들게 되었는데 그의 표현을 빌면 그들은 미친듯이 교만한 자들이었고, 육적인 것을 너무 따랐던 자들이며, 말을 너무 많이 하는 자들이었다.
또한 카르타고에서 10년 이상 동안 동거 생활을 하게되는 한 여인을 만나 살게된다.  통설에 따르면 그녀는 "컹크베인"이었는데 이는 "첩"이라는 뜻이었다.  그대 어거스틴이 결혼하여 따로둔 첩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분이 낮은 여인이었기에 사회적으로 요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아데오다투스(Adeodatus) 역시 사생아가 되었다.


이때에 어거스틴은 점성술에 매혹을 느껴 그들과 의논하기를 즐겨하였다.  그때 그는 그 지방의 총독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는데 그는 대단히 현명한 사람으로 전에 자신의 생계를 위하여 점성술을 철저히 공부하였지만 속이는 것이었기에 그것을 버렸다고 이야기하면서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그 책을 버리라고 권하였다.
어거스틴은 375년 고향으로 돌아가 수사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그때 함께 자란 사람과 아주 친하게 지냈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어거스틴의 이야기를 통하여, 허구한 이야기나 미신에 빠져들게 되었다가, 심한 열병으로 오랫동안 죽은듯이 땀을 흘리며 누워있었는데 그가 의식을 잃고 있는중에 세례를 받았다.  그 친구가 회복된 후 이에 대하여 어거스틴이 농담을 하자 그 친구는 정색하고 자신의 친구가 되려거든 그와같은 농담은 하지 말라고 하였고 며칠후 재발하여 세상을 떠났다.  친구의 죽음은 어거스틴에게 커다란 슬픔을 주었고 그로인하여 슬픔을 잊고자 타가스테의 마을 떠나 카르타고에 갔다.


그는 카르타고에서 처음으로 책을 썼는데 그것은 "아름다움과 적절함(Pulchro et apto)이었다.  이 책을 로마시의 웅변가인 히에리우스에게 바쳤는데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심히 찬양하였기 때문이며, 자신의 연구열이 저 유명한 웅변가에게 알려지기를 원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책은 어거스틴 당시에도 잃어버려 없었다.


어거스틴은 20세때에 모든 학예에 통달한, 학문에 특히 재능을 가진 청년이었다.  당시에 학예는 문법, 논리학, 수사학, 산수, 기하학, 음악, 천문학이었는데 어거스틴은 이러한 책들을 모조리 다 읽고 누구의 도움없이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그의 학문의 재능은 대단히 빨라 문제에 얽힌 책들을 어느 스승의 도움없이 풀었다.
그의 나이 29세때에 마니교의 유명한 감독 파우스투스가 카르다고에 왔었기 때문에 일식과 월식의 날과 시간과 그 범위에 대하여 마니교가 다른 이유등에 관하여 물어보았으나 실망만 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만나서 이야기해보니 말쏨씨가 구수하여 퍽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의 내용에 있어서는 다른 마니교들이 말한 것과 별다름이 없었고 다만 그들보다 말은 더 잘하고 재미있게 한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383년 카르타고를 떠나 로마로 갔다.  그가 로마에 간 이유는 친구의 좋은 보수와 높은 자리의 약속때문이 아니라, 카르타고 학생들보다 그곳 학생들이 더 조용히 공부하고 엄격한 규율 밑에서 통제되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때에도 아직 마니교를 못떠났는데 그러나 마니교에 대하여 옹호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도 노골적으로 설득하여 믿지 말라고 하였다(특히 로마의 하숙집 주인에게 그러하였다).  또한 이때 교회에서 진리를 찾는 희망을 버렸는데 그 이유는 신이 인간의 육체의 형상을 갖고 있고 육체의 지체의 윤곽에 제한되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성서의 여러문제점을 가지고 그책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 하거나 의견을 듣고 싶어했다.


그 후 밀라노의 도시로부터 로마 시장에서 수사학 교사하나를 선발하여 국비로 밀라노에 보내 달라는 요청이 왔는데 이때 어거스틴은 마니교 사람을 통하여  지원하여 말라노에 갔는데 그는 이때부터 영원히 마니교를 떠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암브로시우스 ( Ambrosius )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어거스틴을 친절하게 대하여 주었기 때문에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의 내용보다는 그의 설교의 형식에 관심을 두고 설교를 듣기 시작하다가 점차적으로 기독교 신앙은 합리적인 근거하에 옹호될 수 있다고 보게 되었다. 

 

 이때 밀라노에 모니카가 �아 왔는데  그녀는 그곳에서도 신앙의 열심을 내었다.  교회에 나가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들었으며, 어거스틴이 하루빨리 구원 받기위해 열심히 기도하였고, 구제에도 힘썼다. 그녀는 어거스틴의 구원을 위해서 암브로시우스를 천사같이 극진히 대접하였으며, 또한 발렌티니아누스( Valentinianus)황제의 어머니 유스티나( Justina )가 아리안파의 기독교인들의 꾀임에 빠져 암브로시우스를 박해하였는데 이때 모니카가 교회를 사수하는데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결혼의 압력에 의해서 어떤 여자와 약혼을 하게 되었다.   이  일은 모니카의 노력으로 성사 되다.  그러는 동안에 지금까지 동거하던 여인은 어거스틴의 결혼에 방해가 된다고하여 아프리카로 떠나게 되는데 그때 그녀는 다시는 다른 남자를 만나서 같이 살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맹세하고 떠나갔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결혼하기까지의 2년의 기간이 길어서 한 여자를 얻게 되는데 이 일은 어거스틴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오점이 되는 사건이 되었다.


어거스틴은 신플라톤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주로 프로티누스( Plotinus )의 작품을 많이  읽었다.   이 철학은 마니교의 물질주의와  그리고 회의주의에서 벗어나는데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또한 밀라노에서 빅토리누스( Victorinus )로부터 얻은바가 매우컸다.  빅토리누스는  신플라톤학파의 유명 인사였는데 그가 말년에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은 어거스틴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었다.  밀라노에서 그는 암브로시우스의 감화를 받은것 외에도 바울의 서신을 연구하면서 성서의 진리를 깨닫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안토니우스의 전기로 인하여 점점 더 진리의 문턱에 이르게 되었다.   

 

빅비토리누스의 이야기와 폰티키아누스를 통하여 황제를 수행하던 두명의 관리가 복음을 받아들여 관직과 결혼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통하여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아서 자기  성찰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밀라노의 하숙집 정원에서 그의 표현대로하면  " 나의 깊은 생각이 나의 영혼의 심연을 파헤치고 나의 모든 비참을 �아내어 마음의 눈앞에 쌓아놓을때 눈물의 홍수를 동반한 큰 폭풍이 내 마음에서 일어났습니다. "  라고 말하였다. 

 

어거스틴이 이같이 통회의 눈물을 흘릴때 이웃집에서 어린이의 말이 들렸는데 그것은  " 들고 읽으라, 들고 읽으라 ( Tole lege, Tole lege) " 라는  말이었다.  어거스틴은 이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여 성경을 �아 읽었는데  그 곳은 바로 로마서 13장 13 - 14절이었다. 즉 "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 였다.  그는 이 말씀을 통하여 회심을 하게되었다.    회심은 386년 늦은 여름경이었다. 

 

그는 회심후에 새로운 삶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자하여 밀라노 근방에있는 카씨시아쿰( Cassisiacum )에있는 친구의 별장에 여러 사람들과함께  들어갔다. 그는 이때 수사학 교사를 포도 수확기 방학을 이용하여 그만두었다.  어거스틴은 이곳에서  [ 회의론 반박론 ( Contra Academicos ) ]등 여러 책들을 저술하였다.  또한  어거스틴은 이곳에서  암브로시우스에게 편지를 보내어 세례받기전  준비하기 위하여 어떤 책을 읽으면 좋으냐고 물었고 암브로시우스는 어거스틴에게  이사야서를 권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이사야서가 매우 어려워 바울의 서신을 읽으면서 세례를 준비하였고 마침내 387년 사순절 초에 밀라노에 돌아와 제자이자 친구인 알피우스와 아들과  함께 암브로시우스감독으로부터 부활절 전날밤에 역사적인 세례를 받았는데  이때 어거스틴은 너무나 감격하여 울음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 일을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있다.  "세례를 받고나니 우리들의 과거 생활에 대한 괴로움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라고 고백하였다.


어거스틴은 일행과 어머니와 함께 고향에 가기위해 로마의 항구 오스티아(Ostia)에 도착하였는데 여기서 어머니를 잃는 슬픔을 당하게 된다.  이때 모니카는 56세였고, 어거스틴은 33세였다.  그때 어거스틴은 바로 아프리카로 가지 않고 1년간 로마에 머물면서 자유의지론(De libro aritrio)등 몇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388년 고향인 타가스테에 가서 재산을 팔아 구제하였고, 살던 집은 개조하여 수도원으로 만들었다. 

 

그는 391년 수도원 문제로 힙포(Hippo)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게 앞으로 끌려나와 발레리우스에게서 사제로 안수를 받는다.  그는 여러 논쟁으로 점점 유명해지자 다른 지역의 감독으로 어거스틴을 빼앗길까봐 발레리우스는 서둘러 어거스틴을 힙포의 감독으로 선출하였다.  발레리우스감독은 그후 얼마있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여러 논쟁을 통하여 교회를 변론하였고 감독의 직분에 충성스레 봉사하다가 430년 5월 반달족이 힙포를 포위하고 해안과 도로를 봉쇄하였는데 반달족이 포위한지 3개월 후 어거스틴은 열병으로 앓아눕게 되었고 다윗이 참회할 때 쓴 시편을 외우면서 참회의 눈물속에 430년 8월 28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생애를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그의 사상배경에 깔린 요소를 8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교 전통과 연결시켜준 경건한 그리스도교도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여기서 또한 폴 틸리히는 모든 교회교부들의 위대성이 그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았다.


둘째로, 키케로(Cicero)의 저서[Hortensius]를 연구함으로써 그는 내적으로 진리탐구에 대한 자극을 받았다.  어거스틴은 또한 키케로 부터 절충적, 실용적인 시점(視點)를 배워 지상의 나라와 신의 나라를 탐구하였다고 주장한다.
세째로, 어거스틴은 마니교로부터 진리란 단순히 이론적인 논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로 실천적, 실존적 관심사였으며, 진리는 구원의 진리를 의미했으며, 또한 진리란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의 싸움에서 나타난다고 하는 마니교적 사상을 배웠다.  즉 이와같은 것은 역사를 해석하는 "가능성을 부여하는" 시점을 어거스틴에게 제공하였다.
네째로, 어거스틴은 마니교를 떠나 회의주의(Skepticism)에 빠졌다.  이 회의주의는 그리스도교의 계시사상을 받아들일 준비로서, 소극적이었지만 그 전제가 되었다.  또한 회의주의는 계시의 이론을 위해 그 바탕이 되었으며,이를 통하여 새로운 인식론(New Epistemology) 도 얻게 되었다.


다섯째로, 어거스틴은 회의주의를 신플라톤주의로 극복하였다.  신플라톤주의는 어거스틴에게 새로운 확실성 곧 혼의 내부에 있는 신의 직접적 확실성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신과 세계의 관계를 해석하는데 필요한 바탕을 제공하였고, 이 철학은 어거스틴에게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심리학적 통로를 가르쳐 주었다.
여섯째로, 또한 어거스틴은 회의주의를 교회의 도움을 통하여 극복하였다.  그것은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시우스(Ambrosius)의 영향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일곱째로, 어거스틴은 수도자나 성자들이 실천하고 있었던 그리스도교적 금욕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여덟째로, 지금가지 요소에 하나가 결여되어 있는데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이다.  그러나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어거스틴에게 직접적으로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C. 어거스틴 시대의 역사적 배경

 

북아프리카의 속주의 역사는 A.D 146년 카르타고의 멸망과 더불어 설치된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에서 기인된다.   로마가 이곳을 정복한뒤 약 1세기 동안에는 속주로써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였지만 점차적으로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케사르( Caesar )와 아우구스투스( Augustus ) 시대를 거치면서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재건되었다.
북아프리카의 속주는 일반적으로 5가지로 구분되었다.  첫째로, 로마 식민지( Rome Coloniae ), 둘째로, 라틴시( Latin  Municipia ), 세째로, 옛 카르타고의 도시들 ( Punic Cititates ),  네째로 토착마을 ( Native  Villages ),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목 부족들 ( Unsettled  Tribes )로 구성되었다.    착민 집단들은 처음에는 로마 식민 도시들의 하위에 편재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제적인 부를 축적시켜 로마 식민 도시들과 동등한 수준으로 성장하였고, 토착민들은 로마의 시민권을 얻는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또한 북아프리카의 도로 사정은 서방의 어떠한 속주들보다도 발달하였는데 원래 도로의 목적은 군사적이었지만 이 도로를 통하여 도시들이 연결되었으며, 문화를 촉진 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처음 문화의 전파자는 말할 나위없이 군인이었다.


아프리카의 행정적인 구역은 기원 1 -2세기에 3개의 구역으로 구분하였다.  첫째로는, 리비아( Lybia )의 서쪽 지역을 포괄하는 트리폴리타니아( Trifolitania )였고, 둘째로는, 남튀니지아를 포함하는 하드리멘툼( Hadrimentum )으로부터 통치되는 비자세나( Byzacena )였으며, 마지막으로 , 튀니지아의 북쪽은 기존의 아프리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아프리카의 종교를 하나로 이야기할 수 는 없지만 3세기 초에 새턴( Saturn )을 숭배한것은 확실하다.  이 신은 이탈리아의 신인 " Saturnus "와는 완전히 다른것 이지만 표면상으로는 베르베르족의 바알 - 함몬 ( Ball Hammon )의 계승자로 되어있다.  이 신은 만신저의 여러 신들처럼 신전에서 숭배된 것이 아니라 노천지역에서  혹은 고원지대에서 숭배 되었다.   주민들은 그둘 자신의 신들에게 충서을 다하였다.  아프리카인들은 베르베르나 셈계의 신들인 바알(Ball)이나, 타니트( Tanit)를 갖고 있었으나 그들은 Saturn, Juno, Caelestis등으로 불리워졌다.  그러나 3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러한 기존의 신을 버리고 누미디아 사람들의 대다수가 그리스도교로 전향하였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새턴신을 버리고 그리스도교로 전향하는였는지는 밝혀지지 아니하였다.


전반적으로 로마제국의 후기에는 경제적으로는 과중한 세금의 부담이 중간 계층을 이루던 십부장의 몰락을 가져왔고, 산업은 쇠퇴하였으며, 경작지는 황폐하여 경제적인 위기 증세가 뚜렷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의 반공화적 정체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틴누스에 의해 전제 군주제로 성격이 변하고 데오도시우스 이후에는 중앙의 강력한 통치력이 와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의 격변기 속에서 그리스도교는 꾸준히 확장되어 가고 있었고, 특히 황실에서조차도 그리스도교는 파고드들어 마침내 콘스탄틴황제 때에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선포하지 않으면 않될 정도의 세력을 갖게 되었다.

 

D.로마제국과 그리스도교의 박해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예루살렘에서부터 전 세계로 확산 되었는데 그리스도교의 확장사를 살펴보면 오히려 박해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처음 얼마 동안은 로마 정부의 법적인 보호아래 유대교의 한 분파로 인식 되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과는 명백히 자신들을 구분하였고 핍박하였는데  이는 네로박해시에 뚜렷이 나타났다.


그러면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 박해의 원인은 무엇인가 살펴보자. 그 이유는 첫째로, A.D 60년대 이후로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서로 다른 별개의 종교라는 것이 알려졌고, 이에따라 법률상 불법적인 종교( Illicit Cult )로 분류 되었기 �문이었다.  즉 유대교는  속국의 종교라는 특징을 갖고 있는데 반하여 그리스도교는 어떤 특정 국가의 종교도 아니머, 그렇다고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둘째로, 반사회적 집단으로 오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즉 타키투스는  "  그들의 악덕으로 인하여 미움을받던 인간들의 집단 " 이라고 하였음을 볼때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오해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특히  A.D 64 년 이후에 그리스도교가 비밀리에 집회를 함으로 인하여  이 집회에서 식인행위를하며, 근친 상간의 행위를 한다고 오해하였다.
세째로, 황제 숭배를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은 정치와 종교가 미분화된 고대 국가의 하나로 정치가 종교를 지배하는 전형적인 전제 정치체제 였으므로 세계 대제국을 건설하였던 정치권력이 스스로를 신격화 하였다.  즉 황제는 신의 화신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이를 더욱 강조하여 마침내는 메시야로서 국가의 거룩한 아버지로 숭배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거부하였던 것이었다.  이는 반 로마적인 행위였으며, 반 국가적인 행위로 간주되었다. 또한 황제를 숭배하던 일반 시민들까지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중오심을 갖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네째로, 사상의 차이로 박해를 받았다. 즉 로마는 영원 불멸의 나라인데 그리스도인들은 말세가 가까와 있다고 전도하며, 또한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불합리한 것으로 여겨져 박해를 받았다.   여기에는 또한 로마 사회는 헬라문회권으로써 헬라사상을 존중하였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에 의하여 여러차례 박해를 받았다.   이 그리스도교의 박해를 드 생크르좌( de ste. croix )는 3시기로 구분하였다.


첫째 시기는, A.D.64년 네로에 의한 박해 이전까지로 구분한다. 이 기간의 특징은 로마정부에 의한 박해보다는 유대인들의 적개심으로 인하여 소규모의 박해가 일어났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순교자는 스데반( Stephen )과  예수의 형제 야고보( James )였다.  이때 로마 정부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무관심하게 대하였거나 공평히 대하였다.


두번째 시기는, 네로의 박해 이후 A.D 250년 데키우스( Decius )박해 이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 기간에서는 황제들이 직접으로, 혹은 간접으로 박해에 관여 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의 박해의 특징은 비조직적이고, 지역적인 박해로 끝이났다.  또한 비록 상당한 수의 희생자 수가 있었지만 단기간내에 끝났다느데 그 특징을 이루고 있다.


세번째 시기는, 데키우스 박해로부터  A.D 303년에 일어나  대 박해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 기간에는 정부의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박해가 전국적으로 해하여졌는데 그러나 대체로 박해의 기간은 짧았다.    즉 데키우스박해도 1년에 걸쳐 행하여졌으며,  발레리안누스( Valerianus )의 박해도 3년 ( A.D 257 - 259 )에 끝이 났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 Diocletianus )와 그의 측근들에 의하여 일어난 박해는 동부에서 상당히 오래 계속되었다.  그러나  서부에서는 2년 동안만 계속 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 그리스도교는 급속도로 성장과 확산이 있게된다.


이와같이 그리스도교에대한 로마 정부의 오랜 박해는 A.D 311년 4월 30일에 공포된 갈레리우스의 교서에 의하여 종식된다. 그 내용은 국가 기강에 어긋나지 않을것을 조건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관용을 베푼다는 교서였다.   후 18개월 후인  A.D 312년 10월 18일 콘스탄틴은 로마 교외에있는 밀비안다리( Milvian  Bridge )에서 자신의 적수인 막켄티우스( Maxentius )를 물리치고 그기스도교인  지배자로 출발한 것은 312년 부터이다.


콘스탄틴은 밀비안 다리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후 약 3-4개월 후인  313년 2월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 Licinius )와 화합을 가진뒤 역사적인 밀라노 칙령을 발표한다.  이 칙령의 중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  나 콘스탄티누스와 나 리키니우스 황제는 좋은 징조속에서 밀
   라노에서 회동하여 공익에 관한 문제들, 그 중에서도 특히 다
   수자들에게  혜택을 줄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논의한 끝에
   ... 그리스도인들이나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어떠한 것이든
   그들이 원하는 형태의 신앙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권한
   을 부여해 주기로 하였다.  그리고 특히 그리스도인들에 관하
   여는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만일 누군가가 그들이 항
   상  모이곤 하던 장소들을 우리의 국가 재산으로 또는 다른데
   서  매입한듯하면 그 댓가나 보상을 받지말고 지체없이 그리
   스도인들에게 반환하게 한다. ...  그대는 앞서말한 법규대로
   그리스도인 즉 그들의 공동체나 대중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갖지 말고 지체없이 이 모든 것들을 반환 하라는 명령을 내려
   라.  ...  . "


황제들에 의한 그리스도교 박해는 결과적으로는  신자들의 신앙의 열정을 더욱 뜨겁게 하였으며,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게 하였으며, 더욱 복음전파에 힘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히려 교회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으니  그것은 교회의 분렬을 초래하였다.  즉 데시안 황제의 박해때에  노바티아니즘( Novatianism )이 , 디오클에티안 황제의 박해때에는 도나티즘 ( Donatism )이 생기게 되었다.

 

E. 도나티즘.


  1.역사적 배경.

로마 제국이  3세기의 격동기로부터 벗어 났을때  국가는 도덕적 권위를 상실하고 단지 무력적인 권위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A.D 284년에  황제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일리안인으로서  군대출신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혼란의 시기에 맹목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들을 조합하여 하나의 체계를 수립하려고 함으로써 제국의 회복과 강회를 꾀하였다. 즉 황제권을 강화하고, 정부조직을 개혁하고, 군대를 쇄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국가안의 국가로서의 교회라는 고동체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는 황제권 강화라는 목적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므로  대박해는 그의 시대에 전개되었던 것이다.   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 제국을 네명의 황제들로 하여금 분활하여 다스리게 하였는데 이들중  두명은  Augustus 라는칭호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동방에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서방에서는  막시미안이 이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 부제로서  Caeser 라고 불리는  황제가 위치하였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아래에는 갈레리우스가 , 그리고 막시미나의 아래에는 클로루스가 있었다.


황제들 가운데 갈레리우스가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하여 적개심을 갖은듯 하였는데 그에 의해서 그리스도교 박해의 조짐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레토래스는  갈레리우스가 박해의 선도자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교 박해는 최초에 군대에서 시작하였다. 많은 당시의 신자들이  교회 지도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에 입대 하였느데  295년경 입대를 거부하거나 병영을 탈영하였다는 이유로 몇몇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처형되었는데 갈레리우스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이러한 태도를 제국의 반역행위로 규정하고 제국의 심각한 위험으로 간주하였다.


그리스도교의 박해는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03년의 첫 포고령( A.D303년 ) 을 통하여 그리스도교인들의  고극관리직에서 축출시켰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떠나지 아니하면 노예로 전략시키며, 모든 시민권은 박탈하고, 모든 교회는 파괴하며, 모든 성경은 불태우도록 하였다.


두번째 포고령(A.D 303년 )은, 두차례의 황궁의 화제사건과 맞물려서 포고령이 선포되었다. 이 포고령은 황궁에서의 황실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황실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엄명하는 것이었으며, 그리스도교의 모든 성직자들과 교회 직분자들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세번째 포고령(A.D 303년 )은 , 투옥된 자들을 배교하도록  행하여진 것이었다.  즉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자유의 몸이되지만 끝까지 부인하지 않으면  고통당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배교를 하게 되었다.
마지막 포고령은  A.D 304년 4월 3일 막시미안에 의해서 발표되었는데  이 칙령은 그리스도교를 박멸하고자하여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고백만으로도 다른 법정의 절차를 밟지 않더라도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박해는 제국의 전역에 퍼지게 되었고 그리스도교는 소멸되듯이 보였다.  그러나  박해자들이 하나씩 죽어가게 되었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박해를 시작한지 2년도 되지 못하여 자신의 직위를 포기하고 서민처럼 살다가 질병으로 죽어갔으며, 막시미안은 목매달아 죽었고, 갈레리우스는 311년 박해를 중지하는 칙령을 내린 후 5일만에 죽었으나   그리스도교회는  그런 어려운 박해 속에서도 오히려 성장하였다.

 

2.도나투스타의 분파 발생과정.

대박해 이후에 교회에서는 심각한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는 고백자들과 배교자들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교회 지도자중 일부는 박해 동안에 성문서를 양도하라는 명령에 복종하여 처벌이나 순교를 피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이들중 일부는 시인을 하였으나, 일부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 성문서가 아닌 다른 이단의 문서들을 넘겨주었다고 말하였다.  당시 카르타고의  감독인 멘수리우스도 후자에 속하였다.  그는 티기시스의 감독인 세쿤투스에게 보낸 서한에서  " 나느 그리스도인이요 감독이지 배교자가 아니다. " 라고 변호하면서 그가 어떻게 이단 문서들을 아눌리누스 총독의 대표들에게 넘기게 되었는가를 말하였다.


그러나 멘수리우스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 키프리안의 신학의 순교자적인 사상에 물들어있는 많은 아프리카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이때부터 교회의 분리가 시작되었다.
311년 멘수리우스가 사망하자  그 다음해에 카르타고의 부감독인 캐실리안이 감독으로 선출되어 다른 두명의 감독에 의해 감독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캐실리안이 배교자들에게 관용적인 정책을 쓴 멘수리우스의 태도에 도의를 하였었기 때문에 캐실리안의 감독직을 반대하였다.  이 그룹의 주모자는 열광주의자인 루실라부인의 후원을 받는 보트루스,와 캐레스리우스였다.


이들은 누미디아 감독들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70명이 티기시스감독인 세쿤투스의 주제하에 루실라  집에서 회합을 가져 캐실리안의 감독 안수직에 참여하였던 3명의 감독이( 페릭스,노벨루스,파스티우스)가 배교자였음을 주장하였고 그 안수직은 무효임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해서 분리자들의 교회가 생기게 되었고, 이들은 그때까지도 아프리카 교회에 남아있던 몬타너스파와 노바디안파에 의하여 많은지지를  받았다.


이렇게해서 발생한 도나투스트파는 313년부터 게속해서 도나투스가 40년간을 이끌었다.  당시 도나티즘은 아프리카지방의 많은  엄격주의자로부터 호응을 받았을뿐 아니라 라틴어나 페니키아어가 아니 리비아말을 사용하는 누미디아 지역에서 호감을 샀다.   이 지역은  로마 문화, 로마 군인들, 행정가들, 세금징수원, 그리고 로마의 지주들에 대하여 적대적이었고 카톨릭 교회를 동맹자로 삼았다.  그들은 4세기 중반부터 킬쿰세리온( Circumcellion )불리는 과격주의자들과 함께 기존의 카톨릭 교회에 반대하였다.


350년에서 355년 사이에 도나투스가 사망하자 가울 출신의 파르메니안이 카르타고의 감독직을 계승하였다.  그는 카톨릭의 입장에 반대하는 긴 책을 저술함으로서 391년 죽을때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이 기간에 도나티즘은 아프리카에서 카톨릭 교회만큼 강력해졌고, 누미디아에서는 그 세력이 더컸다.
391년 파르메니아의 후임으로 프리미아누스가 감독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내분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프리카에서 그렇게 강력하던 도나투스트파의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3.도나투스트파의 신학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시에  두 부류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박해시에도 신앙을 지킨자들을  고백자( Confessor )라고 불렀으며, 박해로 인하여 성서를 넘겨준 자들을 배반자( Traditor )라는 칭호를 붙였다.  고백자들을  지도자인 도나투스( Donatus )의 이름을 따서 도나투스트파라고 하였다.


어거스틴이 감독으로 있던 힙포의 그리스도인의 대부분이  이 파에 포섭되어 있는듯이 보였다.  이들의 주요 교리는  첫째로, 진정한 교회는 오직 하나님께 충성된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며,  둘째로, 박해시에 성서를 부인한 자들은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하며,  세째로,  교회와 국가는 분리 되어야 하며,   네째로, 의심 스러운 성격의 소유자(배교자)로부터 받은 세례와 안수는 무효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오래전의 퓨뉴마적 전통( Pneumatic  Tradition )을 영속화 시켜서 성령의 은사들을 가지고있는 성직자들만이 정당한 의미에서 성직자로 인정하였다.  시프리안의 겨우처럼 직분을 성령과 연결시켜 생각하였으며, 감독의 직분은 언제나 성령의 은사들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흠이 없는 생활과 받은 은사들에 의하여 자격이 인정된 자들에 의해서만 진정한 감독으로 인정하였다.  또한 합당치 못한 감독의 교권적 행위는 유효성을 가질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에 의해서 성직을 임명받았거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피임과 성례전은 효력이 없다고 보았다.  이와같은 이유는 그와같은 성직자들에게는 성령의 은사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가리켜  갱생신학( Theolgia Regennitorum )의 계통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성직임명의 유효성과 성례전의 유효성은 이를 시행하는 감독의 자격과 가치에 있다고 보았으며,  또한 교회의 거룩성도 인간에 의해서 구별된다고 보았다.  즉  그들은 인간의 도덕적 행위에 대한   혹은 신앙에대한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였으며, 그리스도교를 부패로부터 막으려는 열렬한 종교적 열심이 있었다.  그러나 기존 교회를 부인하고 , 분리주의로 나아간 후에 극단적인 불법 행위( 키르쿰체리의 과격주의자들에 의해서 약탈과 살인등의 행위 )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처음의 의도는 순수하였지만 결과는 좋지 못한 분리주의자들이었다.   또한 인간의 해위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펠라기우스와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약화시키고 부인하게 되는 것과 같은 신학적인 문제점들을 지니게 되었다.

 

F.어거스틴의 교회론.


  1.어거스틴의 교회론의 기본 사상.

어거스틴은 도나투스트파와의 논쟁을 통하여 그의 교회론을 정립하였는데  교회에 관한 교리레 있어서는 주로 키프리안  으로부터 유래된 서방의 신학 전통을 이어받아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교회론은 시프리안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상적인 토대 위에서 어거스틴의 자신의 교회론을 정립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교회론은 더욱 발전하여 서방 교회론의 역사에서 최초로 종합적인 정리를 한 신학자라고 말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교회론에  있어서 근본 사상은 " 교회는 하나 "라는 사상이다.  그는 시편 주석을 위시해서 많은 설교를 통하여 전체적 그리스도라는  사상이 깔려있다.


또한 어거스틴의 교회론의 기초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스런 몸이며 ,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사상이다.  여기에서 몸과 머리는  한 그리스도이다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몸이 없으면 온저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 그가 몸소 몸을 낮추어 우리와 더블어 온전하기 때문이다.  예슈 그리스도는 우리 없이도 온전하시고 전체가 되시는 분이시다.  이와같이 머리와 몸의 완전하 통일의 관념에서 교회를  " 전적인 그리스도 " , " 한 사람  " , "  온전한 사람 " , " 한 인격 " 등으로 말하고 있다.

 

2.교회의 일치성.

도나투스파에 의하면 교회는 언제나 소수의 남은자로 구성되며,오직 신앙을 지킨 고백자들로 구성되어야 하며, 박해시에 배반한 자들과의 관계를 끊고, 순결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또한 배반자들에 의하여 감염된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와같은 그들의 주장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교회의 표식은 통일성과 보편서에 있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은 교회의 통일성에 대하여 " 교회는 오직 하나만이 있으며, 그리스도도 하나요, 신부도 하나이다. "라고  주장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교회는 첫째로, 신앙의 통일성을 가지며, 사랑의 일치성을 가지는데  어떤 사람은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이단자는 면할 수 있을 지언정 사랑의 통일성에 위배되면 역시 분열 주의자나 이단이 된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은 계속해서 이 통일성의 원리는 유기적인 것이지 제도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비록 순교자라 할지라도 이 신앙과 소망과 사랑의 통일을 깨뜨리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교회는 사랑으로 묶여져야 하고 그 사랑은 수 많은 죄를 덮어준다고 믿었다.  그런데 교회로부터 벗어나는 사람은 그 사실로 인하여 사랑이 결핍되고,따라서 하나님의 은총이 결핍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하여 볼때  어거스틴이 도나투스트파와의 노쟁에서 혓ㅇ성시킨 교회론은 무엇보다도 교회의 통일성과  일치성을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카톨릭적 전통에서 벗어나 불리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자들로 보며,  비록 순교자라 할지라도 구언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교회의 일치성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3.교회의 거룩성.

교부들이 교회를  " 거룩한 창녀 " 라고 부른 것은  의미있는  말이며, 이와같은 개념안에서 어거스틴은 교회안에 죄인이 있다고해서 교회를 떠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를 자르는 것이라고까지 말하였던 것은 죄인이 있으나, 거룩한 교회를 강하게 인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어거스틴은  교회의 거룩성은 구성원이나, 성례 및 개인적 성화의 산ㅇ물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거룩하고, 성례는 그리스도의 행동이기에 거룩하다라고 말하였다.
실제에 있어서 교회는 성도의 개인의 여부와 형편에 따라서가 아니라  이같은 요인과는 관계없이 거룩하다.  교획사 사람들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조직된 신비적인  교회는 겸손속에  성장되어지고 있으며, 구속의 행동을 통하여 볼 때에도 교회의 성결과 거룩성은 하나님에 의하여 이뤄진다. 이 능력에 힘입어 교회안에 있는 성도들이 변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성결은 무한하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시프리안으로부터 유래된  주관적 교회의 거룩성보다는 교회의 개관적 거룩성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4.교회와 성례전.

성레전의 개념은 2세기부터 점차적으로 변화되어 성례는 불가사이하게 역사한다는 사상이 점점 세력을 얻게 되었다. 어거스틴도 어느정도는 이 사상에 동조하였지만, 그러나 그는 믿음과 회개를 성인에게 있어서 세례의 필수요건으로 보았다.  또 세례받지 못하고 죽은 어린이들은 버림을 받을 것이로되  보호자의 보호를 받아 세례를 받은 어린이의 경우에는 교회의 신앙이 바로 어린아이의 신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더우기 세례는 그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에 속하여 있다는 것을 인하여 지워져 버릴 수 없는 특징을 어린아이들에게 인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세례의 효과를 보통 이상으로 특수하게  정의하기를 세례는 죄�( guilt )으로서  원죄( original sin )를 모두 제거하나 본성의 부패성( corruption )은 제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성례전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안에서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세례를 받음으로 정식으로 교회의 회원이 되며,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며,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과 일치된다고 보았다.
성례의 본래 시여자는 그리스도 자신이므로 성례의 타당성은 시여자의 가치에 좌우되지 아니한다고 보았다. 또한 교회의 일꾼(사제)의 가치나 수령자의 가치에 죄우되지 아니한다. 오히려 성례의 구원의 효과는 수령자의 신앙에 의존한다.


어거스티에 의하면 성례가필요한 이유는 하나닌의 은초이 성례를 통하여 오기�문이다. 성도느 교회의 성례전을 통하여 신비적인 체험을 하게되며, 신앙의 결의가 굳어지고,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이와같이 도나투스트파의 시여자에 따라서 성례의 효과가 있다고 보는 견해에 반대하여 그는 분리주의자의 세례나 교회의 세례 이 모두가 정당하다고 보았으나 오직 교회안에서 행하는 성례전만이 규례전적인 성례전이며, 교회안의 성례전만이 구속적 영향력을 지니며,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리하여 어거스틴은 성례자체와 성례의 유효성을 구별하여 분리시킴으로써 이 두사상의 결합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5.교회와 국가.

어거스틴에 의하면 진정한 국가란 기독교적이어야 하낟고 보았다.  사회조직의 궁극적인 형태는 종교적이므로 국가는 어떤 형태로든 교회의; 일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은 법과 권위로써 국가를 분명하게 하고있다.


국가의 목적은 질서 안에서 평화의 복구와 유지이다.  그 원칙적인 기능은 사악한 자들의 압제와 형벌이고, 더 나아가서는 선한 삶의 증진과 그의 시민들이 선하고 덕성있는 사람들이 되도록 훈련시키고 교육하는 것이다.


여기에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가 설정된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보더라도 황제에 의한 교회의 통제보다도 무정부 상태가 더 위험한 시기였으며, 언제든지 제국적 세계국가는 종교적 기반 없이는 그 강한 유대와 합일점을 �지 못하므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여기에 어떠한 그리스도인도 합법적인 권위에 대한 충성을 부정하지 않았고, 국가 역시 악의 확장을 막고 현세적 질서를 유지하여 참다운 신앙을 견제하도록 하는 상호 보완의 관계가 이루어 져야한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교회와 국가강의 관계는 일치성을 부여하지도 않으며 국가를 사탄과 동일시 여기지도 아니하였다. 그는 국가에서 의를 제거해 버린다면 도적떼에 불과 하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국가는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졌다고 이야기한다.  국가는 그 자체의 기초위에  서서 그 자체의 의를 소유하며, 하늘의 도성을 돕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는 내세를 바라보며 신앙으로 살아가는 순례자의 단체이다. 그것은 국가와 나란히 땅위에서 살아가며, 국가가 제공하느 땅의 평화를 사용한다.  교회와 국가는  " 그것들을 부정하거나 파괴시키지 않고 돕고 추구한다. "

 

6.어거스틴의 교회론 비판

첫째로, 어거스틴은 성삼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세례는 어디서나 동일 하다고 하였지만 그는 카톨릭 교회의 개념으로  인하여 이낟자들에 의해서 행해진 세례의 은사는 허용하지 아니하였다.  또한 세례받지 아니하고 죽은 어린이의 운명에 대하여, 구원받지 못한다는 극단적이며 매우 독단적인 이론을 전개한다.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죄책으로서의 원죄는 제거되나 본성의 부패성은 제거되지 아니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욕, 즉 성적인  욕망은 제거된다고 하는 모순을 드러낸다.


둘째로,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준다느 예정설을 가리키면서 또한편으로는 눈에 보이는 교회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여 하나님의 예정을 교회 안으로만 제한하는 모순점을 드러낸다.
세째로, 어거스틴은 진정한 경건생활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인격적인 관계임을 가르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수도원의 금욕주의를 지지하는 모순을 보여준다.
네째로, 교회도 세상에 나타날 수 있는 조직의 일부라는 외형적 교회관에 사로잡혀 가시적 교회를 일치시키려는 의도에서 물리적 수단을 허용하고 만다. 즉 그는 사랑에 의해 지도받는 것보다 두려움에 의해 지도받는것이 훨씬 빠른 방법임을 주장한다. 이는 교황들의 이교도들을 처형시키는 물리적 수단의 근본적인 원리를 제공하는 것이 되었다.


 Ⅲ.결     론.

 

A.내용요약.

어거스틴 당시에 누미디아 지역에서는 분파주의인 도나투스트파가 그 세력을 얻어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었다.   그때 힙포의 감독이었던 어거스틴은 이들의 분파주의에 대항하여 신학적인 원리를 정립하였는데  이것이 어거스틴의 교회론이 되었고 그리스도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최초로 교회론을 정립한 것이 되었다.


어거스틴은 교회에서 분리되 나간 행위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떨어져 나간  중대한 오류를 범하였다고 주장하면서 교회의 분파운동은 비록 순교자라고 할지라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교회의 거룩성, 그리고 성례전의 타당성등을  그리스도에게 �점을 �춤으로 주관주의에서 벗어나 교회의 객관성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또한 교회와 국가는절대적으로 분리하며 상관하지 않아야 한다는도나투스트파의 주장에 대하여 국가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으로 서로 상호 보완하여 보충적인 역확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에 의해서 교회의 새로운 신학적 개념들이 도입되었는데 그의 의해서 처음으로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 그리고 어머니로서의 교회의 개념등이  나오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어거스틴에 의하�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라하였으며, 이 타락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교회의 양식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교회론은 성례전을 매우 중요시 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신학은 후에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성례전을 중요시하는  중요한 원리를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교회론의 특징은 교회의 통일성과 권위에 두었으며, 교회 안에서만 진리와 구원이 있음을 주장하고, 성도는 성례전을 통하여서만 교회의 일원이 되며, 그리고 이 성례전을 통하여 야육 되어진다.  이때 교회는 어머니 같이  성도들을 이끌어 나간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 나라르 향하여 나아가는 순례의 길목에 있으며, 이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 된다.

 

B.교회 일치 운동에 있어서 나아가야 할 길.

첫째로, 도나투스트파는 처음에는 신앙의 순수성과 거룩성을 주장하는데  열심을 내어 교회로 하여금 교회의 타락에 견제하는 역활을 하게 되었지만 나중에는 신앙의 순수성 보다는 분파적 이익을 위하여 폭력까지 사용하게되며, 원래의 의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결과를 갖게 됨을 볼때  교회의 일치 운도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따라서 교회의 일치 운동은 먼저 교회 안에서 일어나야 함을 우리에게 교훈해 준다.


둘째로, 교회의 일치 운도에 있어서 폭력적인 강압적 방법은 옳지 않음을 우리에게  교훈해준다.  즉 폭력은 폭력을 낳게 되며, 폭력으로 인하여 더욱 분파되고 갈라지게 됨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셋째로, 교회의 일치 운동에 있어서 올바른 신학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도나투스트파는  신앙의 주관성과 책임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진리에서 벗어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넷째로, 교회의 일치 운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임을 기억하여 오늘의 현실 속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에 힘써야 함을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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