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 - 펠라기우스의 은총론에 대한 논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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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앙 연구가들/어거스틴

2009. 1. 27.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은총론에 대한 논쟁 고찰

 

신원균 목사

 

서  론 

  1. 문제제기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앙적 형태가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보다는 "인간 중심"적인 신앙의 형태로 변질되게 된 것은 인간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의 형태와 인간 중심적인 형태의 신앙적 특징은 이미 교회 역사의 초기에서부터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제시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초기 교부시대의 논쟁이 후대에도 계속적으로 영향을 끼쳐서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초기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갖게 되면 오늘날 변질되어 있는 신앙적 형태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거스틴(Augustin)의 인간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주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명령하소서"라는3)

 

 표현에 담겨져 있다.  즉 어거스틴은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라는 말씀의 기초에서 인간의 존재와 또한 인간이 누리며 살아가는 모든 것이 은총의 선물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가장 연약하고 비참한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어거스틴은 명확하게 증거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적인 개혁신학의 기초를 정립해 주었던 것이다.

  반면 인간 중심적인 신앙의 대표적인 신학적 기초로서 펠라기우스(Pelagius)를 언급할 수 있는데 이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들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행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계명을 주셨을 리가 있는가? 우리는 언제든지 선이나 악이나 자유로 선택할 수 있으며, 이 자유 선택의 기능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가 타고난 최고의 선이다"4)

 

라고 언급하면서 인간에게 자율적인 선택의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언급하므로 인간 중심적인 신앙의 형태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결국 이런 정신은 오늘날 자유주의를 비롯해서 모든 인간 중심적인 신학의 기초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전혀 다른 결과로 신학적인 성격이 규명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을 통해서 두 분파간에 공통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그리고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구별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에 대한 평가가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입장처럼 평가되지 않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평가됨으로 어거스틴의 신학이 심각하게 문제가 되고 오히려 펠라기우스의 신학적 입장이 더욱 높이 평가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평가를 제시한 사람으로 요한 웨슬레를 언급할 수 있는데 그는 펠라기우스가 이단으로 불리운 것에 대하여 회의적이었고, 동정적이었다. 소위 펠라기우스의 이단성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완전한데 나아갈 수 있다는 것과, 따라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5)

 

  또한 한영태 교수는 "펠라기우스의 교훈이 오늘에 새롭게 이해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와 도덕, 신앙과 윤리, 바울과 야고보는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6)

라고 평가하면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를 주장했던 것이며,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책임을 주장한 것이기에 이 두 주장의 조화를 주장하면서 펠라기우스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했던 것이다.

 

  이런 주장은 마치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은혜만을 주장하고 인간의 책임은 주장하지 않은 것처럼 어거스틴의 인간론에 대한 이해를 오해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신학적 논점을 잘못 평가하는 원인은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신학적 입장이 정확하게 구별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즉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신학적 표현이나 주제의 내용이 많이 겹쳐 있는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두 신학적 입장의 특징을 정확하게 구분해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표현과 내용상에서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을지라도 전혀 다른 신학적 기초와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입장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특징들을 분명하게 구분해 내야만 하는 것이다.

 

이제 본 논문에서는 이와 같이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가 가지고 있는 표현상의 특징과 주제상의 내용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과 신학적 구조를 정확하게 분석해 보고자 한다. 그래서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신학적 논점이 어떤 방식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어떻게 서로 다른지를 명확하게 구별해 냄으로 서로가 가지고 있는 인간론의 근본적인 차이점과 특징이 무엇인지를 정립해 보고자 한다.  즉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인간론에서 근본적인 차이점과 특징은 L. 벌콥의 지적처럼 "자유의지(Free Will)와 원죄(Original Sin)"에 있어서 가장 명확하게 구별됨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7)

 

 

2. 연구방법

  본 논문을 전개해 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이 있다면 고대 교부의 연구가 매우 미흡한 현(現) 신학적 형편을 고려해 볼 때 어거스틴의 방대한 논문을 연구한다는 것이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고대 교부의 연구가 개혁신학 쪽에서 많은 내용이 연구되어진 것이 아니라 비(非)개혁신학 자들에 의해서 연구되었기에 어거스틴을 소개하는 것이 많은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런 신학적 형편 때문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개혁신학자들이 소개한 어거스틴의 이해를 기초로 해서 어거스틴의 논문을 분석해 보는 것이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가장 바르게 어거스틴을 소개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본 논문은 칼빈과8)

 워필드9)

와 벌콥10)

을 중심으로 개혁신학자들이 어거스틴의 핵심적인 인간론 이해를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지를 기초로 해서 어거스틴의 논문을 분석할 것이다.  다행히 어거스틴의 은총론 논문이 번역이 되어 있어서 이 논문을 개혁신학자들의 입장에 의해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 논문은 "어거스틴의 은총론"(필립샤프편, Ⅰ.Ⅱ.Ⅲ.Ⅳ, 차종순역,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1998)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되었는데 이것은 라틴어 번역이 아니라 미국의 Eerdmans Publishing Company에서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던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Editted by Phillp Schaff, Vol. V. Saint Augustin: Anti-Pelagian Writings를 번역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라틴어로부터 느낄 수 있는 어거스틴의 깊은 신학적인 이해를 접근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지만 전체적인 어거스틴의 신학적 성격을 이해하는데는 충분하기 때문에 이것을 집중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어거스틴의 은총론 논문은 년(年)도별로 다음과 같은 논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공로와 죄의 용서에 관하여, 유아세례에 관하여"(De Peccatorum Meritis et Remissione, et Baptismo Parvulorum/412), "영과 의문에 관하여"(De Spiritu et Littera/412), "본성과 은총에 관하여"(De Natura et Gratia, contra Pelagium/415), "인간의 의의 완성에 관하여"(De Perfectione Justitiae Hominis/415), "펠라기우스 재판 진행에 관하여"(De Gestis Pelagii/417), "그리스도의 은총에 관하여, 그리고 원죄에 관하여"(De Gratia Christi, et de Peccato, contra Pelagium/418), "결혼과 현세욕에 관하여"(De Nuptiis et Concupiscientia/419), "영혼과 그 기원에 관하여"(De Anima et ejus Origine/419),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두 개의 편지를 반대하여"(Contra Duas Epistolas Pelagianorum/420), "은총과 자유의지에 관하여"(De Gratia et Libero Arbitrio/426), "비난과 은총에 관하여"(De Correptione Gratia/426-427), "성도의 예정에 관하여"(De Praedestinatione Sanctorum/428), "견인의 은총에 관하여"(De Dono Perseverantiae/429).

 

  그리고 "어거스틴의 은총론"에 대한 많은 신학 논문이 제시되고 있지만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비(非)개혁신학적 입장에서 대부분 발표된 논문들이기에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어거스틴의 입장과는 많은 차이가 있기에 이 논문들은 제외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행히 남사현전도사가 개혁신학자인 김영규교수의 지도를 통해서 발표한 "공적론에 대한 칼빈의 비판에 있어서 어거스틴의 은총론의 영향"11)

 

이란 논문이 2001년도에 발표되어 이 논문도 함께 참고하여 어거스틴의 논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삼았다.

  이제 이런 자료를 중심으로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논문이 워낙 방대하고 또한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 있어서 주제와 그 주제에 대한 표현상의 차이가 매우 미묘하고 또한 복잡하기 때문에 논문을 차례대로 분석하는 것은 매우 큰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본 글에서는 논쟁의 핵심적인 내용으로 제시되는 죄(罪)와 은총의 성격, 그리고 자유의지와 은총의 관계에 대해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3 주제를 다루어 가며 전개시키는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신학구조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와 같은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이 오늘날 개혁신학의 선(線)을 이어 가려고 하는 교회에게 어떤 신학적 의미가 있는지를 밝혀 보고자 한다.

 

본   론

 A. 워필드(B.B. Warfield)의 논평12)

 

 1.  펠라기우스주의의 기원과 성격

   워필드는 어거스틴의 "은총론"에 대한 이해를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아주 명확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  특히 그는 칼빈의 신학적인 사고에 기반해서 정확하게 어거스틴의 인간 이해를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에 워필드의 지적을 통해서 어거스틴의 신학적 구조와 인간론의 특징을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워필드는 펠라기우스주의 역사적인 기원과 성격을 간략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초대교회의 4세기까지는  하나님의 본성,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논쟁의 시대였으나 5세기에 들어서면은 전혀 다른 내용이 중요한 신학적 논쟁으로 제시되기 시작하였다고 정리해 주고 있다.  그것은 자유의지와 은총의 상호관계에 관한 교리를 정확하게 정리해야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론에 대한 신학적 주제가 문제시되기 시작한 것은 동방교회에서 자유의지에 대해서 많은 강조를 한 반면에13)

 서방교회에서는 인류의 타락에 더욱 큰 강조점을 두면서 하나님의 은총의 필요성을 강조하게 되자14)

 양쪽의 입장을 명확하게 정립해야 하는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것이다.15)

 

  이와 같은 시기에 더욱 문제가 되었던 것은 "영지주의의" 영향이었다.  즉 영지주의는 영과 육에 대한 극단적인 이원론를 주장하면서 육체를 부정한 것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인간의 삶과 행동에 대한 무책임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영향이 교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을 때 펠라기우스는 성도가 너무나 자신의 삶과 행동에 대해서 무책임하게 행하는 것을 고민하던 중에16)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게 되었으며, 그 책임성에 대한 주장은 급기야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도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의지"를 주장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17)

  이런 펠라기우스의 신학적 동기를 워필드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자유의지에 대한 그의 강조에 있지 않고, 오히려 자유의지를 강조함으로써 인류의 타락과 은총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데 더 큰 문제점이 있다"18)

라고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에 펠라기우스가 고민한 신학적 동기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그는 나름대로 당시의 부패해 가는 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지적하고 바르게 회복해 보려는 좋은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성경에서 제시하는 총체적인 교리적 체계를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한 부분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잘못을 범했던 것이다.19)

 

  이런 오류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제시하는 의미가 크다.  즉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교회의 부패와 변질을 지적하면서 개혁과 회복을 주장하지만 역사적으로 증거되어 왔던 개혁신학의 교리적 체계를 정립해 놓지 못하고 이런 문제제기만 하게 될 때는 성경적인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을 극단적으로 치우친 사고로 이해해서는 이단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론에 있어서도 성경의 총체적인 교리적 체계를 통해서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은총을 완전히 파괴하고 인간의 책임과 행동만을 강조하는 인간중심적인 신학적 사고로 모든 신앙적 체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고 이런 신학적 체계는 급기야 정통적인 교회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드는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위험성을 워필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해 주고 있다.  "펠라기우스주의와의 투쟁은 사실에 있어서 기독교의 근본 그 자체를 위한 투쟁이며, 앞 세대에 있었던 신학적이며 기독론적인 논쟁보다도 훨씬 더 위험스러웠으며, 여기에서는 기독교의 실제적인 본질이 손상될 위험을 맞이했다".20)

 

  그리고 워필드는 이런 펠라기우스의 특징을 "율법주의 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으며, 더욱 중요한 펠라기우스주의의 신학적 핵심 내용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정리해 주고 있기도 하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펠라기우스주의의 핵심적이며 형식적인 기본 원리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완벽한 능력을 가정하는 데 있었다. 인간의 능력은 의가 요구하는 모든 사항을 행할 수 있으며, 자신의 구원을 성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완벽을 이룰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전체적인 이론의 핵이었으며 여타의 다른 가정들은 이 핵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또한 바로 이 핵으로부터 도출되었다. 시간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이것이 그의 체계의 뿌리였다.21)

 

   그런데 펠라기우스가 이런 주장을 하게 된 것은 아무 의미 없이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잘못된 성경 이해에서 출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대하15:2의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22)

 

라는 말씀과 같은 성격의 구절들을 표면적인 이해로만 이해했던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구원과 모든 삶에 대해서 완전히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명령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것은 곤란한데요!, 이것은 어려운데요!, 우리로서는 불가능한데요!, 우리는 사람인데요! 등등의 보편적인 핑계에 대해서 격분하면서 '이 무모한 미친 짓을 집어치우라!'"고 외쳤으며, 더 나아가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이중적인 무식쟁이로 욕하는 것과 같다'라고 증거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율법을 인간에게 억지로 부과시키시는 모순된 분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란 것이다.23)

 

  이런 펠라기우스의 성경 이해는 점점 더 인간의 자유의지를 극단적으로 제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처럼 잘못된 성경 이해에서 더 위험한 이단적 교리로 나아간 펠라기우스의 오류를 워필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고 있다.

     인간의 능력을 이렇게 주장하는 데서부터 세 가지의 중요한 사실을 유추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으며, 어거스틴도 이러한 추론이 펠라기우스 체계의 주된 요소라고 인정했다.  펠라기우스는 모든 사람은 원하기만 한다면 죄가 없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이전의 많은 성인들도 사실에 있어서 죄없이 살았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인간으로부터 떼어 낼 수 없다는 결론에 자연히 도달하게 됨으로, 각각의 인간은 과거인들의 지나가 버린 행동으로부터 연유된 죄악이나 도덕적인 연약성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에 태어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인간의 능력을 긍정한다는 동일한 가정으로부터 인간이 이를 순종하기 위해서 초자연적인 도우심이 필요치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므로,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연약성을 지원하기 위한 내적인 도우심이란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은총의 필요성과 사실성을 강력하게 부인하였다. 바로 이 마지막 사항에 이르러서 논쟁의 가장 큰 강조점을 두었으며, 어거스틴은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부인되고 또한 반대되는 데서 다른 어느 것보다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24)

 

   어거스틴은 그가 이런 구절을 주장하면서 의지의 자유로운 선택을 주장한다고 증거하고 있다.  즉 이들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데는 우리의 공로가 이미 있었다는 식으로 성경을 해석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식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다는 사실에 우리의 공로가 있으며, 그 다음에 이 공로에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그를 만나 뵙게 하신다고 이들은 생각한다고 지적하고 있다.25)

 

  그러나 이 구절을 보게 되면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의지가 앞선 것처럼 보여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성경을 단편적으로 이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다른 구절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의 성격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전체의 의미를 고려해야만 위의 구절의 참된 뜻을 이해할 수 있음을 어거스틴은 지적하면서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주옵시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명령하소서"라는 유명한 말을 정립하게 되었다.26)

 이제 워필드는 어거스틴의 지적을 따라서 펠라기우스의 결정적인 오류들을 몇 가지로 정리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고 있다.

 

     펠라기우스의주의자들의 각별한 개인주의적 세계관은 인간의 습관이 인간의 본성 그 자체에 미치는 영향력을 인지하지 못하고 놓치는 데서 나왔다.  선을 덕스러운 행동의 복합이라고 보았듯이, 그들은 죄란 전적인 행동으로 혹은 불연속적인 일련의 행동들로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거룩함이란 일련의 거룩한 행동과 별개로 일어날 수 없다고 하는 이교도들의 본질적인 주장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 결국 그들은 인간을 통전적으로 보지 않고 역량(possibilitas)과, 능력(posse)이라는 이름의 자유의지의 기관으로 국한시킨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역량과 능력이란 이것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며, 역량과 능력은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의 자유의지 이론의 결정적인 오류가 있다.  즉, 그들은 자유를 형상(form)에서만 보았을 뿐 질료(matter)에서는 보지 못하였으며, 또한 인간이 선과 악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그리고 절망적으로 오락가락하는 흔들리는 존재라고 함으로써 인격의 성장을 전혀 허락하지 않았으며, 동시에 인간이 선을 계속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얻게 되는 유익을 전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형의 사고는 인간의 유기체성을 와해시켜 불연속적인 자의적 행동의 집적체로 몰고감으로써 인류의 결속력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  분명하건데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인간이 의지를 위해서 창조되지 않고, 의지가 인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27)

 

 

2.  펠라기우스 논쟁의 외적인 역사

   펠라기우스는 "성 바울의 서신에 관한 주석(Commentary of the Epistles of Saint Paul)"라는 글을 통해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그리고 로마에서 체류하는 동안에는 변호사인 카일레스티우스(Caelestius)를 제자로 얻었으며 이 사람에 의해서 공개적인 펠라기우스주의의 논쟁이 전개되었다.  카일레스티우스는 카르타고에서 감독직을 요구하였으나 밀라노 출신의 집사인 파울리누스(Paulinus)가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였으며, 결국 이 문제는 감독 아우렐리우스(Aurelius)가 주재하는 회의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다루어 졌다.  여기서 파울리누스의 고소 내용은 카일레스티우스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고 정리하고 있다.28)

 

 

아담은 숙명적인 존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죄를 짓거나 혹은 짓지 않았거나 죽었을 것이다.

아담의 죄는 그 자신만 오로지 손상시켰을 뿐 인류 전체를 손상시키지 않았다.

갓 태어난 유아는 아담이 죄를 짓기 이전의 상태와 동일하다.

인류 전체는 한편으로는 아담의 사망 혹은 타락으로 인해서 죽지 않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다시금 일어나지도 않는다.

갓 태어난 유아는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영생을 얻을 수 있다.

율법도 복음과 마찬가지로 영생에로 인도해 준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에도 죄가 없었던 사람이 있었다.29)

 

 

  바로 이 회의에서 카일레스티우스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그 결과 그는 곧바로 정죄되었으며 동시에 출교의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펠라기우스는 415년 경 여름에 파울루스 오로시우스(Paulus Orosius)라는 장로가 어거스틴으로부터 온 편지를 제롬에게 가지고 가게됨으로 7월경 예루살렘 요한(John of Jerusalem)이 주재하는 교구회의에 출두하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지적된 펠라기우스의 주장 중 핵심적인 내용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죄없이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회의에서는 감독들이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많은 호의적인 반응을 나타내어서 명확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고 급기야는 로마의 감독에게 보내어 결정을 내리기로 합의하는 정도에서 끝나게 되었다.30)

 

  이런 결정이 있은지 얼마지나지 않아서 아를르의 헤로스(Heros of Arles)와 애의 라자루스(Lazarus of Aix)라는 감독들이 대주교인 가이사랴의 율로기우스(Eulogius of Caesarea)와 함께 다시 한번 펠라기우스를 고소하게 되었다.  따라서 같은 해인 415년 12월에 리다(Lydda: Diospois)에서 14명의 감독들이 회집되어 재판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재판의 결과에 대해서 워필드는 "아마도 이 회의가 엮어 낸 어리석은 광대짓만큼 바보스러운 일은 일찍이 교회에서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31)

라고 매우 심하게 비평을 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회의에서 펠라기우스는 라틴어로 된 자신의 고소문에 대해서 라틴어와 희랍어에 능통했던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서 모든 내용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시켰으며, 당시 언어적인 문제를 깊이 분석할 수 있는 재능이 없었던 감독들은 펠라기우스의 변호와 그의 교활한 위장에 명확한 정죄를 선언하지 못하고 오히려 펠라기우스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32)

 

  이처럼 회의를 승리로 이끈 펠라기우스는 "자유의지를 옹호하면서(In Defence of Free-Will)"라는 책을 발표하여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런 펠라기우스의 활동에 대한 소식이 북아프리카에 전해지자마자 펠라기우스와 카일레스티우스의 정죄에 대해 재확인하는 두 군데의 지역회의가 시작되었다.  즉 하나는 416년 여름 중반에 68명의 감독이 소집한 회의와 이 회의 이후 곧이어 진행된 60명의 감독이 소집한 밀레베(Mileve or Mila)회의 였다.  이와 같은 북아프리카의 회의는 그 당시 로마의 감독이었던 인노센트 1세(Innocent 1)에게 통보되어 북아프카의 결정에 동의해 줄 것이 요청되었다.  결국 417년에 인노센트는 북아프리카의 결정에 동의한다고 밝히면서 내적인 은총의 필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펠라기우스의 유아세례 이론을 거부하였으며, 또한 펠라기우스와 카일레스티우스가 정통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출교를 명령한다고 선언하게 되었다.33)

 

  그런데 이와 같은 중요한 결정이 인노센트가 죽고 난 후 세워진 조지무스(Zosimus)의 취임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즉 카일레스티우스는 로마에 나타나서 자신의 입장을 호소하였으며, 예루살렘의 요한의 뒤를 이은 프라이루스(Fraylus)의 추천서 등을 제시하면서 자신에게 내려진 결정이 부담함을 주장하였다.  본래 희랍인이었던 조지무스는 서방의 논쟁에 관심이 없었기에 즉각적으로 카일레스티우스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북아프리카에 펠라기우스와 카일레스티우스가 정통카톨릭이라고 선언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북아프카의 성급한 판단을 신랄하게 비난하기도 하였다.34)

 

  이처럼 펠라기우스주의의 핵심을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한 오류 때문에 교회를 혼란케하며 신앙의 근본을 변질시키는 일들이 당시부터 있었던 것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도 여전히 펠라기우스주의의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보류하게 될 때 교회는 엄청난 혼란 속에 빠져 들어가기 때문인 것이다.

 

  조무스의 결정은 당연히 북아프리카의 교회들을 흥분케 했으며 그 결과 417-418년경에 200명이 넘는 감독들이 카르타고에서 회의를 소집해서 조지무스에게 자신들은 펠라기우스와 카일레스티우스를 반대한다고 재차 선언하게 되었다.  즉 이들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의 도우심을 받지 않으면 행동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알 수 없을뿐더러, 올바르게 행동할 수도 없으므로 우리는 은총이 없으면 경건에 속한 어느 것 하나라도 가지거나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혹은 행할 수 없다"라고 선언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확고히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강경한 입장에 조지무스는 자신의 결정을 번복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펠라기우스와 카일레스티우스를 로마로부터 추방한다는 명령이 라벤나(Ravenna)의 황실로부터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결정으로 카르타고에서는 기본적으로 펠라기우스적인 색체를 가지고 있는 9개의 교회법을 모조리 정죄하게 되었다.  그리고 로마에서도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을 정죄하는 단호한 문서가 발표되었으며, 아프리카의 입장을 따라서 본성의 타락, 참된 은총, 세례의 필요성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이처럼 이 회의의 내용은 3개의 내용을 기본적인 핵심으로 정리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35)

 

 

첫 번째는 인류와 원죄와의 관계를 다루었다.  즉 신체적인 죽음은 아담의 죄의 결과가 아닌 본래적인 필연성에 기인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저주하였다.

두 번째는 은총의 성격에 관해서 다루었다.  즉 은총은 오직 과거의 죄를 사면해 주는 데 효력이 있을 뿐이며 앞으로 지을 죄를 피하는 데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저주하였으며, 은총은 그것이 없더라도 우리가 행할 수 있었던 그 일들을 더욱 쉽게 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하는 주장을 저주하였다.

세 번째는 인류의 우주적인 죄악을 다루었다. 즉 사도들의 죄의 고백은 오직 그들의 겸손의 소치라고 주장하는 자들을 저주하였으며, 주기도문에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옵시고"라고 하였던 것은 성도들이 자신들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신들과 교제하고 있는 죄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을 저주하였다.36)

 

 

  그런데 이와 같은 교회의 결정에 펠라기우스파의 선두 주자였던 엑크라눔의 율리안(Julian Eclanum)을 포함한 18명의 이탈리아 출신 감독들은 교회의 문서에 서명하기를 거절함으로써 축출 당하였으나, 이들은 계속적으로 지역을 옮겨 다니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입장은 확고부동하였다.  많은 펠라기우스주의의 이단들은 423년 킬리키안(Cilician)에서, 424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리고 안디옥(Antioch)에서 정죄를 받았다.  특히 추방당한 감독들은 429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네스토리우스(Nestorius)와 함께 있기도 했으나 431년 로마의 감독이었던 코엘레스틴(Coelestine)에 의해서 네스토리우스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모두 정죄를 당하기도 했다.37)

 

  그런데 이 이단들은 가울(Gaul)이란 지방에서 수도원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좀더 색다른 형태로 다시 세워가기도 했다.  즉 이들은 "은총을 주장하는 어거스틴의 이론을 긍정하면서도 선(善)은 인간이 스스로 결정한다"는 펠라기우스적인 개념을 새롭게 도입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이런 주장들은 프로스퍼(Prosper)와 힐라리(Hilary)가 어거스틴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이 죄가 아담으로부터 유래되었으며, 결코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총을 필요로 하며, 이 은총은 사람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값없는 것이지만, 그러면서도 불가항력적인 것은 아니며, 이 선물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 여부와 상관없이 언제나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공로 때문에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와 같은 공로를 실제적인 것으로 그리고 예견하는 가운데에서 주어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38)

 

 

  워필드는 이와 같은 변형된 주장을 "반(半:semi)-펠라기우스주의"라고 지적해 주고 있으며, 이들의 새로운 지도자를 크리소스톰(Chrysostom)의 제자인 요한 카시안(John Cassian)이었으나 대표적인 우두머리를 이보다 후대에 등장한 레기움의 파우스투스(Faustus of Rhegium or Riez)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들의 활동들은 아퀴테인의 프로스퍼(Prosper of Aquitaine)와 아를르의 카이사리우스(Caesarius of Arles)에 의해서 곧바로 정죄를 당하였고, 496년에는 교황 겔라시우스(Gelasius)가 파우스투스의 글을 정죄하여 최초로 발행되었던 금서목록표에 첨가시키기도 했으며, 6세기에 들어와서는 교황 호르미스다스(Hormisdas)에게도 정죄를 당하였으며, 529년에는 이 이단들의 주장을 명확하게 반대하기 위해서 카이사리우스의 주재로 "어거스틴주의의 신조"가 채택되기도 하였으며, 이것은 다음해에 보니페이스 2세(Boniface Ⅱ)의 비준을 받기도 했다.39)

 

  우리는 워필드가 이와 같이 지적하고 있는 어거스틴주의와 펠라기우스주의의 논쟁에 대한 교회역사를 깊이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후대 교회에게 끼친 영향이 막대했으며, 또한 그 오류의 내용을 오늘날 한국교회도 계속해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즉 우리는 정통교회에서 펠라기우스의 내용을 명확하게 구별해 내지 못했을 때 교회가 얼마나 무서운 혼란을 겪게 되었는지 명심해야 한다.  특히 바른 안목을 갖지 못했을 때 이단으로 정죄했던 내용들이 정당하게 교회 안에 버젓이 들어오는 결과를 맞이했던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결국 이런 오류의 위협은 오늘날도 교회가 바른 안목을 가지고 정통적인 인간론에 대한 신학적 체계를 정립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여지없이 교회 가운데 정당한 입장으로 뒤바뀌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오히려 우리는 교부시대의 교회들이 끊임없이 노력하고 힘을 기울여서 거듭 펠라기우스주의를 강경하게 거부하고 정죄하며 저주했었던 정신을 기억하고 이런 정신이 오늘날 개혁교회 가운데 다시 회복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펠라기우스주의가 어떻게 반펠라기우스주의로 나아가는지를 보면서 인간론에 대한 명확한 교리적 체계를 정립하고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양보하게 되면 전체가 무너지게 됨을 깨닫고 정통적인 개혁신학에서 보존되었던 인간론에 대한 교리체계를 완전하게 보존하는 것이 교회를 보호하는 첫걸음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3.  어거스틴의 입장

   이 내용은 아래의 어거스틴의 본 논문에서 보다 자세하게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워필드가 정리한 핵심적인 내용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워필드는 어거스틴의 신학적 체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모든 선의 원천인 하나님에게 인간이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으로서의 은총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아니, 은총은 그의 교리적인 발전의 각 단계에서 빠뜨릴 수 없는 기본적인 요소로서, 그가 은총중심적인 원리를 근간으로 해서 세운 모든 신학이 언제나 일관성을 갖도록 해주는 결정적인 요소였다"40)

  이와 같은 신학적 체계를 통해서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의 인간론에 대한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고 증거한다.  즉 어거스틴이 지적한 펠라기우스의 문제점은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말하지만 하나님의 선물을 완벽한 자유의지 안에 국한시키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인간들에게 무엇을 추구할 것이며 무엇을 피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계명과 교훈 안에 국한시킴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가 선한 것을 지향하게끔 한다"41)

 등과 같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에 반해 어거스틴이 제시한 바른 교리적 체계 가운데서의 인간론 이해를 워필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해 주고 있다.

    우리는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된 것과 우리가 살아 있는 것과 우리가 이해하는 것도 모두 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우리가 사람이며 우리가 부유하게 살며 우리가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도 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 이외에 우리의 것이란 없습니다.42)

 

   이처럼 어거스틴의 이해는 인간의 공로에 의해 주어지는 은총이 아니라 이 공로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은총의 선행적 성격에 대해서 분명하게 증거하였고, 이런 정신은 "우리에게 명하신 것을 주시고, 주님이 원하신 것을 우리에게 명하소서"라는 유명한 고백으로 표현되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은총과 의지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어거스틴은 자유의지와 믿음과 은총의 상호관계를 정신을 잃고 흠뻑 빠질 정도의 흥미있는 방법으로 다루면서, 이 상의 세 가지는 서로 배척하지 않고 동시적으로 존재한다고 하였다"43)

라고 워필드는 지적해 주고 있다.

 

  특히 세례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도 워필드는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핵심적으로 요약해 주고 있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갓 태어난 유아는 세례를 받을 수도 있다고 어느 정도 양보하였다.  이제 남은 문제는 무엇 때문에 갓 태어난 유아가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였다. 우리는 이 방법을 통하지 않으면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구원을 위해서도 아니고 영생을 위해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라고 말한다."44)

 

  이처럼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교묘하게 언어적 표현에서 모호하게, 또는 위장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주었다고 지적해 주고 있다.  그리고 414년에는 힐라리(Hilary)에 의해서 보내진 호소문에 답변하는 가운데서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의 교리적 오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었다고 지적해 주고 있다.

"첫째는 사람은 죄가 없을 수 있다.  둘째, 원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계명을 쉽사리 지킬 수 있다.  셋째, 갓 태어난 유아는 세례를 받지 않고 사망하였다고 할지라도 죄없이 태어나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멸망하지 않는다.  넷째, 부자는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팔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다섯째, 우리는 절대로 맹세해서는 안 된다.  여섯째, 교회는 이 세상에 흠이나 티가 없다".45)

 

   이런 오류가 제시될 때마다 워필드는 어거스틴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것을 주시고, 주실 것을 명하시옵소"라는 은총론의 방식을 가지고 모든 오류를 반박하는 원리로 삼았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은 절제를 명령하시고 절제를 주셨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명령하시고 은총으로 말미암아 주셨다.  하나님은 의문(儀文)으로 명령하시고서 성령으로 주신다.  왜냐하면 은총이 없는 율법은 죄를 넘치게 하고 영이 없는 의문은 죽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명령하시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을 행하려고 애쓰다가 율법 아래에서 인간의 연약성을 발견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은총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를 알 것이다"46)

라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연약한 인간에게 명령하시며, 또한 은혜를 베푸시는지를 설명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어거스틴은 성경의 총체적인 교리적 체계에 입각해서 은총론를 제시해 나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외에도 워필드가 지적하는 어거스틴의 놀라운 신학적 구조를 발견할 수 있는 표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여러분이 나아가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일이지만, 여러분이 나아가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란 점을 의심하지 마십시오"47)

 

 이런 표현도 위의 내용과 비슷하게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책임이 어떻게 조화롭게 설명될 수 있는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표현임을 보게 된다.  그리고 자유의지 부분과 관련해서 아주 유명한 어거스틴의 지적이 있는데 이것을 워필드는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면 사람은 자유의지로써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유의지를 주어서 사람을 만들어 주신 그 하나님께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선물)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48)

 

  결국 펠라기우스가 자신의 모든 신학적 체계를 세우고자 하는 자유의지에 대한 부분도 어거스틴은 그 자유의지 자체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을 증거하는 가장 강력한 표현이 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유의지 자체가 선물이라는 것이다.  워필드는 최종적으로 이와 같은 펠라기우스의 신학적 내용은 기독교를 가장 심각하게 파괴하는 것임을 어거스틴이 가장 명확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펠라기우스가 죄는 실체가 아니므로 실체인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서 어거스틴은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파괴시키며, 만일 죄가 부패케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죄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겠는가라고 답변하였다."49)

 

 이처럼 펠라기우스주의는 기독교의 또다른 면이 아니라 신앙을 가장 심각 파괴하는 이단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펠라기우스주의의 신학을 자신의 신학적 체계로 정립해서는 이것도 기독교의 한 분파 속에 속하는 것처럼 교회 가운데 들어와서는 기독교 일치 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많은 분파들이 있는데 우리는 이런 분파들이 명백히 신앙을 파괴하는 이단임을 분별해 내야 할 것이다.  즉 교회일치를 이루어야 하는 형제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교회일치는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시119:63)라는 말씀에서 증거 되고 있는 것처럼 같은 교리적 체계를 가지고 있는 교회와 일치를 이루는 것이지 이처럼 성경을 파괴하는 자들과 일치를 이루는 것은 아닌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놀랍게 헌신한 어거스틴에게도 역시 인간이었기에 연약한 부분이 있었음을 지적하는 워필드의 평가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어거스틴을 연구하려고 할 때 어떤 방식으로 어거스틴의 인간론을 이해하고 접근해야 할 것인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은총의 수단에 대해서 말할 때에, 즉 사람에게 은총을 수여하시는 통로와 상황을 말할 때마다 은총론과 교회론이라는 그의 신학의 상이한 두 갈래 길의 접촉점을 찾아서 접근시킴으로써, 슬프게도 그는 외부적인 영향력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서 그의 신학의 자연적인 흐름을 인위적으로 약간 굴절시켰음을 볼 수 있다.50)

 

      예를 든다면 세례는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이 원리를 제외시킬 수 있을 정도의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다.  세례는 이것이 없으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을 정도의 통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상의 교리에서 유출되는 가장 슬픈 결론은 갓 태어난 유아를 포함해서 세례받지 않고 죽은 모든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버림을 받으며, 영원한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 -- 이것이 어거스틴의 구원론의 어두운 면이다.  그러나 그가 그 시대에 통용되었던 일반적인 사상으로서 물려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은총의 신학이 아니라 죄의 사면을 위해서는 세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보편적이며 전통적인 믿음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51)

 

   우리는 워필드가 지적하는 이와 같은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중세 로마 카톨릭의 문제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즉 로마 카톨릭은 어거스틴이 실수한 부분을 오히려 어거스틴의 핵심적인 신학체계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 결과 중세시대에는 세례가 구원에 있어서 필수임을 주장하게 되었고52)

, 그 세례를 집행하는 신부들에게 결국에는 많은 권위가 세워지게 됨으로 많은 부패가 교회에 증가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와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어거스틴의 신학적 체계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가운데 그의 인간론을 연구해야만 정통개혁신학의 교리적 체계를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B.  어거스틴의 은총론

 

1.  원죄(罪)에 대하여(De Peccato Originali)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에 있어서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부분은 죄(罪)에 대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이 은총론의 논쟁은 인간론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53)

  그리고 은총론의 의미를 정립하기 위해서도 죄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은총의 이해가 출발되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에 있어서 죄에 대한 정의와 그 성격을 어떻게 정립하고 이해하는가가 가장 시급히 정리되어야 할 부분임을 알 수 있다.

 

  우선 죄에 대한 논쟁이 각 논문마다 다양한 주제와 연결되어서 전개되어지고 있기 때문에 죄를 가장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논문을 중심으로, 그리고 각 주제의 내용들이 이 죄에 대한 논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를 요약해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먼저는 무엇보다 이 논쟁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된 논문인 "공로와 죄의 용서에 관하여, 유아세례에 관하여"(De Peccatorum Meritis et Remissione, et Baptismo Parvulorum/412)를 소개하면서 이 논쟁의 성격과 발단의 원인을 살펴보고 "영과 의문에 관하여"(De Spiritu et Littera/412),"그리스도의 은총에 관하여, 그리고 원죄에 관하여"(De Gratia Christi, et de Peccato, contra Pelagium/418) 등의 논문을 통해서 죄의 내용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어거스틴은 첫 번째 논문의 서두에서 본 논문은 마르켈리누스에게 보내는 편지임을 밝히고 있다.  특히 논쟁과 관련된 어거스틴의 기록된 문서가 최초로 나타난 것이 바로 '집정관이며 공증인이었던' 마르켈리누스에게 보내는 본 논문을 통해서 드러났던 것이다.  이 논문은 마르켈리누스가 카일레스티우스의 재판의 과정 중에 펠라기우스의 이단과 관련된 중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어거스틴에게 요청하여 그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 제시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질문한 내용은 3가지로 정리가 되는데 그것은 "사망죄의 전달에 대한 것과, 무죄한 삶의 가능성과, 유아세례의 필요성"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이 3가지의 내용을 답변하는 방식으로 본 논문을 제시해 주고 있다.54)

 

  먼저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가 "아담이 죄로 인한 허물이 전혀 없었다고 하더라도 죄에 대한 처벌에서가 아니라 존재의 필연성으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도록 조성되었다" 라고 주장하며, 또한 이들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율법서의 구절을 인용해서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죄가 발생하는 "영혼의 사망"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함을 지적해 주고 있다.  즉 이런 주장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육체의 죽음은 분명 죄로 인한 처벌에서 오는 것임을 창3:1955)

과 롬8:10-1156)

과 고전15:2157)

 등과 구절을 통해서 배격해 주고 있다.58)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아주 교묘하게 언어적인 차이성으로 피해 가려고 하는 것을 어거스틴은 냉철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  즉 이들은 어거스틴이 고전 15:21절을 가지고 자신들의 입장을 배격하자 곧이어 주장하기를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라는 말씀에서 사망은 몸의 사망이 아니고 영혼의 사망이라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59)

  그러나 이런 모든 이론을 배격하고 어거스틴은 "사도께서 뚜렷하게 몸은 우리 안에 있는 죄로 인해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아직까지도 영은 생명이기 때문에 너희 죽을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몸도 의로 인해서 살게 될 것이며, 이러한 전 과정은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해서, 즉 너희 안에 머물고 있는 성령으로 인해서 살게 될 것"60)

이라고 제시해 주고 있다.   

 

  다음으로 롬5:12절의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라는 말씀에 대해서 지적해 주고 있다.  즉 펠라기우스는 여기서 말하는 "사망"은 몸의 사망이 아니며, 아담이 범죄함을 인해서 초래하였던 그러한 사망이 아니라 실제적인 죄로 인해서 발생되는 영혼의 사망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특히 더욱 문제가 된 것은 이들은 이 실제적인 죄가 첫사람으로부터 자연적인 유전에 의해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모방"에 의한 것이라 주장했던 부분이다.61)

 

  이런 주장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사도의 말을 통해서 그 뜻은 사도께서 죄와 사망을 한꺼번에 말씀하실 때에 자연적인 유전에 의하여 모든 사람에게 죄가 전달되었다고 말하면서 죄와 사망을 들여온 소개자는 "인류의 증식"을 맨 처음에 시작한 사람인 아담이었다고 확증해 주고 있다.62)

  여기서 우리는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구분해야 할 것이다.  즉 펠라기우스도 죄를 말하고 있지만 그 죄의 성격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제시해 가고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다른지를 정확히 구별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먼저 어거스틴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라는 말씀에서 말하는 죄는 "생식에 의한 증식"을 말하는 것이었으며, 펠라기우스는 이것을 "모방"으로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원죄의 문제를 묻는 중요한 물음이기도 하였다.  즉 원죄는 아담의 후손들에게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본성의 잘못과 타락에 기인하지 않고 아담을 따라서 "모방했기" 때문에 생겼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원죄의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서 "증식되어 전달된 것(propagatio, propagation)"이라고 확증했던 것이다.63)

 그리고 어거스틴은 이들의 잘못된 모순을 지적하기 위해서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5:18)라는 말씀을 들어서 "아담으로 말미암아서 사람이 죄인 되는 것이 오로지 모방에 의한 것이라면 왜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방함으로써 의인이 되지 못하는 것인가?"64)

 

 라고 반문하여 그들의 논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지적하기도 했다.

  이제 세 번째로 제시되었던 부분은 유아세례에 관한 부분인데, 세례의 문제에 있어서도 어거스틴은 이들이 출생으로 말미암아서 모든 사람에게 그와 같은 원죄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갓 태어난 유아들이 세례를 통해서 원죄가 사면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지적해 주고 있다.  즉 이들은 갓 태어난 유아는 아담으로부터 내려온 죄의 유전 때문에서 가 아니라 그들이 생활 가운데서 스스로 범한 죄를 사면받기 위해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또한 갓 태어난 유아들은 죄의 사면을 위해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출산이 영적인 것이 아니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기 위해서, 하늘나라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자가 되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속자가 되기 위해서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펠라기우스의 교묘함은 이들의 언어 표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즉 이들은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죄의 사면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 받는 것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죄의 사면을 위해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표현을 바꾸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담에 의한 죄가 아니라 유아들이 스스로 범죄한 것으로 제한하는 방식으로 제시한 것이기 때문에 어거스틴의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원죄와 씨름하다가 급기야 이들은 "영혼은 선재적인 천상적 거주처에서 죄를 지음으로써 각 단계와 계층을 따라서 자신들의 죄상에 맞는 육체적인 몸을 지니게 되었으며, 선재적 삶에 대한 처벌로서 정도에 따라 신체적인 고통을 겪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던 것이다.65)

 

  이와 같은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라는 말씀을 통해서 유아도 동일하게 죄에 구원받기 위해서 세례를 필요로 하는 것임을 증거하였다.  즉 세례는 반드시 구원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성경의 증거라고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서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3:21)66)

 

.  결국 유아들도 죄에 대한 사함을 받지 않으면 어둠 속에 머물 수밖에 없음을 증거 했던 것이다. 즉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라는 말씀처럼 유아들도 원죄를 소유하였던 것이며 이 원죄를 사면받기 위해서 세례를 필요로 했음을 어거스틴은 증거 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죄에 대한 교리적 체계를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먼저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원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표현을 바꾸어 인정하는 듯하는 내용도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즉 아담은 창조때부터 숙명적인 존재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제시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선:善)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전7:29)라고 주장하는 아담의 선한 창조를 주장하는 어거스틴과 명백하게 반대되는 내용이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어 창조 이전의 선재적(先在的)인 삶의 처벌로 인한 창조까지 주장한다. 

 

 

  이렇게 아담의 첫 창조를 악한 창조로 소개한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죽음이 죄에 의한 처벌이 아니라 이것은 숙명적인 것이기에 육체적인 죽음과 영혼의 죽음으로 구분을 한다.  그리고 이런 아담의 창조와 그 죄의 성격 때문에 당연히 죄의 전가를 당연히 부정하게 되고, 후손들의 죄는 단지 "모방"에 의한 죄라고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다르게 어거스틴은 선한창조를 제시했으며, 이 창조가 아담의 죄로 인해서 타락하고, 부패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죽음의 처벌을 받게 된 것이며, 이 죄의 결과로 "아담 안에"67) 있었던 후손들은 동일하게 원죄를 물려받게 된 것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68)

 

 

 계속적으로 어거스틴은 "공로와 죄의 용서에 관하여, 유아세례에 관하여"(De Peccatorum Meritis et Remissione, et Baptismo Parvulorum/412)의 논문 Ⅲ권에도 펠라기우스의 "바울서신 주석"에서 제시된 원죄의 문제점을 지적해 주고 있다.  즉 펠라기우스는 이 주석을 통해서 원죄를 반대하는 주장을 제시하였기에 이것을 비판하는 내용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먼저 "아담의 죄가 죄를 범하지도 않은 사람까지 손상시켰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의는 그리스도를 믿지도 않은 사람에게도 유익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펠라기우스의 오류를 지적해 주고 있다.

  이런 펠라기우스의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끊임없이 원죄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 반론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주장은 곧 이어서 "만일 세례가 그 옛 죄를 씻어서 없게 해준다면, 세례를 받은 두 분 부모로부터 태어나는 자녀들은 이 죄로부터 벗어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지지도 않은 것을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69)

 

라는 주장으로 이어지면서 갓 태어난 유아에게는 원죄가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펠라기우스의 질문들을 통해서 우리는 왜 인간론에 대한 논쟁 가운데 "유아세례"와 "결혼"에 대한 문제들이 논쟁점으로 제시되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즉 이것은 원죄에 대한 내용이 실제적으로 적용되는 부분에 대한 것이었다.

 

  이런 오류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의는 믿는 자 이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유익이 없는 것임을 증거 하면서, 특히 펠라기우스의 질문들이 원죄를 희석시키려는 질문들임을 깨닫고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라는 성경말씀을 근거로 예수님께서는 갓 태어난 유아들에게 있어서도 역시 구원자이심을 증거하고, 그러므로 유아들도 원죄의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증거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원죄의 고백은 정통교회가 늘 간직해 왔던 교리임을 더불어 언급해 주고 있기도 하다.70)

 

  즉 키프리안이나 또한 제롬 등의 증언을 빌어서 반격했던 것이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이런 반격을 받을 때마다 "갓 태어난 유아는 죄의 사면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별되기 위해서 세례를 받는다"라고 하면서 의미를 계속적으로 가리우려고 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즉 한 논의에서 또 다른 논의를 계속적으로 던지면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려고 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한 가지 더 살펴보아야 할 논문은 "그리스도의 은총에 관하여, 그리고 원죄에 관하여"(De Gratia Christi, et de Peccato, contra Pelagium/418)라는 논문이다. 본 논문에서도 펠라기우스주의의 죄(罪)관이 더욱 깊이 있고 또한 폭넓게 잘 지적되고 있다.  특히 우리가 본 논문에서 깊이 주의해야 하는 부분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단순하게 원죄를 부정하는 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교묘하고 또한 모호하게 자신들의 입장을 전개시켜 나가기 때문에 이들의 죄관에 대한 논쟁점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구별해 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죄의 전달과 이로 인한 세례의 문제를 다룰 때나 또는 죄와 은총의 성격을 다룰 때는 전혀 다른 의미로 자신들의 입장을 전개시켜 나간다.

 

  이처럼 본 논문에서 펠라기우스가 어거스틴과 계속되는 논쟁을 통해서 자신의 입장을 어떻게 바꾸어 나갔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거스틴의 지적을 따라서 펠라기우스주의가 가지고 있는 죄(罪)론이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정확하게 정립하므로 펠라기우스의 죄관이 마치 정통교회의 죄관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막아야 할 것이다.

  먼저 펠라기우스의 제자인 카일레스티우스는 아담의 죄가 오로지 아담에게만 손상을 입혔을 뿐, 인류 전체는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갓 태어난 유아는 출생시에 아담의 범죄 이전의 상태와 동일하다라고 증거 하면서 결국 원죄는 단 하나의 갓 태어난 유아라도 붙들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원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다.71)

 

  이와 같은 입장은 매우 모호하다 즉 한편으로는 죄 자체도 "모방"이란 말로 원죄의 의미를 희석시키고 또한 죄의 전달과 영향에 있어서도 이처럼 전혀 다른 의미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이들은 유아의 세례를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원죄의 유전을 부인하면서 갓 태어난 아이들은 타락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음을 계속 주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을 전체적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72)

 

 

① 아담은 숙명적인 인간으로 피조되었기 때문에 범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죽었을 것이다.

② 아담의 범죄는 그 자신만 손상시켰을 뿐이며, 인류 전체를 손상시키지는 않았다.

③ 갓 태어난 유아는 아담의 범죄 이전의 상태와 같다

④ 인류는 아담 안에서 죽지 않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지도 않는다.

⑤ 율법도 복음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하늘나라로 이끌어 준다.

⑥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에도 죄없는 사람이 있었다.

 

  이와 같이 정리된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펠라기우스주의의 죄관의 특성을 좀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이들의 가장 기초적인 신학적 뿌리는 앞부분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무(無)율법주의에 대한 반대로 인간의 책임을 확립하고 강조하려는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론과 관계된 모든 내용 속에서 끊임없이 인간의 자율적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의지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시켜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펠라기우스의 죄관에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임을 기억해야 한다.73)

 

 이것을 발견하면 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그렇게 많고 다양한 죄관의 내용들을 전개시켜 나가려고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 이전에 대한 죄의 문제나, 그리고 창조시의 인간의 상태나 또한 그 후의 죄의 전달에 대한 문제나, 또한 그 죄의 상태에 회복하는 과정에 대한 문제로 세례에 대한 문제 등 모두가 완전한 자유의지를 확립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어거스틴은 본 논문에서 펠라기우스와 카일레스티우스가 주장하는 원죄의 성격을 핵심적으로 밝혀 주고 있는데 특히 이들의 원죄에 대한 주장이 동일함을 다음과 같이 지적해 주고 있다.

     나는 약속한 대로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펠라기우스가 실제에 있어서는 카일레스티우스와 동일한 견해를 고수하고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본다. 

 

그는 "우리가 칭찬을 받을 수도 있고 또한 비난받을 수도 있는 선한 것과 악한 것은 우리와 함께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의해서 행하여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온전하게 성장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 가운데서 어느 것 하나를 행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덕스럽지 못하게 피조되지만 동시에 악하게도 태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들의 정상적인 의지가 행동을 취하기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그것만이 사람 안에 남아 있는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악이 사람과 함께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잘못이 없이 태어난다면, 그리고 사람의 의지가 활동하기 이전에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만이 사람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74)

 

   그리고 이런 주장을 기초로 해서 어거스틴은 더욱 중요한 면을 지적해 주고 있다.  즉 이들의 주장이 매우 교묘하고 모호하여 자칫하면 정통교리처럼 이해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에 있어서 핵심적인 오류의 내용을 어떻게 구별해야 할 것인지를 집중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먼저 어거스틴은 논쟁에 있어서 펠라기우스의 주장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다음과 같이 정립해 주고 있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부인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과 무관한 하늘나라를 약속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에 대한 진정한 반대는 세례를 받지 않은 유아가 첫 사람의 정죄를 받을 수 있으며, 또한 원죄가 유아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오로지 중생에 의해서 깨끗게 될 수 있다고 고백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유아들은 세례를 받아야만 영원한 사망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례를 필히 받고 주님의 피와 살에 참여함으로써 영생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75)

 

  이런 어거스틴의 지적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원죄(原罪)론과 관련해서 핵심적으로 고백해야 할 내용은 피해 가고 오히려 부수적인 부분은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교묘함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증거해 주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명백하게 밝히지 않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들도 갓 태어난 유아가 세례를 받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논쟁의 쟁점이 아니다.  우리는 갓 태어난 유아의 원죄의 소멸에 관해서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는 갓 태어난 유아에게는 중생의 물로써 깨끗하게 할 어떤 것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76)

 

  이들은 이처럼 자신의 주장에 교묘하게 가리우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마치 이들도 우리와 동일한 입장에 서 있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외에도 이들의 모호함은 구원에 해당되는 부분에서도 역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있다.  "그가 말하는 구속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악으로부터 선으로 가는 것인지? 아니면 선으로부터 더욱 좋아지는 개선을 말하는 것인지? 심지어 카일레스티우스까지도 카르타고에서 갓 태어난 유아의 구속을 인정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의 범죄가 유아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77)

 

 이처럼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교묘하고 또한 모호한지를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펠라기우스는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내용과 그리고 그 죄와 부패의 성격, 그리고 죄에 의한 결과들, 또한 구원과 현실적인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완전하고 충족한 자유의지를 정립하게 위해서 자신의 논의를 계속적으로 전개시켜 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이런 과정 가운데서 결혼과 유아세례에 대한 문제도 논의로 또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즉 펠라기우스는 원죄를 주장하게 되면 결혼의 가치와 거룩함이 손상을 받고 더렵힌자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답변해 주고 있다.

 

 따라서 갓 태어난 유아는 죄지을 능력을 가지지 못하였다고 할지라도 죄의 오염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결혼의 합법성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결혼의 꼴사나운 부적절함에 기인한다. 합법적인 것으로부터는 본성이 태어나고,꼴사나운 부적절함으로부터는 죄가 태어난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본성의 장본인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혼인 예법에 의해서 남성과 여성을 하나로 연합시키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죄의 장본인은 사람을 속인 마귀의 교묘함이며 여기에 동의한 인간의 의지이다.78)

 

   이와 같은 어거스틴의 답변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 타락은 중생의 물로써 온전하게 씻기울 때까지는 중생한 사람의 육적인 몸안에 남아 있을 것이며,  그리고 중생한 사람은 다시금 중생할 필요가 없으나, 그럼에도 육체에 따라서 자녀를 생산하게 되며, 그 후손들에게 중생한 상태가 아니라 출생한 상태를 물려주게 된다고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불신앙으로 인해서 죄책을 느끼든지 혹은 완전한 신앙이든지를 막론하고 다같이 신실한 자녀가 아니라 죄인을 낳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야생의 올리브 씨앗이나 재배된 올리브 씨앗이나를 막론하고 다같이 재배된 씨앗이 아니라 야생의 씨앗을 생산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와 같이 사람의 첫 번째 출생은 오로지 두 번째 출생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는 그런 속박상태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결혼의 거룩함이 손상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보존된다고 지적해 주고 있다.79)

 

  결국 지금까지의 논쟁점을 통해서 우리는 어거스틴의 지적처럼 펠라기우스가 단순히 원죄에 대한 문제점를 가장 중요한 점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의 자리를 확립하려고 했던 것이 그의 가장 중요한 논점이었음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즉 그는 "자유의지"의 자리를 확립하기 위해서 어떤 때는 원죄를 부정하기도 하고 또한 말을 바꾸어 원죄를 인정하듯이 표현하기도 했던 것이다.  즉 문제는 "자유의지"가 그에게 있어서는 더욱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펠라기우스의 비(非)성경적인 죄관으로 오늘날까지 교회가 죄론에 있어서 큰 혼란을 겪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즉 오늘날 더 이상 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분위기로 전락한 것이다.  결국 이런 분위기는 회개에 대한 언급이 점점 사라지고 오직, '상처', '연약함', '치유', '회복' 등과 같이 죄의 개념을 흐리게 하는 표현들만 난무하게 된 것이다.  즉 어느 곳 하나 그것을 분명히 '죄'라고 지적해 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피상적인 회개와 그리고 단순히 윤리적인 회개의 수준으로 전락한 죄의 개념을 우리는 깊이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2. 본성과 은총에 관하여(De Natura et Gratia, contra Pelagium)

   다음으로 논쟁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내용은 "의지 와 은총"에 대한 부분이다.  즉 지금까지 죄에 대한 의미가 무엇이고 또한 그 성격이 무엇인지가 제시되었다.  특히 펠라기우스는 죄에 대한 의미를 전개시켜 갈 때에도 위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완전하고 충족한 자유의지"를 세워가는 것이 최종 목적이었기 때문에 이제는 자연적으로 이 의지의 성격에 대한 부분이 논쟁의 중심 내용으로 전개되는 것을 보게 된다.  즉 완전하고 충족한 자유의지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죄(罪)에 대한 이해가 가장 기초적인 이해로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지금까지 죄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펠라기우스가  인간의 본성에 자리잡고 있는 "의지"를 어떤 의미로 주장하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완전하고 충족한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와 반대로 인간의 의지라는 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존재하고 활동하는 것임을 어거스틴을 통해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먼저 "의지"에 대한 부분은 "공로와 죄의 용서에 관하여, 유아세례에 관하여"(De Peccatorum Meritis et Remissione, et Baptismo Parvulorum/412)라는 논문에서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다.  즉 이 논문의 Ⅱ권에서 어거스틴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서도 죄없이 살았던 사람이 있으며, 있었으며, 있을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해서 반론을 펴면서 이 의지의 성격에 대해서 성경적인 의미를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의지와 의지의 한계성에 대한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4가지의 명제를 세우고 이것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해 가고 있다.  첫 번째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사람이 이 세상에서 전혀 죄가 없는 무죄한 상태를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를 묻는다.  여기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나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람의 자유의지를 들어서 이러한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의지 그 자체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즉 하나님의 선물로 돌릴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유의지 그 자체의 존재뿐만 아니라 그 자체의 선함에 있어서까지,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의 계명을 수행하도록 사용되어질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80)

라고 매우 긍정적으로 답변한다.

 

  그런데 이런 어거스틴의 답변은 펠라기우스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자유의지의 성격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즉 어거스틴은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6)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를 깊이 고려하면서 "이상 열거한 말씀들과 여타의 유사한 말씀들로부터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실행 불가능한 계명을 주시지 않으셨음을 확신할 수 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원조를 받아서81)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무엇을 막론하고 불가능하지 않음을 확신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사람은 원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죄없이 될 수도 있다"라고 답변해 주고 있다.  즉 어거스틴은 성경 자체에서 증거하고 있는 그 자체를 존중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즉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기 위한 목적 때문에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사실을 감추거나 축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가 성경 전체의 체계 속에서 어떤 의미로 제시되고 있는 것인지를 정립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논의를 이끌어 갔던 것이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의 논의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자의적인 의지로서 불가능한 그러한 것들을 행하도록 명령하지도 않으실 것이다"82)

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경의 단편적인 면만을 주장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 명제로 어거스틴은 "일찍이 이와 같이 죄없는 상태를 성취한 사람이 있었으며, 혹을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야 옳은 가?"라고 묻고서는 성경의 증언에 기초해서 부정적으로 답변해 주고 있다.  즉 어거스틴은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143:2),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1:8)라는 말씀에 입각해서 인간이 죄없는 상태를 성취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배격하고 있다.83)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첫째 주장과 두 번째 주장은 모순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첫째 주장을 어거스틴이 긍정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와 은총의 위대성을 성경이 명백하게 증거하기 때문에 이것을 드러낸 것이며, 두 번째 주장에서는 인간의 실제적인 형편을 다만 성경의 증언대로 증거한 뿐이다.  이런 논증을 통해서 우리는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의지와 영광을 아주 세밀하게 살펴서 어느 한 부분에서도 결코 가리우려고 하지 않았던 경건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즉 "의지"대한 내용을 무조건 반대한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처음에 주신 의지와 그리고 타락한 후의 의지와 또한 중생된 후의 의지를 깊이 있게 드러내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렇게 답변하고 난 어거스틴은 세 번째로 인간의 의지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죄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하는데, 왜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가? 라는 명제에 대해서 답하시기 시작한다.  즉 그것은 사람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죄를 짓지도 않았으며 또한 지을 것 같지도 않은 사람이, 사람의 아들로서 지금 살고 있지는 않으나 일찍이 언젠가 존재했었으며, 혹은 언젠가 시간이 오면 존재하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하신 중보자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그와 같은 사람은 지금 살고 있지도 않으며, 과거에 살지도 않았으며, 앞으로 도 살 수 없다고 못박고 있다.84)

 

  이처럼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가 인간이 죄의 문제를 자신의 "의지"로 자유롭게 처신 할 수 있음을 주장하면서 "자유의지"를 세우려고 했던 것에 대해서 철저하게 성경적인 증거에 입각해서 배격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다음으로 제시되는 것은 "영과 의문에 관하여"(De Spiritu et Littera/412)라는 논문을 살펴볼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앞의 논문에서 제기했던 완벽한 의를 지니고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일찍이 없었으며 또한 없을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죄없이 살 수 있다고 선언한 것에 마르켈리누스는 일찍이 선례가 없었으며 또한 지금도 없는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느냐? 라는 질문으로 재질문을 하였고, 여기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3:6)라는 말씀을 가지고 은총의 성격에 대한 총체적인 내용을 제시해 주고 있다. 

 

특히 여기서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주의의 뿌리를 좀더 깊이 있게 드러내었다.  즉 펠라기우스의 가장 위험한 교리적 성격을 원죄와 인간적 의의 불완전성과 은총의 필요성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지적해 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앞 부분에서도 소개한 것처럼 어거스틴이 성경에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그 어느 부분도 결코 축소하거나 삭제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성경에서 증거하는 그 자체로 제시하려고 했던 놀라운 경건의 정신을 다시 한 번 발견하게 된다.  즉 워필드도 이 부분을 매우 놀랍게 다음과 같이 지적해 주고 있다.

    

 어거스틴은 마르켈리누스에게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대전제에 입각해서, 마치 낙타가 바늘 구명으로 들어가는 것까지도, 결코 일어난 일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가능한 것처럼, 무죄한 삶의 실제성은 부인하면서도 그 가능성은 긍정한다고 밝혔다. 인간의 완성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도구적으로 사용하시고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심으로써 이루시기 때문에 참으로 하나님의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은 참으로 우리들에게 죄없이 살았던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다만 사실을 선언적으로 언급한 것이다.85)

 

   우선 어거스틴은 이와 같은 의문을 제시하는 마르켈리누스에게 "너는 비로소 이 위대한 일이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인간들의 역량에 의해서 성취되어질 가능성을 가졌음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의심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는 말로 글을 시작하고 있다.  이 말은 어거스틴의 답변에는 마르켈리누스가 질문한 것이 모순된 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에서 이와 같은 구조로 우리에게 답변하고 있음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즉 두 가지가 어떻게 조화롭게 소개될 수 있는지를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어거스틴은 사람이 죄없이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성경의 사실에 위배되는 것이지만 이 주장 자체로 인해서 이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즉 용서될 수 있는 오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도저히 용서될 수 없는 오류는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않고서 이러한 완성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주장인 것이다.  이런 주장은 하나님의 은총을 배격하는 것이며, 이것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일을 인간의 능력 안에 포함시키는 행위라고 지적하고 있다.  결국 펠라기우스가 가지고 있는 오류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어거스틴이 무엇을 더욱 중점으로 논쟁을 삼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펠라기우스의 단편적인 오류만을 보게되고 그러므로 인해서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펠라기우스의 오류의 핵심은 결국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선물을 완벽한 자유의지 안에 국한시키는 방식으로 도우심을 이해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처음 주신 완전한 자유의지의 충분성이 바로 도우심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의지는 더 이상 도우심을 받을 필요가 없이 활동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주장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인간들에게 무엇을 추구할 것이며 무엇을 피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계명과 율법 안에 국한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도우심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하는 주장까지도 언급하게 되었다.  즉 자유의지의 충분성은 결국 계명과 율법을 충분히 행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을 겉으로는 인정하고 있는 듯 했으나 그것을 실제적으로 적용하고 이해하는 방식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즉 은총이 필요없는 형태로 은총의 내용을 주장했던 것이다.86)

 

 이런 은총은 결국 진정한 은총이 될 수 없는 것임을 어거스틴은 지적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가 교묘하게 완전한 자유의지를 주장하므로 은총의 내용을 가리우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  즉 자유의지조차도 선물임을 증거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는 참으로 진리의 길을 알지 못한다면 죄를 짓는 것 이외에는 별로 유용되지 못하는 것임을 지적하면서 성령의 은총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즉 율법과 영의 조화를 고후3:6에 근거해서 성령의 은총이 없는 율법 자체는 결코 죄를 없이 할 수 없고 오히려 죄를 드러내기만 할 뿐임을 지적해 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이와 같은 원리에 따라서 "행위의 법에 의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에게 명령한 것을 행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믿음의 법에 의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께서 명령하신 것을 주시옵소서라고 말한다"라고 증거하고 있다87)

 

  이 말은 의지는 은총에 의해서 자유를 얻게 될 때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즉 은총으로 인해서 자유의지가 무효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지를 세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원리를 어거스틴은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라는 말씀에서 이끌어 내고 있다.88)

 계속해서 어거스틴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방식을 "우리는 자유의지로써 지은 죄를 하나님에게 떠넘기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또한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89)

고 물으시는 구절에서 보여 주듯이, 우리가 믿게 되는 의지 자체가 창조의 시점에서 받은 것임을 감안해서 그것도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이와 같이 의지와 은총의 놀라운 관계의 내용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라는 말씀에 잘 제시되고 있음도 언급해 주고 있다.  즉 영혼이 받은 것은 무엇인든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그러면서도 받는 행위와 소유하는 행위는 또한 받는 자와 소유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다.90)

 

 이처럼 겉으로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결코 모순되지 않는 은총과 의지의 성격이 성경에서 증거해 주시는 참된 인간론의 특성임을 정립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신비는 결코 호기심을 다가서서는 알 수 없으며 오히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라는 고백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임을 지적해 주고 있다.

  이처럼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창조시의 의지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에 있어서부터 서로 명백하게 구별되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즉 펠라기우스는 창조시부터 "완전하고 충족한 자유의지"를 주신 것으로 생각하고 이것을 은총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비록 펠라기우스와 비슷하게 창조시에 선(善)과 악(惡)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의지"를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자유의지조차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으로 끊임없이 은혜를 입어야 하는 그런 성격의 자유의지라고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자유의지 자체가 선물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다음으로 이어지는 "본성과 은총에 관하여"(De Natura et Gratia, contra Pelagium/415)라는 논문에서 우리는 의지와 은총의 성격을 좀더 명확하게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본 논문에서 어거스틴은 앞 논문에서 논의되었던 내용을 계속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펠라기우스는 무엇보다도 죄의 질책을 받을 때에 인간적 본성의 연약성을 탓함으로써 도피하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반대해서 오히려 본성의 완전성을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펠라기우스의 입장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우리의 본성이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악으로 인해서 타락하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께 징벌을 받기에 이르렀으며, 그래서 더욱 은총을 필요로 하게 되었음을 증거해 주고 있다.  즉 타락으로 인해서 그나마 가지고 있었던 자유의지가 부패하고 변질되어 이제는 죄밖에 지을 수 없는 "노예의지"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제는 더욱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게 되었다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어거스틴은 은총의 총체적인 개념을 정립해 주면서 인간론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제시해 주고 있다.

 

  우리는 본 논문을 접하게 될 때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이 매우 세밀하게 진행되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펠라기우스는 표현과 주제를 동일하게 사용하면서 전혀 다른 의미를 부가시키고 있고, 또한 더 나아가서 상이한 표현 사이에서도 또다른 구분을 제시해서 논쟁의 내용이 매우 포괄적인 형태로 제시되어 무엇이 초점인지 알 수 없도록 하는 것을 보게 된다.  특히 펠라기우스는 자신이 말한 부분에 대해서도 스스로 그 이미를 번복하고 전혀 다른 의미로 제시하기도 했기 때문에 펠라기우스가 말하고자 하는 논점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우선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죄없이 살 수 있는 '가능성'과 '현실성'을 교묘하게 구분하면서 그는 성경의 많은 의인들이 죄로부터 자유로웠다고 주장하면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인간에게 본래적으로 주어져 있었던 것이며, 바로 이와 같은 본래적인 가능성을 심어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가능성이 은총이라고 주장한다.91)

 

  이런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정리해 보면 어거스틴이 지적한 대로 인간이 죄없을 수 있다는 사실보다는 죄없을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더욱 관심을 가져야 함을 알 수 있다.  즉 이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있다고 펠라기우스가 주장한 반면에 어거스틴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분을 통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않으면"92)

 

 어느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고 부인하였다.  이렇게 볼 때에 논쟁의 전체적인 핵심은 은총에 관한 것으로서 펠라기우스는 은총의 진정한 의미를 인정하지 않은 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본성 안에 머무르게만  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어거스틴이 말하는 은총이란 우리 인간들의 공로가 철저하게 배제되어야만 진정한 의미의 은총이 정립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본 논문에서는 은총과 자유의지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일에 있어서 우리 인간들은 물론 분명하게 일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활동이 언제든지 인간들의 활동보다 선행적(先行的)이므로 하나님과 더불어서 동역자로 일할 뿐이다.93)

 하나님은 언제든지 인간보다도 선행적으로 활동함으로써 인간이 치료받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치료의 과정에 있어서 인간을 또한 뒤따라오심으로써 인간들이 치료를 받고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랄 수 있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부름을 받도록 선행적으로 일하시지만, 인간들은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므로 또한 인간들을 뒤따라오심으로써 인간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게 하신다. 보라 성경에서는 이상의 두 가지 활동을 다같이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한다. 성경에는 이상의 두 가지가 다같이 있다.  즉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94)

 

라고 하였으며, 또다시 "나의 평생에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95)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논리적인 증거를 제시함으로써 찬양을 돌리려 하지말고 고백으로써 우리들의 삶을 밝히 드러내 보이도록 하자.96)

 

 

  위의 지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비록 인간의 자유의지가 마치 인간의 모든 활동을 이루어 가는 것처럼 보여져도 그 인간의 활동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그것이 우리의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즉 인간의 의지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아래서 다스려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본성의 완전한 자유의지를 은총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율법과 계명을 주신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보았다. 즉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과 의문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살펴볼 수 있었던 것처럼 성령의 은혜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이 없이도 율법을 주신 그 자체가 충분한 은총이기 때문에 은총을 전혀 다른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또한 카일레스티우스가 "율법도 복음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하늘나라로 이끌어 준다"라고 주장한 것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처럼 이들은 본성의 완전한 자유의지의 충분성을 증거하므로 결국에는 고대의 성도들이(구약)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받는 신앙의 원리를 완전히 제거하기에 이르기도 한다.  이런 오류를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지적해 주고 있다.

 

 이들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본성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살았었으나, 그 다음으로 율법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세 번째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살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까지는 창조주를 이성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나 인간의 태도가 부패하게 되었으며, 그 때에 본성이 녹슬어서 불충분하게 되었을 때에 율법이 이를 도왔는데, 이것은 자연이 달빛으로 말미암아 붉은 빛을 회복함으로써 본래적인 윤기를 되찾은 것과 같다.  그러나 사람들이 죄짓는 습관에 너무나도 깊숙이 물들어 버리고, 또한 율법이 이러한 습관을 치유하기에 불충분하게 되자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라고 말한다.97)

 

   결국 이들은 신구약의 통일성을 깨뜨리는 선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어거스틴은 고대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은총을 빼앗는 것은 성경 전체를 파괴하는 행위임을 지적해 주고 있다.  그리고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2)라는 말씀을 근거로 고대의 성도들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을 얻는 것임을 증거해 주고 있다.  특히 펠라기우스가 그리스도께서 아직 성육신 전이었기 때문에 율법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심판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리스도의 심판은 그들과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된 것이냐?"라고 반문하고 있다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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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오늘날 우리도 역시 심판 전이기 때문에 그리스의 심판과는 상관이 없이 산다라는 오류를 지적해 준 것이다.  계속해서 어거스틴은 구약이나 신약 모두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을 얻는 것임을 다음과 같이 증거해 주고 있다.  "우리가 아직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은 그리스도의 심판이 결국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써 심판날에 그리스도의 우편에 서려 한다면 그 옛날의 성도들도 그 당시에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장래적으로 어느 날엔가는 이루어지게 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지체에 속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99)

 그리고 다음과 같은 어거스틴의 신구약 이해는 은총의 통일성을 정립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이다"(시116:10) 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믿음에 의해서 깨끗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도께서는 "기록한바 내가 믿는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고후4:13)고 하였다.  이와 동일한 믿음으로부터 그분에 관해서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시45:6-7)라고 하였다. 이와 동일한 신앙의 영에 의해서 이상의 모든 사항이 일어날 것을 미리 보았으며, 그들은 이러한 일들이 우리들에게 일어날 것을 믿었다. 그들은 참으로 이러한 사건들에 참여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앙 안에서 예언하기를 즐거워하였다. -- 그러므로 나타났다면 그 당시에 존재하였으나 숨겨져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숨겨짐은 성전의 휘장으로써 상징적으로 말하였다. 그러므로 그 옛날에도 사람들 사이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한 분 중보이시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존재하였다.100)

 

 

  지금까지 살펴본 펠라기우스의 은총관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그는 창조시 완전한 자유의지를 주셨고, 이것으로 모든 것은 충분하다고 한다.  즉 한 번 주신 이 자유의지는 그 어떤 것으로도 소멸되거나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은총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율법과 교훈과 명령 그 자체를 주신 것이 은총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완전한 자유의지가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에 율법과 교훈과 명령들을 완전하게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의롭게 될 수 있도록 율법을 주신 그것이 은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셋째는 은총은 값없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의 선택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 즉 인간의 공로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은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어거스틴의 지적처럼101)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은 과거의 죄만 사면을 받는 것이지 미래의 죄를 사면 받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펠라기우스주의의 은총관은 어거스틴의 은총관과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부분은 펠라기우스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들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행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계명을 주셨을 리가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어거스틴의 대답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은 이것을 설명하면서 은총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더욱 깊이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102)

고 말씀하신 데 대해서 우리가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돌이키소서"103)

라고 말하고, 또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키소서"104)

라고 말하고, 또한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라고 증거한다.

 

  즉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기를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생각하라"105)

고 말씀하신 데 대해서 우리가 "나로 깨닫게 하사 주의 계명을 배우게 하소서"106)

라고 말하며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그것을 주시옵소서"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태도임을 지적해 준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기를 "네 정욕을 따라가지 말라"고 명령하신 데 대해서 우리가 "그러나 지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다르게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나이다"107)

라고 말하며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그것을 주시옵소서"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 그 무엇을 말하겠는가? 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너희는 의를 행하라"108)

고 명령하실 때에 우리는 "주의 규례로 나를 가르치소서"109)

라고 말하며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그것을 주시옵소서"라고 말하는 것 외에 또 무엇을 말하겠는가? 라고 말하며,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주님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 배부를 것임이요"110)

라고 말씀하실 때에 우리는 의의 음식과 음료를 구해야 하지 않겠으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배부르게 먹여 주시는 바로 그분에게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증거하고 있다.111)

 

  이처럼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은 명령을 주신 것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이 없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임을 증거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사람도 명령하신 것을 이행할 수 없음을 아시면 서도 모든 사람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명령하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누구든지 불경건하게 그리고 경멸적으로 하나님의 훈계를 멸시하는 자들이 있을 경우에 그들의 정죄에 합당한 일을 행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훈계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이행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이행하지 못하였을 경우에, 스스로 용서함을 받기 바라는 심정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을 씻어 주시는 선한 일을 하신다라고 어거스틴은 증거해 주고 있다.  즉 죄가 없으면 하나님의 자비로운 용서가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죄가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로 말미암은 금기 조치가 실패할 수 없음을 증거하시기 위함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처럼 어거스틴이 드러내고자 했던 은총은 명령하신 것을 주시는 은총이며, 또한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친히 명령하시는 그런 은총을 말했던 것이다.  즉 인간의 의지를 사용하시고 또한 그 의지가 묵살되거나 제거되지 않고 확립되어지도록 하신다 할지라도 이 의지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아래 있는 의지인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이루시는 그런 은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이와 같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라는 말씀을 통해서 증거했으며, 또한 명령하시고 그 명령을 이루기 위하여 친히 뒤따라서 오셔서 그 명령을 이루시는 은총의 성격을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라는 말씀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즉 이것이 참된 은총의 성격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어거스틴의 지적을 통해서 무죄한 삶의 가능성 등과 같은 것이 문제점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없이 살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이 가장 심각한 문제점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즉 이것을 거부하게 됨으로 인간은 죄의 근본적인 성격인, 하나님과 같이 되려하고, 또한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의 힘으로 살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본질적인 죄악의 내용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정신은 하나님의 자리와 그분의 뜻을 모두 거역하고자 하는 엄청난 죄악의 내용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가장 중요한 논쟁점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도 '죄'에 대한 논쟁에서 출발하여 결국에는 '은총'에 대한 내용으로 논쟁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성격을 흐리게 하거나 가리우는 것이 가장 무서운 죄의 성격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런 논쟁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은총'의 내용이 은총 그대로 남아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04문에서 "제 일 계명이 요구하는 의무는 하나님께서 홀로 참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알고 인정하며, 따라서 그만을 생각하고, 명상하며, 기억하고, 높이고, 존경하고, 경배하며, 택하고, 사랑하고, 원하고, 경외함으로 그를 예배하고, 영화롭게 하고, 그를 믿고, 의지하며, 바라고,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그를 위한 열심을 가지며, 그를 부르며, 모든 찬송과 감사를 드리고, 전인격적으로 그에게 완전히 순종하고, 복종하며, 그를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범사에 조심하고, 무슨 일에든지 그를 노엽게 하였으면 그것을 슬퍼하며, 그와 겸손히 동행하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먹고살며, 그분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신앙의 근본정신이 보존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어거스틴은 자신의 논쟁에서 이것을 인간론의 가장 궁극점이 목적임을 정립해 주고자 했던 것이다.

 

3. 은총과 자유의지에 관하여(De Gratia et Libero Arbitrio)

   우리는 본 논문을 통해서 은총과 의지의 관계성에 대한 신비하고 오묘한 진리의 내용을 소개받게 될 것이다.  즉 위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의지는 펠라기우스가 말한 것처럼 현재 완전하고 충족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아래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제 논쟁은 3번째의 중요한 주제로 옮겨가게 된다.  즉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이 말한 의지와 은총의 성격에 계속의 반문을 했고, 이 반문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반문으로는 은총만을 강조하게 된다면 의지는 그 자리를 잃게 되고 또한 의지가 없다면 인간을 만드시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이 가리워진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처럼 펠라기우스는 의지가 은총의 다스림 아래에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럼으로 의지와 은총이 어떤 방식으로 조화롭게 활동하는 것에 계속 반문을 던졌던 것이다.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실제적으로 의지와 은총이 어떻게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 가는 것인지를 성경의 증거를 따라 증명해 가기 시작한다.  즉 어거스틴은 은총을 너무나도 옹호한 나머지 자유의지를 제거시켜 버릴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되며, 반대로 자유의지를 지나치게 옹호한 나머지 우리들의 거만스러운 불경건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릴 정도가 되어서도 안 되는 것임을 제시해 주고 있다.112)

 

  특별히 이 부분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의미들을 제시해 준다.  즉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이 단지 신학적인 논쟁의 성격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정체성을 확립해 주는 아주 중요한 실천적인 문제를 제시하고 있음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또한 판단하고 결정해야 삶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과정을 단 하루도 없이 살아가는 인간은 없는 것이다.  결국 이런 삶의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며 결정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문제인가? 아니면 운명론처럼 아무 목적없이 기계처럼 이끌려져 가는 것이나 또한 신비주의처럼 자신의 의지로는 아무것도 판단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항상 외부의 직접적인 계시와 인도를 통해서만 이끌려져 가는 비(非)인격적 존재인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총 아래서 인격적으로 우리의 의지를 확립하는 방식으로 살아 갈 것인가를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의미인 것이다.  즉 이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가운데서 성실한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배우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우선 "은총과 자유의지에 관하여"(De Gratia et Libero Arbitrio426)라는 논문에 잘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먼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성경 속에서 인간의 의지와 공로만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이루어 가는 것처럼 보여지는 다음의 말씀들을 주로 언급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증거하고 있다고 지적해 주고 있다.113)

 

   (대하15:2) 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대상28:9)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어거스틴은 이들이 이 구절을 주장하면서 인간이 완전한 자유의지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지적해 주고 있다.  즉 이들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데는 우리의 공로가 이미 있었다는 식으로 성경을 해석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식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다는 사실에 우리의 공로가 있으며, 그 다음에 이 공로에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그를 만나 뵙게 하신다고 이들은 생각한다고 지적하고 있다.114)

 

  이 구절을 보게 되면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의지가 앞선 것처럼 보여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성경을 단편적으로 이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다른 구절에 분명히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의 성격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경 전체의 의미를 고려해야만 위 구절의 참된 뜻을 이해할 수 있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주장한 것과는 다른 의미의 성경 구절이 어떻게 제시되고 있는 지를 다음과 같이 밝혀 주고 있다.115)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하기 위하여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라고 했으며, 그 다음에 자기의 자유 의지도 보이기 위해서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고전15:10)라고 첨부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 관해서도, 예컨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고 말한 때와 같이, 사람의 자유의지에 호소합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자기의 의지를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이런 권고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사람의 의지가 선행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경계하기 위해서,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라고 말한 후에, 즉시 이 말을 제한하는 의미로,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라고 첨부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내가 단독으로 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나와 함께 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는 비록 인간의 의지와 공로에 대한 성격으로 제시되는 말씀이 표현되고 있어도 성경 전체의 정신은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은혜의 성격임을 그 기초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은총의 기초 가운데서 인간의 의지를 촉구하는 말씀과 은혜를 강조하는 말씀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 것인가? 를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다.116)

 

      그러므로 영생을 상으로 받는 우리는 선행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다고 해석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같이 내게는 생각됩니다.  주 예수의 말씀에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사도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고 말한 다음에, 사람들이 이 발언을 근거로, 믿는 사람에게는 선행이 필요하지 않고 믿음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으며, 또 사람들이 자기의 힘으로 선행을 할 수 있는 듯이 그 선행을 자랑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양편의 의견에 대처하기 위해서 사도는 즉시 첨부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

 

그러면 여러분은 듣고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그 원인이 있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행위에 대해서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행위 가운데는 우리가 그것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 내신 것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의심할 여지없는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곧 여러분의 선한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에 불과한 것과 같이, 선한 생활에 대한 상으로서의 영생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뿐 아니라, 영생을 상으로 주시는 선행이 거저 주신 것과 같이 영생도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즉 마치 의에 대한 상인 듯이 은혜에 대해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비록 사람의 의지와 공로를 나타내고 있는 말씀도 결국에는 은총임을 증거하고 있다.  즉 그는 처음 것도 하나님의 은총이며, 마지막의 것도 은총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는 "사람의 의지를 상대한 명령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도록 은총이 그를 돕는 것이다"117)

 

,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공로에 면류관을 씌워 주시는 것이고, 그대의 공로에 씌워 주시는 것이 아니다"118)

라는 언급을 통해서 왜 모든 것이 은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즉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라는 말씀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을 주시고 또한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지 않고 성취될 수 있도록 친히 뒤따라 오셔서 자신이 주신 것을 스스로 완성시키시기 때문에 결코 인간의 공로와 의지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정립한 구조에서만이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인간의 의지를 촉구하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공로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면서 동시에 인간이 게을러지지 않도록 우리를 지키시고 계셨던 것이다. 이 두 가지가 함께, 동시에 성도에게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도를 이끌어 가시는 놀라운 신비인 것이다.  이제 어거스틴은 이 주제와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지적을 던지면서 정리를 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인 줄 아시면서 명령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펠라기우스파는 주장하며, 이것을 자기들의 위대한 지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에게 구해야 할 것을 깨닫도록,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명령하십니다.119)

 

   이 의미는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면 서도 마치 인간의 의지와 공로로 무엇을 주시는 것처럼 말씀하셨던 이유는 위에서 제시된 것처럼 인간의 게으름을 제거하시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보다 궁극적으로는 이 요구를 통해서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더욱 깊이 깨닫는 것, 즉 이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을 통해서만 이루어짐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더욱 깊이 의지하며 신뢰하는 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깊은 자비하심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은총에 대한 깊은 신학적 이해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115문에서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고백되어지고 있다.120)

 

제 115문 : 아무도 이 세상에서 십계명을 지킬 수 없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십계명을 지킬 것을 엄히 명령하셨습니까?

답 : 첫째로, 우리가 오래 살면 살수록 우리의 죄성을 깨닫게 되고 우리의 죄성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더욱 더 사죄와 칭의를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마지막에 생이 끝난 다음에 우리 목표인 완전한 순종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점점 더 새롭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의 은총을 간구토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어거스틴은 상급(보상)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면서 이와 같이 의지와 은총 어떻게 신비롭게 조화를 이루는 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먼저 바울의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고후5:17) 라는 말씀을 증거해 준다.  즉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준비 할 수도 없고 다만 "하나님께서 일찍이 우리로 하여금 걷도록 예정하신"그 '선행으로' 조성되고, 형성되고, 또한 창조되었음을 안다는 것이다.  또한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어거스틴의 다음과 같은 증언을 통해서 우리는 보상이 어떻게 은총의 성격을 기초로하고 있는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당신의 선한 생활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말 것이며, 또한 동시에 선한 생활의 보상으로서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도 또한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기를 바란다.  더욱이 그것은 값없이 주어지며, 주어진 모든 것은 빠짐없이 값없이 주어진다.  그러나 주어진 모든 것들이 유일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은총이기 위하여 보상으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이에 대한 보수처럼 은총은 은총에 따라 주어진다. 그리고 이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더욱더 진실되기 위하여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신다.

121)

 

 

   이처럼 어거스틴은 의지와 은총이 얼마나 신비로운 조화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성경의 증언을 통해서 정립해 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의지와 은총이 각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의 은혜 아래에서 자유롭게 확립되어져 가는 그런 아름다운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펠라기우스는 성경에 '은총을 위한 은총'이라는 말씀이 있느냐고 묻는다.  이때 어거스틴은 앞에서도 계속 증거 했던 것처럼 요한복음에서 이 점에 관하여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음을 증거해 준다.  즉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우리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그의 충만한 대로부터 받았으므로, 우리가 겸손한 태도를 갖는다면 우리가 선한 생활을 이끌어 가는 가장 작은 분량의 능력까지도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롬12:3)따를 뿐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기"122)

 라는 말씀처럼 우리 모두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자임을 깨닫게 된다는것이며, 이것이 바로 은총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은총의 다스림 아래 자유롭게 세워져 있는 의지의 관계를 어거스틴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증거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면류관이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란 말인가?  하나님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의지)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라고 기록한 것처럼 선한 사람에게서 선한 일을 이루시기 때문에 시편의 기자는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시103:4)라고 말씀하였으며, 이것은 우리가 면류관을 보상으로 받게 되는 선한 행위를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를 통하여 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행할 수 있는 의지와 행위'를 주시기 때문에 한순간이라도 자유의지가 없어졌다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것이(자유의지가 없는 것) 그가 말하려는 의미였다면 바로 앞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행하라'는 명령이 주어지면 자유의지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여기에 '두려움과 떨림'이 첨가되면 어떠한 선한 일을 마치 스스로 이루는 것처럼 자기에게 돌리는 것을 방지하여 자랑하지 못하게 된다.123)

 

   이처럼 어거스틴은 은총과 의지의 신비로운 조화와 구조를 성경적인 근거에 따라서 정확하게 정립해 주었다.  즉 어거스틴은 은총을 주장했기 때문에 의지를 무시한 형태가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이 어거스틴은 극단적으로 은총만을 주장했기 때문에 반대적으로 펠라기우스가 주장한 의지에 의한 인간의 책임도 정당하게 인정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은 어거스틴의 인간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오류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어거스틴이 제시한 은총과 의지의 신비로운 조화만이 인간의 의지를 묵살시키거나 제거하지 않고 가장 바르게 확립해 주고 세워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는 다음과 같은 어거스틴의 지적처럼 오히려 성경적인 자유의지를 가장 심각하게 헤치며,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의지를 제거시키는 것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자유의지를 참으로 주장하기보다는 단순하게 줌으로써 자유의지 이론을 부풀리는 데 그쳤으며, 이로 인하여 아무런 안정성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땅에 떨어지게 하였다. 하나님의 지식도, 본성도 죄의 단순한 사면까지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이다.  그러나 율법의 완성과 본성의 해방과 죄의 주권을 제거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도 바로 이 은총으로 말미암는다.124)

 

이제 이와 같이 은총과 의지가 신비롭게 조화되어 활동하는 방식을 어거스틴은 회심의 예를 들어서 설명해 주고 있다.  즉 마음의 회심에 있어서 은총과 의지가 어떻게 각각의 모습을 드러내는지를 증거해 주고 있는 것이다.  먼저 어거스틴은 사람들이 자유의지로써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시편의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지니라"(시95:8)라는 말씀과 에스겔의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18:31-32)라는 말씀으로 돌이켜야 할 인간의 책임을 제시해 준다.  즉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돌이켜야 하는 책임있는 자리가 있음을 증거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돌이킴은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80:3)라는 말씀처럼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임을 어거스틴은 지적하고 있다.125)

 

   이처럼 왜 하나님께서 다른 부분에서는 돌이키는 것이 은총이라고 말씀하시며, 또한 다른 부분에서는 이것인 인간의 책임이라고 말씀하시는 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36:26)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만들며'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이 어떻게 "내가 너희에게 준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가? 주시려고 하였다면 왜 명령하시겠는가? 사람이 만들 것인데 하나님께서 왜 주시겠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을 순종하도록 돕기 때문에 명령한 것을 주시는 것이다.  이 은총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전에는 악했을지라도 선한 의지를 지니게 된다.  이 은총으로 말미암아 이제 시작한 그 선한 의지가 확대되어서 커지며, 일찍이 굳은 마음으로 그리고 온전하게 원하였던 그 계명을 원하는 대로 성취하게 된다.126)

 

   이처럼 회심에 있어서 은총과 의지는 신비로운 조화 가운데서 함께 일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도 결국 우리는 이 의지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의 다스림 안에서 자유가 확립되는 방식으로 있는 것이지 결코 '신인협력설'처럼 동등한 입장에서의 일하는 방식은 아닌 것을 명확히 정립해야 할 것이다.  즉 이 은총은 인간의 의지를 제거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악한 대로부터 선한 대로 변화시키고, 또한 인간의 선한 의지를 도와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의 다스림 안에 성도의 의지가 확립되어져 가는 방식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계속적으로 다음과 같이 증거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기록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악한 대로부터 방향을 바꿔 주신 사람의 선한 의지가 선한 행동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줄뿐만 아니라, 세상을 따르는 사람들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얼마든지 돌이키시며, 또한 가장 의로우신 하나님 자신의 가장 비밀스러운 조언에 따라 어떤 사람은 의롭다라고 판단하시고, 어떠한 사람은 처벌을 쌓아 두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127)

 

   이처럼 은총과 의지가 선한 열매를 맺는데 있어서 신비로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도 놀라운 사실이지만 우리가 더욱 놀라게 되는 것은 죄(罪)에 대한 부분에서 더욱 놀라게 된다.  즉 어거스틴은 악인의 의지가 어떻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안에서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나 원인자로 세우지도 않으면서도 어떻게 오직 인간 자신의 책임으로 이해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는 먼저 "악한 사람의 마음속에까지 활동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끌며, 이와 동시에 악한 자들의 행위에 따라 갚으시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어느 누구인들 떨지 않으랴?"128)

라고 증거 하면서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매우 놀라운 신비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어서 어거스틴은 이것의 예로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의 일을 그 예로 소개해 주고 있다.

 

  즉 르호보암이 여로보함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에 대해 노인들의 현명한 조언을 듣지 않고 젊은자들의 악한 조언을 받아들이게 되어 남북이 분열되는 역사를 소개해 주고 있다.129)

 특히 여기서 르호보암 왕이 젊은자들의 악한 조언을 받아들인 것은 분명 르호보암 자신의 악한 의지로 선택한 일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계속해서 이와 같은 인간의 악한 의지를 넘어서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놀랍게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소개해 주고 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고한 말씀을 응하게 하심이더라'(왕상12:15).  사람의 마음이 돌아서는 것은 비록 하나님의 일일지라도 이상의 모든 일은 참으로 사람의 의지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130)

 

  어거스틴은 또 한 예를 들고 있다.  즉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과 구스에서 가까운 아라비아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사 여호람을 치게 하신 사건을 소개한다.131)

 여기서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시련을 받아 마땅하다고 판결한 나라들을 황폐화하도록 하나님께서 원수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적군들의 악한 의지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즉 "블레셋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지로 하지 않았단 말인가? 혹은 그들의 움직임이 그들의 의지와 너무나도 일치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성경에서 '여호와께서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켜서' 이러한 일들을 하게 하였다는 것이 거짓이란 말인가? 이 침략자들은 자신들의 의지로 왔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격동시켰기 때문에 두 개의 문장은 다같이 옳다고 볼 수 있다".132)

 

  이렇게 양쪽의 의지를 모두 소개한 다음에 어거스틴은 "그리고 이것은 동등한 진리를 서로 다르게 표현하는 방법상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즉 여호와께서 그들의 마음을 격동시켰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로 왔다"라고 제시하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의지와 악인의 의지가 각각 일하는 방식으로 되어지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고 지적해 준다.133)

  그러나 이 의미는 악인의 의지도 성도의 의지처럼 인간의 모든 의지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의 범위를 벗어나서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의 다스림 안에서만 활동하는 그런 의지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런 구조와 방식을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소개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역사하여 원하시는 방향으로 그 사람의 마음이 끌리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따라 선행을 행하고, 혹은 하나님의 버리심에 따라 악행을 하게 하신다는 것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판단은 때로는 명백하게 드러나고 때로는 비밀스럽게 감추어져 있지만, 언제나 의롭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134)

 

  이처럼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놀라운 권능과 다스림으로 죄와 전혀 상관이 없으심에도 악한 자의 의지까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다스려 가심을 성경의 증언을 따라서 제시해 주고 있다.  여기서 악인의 의지가 어떻게 자신의 의지가 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서 인도되는 것인지는 매우 어려운 이해를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가지를 함께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실을 신앙으로 인정하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거스틴도 이와 같이 성경의 증언에 신앙적으로 수긍해야 할 것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강퍅케 되거나 무디어질지라도 그러한 사람들의 악한 업적이 먼저 있었으며, 그에 따른 마땅한 고난을 겪는다는 것을 결코 의심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잠언서에서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19:3)는 말씀에 위배되지 않게 된다".135)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선한 의지는 결코 우리의 공로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비록 우리의 의지가 사용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전적인 은총의 선물이며, 또한 악한 의지는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벗어나서 움직이거나, 활동할 수 없을지라도 그 죄악의 책임은 오직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신비인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신비 그대로 남아 있어야만 하는 것이지 인간의 논리에 맞추어서 밝혀져야 할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님을 우리는 깊이 주의해야 할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런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11:33-34)라는 말씀 앞에 자신을 겸손히 낮추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놀라운 신비로운 조화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어거스틴의 말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자 한다.

 

     주님께서 '나 여호와가 그 선지자로 유혹을 받게 하였음이어니와'(겔14:9)라는 말과 이와 비슷하게 사도가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9:18) 는 것을 들을지라도 그렇게 속임을 받고 또한 강퍅케 되는 자들은 악한 행위로 인하여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믿어야 한다.  반면에 자비를 보이시기로 한 사람의 경우에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시는"(벧전3:9) 하나님의 은총을 충성스럽게 그리고 지체없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또한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여호와께서 바로를 강퍅케 하셨다" 혹은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136)

 

이라고 말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바로의 자유의지를 제거하신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왜냐하면 바로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함을 따라서, 그것을 이유로 하여 이러한 일들이 생긴 것은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에 대하여는 파리재앙을 애굽으로부터 물리친 다음에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마음을 완강케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출8:32)고 기록하였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으로 바로를 강퍅케 하였으며, 바로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강퍅케 된 것이다.137)

 

   이처럼 펠라기우스의 체계는 인간에게 주어졌다고 여겨지는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도우심마저 저버릴 정도의 이단에까지 이르렀다.  반면에 어거스틴은 이 이단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주권에다 인간의 책임을 흡수시키는 데 있어서 상대편을 설득시키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어거스틴은 물어 볼 필요도 없이 인간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심오한 신비에다가 호소하였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에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은총의 수여를 주장하는 가운데에서도 진지하게 인간의 책임을 옹호하고 또한 증명하려고 세심한 배려를 베풀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138)

 

 

4.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신학적 구조의 차이점

   지금까지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은총론에 대한 논쟁을 살펴보면서 각각의 인간론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았다.  이처럼 두 분파는 비슷한 표현과 주제를 전개해 가고 있지만 그 내용과 의미가 전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논쟁의 방식과 범위가 아주 폭넓으면서도 깊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접근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에 있어서 핵심적인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구별해 내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간단한 신학적 논쟁이 아니라 기독교의 기틀 자체를 흔들어 놓는 논쟁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와 같은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차이점을 좀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여기에서는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신학적 구조가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즉 자신들의 논점을 어떻게 이끌어 가지는지를 알게 되면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의 차이점이 왜 다른지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오늘날 한국 신학계에서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점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혼란에서 개혁신학의 입장을 명확히 세울 수 있는 좋은 안목을 제시해 줄 것이다.

 

  우선 워필드는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주의의 잘못된 신학적 체계를 정확하게 비평할 수 있었던 것은 어거스틴의 신학이 바로 "성경신앙"에 입각한 신학이었기 때문임을 다음과 같이 지적해 주고 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성경만이 대답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 이 문제에 대한 애매하지 않은 명확한 답을 찾는단 말인가? -- 그러므로 우리가 다만 죄는 증식된다는 확실한 부분에 대해서만 강조할 뿐 하나님께서 그렇게 죄를 만드셨는가라는 불확실한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139)

 

   우리는 이와 같은 어거스틴의 "성경신앙적 신학구조"를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인간론과 펠라기우스주의의 인간론이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두 분파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즉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경신앙" 안에서 신학적 체계를 정립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어거스틴의 신학적 체계는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고 오히려 자신과 동일하게 비(非)성경신앙적인 체계에 서 있는 펠라기우스주의의 이론이 더 친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경신앙적 신학구조"라는 것은 "전체성경"(Tota Scriptura)140)

과 "오직성경"(Sola Scriptura)141)

이라는 의미로 좀더 자세하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전체성경"과 "오직성경"의 구조 안에서 인간론을 풀어가는 방식은 이미 앞의 글들에서도 조금씩 소개된바 있다.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전체성경"(Tota Scriptura)의 구조를 어거스틴이 얼마나 깊이 세우고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해 보고자 한다.

     펠라기우스가 끝맺음으로 "그러므로 우리가 읽은 것을 그대로 믿기로 하자.  그리고 우리가 읽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무엇인가를 첨가시키는 것을 악으로 알자.  그리고 이 기준을 모든 경우에 있어서 적용시키는 것으로 만족하자"라고 주장한 것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엄청난 선언이다.  여기에 반대해서, 나로서는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142)

 

라는 사도의 권면에 근거해서 우리가 읽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무조건적으로 모두 다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읽지 않은 것에다가 무엇을 첨가시킨다고 해서 악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읽지 않은 대로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경험한 것에 대한 진실한 증언자로서 무엇인가를 첨가시킬 수 있는 권리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43)

 

   위의 어거스틴의 지적을 살펴보면 펠라기우스가 자신의 인간론을 풀어가는 데 있어서 치명적으로 범한 오류가 무엇인지를 지적해 주고 있다.  즉 펠라기우스는 자신의 인간론을 피력하기 위해서 성경의 단편적인 부분만을 집중했고, 그리고 그 부분은 성경의 전체적인 체계에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그 부분에 속한 문자 그 자체만을 고집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시켰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신학적 논의를 보증하기 위해서 그는 성경을 단편적으로, 그리고 편협한 문자고집 방식으로 제시를 했다는 것이다.144)

 

  이런 펠라기우스의 모습은 "우리가 읽은 것을 그대로 믿기로 하자"라는 표현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매우 정통교회의 성경신앙의 방식과 매우 유사한 것처럼 보여진다.  즉 성경에 있는 표현을 그대로 받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성경의 전체적인 체계를 고려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그런 표현이었던 것이다.145)

  이런 태도는 마치 오늘날 '성경만 공부하자'라고 말하면서 성경을 전체적으로 체계 있게 배우기 위해서 개혁교회에서 항상 간직해 왔던 '신앙고백적(신조)성경이해'를 무시하는 형태와도 비슷한 형태인 것이다.  즉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을 버리고 단지 성경만을 보려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의 전체적인 체계를 바르게 받지 않고 단편적으로 성경을 접근해 들어가면 반드시 편협적인 사고로 빠져들기 때문에 우리는 이와 같은 펠라기우스의 오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주의해야 할 것이다. 

 

  즉 앞의 글에서도 이미 지적한 것처럼 이런 오류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제시하는 의미가 큰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교회의 부패와 변질을 지적하면서 개혁과 회복을 주장하지만 역사적으로 증거되어 왔던 개혁신학의 교리적 체계를 정립해 놓지 못하고 이런 문제제기만 하게 될 때는 성경적인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을 극단적으로 치우친 사고로 이해해서는 이단으로 빠져들어 가기 때문인 것이다.

 

  다음으로 제되는 것은 "오직성경"(Sola Scriptura)의 의미인데 이것은 오직 성경의 증언으로만 만족하고자 하는 정신인 것이다.  이런 신학적 체계가 위에서 어거스틴이 "의지"와 "은총"의 특성과 조화에 대해서 설명할 때 소개된바 있었다.  즉 어거스틴은 이런 난제를 해결해 가려고 할 때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논리적인 증거를 제시함으로써 찬양을 돌리려 하지말고 고백으로써 우리들의 삶을 밝히 드러내 보이도록 하자"라는 정신으로 자신의 논의를 전개시켜 갔던 것이다.  즉 이것은 설명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인간의 논리로 풀어가려고 하는 방식이 아니라 성경의 증거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신학체계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점인 것이다.

 

  이처럼 어거스틴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을 믿지 못하였듯이 신학의 체계에 있어서도 사람을 믿지 못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인간적인 모든 첨가물을 배제시킨 사람도 또한 없었을 것이다.  그는 항상 신학이 다루어야 할 주제에 대해서 "우리가 성경의 증언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다른 어떠한 수단도 찾지 못할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즉 "우리가 믿음을 통한 지식과 이해를 갖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목을 성경의 권위에 얽매어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그의 전 생애의 실천이었던 것이다.146)

 

  그리고 어거스틴은 의지와 은총의 신비로운 조화의 내용이 인간의 논리로 충분하게 설명되지 못할 때는 항상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롬9:20) 라는 말씀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11:33-34)라는 말씀에 의지해서 자신을 깊이 낮추고 오직 하나님의 오묘하시고 높으심을 경외하는 자세로 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이제 이와 같이 깊이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정신이 다음과 같은 어거스틴의 글에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제, 이 논문을 주의 깊게 숙고해 보고 이해가 되거든 하나님을 찬양하기 바란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거든 하나님께 올바른 이해를 달라고 기도하기 바란다.  성경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사도 야고보가 친히 우리에게 말해 주었다. 그렇지만 당신으로부터 내쫓고 또한 당신 안에 머물지 못하도록 기도해야 하는 또 다른 지혜가 있다. 

 

이 지혜는 사도가 극도로 미워하면서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헛된 호기심)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적정과 절도)"(약3:14-17)라고 말했다.  이러한 지혜를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사람은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인가?147)

 

 

5.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은총론 논쟁이 주는 신학적 의미.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에서 우리는 중요한 개혁신학의 의미를 배우게 된다.  즉 이것은 단순한 논쟁의 역사가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인간론에 대한 바른 이해는 교회 가운데 생명력을 불어넣는 진리의 귀한 내용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의 논쟁을 통해서 우리는 단순히 지식적인 논쟁의 내용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우리 자신을 지키고 또한 교회를 지키고 보존하는 그런 거룩한 진리의 싸움을 배우게 된다.

 

  즉 작게는 인간론에 대한 논쟁이지만 이와 같은 논쟁의 과정을 통해서 진리를 지켜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정신은 이미 앞 부분에서도 소개된 바 있었다.  즉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의 죄에 대한 주장에 대해서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파괴시키는 것"148)

 

 이라고 명백하게 밝혔던 것을 보게 된다.  이처럼 펠라기우스주의는 기독교의 또다른 면이 아니라 신앙을 가장 심각 파괴하는 이단임을 명백히 했던 것이다. 그는 결코 모호하게 피하지 않고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또한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성도가 어떠한 자세를 지켜야 할 것인지를 증거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신이 다음과 같은 표현에 잘 드러나고 있다.

 

     모든 카톨릭 교도들은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에너지를 가지고서 이와 같이 해로운 교리를 논박하고, 또한 경계심을 가지고서 이들을 반대하지 않아야 된다는 말인가? 따라서 우리가 진리를 위해서 싸울 때에는 경쟁을 좋아해서라기보다는 무지한 자들이 정확하게 가르침을 받게 하기 위해서 정확한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이로 인해서 교회는 원수들이 무너뜨리려고 획책한 구렁텅이로부터 더욱 큰 유익을 얻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사도께서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고전11:19)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149)

 

   오늘도 교회를 파괴하고 진리를 빼앗으려고 하는 자들은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참된 진리가 마치 교회를 어지럽히고 파괴하는 것처럼 속이며 우리를 유혹하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거룩한 싸움은 더욱 올바르게 우리 안에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즉 이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고유하신 목적에 따른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서 부르심을 받는다고 가르쳤던 어거스틴의 이론은 운명론을 가장한 위장이며, 교회 교부들과 참된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만일 어거스틴의 가르침이 옳다고 하더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무관심과 절망에 빠지게 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설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150)

 

이처럼 참된 진리가 마치 가장 악한 것처럼 보여지도록 오늘도 악한 자들은 우리를 미혹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와 같은 논쟁 앞에 기꺼이 나설 수 있는 준비와 용기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본 논쟁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또다른 개혁신앙의 정신인 것이다.

 

  한 가지 더 언급해야 할 것은 워필가 지적하듯이 어거스틴을 중심으로 당시 정통교회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에게 대해 취했던 행동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이단에 대한 엄밀한 권징의 정신만이 교회를 지키고 또한 바른 신앙을 세워가는 중요한 원리가 되기 때문인 것이다.  특히 워필드는 어거스틴이 교회법에 의한 권징뿐만 아니라 시민법적인 권징까지 언급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해 주고 있다.

 

 어거스틴은 이단에 대한 시민법적인 처벌의 정당성을 믿고 있었으므로 다른 경우에서처럼 이 경우에도 당연히 시민법에 호소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법원에 서신왕래가 있던 영향력 있는 친구가 있었으므로 최후의 수단으로서 시민법적이며 교회법적인 힘의 논리가 동시에 헌신으로 가득한 교황의 가련한 머리에(조지무스) 일격을 가하였을 것이라고 충분하게 가정해 볼 수 있다.151)

 

이 두 개의 편지에서 다 같이 어거스틴은 로마의 주교좌가 황제의 명령에 따라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에게 박해를 가한다는 사실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고 식스투스에게 만천하에 드러난 이단에게 응분의 처벌을 가하는 것이 의무라는 사실을 촉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악독을 비밀스럽게 퍼뜨리고 다니는 자들과 기억을 더듬어 볼 때에 이러한 정죄가 있기 이전부터 이들의 오류를 전했던 사람들과 지금은 두려움으로 인해서 잠잠하게 있는 사람들을 색출해서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과거의 신앙을 철회할 것을 촉구하든지 아니면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152)

 

 

  우리는 이런 지적을 통해서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은 단순히 신학적인 인간론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이 논쟁은 곧 교회를 보호하고 성도 개인의 신앙을 지키고 기독교를 지키는 거룩한 싸움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단순히 논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였던 것이다.  이미 앞부분에서도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교회로부터 정죄를 당하고 그 지역에서 추방을 당하는 내용을 소개받았던 것처럼 이 논쟁은 자신의 생명을 내맡기는 그런 싸움이었던 것이다.  즉 논쟁의 결과에 따라서 한쪽은 생명을 내놓아야 하는 그런 성격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와 같이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엄밀한 권징의 정신을 교회 안에 다시 회복해 할 사명이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결   론

 

  이제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을 마치면서 이 논쟁이 우리에게 주는 깊은 신학적인 의미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어거스틴은 은총론을 정립해 주면서 인간의 자기정체성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 것이다.  즉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가장 깊이 있게 발견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이다.  그러므로 인해서 겸손해 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자리를 발견하도록 해 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만 인간의 겸손만이 목적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죄를 가장 깊이 발견할 될 때 우리는 그 죄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해서 지키려고 했던 핵심적인 내용인 것이다.  즉 은혜 위에 은혜를 부으시며 그분의 은총을 부으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인간의 자리를 철저하게 정립해 준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은혜는 오늘도 그분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의 은총 아래서 가장 성실하고 책임 있는 존재로서 자신들의 의지를 확립해 가도록 이끄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임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어거스틴의 중심적인 사상은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이러한 사상은 구원과 관련된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로 돌리게 하였으며, 모든 선한 것의 원천을 하나님에게로 돌리게 하였던 것이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이 돌판의 한쪽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면, 다른 쪽에는 "만물이 너희 것이니라"가 새겨져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153)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주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명령하소서"

참고문헌

Augustin    어거스틴의 은총론Ⅰ, 차종순역,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Augustin    어거스틴의 은총론Ⅱ, 차종순역, 한국장로교출판사, 1997.

Augustin    어거스틴의 은총론Ⅲ, 차종순역, 한국장로교출판사, 1997.

Augustin    어거스틴의 은총론Ⅳ, 차종순역, 한국장로교출판사, 1998.

Augustin    참회록, 김종웅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1.

Augustin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론, 김종흡역, 생명의 말씀사, 1990.

Berkhof, L.  기독교교리사, 신복윤역, 성광문화사, 1994.

Berkhof, L.  조직신학, 권수경.이상원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5.

Hodge, A.A. The Confession of Faith, (Pennsylvania: the Banner of Truth Trust, 1992).

Warfield, B.B. 칼빈. 루터. 어거스틴, 한국칼빈주의연구원편역, 기독교문화협회, 1993.

김의환편역.   개혁주의 신앙고백집, 생명의 말씀사. 1994.

남사현.      공적론에 대한 칼빈의 비판에 있어서 어거스틴의 은총론의 영향,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0.

 

 미주

3) Augustin, 참회록, 김종웅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1. p. 280.  어거스틴은 자신의 "참회록"이 바로 이와 같은 정신에서 기초되어 있는 논문이라고 언급해 주고 있다(Augustin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론, 김종흡역, 생명의 말씀사, 1990. p. 321).

4) Ibid. p. 5.

5) H. Orton Wiley, Theology, (Kansas City: Beacon Hill Press, 1940), Ⅰ. p. 69.  남사현, 공적론에 대한 칼빈의 비판에 있어서 어거스틴의 은총론의 영향,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0. p. 1. 재인용.

6) 한영태, 펠라기우스의 신학에 관한 연구, 신학과 선교 제16호, 1991. p.179. 남사현, op. cit., p. 2. 재인용.

7) L. Berkhof, 기독교교리사, 신복윤역, 성광문화사, 1994. 151.

8) John Calvin. 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ited by John T. McNEILL,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cf) 기독교강요, 김종흡,신복윤,이종성,한철하      공역, 생명의말씀사, 1994(1559판).

9) B.B. Warfield, 칼빈. 루터. 어거스틴, 한국칼빈주의연구원편역, 기독교문화협회, 1993.

10) L. Berkhof, 기독교교리사, 신복윤역, 성광문화사, 1994. cf) 조직신학 상(上), 권수경.이    상원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5.

11) 남사현, 공적론에 대한 칼빈의 비판에 있어서 어거스틴의 은총론의 영향,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0.

12) 워필드의 어거스틴에 대한 평가는 어거스틴의 논문을 미국판으로 번역하는데 있어서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에 관한 안내논문"이란 서론으로 편집되어 있다(Augustin, 어거스틴의 은총론, 차종순역,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pp. 17-189).  이것을 중심으로 정리를 하였으며, 이 외에도 워필드가 집필한, "칼빈.루터.어거스틴, 한국칼빈주의연구원편역, 기독교문화협회,1993"에서 제시하고 있는 어거스틴에 대한 신학이해를 정리하였다.

13) 알렉산드라아 교부들(클레멘트)와 크리소스톰.

14) 3세기의 터툴리안 키프리안, 그리고 4세기의 포이티어의 힐라리와 암브로스.

15) Augustin, 어거스틴의 은총론, op. cit., pp. 25-26.

16) Ibid. p. 205. 이런 자들을 무(無)율법주의자들이라고 에딘버러 편집본 1권 서문에서 피터 홈스는 지적하고 있다.  결국 오늘날 성경을 구원받은 이후에 삶의 규범으로 삼지 않는 많은 무(無)율법주의자들은 펠라기우스와 같은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대표적인 무(無)율법주의자들은 성경을 무시하는 신비주의 운동, 즉 성령운동을 주장하는 자들 대부분을 들 수 있다.

17) Ibid. p. 78.  에딘버러 편집본 제1권에 부치는 서문에 피터 홈스(Peter Holmes)는 "앞세기 동안에 기독교 사상가들은 신론과 기독론에 온통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지만 펠라기우스는 전혀 신선한 주제로써 인간의 태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특별하게 고안해 낸 주제에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 주관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다루면서 인간이 하나님과 가지는 관계에서 그의 모든 신학적 주제를 재음미하였다. 펠라기우스의 이단은 주로 두 가지 사항을 맴돌고 있었는데, 인간적 본성이 부패하지 않았다는 가정과, 인간의 의지에 대한 초자연적인 영향력(성령의 내적은혜)에 대한 부인이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18) Ibid.

19) A. 핫지는 이와 같은 이단적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정리해 주고 있다.  "이단들이 모든 기회에 나타나서, 성경을 곡해하며, 말씀의 어떤 부분을 과장하고 다른 중요한 부분을 버리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켜 거짓으로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성도를 보호하기 위해서 성경의 모든 중요한 교리를 정확히 정리해서 잘못된 것을 밝히고, 모든 거짓된 것을 제거하기 위해 성경 전체를 깨달을 수 있도록 했다.  이와 같이 성경 말씀의 전체 내용을 그 중요성에 따라서 잘 정리하므로 써 말씀의 어떤 부분이 부당하게 축소되거나 또는 제거되거나, 과장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했던 것이다"{A.A.  Hodge, The Confession of Faith, (Pennsylvania: the Banner of Truth Trust, 1992). p. 2}. 

20) Ibid. p. 27.

21) Ibid. p. 28.

22) (대하15:2) 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대상28:9)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23) Ibid. p. 29.  펠라기우스가 인간론을 이해할 때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즉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의 주장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의 자의적인 의지로서 불가능한 그러한 것들을 행하도록 명령하지도 않으실 것이다"(Ibid. p. 333).

24) Ibid. pp. 30-31.

25) Ibid.

26) 어거스틴은 고린도전서15장을 이용해서 이런 정신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고 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하기 위하여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라고 했으며, 그 다음에 자기의 자유 의지도 보이기 위해서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고전15:10)라고 첨부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 관해서도, 예컨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고 말한 때와 같이, 사람의 자유의지에 호소합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자기의 의지를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이런 권고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사람의 의지가 선행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경계하기 위해서,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라고 말한 후에, 즉시 이 말을 제한하는 의미로,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라고 첨부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내가 단독으로 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나와 함께 한 일이라는 것입니다(Augustin,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론, op. cit., p. 178).

27) Augustin, 어거스틴의 은총론, op. cit., pp. 36-37.

28) Ibid. p. 38.

29) Ibid. p. 39.

30) Ibid. p. 40.

31) Ibid.

32) Ibid. p. 41.

33) Ibid. p. 42.

34) Ibid.

35) Ibid. p. 44.

36) Ibid. pp. 44-45.

37) Ibid. p. 46.

38) Ibid. p. 47.

39) Ibid.

40) Ibid. p. 48.

41) Ibid. p. 61.

42) 이와 같은 정신의 기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중요한 구절로 제시되고 있다.   (롬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고전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약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43) Ibid. p. 63.  은총과 자유의지는 다 같이 옹호해야 하지만 어느 한쪽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다른 한쪽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Ibid. p. 153)

44) Ibid. p. 70.

45) Ibid. p. 73.

46) Ibid. pp. 75-76.

47) Ibid. p. 103.

48) Ibid. p. 119.

49) Ibid. p. 79.  이런 주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구원이라는 주장을 극도로 해롭게 하며, 치명적으로 죽게 하고, 또한 위배되게 하며, 그리고 더 나아가서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 온 신앙과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건을 크게 거스리게 한다(Ibid. p. 333).

50)  Ibid. p. 185.

51)  Ibid. pp. 186-187.  어거스틴의 신학은 자체적으로 매우 강한 교회론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국하고,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대하는 논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는 반(反)교회적인 요소를 명백하게 내포하게 되었다 (Ibid. p. 188)

52) 개혁교회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처럼 세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 의식을 모독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커다란 죄가 된다. 그렇지만 세례를 안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중생할 수 없다거나 구원을 못 받는다든가, 또는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의심할 여지없이 중생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세례 의식에 은혜와 구원이 불가분하게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8장 5절).

53) "이 두 사람의 견해 차이는 근본적으로 인간관의 차이였다.  펠라기우스는 현실의 인간에게도 자유의지가 있어서 선과 악을 자기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어거스틴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를 주장하였고 본성은 완전히 부패하고 그 부패한 본성이 후손에 의해 유전되어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다"(남사현, op. cit., p. 48).

54) Augustin, 어거스틴의 은총론Ⅰ, 차종순역,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p. 55.

55) (창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56) (롬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게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57) (고전1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58) Ibid. p. 239.

59) Ibid. p. 245.

60) Ibid. p. 244.

61) Ibid. p. 245.

62) Ibid. p. 246.

63) Ibid. p. 248.

64) Ibid. p. 258.

65) Ibid. pp. 263-273.  이런 주장은 불교의 전생(前生)설과도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66) (딛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증거구절을 증거해 주고 있다.  (요일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5:9-12; 요일3:8),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고전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갈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엡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골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 딤전1:15-16; 딤후1:8-10; 히1:1-3; 계5:9; 행3:14-15.

67) 어거스틴은 후손의 원죄와 관련해서 "실재론"의 의미를 사용한다.  즉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히7:10) 라는 말씀의 기초로 해서 후손들이 아담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에 아담 안에서, 아담과 함께, 원죄에 참여하며, 이것을 물려받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이후 많은 개혁신학자들은(칼빈, 바빙크)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5:14)라는 말씀을 기초로 해서 "언약 대표론"를 주장하기도 한다(L. Berkhof, 조직신학 상(上), 권수경, 이상원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5. pp. 454-461).

68) 죄의 정의에 있어서 벌콥은 어거스틴이 죄를 적극적인 어떤 것으로 보지 않고, 소극적이며, 뭔가 결핍(negation or privation)된 것으로 보았다고 지적한다.  즉 죄는 인간에게 주어진 실질적인 악이 아니라, 선의 결핍으로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죄관은 종교개혁시대를 거치면서 좀더 명확하게 정리되는 것을 보게된다.  즉 죄는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한 것으로 정립이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어거스틴의 죄관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중세 로마 카톨릭에서는 "원죄가 어떤 적극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뭔가 꼭 있어야 할 것이 결핍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특히 그것을 원시적공의의 결여(原始的公義缺如)"로 변질시켰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L. Berkhof, 기독교교리사, 신복윤역, 성광문화사, 1994. pp. 153-168).

69) Augustin, 어거스틴의 은총론Ⅰ, op. cit., p. 416.

70) Ibid. p. 419.

71) Augustin, 어거스틴의 은총론, Ⅲ. 차종순역, 한국장로교출판사, 1997. p. 86. 그리스도의 은총에 관하여, 그리고 원죄에 관하여(De Gratia Christi, et de Peccato, contra Pelagium)

72) Ibid. p. 96.

73) 벌콥은 펠라기우스의 신학적 기초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연적 능력에서 자신의 이론의 출발점을 찾는다.  그의 근본적 전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한 일을 하도록 명령하셨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인간에게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 말은 또한 인간에게 절대적인 의미의 자유가 있음을 의미한다"(L. Berkhof, 조직신학, 권수경.이상원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5. p. 450).

74) Ibid. p. 98.

75) Ibid. p. 104.

76) Ibid. p. 105.

77) Ibid. p. 106.

78) Ibid. p. 133.

79) Ibid. p. 136.

80) Augustin, 어거스틴의 은총론Ⅰ, op. cit., p. 340.

81) 이 부분도 펠라기우스의 주장과 비슷한 표현을 쓰고 있지만 어거스틴은 그 전제 조건을 "하나님의 도우심과 원조를 받아서"라고 명시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82) Ibid. p. 333.

83) 이런 정신에 기초해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잇다.  149문. 어느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답: 아무도 자기 스스로 이생에서 받은 어떤 은혜로도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고, 오히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매일 계명을 범합니다.

84) Ibid. p. 377.

85) Augustin, 어거스틴의 은총론Ⅱ, 차종순역, 한국장로교출판사, 1997. p. 60.

86) Ibid. pp. 22-23.

87) Ibid. p. 51.

88) Ibid. p. 96.

89) (고전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90) Ibid. p. 113.

91) Ibid. pp. 148-149.

92) Ibid. p. 201.

93) 이것은 신인협력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도, 인간도 일을 한다는 의미이다.

94) (시59:10)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내 원수의 보응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시리이다

95) (시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96) Ibid. pp. 181-182.

97) Augustin, 어거스틴의 은총론Ⅲ, op. cit., p. 119.

98) Ibid. pp. 119-120.

99) Ibid. p. 120.

100) Ibid. pp. 117-118.

101)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총이 주어지며, 또한 율법이나 본성도 아닌 이 하나님의 은총은 이미 범해 버린 죄에 대하여만 적용될 수 있을 뿐 미래적인 죄를 멀리하게 하거나, 혹은 우리를 공격해 오는 죄를 굴복시키는 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Augustin, 어거스틴의 은총론Ⅳ, 차종순역, 한국장로교출판사, 1998. p. 257).

102) (슥1:3)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103) (시85:4)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그치소서

104) (시80:3)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80:4)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105) (시94:8)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106) (시119:73)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나로 깨닫게 하사 주의 계명을 배우게 하소서

107) (약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108) (사56: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은즉

109) (시119:108)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 입의 낙헌제를 받으시고 주의 규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110)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111)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112) Ibid. p. 370.

113) 어거스틴,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론, 김종흡역, 생명의 말씀사, 1990. p. 177.

114) Ibid.

115) Ibid. p. 178.

116) Iibd. pp. 185-186.

117) Ibid. p. 176.

118) Ibid. p. 180.

119) Ibid. p. 198.

120) 김의환편역, 개혁주의 신앙고백집, 생명의 말씀사. 1994. p. 252.

121) Augustin, 어거스틴의 은총론Ⅳ, op. cit., p. 248.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122) 고전12:7. (고전3: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고전7: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고전12: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123) Ibid. pp. 249-250.

124) Ibid. p. 258.

125) Ibid. p. 263.

126) Ibid. pp. 263-264.

127) Ibid. p. 278.

128) Ibid. p. 281.

129) (왕상12:8) 왕이 노인의 교도하는 것을 버리고 그 앞에 모셔 있는 자기와 함께 자라난 소년들과 의논하여 (왕상12:9) 가로되 너희는 어떻게 교도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뇨 백성이 내게 말하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메운 멍에를 가볍게하라 하였느니라 (왕상12:10)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 왕께 고하여 가로되 이 백성들이 왕께 고하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우리를 위하여 가볍게 하라 하였은즉 왕은 대답하기를 나의 새끼손가락이 내 부친의 허리보다 굵으니 (왕상12:11) 내 부친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 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소서 (왕상12:12) 삼일만에 여로보암과 모든 백성이 르호보암에게 나아왔으니 이는 왕이 명하여 이르기를 삼일만에 내게로 다시 오라 하였음이라 (왕상12:13) 왕이 포악한 말로 백성에게 대답할새 노인의 교도를 버리고 (왕상12:14) 소년의 가르침을 좇아 저희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은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니라

130) Ibid. p. 281.

131) (대하21:16)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과 구스에서 가까운 아라비아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사 여호람을 치게 하셨으므로 (대하21:17) 그 무리가 올라와서 유다를 침노하여 왕궁의 모든 재물과 그 아들들과 아내들을 탈취하였으므로 말째 아들 여호아하스 외에는 한 아들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132) Ibid. p. 282.

133) Ibid. p. 282.

134) Ibid. p. 285.

135) Ibid. p. 285.

136) 출4:21, 7:3, 14:4.

137) Ibid. p. 289.

138) Ibid. p. 204.

139) Ibid. pp. 123-124.  "빅토가 어거스틴의 조심스러운 무지를 닮는 것이 어거스틴이 빅토의 무모한 오류의 주장을 닮는 것보다 좋지 않겠는가?"(Ibid. p. 139).

140) "전체성경"이라는 말은 성경의 모든 내용을 빠짐없이 소개하고 지켜가고자 하는 정신인 것이다.  즉 우리의 형편과 상황에 의해서 추가하거나 감하지 않는 정신을 말한다.  이런 정신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그 기초로 하고 있다.

   (신4: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신12:3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 (마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행20: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계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계22: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141) "오직성경"이라는 의미는 보통 개혁교회에서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춘다"라는 표현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즉 모든 호기심을 거절하고 오직 성경이 가르치는 것에만 만족하며, 그 이상을 찾지 않는 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정신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고전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하려 함이라(벧후1: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이것만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시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61) 방백들이 무고히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142) (살전5: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143) Augustin, 어거스틴의 은총론Ⅱ, op. cit., pp. 194-195.

144) 개혁신학이 성경해석의 원리로 삼고 있는 문법적 해석(문자적 해석)의 의미와 다른 것이다.

145) 예를 들자면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29-30) 라는 말씀을 들 수 있다.  이같은 말씀은 표현된 문자 그대로 이해하거나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의미가 내포하고 있는 본질적인 의미를 성경의 총체적인 체계 안에서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즉 실제로 눈이나 손을 찍어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죄악을 짓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라는 뜻인 것이다.

146) Augustin, 어거스틴의 은총론Ⅰ, op. cit., p. 189. "성경이란 권위의 가장 높은 하늘 꼭대기 위에 세워진 것"(sanctam Scripturam, in summo et coelesti auctoritatis culmine collocatam), "성경의 진리에 대해서 확신과 마음 든든함으로 항상 읽어야 하며 성경의 모든 말씀들을 절대적으로 믿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de veritate ejus certus ac securus legam: veraciter discam)(B.B. Warfield, 칼빈. 루터. 어거스틴, op. cit., p. 312).

147) Augustin, 어거스틴의 은총론Ⅳ, op. cit., p. 290.

148) Augustin, 어거스틴의 은총론Ⅰ, op. cit., p. 79.  "이런 주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구원이라는 주장을 극도로 해롭게 하며, 치명적으로 죽게 하고, 또한 위배되게 하며, 그리고 더 나아가서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 온 신앙과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건을 크게 거스리게 한다"(Ibid. p. 333).  워필드는 이와 같이 성도에게 있어서 펠라기우스주의의 실제적인 피해와 또한 어거스틴주의의 실제적인 유익을 다음과 같이 증거해 주고 있다.  "인간 스스로의 장점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의 삶을 괴롭히는, 희망과 두려움의 교차상태 대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믿는 감정상태를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천으로 보는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 신앙이 어거스틴에게서 비롯되었다"(B.B. Warfield, 칼빈. 루터. 어거스틴, op. cit., pp. 271-272).

149) Augustin, 어거스틴의 은총론Ⅲ, op. cit., p. 110.

150) Augustin, 어거스틴의 은총론Ⅰ, op. cit., p. 167.

151) Augustin, 어거스틴의 은총론Ⅰ, op. cit., p. 105.

152) Augustin, 어거스틴의 은총론Ⅰ, op. cit., p. 125.

153) Augustin, 어거스틴의 은총론Ⅰ, op. cit., p. 188-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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